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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의 비극과 비대칭 전선
    통계에 의하면 2012년 이슬람 관련 테러그룹에 의한 총 테러 건수는 2,800건에 사망자가 17,725명이며 부상자는 15,708명이다. 이 중에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른 테러 건수는 155건이고 사망자 수는 848명, 부상자는 1,638명이다. 이슬람에 의한 테러는 해가 거듭할수록 증대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지난 11월 13일 프랑스 파리를 강타한 동시 다발 IS의 테러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IS는 이번 테러 공격으로 거대 국제행사를 앞둔 프랑스의 안보 역량과 테러 경비태세에 대한 의문이 일도록 하는 효과를 낳았다. 올랑드 대통령은 15일 터키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취소했다. 이처럼 세계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엄청난 범죄를 저질럿다. 세계는 한목소리로 IS를 규탄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두 정상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IS의 퇴치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항 하자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번 파리의 총기 만행을 일으킨 세력들을 추적한 결과 주동자 8명 중 3명이 벨기에 출신으로 드러나면서 왜 벨기에가 유럽 테러리스트들의 온상이 됐는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민일보에 의하면 ‘유럽 언론들은 우선 벨기에가 유럽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일찍부터 허용된 나라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벨기에는 이미 197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요청으로 ‘과격한 사상’인 이슬람 근본주의를 설파할 설교자들의 입국을 허용했다. 이슬람 초기 사회를 본받자는 취지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등이 신봉하는 사상이고, 이교도를 몰아내기 위한 성전(聖戰)을 정당화하고 있다. 다분히 벨기에의 이슬람교도들이 근본주의를 접하기 쉬운 환경이고, 또 이들이 과격화되는 원인으로 꼽힌다.‘고 언급하였다. 프랑스의 비극은 우리에게 IS가 가진 전쟁 형태를 짚어보게 만들고 있다. 전호진은 이를 비대칭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과거의 전쟁은 군인대 군인, 국가와 국가 그리고 전쟁터가 존재했다. 그러나 비대칭 전쟁은 적군과 아군이 싸우는데 따른 이념, 전선, 군대, 전략등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IS가 시도하고 있는 서방과의 전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첫째는 IS의 전쟁 목적은 자기 나라와 자기 부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초자연적인 전쟁으로서 알라의 세계를 위하여, 알라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 이로 보건데 테러를 통한 전쟁의 목적은 정치적 요인이 아니라 종교 이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IS의 전쟁 목적에 반하여 서방의 방어적 전선은 미국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나, 프랑스나 러시아의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둘째는 IS와 같은 테러 전쟁에 개입하는 나라들이 빨리 전쟁을 종식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들 테러리스트들은 무한정으로 끝까지 싸워서 끝장을 보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전략으로 말미암아 서방 나라들은 국내의 여론과 정치적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도중에 전선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는 서방의 군대는 정규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IS와 같은 테러리스트들은 민간이 투사들이다. 그들은 테러 훈련은 받았으나 군번도 없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다가 죽으면 보상도 없다. 다만 죽으면 이슬람 교리에 의해서 72명의 미인들이 천국에서 그들을 환영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네 번째는 테러리스트 전쟁에 참여한 서방의 군대들은 테러리스트를 색출하거나 체포하여 사살한다. 이에 반하여 IS 같은 테러리스트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다. 다섯 번째는 테러리스트들은 자기 나라 국기가 없다. IS같은 집단도 자기 나름대로 만든 국기를 상징적으로 들고 있을 뿐이다. IS는 코란을 기초로 한 이념을 상징화 한 깃발을 들고 있을 뿐이다. 반명 테러전에 참여한 서방 군인들은 자신의 국가 상징물인 국기가 어깨에 걸려 있다. 결국 프랑스의 비극은 우리나라에도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다문화정책일 것이다. 온정주의로 대별된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주목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1-20
  • 대림절(Advent)을 위하여…
