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3(목)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쁨의 나무’(요15:1-2)
    얼마 전 새벽, 저는 자주 오르는 산에서 기도 하였습니다. 후두둑 후두둑 가끔씩 알밤 떨어지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들짐승의 발자국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가을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다 마친 후 먼동이 터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놀랍게도 주변은 여기 저기 하트모양의 알밤들로 차려 있었습니다. 솔직히 전 어지간하면 알밤을 잘 줍지 않고 다람쥐에게 양보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날만큼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밤나무가 이렇게 저에게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의 친구가 되어준 당신께 뭔가 선물을 드려야겠기에,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 무릅쓰고 맺은 열매입니다. 저의 성의를 받아주십시오.” 물론 제가 이렇게 상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삿9:8이하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 알밤을 통하여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포도나무 역시 나무들이 자신에게 왕이 되라고 할 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하며 거절합니다(삿9:13). 자신의 존재 이유가 왕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는 기쁨의 나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자신을 포도나무로, 신앙인들을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짓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1-2). 주님은 기쁨의 나무이고 우리는 기쁨의 가지인 셈입니다. 기쁨의 나무로부터 진액을 받아 기쁨의 가지가 된 신앙인들이 기뻐하며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라고 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까? 물론 위 말씀처럼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9). 사랑할 때 기쁨이 오고 기뻐할 때 힘이 생깁니다(느8:10).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옥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바울이 오히려 그를 염려하는 형제들을 위로하며 기뻐하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바로 기쁨은 너그러운 용서 가운데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 꽁한 마음, 혐의를 품을 때 성령과 교통이 끊어짐을 신앙인들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가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용서 받지 못하는 죄’는 ‘용서하지 않는 죄’인 것입니다. 기뻐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염려는 기쁨은커녕 오히려 영과 육 모두를 병들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4:6-7). 어떻게 하면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주 안에서 사랑하며 살고, 관용해야 하며, 염려를 주께 맡길 때 비로소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새 달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뻐하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10-0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에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를 부르며 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 지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만물의 주인으로 그 보좌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그 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그 관계에서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사실로 믿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믿으라고 설득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는 너무나 확실한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빛이 있어라” 자존자의 말씀 따라 빛이 있었습니다. 누가 창조주의 말씀을 거역하겠습니까? 창조주가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천지는 창조가 이루어 지고 창조된 모든 만물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만물은 축복을 누립니다. 땅과 우주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함께 연합할 때 창조의 질서대로 우주가 유지되듯이 사람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살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실 능력이 있지만 모든 기도는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 져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께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기도를 들으십니다. 아버지의 의무로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또 아버지이기 때문에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리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근엄하신 능력인 거룩으로 존재 하십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만의 영역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피조물은 거룩에 닿는 순간 소멸해 버립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합니다. 거룩 앞에 서면 그 뜻에 벗어나는 인간은 거룩의 불로 소멸되어 버리고 맙니다.(레 10:1~2)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설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를 주셔서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에서 죄인인 나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르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을 받은 자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아버지로 나타내셨습니다.(요 17:6)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셨습니다.(요 17:26) 거룩하신 여호와, 죄는 그 앞에 서면 소멸되는 거룩하신 하나님, 그분을 우리에게 아버지로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교회는 아버지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알리시고 아버지께 기도할 때 예수 이름의 사용권을 주셨습니다.(요 16:23~24) 우리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칼럼
    • WAIC 칼럼
