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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의 이름은…
    <창세기>를 무대로 활동하는 족장들에게 있어 강을 건넌다는 노릇은 오늘날 우리가 교량을 이용해서 쉽게 강을 건너버리는 것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요단강을 건넘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는 일이었고, 동양권에서의 황천 또한 같은 개념의 경계선이었던 것이다. 건널 강이 깊지도 넓지도 않아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쉬 건널 수 있는 강이어도, 건너에서 발붙여 사는 족속은 건너오는 자들에게 동반자도 될 수 있고 대적자도 될 수 있기에 불안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그들 선주민이 섬기는 신들은 그 결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터라, 두려워하며 강을 건너는 이가 초자연적 존재와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으리라. 야곱은 홀로 얍복 나루에 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딸린 식구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미리 건너보내고 난 후여서, 나름대로 도강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한숨 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 야곱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타자를 맞잡고 씨름판을 벌인다. 끈질긴 야곱답게.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다. ‘야곱입니다.”“야곱”이 어떤 이름이던가? 그의 탄생기록을 더듬어본다.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야곱”은 히브리 고유의 이름은 아니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그 본래의 뜻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였고. “발뒤꿈치“를 가리키는 ”아아케브”나 “앞지르다”라는 뜻의 “야야코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소견. 그럼에도 <창세기>는 구태여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고 명시한다. 고대 셈족은 조상을 끔찍이 존중하는 족속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조상의 이름을 “발뒤꿈치”와 같은 상스럽지 못한 단어로 나타낸 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터.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그럴듯한 해석으로 상징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을 터인데도 말이다. 설사 <창세기>의 기록대로, 아우가 형의 발꿈치를 잡은 채로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쪽으로 해석의 가닥을 잡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인데도 말이다. 히브리인이 당시 오리엔트 세계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해석을 물리치고,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지독한 “야곱”을 고집한 데에는 그들 나름의 절실한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의 “야곱”, “악착같은 야곱”은 그 강인한 정신으로 해서 수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한 족속의 시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야곱은 그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울부짖은 것은 그 정체성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침묵은 바로 그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신뢰요 사랑이 아니었던가. 정체성은 겸손과 같은 미덕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정체성이 확립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겸손은 미덕이 될 수 있는 것. 그러기에 이름은 다른 누구의 이름으로 대신할 수 없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라는 것은 겉모양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지 않는가. 너의 본질을 바꾸라는 말씀이다. 지금까지는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늘어지는 악착한 근성으로 목숨을 이어오고 종족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나 하나님과 겨룰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왜 인간이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싸움에서 엉덩이뼈를 다친 것은 야곱이었지만 정작 진 것은 초월자였다. 너희가 나와 겨루어주면 나는 언제든지 져줄 수 있다는 뜻일까. 내가 왜 너희에게 져주지 않을까보냐! 나는 너희에게 이기기 위해서 너희의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너희에게 지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너희를 너희 되게 하고자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았거늘...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쩔뚝거리며 걸어가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아니던가. 그 실루엣은 한 해를 마감하며 한국의 교회들이 만들어야할 실루엣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1-12
  • 중보 기도
