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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령에 대한 선교학적 재발견
    필자는 오늘 피터 바이어 하우스의 “성령에 대한 선교학적 재발견”에 대한 글을 인용하여 글을 엮고자 한다. 선교적선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성찰은, 이제 우리가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중요한 위치를 동시에 주목할 때만이 선교의 본질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선교의 성령론적 특성을 1974년 로잔 대회는 그 신학적 기초선언 중 하나의 고유한 장(14장)에서 확고히 했다. 1985년 5월 오슬로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위원회의 신학분과 위원회와 세계복음주의 연맹이 그에 대한 하나의 특별한 연구협의회를 열었다.선교에 있어서 성령 수여의 구속사적 편입과 함께 성령의 보혜사적 기능을 들 수 있다. 성령강림절에 오신 성령의 획기적인 과제는 그가 아버지 하나님의 위임을 받고 아들의 신적인 대변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선교적 증언을 보증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계시의 진리에 대해 감겨진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선교적 선포에 성령의 돕는 중재가 어떠한 가는 신학적으로 요한복음의 고별사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요한에게 있어서만 사용되는 성령의 신비스런 별칭, 즉 문자적으로 “불러들이는 자”라는 뜻의 “파라클레토스”가 나타난다.이것은 요한복음 14장 16절, 26절, 15낭 26절과 16장 7절 이하의 네 곳에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17절과 16장 13절에서 동시에 진리의 성령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보혜사는 그럼 누구인가, 또는 성령의 이러한 별칭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보혜사 parakiein)의 그리스 어원은 돕는 자로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 요청하게 되는 누군가를 가리킨다. 삼위일체의 틀에서, 즉 세 인격의 내부 관계(내재적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역시 외부로의 공동의 사역(경륜적 삼위일체)이란 관점에서 볼 때, 성령에게 하나의 특별한 의사소통의 과제가 주어진다. 만약 아버지 하나님과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종말론적 충만 가운데 나타난 성령강림절의 구속사적 사건 속에서 땅으로 보내셨다면, 그의 보혜사적 대리의 사역은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교와 관련하여 실현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그의 제자들에게 현존하게 만든다(요 16:14). 성령이 제자들과 비기독교인 청중의 내면적 상태를 진단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깨닫는 것은 그들에게 삼중의 장애물이 막고 있는 것, 그리고 이 장애물을 통해 청중들이 일부는 고의로, 일부는 내부적 속박으로 복음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장애물의 첫 번째 장벽은 그들의 초월성의 상실 때문에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대한 몰이해에 있다. 두 번째 장벽은 고의적인 폐쇄성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완강하게 반항하며 자기 우상화가운데 창조와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따라 인식할 수 있는 것에 저항한다. 세 번째 장벽은 내면적인 속박이다. 그것은 죄과의 청취능력을 마비시키도록 양심을 압박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버릴 수 없게 된 짐을 견고하게 한 죄악의 힘을 통해 생긴다. 영적 죄 인정 또는 확신의 중요한 내용을 말하는 세 개의 중심 개념이 나온다. 그것은 죄, 의, 심판이다. 보혜사는 세상에 대해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에 대해 눈뜨게 한다.구원에 필요한 그 첫 번째 인식은 죄의 본성에 관계된다. 왜냐하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분노가운데 있는 재앙의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오직 그 죄를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구원의 소식이 된다. 두 번째로 성령은 의의 본질에 대한 시야를 그들에게 열어 주신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무이한 구원행동 안에서 계시된다. 성령께서 세상에 세 번째로 열어 주시는 것은 심판에 대한 시야이다. 이것이 세상 권세 잡은 자기 심판 받는 데에 있다. 에리히 자우어는 성령의 보혜사적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그들의 불신앙을 통하여 폭로하는데, 이는 그들이 주님을, 한 분이신 참된 주님을 내던져 버린 것이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1-11
  • 선교지에서의 구원 선포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사역할 때에 쟁점 하나가 인간의 구원문제이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진리이다. 이 진리야 말로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를 이글 수 있는 절대적인 무기가 된다. 죄인인 인간이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 있음을 생각할 때, 그의 구속은 그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올 수 있다. 이것이 실제로 구약과 신약성서의 모든 구원론적 진술의 일관된 진단이다. 모든 구원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그 주체로 한다. 인간은 또한 그의 구속에 능동적으로 공헌할 수 없으며,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구원의 장본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구원의 내용이시다. 구원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 관계의 회복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실존이 그 관계 회복의 근원과 목적설정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한 인간의 재난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마지막 기회가 된다. 싸이더와 패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성경의 언어용법의 압도적인 다수가 가리키는 것을 구원론적 언어 사용을 제한하는 방향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연관이 있으며, 이것은 개인 혹은 공동체와 연관되어 있다. 