    옛날, 이탈리아 피렌체에 라니에로라는 사나이가 살고 있었다. 남달리 힘이 센 그는 성품이 난폭해서 싸움이라면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아내 프란체스카도 남편의 난폭을 견디다 못해 끝내 친정으로 도망 가버리는데... 거칠고 지기 싫어하는 사나이 라니에로도 아내 사랑만은 남달랐던지, 이래저래 달래 보았으나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 주지 않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용병이 되기로 작정한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면 전리품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피렌체의 대성당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 갖다 바친다면 신앙이 깊은 아내가 돌아와 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아내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사나이는 공적이 모자란다고 여겼던지 그때 막 바람 불기 시작한 십자군 전투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슬람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그가 보상으로 예루살렘 그리스도의 성묘를 밝히고 있는 횃불에서 불씨를 얻어 자신의 등에 옮겨 붙일 수 있는 특전을 허락받게 된다. 당시 그것은 가장 소중한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사나이는 그 등불을 멀리 이탈리아까지 모셔갈 작정을 한 것이다. 동료들은 입을 모아 반대했다. “아무리 힘이 센 자네라할지라도 그 등불을 들고 가서 피렌체의 성모마리아상 앞에 바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놀려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동료들의 빈정거림에 화가치민 사나이는 오히려 절대로 불을 끄지 않고 피렌체까지 등을 가지고 가겠노라 장담하고 나선다. 예루살렘에서 피렌체까지, 그렇게 등불을 끄지 않고 옮겨가는 세상에서 드문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막상 여행은 장사 라니에로에게도 생각했던 만큼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거꾸로 말 등에 올라앉아 외투로 바람을 막으며 천천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도적을 만난다. 여느 때라면 말에서 뛰어내려 한주먹 먹이면 만사가 해결될 일이었으나 등불을 지키자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도둑이 달라는 대로 아끼던 말과 갑옷을 내주고는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고 말라빠진 말 등에 흔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놀림은 날로 심해갔다. 당장 말에서 뛰어 내려 본때를 보여주고 싶지만 등불을 지키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등불을 모셔가는 라니에로의 여행은 이어졌다. 여행을 통해서 사나이는 많은 것을 체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아주 약한 바람에도 쉬 꺼져 버릴 것 같은 가냘프기 짝이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많이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불같이 타오르는 분을 참아야 하는 것이 분하고 서글펐다. 그러나 분노와 증오로서는 그 작은 것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터득해가게 된 그는 가장 싫어했던 굴욕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마저 깨닫는다. 그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곧 꺼져버릴 것 같은 작은 등불을 지키며 한발 한발 나아가는 나그네 길을 통해서 그는 점차로 변해가고 있는 스스로를 느끼게 된다. 다툼보다는 평화를, 거침보다는 온유를, 미움보다는 용서를 소중히 여기며, 연약한 것을 돌보는 사나이로, 그는 변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등불이 남달리 우람한 한 사나이를 그렇게 바꾸어갔다는 것이 <횃불>이야기의 골자. “등불이 꺼진들 부싯돌만 있으면 곧 되살릴 수 있을 터인데...” 사나이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예루살렘의 불과 피렌체의 불이 다를 것이 무언가”하고 말할 줄도 몰랐다. 그 우직스러움이 가냘픈 등불을 그 등불 그대로 지켜올 수 있었으리라. 우직함은 어느 틈엔가 온유함으로 바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림절을 맞으며 <횃불>을 되씹는 것은 어느 틈엔가 우리에게서 없어져가고 있는 그 무엇이 아쉬워서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림절은 잃어버린 그 무엇을 되찾게 하는 계절일 지도 모르고.셀마 라겔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rl?f, 1858-1940)는 스웨덴 출신의 여성작가. 풍부한 상상력과 모성적 애정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낳았다. 청소년이 읽도록 썼다는 <닐스의 이상한 여행>이 특히 많이 알려진 것은 19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횃불>은 그녀의 <그리스도 전설 집>에서 옮겨온 것.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1-20
  • (정신재) 버리기. 9
    버리기. 9 양 왕 용그대의 명령 따라물 위를 걸어가는베드로에게바람으로 다가온무서움.끝내 물 속으로 빠져갈 때믿음이 적은 자여왜 의심하였느냐고꾸짖으며 건져 내신그대의 말씀대로무서움과 의심 버리기.이 세상의 온갖 바람과 어두움도그대의 말씀 거역하지 못하는 법.말씀으로무서움과 의심 모조리 물리치기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한 노숙자가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그 문 앞에 섰습니다. 문지기가 물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너의 지금까지의 행적 점수가 1000점이 되어야 한다. 네가 한 행적을 말해 보아라.” 노숙자는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동료들을 위해서 폐휴지를 팔아 봉사하였습니다.” “그건 50점밖에 안 된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성가대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50점이다. 아직 1000점이 되기에는 멀었다.” “청빈하고 온유하게 살았습니다.” “그것도 50점이다. 아직 모자란다.” 노숙자는 답답하고 막막하였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이제까지 공들였던 것이 허사가 될 판이었습니다. 그는 안 되겠다 싶어 마지막으로 주님께 매달렸다. “주님! 도와 주십시오. 제가 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제가 의인의 반열에 들어 의롭게 살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였습니다.” 그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제서야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바로 그거다. 그게 850점이다. 이제 들어가라.”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로지 나를 지으신 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도리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과 소금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는 기회를 주셨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시어 우리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믿음대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11-20