    중국 선교사로 활동한 한 여선교사가 중보기도에 대하여 이런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교활동 당시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그녀가 거주하던 작은 마을에도 공산군이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감금된 채 식량과 의료 혜택이 끊기고 우편물마저 차단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도움만을 바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선교사들을 억압하고 제한했던 많은 규제와 제한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식량과 의료혜택이 재개되고 공산군들도 선교사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도 허락되었다.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한참 후 그들은 오하이오에 있는 한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 사랑하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며칠 밤을 세워가며 철야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하이오의 교인들이 밤을 세워가며 기도할 때가 중국에서는 아침이었으며 바로 그때부터 선교사들의 모든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하이오의 교인들이 선교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했듯 지금 이 땅의 성도들도 민족을 위한 중보 기도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보자의 기도를 생각해 보자. 중보자란 쉽게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로 분리된 존재들을 연결시켜 주거나 조정해 주는 것을 말 한다. 한 예로 공인 중개사는 부동산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을 연결해 준다. 서로의 이해가 엇갈릴 때는 공정한 입장에서 서로 유익이 되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하찮게 보이지만 참 중요한 일이다. 중개사가 없다면 파는 자와 사는 자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공인 중개사만이 할 수 있다. 중보기도란 전능하신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연결해 주고 부탁드리는 일이다. 즉 누군가에게 잘못과 실수가 있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대신 간구하여 얻게 해주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세를 얻은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중보자’(Mediatdr)란 범죄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단절 관계를 이어주는 이를 가리킨다. 물론 성경은 참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고 선언하고 있다.(딤전2:5) 모든 그리스도인도 완전치는 않지만 일면 중보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창18:22~33), 모세(민14:11~20) 욥(욥42:7~9), 아모스(암7:1~6) 등 중보자의 역할을 잘 감당했던 신앙 위인들이 많다. 이러한 기도의 능력을 알았기에 바울은 중보 기도를 권면하였다.(딤전2:1~2, 엡6:18, 살후3:1) 이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에 직면한 악한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려 할 때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호소할 중보자를 요구 하신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불신자들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야한다. 멸망으로 치닫는 어두운 이 세상의 죄악을 사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는 하나님 사랑과 공의를 선포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강력히 선포하여 그들로 죄악에서 돌이키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의 때에 죄악 된 세상과 멸망당할 불신자들을 위해 눈물 흘려 중보하는 기도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 고로 중보기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자 특권인 중보 기도에 열심을 냄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간구한다.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시지 않으실 것이다. 혹시 기도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간구라면 돌이켜야 한다. 먼저 이웃을 위하여 간구해야한다. 믿음이 연약한 이웃을 위해, 육신이 병들거나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참된 기도는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시키지만 잘못된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자신까지도 망하게 한다. 종교 개혁의 선두 마차 마틴 루터는 ‘남을 위해 드리는 중보 기도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이기주의의 속임에서부터 우리를 정화시켜 줄 수 있다’고 말했고 또 기도의 거성 에즈라 바운즈도 ‘타인을 위해 중보 기도한다는 것은 고귀한 영혼과 순결하고 고상한 동기와 이타적인 마음과 열렬한 정신과 신성한 기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로 서로를 위한 기도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귀중한 방편이 됨은 물론이다. 우리가 주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깊이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성도들은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뿐만 아니라 또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중보기도에는 하나님의 역사함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의 부자나 권력자들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만이 할 수 있다.
    • 칼럼
    • 목회자
    2016-01-12
  • 새해의 각오
    구약에서 히브리어의 ‘새로움’이라는 말은 ‘하다쉬’인데, 이는 새롭게 하다. “부활하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이 시편 51:10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여 정직한 마음을 창조 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고백은 새롭게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역사는 언제나 준비된 자의 몫이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그것은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고 한 해를 출발 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씀과 같이 새로운 2016년은 분명 역사의 새로운 부대입니다. 2016년의 새 부대에 들어 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각오로 열어 간다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져 봅니다.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옛 사람에게서 새 사람으로의 전환이며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이고 나를 위한 삶에서 너의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할 것입니다. 