수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약의 “대속개념”을 하나의 종교사적인 표상으로 제쳐 놓는데, 이는 다른 여러 성경적 진술과의 전체적인 관련에서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의 중요한 단서들을 주목하도록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간구원의 메시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첫째는 구원은 신약적 의미에서 단지 “부정적”으로만 죄의 용서를 통한 죄책의 도말에 있지 않다. 모든 성경의 구원론적 용어들은 행동개념들로서, 재난의 제거를 내포한다. 적극적인 새로운 구원의 상태, 즉 인간의 하나님과의 갱신된 친교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양자됨 또는 하나님의 아들 됨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바울과 요한의 개념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여짐은 구원사건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데, 계속적인 변화와 영적 성장의 과정을 통하여 온전한 성숙에 다다라야 할 성화이다. 셋째는 구속은 단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만약 구원이 단지 개별적인 죄인에 의해서만 개인적 신앙행위를 통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구속의 목적은 그의 몸 된 지체로서의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넷째는 구원은 물론, 거듭 강조한 바와 같이, 우선 먼저 하나님께 대한 수직적 관계에서 실현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에 대하여 갱신하는 결과를 갖는다.다섯째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얻는 구원은 세 가지 구원사적 시간 속에서 효력이 발생된다. 구원은 현재에서의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의 수용과 유지에서 실현되며, 또한 매일의 붙듦에서 갱신되어야 한다. 구원의 성취는 미래에서 발견된다.위에서 언급된 인간 구원의 개념이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화해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겠다. 선교사들은 십자가로부터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는 과제가 선교적 직무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지해야 하겠다. 부활로부터 규정된 사명의 양태는 그를 주님으로 선포하는데 있다. 실제로 우리가 거의 2000년간의 선교역사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 사람들은 선포되거나 읽혀진 하나님의 말씀에서 다양한 측면 때문에 내적으로 감동 받아 마침내 그의 주님이요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숨을 바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내적 확신의 사역과 율법과 복음을 통한 깨달음의 사역은 선포자의 처분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선포자가 책임지는 것은 오로지 온전한 구원의 소식을 청중의 내적 상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개입을 하면서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1-03
  • 선교는 하나님 말씀의 증거
    선교지에서 선교사의 일차적 책임은 무엇인가? 이는 말씀의 선포이다. 이 문제는 선교사가 지닌 신학의 유형에 따라서 일차적이냐 아니면 2차적이냐로 갈려지게 된다. 피터 바이어 하우스는 선교를 위한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확신에 의하면 복음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중심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고전적이며 복음적인 선교 이해에 본질적인 자료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제7장에 복음의 교의와 교회의 표지로 언급된 성례는 가시적인 말씀으로서 넓은 의미의 말씀에 포함된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기적은 천국 복음 선포의 구체적인 내용을 신뢰하게 하는 부수적인 표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4복음서 전체와 사도행전에 재현된 선교명령의 형식들에도 해당된다. 여러 곳에서 사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말씀에 대한 봉사로 나타난다. 그에 상응하는 개념들은 ‘설교하다’, ‘가르치다’, ‘증인이 되다’, ‘제자를 삼다’, ‘세례를 주다’, ‘죄 용서를 하다’ 등이다. 말씀에 대한 봉사는 다른 모든 목회 적이며 사회봉사적인 교회의 과제 중 가장 우선적인 것이다. 로잔 언약(5번 항목)에도 올바르게 표현되었듯이 사회정치적 책임은 선교 개념에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내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직접적인 구원을 위한 교회의 파송의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의도된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른 선교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순종의 열매요 결과이다. 선교자료로서의 말씀에 대한 높은 가치평가는 무엇보다도 성경자체의 증언과 다음과 같은 체험에 기인한다. 그 체험이란, 성경은 의미 있고 깨달음을 주는 특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바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과 성화를 이루신다. 그러면 선교사가 지녀야 할 복음의 진정한 내용은 어떤 것인가? 파송 된 자는 듣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받은 바를 전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첫 번째 파송 받을 때부터 분명한 메시지, 즉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마땅히 회개해야 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복음의 내적 통일성은 두 가지 근거를 가진다. 첫째로, 예수님이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약성경의 참된 의미를 밝혔을 때,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분명하게 해석된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기인한다. 둘째로, 모든 사도들에 의해 확고한 전승재료로 보전되고 선포된 것에 기초를 둔다. 