  • 허무주의
    쿠바에 사는 한 어부의 이야기이다. 산티아고란 이 노인은 홀아비였다. 어느 날 그는 고기를 잡기위해 멀리 멕시코만까지 갔다. 어찌된 일인지 84일이 되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드디어 ‘말린’ 이라는 물고기 한 마리를 잡게 된다. 말린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셌으며 사나웠다. 산티아고와 배는 말린에 의해 넓은 바다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그때부터 산티아고와 물고기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다음날도 물고기의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산티아고는 생고기와 고등어를 먹어가며 고독과 피곤을 이겨야 했다.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지친 물고기는 수면으로 떠올랐다. 노인은 물고기에 작살을 꽃아 배 옆에서 끌고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물고기가 흘린 피는 상어 떼를 불러들였다. 밤새도록 상어 떼와 필사의 싸움을 하면서 새벽 포구에 도착한 노인은 오직 물고기의 앙상한 뼈만 발견할 수 있었다. 지친 그는 침대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케 했으며 영화로도 제작된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소설의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지향점은 바로 ‘허무주의’ 이다. 인생은 그 어떤 목적도 없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어느 날 엽총으로 자살을 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허무주의가 문학, 음악. 사회, 경제, 종교 등에 깊이 침투하여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행사하며 기독교 진리를 왜곡 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허무주의가 우리의 청년, 청소년, 초등학생은 물론이거니와 기성세대도 심각할 정도로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할뿐더러 이 세상의 모든 삶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역동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절망의 늪에 잠겨 있는 것이 더욱 편한 것이라 생각하며 심지어 자살이라는 엄청난 죄악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 허무주의 빠지면 자아가 상실 된다 자아(Ego)란 인간의 의식적인 부분을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깨어 있는지 잠자고 있는지 알고 있다. 또한 기억력이 있으며 확실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직접 인식하고 항상 ‘나’ 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자아’ 라고 말하다. 물론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의식적인 면’ 만을 자아라고 한다.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그런데 명예, 권력, 물질, 쾌락 때문에 자아가 상실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일까?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 는 자아 상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자아 상실이란 자아 결정의 중심의 상실이며 인격 통일의 붕괴이다. 통일 될 수 없는 분열의 충동에 의한 중심적 자아의 붕괴이다. 유한한 인간이 어느 것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렇다. 인간이 물질을 포함한 피조계에 대하여 스스로 중심됨을 주장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면 결국 그 속에 예속되어 영혼 없는 물질과 같이 되어버린다. 심각한 것은 오늘 날에도 자아를 상실한 사람들이 많다. 심한 말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즉 물질, 명예, 권력, 성욕, 쾌락, 술, 도박, 게임, 인신 매매, 폭력, 이단 등으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인간의 모든 생활은 감각 기관, 호기심에 의해 끊임없이 유혹을 당한다. 그렇다고 하여 정신 나간 상태 즉 물질이나 어떤 것으로 인한 자아 상실의 상태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맛있는 생선일수록 날카로운 가시와 치명적인 독이 있는 것처럼 이 땅의 영화와 사치 역시 생선과 같다. 즉 맛있는 생선에 가시와 독이 있는 것처럼 눈에 보기 좋은 이 땅의 영화와 사치에는 고난과 애통이라는 형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를 주의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가시와 독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허무주의에 빠져 자아를 상실할까? 그것은 인생의 목적 즉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짐승처럼 맹목적으로 살면서 동물적 본능에 의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좇게 된다. 고로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짐승처럼 산다면 결국은 도살당하는 짐승처럼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생의 바른 목적을 분명히 가져야한다. 또 인생의 바른 목적을 모르고 사는 자들에게 그것을 부지런히 가르쳐할 본분과 사명이 있다. 도대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맨 초두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묻고 그 답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있다.