새해 정초를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눅 13:6)를 다시 묵상 하여 봅니다.지방에서 목회 할 때 어느 교우가 무화과 씨를 선물해서 씨앗을 교회 차고 뒤에 심었더니 싹이 나오는데 밑에서 부터 여러 가지가 뻗어 나오더니 3년 쯤 되니 크지도 않은 투박한 나무에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무화과의 맛을 알고 속성을 알게 되었습니다.장소를 가릴 것 없이 아무데나 심기만 하면 잘 자라는 볼품없는 나무가 포도원에 심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주인의 파격적인 은총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무화과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뚜렷한 재능도 없었던 자신을 주의 종 삼으시고 구비구비마다 사랑과 은총으로 돌아보시고 함께 하신 은총에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신에게 이제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씀과 같이 또 한 번의 2016년은 새로운 부대를 허락하셨습니다.2016년의 새 부대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각오로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는데 그 공간에 무엇을 담을까? 그것은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의 전환하라는 명령이며, 육적인 생활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하라는 통보이며, 자아를 위한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의 으로의 전환하라는 의미로 다가 옵니다.목회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주인과 과원 지기의 정성과 관심에 비하면 내가 맺은 열매는 빈약하였고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것이라도 은총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들인가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주인은 3년간 열매를 위하여 거름을 주고 북돋아 주고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붓고 열매만을 기다렸는데 시간이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또 내년도 있다고 생각 하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도 미루어 놓은 채 어느덧 황금 같은 세월이 흘러가 버린 아쉬움만 남습니다.세계 제일의 하와이 촌을 건설한 키이젤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에 “나의 성공은 시간 활용을 잘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5시간의 잠자는 시간도 아이디어의 시간 이라고 하면서 종이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그 생각들을 노트에 적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실행해 갔다고 합니다. 부지런한 청지기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벌써 2015년도 을 보내고 21016년의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키이젤 처럼 거창한 하와이는 아니더라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옵소서. 한대로 정의가 새파랗게 살아 있어 ‘유전 무전’ ‘무전 유죄’로 고통 받지 않는 나라, 속담에서 같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나라, 건설에 쓰임 받고자 소박하지만 절실한 소원을 꿈꾸어 봅니다.역사의 어둠에는 항상 개인주의, 이기주의적인 사욕이 설치는 시대였습니다. 반대로 역사의 발전과 공동체의 기쁨에는 이타주의, 공리주의적인 정신이 기둥처럼 세워져 있었습니다.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주인은 올해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거름을 주고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하지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올해도 이 말씀으로 마지막 주시는 기회라 믿고 시간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해 볼까 다짐해 봅니다. 주인의 배려와 과원지기의 간청으로 또 한해를 주셨으니 주인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결심 떠오릅니다. 끝으로 정신문명이 물질, 문명을 이끌어가는 바른 가치관을 세워가며 사회 풍토를 쇄신하고 도덕적 기풍을 크게 진작 시키는 일에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회가 일어나 새일을 감당하기를 소원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모든 역량을 한데 모아 구세재민(救世載民)의 청풍을 일으키는 새해 새 각오를 다짐해 봅니다.주여! 이런 일들이 금년에 안에 반드시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1-12
  • 숲길을 걸으며
    지난 주는 오래간 만에 종로에서 열리는 문학인 행사에 갔다가 청개천의 크리스마스 테마 파크 거리를 걸어 보았다. 낮에 보아도 그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섬세한 모습들이 개천 숲을 걷는 이들을 환영하듯 즐거운 개천과 숲의 걸음이었다.청개천의 길을 걷다 옛 서점을 돌아보았다. 학창 때는 한 주간이 멀다하고 찾았던 곳, 구하려 하던 서적을 만나면 사랑하는 자를 만난 듯 책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던 추억의 장소를 물어물어 찾았다.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그때의 모습은 거의 경제 논리에 의해 일반 상가로 대치되었고 몇 서점만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옛 추억을 더듬어 보며 몇 군데를 둘러보다가 어느 서점에 들르니 좁은 공간에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한눈에 들어와 접어든 책이 있었다. 책 내용을 살펴보니 글과 사진을 함께 어울려 소담스럽게 쓴 것으로 제목은 ‘숲’이었다.글의 내용도 석류 알처럼 영롱하여 글쓴이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책을 구해 읽으면서 어느 새 숲속에 기대고 있는 내가 됐다. 목양의 현장은 마치 숲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별별 나무들이 제 나름대로 서있는 곳 각각 제 목소리로 산바람을 휘감는 것이 그렇고 높은 나무 작은 나무 이파리 떡갈나무 참빗 같은 침엽수 등 천태만상 이다. 숲은 속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느림’과 ‘비움의’ 교훈을 품는 삶의 수원지와 같다.