바울 역시 자신의 사도직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주어졌음과 그에게 선물로 부여된 비밀의 인식을 열정적으로 변호하였지만, 때때로 그가 받은 전승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일찍이 문학적인 자질이 있는 일단의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에 관한 기록물들을 편찬한 후에(비교 눅 1:1f), 이 문서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두 선포를 의미했던 것인데 후에 “복음”(막 1:1)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성경은 세계 선교를 통하여 항상 선교지의 새로운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전 세계교회를 교의적으로 묶어주는 연결점이 된다. 고대 교회의 이러한 성경의 확정과 신앙고백의 형성 과정은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학설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변경하는데 대응하는 영향력 있는 보호 장치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성경의 복음을 지시하는 것 자체가 복음화를 상황주의의 그늘 아래 새롭게 구성하는 시도와 시대사조의 흐름을 절대적인 위임으로 인정하려는 자의적인 경향에 대응하는 필수적인 경고가 된다.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진리인 성경이 문화의 벽을 넘어 갈 때에는 가변적 요소를 지닌다. 즉 16,17세기 인도와 중국에서의 예수회 선교 시대 이래로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된 선교방법으로서의 적응의 노력과 논쟁은 선교 이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적응을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요청은 이미 사도들의 선교방법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적응에는 신학 개념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풍습에의 적응이 관건이다. 개념의 가변성을 통하여 생긴 차이점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의 차이이다.비록 문화적 가변성이 존재할지라도 선교사는 절대적인 진리인 성경을 인간의 사변적 이론을 들어 바꾸거나 훼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선교의 일차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교)
    • 칼럼
    • 선교
    2016-10-20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교
    성경은 이름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대표적인 이름이 “아브라함” 이다. 창세기 12장 2절에 의하면 “...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대로 성경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선교를 위해서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영적인 직무수행자들의 말과 행동이 그 권위와 능력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통한 전권위임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성경적 근본생각은 신적인 사명을 주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서 현존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표현을 발견한다.바울은 잘 알려진 유명한 구절에서-로마서를 시작하는 초두의 자기소개에서-자기의 개인적인 파송이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즉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charis)와 사도의 직분(apostole)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우리는 이하에서 이러한 이름 모티브를 다양한 관점에서 선교학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첫째는 이름의 의미 속에는 개인적 현존으로서의 이름이 존재한다. 개인 이름에 대한 성경적 생각에 근본적인 것은 그것은 고대의 생각에도 마찬가지였겠는데 이름은 곧 바로 존재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해는 개신교 교회가 모든 예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거룩한 형식으로 열 때 그 배후에 있는 것이다. 먼저 이것은 공동체의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상향식의” 고백행위가 아니라, 그 언사에 있어서 예배 집전자는 전권을 위임 받은 상태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향적으로” 행동한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불가시적으로 현존하면서 예배의 전체 사건 속에서 주도권을 넘겨받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에게 그의 은총의 수단을 통하여 자신을 선물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받아들이신다. 어떤 한 개인의 이름은 그 개인의 의미와 본질적 특성, 행동방식 및 현존의 규정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곳은 성경에 나타나는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에게 다양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 속에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정해지며(창17:5), 세례요한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곧 도래할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위한 길을 예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그 이름으로 불리울 때, 이것은 동시에 그 이름으로부터 비롯되는 거룩한 영향력에 대한 기대에 찬 소명 하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특별한 특권을 나타내며 그 이름에 걸맞는 영향력을 갖는다.둘째는 우리가 세상에서 불려지는 이름 속에는 자리매김으로서의 이름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가끔 그 사람의 서열과 영향력이 나타난다. 신약성경의 기독론도 예수의 인격에 부가되는 존귀한 이름의 형태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의미가 있다. 직접적인 과정 속에서 수행되는 바로 이러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계시의 사건은 인간 편에서의 신앙과 교리의 발전과 함께 상응한다. 예수 자신은 숨기시기도 하고 동시에 드러내시기도 하시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불렀다. 제자들은 그를 분명히 보다 일찍 헬라의 문화에 맞추어서 존경스러운 의미로 주님(kyrios)으로 불렀다. 