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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의 길 4단계
    예루살렘 탈무드(BC 50-AD 30)의 랍비들은, 유월절 만찬에서 네 차례나 건배하며 포도주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의 심포지엄 만찬을 모방한 것이란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출애굽기 6장 6-7절에서 그 동기를 찾으려는 경향이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대체적인 자세인 것 같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종살이로부터 구해낸 것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네 개의 ‘동사’로 표현되는 ‘네 단계’로 진행된 사건이라 읽으면서, 그 고비마다를 기념하는 행위로 네 번 건배한다는 뜻으로. 출애굽기 6장 6-7절. “그러므로 너(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아랫 줄로 표시한 네 동사, ‘이끌어 내고’ ‘건지고’ ‘구하고’ ‘삼고’ 하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행위를 되새기자는 것이 곧 유월절 만찬이었던 것이다. 랍비 모르데하이 코헨의 고전적 명저 <토라에 대해서>에는, 그들의 조상이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에 대한 멋진 해석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로: ‘나는 너희를 이집트의 고역으로부터 이끌어내겠다’는 선언은, 나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자각적으로 종살이는 견딜 수 없는 고역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벗어나야겠다고 깨닫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 히브리어 ‘고역’은 ‘인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상황이라 판단할 때, 비로소 제 2의 단계가 준비된다는 것이다. 둘째 단계: ‘구원’은 실제적인 노동으로 부터의 구원을 말한다. 그러니까, 마음의 자유가 물리적인 자유에 앞서야하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말인 것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자의 도시나 궁전을 건설하기 위해 땀 흘려 자신을 소모하는 대신, 자신의 노력을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진다.’하고 약속하시는 것. 셋째 단계: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는 말씀은 긍지를 가지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민족만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 있고,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뜻. 그리하여 그들이 자유를 누리며 독립하는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마지막 넷째 단계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의 준비가 완료되는 것’이라 했다.”출애굽기 5장이 기록하고 있는 상황은, 바로가 얼마나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며, 그 상황은 이스라엘이 분연히 일어서지 않으면 안될 상황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장감독이나 간수, 그리고 경멸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의 내통자들조차도 바로의 요구는 너무 지나쳐서 그 요구에 응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바로에게 보고할 지경이었으니. “저희 종들은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로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 종들이 이처럼 매를 맞았습니다. 잘못은 틀림없이 임금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출 5: 16-17)바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 바로의 대답은 채찍과 모욕뿐이었다. 낙망한 모세는 주님에게 대든다. “왜 이 백성을 이렇게 못살게 하시는 것입니까? 왜 저를 그들 가운데로 보내신 것입니까? 저가 바로에게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항의했기 때문에 그가 이 백성을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출 5:22-23)바로 그때, 모세는 ‘자유의 길은 멀고, 수많은 장애를 겪지 않으면 안 되는 법. 억압받는 민중이 일어서기만 하면 당장에 얻어지는 자유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히브리인과 똑 같은 역사를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미하노라면 뭔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08-28
  •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
    중국 명나라 때 지행합일을 주장해 양명학을 발전시켰던 왕양명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산적, 마적 등으로 인해 폐해가 심했다. 왕양명은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강서 지방으로 갔다. 그때 한 사람이 왕양명을 찾아와 진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위병이 그를 가로막으면서 왕양명이 강의중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아섰다. 그러자 그는 ‘아니, 선생님께서 그럴 겨를이 있으십니까’라며 따졌다. 이때 위병은 강의는 날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강의가 끝난 왕양명에게 ‘적도들이 언제 역습할지 모르는 이 위험한 중에 유유히 강의만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라며 묻자 왕양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산중의 적은 무찌르기는 쉬운 일이나 마음에 있는 적은 무찌르기가 어렵다네. 그러기에 나는 매일 내 마음을 향해 도를 강의하고 있는 것 일세’ 왕양명은 왜 그의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 했을까? 사람의 마음은 사고의 중심지며 의식의 원천으로써 선악의 근원지가 되기 때문이다. 즉 생을 지배하는 중심지이다. 헌데 우리는 하루에도 이러한 두 가지 마음 즉 미움의 마음이 지배하는가 하면 사랑의 마음이 생기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기는가하면 섭섭한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이렇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저렇게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든다. 믿음과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생기는가 하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불쑥 들기도 한다. 