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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왁 선교 역사의 독특성
    필자의 제자인 제경실의 연구에 의하면 말레이시아 사라왁의 기독교 역사는 네 단계를 통해서 현대에 이르고 있다고 연구하였다. 첫째는 James Brooke과 기독교 선교(1841-1868)의 시대, 둘째는 Charles Johnson Brooke과 기독교 선교(1868-1917)의 시대, 세 번째는 Charles Vyner Brooke과 기독교 선교(1917-1941)시대 그리고 네 번째는 영국식민지 시대의 기독교 선교(1946-1963)이다. 위에서 언급한 네 단계를 한 지면에 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늘은 이러한 네 단계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먼저 개괄적인 차원에서 사라왁의 독특한 역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제경실은 사라왁은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라왁 현대사를 보면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왕족이 아닌 이방의 영국인들이 국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 시기가 있다. 이를 사라왁 왕국 혹은 White Rajah 왕국이라고도 부른다. 화이트 라자 시대는 제임스 부룩(James Brooke)을 시작으로 하여 그의 조카 챨스 존슨 부룩(Charles Johnson Brooke)과 챨스의 아들인 챨스 바이너 부룩(Charles Vyner Brooke)에 이르기 까지 3대에 걸쳐 105년(1841-1946)동안 어어 지는데 부룩가(家)가 집권했던 이후 현재까지 사라왁은 말레이시아 토착 기독교의 본 고장이 되어 왔다. 이슬람을 국교로 삼는 말레이시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왁은 공공연히 ‘기독교 주(The State of Christianity)’라 불리어지고 있다. 사라왁의 선교는 1848년 성공회를 시작으로, 로마 가톨릭은 1881년 그리고 1901년에는 감리교로 이어져 내려갔다. 부룩의 시대라 할 수 있는 1841년부터 세계 제 2차 세계대전시대까지 부룩가(家)는 사라왁을 통치하면서 사라왁 다양한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을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원래 사라왁은 부르나이(Brunei) 술탄(Sultan)의 영토였다. 술탄(Sultan)은 말레이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부르나이는 보르네오섬 북서해안에 위치한 이슬람국가이며 지리적으로는 동말레이시아 사라왁주안에 둘러싸인 술탄의 국가이다. 풍부한 석유자원으로 인해 국왕인 하사날 볼키아 왕(29대 술탄)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왕으로 일컬어 지고 있으며 부루나이 국민들의 80%이상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라왁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부루나이 중심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부루나이 술탄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해 사라왁을 다스리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에 19세기 초 사라왁 지역을 다스릴 수장을 임명하고 쿠칭으로 파견한다. 그당시 사라왁은 지금의 쿠칭(Kuching)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을 의미했다. 점차적으로 부룩가가 사라왁의 영토를 넓혀가 림방(Limbang)과 라와스(Lawas)에 이르는 지금의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 사라왁은 안티몬(Antimony)과 금과 같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부르나이에서 파견된 수장은 당시 말레이족 지도자로부터 금광 발굴권과 판매권등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게 된다. 하지만 세금을 터무니 없이 높게 책정하고 육지다약족(Land Dayak)인 비다유(Bidayuh)들을 광산 노동자로 고용하지만 그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원주민들을 억압적으로 불공평하게 다스리자 원주민들 사이의 원성이 높아지게 되었고 그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사라왁 원주민들은 부르나이 술탄에 의해 임명된 그들의 수장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부르나이 술탄은 사라왁의 민란을 잠재울 다른 이를 보내게 되는데 그 또한 성난 민심을 잠재우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술탄 부르나이에 의해 파견된 두 번째 수장은 빵이란 라자 무다 하씸(Pangiran Raja MudaHashim)이다. 그러한 사라왁의 정치적 혼란기에 제임스 부룩은 사라왁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 당시 수장인 빵이란 라자 무다 하심(Pangiran Raja Muda Hashim)은 부룩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 민란을 제압하면 그에게 사라왁의 수장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부룩이 성공적으로 성난 민심을 잠재우게 되고 1941년 빵이란 라자 무다 하심은 부루나이 술탄의 제가(制可) 없이 그를 사라왁의 수장으로 임명한다. 이어서 그 다음해인 1842년 부룩은 직접 부루나이 술탄을 찾아가 왕권을 제가 받게 된다. 이렇게 사라왁의 수장이 된 그와 그의 일가가 105년을 사라왁을 다스리면서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크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말레이시아 사라왁 선교를 준비하는 독자들에게 제자인 제경실의 논문을 인용하여 이 글을 드린다. 앞으로 이어질 글을 통해서 사라왁선교가 꽃이 필 것을 기대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2-24
  • 말레이시아 사라왁(Sarawak) 선교
    필자의 제자 가운데 제경실 사모님이 있다. 부군인 엄태욱 목사님과 함께 말레이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오랫동안 사역을 하였고, 현재에는 한세대학교에서 선교학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제경실 사모님은 지난 학기 석사학위 논문을 완성하였다. 그 분의 논문을 지도하면서 사라왁 지역에 깊은 선교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몇 회에 거쳐서 사라왁 지역의 선교를 다루고자 한다. 고백하기는 대부분의 자료들이 제경실 사모님의 논문에서 인용되었던 내용들임을 밝힌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다종교의 사회이다. 말레이시아는 동·서말레이시아로 나뉘는데 수도인 쿠알라 룸푸르(Kuala Lumpur)를 중심으로 하는 반도 말레이시아가 서(西)말레이시아이며 보르네오섬의 사바(Sabah)와 사라왁(Sarawak)주가 동(東)말레이시아에 속한다. 특히 사라왁은 말레이시아의 13개주 중에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그 크기는 서말레이시아의 11개 주를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크다. 