    2019-10-01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고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을 잘 묵상해 보면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 더 명확해 집니다. 먼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 6:5) 위선자는 겉으로 보여 지는 행동만 선한 체 하는 사람입니다. 위선자는 행동이 자신의 인격이 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게 가능한 사람입니다. 위선자는 남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큽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기도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들은 기도의 댓가로 자기들이 원하는 인정을 보상으로 이미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 없습니다.(마 6:5) 예수님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곳은 아무도 없는 곳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는 사람이 그곳에 갑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그곳에 오십니다.(마6:6) 그리고 은밀한 중에 기도를 들으시고 갚아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요 17:26)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실체가 분명합니다.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이방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 주십시오’ 반복하면서 영혼 없이 중얼거립니다. 그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받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구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받는 것입니다. 인격이 없는 관계는 댓가를 치르고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점원이 친밀하고 사랑하는 깊은 관계 때문에 나에게 물건을 주는 게 아닙니다. 내가 물건 값을 지불했으니 주는 것입니다. 인격 없이 구하는 내용에서 친밀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신에게 자기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겠지요, 그 기도는 내가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 주십시오’ 를 반복하면서 의미 없는 말을 계속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만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보다 가장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어찌 영혼 없는 ‘주십시오’ 를 반복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는 댓가를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라 마음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들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이지요, 크게 말하든 작게 말하든 많이 말하든 한마디만 하든...말하는 내용이 두서가 없어도 들으십니다. 그분에게 말하기만 하면 작은 신음소리까지 들으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구하기 전에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 이시기 때문입니다.(마 6:8) 아버지와는 대가로 주고 받는 거래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마땅히 구하는 것이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안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에 안주시면 기다리고 아버지의 뜻이 절대 아니면 포기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얄팍한 기도와 비교 해 보십시오, 수준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이런 수준의 기도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09-2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신 기도’(마 6:5~8)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기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초신자 때에는 정말 기도하는 게 막연하지요, 그래서 무조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믿음이 생겨나고 직분을 받게 되면서 기도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기도를 더 깊이 알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응답받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왜 내 기도는 응답이 안될까? 주님은 내 기도를 들으실까? 성도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는 가요?’ 라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고도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6:5, 7) 무조건 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걸러서 들으신다고는 하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무엇일까? 를 알고 기도하면 더 좋겠지요,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치신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 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에서 강연한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내용만 따로가 아니라 산상수훈의 내용과 연결되어 집니다. 산상수훈은 제자들의 삶을 강연하신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불신자들이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하면서 그 말씀의 깊이에 빠져드는 말씀 들입니다. 아무나 쉽게 따라서 할 수 없는 수준의 삶입니다. 그 삶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대단히 수준이 높은 믿음의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그만큼 놓은 수준의 기도이니 초신자가 할 수 있는 수준의 기도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초신자들도 믿음이 생겨나고 신앙의 연륜이 생기면서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렇게 기도해야 맞습니다. 먼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준비된 마음입니다. 얼마나 갈급한 마음인가,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인가, 얼마나 순종하는 마음인가...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자, 화평케 하는자,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를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살 때 그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으로 준비된 자들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기도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진실합니다. 주기도문은 내용 이전에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준비되어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는 그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로 증명됩니다. 주기도문은 이렇게 기도의 깊은 본질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내용을 잘 묵상해 보면 거기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가 더 명확하게 나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09-1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회심한 삭개오’(눅 19:1~10)