만일 이렇게 기압골의 영향에 따라 발생하는 마음의 변화를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일 수 없는 정신 분열증 환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 하신다(약 4:8). 두 마음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과 벗하려는 마음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마음(눅 16:13)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을 성결하게 한다는 것은 이러한 두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고 좇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중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좇아 하나님과 함께 재물도 동시에 섬기려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많다. 곧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한편 세상의 쾌락과 축복을 얻기 위해 적당히 세상과도 짝하려 한다. 인간적으로 볼 때 대단히 지혜로운 것 같아도 착각이요, 더 나아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두 마음을 감찰 하신다.(살전2:4) 감찰하다는 헬라 원어로 ‘시험하다, 검사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참된지 그릇되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분변하시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실을 지켜보시고 계신다(대상 28:9, 렘 12:3).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전지하신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 주님의 선한 마음을 본받아야한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은 첫째 겸손한 마음이다(마 11:29). 주님은 본래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낮아져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창조주로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을 섬기는 삶을 사셨고 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셨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희생의 겸손을 본받아 늘 낮은 자리에 설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한다. 둘째 착한 마음이다(행 10:38). 주님의 행하신 모든 일은 다 착한 일이다. 병자를 고치시고 영혼을 구원 시기셨으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다. 착한 일은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만이 할 수가 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들도 착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독한 마음은 성도들 마음에 합당치 않다. 주님처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어려운 이웃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셋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다(벧전 2:21).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님마음을 본받아야한다. 주님의 은혜만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는 마음이다(빌2:7).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셨다. 또한 사욕도 없으셨다. 이 땅의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영광이나 정치적인 야망이 조금도 없으셨다. 무덤도 타인의 무덤을 빌리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주님의 빈 마음을 가진 목회자와 장로와 성도를 원하신다.
    • 칼럼
    • 목회자
    2015-08-28
  • 이문동 所見.7 - 정신재
    이문동 所見.7-낙숫물과 명상 정 신 재낙숫물이 떨어진다 사랑의 귀울림이기다림 포근히 적시는 내 마음의 하수고이문동 삼층 다락에서 경이 음성 듣는다.미감을 향한 갈구 멀리서 또 가까이서괴로우면 괴로움을 꿰고 있는어머니 젖은 음성에서 빛이 쌓여 가고 있었다. 언젠가 강의실에서 시험 감독을 할 때입니다. 한 여학생이 하얀 색깔의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시험을 치르고 있는데, 하얀 살결의 허벅지 아래로 컨닝 페이퍼를 놓고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만 그 여학생에게 눈길이 가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그때 생각난 것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면 성령님이 인도하시어 나로 하여금 의롭게 행동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나는 그 여학생에게 다가가서 눈짓을 하며 경고를 보냄으로써 더 이상 컨닝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묵상의 시간을 가질 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은 여자 때문에 망한 사내였습니다. 그는 “나귀의 새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일 정도로 힘이 세었습니다(삿 15:15). 그가 가사 사람들에게 포위되었을 때에는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삿 16:3) 갈 정도로 힘이 강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영”(삿 15:14)이 임할 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을 때,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소렐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들릴라에게 삼손을 꾀어 그의 힘이 어디서 생기는가를 알아내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자신의 힘의 원천을 거짓으로 알려 주다가 들릴라가 계속 조르자, 그만 자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삼손의 사랑은 결국 헛된 것이 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여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 남녀의 만남은 행복의 꽃밭을 이룹니다. 부부도 오래 살다 보면 사랑이 식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 끈이 단단히 묶여지면, 꽃보다 아름답고 멋지고 은혜로운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맺어 주신 짝이라고 생각하면, 불행이나 이혼이 있을 수 없지요. 추억을 더듬어 지난날의 사랑을 더듬어 보는 것도 삶의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일일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주님과 교제하면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부부 만세.
