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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호)청지기의 사명
    청지기의 사명 김 성 녀하나님이 맡겨주신 청지기의 사명을지혜롭고 슬기롭게 행케 하여 주소서마음속에 품은 믿음 귀히 간직하고서주인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해야 하리착하고도 충성스런 청지기가 되어서주님 맘에 합한 자로 인정받기 원하네많은 고기 뛰노는 곳에 그물 던지러 가세깊은 바다 겁내지 말고 열심히 던져 보세힘들어도 쉬지 말고 기도하며 던지면그물 속에 잡힌 고기 우리 주님 거두시리모든 그리스도인이 청지기라는 사명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할까. 대부분이 청지기의 사명을 잘해야지 라기보다는 그냥 주어진 직분에만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에서 화자는 청지기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1연에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청지기의 사명”이라 언급하며 계속해서 그 사명을 종의 입장에서 주인이 기뻐하도록, 착하고 충성스런 청지기를 언급하다가, 4연에서는 청지기의 사명에서 전도라는 사명을 언급한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와 안드레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던지라 말씀하신 쪽으로 던졌을 때 많은 고기를 잡았다. 전도라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내 의지대로만 하려하면 힘든 것이 더욱 힘들어지고 결국 포기하기가 쉽다. 그러나 쉬지 않고 구도자를 위해 주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지시대로 열심을 낸다면 거두어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아마도 화자는 평상시에 전도에 대한 열정이 많거나 많은 영혼을 전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인가보다. 수많은 청지기 사명이 있지만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 열심을 낸다는 것이 바쁜 사회속에서 쉽지는 않다. 그러나 “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영혼을 위해 주님의 방법대로 시도한다면 좋은 열매를 거둠으로 주님께 영광돌리는 청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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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시선
    2016-01-21
  • 천륜(天倫)과 종교
    기독교는 부모 공경에 대해서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십계명 가운데 제 5계명을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기록되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라고 권면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부모와 자신과의 관계를 세속적인 단어로는 천륜이라고 볼 수 있다. 천륜의 사전적 의미는 “부모와 자식 간에 하늘의 인연으로 정하여져 있는 사회적, 혈연적 관계”라고 나와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천륜지간 이라는 글을 검색했더니 다음과 같은 글이 나왔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지간[天倫之間]입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귀한 인연[人緣]이지요. 이것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절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순 없습니다. 가버린 세월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가 버리면 되돌아 오지 않는것이 세월이요. 떠나시면 모시고자 해도 따를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나무는 고요하고 싶어도 바람이 그치질 아니하고 부모님을 모시려 하나 세월이 기다려 주지를 않습니다. 살아 생전 부모님을 잘 섬김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천륜지간[天倫之間]의 도리입니다. 이 글을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논어(論語)가 생각나서 기슬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016년을 희망찬 날들로 채우기를 원하는 나에게 무겁게만 들려오는 소식들로 가득차 있다. 참으로 암담한 사실은 ‘천륜 짓밟은 냉혈한’ IS대원, 탈출 설득 어머니 공개처형, 이라는 소식이다. 인터넷 기사에 의하면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20대 대원이 탈출하자고 설득하는 어머니를 공개 처형했다고 BBC방송과 AP통신 등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에 따르면 IS 대원인 알리 사크르(21)는 지난 7일 IS가 점령한 시리아 락까에서 어머니 레나 알-카셈(45)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공개 처형은 카셈이 일하는 우체국 건물 인근에서 이뤄졌다. SOHR는 카셈이 아들에게 IS 조직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떠나자고 설득했기 때문에 공개 처형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미군 주도 연합군의 공습이 IS를 쓸어버릴 수 있다면서 아들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은 어머니 말을 IS에 그대로 전했고 IS는 공개 처형을 명령했다. 다른 인권단체인 ‘락까는 조용히 학살당하고 있다’(RBSS)도 어머니의 공개 처형 소식을 전하면서 처형 이유를 ‘배교’라고 설명했다. IS는 동성애, 배교 등을 이유로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최근 들어 IS의 근거지 락까에 대한 연합군은 공습이 심해지자 탈출 의지 등을 꺾기 위한 IS의 공개 처형 사례도 늘고 있다. 한 젊은 여성은 IS 점령 아래서의 도시 생활을 담은 글을 썼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았다. SOHR는 IS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2014년 이후 동성애와 배교 등으로 살해된 사람이 2천 명이 넘는다고 전했다.보도에 의하면 자식의 안위가 걱정이 된 어머니가 IS조직을 떠나서 안전지대로 탈출하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는 자식을 낳아서 성장시킨 어머니의 당연한 자식사랑이다. 