    여리고에는 삭개오라는 부자 세리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직업이 새리장인 삭개오를 죄인 이라고 했습니다.(눅19:6절) 그 당시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로마에 파견된 총독의 주된 임무는 유대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는 일이었습니다. 총독은 세금을 걷어 들이는 사람을 지역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주민을 뽑아서 위임을 해서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세금을 걷게 했습니다. 그들이 세리입니다. 세리장은 세리를 고용해서 세금 징수권을 주는 사람입니다. 세리장이 세리를 고용할 때에는 얼마만큼의 세금을 걷어서 주겠다는 입찰을 거치는 데 가장 높은 금액을 쓴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줍니다. 세금 징수권을 따낸 사람은 자기몫을 더 챙겨야 했기 때문에 입찰한 금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했습니다.(이스라엘 따라걷기) 세리는 규정된 금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하니 여러 가지 각종 명목을 끌어 붙여서 세금을 걷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세리장과 세리는 주민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당시에 세리는 동족들에게 로마인 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는 욕을 먹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었으면 예수님 당시의 죄인을 세리와 창녀라고 했는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삭개오는 어려운 시기에 살아보려고 바둥거린 것인데... 동족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신세가 되어 그들 속에 함께 살고 있으니 그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마음은 더욱 편지 않았겠지요, 부자여도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를 받으면서 소외되어 살다보니 사는 기쁨이 없었겠지요, 마음으로부터 올라오는 죄책감과 외로움으로 갈급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신 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갈급한 마음에 얼마나 주님을 만나고 싶었으면 뽕나무에 올라갔을까요? 오직 예수님을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김없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묵어야 하겠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눅 19:7)” 무리들이 수군거립니다. 율법에서는 죄와 정결을 철저하게 구분해서 공동체에서 제거하여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돌로 쳐서 죽이는 죄인도 있습니다. (신 21:21) 그러니 죄인과는 당연히 가까지 하지 않는 걸로 알았겠지요,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교제하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런 못된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했습니다.(눅 19:6)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빛이 삭개오 안의 어두움에 비추이니 어둠속에 숨겨졌던 자기안의 모든 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라 잃고 근근이 살아가는 같은 민족에게 못할 짓을 했구나. 이웃의 아픔과 상처를 후비면서 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했구나.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임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갑자기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삭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칩니다. “주님,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우리민족을 위해서 쓰겠습니다.” 아, 이것은 율법을 다 지킨 부자 청년도 못했던 일입니다. (눅 18:22) 할렐루야! “주님, 내가 누구 것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출 22:1)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는 삭개오가 그동안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자기의 욕심에 묶여있던 어둠의 결박이 풀려납니다. 삭개오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아! 이제는 살 것 같습니다. 하늘도 나무도 바람도 꽃도 이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웠던가?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의 떠들고 우는 소리가 이렇게도 사랑스러웠던가? 나를 미워하던 이웃사람들이 이리도 가슴에 저미도록 측은 했던가? 삭개오는 구원받았습니다. 못쓸 인간 삭개오, 그도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구원받은 삭개오를 보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 칼럼
    • WAIC 칼럼
    2019-09-09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거룩한 예배’(레 10:1~11)
    사람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탁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머리가 좋아서? 직립보행이라서? 사람은 모든 생명체 중에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고전 15:49) 사람이 하나님과 만나서 연합하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은 어느 피조물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고전 15:41) 그것이 가장 탁월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러 내려오십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러 오시는 장소인데 예배를 드릴 때 오십니다.(레 9:4)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그 하나님을 감당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을 만나는 방법을 아주 자세하고 세밀하게 하나 하나 모세에게 지시했습니다. 하나라도 잘못 전달되면 큰일 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자기가 들은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아론은 하나도 빠뜨지 않고 그대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옮깁니다. 내 대신 죽어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오는 방법들은 그중에서 하나라도 잘못 전달되거나 그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거룩하심 앞에서 소멸되어 버립니다. (레 10:1~2)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감히 설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신 대로 하면 안전하겠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레 9:6) 그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그때 나타나신 여호와의 불의 영광 앞에서 사람들은 감당 할 수 없어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묻고 엎드렸습니다. (레 9:24) 거룩하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거룩하심과 영광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십니다. 