숲은 편리함이나 안락함은 없는 대신 순결함과 침묵의 훈계를 껴안고 있다. 은퇴가 머지않은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나의 목양은 겨우 나무 가지 하나 붙들고 씨름하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눈먼 목회였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숲만 바라보고 씨를 뿌리는 목자가 아니었나 본다. 밭을 일구는 일에는 일 년이 걸리지만 씨앗을 뿌리는 일은 하루면 충분하다. 밭을 일구는 데는 많은 땀과 수고가 필요 하지만 씨앗을 뿌릴때는 하루의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뿌리는데도 절차가 있는 법, 밭이 돌밭인지 부드러운 흙 밭인지 확인한 후에 씨앗을 심어야 초록색 잎과 풍성한 열매를 를 기대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 할진데 사람들은 밭을 일구는 데는 관심이 적고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구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았았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와 좌절 아픔으로 점철된 목회 여정 이제 생각하니 씨앗에서 싹이 트지 않은 것은 종자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키워갈 밭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임을 이제야 조금은 깨닫게 된다. 밭을 먼저 일구고 씨를 뿌려야 하는 법 내 대지에서 자라는 이웃은 나의 열매이고 내 농토 에서 자라는 엉겅퀴와 잡초는 계속 일구어 가야 할 소중한 생명임을 늦게라도 깨닫게 되니 다행이다. 밭은 영원하지만 좋은 씨를 구하는 것이나 밭은 주인이지만 씨앗은 손님임을 모르거나 치 나치고 숲만 소중히 여겨 왔던가? 한국 교회도 숲만 찾아 가지 말고 밭을 일구어야 하지 않겠나? 믿음의 선조들이 일구어 놓은 밭에 열매를 즐기지 말고 새로 옥토를 만들어 야하지 않겠나?씨앗을 뿌리려는 다툼과 경쟁은 넘치지만 그것을 심은 밭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단순하고 정직한 밭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자기 터라 주장하는 소리는 커가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 속에서 모든 주장을 받 아 들이는 침묵의 밭이 되려는 노력은 보기가 힘든 것 같다. 한 겨울 동안 편안한 휴식을 취하였으니 내 이웃의 아픔에 우리의 사랑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밭이 되어 지기를 소원해 본다.밭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비를 마시고 비옥해 지게 된다. 나의 마음 밭에 숲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며 향기를 피어나는 새해를 꿈꾸어 본다. 또한 좋은 터를 일구어 좋은 열매를 제공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5-12-30
  • (정신재)목련꽃
    목련꽃 임 원 재바스락바스락책갈피 속에서엘리어트의 4월이알몸으로 일어서는패러독스차라리비릿한 살냄새 역겨워속옷까지 벗어던진동토의 지심 외발로 서서그날의 그리움에환호하는비로소개벽하는 날속살 들어낸순백의 꽃잎으로볼 비비며사랑으로 부활하라.“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막 11:15-18).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우리 안이 더러우면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그 안에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십시오.주여! 내 안이 더러웠사오나 주님이 깨끗하게 하셨사오니,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사랑의 꽃이 피게 하소서. 성령이 함께 하셔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소서. 주님의 생명수로 사랑이 풍성하게 자라도록 하소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칼럼
    • 기독시선
    2015-12-30
  • 임현수 목사의 석방을 위한 기도
    임현수 목사가 평양 당국에 의해 구금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반공화국특대형 범죄행위“라는 죄명과 함께 종신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필자가 아는 임현수 목사는 선교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분이셨다. 임 목사는 CCC 라는 선교기관에 간사님으로서 함께 활동하셨고, 필자도 공부를 했던 CCC의 교육 기관인 국제신학대학원(International School of Theology)을 마치고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캐나다에 가셔서 교회사역을 하였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방학 때만 되면 캐나다에서 학생들을 대리고 단기선교차 필리핀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남북이 해빙 무드로 돌아선 이후부터는 북한을 주요 선교지로 택함과 함께 식량과 필수품 그리고 선교비를 들고 북한 자주 드나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남한의 교회들이 우선순위로 해야 할 동포 선교를 임 목사님이 앞장서서 감당했다고 본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 목사는 북한의 암울한 감옥 에서 사투를 벌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의 각종 언론에서 임현수 목사에 대해 보도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캐나다 정부에서는 앞서 북한이 지난 16일 10개월째 억류한 임 목사에게 국가전복음모죄를 씌워 종신노역형을 선고한 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연달아 우려의 뜻을 밝혔다. 이러한 캐나다의 생각에 대해서 북한은 12월 22일 임현수 목사에 대한 북한 최고재판소의 종신노역형 판결을 캐나다 정부가 비판한 데 대해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반발했다고 한다. 또 “조사 과정에서는 영사 접촉을 불허했지만 조사 사업이 끝난 다음 특례적으로 캐나다 대표단을 초청해 재판에 방청으로 참가시키고 영사 접촉도 실현시켜줬다”며 “캐나다 정부는 이에 대해 걸고들 아무런 법률적 명분도 없다”고 주장했다.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자기 공민이 저지른 악랄한 범죄행위로 우리 앞에 죄를 진 처지에 놓여 있는 캐나다 정부가 거꾸로 우리의 정정당당한 사법조치를 놓고 ‘우려’요 ‘국제법 위반’이요 하면서 시비질해 나서는데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북한 대변인은 “반공화국특대형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재발방지 조치를 취해야 할 캐나다 정부가 오히려 비호두둔하면서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우리에게 삿대질하는데 대해 절대 묵과할 수 없다”며 “캐나다 측의 부당하고 무례한 처사는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에게 종신 노역형을 선고한 것은 2년 전 미주 기도성회 등에서 있은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최근 임현수 목사에 대한 재판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4분 분량의 임 목사의 선교집회 강의 영상을 증거자료로 제시했다고 한다. 