    • 칼럼
    • 기독시선
    2015-08-14
  • 선교를 위한 남은 자의 역할
    금년의 무더위는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다른 것 같다. 연구실과 교회 그리고 편안히 쉬어야 할 곳인 집도 무더운 여름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보도에 의하면 섭시 45도로서 채감온도가 90도를 넘는다는 중동 지역의 이란과 이라크를 보면서 더워진 지구를 실감하게 된다. 급기야 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오바바 미국 대통령과 반기문 UN 사무 총장이 회담을 통해서 기후 변화에 대해서 적극 대처하기로 했다는 뉴스도 보인다. 육신이 더위에 고통을 받을 때에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영적 세계도 끝까지 견뎌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사상이 남은자의 역할이다. 이사야 10:20-23의 말씀은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배교의 위험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지키시고 유지하실 것이라는 남은 자의 역할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 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모두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절대적인 신앙에서 떠날지라도 남은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말씀 입니다.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도 순환적인 관계를 가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을 배반하고, 벌을 받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하시는 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때에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도록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도전을 주었고, 배교의 위험을 공격 하였다.더 구체적으로 남은 자란 어떤 의미를 지닌 용어인가? 열왕기상 19:10에 의하면, 주의 선지 엘리야와 바알을 섬기는 이세벨과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끓지 아니한 자 7천을 남겨두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만천하에 공포하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 구약성경을 통해서 남은 자들의 정의를 찾는다면, “남은 자들은 곧 끝까지 견디는 소수의 신실한 자들을 가르치며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인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의 남은 자란 혈통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남은 자의 정의를 로마서 9:6에서 잘 말해주고 있는데, “은혜로 택함을 입은 자”가 곧 남은 자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남은 자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소수의 선택함을 받은 자들을 택하셨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 남은 자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남은 자들의 역할은 열방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뜻을 알려드리는 일을 위하여 직임을 받았다. 인간들은 가끔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보게 된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상을 섬기는 일에 극치를 보면, 금송아지 사건을 볼 수 있다.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 가운데 모세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엘 갔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있을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 그것으로 신을 삼았다. 결국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된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남은 자의 역할을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많은 어려움이 도래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남은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은 자를 통해본 이시대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영적으로는 침체된 한국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세속적인 일들 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신앙으로 패턴을 바꾸어야 하겠다. 또한 기독교인들로서 우리가 처한 사회적인 관심 상항에 대해서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하겠다. 즉 동성애 문제라든지, 남북의 문제라든지, 사회 윤리와 부의 재분배 문제등에대해서도 할 수 있으면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영적 가계를 이어 오듯이, 이 시대를 통해서 선교의 역군으로 쓰임 받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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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5-08-14