주님을 경외하면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통해서 거룩하심에 흡수될 때 그분의 영광이 되고 주님을 멸시할 때 그 거룩하심에 부딪쳐서 소멸됩니다. 거룩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 맘대로 내편할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그 말씀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영광의 불 앞에서 사람들은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을 온몸으로 느꼈고 또 그분이 임재 하실 때 심판의 불 앞에서 죽었습니다. (레 9:24, 10:2) 레위기의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거룩하고 속된 것이며 무엇이 정하고 부정한 것인가를 분별하게 됩니다. (레 10:10)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이며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결한 것입니다. 부정한 것은 가증한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에서 변질된 기형입니다. (레 11:10)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가증한 것을 먹는 것 조차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이라고 비뚤어지거나 오염된 것은 그 존재 앞에 설 수 조차 없는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완전무결하신 하나님, 예수님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혜입니다. 어린양이 재물이 되셔서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행 10:12~15) 그런 특혜를 받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겠지요, 거룩하고 정한 것이 아니면 천국 문에 들어가지 못합니다.(고전 6:9~10) 그것이 정당하지 않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구별해서 타협하지 않고, 받은 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구원이고 그것을 깨는 것이 심판입니다. 이것은 이미 폭로된 예언이며 비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구원은 믿음의 최후 목표입니다.(벧전 1:9)
    • 칼럼
    • WAIC 칼럼
    2019-09-02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시대의 분별’(롬 1:18~27)
    이 시대를 표현하는 것은 문화와 사상인데 말씀이 진리이므로 말씀으로 문화와 사상을 읽으면서 시대를 분별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땅을 망하게 하는 가장 큰 대적 중의 하나가 사상으로 다가오는 동성애라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성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면서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창 1:27)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이외의 다른 성은 없는데 게이나 트렌스 젠더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온 천지 만물 중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지 않으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에서 변질된 것은 있습니다. 창조된 천사가 변질되어 타락한 천사가 되었습니다.(사 14장, 계12장 참고),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만드신 기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창조된 남성과 여성에서 변질된 성이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 젠더....입니다.하나님이 제3의 성이나 양성을 만드신 기록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런 것을 만드실 분이 절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의 창조에서 이런 변질된 것들이 나왔을까요? 인류 중에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 이겠지요 (롬 1:18)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알기는 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어두움에 사로잡혀 묶여 있으니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설득이 안됩니다. 마음에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없고 진리를 모르는 지혜와 지식은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지혜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장 어리석은 부류들입니다. (롬 1:22) 얼마나 어리석으면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과 썩어질 우상의 자리를 바꾸어 놓겠습니까? (롬 1:23) 그런 이들을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시니 자기들의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갈 데 까지 가서 선을 넘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롬 1:24) 그 결과로 여자들은 정상적으로 쓸 것을 비정상적으로 바꾸었고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버리고 정욕에 불타서 남자끼리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것입니다.(롬 1:26~27) 동성애의 출처는 이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린 부류들의 비정상적인 성욕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 타고난 것으로 합리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성애는 정체를 알고 깊이 들어가 보면 음란하고 타락한 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래 주신 성은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 하나만 주셨습니다. 온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과만 몸이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영혼이 하나가 되는 것인데 많은 사람과 한 몸이 되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전 6:16~17) 그렇게 한 몸이 된 부부에게 하나님이 친히 증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많이 주시지 않고 하나만을 주신 이유는 거룩한 자녀를 만들어 하나님 나라의 대를 이어가라는 것입니다. (말 2:14~15) 원래의 성은 이렇게 거룩한 것입니다. 자기의 쾌락과 일시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주셨다면 간통에 대해서 죽이라는 명령은 너무 가혹하겠지요, (신22:22) 그런데 이런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고 선을 넘다 못해 동성과 양성의 경계를 지났습니다. 창조주의 자리를 넘어서 자기가 스스로 성을 선택하거나 성의 구별이 없는 이 사상이 도대체 어디로 부터 나왔을까요? 창조된 천사의 변질된 마귀에게서가 아니면 이런 것들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적인 전쟁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동성애보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비정상이 정상이 됩니다.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08-26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창 11:1~9)