성경은 자식사랑에 대해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ㅈ불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면서 부자간의 관계를 언급하셨다. 어머니를 공개 처형장으로 내몰아 버린 자식은 종교적 맹신에 의해서 천륜을 내 팽개쳤다.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인간 교육 중에서 최고의 경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어머니를 총알 바지로 만드는 종교를 좋은 종교라고 볼 수 있는가.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기를 바란다.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를 반면교사 (反面敎師)로 삼아야 하겠다. 오늘도 우리는 신앙심을 이유로 가정과 자녀를 팽개침과 아울러 책임을 회피하고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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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1-21
  •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기 직전에 한 일
    잘못된 성서 번역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다는 주장에 당장 고개를 끄덕여 줄 이가 있다면, 그는 남달리 깊은 영성을 지녔거나,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둘러싸고 있던 당시 러시아의 속사정을 소상히 연구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상당한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운명한 것은 1881년 1월 28일 오후 8시경. 쉰아홉 해의 파란 많았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사인은 폐동맥파열로 진단되었고, 그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아내와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범해 보이는 그의 임종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데에는 이상하게도 러시아의 문인들 중에는 평안하게 제명을 살다간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징크스가 한 몫하고 있다. 푸시킨과 레르몬토프는 결투로 죽었고, 고골과 가르신은 미쳐서 죽었다. 가출해서 죽은 톨스토이는 그렇다 치고, 자살한 문인들이 있는가하면 숙청되어 처형된 이도 있는 터에, 59세의 나이이긴 해도 가족과 친지가 지켜보는 병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받은 최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서 남달리 등장인물들의 최후를 비정상적으로 엮어갔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정작 자신은 평온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어떤 인과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문호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각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가 죽기 13시간 전, 우연이라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미스터리한일이 있었다. 오전 7시경, 문호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곁에 있는 아내 안나 에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오늘은 죽을 것 같아요.”하고 말한다. 그리고는 그의 만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성경으로 점을 치겠노라고 했다. 아내는 손때로 찌들은 낡은 성경을 그의 머리맡에 갖다 놓는다. 그 성경은 30년 전, 청년 도스토예프스키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죄수로 시베리아로 호송되는 도중 드보리스크에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의 아내들이 건네준 바로 그 성경. 1823년판 러시아어 역 <신약성경>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손을 뻗어 책갈피를 넘겼다. 펼쳐진 쪽은 마태복음 3장 끝 부분에서 4장에 걸쳐 있었다. 성경 점을 칠 때에는 펼쳐진 왼편 쪽 위쪽에서 훑어 최초로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을 점괘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가 받은 점괘는 <마태복음> 3장 14-15절로, 세례요한이 예수로부터 세례 요청을 받고 사양하는 바로 그 구절이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안나가 여기까지 읽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만 읽으라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말리지 말라. 즉 내가 죽는 다는 뜻이지...” (러시아역에서는 “허락하라”를 “말리지 말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역본이나 영어역본에서는 “지금은 말리지 말라”라는 번역은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이제 허락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인 것은, 러시아판 신약성서 모두가 그렇게 번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유독 1823년판에서만 그 구절이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죽음을 앞 둔 문호가 성경 점을 친 성경책이 1823년 판이 아니었다면 그의 죽음은 연장될 수 있었을까? 사후에 그의 장서목록을 검토해본 결과 그에게는 1862년 이후의 개정판을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성서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 되고 있다. 만약 다른 책으로 점을 쳤다면, 그래서 “말리지 말라” 가 아니라 “허락하라”로 읽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은 적어도 수년간 연장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그랬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애독자들이 그렇게 아쉬워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도 써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안나 부인이 <회상록>에 기록하고 있는 이 일화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그 성경을 준 폰 비지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낸 적이 있었다. “설사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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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1-21