  • “조크는 작자가 없는 문학”
    “조크는 작자가 없는 문학”이라 했다. 자신은 독자라고만 여겼는데, 어느덧 작품 형성에 관여하고 있다면 작가가 될 수박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모든 조크의 겉모양은 엇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알맹이는 늘 새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국경을 넘나들며 다듬어진 작품일지라도 ‘해석과 적용 과정’을 거쳐 완성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조크는 작자가 없는 문학”이란 말은 단순히 표절에서 자유롭다는 사정만을 두고 함부로 해본 말이 아닌 것이다. 길거리에 개를 동반한 거지가 서있다. 개목에는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는 표지판이 걸려 있고, 땅바닥에 놓인 깡통 속에는 몇 푼의 동전이 들어있다. 가까이에 있는 전화 부스에서 한 사나이가 튀어나오더니, “잘 보시오. 내가 백원짜리 동전 넷을 가지는 대신 오백원짜리 동전 한 개를 넣었다오.”했다. 거지 : “이 사기꾼 녀석, 네놈이 넣은 것은 백원짜리 동전이잖아!”사나이 : “사기꾼은 네놈이지. ‘눈이 보이지 않는다.’ 했으면서.”거지 : “이 멍청아, 눈이 안 보이는 것은 개지 내가 아니지 않는가. 표지판 은 개목에 걸려있는 걸.”이같은 유형의 조크를 생산해내는 작자는 여의도 언저리라면 어렵잖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크에는 작가가 따로 없다고는 했지만, 더러 작자를 밝힐 경우 효능이 커진다고 판단된다면, 이름을 밝힐 수도 있다는 것이 조크계의 불문율이 되어 있다. 출처를 밝힐 수는 있지만, 풋 노트를 달지 않아도 처벌은 받지 않는다.A “아침 일찍 낚시를 가시는가 보지요.”B “아닐세, 낚시하러 가는 길일세.” A “그래요? 나는 낚시하러 가시는 줄만 알았네요.”프랑스의 극작가 마르셀의 <웃음에 대해서>에 있는 걸작이라 알려지고 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우월감’을 표현한 조크라던가? 그렇지만 요사이 토크 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라 굳이 작자의 이름까지 들추지 않아도.... 어느 겨울 오후, 버스정류장에 남자 둘이 서있다. 한 사람은 평범한 시민 같아 보이나, 다른 한 사람은 약간 이상한 느낌을 주는, 이를테면 초능력자이거나 예언자, 아니면 정신이상자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침묵이 불안했던지 평범한 쪽이 먼저 입을 연다. “저기 저 할머니는 눈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가 봐요.”눈이 질펀한 길바닥에서 할머니 한 분이 뭔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열쇠라도 떨어뜨린 모양이지요.” 응대가 없자 멋쩍은 듯이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받아 초능력의 사나이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아니라오.”평범한 시민이 놀라 사나이를 쳐다보는 순간,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아버린 듯 섬뜩한 느낌이 등줄기를 흐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간은 두려운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그걸 아시지요?” 사나이가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할머니가 찾고 있는 동전은 내가 벌써 주은 걸요!”아무나 알 수 없는 일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일 것 같지만, 미리 돈을 주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그러니까 제 삼자처럼 구는 당사자... 정치인의 기자회견에서...부동산 소개사의 언변“이 집으로 말씀드리자면, 솔직히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손님께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하실 수 있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나쁜 면부터 말씀드리자면, 환경문제입니다. 이쪽에는 양돈장이 있고, 저쪽에는 암모니아 공장, 그리고 맞은편에는 사격장이 있다는 정도입니다. 이제 좋은 면을 말씀 드리자면, 언제나 생활을 위한 지적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그것은 뛰어난 현대적 특징이랄 수 있지요. 창문을 완전히 닫고 있어도 풍향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구요. 이렇게 훌륭한 특징을 갖춘 집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여기서도 해석과 적용, 그리고 책임은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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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5-08-14
  • 덤! 덤! 덤!