사라왁은 1963년 9월 16일 싱가폴(Singapore), 사바와 함께 말레이 연방에 합류하여 현재의 말레이시아가 형성되었다. 특별히 사라왁주는 아직까지도 자체적 이민법을 적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외국인이 사라왁에 들어올 때 연방정부 이민국을 거쳐 다시 사라왁주 이민국을 거쳐야 한다. 심지어 같은 말레이시아인이라도 서말레이시아인이나 사바인들이 사라왁에 들어올 때는 외국인과 같이 여권을 소지해야하며 여권에 입국허가 기간을 받아야 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연장 또는 사라왁주를 떠나야 한다. 반면에 사라왁 사람들은 사바를 비롯해서 말레이시아 전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또한 사라왁은 서말레이시아와는 달리 원주민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 각 족속의 이름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반족은 사라왁의 주 종족으로 2015년 기준으로 사라왁 전체인구의 37퍼센트 차지한다. 하지만 이반족은 다른 소수종족, 룬바왕(Lun Bawang)이나 클라빗(Kelabit)족속에 비하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 교육적으로도 많이 낙후되어 있다. 이반족을 향한 복음의 역사를 되짚어볼 때 우리는 복음을 거부한 이반족을 발견하게 된다. 챨스 바이너 부룩(Charles Vyner Brooke)이 사라왁을 다스리던 시기에 호주시민권을 가진 3명의 선교사들이 사라왁에서 이반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하지만 이반족 복음전파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그들은 더 깊숙한 내지 지역으로 들어가 다른 종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결과적으로 그 복음은 룬바왕이라는 소수 부족 5000명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라왁의 영적 부흥을 가져왔다. 이런 이반족 개종의 부진은 현재까지 많은 한국 선교사들을 사라왁으로 향하게 한다. 이반족의 개종의 부진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의 문화적 관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집단주의적이며, 삶과 제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반사회에서 복음은 그들의 문화의 옷을 필요로 한다. 필자의 제자인 제경실 부부는 1997년 말레이시아로 파송을 받고 1년 뒤인 1998년부터 사라왁의 시부(Sibu)지역에 거주하면서 이반족 사역을 감당하였다. 부부 선교사 가족들이 시부에 정착할 당시만 해도 시부는 외국인이 거의 없는 현지인들의 도시였고 시부외곽지역에는 많은 이반족 롱하우스(Longhouse)들이 밀집하여 있어서 무엇보다도 이반족 선교의 선교베이스로 삼기에는 적합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2000년 시부지역에 현지인 교회를 개척하고 정글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여러 가지 문화적 한계를 경험하였다. 또한 오랜 선교기간동안 상황화의 현장을 직, 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하였다. 잘못된 상황화로 인하여 복음이 변질되었던 경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두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때로는 복음을 상황화하여 자신들의 전통 문화와 관습과 충돌하지 않도록 전했을 때 처음에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만 점진적으로 자신들의 전통 문화와 관습을 지적받게 되면 받아들였던 복음을 쉽게 버리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사역하였던 말레이시아는 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이슬람법인 샤리아(Sharia)법이 상위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엄밀하게 말하면 이슬람 종교가 삶의 전체를 지배하는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의 사라왁 지역 선교의 관심은 선교역사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사역을 들어내기 위함이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2-10
  • 예언적 설교의 기반은 말씀
    요즈음 강단을 보면 근거가 불분명한 말씀을 여과 없이 인용하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특히 예언적 설교들을 들어보면 더욱 그렇다. 이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 이후에 교단에서 있어 왔던 하나의 패턴이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은 교회의 선지자적 교직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도들의 시대가 종료된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아직도 선지자의 영적인 임무가 존재하는가? 분명한 것은 구약시대의 선지자에 따라 초대교회에서 선지자의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에 나타나 있다. 즉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써 보낸 성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초대교회의 직분에 대한 고전적인 목록에서 각각 사도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며 사도들과 함께 초대교회들을 건립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직분이다. 카리스마를 가지고 말하는 초대교회의 예언은 항상 기존의 기록된 성경말씀의 해석으로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눈에 보이지 않는 임재하신 주님의 직접적인 자극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언은 말하는 자의 자기기만이나 의도적인 사기, 그렇지 않으면 마귀의 영감에 까지도 지배당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그 당시에도 모든 예언은 세심한 영적인 시험을 거쳐야만 했다. 이 시험을 첫째로 그 예언이 성경 또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신13:1-5, 요일 4:1-4), 둘째로 예언하는 자의 품행이 성스러운지(벧후2:2), 그리고 셋째로 예언의 경우 발생하는 사건에 실제로 적중하는지(신18:22이하) 주의하여 살펴야 한다.이러한 예언자적 설교의 기반은 율법과 복음 안에 있는 성경말씀이다. 만일 이러한 설교가 가르치는 임무의 일환으로 역사적인 위기 상황 하에서 하나의 명령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면 그 성경적인 기원은 특히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선지자적인 요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교회에서의 선지자적인 선포가 전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첫째로 성경의 선지자적인 저자들의 의도와 정확히 부합되도록 이 선포가 시대의 표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하며, 현재의 상황을 해명함에 있어서도 성경적으로 교육받은 청중들에게 그 자명성이 드러나야 한다.