  • 순교자 이그나티우스의 편지
    교부 이그나티우스가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그는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밀알이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 가루가 되어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라고 한 후 순교했다.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도 A.D. 156년 어느 날 예수님을 욕하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라고 종용하는 이들에게 ‘저는 86년간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제게 나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저를 구원하신 저의 왕을 욕할 수 있습니까?’ 말한 후 화형을 당했다한다. 당시 그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었을까? 아니다. 신앙을 포기하면 굳이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의 신앙을 선택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이 이탈하거나 포기할 만큼 고난이 찾아오고 신앙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게 보이는 유혹이 있을 때 성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환난에 동참하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비록 법은 어기지 않더라도 세상에 만연된 죄악된 규칙을 따르지 않음으로 인해 공공연한 따돌림과 사회적 고립을 경험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늘날 한국교회를 비롯 자유사회에는 교회와 성도에 대한 정치적 박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사단은 다른 방법으로 성도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서 사업상, 직업상 등의 이유로 하나님과 교회를 멀리하고 우상 숭배를 비롯한 각종 죄악에 참여케 하고 그것을 교묘한 방법으로 합리화시켜 주어 그 죄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인인 정치 지도자들이 표를 의식해 사찰에 가서 예불을 올리는 것이나 사업상 바이어를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이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교회와 성도로 봐서는 핍박을 동원한 공격보다도 은밀한 유혹과 자기 합리화를 통한 공격으로서 더 위험하다. 핍박은 사단의 공격인 것이 뚜렷이 인식되어 대처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은밀한 유혹이나 자기 합리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공인 이전에는 로마 제국의 성도들의 신앙이 굳건한데 반해 기독교 공인 후에는 로마 제국의 성도들이 급속히 타락하는 사실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처럼 마귀는 하찮게 보이는 작은 유혹들을 통해 성도들을 곧잘 쉽게 넘어지게 한다.마귀가 미혹하는 것을 보자. 사실 어떤 일에 실수를 한다거나 잘못을 하면 우리는 그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또한 어떤 사람이 실수를 한다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보편적인 것이다. 인간들은 교육이나 환경 개선을 통해 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고치고 문제점을 개선한다면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사람에게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 같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환경을 개선하고 미리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환경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문제가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론 어떠한가?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문명의 사회이고 지식과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혹은 그런 사람일수록 문제는 더 많고 범죄성도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훨씬 교묘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 모두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문제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근원적으로 인간 배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부적응하게 하는 세력이 있는데 곧 그것이 바로 마귀란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사람이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성도들을 달콤한 방법으로 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을 주목하는 대로 만들고 거기에서 문제와 해법을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탄의 유혹과 고난이 올 때 절대로 마음이 약하여 상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쳐야한다(마 4:4).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와 맞서 영적 싸움을 할 때 홀로두시지 않고 천사를 파송하여 돕고(히 1:14) 또 친히 함께해 주실 것이다(요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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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1-21
  • (정신재) 민들레 홀씨