    이강백의 ‘결혼’의 내용이다. 남자가 말한다. 난 사기꾼입니다. 이 세상 것을 잠시 빌렸었죠. 그리고 시간이 되니까 하나둘씩 되돌려 줘야 했습니다. 이제 난 본색이 드러나고 이렇게 빈털터리입니다. 그러나 덤,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누구 하나 이것이 내 것이다 말할 수 있는가를,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모두 덤으로 빌렸지요. 눈동자, 코, 입술, 어느 것 하나 자기 것이 아니고 잠시 빌린 거예요. 남자는 관객석의 사람을 붙들고 또 말한다. 이게 당신 겁니까?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요? 잘 아꼈다가 시간이 되면 꼭 돌려주시오. 덤 이젠 알겠어요? 남자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덤, 난 가진 것 하나 없습니다. 모두 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가진 건 뭡니까? 무엇이 정말 당신 것입니까? 넥타이를 빌렸던 남성 관객에게 내 말을 물어 보시오. 그럼 나를 이해할 거요. 내가 당신에게서 넥타이를 빌렸을 때, 그때 내가 당신 물건을 어떻게 다뤘소? 마구 험하게 했었소? 망가뜨렸소? 아니오, 그렇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렸던 것이니까 소중하게 아꼈다간 되돌려 드렸지요. 덤! 당신은 내말을 들었어요? 여기 증인이 있습니다. 이 증인 앞에서, 약속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덤 당신을 빌리는 동안에 아끼고, 사랑하고, 그랬다가 언젠가 그 시간이 되면 공손하게 되돌려 줄 테요. 덤! 내 인생에서 당신은, 나의 소중한 덤입니다. 덤! 덤! 덤! 이 글의 주제는, 인생에서 소유의 모든 것은 빌린 것이며, 덤과 같은 것이란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서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 잠시 빌린 것이다. 자연도 모두 빌린 것이며, 인간이 소유한 명예도 지위도 물질도 잠시 빌린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사랑할 때도 역시 상대를 잠시 빌린 것이다. 헌데 자고로 인간들은 이러한 덤 의식이 무지하고 소유욕만 강하다. 그래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알아야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고 없이 부르시면 이 모든 것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정복자였던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은 생전에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관에 네 개의 구멍을 뚫어 양손과 발을 내놓아라’ 이것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사람은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온갖 부정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전생애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에서 얻는 것은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사람은 눈을 뜨자마자 망가진 차를 보며 아까워했다. 이에 간호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선생님, 지금 차가 문제가 아니에요. 선생님의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는 말이에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눈을 돌려 왼손을 보더니 또 소리쳤다. ‘아이고 내 롤렉스시계, 롤렉스시계...’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나는가? 세상에서 오직 명예와 권력과 재물만이 가장 안전하고 든든한 방패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을 보자.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처신하던 자가 점차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쌓이면서 어느 사이에 그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흘러 더 많은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갖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예와 권력을 욕심내며 더 높은 곳을 탐하다가 결국 큰 실패와 파멸을 맞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쌓일수록 넘어질 위험도 더 커지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고로 우리는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반드시 축복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파멸로 인도하는 사닥다리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함으로써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또 축복을 받아 명예와 재물이 많아질 지라도 늘 이러한 위험이 있음을 알고 더욱 삼가하며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명예와 재물이 더해진 자들은 오히려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선한 일에 힘씀으로써 받은 축복을 더 크고 신령한 축복으로 나아가는 통로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가진 자들은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아 근검절약으로 재물을 축적한 뒤 이를 다시 세상에 환원시켜 수많은 도서관이나 복지 재단을 만든 미국의 부호들처럼 사회에 환원하면 어떨까?