둘째로 오늘날의 예언은 교회가 말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정체된 교회에 무기력과 시대정신에 대항하는 지침을 선포함으로 그 신뢰성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고, 또한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민족들에게도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는 전권을 가지고 외칠 임무를 받은 자로 삼으셨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전달된 이 말씀의 효력으로 인하여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되었다.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영원한 말씀을 보내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뜻을 성취하시고 도한 세계의 종말의 시대가 시작되도록 하셨다. 이 시대를 마감하는 절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이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으로 모든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늘의 권세와 영광으로 다시 오실 때 도달하게 된다.(계19:11-16)오순절에 부어주신 성령께서(행2:6-11) 모든 민족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이 말씀은 하늘과 땅이 존속하는 한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이 그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세상 마지막 날까지 원래의 능력 가운데 선포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설교가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기록된 성경말씀, 즉 정경인 구약과 신약의 성경으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기독교의 선교가 이 말씀의 권위를 성삼위 하나님의 권위로서 높이 존중한 채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에게 화목의 직책을 수행하는 한 신뢰할 만한 선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지 이렇게 함으로 선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의 보내심을 계속하고(요20:21 이하)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이처럼 예언적 설교의 기반도 말씀의 중심성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연구원)
    • 칼럼
    • 선교
    2017-02-03
  •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종말에 대한 기대는 일반 신자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소망이다. 특히 19세기의 미국 선교운동가인 A.B 심슨은 왕의 재림을 크게 기대하셨던 분이다. 오늘날에도 국가의 위기와 영적 혼탁 그리고 교회의 세속화를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게 만든다. 오늘 필자는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주제를 통해서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 조망에 대해서 피터 바이어하우스의 이론을 들어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먼저 성경 속에서 종말의 의미를 펼쳐보면 구속사적 선교에 대한 사고의 근본적인 특징은 수미일관하게 종말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주의적인 전도와 교회의 건립 그리고 자신의 서신에 나타난 신학적인 내용 안에서 행한 바울의 선교사적인 행위는 이러한 통찰을 통하여 철저하게 규정되어 있다. 역사의 목표가 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복음주의적인 최초의 전도(살전 1:9 이하, 행 17:31)와 이 재림을 근거로 한 훈계들(고후 5:10, 딛2:13)에서 이미 근본적이고 역동적인 주제를 형성하였다. 성경적인 종말론은 3부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첫째로 이 종말은 실제로 역사의 마지막 날 또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형성하는 것 즉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마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교회의 구원, 가시적인 그리스도의 통치의 시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과 관계된다.둘째로 종말론적인 가르침은 “먼저 발생해야만 할 일”(눅21:9)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는 자연과 역사속의 대재앙들, 거짓 선지자들과 사탄의 통치가 서로 싸우는 구속사적인 드라마의 끝에서 두 번째 막을 장식하게 될 사건들을 의미한다.셋째로 종말론적인 적그리스도와의 대립의 시작과(요일2:18)재림에 대한 대망을 통하여 규정된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하는 올바른 태도도 포함한다는 점도 성경적 종말론의 구조에 속한다.(고후11:9) 성경적인 종말론은 사변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운명론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영혼을 돌보는 봉사와 선교교회를 건립하는 봉사 안에 있다.종말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삶의 과정에서 항상 도래되는 시험 중에 받는 예언의 위로를 체험해야 한다. 사실 사도의 가르침에 포함된 종말론적인 요소는 초기 기독교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민족들의 복음화를 고무하고 또한 교회를 유지, 확장하는 데에 분명한 건설적인 기능을 한다. 과거나 현재에도 시험을 당하는 상황에서 교회는 예언자적인 말씀으로부터 다양한 시각에서 위로와 강건케 하심을 받을 수 있다. 거룩한 고난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첫째는 성경적인 예언은 신실한 신앙 안에서 교회의 옳음을 증명하고 그 최종적인 구원을 확실하게 한다. 고난 받는 교회는 “조만간 승리하는 교회가 된다는 약속”을 가진다. 둘째는 교회는 교회와 세상에서 발생하는 각 시대의 사건과는 달리 성경에서 말하는 “시대의 표적”(마16:3, 24:3, 눅21:11) 과 함께 구속사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교회는 방향설정이라는 단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셋째는 교회가 처하게 될 상황과 종말론적인 싸움에 관한 교회의 경악을 예언한 말씀을 확인하는 일은 교회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몰래 숨어 들어오는 유혹에 대하여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한다(마 24:4, 24, 42).넷째는 동시에 이는 기도하게 한다. 이 기도는 하나의 열정적인 전쟁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물론 기도도 성경말씀에 기초한다. 다섯째는 고난 중에 받는 위로의 다른 영적인 원천으로는 성경과 성경을 근거로 한 기도 외에 규칙적으로 행하는 성만찬이 있다. 여섯째는 시간의 싸움 안에서 우리를 강건케 하고 우리에게 방향을 설정해 주는 은사의 수단을 사용함으로 고난에 대한 깊은 이해가 교회에서 날로 성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기 때문이다.일곱째는 자신의 신앙고백에 신실하려다 맞이하게 되는 가장 위급한 경우로서 순교는 예외로 하고, 시험을 당할 때에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일은 핍박당하는 교회를 스스로 위협하는 자폐증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선교를 위한 충만된 마음은 우리를 죽음을 초월한 종말의 날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1-24