    민들레 홀씨 김 철 교 노오란 꿈이 옹골차게 영글면이리도 가볍게 날 수 있는 것을머문 듯또다시 바람이 불면미련없이 자리를 턴다세월의 무게를 다 내려놓고바람에 실려 어디로 간들거기가 고향이 아니겠느냐주님! 오늘도 저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저희가 새나 물고기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셨지요.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을 때에 주님이 시몬의 배에 오르셨지요. 사람들이 몰려들므로 예수님은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셨지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지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베드로가 대답하였지요.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그리하여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지요. 베드로가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도움을 청하여 두 배에 물고기가 채워져 잠기게 될 정도였지요. 베드로가 엎드려 고백하였지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지요.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그리하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지요(눅 5:11).주님! 저희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따르렵니다. 주께서는 저희의 달란트를 아시오니, 그 달란트를 통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저희의 믿음이 “옹골차게 영글”었을 때 저희는 주님 뜻에 의지하여 어디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바람에 실려 어디로 간들/ 거기가 고향이 아니겠”습니까. 저희의 마음은 “민들레 홀씨”가 된 기분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한들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 저희들의 고향이겠지요. 세상의 미물도 다 주님이 주관하시는데,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저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주 뜻대로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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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시선
    2016-01-12
  • 선교역전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동안에는 서구에서 제 3세계로 향하는 것이 대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역전이라는 어휘가 왠지 새롭지 않다. 필자는 오늘 Allan L. Effa, 박사에 의해서 쓰여진 논문 “세계 기독교속에서 나이지리아의 요소”가운데에서 발췌된 글을 소개함하고자 한다. 이 글의 하반부에는 “선교 역전: 나이지리아인에 의해 시작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교회들”이라고 쓰여져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선교 운동의 주류는 남에서 북으로, 가난한 세계에서 부자 세계로, 변두리에서 힘의 중심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고 있다. 복음은 이민의 막대한 물결에 기인하여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다. 비구조화된 방법 안에서, 그리고 선교의 본부의 통제 밖에서 많은 시간동안 그것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복음은 가장 기대되지 않는 곳에 도달한다. 그 곳이 어디든지 성령이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감동시키신다.한 번에 많은 선교사를 보낸 땅에 있는 나라들에 거주했던 서아프리카 크리스천들은 이민을 통하여 오늘에는 영국 땅에 수 없이 많이 거주하면서 신앙 생할을 하고 있다. 비록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주로 경제적 이유로 유럽에 왔을지라도, 서방의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가져가기 위한 선교의 열정적 감각이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나라들로부터 온 많은 나라들이 오늘날 영국에서 섬기는 50개국으로부터 온 약 1,500명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크리스천들은 주류에서 영적 집과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복음주의 교회를 발견하는 반면, 최근 몇 년 동안 다수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시작된 교회가 생겨나고 있다. 이 교회들은 두 개의 폭넓은 부문 속에 포함되어있다.첫 번째 부문은 아프리카에서 비롯된 교회의 유럽 또는 북아메리카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의 부분은, 영국의 경우에서 특히, 1960년대만큼의 이른 시기로 소급된다. 이것들의 예는 Aladura 교회, 더 깊은 삶, 하나님의 구속된 크리스천 교회 (모든 교회는 기원에 나이지리아인이 있다.) 그리고 오순절 가나 교회이다. 이것들 중 몇몇은 함께 모인 이민자의 작은 그룹에 의해 발견되었고 결국 모임으로 조직화되거나 다른 경우, 계획된 선교 아웃리치 노력들을 통해서, 나이지리아나 가나의 국외로 추방된 사람들 중에서 일하기 위하여 교회 심기 목사들의 파송을 포함한다. 두 번째 부문은 유럽에서 시작된 교회들을 포함한다. 이 교회들 중 몇몇은 이어서 아프리카와 세계의 다른 부분에서 분파를 설립했다.이 두 형태의 교회들은 유럽 기독교의 지형을 바꾸기 위해 돕고, 성장하는 세계적 선교의 힘이다. 우리는 이미 영국의 교회 출석률이 주로 이민 요소 때문에 감소를 멈췄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것은 주로 “흑인이 대다수인 교회들”의 생명력 때문이다. 크리스천 연구의 Peter Brierly는 런던 안에 교회 출석의 51%가 흑인과 소수민족으로 구성된다고 평가했다. Gerrie ter Haar는 1997년에 가나인들에 의해 알려진 그들의 대부분인 약 40개의 아프리카인에 의해 시작된 교회들은 암스테르담에 존재한다고 보고했다. 교회의 첫 번째 부문의 예로써, 간단히 하나님의 구속된 크리스천 교회(RCCG)를 고찰하도록 하자. 그 구속된 교회는 무교육자지만 능력있는 설교자, Josiah Akindayomi의 목회에 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RCCG가 되는 것을 시작하기 위해 Cherubim과 Seraphin 교회를 남겼다. 강력한 선교 명령은 교회를 바로 사작하도록 교회를 특징지운다. 1981년까지는 그렇지 않았지만 Enoch Adeboys가 교회의 리더십을 취할 때 그 운동은 수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RCCG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독교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나이지리아 자체 안에서 적어도 4,000개의 RCCG 교구와 5백만 가량의 지지자가 있었다. Lagos의 동북쪽으로 45킬로미터에서 있었던, ”구원 캠프“에서 특별한 모임은 한 번에 일백만 명 정도의 많은 사람들을 끌었다. 