    시날 평지에 사람들이 모여 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인류 중에 탁월한 무리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자들입니다. 무엇이든 못할 게 없을 것 같은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자 우리가 이 땅 위에서는 최고가 되었으니 더 높이 올라가자. 하늘까지···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자” 그들은 자기들의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뛰어난 사람들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이 없으면 모든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가장 미련한 짓을 합니다.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다니.... (롬 1:22~23)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가장 탁월한 인류가 가장 미련한 짓을 합니다. 정말 지혜가 무엇이고 정말 미련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탁월한 부류들은 자기들이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진리를 거부하다가 아예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진리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걸 모르고 열심히 열심히 자기의 탁월한 능력으로 성을 쌓으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을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지혜는 본질을 알아야 뚫어집니다. 본질이 막힌 지식은 어리석은 것이지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가장 미련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거창하게 프로젝트를 세우고 시작해도 지존자께서 언어 하나만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면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창11:8) 그렇게 온 땅으로 흩어져 나간 인류의 가장 똑똑하지만 미련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탁월함으로 왕이 됩니다. “가장 높은 구름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로다(사 14:14)” 하나님은 그 무리들을 마귀와 동일시 하시며 심판의 대상으로 삼으십니다.(사 24:21) 아직도 가장 높은 자리의 열망을 가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지만 그들이 열망하는 그 자리는 결코 차지 할 수 없습니다. 어찌 창조주를 밀치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망상이 어리석음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망상으로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해진 마음은 화를 불러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의도적으로 싫어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진리의 기준이 없으니 육체의 욕망대로 살아가다 죄를 짓고 사형당합니다.(롬 1:28~32) 그걸 모르니 인류의 가장 탁월한 부류들이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지 않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대로 자기 역할을 다 하지 못한 피조물들의 심판날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날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의 심판자가 되십니다. 온 천하를 이끌고 군림하는 가장 똑똑하지만 미련한 부류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탁월해 보이는 그들의 매력에 속아서 모두 그들의 멸망으로 들어가면서 세상은 점점 그 영향력 아래에서 운영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생존 마저 위험해질 그때 교회는 존재감인 거룩함으로 버텨내야 합니다.(계13:17) 치열한 영적전쟁입니다. 반드시 이겨야 사는 전쟁입니다. 교회는 마지막 시간을 뚫고 거룩으로 걸러져서 승리하는 무리들입니다.(계7:9~10)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4)” 거룩한 교회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08-21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죽은 사람의 부활’(요11:1~44, 고전 15장)
    예수님 믿는 가장 큰 가치는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영원한 생명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베다니에 살던 병든 나사로가 위독해서 두 여동생은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합니다. 빨리 오셔서 우리 오빠의 병을 고쳐주세요 예수님!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요 11:4) 그런데 예수님이 이틀을 지체하시는 바람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틀린 것인가?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사로가 자고 있으니 가서 깨우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부활생명을 가진 사람의 죽음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영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생물학적인 생명을 받았습니다. 부활생명은 생물학적인 생명과 다릅니다. 그래서 죽음도 생물학적인 죽음과 진짜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은 완전한 끝이며 절망입니다. 죽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진짜 죽음은 지옥입니다. 영원의 관점으로 보면 생물학적인 죽음은 다 끝난 것이 아니라 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변화를 지나 새로운 시작이 있고 더 큰 소망이 다가 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는 죽음이 자는 것이며 깨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요11:11, 14) 그래서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생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십니다. 부활생명은 생명의 근본이신 예수님 이십니다. (요11:25)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부활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은 성도는 듣고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 11:43~44)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믿고 소망합니다.(요 5:29) 사람들은 죽었던 나사로의 시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부활생명을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날 하나님의 생명이 육체와 분리되시면서 떨어져 나오실 때 그 부활생명의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었던 땅이 흔들리면서 바위가 터지고 그 주변일대의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의 육체가 나사로처럼 일어나서 성으로 걸어 들어왔던 역사적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7:53) 마지막 날 부활생명을 받은 성도들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몸으로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그때는 어떤 몸입니까?