부활이후 이 명칭은 엄청난 의미로 자리매김했으며 상승작용을 거치게 되었다. 그가 구약의 주-야훼와 동일시됨으로서 이제 결정적으로 인간적인 차원에서 신적인 차원으로 상승하고 이로써 그를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좀 더 확실하게 고유명사로 된 다른 칭호는 그리스도라는 칭호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요, 대제사장이며 동시에 예언자이다. 예수를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구원자요 구속자라고 증언하는 것도 이러한 고백 속에 포함되어있다. 예수의 존귀를 나타내는 또 다른 호칭은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연관 된다.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오히려 그 위대한 이름 대신에 복지와 상담 그리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선교사들은 공중 권세 잡은 세력과의 영적 대결과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사역에서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0-13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교
    성경은 이름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대표적인 이름이 “아브라함” 이다. 창세기 12장 2절에 의하면 “...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대로 성경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선교를 위해서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영적인 직무수행자들의 말과 행동이 그 권위와 능력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통한 전권위임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성경적 근본생각은 신적인 사명을 주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서 현존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표현을 발견한다.바울은 잘 알려진 유명한 구절에서-로마서를 시작하는 초두의 자기소개에서-자기의 개인적인 파송이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즉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charis)와 사도의 직분(apostole)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우리는 이하에서 이러한 이름 모티브를 다양한 관점에서 선교학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첫째는 이름의 의미 속에는 개인적 현존으로서의 이름이 존재한다. 개인 이름에 대한 성경적 생각에 근본적인 것은 그것은 고대의 생각에도 마찬가지였겠는데 이름은 곧 바로 존재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해는 개신교 교회가 모든 예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거룩한 형식으로 열 때 그 배후에 있는 것이다. 먼저 이것은 공동체의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상향식의” 고백행위가 아니라, 그 언사에 있어서 예배 집전자는 전권을 위임 받은 상태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향적으로” 행동한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불가시적으로 현존하면서 예배의 전체 사건 속에서 주도권을 넘겨받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에게 그의 은총의 수단을 통하여 자신을 선물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받아들이신다. 어떤 한 개인의 이름은 그 개인의 의미와 본질적 특성, 행동방식 및 현존의 규정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곳은 성경에 나타나는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에게 다양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 속에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정해지며(창17:5), 세례요한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곧 도래할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위한 길을 예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그 이름으로 불리울 때, 이것은 동시에 그 이름으로부터 비롯되는 거룩한 영향력에 대한 기대에 찬 소명 하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특별한 특권을 나타내며 그 이름에 걸맞는 영향력을 갖는다.둘째는 우리가 세상에서 불려지는 이름 속에는 자리매김으로서의 이름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가끔 그 사람의 서열과 영향력이 나타난다. 신약성경의 기독론도 예수의 인격에 부가되는 존귀한 이름의 형태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의미가 있다. 직접적인 과정 속에서 수행되는 바로 이러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계시의 사건은 인간 편에서의 신앙과 교리의 발전과 함께 상응한다. 예수 자신은 숨기시기도 하고 동시에 드러내시기도 하시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불렀다. 제자들은 그를 분명히 보다 일찍 헬라의 문화에 맞추어서 존경스러운 의미로 주님(kyrios)으로 불렀다. 부활이후 이 명칭은 엄청난 의미로 자리매김했으며 상승작용을 거치게 되었다. 그가 구약의 주-야훼와 동일시됨으로서 이제 결정적으로 인간적인 차원에서 신적인 차원으로 상승하고 이로써 그를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좀 더 확실하게 고유명사로 된 다른 칭호는 그리스도라는 칭호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요, 대제사장이며 동시에 예언자이다. 예수를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구원자요 구속자라고 증언하는 것도 이러한 고백 속에 포함되어있다. 예수의 존귀를 나타내는 또 다른 호칭은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연관 된다.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오히려 그 위대한 이름 대신에 복지와 상담 그리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선교사들은 공중 권세 잡은 세력과의 영적 대결과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사역에서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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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10-13