그들의 컨퍼런스 장소는 쉽게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 교회의 목회는 대학교, 영화 스튜디오, 위성 텔레비전, 그리고 Wi-Fi 인터넷 공급자를 포함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검은 대륙의 땅이라고 지칭하는 아프리카인들이 현대선교의 아버지를 배출한 영국의 기독교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따라서 이를 선교역전이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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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2
  • 너의 이름은…
    <창세기>를 무대로 활동하는 족장들에게 있어 강을 건넌다는 노릇은 오늘날 우리가 교량을 이용해서 쉽게 강을 건너버리는 것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요단강을 건넘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는 일이었고, 동양권에서의 황천 또한 같은 개념의 경계선이었던 것이다. 건널 강이 깊지도 넓지도 않아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쉬 건널 수 있는 강이어도, 건너에서 발붙여 사는 족속은 건너오는 자들에게 동반자도 될 수 있고 대적자도 될 수 있기에 불안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그들 선주민이 섬기는 신들은 그 결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터라, 두려워하며 강을 건너는 이가 초자연적 존재와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으리라. 야곱은 홀로 얍복 나루에 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딸린 식구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미리 건너보내고 난 후여서, 나름대로 도강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한숨 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 야곱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타자를 맞잡고 씨름판을 벌인다. 끈질긴 야곱답게.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다. ‘야곱입니다.”“야곱”이 어떤 이름이던가? 그의 탄생기록을 더듬어본다.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야곱”은 히브리 고유의 이름은 아니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그 본래의 뜻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였고. “발뒤꿈치“를 가리키는 ”아아케브”나 “앞지르다”라는 뜻의 “야야코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소견. 그럼에도 <창세기>는 구태여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고 명시한다. 고대 셈족은 조상을 끔찍이 존중하는 족속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조상의 이름을 “발뒤꿈치”와 같은 상스럽지 못한 단어로 나타낸 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터.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그럴듯한 해석으로 상징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을 터인데도 말이다. 설사 <창세기>의 기록대로, 아우가 형의 발꿈치를 잡은 채로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쪽으로 해석의 가닥을 잡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인데도 말이다. 히브리인이 당시 오리엔트 세계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해석을 물리치고,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지독한 “야곱”을 고집한 데에는 그들 나름의 절실한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의 “야곱”, “악착같은 야곱”은 그 강인한 정신으로 해서 수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한 족속의 시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야곱은 그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울부짖은 것은 그 정체성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침묵은 바로 그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신뢰요 사랑이 아니었던가. 정체성은 겸손과 같은 미덕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정체성이 확립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겸손은 미덕이 될 수 있는 것. 그러기에 이름은 다른 누구의 이름으로 대신할 수 없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라는 것은 겉모양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지 않는가. 너의 본질을 바꾸라는 말씀이다. 지금까지는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늘어지는 악착한 근성으로 목숨을 이어오고 종족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나 하나님과 겨룰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왜 인간이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싸움에서 엉덩이뼈를 다친 것은 야곱이었지만 정작 진 것은 초월자였다. 너희가 나와 겨루어주면 나는 언제든지 져줄 수 있다는 뜻일까. 내가 왜 너희에게 져주지 않을까보냐! 나는 너희에게 이기기 위해서 너희의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너희에게 지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너희를 너희 되게 하고자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았거늘...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쩔뚝거리며 걸어가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아니던가. 그 실루엣은 한 해를 마감하며 한국의 교회들이 만들어야할 실루엣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1-12