(고전 15:35) 생물학적인 죽음은 몸과 영혼이 분리 되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을 받은 영혼은 예수님이 부르실 때 까지 잡니다.(요 5:28) 그러면 몸은 어떤가요? 생물학적인 몸은 나흘이 지나면 썩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썩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하지 않을 썩을 것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고전 15:50) 못 들어 가는 게 당연하지요. 창조주의 창조원리는 모든 형체를 먼저 주신 게 아니라 종자(씨)를 주셔서 그 종자가 썩고 죽어야 형체가 나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창1:11~12) 사람은 물리적인 몸을 종자로 받았습니다. 그 몸을 심으면 썩고 죽어서 다시 신령한 몸으로 납니다.(고전 15:43~44) 신령한 몸은 이 원리로 해서 만물이 순종하여 반응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됩니다.(빌 3:21) 하늘의 시민권자 들은 하늘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을 그렇게 받게 됩니다. 생물학적인 몸들이 종자가 되어 썩어서 죽고 신령한 몸들이 나올 때 비로소 죽음은 완전히 멸망한 사실이 확증됩니다. 더 이상 죽음과 죽음에 속한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계21:4) 성도는 죽음을 향해서 당당하게 소리쳐 따져 묻습니다.(고전 15:55) 죽음아 어디에 네 승리가 있느냐? 죽음아 네가 타겟으로 삼는 죄가 이제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가 소멸되어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를 받은 자들의 당당한 외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받아서 가지고 있는 영원한 부활생명입니다. 부활생명을 가진 성도가 이기지 못할 육체의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영원한 부활생명의 눈으로 보면 이 땅의 일이 아무리 커도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진짜 죽음은 절망이며 지옥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08-1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시편 114편)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것입니다. 여호와는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에 임재 하십니다.(시114:2)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다스리는 그분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탁월하며 거룩한 나라인지 이것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합니다. 왜 여호와의 백성이 이스라엘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 중에서 자기 것으로 한 부류를 택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모아서 자기 민족으로 만드신 것은 그분의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택하신 이스라엘을 그분의 이름을 걸고 지키십니다.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보호를 받았는지 시편기자가 만방에 드러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계획을 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직접 데리고 가나안으로 나가십니다. 그 길에 홍해 바다의 물들이 자기 백성의 무리를 데리고 나오시는 여호와를 보았습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기세에 눌려 그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 깊음 속에서 진동하면서 도망갔습니다.(시114:3) 그곳에 모세의 지팡이만 보이고 주님의 발자취는 보이지 않았지만 누가 여호와의 권세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광야를 지나 가나안땅을 앞에 두고 요단강 앞에 섰을 때 요단의 물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면서 물러가서 한곳에 쌓여 섰습니다.(시114:3) 그곳에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자국만 보였지만 만물은 그곳에서 여호와의 발자취를 보았습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산들은 뛰며 찬양합니다.(시 114:4) 왜 바다의 물들이 여호와 앞에서 도망하고 물러갑니까?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 질 때 온 천지 만물은 그분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순종하여 협력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그분의 뜻을 이 땅위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홍해에도 요단에도 물들이 도망가고 물러간 그 자리에는 사람의 발자국만 보였지만 땅은 여호와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그 일 앞에서 만물은 두려워 떨며 경배합니다.(시 114;7 광야에서는 반석도 이스라엘을 데리고 가시는 여호와를 보고 경외함으로 그 앞에서 물이 있는 못으로 변합니다.(시 114:8) 반석이 순종하여 물이 있는 연못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 앞에서 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특별한 보호를 받으면서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중심에 주인공으로 서 있었습니다. 주인공 이스라엘을 중심에 두고 물들은 여호와께 순종함으로 기적을 일으키면서 합력하기도 하고 산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뛰놉니다. 이스라엘이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앞으로 나아갈 때 그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때문에 실패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계획이 실패했을까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교회로 대치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을 볼 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택하신 이스라엘은 결코 멸망하지도 버림받지도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실패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명철의 부르심으로 마지막 때에 교회를 자기 것으로 부르셔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롬 11:3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교회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 되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스라엘이 특별한 보호하심을 받았던 것 같은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홍해와 요단의 물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합력했던 것처럼 만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에 합력하게 될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19-08-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