  •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구원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오히려 그분의 뜻을 거스리는 일을 할 때가 많다. 복잡하고 힘든 시류 속에서도 2017년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신앙의 목적인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 필자는 피터 바이어 하우스가 주장한 세 가지의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해명’에 대한 이론을 소개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믿음과 이해이다. 교회가 충만하게 영적으로 성숙하고 싸움을 통해 얻은 성경의 구원진리 안에 흔들리지 않고 존립하도록 하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의 목적이라면, 이는 교회가 이 진리를 내적인 의미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증거에 의거하여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존 스토트는 선교적인 설교에서 바로 이러한 인식적인 요소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 알려주고 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복음주의적으로 무책임하고 경솔한 태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와 병행하는 이해가 없이는 아무런 기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에게 진리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기 이전에 그는 먼저 진리를 이해해야만 한다.”라고 언급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은 영적인 이해로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성령을 통한 내적인 조명이며, 다른 하나는 가르침의 내용 곧 하나님의 뜻을 안으로 수용하고 순종함으로 그 뜻에 따라 행하기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둘째는 인식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낸 고별사에서 바울은 자신이 3년간 그들 가운데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친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회고하고 있다(행 20:27). 그는 아무것도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또는 구원의 계획)을 다 그들에게 전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무리를 위해 성령께서 임명하신 감독자로서 수용해야 할 책임과 또한 향후 위험한 거짓 교사들과 대항할 때 스스로 가져야 하는 능동적인 책임에 대한 조망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경륜(oikonomia)이라는 동일한 개념이 하나님께서 계시역사 중에서 행하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의미와 사도의 임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성경의 구속사적 일치에 관한 인식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 포함된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중요한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가르침은 적절한 논증의 부담을 짊어지기에 내용적으로 포괄적이며 또한 충분한 통일성을 가진 권위적인 인식의 기반을 보호하고 또한 항상 이 기반으로 소급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의 기반은 직접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전승과 사도들의 경험에 의한 증거를 넘어서서 설교와 가르침을 위한 텍스트가 되는 구약성경이라는 사실을 다양하게 지적하였다. 사도들의 핵심적인 관심사는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설교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의 말씀에 드러난 의도와 내적으로 합치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그리스도 사건의 조명 안에서 구약성경을 주석학적으로 해명하는 일은 사도들의 설교와 가르침에서도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이러한 해명은 3중의 설득 방식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첫 번째 방식은 나사렛 예수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나타난 비상하고 놀라운 사건의 명증성이다. 두 번째 방식은 성서해석의 해석학적 방법으로 이는 에세네파 쿰란공동체의 주석에서 유사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소위 주석방법이라고 한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특히 시편과 구약의 선지서들을 현재의 자신들의 공동체에 이미 해명된 지혜의 말씀으로 이해하였고, 이에 부합하여 이 말씀을 말세에 자신들을 선택하실 것이라는 선민의식을 근거로 설명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복음과 구약성경 말씀이 일치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 번째 방식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드러난 다른 사건들의 의미관계를 명시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인간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초림 시키심으로 인간의 구원 계획을 입증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임무는 그분의 뜻을 선교현장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1-13