  • 중보 기도
    중국 선교사로 활동한 한 여선교사가 중보기도에 대하여 이런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교활동 당시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그녀가 거주하던 작은 마을에도 공산군이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감금된 채 식량과 의료 혜택이 끊기고 우편물마저 차단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도움만을 바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선교사들을 억압하고 제한했던 많은 규제와 제한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식량과 의료혜택이 재개되고 공산군들도 선교사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도 허락되었다.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한참 후 그들은 오하이오에 있는 한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 사랑하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며칠 밤을 세워가며 철야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하이오의 교인들이 밤을 세워가며 기도할 때가 중국에서는 아침이었으며 바로 그때부터 선교사들의 모든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하이오의 교인들이 선교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했듯 지금 이 땅의 성도들도 민족을 위한 중보 기도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보자의 기도를 생각해 보자. 중보자란 쉽게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로 분리된 존재들을 연결시켜 주거나 조정해 주는 것을 말 한다. 한 예로 공인 중개사는 부동산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을 연결해 준다. 서로의 이해가 엇갈릴 때는 공정한 입장에서 서로 유익이 되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하찮게 보이지만 참 중요한 일이다. 중개사가 없다면 파는 자와 사는 자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공인 중개사만이 할 수 있다. 중보기도란 전능하신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연결해 주고 부탁드리는 일이다. 즉 누군가에게 잘못과 실수가 있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대신 간구하여 얻게 해주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세를 얻은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중보자’(Mediatdr)란 범죄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단절 관계를 이어주는 이를 가리킨다. 물론 성경은 참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고 선언하고 있다.(딤전2:5) 모든 그리스도인도 완전치는 않지만 일면 중보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창18:22~33), 모세(민14:11~20) 욥(욥42:7~9), 아모스(암7:1~6) 등 중보자의 역할을 잘 감당했던 신앙 위인들이 많다. 이러한 기도의 능력을 알았기에 바울은 중보 기도를 권면하였다.(딤전2:1~2, 엡6:18, 살후3:1) 이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에 직면한 악한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려 할 때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호소할 중보자를 요구 하신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불신자들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야한다. 멸망으로 치닫는 어두운 이 세상의 죄악을 사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는 하나님 사랑과 공의를 선포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강력히 선포하여 그들로 죄악에서 돌이키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의 때에 죄악 된 세상과 멸망당할 불신자들을 위해 눈물 흘려 중보하는 기도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 고로 중보기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자 특권인 중보 기도에 열심을 냄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간구한다.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시지 않으실 것이다. 혹시 기도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간구라면 돌이켜야 한다. 먼저 이웃을 위하여 간구해야한다. 믿음이 연약한 이웃을 위해, 육신이 병들거나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참된 기도는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시키지만 잘못된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자신까지도 망하게 한다. 종교 개혁의 선두 마차 마틴 루터는 ‘남을 위해 드리는 중보 기도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이기주의의 속임에서부터 우리를 정화시켜 줄 수 있다’고 말했고 또 기도의 거성 에즈라 바운즈도 ‘타인을 위해 중보 기도한다는 것은 고귀한 영혼과 순결하고 고상한 동기와 이타적인 마음과 열렬한 정신과 신성한 기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로 서로를 위한 기도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귀중한 방편이 됨은 물론이다. 우리가 주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깊이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성도들은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뿐만 아니라 또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중보기도에는 하나님의 역사함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의 부자나 권력자들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만이 할 수 있다.