  • 선교명령의 의미를 생각하기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오늘 독일의 선교학자로서 명성을 지닌 피터 바이어 하우스의 이론을 소개 하고자 한다. 선교명령 이란 근대 교회의 역사에서 모든 세대의 전체교회에서 부활하신 자의 선교명령이 계속적인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을 최초로 성과 있게 주장한 공로는 근대 세계선교의 개척자인 윌리엄캐리(William Carey)에게 돌려진다. 그는 주님의 선교 명령이 그의 12제자들에게 향한 개인적인 명령이요, 그 명령도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끝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복음주의적 선교운동의 파송이해는 전적으로 선교명령에 대한 순종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다른 동기들과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명령의 타당성을 자명한 것을 전제한다. 1886년 헤르몬 산에서 열린 학생선교대회 참자들을 향한 요청에서 윌리엄 애쉬모어는 “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보여주시오.”라고 외쳤다. 현대 교회일치 선교운동의 선구자인 존 모트에게 있어서도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은 “예수의 마지막 명령은 우리의 선교의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요한네스 바르넥은 “일차적으로 예수 안에서 구원자와 주님을 만나고 그러나 그분 속에서 동시에 모든 상실된 인간의 구원자를 인식하는 고유한 구원체험의 바탕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순종은 과거 선교운동의 뿌리였고 또한 현재 선교운동의 뿌리이다.”라는 점을 확인하였다.이에 반해 최근의 개신교 선교학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최소한도 선교명령에 입각해서 선교를 우선적으로 근거지우는 것에 일정한 거리를 두거나, 심지어는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한편에서는 역사비평적인 성서주석에서 마태복음 28장 18-20절 부분을 더 이상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고 교회공동체의 형성물로 보기 때문이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적인 이유 때문인데, 그것은 복음자체의 본질 속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파송이 과도하게 합법화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피터스는 선교를 명령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우주적인 사랑의 경륜과 삼위일체적인 본질 속에서 신중심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 제자들도 자신의 파송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교회의 선교를 아들의 선교와 이것들을 계속 추진하는 성령의 선교속으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구원사적인 맥락의 조건들을 보면서 중요하게 확정해야 할 사항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획하신 것은 승천하심으로 마치신 자기 자신의 세상으로의 파송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계속 수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 공동체에 계속해서 의식화되어 남아 있어야 할 것은, 교회는 자기 자체를 위해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에 의하여 하나의 위임 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요, 그분의 순종적인 수행에 입각하여 교회는 다가오는 심판 속에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명령이 복음의 세계선교적 선포를 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명령은 이러한 구원사건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결론이요, 따라서 선교적 과제의 구속력을 분명하게 제시한다(행 10:39-42) 이런 연관성에서 볼 때 구스타프 바르넥에게 있어서 신앙을 확산시키는 일은 인간의 자발성에 맡겨져서는 안되고, “직무로 정당화 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안수를 받은 선교사인 사도의 직무를 근거 지워준다고 한다.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대사”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로 활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일꾼)”에게서 오직 기대하는 것은 그 비밀들이 전달될 때에 참인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선포자는 성경의 메시지를 조작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는 선교의 열기가 식어가는 이때에 독일사람인 노 학자의 말에 경청할 시간이 되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9-29
  • 선교사의 건강은 선교의 열매
    네팔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유는 건강책크 때문이라고 한다. 이 미국 선교사 부부는 지난해 지진으로 말미암아 선교지 네팔에서 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마치 최근에 지진에 안전하다고 느낀 한국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400여회의 지진과 여진은 심장을 정지 시키는 고통을 겪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인명 손실이 없는 한국에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데 네팔에서의 지진은 산이 갈라지고, 몇 천년된 문화제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서 끊임없는 장례식을 목격한 충격은 너무나 컸다고 간증하기도 했다. 선교지에서 건강을 잃으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필자의 가족도 건강 때문에 선교지를 철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소식을 접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된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몸이 아파서 누울 정도가 아니면 병원을 찾지 않는다. 국내 한 교회의 선교부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선교대회를 통해서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건강검진을 실시한다고 들었다. 