    • 칼럼
    • 목회자
    2015-08-14
  • (정신재)동천冬天
    동천冬天 서 정 주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한국은 전쟁 후 폐허를 딛고 21세기에 모범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광복 후 1인당 국민 소득이 60달러에 불과하였던 한국의 경제는 현재 1인당 26,000달러로 380배 늘어났고, 무역 규모는 세계 12위이며, 반도체와 조선 산업은 세계 1위, 인터넷 통신 보급률 세계 1위, 철강 산업 세계 4위, 자동차 산업 세계 5위 등 경제 규모면에서 엄청난 발전이 있었습니다. 1987년 대규모 민주화 항쟁이 있은 이후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도 이룩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경제 개발 모델과 정치 민주화 과정은 아시아·아프리카 등의 여러 나라의 경제와 정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문화면에서도 K-Pop, K-Drama 등은 중국·일본?대만 등에 한류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성장 배경에는 시의 역할이 한 몫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1976년 『서정주 시선』에 위 작품이 실린 이후, 「동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습니다. 이는 이 작품에 나오는 이미지가 지상과 천상을 오가며 사랑의 깊이가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지 섣달”은 일 년 중 가장 밤이 길고 추운 때지요. 이때 화자는 임의 모습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눈썹을 생각해 냅니다. 화자는 그 아름다움을 혼자만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소유의 욕심도 버리고 집착과 권태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천 날 밤이나 되는 꿈으로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눈썹”이 임의 눈썹을 닮은 초승달이 되었네요. 그러자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도 비끼어 가네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기에 한국인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닐까요.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류 가운데서 역사상 그 누구도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보이신 분이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몸소 못박히셔서 속죄양의 역할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과 다시 화평할 기회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와 함께 하게 하셨지요. 필자는 성가대 솔리스트입니다. 어느 날 녹화된 나의 노래를 보고 나는 얼굴이 매우 화끈거렸습니다. 화면 속의 내가 너무 노래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평소에 내가 그리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창피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리숙한 아들이지만, 진정 사랑하지요. 아마 하나님의 심정도 이러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진정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07-31
  • 선교지의 한국어 교육
    선교지에서의 교육을 통한 선교 접촉점은 참으로 중요하다. 대부분의 선교사가 말씀 선포 이전에 접촉점을 갖게 되는데 피부와 언어가 현지 사람들과 다른 한국인 선교사는 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거부감을 완화하여 그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전략이 한국어의 가르침이다. 필자는 교수 생활을 하면서도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끊임없이 전략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평생교육원을 통한 한국어 교원 양성이다. 이는 국립국어원으로 부터 교원양성을 허가 받아서 교원들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이러한 기관을 만들어서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좋은 교수와 일꾼들을 만나서 2013년부터 진행해 왔다. 최근에는 우리 평생교육원에서 교육 받은 두 사람의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르완다 지역으로 파송되었다. 지난 7월 19일 두 분의 파송식이 수원명성교회에서 있었다. 그 분들에게 전달해야할 “한국어 3급 교원 교육 수료증‘을 갖고 참여하였다. 어떻게 보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도 있지만 기어이 떠나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우리 기관을 통해서 그들의 사역에 일조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생기는 순간이었다. 필자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선교지에 전략화 하기 위해 서둘렀던 이유는 경험에 의한 것이다. 과거 선교 단체에 근무하던 중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활동하기를 원했지만 언어를 배울 길이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 노량진에 소재한 SDA영어 학습당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영어를 배우면서 언어가 선교의 접촉점을 갖는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제 세계는 한국어를 신기하게 볼 뿐만이 아니라 배우기를 원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한류의 본질은 문화적 요소이다.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요구이다. 한류를 통해서 화면 속에서 한국을 이해하도록 했다면 이제는 교육을 통해서 배우게 해야 함과 아울러 직접 경험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래의 글은 몇 년 전 국내의 인터넷에 소개된 내용이다. 