    • 칼럼
    • 목회자
    2016-01-12
  • 새해의 각오
    구약에서 히브리어의 ‘새로움’이라는 말은 ‘하다쉬’인데, 이는 새롭게 하다. “부활하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이 시편 51:10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여 정직한 마음을 창조 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고백은 새롭게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역사는 언제나 준비된 자의 몫이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그것은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고 한 해를 출발 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씀과 같이 새로운 2016년은 분명 역사의 새로운 부대입니다. 2016년의 새 부대에 들어 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각오로 열어 간다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져 봅니다.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옛 사람에게서 새 사람으로의 전환이며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이고 나를 위한 삶에서 너의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할 것입니다. 새해 정초를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눅 13:6)를 다시 묵상 하여 봅니다.지방에서 목회 할 때 어느 교우가 무화과 씨를 선물해서 씨앗을 교회 차고 뒤에 심었더니 싹이 나오는데 밑에서 부터 여러 가지가 뻗어 나오더니 3년 쯤 되니 크지도 않은 투박한 나무에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무화과의 맛을 알고 속성을 알게 되었습니다.장소를 가릴 것 없이 아무데나 심기만 하면 잘 자라는 볼품없는 나무가 포도원에 심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주인의 파격적인 은총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무화과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뚜렷한 재능도 없었던 자신을 주의 종 삼으시고 구비구비마다 사랑과 은총으로 돌아보시고 함께 하신 은총에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신에게 이제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씀과 같이 또 한 번의 2016년은 새로운 부대를 허락하셨습니다.2016년의 새 부대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각오로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는데 그 공간에 무엇을 담을까? 그것은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의 전환하라는 명령이며, 육적인 생활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하라는 통보이며, 자아를 위한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의 으로의 전환하라는 의미로 다가 옵니다.목회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주인과 과원 지기의 정성과 관심에 비하면 내가 맺은 열매는 빈약하였고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것이라도 은총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들인가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주인은 3년간 열매를 위하여 거름을 주고 북돋아 주고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붓고 열매만을 기다렸는데 시간이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또 내년도 있다고 생각 하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도 미루어 놓은 채 어느덧 황금 같은 세월이 흘러가 버린 아쉬움만 남습니다.세계 제일의 하와이 촌을 건설한 키이젤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에 “나의 성공은 시간 활용을 잘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5시간의 잠자는 시간도 아이디어의 시간 이라고 하면서 종이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그 생각들을 노트에 적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실행해 갔다고 합니다. 부지런한 청지기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벌써 2015년도 을 보내고 21016년의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키이젤 처럼 거창한 하와이는 아니더라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옵소서. 한대로 정의가 새파랗게 살아 있어 ‘유전 무전’ ‘무전 유죄’로 고통 받지 않는 나라, 속담에서 같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나라, 건설에 쓰임 받고자 소박하지만 절실한 소원을 꿈꾸어 봅니다.역사의 어둠에는 항상 개인주의, 이기주의적인 사욕이 설치는 시대였습니다. 반대로 역사의 발전과 공동체의 기쁨에는 이타주의, 공리주의적인 정신이 기둥처럼 세워져 있었습니다.