    • 칼럼
    • 목회자
    2015-11-20
  • 식욕과 영성
    흔히 식욕, 성욕, 명예욕을 인간의 삼대본능이라고 한다. 그중에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식욕이라 할 수 있다. 식욕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으로 식욕이 해결되지 않은 극한상태에 있다면 성욕과 명예욕을 희생해서라도 식욕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식욕이 인간의 가장 강한 본능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취약점이라 할 수 있다. 마귀는 언제나 인간의 약점을 공격하지 않는가. 화를 잘내는 약점이 있으면 늘 화날일로 공격하고, 물질에 약한 자에게는 물질로, 성욕에 치우친자는 성의 유혹으로 공격할 것이다. 오늘날 풍족한 시대의 현대인들에게는 식욕을 통해서 잘못된 음식을 먹게하고 급기야 건강을 잃게 하여 영적건강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 마귀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은 tv를 보면 음식프로그램 일색이다. 소문난집, 대박집 등등하며 맛을 위주로 모양을 위주로 음식을 만들어서 먹고 그러한 음식을 잘 선별해서 먹는 미식가들은 인생을 참 수준 높게 누리며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공신력을 있는 매체를 통하여 음식의 정보를 받은 사람들은 별로 문제의식이 없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음식을 찾아 즐겨먹게 된다. 수 일전 인도선교사로 선교활동을 왕성히 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안식년 개념으로 귀국하신 선교사님이 내원을 하셨다. 한국에 오셔서 어찌어찌하시다가 우리 한의원을 소개받고 건강관리를 받으시기 시작하신지 2개월이 넘어가고 있는 시점이다. 처음 뵈었을 때는 얼굴은 상기되었고 피부도 거칠어 보이고 눈에는 불안정한 기운이 나타나는 등 한눈에 보기에도 건강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결혼도 안하신 홀몸으로 십수년 간 나름대로 열정을 가지고 사역을 잘 하셨는데 언제부터인가 변비도 생기고 체중도 늘어가고 피로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고 짜증과 혈기도 심해져서 사역을 하기가 힘들어지셨다고 한다. 이제는 기도도 할 수 없고 집중하여 성경을 볼 수도 없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들과 자괴감이 들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하였고 주위사람들과도 교류가 안되는 것은 물론 그런상태이다 보니 후원자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끊어져 도저히 더 이상 사역을 하기 힘들고 해야 할 필요성도 상실하는 등 그야말로 목적의식과 열정을 잃고 본국에 호소하여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귀국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상담 중 드시는 음식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쉽게 발견되었다. 현지사정에 의해 흔히 접할 수 있는 빵, 피자, 콜라 등 가공식품과 튀김류를 많이 먹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러한 음식이 맛있고 좋았다는 것이다. 잘못된 음식들이 인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잘 설명을 드리고 그 후 두 달 동안 자연식위주의 음식으로 바꾸면서 대변, 소변을 통해 독소를 배출하기에 힘쓴 결과 매일 매일 회복되어지는 모습을 보이더니 수일 전 오셨을 때는 안색도 피부결도 좋아지고 눈빛이 안정되고 맑아지고 목소리가 힘이 생기는 등 한눈에 보기에도 건강상태가 매우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즈음은 기도가 잘 되시냐는 질문에 “너무 좋습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고 다시 선교에 대한 열정이 생깁니다. 요즈음은 길을 가면서도 주님과 대화를 합니다”하며 웃으셨다.많은 선교사님이나 목사님들이 기도와 말씀의 묵상, 이단연구 등 영적인 건강관리에는 항상 노력을 기울이시지만 의외로 육의 건강관리에는 별 관리를 안하신다는 느낌을 갖게된다. 관리는커녕 오히려 너무 무지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건강관리를 하시는 분들도 운동을 좀 더 열심히 하고 음식을 나름대로 선별하여 드신다는 정도이지 어떤 음식들에 의해 우리의 건강이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받는지, 그런 것이 누적이 되어 우리의 육적건강이 손상이 오면 얼마나 영적건강에 심각한 손상을 받게 되는지, 그러하므로 결국은 건강한 사역을 할 수 없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최초에 우리 인류에게 먹거리를 통하여 죄가 들어왔음을 묵상하자.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볼 때 그 열매가 아름답다고는 생각했을지언정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으리라. 지천에 먹을 것이 널려있는데 굳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고 싶었겠는가. 허나 마귀의 속삭임을 듣고 보니 보암직하고 먹음직해 보이기 시작하여 결국은 먹음으로 죄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 우리 성도들도 별 의식없이 그러한 음식을 즐겨찾게 되고 그 결과 우리의 육체가 병들어가고 영혼이 병들어가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는 분은 없다. 설탕을 위주로 음식을 만들어가는 남자쉐 프가 최고인기직종으로 느껴지니 어찌하겠는가.