  • 선교하는 공동체인 교회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선교사역이다. 따라서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이유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교회는 2중의 구속사적 목표를 지향한다. 그 하나는 현재적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전 세계적인 구속사역의 확장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든 민족들 중에 선택된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는다(행2:39). 또 하나의 다른 목표는 종말론적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의 비전에 따라 특히 요한계시록의 순교적 7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성취된다(계 2:26-28, 3:21).교회 공동체는 세가지 관점에서의 부르심이 존재한다. 첫 번째 관점으로는, 구성적인 근본관계에서 볼 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부르심을 영접하고, 성찬을 베풀고, 자신을 드리는 순서에 따르는 예배이다. 교회는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과 축복을 영접한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승천하신 주님을 성령가운데서 실제로 만나는 즐거운 경험, 설교와 가르침의 효력 그리고 확고한 말씀과 자발적인 증거의 결합을 통하여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사도들이 가르침을 통하여 인도한 공동의 삶이 가지는 두 번째 관점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형제자매의 교제라는 관점이며 또한 궁핍한 지체를 위한 특별한 배려이다. 실제로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들의 설교는 사랑의 봉사와 병행해서 나타났다. 사도들의 지나친 봉사에 대한 일들 때문에 공동체 내부의 직분이 처음으로 분리되어 초대교회의 집사제도가 도입되었다. 교회의 부르심이 가지는 세 번째 관점은, 사회적인 주변세계를 복음화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교회의 질서에 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들이 교회와 그 안에서 책임을 가진 자들에게 교의적이고 윤리적인 내용과 더불어 각 직분 또는 직위와 예배의식의 질서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을 전달함으로 교회를 지도하는 그들의 기능을 보여준다.교회에 대한 사도들의 훈계는 성숙한 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교회와 지체들은 자신의 삶을 잘 정돈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중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며 주변 세계에 선교적인 효력을 가진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성숙함은 현대의 자율성 또는 모든 권력이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민주주의로 오해해서는 안된다.교회는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거부권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거짓된 가르침으로 인한 교회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징은 단지 긍정적으로 가르침을 펼쳐 나아가는 것 뿐 만 아니라 신뢰할 만한 복음서에 어긋나는 가르침과 지속적으로 논쟁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시간을 초월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거짓 선지자와 이방신을 숭배하는 자들과 더불어 싸움을 통하여 이에 상응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선지자적 전통을 신약상경에서는 맨 처음 예수께서 직접 이어 받으셨다.다양한 형태의 혼합주의는 항상 새로운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위험에 빠트리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복음주의자들을 통하여 처음으로 전파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도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양한 종교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인 헤르만 궁켈과 아돌프 폰 하르낙과 같은 사람들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승리한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독교가 혼합주의적인 종교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다. 특성이 없는 종교가 과연 어떤 관철력을 가질 수 있는가? 이는 또한 상세한 비교종교학적 분석으로도 확인되지 않는다. 현대에 복음이 혼합주의적인 외부의 영향을 과도하게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약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현상에 대하여 예수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어떻게 판단하였는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된다. 타종교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모두 혼합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낙성대역을 지나면서 느끼는 것 하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한 수없이 많은 혼합적 간판들이 기독교의 순수성을 왜곡시키는 현장을 본다. 이는 경계해야할 일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1-06
  • 가르쳐 지키게 하는 선교
    예수님 사역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가르침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대중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비밀을 설파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전이나 회당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기르치심을 통해서 메시아 현존의 깊이를 더했다.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본질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선포(kerygma)는 본질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행위 또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명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그 내용으로 한다. 이에 반해 가르침(didache)은 그 의미를 설명하거나 성경적으로 열거된 하나님의 뜻 그 자체를 펼쳐낸 것이다.복음서에 사용되는 가르침은 대부분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수행한 제자들의 가르침을 지칭한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교사라고 칭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는 사실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사역과 태도에서 발견한 첫 번째 인상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이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호칭이 랍비였다.