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주인은 올해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거름을 주고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하지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올해도 이 말씀으로 마지막 주시는 기회라 믿고 시간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해 볼까 다짐해 봅니다. 주인의 배려와 과원지기의 간청으로 또 한해를 주셨으니 주인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결심 떠오릅니다. 끝으로 정신문명이 물질, 문명을 이끌어가는 바른 가치관을 세워가며 사회 풍토를 쇄신하고 도덕적 기풍을 크게 진작 시키는 일에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회가 일어나 새일을 감당하기를 소원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모든 역량을 한데 모아 구세재민(救世載民)의 청풍을 일으키는 새해 새 각오를 다짐해 봅니다.주여! 이런 일들이 금년에 안에 반드시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1-12
  • 숲길을 걸으며
    지난 주는 오래간 만에 종로에서 열리는 문학인 행사에 갔다가 청개천의 크리스마스 테마 파크 거리를 걸어 보았다. 낮에 보아도 그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섬세한 모습들이 개천 숲을 걷는 이들을 환영하듯 즐거운 개천과 숲의 걸음이었다.청개천의 길을 걷다 옛 서점을 돌아보았다. 학창 때는 한 주간이 멀다하고 찾았던 곳, 구하려 하던 서적을 만나면 사랑하는 자를 만난 듯 책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던 추억의 장소를 물어물어 찾았다.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그때의 모습은 거의 경제 논리에 의해 일반 상가로 대치되었고 몇 서점만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옛 추억을 더듬어 보며 몇 군데를 둘러보다가 어느 서점에 들르니 좁은 공간에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한눈에 들어와 접어든 책이 있었다. 책 내용을 살펴보니 글과 사진을 함께 어울려 소담스럽게 쓴 것으로 제목은 ‘숲’이었다.글의 내용도 석류 알처럼 영롱하여 글쓴이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책을 구해 읽으면서 어느 새 숲속에 기대고 있는 내가 됐다. 목양의 현장은 마치 숲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별별 나무들이 제 나름대로 서있는 곳 각각 제 목소리로 산바람을 휘감는 것이 그렇고 높은 나무 작은 나무 이파리 떡갈나무 참빗 같은 침엽수 등 천태만상 이다. 숲은 속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느림’과 ‘비움의’ 교훈을 품는 삶의 수원지와 같다.숲은 편리함이나 안락함은 없는 대신 순결함과 침묵의 훈계를 껴안고 있다. 은퇴가 머지않은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나의 목양은 겨우 나무 가지 하나 붙들고 씨름하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눈먼 목회였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숲만 바라보고 씨를 뿌리는 목자가 아니었나 본다. 밭을 일구는 일에는 일 년이 걸리지만 씨앗을 뿌리는 일은 하루면 충분하다. 밭을 일구는 데는 많은 땀과 수고가 필요 하지만 씨앗을 뿌릴때는 하루의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뿌리는데도 절차가 있는 법, 밭이 돌밭인지 부드러운 흙 밭인지 확인한 후에 씨앗을 심어야 초록색 잎과 풍성한 열매를 를 기대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 할진데 사람들은 밭을 일구는 데는 관심이 적고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구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았았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와 좌절 아픔으로 점철된 목회 여정 이제 생각하니 씨앗에서 싹이 트지 않은 것은 종자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키워갈 밭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임을 이제야 조금은 깨닫게 된다. 밭을 먼저 일구고 씨를 뿌려야 하는 법 내 대지에서 자라는 이웃은 나의 열매이고 내 농토 에서 자라는 엉겅퀴와 잡초는 계속 일구어 가야 할 소중한 생명임을 늦게라도 깨닫게 되니 다행이다. 밭은 영원하지만 좋은 씨를 구하는 것이나 밭은 주인이지만 씨앗은 손님임을 모르거나 치 나치고 숲만 소중히 여겨 왔던가? 한국 교회도 숲만 찾아 가지 말고 밭을 일구어야 하지 않겠나? 믿음의 선조들이 일구어 놓은 밭에 열매를 즐기지 말고 새로 옥토를 만들어 야하지 않겠나?씨앗을 뿌리려는 다툼과 경쟁은 넘치지만 그것을 심은 밭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단순하고 정직한 밭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자기 터라 주장하는 소리는 커가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 속에서 모든 주장을 받 아 들이는 침묵의 밭이 되려는 노력은 보기가 힘든 것 같다. 한 겨울 동안 편안한 휴식을 취하였으니 내 이웃의 아픔에 우리의 사랑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밭이 되어 지기를 소원해 본다.밭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비를 마시고 비옥해 지게 된다. 나의 마음 밭에 숲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며 향기를 피어나는 새해를 꿈꾸어 본다. 또한 좋은 터를 일구어 좋은 열매를 제공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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