    • 칼럼
    2015-11-20
  • 은퇴가 없는 선교
    은퇴(Retirement)란 의미는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낸 것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이는 생산활동은 중지했지만 지속적으로 소비는 하고 있는 삶의 형태로, 단순히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는 ‘퇴직’과는 차이가 있다”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필자에게도 은퇴가 찾아왔고, 지난 8월 31일로 대학에서의 정년 교수직을 마감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나에게 걱정들을 많이 해 주었던 동료들과 제자들을 보면서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들을 불식시킬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갖고 있는 선교관이었다. 즉 “선교에 은퇴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결론은 선교에는 결코 은퇴가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재임용이 되어 지속적으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또한 자유함을 얻은 관계로 다양한 학교에 출강하면서 각기 다른 목소리들을 청취하게 되었다. 어쩌면 출강 시간이 늘어남에서 오는 일정으로 무척 바빠진 느낌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평소에 가졌던 선교의 이론들을 전략화 하기 위해서 지난 10월 31일(토)에는 “재한 이주민 사회통합진흥원”이라는 기관을 창립하여 사단법인화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교의 특성인 역동적인 삶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칼럼을 집필하기 위해서 은퇴에 관한 자료들을 찾던 중에 매우 긍정적인 글을 발견하였다. 학교에서 퇴직을 하고 한국해외자원봉사단으로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 가서 자신이 갖고 있는 달란트를 봉사의 도구로 활용하는 글을 보았다. 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십니까? 퇴직후 1년 산에도 다니고, 국내 및 해외여행도하며 보내다가 에볼라가 창궐할 때 코이카 해외봉사단 단원 선발에 응시하고, 5주간 국내교육도 마치고, 작년12월 중순 탄자니아로 파견되어 현지어 교육받고 중등학교에서 화학선생으로 제3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힘든 과정을 만날 때마다 긍정의 마인드로 기도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전하기 어려운 교육환경이지만 검은 얼굴에 맑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힘을 얻습니다.1960년대 미국의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활동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서 제가 그 자리에 서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지난 6월 5일 우리의 여름방학에 해당하는 방학에 들어갔습니다. 한 달 간의 방학동안 탄자니아 문화를 이해하고 현지어 실습도 할겸, 여행도 해보았습니다. 어제 학교에 갔다 오면서 왠지 글을 쓰고 싶어서 소식 전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내가 일을 할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한민국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나의 재능을 새로운 세상에서 나누고 있습니다. 몇 일 전 한국에서 가져 와서 사용하다 고장난 믹서를 고치러 다니면서 우리의70년대 모습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마치 타임 머신타고 과거로의 여행처럼 말입니다. 퇴직 후의 새로운 세상으로 ‘코이카 해외봉사’를 검색해 보세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위에 언급한 글에서 “대한민국에서 유통 기간이 지난 재능을 새로운 세상에서 나누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음이 감동을 주고 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도 이토록 쓰임새가 많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평생을 살아가야할 우리에게 과연 은퇴란 있는가에 대해서 되묻고 싶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달려갈 길을 에베소 장로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면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했다. 은퇴란 영어로 Retirement이다. 즉 타이어를 다시 끼우고 미지의 새로운 길을 달려 나가는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대학에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달려 보지 못했던 길을 달려보고 싶다. 첫째는 세계로선교학교를 통해서 한국교회에서는 선교의 동력을 회복하고, 세계의 선교 현장에서는 효과적인 선교의 열매를 맺어가게 만들고 싶다. 둘째는 사단법인화된 “재한 이주민 사회통합진흥원”과 “세계다문화진흥원”을 통해서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선교적 차원에서 사역할 수 있는 기관으로 육성하고 싶다. 세 번째는 국내외 사역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한국어 교원 수료증을 세계로원격평생교육원을 통해서 제공하고 싶다. 글을 보신 독자님들께서 이제 타이어를 갈아 끼운 저를 위해 새로운 일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하고 싶다.www.worldcan.co.kr(세게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1-13
  • 구하는 자들에게 주라