이러한 일은 다른 선교부와 현지 선교사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일 수 있다. 사실 세계 선교 현지의 모든 곳에서 의료시설은 매우 열약하다. 특히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 국가들에서의 보건시설은 말할 것도 없다. 말라리아와 장티부스와 이질 같은 질병들은 열대 지방의 선교지에서는 매일 싸워야 할 질병들이다. 선교사들의 또 다른 질병은 사역과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다. 열악한 환경과 휴가 없는 사역 그리고 선교비 조달이 어렵게 될 때에 더욱 심해진다. 특히 아프리카 선교사들은 시민전쟁이나 종교전쟁,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으로 심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게 된다. 특히 선교사들을 납치하여 돈을 요구하는 반군 세력들이 득세 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선교 현장이 지옥 같은 환경으로 바뀌게 된다. 일예로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사역했던 한 나이지리아의 선교사 가족의 자녀들은 아직도 “시에라리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병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유엔 평화 봉사단이 그들을 구출하기 까지 그들은 반란군에 포로가 되어서 죽을 고생을 하였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이 아이들이 겪은 정신적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치료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선교사 가족이 다시 시에라리온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전쟁의 충격과 상처로 인해서 계속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선교사들의 업무는 쉴 틈이 없다. 한 선교사가 다섯 사람의 몫의 일을 하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과중한 일로 인해서 선교사들은 탈진 하게 된다. 비록 탈진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휴가나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휴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역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자신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선교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수많은 영혼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이들이 죽어 간다고 생각한다.최근 일본의 선교지에서 철수한 한 제자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일본 선교에 비젼이 있었고, 찬양하는 달란트를 통해서 일본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힘들게 사역한 나머지 심장이 좋지 못한 관계로 부득이 철수 하여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금은 기도원에서 몸을 쉬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국교회의 선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교지에서 각종 질병과 정신적 공항 상태에 있는 선교사 가족을 돌봐야할 책임이 있다. 지금은 선교회들 마다 나름대로의 건강 프로그램을 세워서 추진하고 있다. 선교사의 질병과 탈진 소식을 접한 본국의 선교지도자들은 “재충전”을 위해서 선교사 가족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이 많아진다. 이러한 충전과 휴식은 선교사 가족들로 하여금 육신적, 정신적, 영적으로 안식을 주게 된다. 이처럼 재충전을 통한 파송과 교제야 말로 매우 바람직한 정책이라고 본다. 이 말은 선교사의 건강은 곧 선교의 참다운 열매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선교, 건강한 선교사는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을 준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9-22
  • 직업과 삶
    사도 바울은 사람이 직업을 갖고 성실하게 근무하여 삶을 영위 할 것을 말씀하셨다. 즉 “... 누가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적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7)”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정황상 사도의 권리에 대한 말씀이지만 필자는 오늘날 우리의 직업과도 연관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 대신에 운명적으로 정해진 금수저와 흑수저 논쟁이 요즈음 화두가 된 듯 하다. 결국 성실하게 일해서 삶의 목표를 성취하는 분위기는 점점 소멸되어 가고 부모가 남겨둔 유산으로 질퍽 질퍽 쓰면서 호위 호식하는 것이 특권인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 아침 포털에 올라온 글은 우리마음을 잠시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글이 올라와 있다. 국민일보가 기사화한 내용은 “‘짜장면 배달원’ 한시간 동안이나 울린 소녀의 사연”이다.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한 여자 아이가 중국집 배달원을 한 시간 동안이나 울게 만들었습니다. 인터넷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갑질’은 아닙니다. 아이가 빈그릇과 함께 건넨 편지 한 장이 때문입니다.눈물 먹은 배달원의 사연은 2일 “아직은 세상 살만하네요”라는 제목으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습니다. 글쓴이는 실직한 뒤 배달 일을 하게 됐다다는데요. “오늘은 너무너무 눈물이 난다”면서 사연을 전했습니다.밤 늦게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딸아이가 집에 혼자 있는데 짜장면 1그릇만 배달해 달라면서요. 흔쾌히 짜장면을 들고 갔다네요. 초인종을 누르니 예쁜 꼬마 숙녀가 “아저씨 감사합니다”하며 받아 들었다고 합니다.그로부터 1시간 뒤 그릇을 수거하기 위해 집에 갔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여자 아니가 설거지까지 해놓은 그릇을 들고 나오는데 왠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더라는 겁니다. 처음엔 ‘택배’라고 쓰여있어 망설였다는데요. 고민 끝에 열어봤다고 합니다.그러면서 글쓴이는 소녀에게 받은 쪽지 사진을 함께 올렸습니다.겉에는 “열어보세요 택배아저씨”라고 적혀있고, 속에는 “저희가 밥을 따뜻하고(게)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또박또박 예쁜 글씨로 쓰여있습니다. 게다가 소녀는 감사의 표시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함께 넣었습니다.