임 목사는 이 동영상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권력 장악을 못해 극악한 공포 정치를 하고 있다며 김정은 정권의 붕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소리 방송은 오늘 이 동영상은 임 목사가 지난 2013년 10월 세계선교동역네트워크의 미주 기도성회에서 한 강의 장면이라고 보도했다. 이 동영상은 주최 측 관계자의 부주의로 유튜브에 올려졌다가 임 목사 억류 보도가 나간 뒤 삭제됐다고 한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이 강의 내용과 유튜브에 오른 또 다른 교회 강의 동영상을 문제 삼아 북한이 지난 1월 말 방문한 임 목사를 구금했다”고 한다.선교는 정치적인 경계를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계를 넘을 때에 수 없이 많은 박해가 있었다. 초대교회 때에는 로마의 정치 제도 아래서 예수님을 믿고 포교 한다는 죄목으로 사자밥이 되기도 하고, 검투사의 칼날아래 목이 잘리기도 하고, 카타콤 속에서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선교의 지향점을 고백했다.엘리뇨의 현상으로 지구 전체가 추운 겨울이 없어졌다고들 한다. 사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북한에 억류 중인 임현수 목사의 겨울은 이곳처럼 따뜻한 곳이 아니다. 성탄과 함께 임현수 목사도 석방되어 함께 새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2-30
  • 목걸이에 걸린 행복 혹은 진실- 모파상의 다시 읽기
    한 해를 마감하며,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를 떠올리게 한 것은 중국 작가 노신(魯迅)의 어록 때문. “사람들은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점차 받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그렇기 때문에 영락없이 선인들의 과오를 그대로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노신의 생각. 그러나 정작 우리의 현실은 손쉽게 그런 기록을 남길 수도 없거니와 남겨진 것도 탐탁스럽지가 않다. “꿩 대신 닭”이라 했던가, <목걸이>가 그러한 아쉬움을 채워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평범한 공무원의 가정에 태어나서 비슷한 처지의 남편을 만난 여주인공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남편이 근무하고 있는 교육부의 장관이 베푸는 야회초청장을 받은 것이 비극의 사단이 되는데... ‘스스로 매력적인 미인이라 여기고 있는 그녀에게는 남달리 보석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야회에 입고 갈 드레스도 장식품도 없었다. 드레스는 남편이 꿍쳐 두었던 돈으로 마련할 수 있었으나 정작 그 드레스에 어울릴만한 보석이 문제였다. 마침 그녀가 수도원 시절에 함께였던 부자 친구에게서 목걸이를 빌릴 수 있어서 무도회에 데뷔할 수 있게 된 그녀는 많은 시선을 모으는 스타가 되어 멋진 밤을 보낼 수 있게 된다. 파티가 파하자, 멋지게 차려 입은 부인들을 의식해서 시간차를 두고 초라한 마차로 아파트로 돌아온다. 좁은 계단을 올라 옷을 갈아입으려는 참에야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는데. 어쩔 수 없이 고급 보석상에서 비슷한 물건을 구해서 친구에게 돌려주기는 했지만, 그 가격은 무려 4만 프랑이나 되었다. 시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을 팔아 대금의 일부를 지불하지만, 나머지는 빚이 되어 부부의 생활을 압박했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꼬박 10년이 걸렸고. 어느 일요일, 우연히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부자 친구를 만난다. ‘안녕, 잔느’ 그녀의 인사에 상대방은 옛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이 변해있었던 것이다. ‘나 마틸다 르아젤이야.’ 그제야 알아보는 친구에게 주인공은 지난 날의 일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너는 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주었단 말이지?’ ‘그래, 너는 눈치 채지 못했지? 똑같은 것이었거든.’ 그녀는 용케도 친구의 눈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을 우쭐해 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란 포레스트에 부인이 친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불쌍하게도 마틸다! 내 것은 가짜였어. 기껏 5백 프랑 짜리였는데...’ 작가 모파상은 이야기의 여러 곳에 많은 암시를 숨겨놓고 있다. 주인공의 남편을 하필이면 교육부의 직원으로 설정한 것도 그렇지만, 아름답게 태어난 여인은 그 매력으로 해서 우아한 생활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암시에 더해, 이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 분함과 허영심이 엉켜서 사물을 판단할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암시들을 삽입한다. 부자 친구라 할지라도, 4만 프랑이나 값이 나가는 목걸이를 선듯 빌려 줄 수는 없을 것이란 당연한 판단도, 목걸이를 돌려주었을 때 제 물건이 맞는지를 확인하지 도 않는 부자친구의 몸짓은 혹시나 해볼 기회였을 터이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던 것이다. “야회복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보석 따위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은 그런 것들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만 가진다면, 얼마든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혹하게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터인데.”하는 것이 오로지 주인공의 생각이었다.우리에게는 <목걸이>로 알려지고 있는 이 작품의 원제는 <La parure>. “장식”, 액세서리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작자는 왜 제목을 “목걸이(Un collier)”대신 “장식(parure)”으로 했을까. parure 원래의 의미 “장식”을 암시하려한 것은 아닐까. “장식”이란 “진실의 모습”을 감추는 짓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을. 오늘 우리의 목에 걸고 있는 “정의” “평등”을 표방하는 목걸이들은 그 가치를 변질시키는 장식이 가리고 있어 더 찬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은 목걸이를 가지게 되어, 자신의 몸을 꾸미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에 취한다. “그러나...”하는 작가의 경고는 우리가 눈여겨 읽어야할 기록이 될 수도 있으리라. 라 루슈코프의 잠언을 되씹어 본다. “행복해지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2-30
