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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분열 책임 누구에게 있나
- ◇처음부터 교파주의 교회로 자리매김한 한국기독교에는 수십 개의 교파와 또 그들 교파에서 분립한 수백 개의 교단이 있다. 이에 따라 자연히 교파 간, 또는 교단 간 연합을 위한 단체와 기관들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교단협의체인 연합단체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1924년 창립),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1989년 창립), 한국기독교연합(한기연, 2012년 창립)이 있고, 최근에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2018년 창립)이 새로 탄생했다. 그 외에도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한기보협, 1978년 창립), 한국기독교교단협의회(교단협, 1985년 창립) 등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교단 간 연합과 일치를 목적으로 창립된 것이다. 그동안 이들 연합단체 중 ‘교회협’은 기독교의 진보를 대변하고, ‘한기총’은 보수를 대변해 왔다. 그런데 한기총이 2012년에 분열하면서 ‘한기연’(창립 당시는 ‘한교연’)이 창립되자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현저한 약화를 초래했다. 이때부터 한국기독교는 우리사회의 주류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전히 연합단체의 분열에 그 원인이 있다.◇300개도 넘는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한 한국기독교가 대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하나된 연합단체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먼저 한국기독교의 최초의 연합단체로 출범한 교회협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복지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매우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특히 늘 약자의 편에서 정의를 외친 교회협의 모습은 거대 권력에 억눌리기만 했던 서민들의 희망이었다. 교회협의 이런 역할은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 본연의 임무이기도 하다. 반면 보수진영의 결집을 목적으로 탄생한 한기총은 그간 교회협 위주로 대변되던 한국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진영은 한기총을 통해 대대적으로 결집했고, 사회적 현안에 있어 보수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사회의 안정과 통합에 기여했다.◇이렇게 구성된 한국교회의 교회협과 한기총의 구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진보와 보수로 대변된 양 단체는 그 정체성 탓에 서로가 굳이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대시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1년에 한번 부활절에는 모두 함께 모여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리며 한국교회의 하나된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기총이 분열하면서 그 구도는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로인해 무엇보다 한국기독교를 상대해야 할 정부 당국을 혼란케 만들었다. 다른 종교는 종교전통별로 한 단체만 상대하면 되었지만, 기독교는 이제 진보측과 보수측 뿐 아니라, 또 다른 단체들도 상대해야 할 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아예 외면해버리는 경우도 많다.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를 이처럼 약화시킨 분열의 책임은 합동측과 통합측에 있다. 그럼에도 그 분열의 책임을 누구도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의 연합과 일치가 제자리를 찾으려면 통합측은 교회협에 매진하고, 합동측은 한기총에 합류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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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분열 책임 누구에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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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와 목사
- ◇히브리어 구약성경에는 ‘토라’(Torah)에 이어 ‘네비임’(Nebiim)이라는 예언서가 나온다. 이 예언서는 총 19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눈다. 전기 예언서는 사실상 이스라엘의 역사서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그것이다. 후기 예언서는 우리가 ‘선지자’라고 부르는 예언자들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구약성경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상 대선지서),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상 12소선지서) 등 15권이다. 다니엘서는 예언서에 포함되지 않고 성문서(Kethubim)에 편입되어 있다. 대선지서니, 소선지서니 하는 말은 초대 라틴계 교부들이 앞에 세 권의 대선지서에 비해 그 분량이 적다는 뜻에서 소선지서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지, 결코 이들의 예언활동이 대선지서 저자들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예언자를 뜻하는 나비(Nabi)는 구약성경에서 약 300회 이상 사용된다. 그것은 ‘말하는 자’ ‘외치는 자’ ‘고하는 자’라는 뜻이다. 고대 언어학자들은 이 말의 어의(語意)는 바벨론어의 ‘나부’(Nabu, ‘부르다’라는 뜻)에서 왔다고 해석한다. 이들은 이 나부에서 나비, 즉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나비의 정의를 “예언자는 어떤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식이 있는 자이며 , 또 그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의 사명은 직접적인 신적 영감에 의해 그에게 전달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선한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그 사회 공동체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이다.◇이같은 예언자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보는 것’(Seer)이고, 다른 하나는 ‘말하는 것’(Speaker)이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을 얻게 하는 영적 환영, 즉 계시를 보는 것이고, ‘말하는 사람’은 그 본 것을 권위있게 전달하는 메신저이다. 