글쓴이는 평소에 배달일 한다고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는데, 어린 소녀에게 사람대접 받았다며 기뻐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습니다.네티즌들도 어린 소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습니다. 제목처럼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는 댓글이 줄을 이었습니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바른 아이가 앞으로 흔들림 없이 반듯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각박한 세상을 바꿔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한 소녀의 순수한 마음이 짜장면을 배달하는 직업인을 한시간 가까이 울게 만들었다는 것은 감동적이 나닐 수 없다. 이는 1000원짜리가 가진 화패의 경중이 아니다. 바로 직업에 대한 존중과 감사의 마음이다. 이러한 존중과 감사가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희망과 꿈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의 기독교계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순수함이 자꾸 소멸되어가는 느낌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담긴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불행스럽게도 이 진리를 해석하고 삶을 통해 실행해 나가는 일부 지도층에 의해서 교회는 망가져 가고 있다. 세속주의가 추구하고 있는 돈과 성(性) 그리고 권력의 욕심이 너무 과한 것 같다. 언론에 의하면 수억원의 공금횡령과 빠찡고에서의 일탈을 일삼는 목사, 청소년 선교기관을 책임지고 있는 어느 목사의 성 추문사건, 정부 권력과 야합을 통해서 무엇인가 취해 보려는 지도자들 때문에 선교의 밭이 점점 황패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기독교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것”이 인류의 타락을 가져와 죄가 인류 속에 전가된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직업 앞에서 천직(天職)의식을 가져야 할 때이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9-08
  • 리우 올림픽과 스포츠 선교
    리우 올림픽의 상징은 아무래도 산위에 버티고 서 있는 예수님상 이었다. 리우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예수님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신앙의 중심이 왜 예수님이신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특히 기독교 선교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최고위층 중의 한사람인 최룡해도 그곳을 방문 하였다고 하니 예수님상은 관광명소와 함께 종교적인 권위를 충분히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포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인종과 종교와 사상을 뛰어 넘어 하나의 공속체를 이루기도 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스포츠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스포츠의 어원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이어서 프랑스 어로 사용되었다. 본래는 disport라 했으나, 영어로 바뀌면서부터 di가 없어지고 sport가 되었다. 원어에서 dis라는 것은 ‘분리(分離)’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로 away에 해당하며, port는 ‘나르다(carry)’의 뜻이었다. 따라서 disport는 carry away라는 뜻으로, 즉 ‘자기의 본래의 일에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나른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일에 지쳤을 때에 기분을 전환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 ‘생활의 성실한, 또는 슬픈 장면을 떠나서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스포츠는 심한 육체활동이나 연습의 요소도 포함하는 말이다. 현대의 스포츠는 경기규칙에 따라 승패를 겨루는 신체적 활동이지만,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활동의 강약도에 따라 레크리에이션 또는 유희로 부를 수도 있다. 대개 신체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신체활동을 체육이라고 하는데, 체육과 스포츠를 명확히 구분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스포츠가 국제적으로 보급되고, 연구에 있어서의 국제적 교류도 활발해지자 그 개념을 국제적으로 통일할 필요가 생겼다. 또한 통일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스포츠를 아곤적(Agon 的) 성격의 운동, 또는 경쟁·투기로서 하는 운동이라고 하는 사고 방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아곤(Agon)은 플레이의 한 범주이며, 그 원동력은 어떤 분야에서 자기의 우수함을 타인에게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욕구이다. 그것을 실증하기 위하여는 평등한 조건으로 자력(自力)에만 의지하여 다른 개인이나 팀과 경쟁하거나, 자연의 장애에 도전하여 이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경쟁 또는 투기로서 하는 운동이 스포츠이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로 시도된 정의에 대해 살펴보면 그 표현 방법은 달라도 기본적 입장은 대체로 같다. 일례를 들면, ISPE(국제 스포츠 체육협의회)의 ‘스포츠 선언’에서는 ‘플레이의 성격을 갖고, 그리고 자기 또는 타인과의 경쟁, 혹은 자연의 장애와의 대결을 포함하는 운동은 모두 스포츠이다’라고 되어 있다.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양궁 금메달의 주인공인 장예진양은 금메달의 기쁨을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멘트를 우리에게 남겼다. 필자는 장예진 양이 자신의 신앙을 숨길만도 한 중요한 자리에서 믿음을 강하게 표현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사이트를 통해서 얻은 그녀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올해 30세로서 초등학교4학년 양궁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대학교 4학년때 첫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2012년 런던올림픽 때는 대표후보선수 4명에 포함됐다가 막판 탈락의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2014년 첫 금메달을 따고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2016년 올림픽 선발전 때에 강채영 선수와 피 말리는 접전 끝에 올림픽대표선수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출전한 그녀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중요한 승부처에서 금메달을 취득할 수 있었다. 