(29회) 물론 제자들은 이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으며(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때 사용한 것을 제외하고!) 오히려 존경심으로 가득 찬 “주(kyrie)” 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물론 선생으로서 예수님의 새롭게 발견하거나 평가하는 과정에서 기독론적인 관심사는 보존되어야 할 것이나, 그를 종교사나 사상사의 위대한 지혜의 스승으로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어떠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이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선교적 가르침일 것이다. 유명한 선교적 택스트인 마태복음 28장 19절 이하에 나열된 4가지 행위는 다음과 같다. 가다, 제자를 삼다, 세례를 주다, 가르치다. 물론 이는 마태가 복음주의적인 설교를 제외한 선교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사형 세례를 받으면서는 제자가 되는 첫 번째 가입의 관점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개종함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로 가입한 자들에 대한 사도들의 선교적인 책임은 결코 종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례와 함께 제자를 삼는 두 번째 관점이 곧바로 연결된다. 이는 본질적으로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수반하는 “가르치는 임무”인 것이다. 이러한 임무가 선교 명령의 종합적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은 이 행위가 세례의 분사형 안에 조화를 이루고 총체적 임무인 “제자를 삼아라”에 하위개념으로 종속된다는 것을 통하여 표현된다.초대교회에서의 가르침은 선교영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도교회에서는 설교 와 부활에 관한 공개적인 증거 외에 가르침은 초기의 교회가 형성된 이후 가장 중요한 사도들의 직분으로 간주하였다. 사도들은 가르침을 통하여 우선은 내용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행19:8), 약속하신 메시아요 하나님 나라를 선물하시는 분으로서 예수의 인격에 관한 것도 일찍부터 그들이 가르친 핵심이었다(행 5:31, 28:31). 사도들의 선교사역 중에서 바로 이러한 가르침이 가지는 핵심적인 의미는 누가의 표현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서신을 통해서도 잘 관찰 할 수 있다.이와 같이 살펴 본 결과 필자가 보기에는 신학적으로 다음의 4가지 사항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사도들이 자신을 돕는 자들에게 확고하게 교회를 지도하라고 부여한 가르침의 임무는 이 사역을 위한 지도자적 자격조건과 배치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치는 카리스마는 장로들(딤전4:14)이나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전수되는 데, 이 때에 서품식을 동반하는 선지자적 약속을 통하여 영적인 은사가 나타난다. 둘째는 서품식에서 받은 카리스마적 가르치는 직분은 교회 또는 공동체를 지도하는 전권과 연결된다. 이 전권은 나이와 성품에 구애받지 않고 이를 받은 사람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교회 또는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성령에 의해 부여된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 부여된 권세(고후 13:10 참조)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셋째는 사도교회에서 가르치는 임무를 부여 할 때에는 이와 동시에 가르칠 내용에 관한 교안도 함께 주었다. 이는 사도들, 특히 바울이 민족들에게 설교했던 케리그마 또는 복음이며(골1:23, 딤전 3:16, 딤후 4:17), 또한 이를 바른말의 본(딤후 1:13) 이라는 어느 정도 형식화된 규범으로서 그들에게 위임한 자산이며 더욱 가치 있는 전통이 되었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2-23
  • 치유는 선교의 전인적 사역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신학자 하르낙은 그의 저서 고대 교회 선교사에서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며 초대교회 선교전도자들이 자기들의 메시지를 아주 본질적으로 “구세주와 치유에 관한 복음”이 되도록 했음을 입증하였다. 기독교선교가 계획한 것은 아니나 타종교들과의 만남에서 발생된 부산물로서 혼합주의적인 제의공동체들이 모든 비서구대륙들에서 발생했다. 이에 반기를 든 벵트 순트클러의 지도를 받고서 40년대 이래의 선교-종교학은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갖게 되었다. 이 연구 분야는 역사 자료에 대한 관심 외에도 이를 훨씬 넘어서 보다 더 근본적인 서구 신학 특히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및 전반적인 선교적 복음전달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20세기에 먼저 오순절운동이 있었고 후에는 은사운동으로 발전되어 예수 활동이나 사도들과 교회들의 사명들 속에서는 구원과 치유가 불가분리의 일치성을 갖고 있다는 그들의 확신이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종합사고에서 이른바 “온전한 복음”이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세계적인 은사운동의 도전이 거세어지고, 나아가서는 사회복음 운동의 초기에까지 연결되고 30년대와 40년대에 이해적 접근으로 알려진 에큐메니칼 선교운동의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현재 복음주의 선교에서도 구원과 복음화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가 크게 요구되고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파송명령은 교회를 총체적으로 인도하였다. 또한 직분자들을 병자에게 보내면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명하였다. 칼바르트가 올바르게 통찰한바 인간의 건강이야말로 “인간 존재됨의 원동력인 것이다. 인간에게 그 건강의 힘은 그 자체가 오로지 인간존재의 기능들과도 같은 그런 영육간의 기능들을 발휘토록 하는 능력, 강인성, 자유로서 인간에게 봉사한다.” 성경적 신앙 속에서는 인간의 육체성의 중점적으로 강조되어왔다. 특히 창조론에서, 신적 로고스의 성육신 증거에서와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속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이는 말하자면 모든 인간의 육체부활을 위한 보증인 것이다.한국에서의 조용기 목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사유의 생활에서-기적을 기대하면 성공을 지향하면서-‘적극적 사고’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의 원천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용기 목사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서 성부 성자 하나님이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힘이 흐르는 “통로”이다. 