    박지원의 허생전의 내용이다. ‘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변 씨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 생이 곧 변 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엇을 좀 해보려고 하니 만 냥을 꿔 주시기를 바랍니다. 변씨는 ’그러시요‘ 하고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변씨의 자제와 손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변 씨가 말하였다. ‘이건 너희들이 알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 하겠느냐?’허생은 만 냥을 받자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림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대추며, 석류, 귤, 유자 등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얼마 안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17세기 중반 조선효종 때 경제 구조가 취약함을 한탄하였다. 자고로 사람들은 돈을 빌려 줄 때 결코 아무에게나 빌려 주지 않는다. 돈을 부탁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대단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와 요건을 붙인다. 헌데 변씨를 보자. 비록 불신자 이지만 초면의 허생에게 이름도 묻지 않고 어떤 조건도 제시 하지 않은 채 거금을 내어 주었다. 오늘 날 목회자, 장로, 성도들이 본받을 만한 인물이 아닐까? 깊이 생각해 보자. 오늘 날 우리들에게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수단 방법을 다하여 물질을 모으고 저축한다. 그런데 왜 아까운 물질을 구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까? 그것은 주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쓸 곳에 쓰라고 물질을 주셨고(마 25:14, 15) 누구에게든 구하는 자에게 주라(눅 6:30)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너희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까다롭게 조건을 붙이지 말고 또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고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도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아예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색하여 물질을 구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그것은 큰 죄악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돈 주머니를 회개한 자가 진정 회개한 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생명처럼 사랑하여 더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탐심 때문에 베푸는 삶을 외면하고 포기한지는 않았던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에서 소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의 곳간을 넓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지도 또 행복하게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쌓아두려면 영원한 곳간에 쌓아두어야 할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선용하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기만 하면 결국 못쓰게 되고 녹슬고 또 도적들의 사냥감이 되기 때문이다. 한동안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위 대도들이 턴 집들은 묘하게도 모두 다 그 집 은밀한 곳에 현찰을 둔 집들만 공통적으로 털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이 물질을 구할 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외면하거나 냉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이제 지금 우리를 살펴보자. 우리는 재물을 쌓아 놓고만 있는 어리석은 자는 아닌지, 그리고 주님과 세상의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는 기회주의자는 아닌지 말이다. 고로 우리는 부에 대한 탐심, 성에 대한 탐닉, 세상의 영예와 소유에 대한 집착 등을 과감하게 버리자. 주님께서 주신 물질을 구하는 자에게 주지 않고 자기를 위해 치부만 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자산들이 상하여 못쓰게 되고 또 엉뚱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며 평생 후회하고 후일에 주께 책망을 받기 때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11-13
  • 소금으로 맛을 내어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 언제나 친절하게 유익한 말을 하고, 묻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對答해야 마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골로새서 4장 1-6).바울은 크리스천이 교회 밖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을 음식조리법에 비유하고 있다. 나의 미각이나 사정을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말을 전해야할 상대방의 미각과 문화적 토양에 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사정을 따라 알맞게 소금을 치라는 충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뛰어난 요리사가 될 수 있는 기본자세는 역지사지에 있다. “내가 전하는 말씀은 절대 진리”이니, “나의 말은 진리이고 평화이니” 무조건 받아 들여야 한다는 식의 데모꾼의 외침일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한다”했다. “언제나” 하는 말은 늘 그런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는 말일 터. 