북동유럽 발트해 인구 320만 명의 나라 리투아니아에도 최근 한류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행사가 열렸다. 빌뉴스대학교에서는 한국어 강좌를 수강하고 있는 학생들이 ‘한빌뉴스’(HANVilnius) 동아리를 결성해 한국 문화 배우기와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빌뉴스대학교는 1579년 설립된 동유럽에 설립된 유서 깊은 대학교 중 하나이다. 15년 전 부터 여러 해 동안 한국어 강좌가 열렸으나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런데 2010년 9월부터 주말학교 프로그램으로 한국어를 다시 가르치고 있다. 빌뉴스대학교는 향후 2-3년 내에 선택과목이 아니라 학사과정 프로그램으로 한국관련 학문이 자리잡길 기대하고 있다. 한국어 수강생들은 함께 정보를 공유하면서 한국을 더 많이 알고, 한국 문화를 익히고 이를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동아리를 결성했다. 최근에 동아리 결성식이 열린 빌뉴스대학교 동양학센터 강의실은 10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태극기를 벽에 걸고, 또한 스크린에 띠우면서 열심히 준비했다. 창립 회원들은 리투아니아어와 직접 배운 한국어를 사용해 연극적 요소와 함께 다양한 한국 문화를 소개해 참석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스크린을 통해 한국의 대중 가수나 그룹이 등장할 때에는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들 가수들의 실제 공연장에 온 열혈 지지자들을 보는 것 같았다. 함께 아리랑을 부르면서 행사를 마쳤는데 어느 한인회 모임에서보다 더 한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현재 인터넷을 통해 한국 드라마, 영화, 대중가요 등이 주로 리투아니아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펴져 있다는 것을 실제로 체감할 수 있었다. 동아리 창립 회원이기도 한 리투아니아인 외교관은 한국 드라마는 짧고, 상황전개가 빠르며 서양과는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어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자막 없이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필자가 소개한 리투아니아에서의 한글 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의 기대심리를 선교전략으로 연결시켜야 하겠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연구원)
    • 칼럼
    • 선교
    2015-07-31
  • 유대인의 조크와 ‘페이소스’
    조크 1: 네덜란드 동부지역에 폭우가 쏟아져 일대가 물에 잠겼다. 경건한 유대인 모세의 집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자, 하나님께 기도했다. 반드시 지켜 줄 것이라 믿고 기도했지만, 물은 점점 불어나기만 했다. 그렇게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마르크가 와서 피난가기를 권했다. 모세는 거절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 줄 것”이라면서. 아래층에 물이 차자 처자를 데리고 이층에서 기도했다. 이층도 물이차자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도했다. 이제 기도 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 때 친구 암논이 작은 배를 저어 와서는 소리쳤다. “이대로 있다가는 곧 빠져 죽을 것이니 어서 배에 오르라!” 그러나 모세는 암논의 호의도 거절했다. 친구의 보트는 멀리 사라졌다. 모세 일가는 집과 더불어 떠내려가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모세가 하늘나라 입구에서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했다. “그렇게도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했다. “나는 그대의 기도를 듣고 두 차례나 구원의 손길을 보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그대는 듣지 않았네.” 조크 2: 랍비 솔로몬의 삶은 경건했다. 언제나 자신에게 엄격했던 그는 토라를 어기는 일도 없거니와, 날마다 기도와 경전 연구에 몰두했다. 그야말로 유대교 성직자의 모범이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랍비 솔로몬이 죽어서 하늘나라로 영접되었다. 하늘나라에서 그에게 배당된 집은 아주 소박해서 속세에서 살던 집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길 건너에는 향기로운 꽃동산으로 둘러싸인 궁궐 같은 저택이 있었다. 어느 날 저택의 유리창 너머로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서 솔로몬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 사람은 생전에 택시 운전사를 하던 벤이었기에. 그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노닥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벤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와인을 마시며, 감미로운 하프 소리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음악소리에 섞여 벤의 호방하고 야비한 목소리가 길 건너 자신의 집에 까지 들려왔다. 벤이란 녀석은 한 마디로 돼먹지 못한 파락호였다. 폭주를 들이키며 도박과 여자 후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시너고그에 얼굴을 들이미는 일도 거의 없었다. 생전의 두 사람의 삶은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랍비는 생각했다. 필시 착오 때문일 것이라고.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을 털어놓았다. “하나님 왜 나는 이렇게도 허술한 집에서 겨우 비바람을 피하며 초라하게 살고 있는 데, 저 되지 못한 파락호 벤은 궁전 같은 대저택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대답했다. “그대가 시너고그에서 설교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잠을 잤다. 그러나 벤이 운전하는 택시의 승객들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열심히 기도했다.”