  • 성도의 세상 보기와 살기
    3세기 라틴 교부의 한 사람인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T.C. Cyprianus)는 도나투스 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도나투스, 이 세상은 포도나무 그늘 아래의 나의 정원에서 본 것과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지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이 높은 산에 올라 거친 대지를 바라본다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요. 노상강도, 바다의 해적, 군대의 싸움, 도시의 현란하고 방탕함, 원형 경기장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결투, 자기 본위의 이기심, 잔인성, 화려한 지붕 아래 있는 고통과 절망 들... 도나투스, 이 세상은 악이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한 곳이요’ 그렇다. 실로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인간의 소욕대로 이 세상은 얻을 것 많고, 갖고 싶은 것 많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 안에서 말씀의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악한 세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경계해야 할 세상은 어떤 곳인가? 세상의 본질을 보자. 우리는 세상을 두 가지 방향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된 선한 창조물이며 우리들로 하여금 누리도록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 세상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들의 다스림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이 두 관점을 적절히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것에 관점을 두고 살아간다면 장미빛 에덴동산의 환상에 싸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달려드는 마귀와 세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핍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두 번째 관점만 가진다면 늘 극단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악하다고 늘 불평하며 적대적인 태도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교회 밖의 모든 것 예컨대 하나님께서 인류 복지를 위해 일반 은총으로 주신 권력, 돈, 지식, 성 등은 다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자고 말하면 곧 세상 지식을 앞세운다고 비난하며 세상의 통치자들은 모두 사단의 하수인이라고 말 한다. 상품이나 증권이 거래되는 시장도 도둑의 소굴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곳에 가까이 해서도 안되고 또 그러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 한다. 이에 세상과 평안히 지낼 수 있는 문제들에서도 괜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세상에서 스스로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누구의 시각으로 볼 것인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나’의 시각이요. 다음은 ‘사람들’ 의 시각이며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각이다.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어떤 상항에서도 내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시각을 가진 이들은 사물이나 사건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고민 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뭐라고 할까?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 보일까? 이렇듯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반응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거나 혹 힘을 가진 사람들이 강압적으로 요구한다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절대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려면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 필자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 한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악에 대해 그 기준이 달라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악한 일을 해도 사람의 눈에만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고 하여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선행에 대해서도 그 기준이 달라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한도에서만 선행을 하려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어디서든 은밀하게 선행을 해야 한다. 고로 세상 사람들처럼 옅은 눈을 기준으로 일희일비 하는 얄팍한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한다. 소극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처럼 세상을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곧 죄악 된 세상을 미워하면서도 주 안에서 그런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12-30
  • (정신재)금일봉