차라리 그런 체질이 되어 있어야한다는 말로 이해해 보자. “은혜가 넘쳐야한다”는 말은 소금으로 맛을 냈으면, 그 맛의 효과가 제대로 상대방이 동의하고 즐거워하는 바가 되어야한다는 말로 새겨본다. 혀끝에 닿는 맛은 그 사람의 표정을 바꾼다. 곁에서 보는 사람도 그가 뭣을 맛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지경이다. 혀끝으로 단 맛을 맛본 얼굴과 혀뿌리로 쓴 맛을 느낀 표정은 사뭇 다르다. 혀의 양옆에서 신맛을 맛본 표정 또한 다르다. 신맛을 접한 얼굴과 단맛을 맛본 표정은 사뭇 달라서 바라보는 다른 사람도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짠 맛이라면 더 그렇다. 소금으로 맛을 낸다고 하는 노릇은 확 소금을 뿌려 썩지 않게 간을 하는 방부처리가 아니다. 소금은 달콤한 맛에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소태맛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 양과 솜씨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 “고등어자반”이란 것이 있다. 생선을 제대로 먹어볼 수 없었던 내륙 안동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즐기던 소금으로 간을 친 고등어를 일컫는데,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지방 사람들이 덩달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무나 조리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좋은 스승을 따라 적잖은 시간 훈련을 쌓은 손에서만 제대로 된 “고등어자반”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맛은 인간의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감정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작이 쌓여가노라면 인간의 성격을 더 복잡하게 바꾸어가게 마련이다. 아비의 미각은 자손에게 전해지고 어미의 먹거리는 태아의 성격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지 않는가. 히브리인의 성격과 표정을 형성해온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그들이 먹어온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그리스도교회가 세계를 향해서 제공할 수 있는 “말씀”이 어떠해야할지를 충분히 고려한 나머지 내뱉은 말이 아니겠는가. 요한 12장,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에서, 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어이 배신자가 될 유다에 대한 비난을 첨가하는 것 까지는 그래도 그 일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 수긍이 간다고 하더라도, 6절에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돈 자루를 맡아가지고 있으면서 거기 넣은 것을 훔쳐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까지 모진 소리를 한 것은 요한기자의 짓궂은 악의가 두드러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모양의 보도가 결국에는 유대인을 핍박하는 구실로 이어졌다는 설은 제법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하다. 소금으로 맛을 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 굳이 상처를 내기 위해서 이기보다는 소금으로 맛을 내어 우리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가꾸어간다는 뜻일 것이다.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전신만신 성모 마리아’판이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예수는 저만큼 비껴 있어 유럽의 그리스도교회는 마리아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접근해보면 나름대로는 소금으로 맛을 내려했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기독교신학은 소금으로 맛을 내는 여유까지를 가꿀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더욱 알맞게 소금으로 맛을 내는 솜씨를 터득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1-12
  • (정신재)문 밖에 선 예수
    문 밖에 선 예수 이 세 영고달픈 삶에 흐물거리는 인생복 받고 부자 되는 길많이 심으면 많이 걷우고교세 늘리는 자 복 받는다 하네화려하고 웅장한 건물 속달콤한 능변과 세련된 제스처철새처럼 모인 군중교회가 복 받은 증거라는데교세 자랑 건물 경쟁교파는 새떼처럼 갈라지고새 시대 새 바리새인세상을 당당하게 앞장서 가네 아름다운 대형 십자가부귀와 명예로 번쩍번쩍교인은 많지만 성도는 어디에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지?믿음 소망 사랑은 애드벌룬이냐?문 밖에 선 예수는 시름없이눈물만 뚝, 뚝, 뚝. 주는 낮고 천한 광야에서도 빛이십니다. 우리는 낮고 천한 죄인이었으나 당신의 한량 없는 은혜로 의의 길에 들어섰사오니, 선한 목자 되시는 주여! 주님 뜻대로 인도하소서. 저희를 인도하시어 하나님 나라에 들이소서. 주의 길은 넓고 크시나이다. 주의 품은 진실되고 아름답습니다. 빛과 소금으로 주님 가신 길 따라 당신께 나아가나이다. 빙수처럼 시원한 말씀으로 죄의 먼지를 씻게 하소서. 빛으로 오신 당신을 앙망하나이다. 거실의 맑은 햇살 속에 당신의 창조가 보이나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소외받는 자들의 아버지시니이다. 두 손 모아 주님께 찬양드리오니 받아 주소서. 지금 현재 여기에 오셔서 아버지의 사랑과 행복을 나누어 주소서. 우리의 수명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주관하시고, 주님이 주신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나를 당신 뜻대로 이루소서.