조크 3: 러시아의 숲에서 어린 소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런 경우, 유대인의 짓이라면서 유대인 마을은 습격을 받아 불타고 재산을 약탈당하는 것이 예사로웠다. 이것을 “포그롬(pogrom)”이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인 거리에서는 유대인이 소녀를 죽였다면서 격분했다. 총과 칼을 꺼내들고 유대인 마을을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 일하고 있던 한 유대인이 소식을 전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든 유대인이 시너고그에 모여 랍비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한 유대인 청년이 달려와서 말했다. “좋은 소식이요! 좋은 소식이요! 좋은 소식이요!” 모두가 기도를 멈추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이 말했다. “죽은 것은 유대인이었어!” 양념: 그리스어 ‘파토스’는 영어의 ‘페이소스’가 되면서 약간 함축이 달라지는 것 같다. ‘승화된 아픔’이랄까. 유대인의 조크에서는 거의 언제나 ‘페이소스’를 읽을 수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찰리 채플린의 과장된 몸짓이 관객에게 와 닿는 것은 그 페이소스 때문이 아닐까. 그가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07-31
  • 외모로 차별하지 말자
    사람의 얼굴은 참 묘하다. 자신의 의지 없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얻었지만 이 얼굴로 인해 좋다, 나쁘다, 싫다 등 평가를 받게 된다. 이 평가는 사람의 성품을 결정하게 되고, 심지어는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타인의 외모를 평가할때는 지극히 신중해야 하며, 심사숙고 해야 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외모란 사람의 얼굴, 신분, 직업, 빈부, 성별, 종족 등 여러 외적인 조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사람의 외적 조건에 따라 차별 대우하는 것을 가리킨다.사람을 외모로 취해선 안될 이유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전인이 하나님의 성품의 영향을 받아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걸작품인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면 이는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실례를 보자.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가장 약하고 작게 보여진 다윗을 장차 왕으로 예정하셨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별, 종족, 신분, 지위, 빈부, 과거를 보고 판단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 소경된 자, 문둥병자, 가나안 여인, 혈루증 앓은 여인, 로마의 백부장, 니고데모, 삭개오 등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그들에게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사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세상적으로 볼 때에 지혜나 문벌 재산이 없는 비천한 자들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약하고 천하고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게 하시고 세상의 지혜자 문벌 좋은 자 학식있는 자 부자 권력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외모가 초라한 가난한자 실직자 노인 장애인 병든자 소년 소녀가장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이주여성 등을 본 척 만 척 하며 넘어가서는 안된다. 우리는 왜 사람을 외모를 보고 취했을까? 나와 무관한 사람들로 보고 멸시했을까? 고통 받는 그들을 돕지 않았을까? 그들은 모두 주안에서 한 아버지를 모시는 하늘의 형제 자매들인데 말이다(마 12:50).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주님의 세계명(요 13:34)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키지도 않고, 경건한 채 하면서 주안에서 한 형제된 성도들을 차별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주님의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요 13:34). 새 계명을 지키라는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말씀이다. 예화로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선 안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미국의 한 도시에 노인 부부가 있었다. 노부부는 자신들이 평생 동안 모은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헌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지금의 미국명문 대학교인 하버드 대학을 방문을 하여 정문을 지키는 수위에게 총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수위는 노부부의 허술한 옷차림을 보고 퉁명스럽게 대했다. “총장님은 지금 바쁘셔서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시간이 없소”라며 거절 했다. 하지만 노부부는 “이런 대학하나 설립하는데 얼마나 돈이 들어갑니까?”라고 수위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위가 노부부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면서 멸시하는 태도로 인정사정없이 쫓아냈다. 노부부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두 노부부는 자신들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지금의 명문대학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 후 하버드 대학에서는 이런 사연을 듣고 크게 아쉬워 했다고 한다. 현재 하버드 대학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기록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고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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