언론에 의하면 장예진 양은 수없이 많은 난관을 의지로 극복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간 승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수에게서 금메달을 따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리우 올림픽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을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경주와도 같다. 수없이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한다. 마치 ‘철로 역정’에 나오는 순례자처럼 각종 시험을 이겨야 할 성도들이다. 언제 부터인가 교회는 세속화의 파고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고난의 십자가 대신에 명예와 돈과 그리고 세상의 향락 그리고 심지어 도박과 같은 병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의 동력을 활용하여 세속화의 물결을 극복하고 승리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9-01
  • 보석처럼 빛나는 선교적인 마음
    John W. Reed의 말에 의하면, 룻기는 칠흑 속에 뭍힌 아름다운 진주처럼 빛나는 보석 이라고 표현을 하였다. 룻기는 참으로 감동적인 스토리다. 이 이야기의 플로트(plot)는 비극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해피앤딩(happy ending)으로 끝나게 된다. 이러한 해피앤딩의 스토리 속에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어휘를 꼽는다면, “구속”과 “인애(헤세드)”이다. 여기에서 “인애(헤세드)는 믿을만한 사람에게 사랑과 인애를 베푸는 충심을 뜻하게 된다. 주인공인 룻은 모압여인 으로서 유대인인 남편이 죽은 후 그녀의 시모인 과부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으로 이주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서 부유한 유대인의 농부인 보아스를 만나서 결혼 하게 되었고 먼 훗날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된 사람이다. 따라서 룻기는 ”룻“의 이름을 따서 ”룻기“로 명칭되었다. 이는 구약 성경에 ”에스더서“와 함께 유일하게 여인의 이름을 따서 기록된 말씀 이다.룻기는 총 4장 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1장은 룻기 전체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나오미라는 한 여인이 남편과 함께 먹을 것을 찾아서 베들레헴 땅을 등지고 모압 땅에 갔으나 낮선 객지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들을 집에서 돌려보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 묘사 되었다. 나오미는 이러한 상처를 안고 고향땅에 한쪽 며느리인 룻과 함께 쓸쓸한 귀향을 담고 있다.2장과 3장에는 룻과 훗일 남편이 되어 가계를 이어갈 보아스와의 관계에 대해서 기록되었다. 그들은 전원적인 풍경 가운데 이상적인 사랑이 싹트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마지막 4장에는 그야말로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룻의 상급이 나와 있다. 이렇게 볼 때에 룻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 정도로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신학적인 이슈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보석처럼 빛나는 룻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째는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다. 나오미가 처한 형편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의 비참한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 하고 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각각 너희의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맛 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룻 1:8-9)”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 머나먼 이국땅에 먹을 것을 찾아 생존을 부지하려 왔지만 남편죽고, 두 아들마저 먼저 보내 버리는 비참한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나오미의 불행을 그대로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며느리인 룻을 통해서 그 가정을 구렁텅이에서 건지어 내실뿐만 아니라 참으로 위대한 가계를 허락 하셨다. 룻기 4:13-15절에는 나오미의 나중형편이 어떤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제 한 가정을 완전히 회복 시켰고, 후일 이스라엘 왕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역할을 감당하였다.두 번째의 교훈은 사망을 인애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다. 룻기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인 단어는 “헤세드(Kindness)”입니다. 나오미는 여호와 하나님께 그의 “헤세드”를 며느리들에게 나타내 달라고 간구 하고 있다. “... 여호와 께서 너희를 선대 하시기를 원하며...(1:8)”,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2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쫓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하도다(3:10)” “헤세드”라는 말이 세 번 쓰여 졌는데 두 번은 나오미가 자신의 자부에게 한 말이고, 한 번은 보아스가 룻에게 한말이다. 하나님은 인애의 하나님 이시다. 그의 은혜는 우리에게 그의 사랑과 인애를 베풀어 주신다.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의 거룩한 피로 사주셨다. 오늘 필자는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인 룻과의 관계를 통해서 절망을 소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사망을 인애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선교는 이처럼 보석과 같은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시킬 수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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