    • 칼럼
    • 기독시선
    2015-10-30
  • 피그말리온 효과
    피그말리온은 기원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키프로스의 왕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여성에게 실망한 왕이 손수 상아를 깎아 만든 여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데, 그녀가 옷을 걸치고 있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 생각하고서는 옷을 입혀주기까지 한다. 자신이 만든 조각물을 실재하는 인간 이상으로 사랑하고 몰입하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에서 운을 띄우기 시작한 “피그말리온”이야기는 훗날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발전한다. 하마터면 인간이 아닌 인형을 편애하는 소위 “피그말리온 콤플렉스”의 자료 정도로 묻혀있을 뻔했던 이야기가 화려하게 20 세기의 무대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익살꾼 버나드 쇼가 1912년에 <피그말리온>이란 희곡을 완성하면서다. 희곡 <피그말리온>은 곧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뮤지컬이 되어 여러 버전으로 변신을 거듭하다가 1964년에는 오트리 헵번이 주연하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많은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내용인즉, 낮은 신분출신의 소녀 일라이자가 비긴즈의 도움으로 언어습관을 고쳐 레이디로 변신하지만, 자아에 눈을 뜨고 그의 곁을 떠난다는 줄거리의 변주들이다. “피그말리온”이 교육심리학의 이론으로 변신한 것도 이 무렵. 1964년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타르가 “인간에게는 남에게서 기대 받은 만큼의 성과를 내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주목을 받게 된 이론 말이다. 그의 이론은 미국의 심리학이 대체로 그렇듯이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결론이라고 했다. 1963년, 로젠타르와 동료 포드가 학생들에게 쥐를 이용한 미로실험을 실시했다. 실험용 쥐를 넘겨주면서, 한 집단에게는 “이 쥐는 잘 훈련을 받은 영리한 계통의 쥐”라는 정보를 주고, 다른 집단에게는 “이 쥐는 형편없는 쥐”라는 귀띔을 주었다. 실험결과 두 집단 사이에 주목할 만한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각각 다른 정보를 받은 학생집단이 쥐를 다루면서 동원한 방법과 기대감의 차이가 실험결과에 반영된 것이라고 로젠타르는 생각했다. 이런 결과는 학생집단과 쥐에서 만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라 생각한 로젠타르는 이듬 해 교육현장에서 실험을 실행한다. 한 초등학교에서 “하버드식 돌발성학습능력 예측 테스트”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가며 실시한 테스트였지만, 내용은 일반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지능테스트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학급담임교사에게는 “차후 수개월 사이에 성적이 나아지는 아동을 찾아내기 위한 검사”라는 설명을 해두었다. 그러나 실제 검사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암시에 불과했다. 검사결과와는 관계없이 무작위로 선발된 아동의 명부를 학급담임에게 보여주면서 “이 명부에 올라있는 아등은 차후 몇 달 안에 성적이 올라갈 아동”이라고 귀띔해둔 것이다. 그런데 명부에 이름이 올라있는 아동의 성적이 분명히 향상하고 있었다는 것. 보고논문의 주장에 따르면, 성적이 올라간 원인으로서는 담임교사가 명부에 올라있는 아동에 대해서는 기대감을 가지고 대했다는 사실과 아동 편에서도 자신이 기대를 받고 있다고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 명명된 실험결과는 더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시험을 한 결과 이러한 효과는 인정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 교육기관이, 공교육 사교육 할 것 없이, 상당한 반향을 불러 모았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인터넷을 뒤지면 <피그말리온 효과>를 빙자한 특수교육의 선정문구를 쉽게 대할 수 있다. 당시의 교회가 이 이론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 없지 않는가. 교회성장과 헌금수입에 선용(?)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피그말리온 효과”란 “인간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게 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나, 자신을 대해주는 다른 사람의 태도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심리학 법칙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대접받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언동을 바꾸게 된다는 것. 이 이론을 근거로 하는 “피그말리온 효과에 따른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다루는 태도나 방법을 조정함으로서 상대의 부적절한 언동을 적절한 언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해보려는 노릇이다. 2천년도 전에 예수는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남을 먼저 대접하라 했지만. 요즘 날로 험해져는 정객들의 말씨를 대하면서, 그들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를 테스트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혹 기대하지 못했던 버전이 축출될지 누가 알겠는가.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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