이 신적인 힘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신앙행동으로 모든 형태의 영육적 병들, 즉 폐병과 암을 포함하여 일순간에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 또한 건강과 질병에 대한 성경적 근본 전제조건은 바로 건강, 즉 혼과 몸의 강건성과 안녕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선물은 그가 선하심으로 인간에게 베푸신 것이며 그 창조의지를 따라 인간 생명이 정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호하시며 치료의 도구를 주신 것이다. 특별한 경우엔 기적적 방법으로 신적 저주의 궁극적 철회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구속사적 산물인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배제하지 않았던 사실은 각 개인의 경우에 사람의 병은 그 자신의 죄가 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인 그분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극심한 분노로 대적하고 있다. 집요한 전략을 가지고 밖에서 안으로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키고, 마비시키고, 비뚤어지게 하여 결국 그 전체 삶의 방향이 하나님 대적으로 왜곡시키려 한다. 이러한 죄의 산물에서 벗어나야한다.성경적 이해로서는 생명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생명의 손상은 인간의 타락 이후로 상실된 하나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금단의 열매를 먹어도 즉시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지라도 타락한 첫 번째 한 쌍의 부모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선언된 이래로 모든 그의 후손들의 생명은 불가불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질병은 산물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3중적 저주(창 3:14-19)의 표적인데 첫째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요, 둘째로 육체적 실존이요, 셋째로는 그 직업적 실존을 무너뜨리는 저주인 것이다. 이 저주에 기인하여 그 둘째 양상 속에서 죄인은 항상 다시 육체적 정신적 종류의 질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 자신의 힘으로는 전혀 방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신유의 은혜가 전인구원의 축복임을 이해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2-16
  •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위
    촛불 시위가 광화문을 뒤덮고 있다. 서슬이 퍼렇던 세상권세에 대한 민중들의 자그마한 샘물이 봇물이 되어 대하를 이루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번쯤 참여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시간의 한계로 인하여 머뭇거리다 시간만 흐르는 기분이다. 이러한 시기에 박 대통령 하야(下野)에 대한 홍정길 목사의 글을 읽었다. 필자 에게는 CCC선배 간사님이 되시는 홍 목사님께서 보수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도 꺼려하는 대통령의 하야를 당당하게 꺼내셨다는 글을 읽고 매우 흥분된다. 홍 목사님 본인의 주장대로 “평생 공개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한 기억이 없다”는 글 속에서 고심 끝에 글을 쓴 것 같다.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최선의 길은 박대통령께서 하야(下野)하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분의 글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일로 국가의 격이 무너지는 일이 생길 염려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격은 민주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리고 북한에 가서 관리들과 대화하였던 부분을 예로 들었다. 그는 ‘남북나눔운동’의 이사장으로 대북 교류 관계를 23년 동안 해 왔다. 이 일을 하면서 북측의 한 분이 제게 이렇게 질문을 받게 된다. “홍목사님, 남녘이 민주화, 민주화하는데 뭐가 민주화요?” 그때 그는 “국가 최고 책임자라 할지라도 잘못했으면 감옥 가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권세를 가진 수령이 최고 권력자인 북한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국가의 격에 대한 차별성을 말한 것 같다. “둘째, 아버님께서 하신 그 모든 일들이 이제는 치욕으로 바뀌고 역사 속에 묻혀버릴 수 있다는 염려”에 대한 이야기 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를 오늘의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던 1등 공신이라는 데는 대부분이 공감한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공을 자녀가 까먹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갖지 말라고 충언하는 듯하다. 홍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이끄셨던 김준곤 목사와의 대담을 소개하고 있다. 김준곤 목사님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담을 홍 목사님께 들려 주었다고 한다. 김준곤 목사님은 박정희 대통령께 “왜 일본에서 버리는 공해산업인 폐기물을 한국으로 받아들입니까? 이것이 이 민족 장래를 향해서 바른 일 아니지 않습니까? 산업폐기물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그 때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 공해는 내가 다 마실 테니 우리 백성이 배만 굶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때에 김준곤 목사님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을 보았는데 두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았다고 한다.“셋째, 대국민 담화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는가?”라는 근거로 박 대통령의 하야를 호소하였다. 홍 목사님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식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인간의 가진 권력의 한계점을 말한 것 같다. 지금까지 홍정길 목사님께서 박 대통령에 하신 하야에 대한 호소문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필자는 이제 몇 가지 현안을 진단해 보고 선교적 관점에서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는 박 대통령은 종교 혼합주의자 였던 최태민과의 만남이다. 최태민은 영세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갖고 활동을 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딸인 최진실의 사주에 의해서 국가의 권력이 집행 되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과 최태민의 만남은 사령에 의한 친분관계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종교혼합이 가진 영적 혼돈이다. 