    금일봉 오 운 교아련하게 떠오르는 시골 운동회본부석 텐트 앞자락 긴 끈 밑으로주렁주렁 매달려 꼬리 흔들던 찬조금동네 잔치 마당 선지국밥 대금이었을까주민 한마음 어울려 포식하던 날이었다.종종 봉투 금액으로 갈등하는 일상입이 쩍 벌어질 액수 건네주고 싶지만분수 지키려면 가늠하기 만만치 않아서순간순간 갈피 못 잡고 고민하기 일쑤다.드러내기 좋아하는 유력 인사들선한 기부금 명목 호명만 요란하며금액란을 호방하게 밝히지 못하는 속셈순수한 사랑만은 균형 감각 잃지 않았으면.“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사랑은 주님이 피 흘려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온 인류를 품에 안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였으며, 영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몸소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의 길을 열어 주었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는 의로운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처신할 수가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절제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역경도 주님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리라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심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님의 순수한 사랑을 본받지 못하고 사랑을 변질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내세우기 위하여 사랑하는 척 흉내를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시골 운동회에서 이와 같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선한 기부금 명목 호명만 요란”합니다. 그들은 “금액란을 호방하게 밝히지 못하는 속셈”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민이 하나 되는 “동네 잔치 마당”이 퇴색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사랑이 그 본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주신 우리들의 순수한 사랑이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12-19
  • 선교사의 선한 싸움
    2015년 12월이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삶의 결산을 생각하는 것은 늙어 가는 아이 탓이기도 하다. 1년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제자로서 얼마나 선한 싸움을 싸웠는가 생각해 볼 때에 그저 함량 미달의 삶을 살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럴 때 일수록 모범된 선교사의 길을 걸었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그리워진다. 디모데 전서 1장 12절부터 18절을 살펴보면 바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사도 바울은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 에게 자신이 간직한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며, 선한 것이며, 또 죄인의 괴수 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직분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며, 은혜 가운데에서 직분을 감당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믿음위에 굳게 서서 이단의 침략 속에서 자신을 기기라 라고 말하고 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을 때에 자신에게 은혜의 직분을 맡겨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9:15절에 의하면,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 이라”라고 바울이 무슨 직분을 가지고 평생에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바울 자신은 이와 같은 은혜의 직분을 받는데 합당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그에게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8:3에 의하면,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다. 그러나 변화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었다고 고백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비단 바울에게만 주는 은혜가 아니다 인류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예수님의 탄생의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마태복음 1:21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류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의한 구원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인내로써 나타나는바, 하나님의 인내가 우리를 덮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3:39절에는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 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것 이니라”라고 말씀 하시고 있다. 최근 서방 세계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IS의 준동이 이제 서서히 우리의 목도 조여오고 있음을 감지한다. 비록 무자비하고 잔악한 IS대원일지라도 복음이 필요하다. 복음만 들어가면 그들도 사도 바울처럼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다. 그 만큼 그리스도의 은혜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 이제 선교사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선한 양심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다. 선한 양심은 때로는 손해도 보고, 때로는 핍박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약해질 때면, 사탄은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밀 까불 듯이 까불기도 한다. 이때에 우리의 신앙이 매우 낙심되기 쉽다. 정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믿음은 가장 강한 하나님의 무기 이다.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일 을 할 만큼 그러한 능력 있는 자도 아니며, 자격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직분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셨다. 따라서 충성스럽게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여 복된 신앙생활을 하므로 축복을 듬뿍 받는 선교사들이 되어야 하겠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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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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