결국 정신세계로부터 문제의 발단은 키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종교혼합은 현대 기독교가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하는 판단 능력을 흐리게 만들어 정책을 잘못 수립하고 집행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둘째는 최순실의 부친되는 최태민은 단돈 10만원을 주고 목사직을 샀다고 국민일보에 보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목사라고 호칭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가 정상적인 신학교 체계 속에서 공부를 한 것이 아닌 사람으로 판명되었다. 비 신학적인 교육 체계 속에서는 바른 기독교교리를 유지할 수 없음을 기독교교회사는 말하고 있다. 결국 최재민은 기독교를 망가뜨리는 데 앞장선 기분이다. 결국 박 대통령의 하야의 소리는 세상권세의 한계와 영원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비교해 주는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2-07
  • 교회 치유사역의 선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이로써 인류를 그 제자가 되도록 부른다. 전인을 향해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표적과 기사로 이를 확증해 주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복음이 증거된다. 이런 전인적 치유사역은 초기기독교에서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일찍이 시작되어 체계화된 사랑의 사역이었으며(행 2:44이하, 4장 32-35절, 6장 1-6절 참조), 다른 하나는 기적을 통해 영적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도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역시 은사적 재능을 갖춘 교회 성도들을 통해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첫째로 기적의 신유사역은 사도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교회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오순절 운동이 발생한 이래로 그리고 뒤따라 발생한 다양한 은사적 “성령의 물결” 이후로 “치유기적”이라는 주제에 복음적 기독교의 일부에서는 점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런 운동에 반대하여 곧장 개혁주의와 경건주의 쪽에서 진지하게 유보적 입장을 올바르게 천명하였다.예수와 그 사도들의 모범을 볼 때 그런 유형의 치유는 전혀 신학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런데도 구원론 중심적 신앙이 이런 유형의 치유나 혹은 기적 행함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나가 무시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이른바 등한시된 구원론의 붕괴와 기만적인 인위조작 외에도 또 다른 제 삼의 위험성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집회이다. 비기독교적인 종교들의 밀교적 능력을 통한 은밀한 혹은 의식적인 이방화(異邦化)이다. 육체 치유는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강요됨이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값없이 주는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생각은 언제나 유효한 것이다. 치유가 복음선포와 동반될 가능성은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그런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최우선적으로는-우리들이 아닌!-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은혜를 자랑하려는 뜻을 가져야 한다.둘째로 교회는 은혜수단인 치유 사역을 활용하였다. 근동 문화사의 영향을 받아 의사들의 의료행위가 제사장 단독의 직무를 통해 대체되었을지라도 양자 사이에는 종교적 유대관계가 유지되었다. 의사도 그 치료활동 속에서 기대되는 치유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본 바로는 예수의 천국복음은 육체적 치유의 표적에 의해서 입증이 되었고 예수는 그 사도들을 처음으로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복음 선포 위임과 함께 치유관세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신체심리학적 치유는 영적 직무의 과업으로서 교회의 사역에 내포되어있다. 이는 초대 기독교에서 여러모로 인증된 것이다. 교회의 축복 사역 아래 안수가 예수님 자신의 명령에 근거하여 처음부터 한 의미심장한 기능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상이한 목적들을 위해 실행되는데 그중 하나는 병자 치유이다. 마가복음 6장 13절에 따른 사도적 선교에 대한 서술에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편지에서 이 관계가 하나의 예수전승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 밖에도 초대교회의 병자치유 실제가 보충 설명되고 있다. 즉 기름을 부음이 연관되어 있다.셋째는 치유 공동체로서의 그리스도인 교회사역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신학적으로 교회의 치유 기능은 세 가지 양상 아래서 고찰될 수 있다. 먼저는 기독교적 사랑(헬:아가페, 라틴어:카리타스)의 관점이다. 다음으로는 신앙인들의 만인사제직의 관점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관점이다. 이 모든 세 가지 양상들은 물론 서로서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특수하게 기독교적이며 교회가 그 역사 속에서 보편적-인간적 고통에 대한 실천적 대답을 주었던 그리고 아직도 주어야 하는 그런 특별한 헌신을 잘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교회와 그 지체들은 그 실존을 하나님의 후원에 의존하는데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세계를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세상을 위해 죽음에 내어 주사 역사적이며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려 하시며 영생을 당신으로부터 하사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의 파괴된 그분과의 관계를 고치사 감사히 그 사랑에 응답하여 나아가서 동료인간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하셨다. 물론 그 제도화된 기관들은 그 주변세계에 기독교적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 고유한, 원래의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과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 사명은 성경적 신앙의 교회론적 근본노선에서 실행되는바 봉사에 민감한 복음선포와 지도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고 또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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