즉 예언자는 하나님이 보여준 것을 보고 그것을 말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보거나 듣는 영적 환상이 없이는 예언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내가 보니...” 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고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예언자는 세속의 사물을 보는 두 개의 육신의 눈 외에,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또 다른 두 개의 영적 눈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예언자는 사이비이거나 가짜이다.◇기독교의 목사직은 이 예언자 전통에서 왔다.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 즉 성경 말씀를 제대로 깨닫고 그 계시를 해석해 전달하는 사람이 목사이다. 그래서 목사가 전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말씀의 대언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없는 설교는 허상이다. 설교는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달아 청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진지해야 한다. 그것이 ‘예배’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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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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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 ◇한국 기독교는 교회의 용어가 그 개념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가장 중요한 교회론에 있어서 ‘교회’(敎會)와 ‘교회당’(敎會堂)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당을 팔면서 교회를 판다고 광고한다. 과연 교회(εκκλησι′α)를 사고 팔 수 있는 것인가? 한국 기독교도 초기에는 ‘교회’와 ‘예배당’으로 구분해 사용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예배당’은 사라지고 모두가 ‘○○교회’라고 불린다. ◇한국 천주교의 경우는 ‘교회’(敎會)와 ‘성당’(聖堂)을 명확하게 구분해 사용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이고, 성당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축성한 거룩한 건물, 신자 공동체가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라고 한다. 중국 기독교도 역시 ‘교회’(敎會)와 ‘교당’(敎堂)을 명확히 구분한다. 이를 혼용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만이 ‘교회’와 ‘교회당’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교회’로 통칭한다. ◇신자가 흔히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신자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당에 가는 것이다. 교회당에 모인 신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이다. 한국 기독교에 교회론이 흔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가 신자 공동체인지, 눈에 보이는 십자가 달린 건물인지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어를 이렇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딤전 3:15), “자기 피로 사신 것”(행 20:28),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고전 1:2),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비밀”(골 1:26)이라고 했다. 어찌 이런 ‘교회’가 십자가 달린 건물인 ‘교회당’과 혼동될 수 있는가.◇‘복’(福)과 ‘축복’(祝福)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향해 ‘축복해 달라’고 기도한다. 복은 복의 근원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축복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 누구에게 축복하는(복을 달라고 비는) 분은 아니다. 이 역시 한국 천주교의 경우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강복’(降福)이라 하고, 사제나 신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 비는 기도는 ‘축복’(祝福)이라 한다. 강복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 또는 복을 내려 주심을 뜻”하는 것이고, 축복은 “사람이나 사물에 하느님의 복이 내리기를 비는 행위”라고 구분해 설명한다. ◇‘제단’(祭壇)과 ‘강단’(講壇)을 구분하지 못한다. 흔히 헌금을 제단에 올린다면서 강단에 갖다놓는다. 제단과 강단은 그 개념과 본질이 전혀 다르다. 제단(altar)은 제사장과 제물이 필요하고, 강단(pulpit)은 설교자와 말씀이 필요하다. 천주교는 화체설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미사 때마다 제물이 되어 제단에 받쳐지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시고, 첫 것을 폐하심으로(히 10:9, 10) 더 이상 제단과 제물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용어상의 이런 구분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개념이 정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 사용되는 용어는 수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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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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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머슴론’
-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으라’고 그에게 말할 주인이 어디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하리라”(눅 17:7-10)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이는 종의 자세, 종의 의무, 또는 종의 도리를 교훈한 것이다.◇성경은 목회자를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종, 그리스도의 양인 교인을 양육하는 목자. 그리스도의 사신이라고 한다. 한국교회에는 최근 목회자 스스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교회 '머슴'이라고 부르는 자도 있다. 어쨋든 이 말은 목사는 교회를 섬김에 있어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종이나 머슴일 뿐, 그 봉사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권한도 없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머슴은 주인과 맺은 일정액의 ‘새경’을 받는 것으로 그 권리는 끝난다. ‘종’이나 ‘머슴’이나 ‘사신’은 다 주인의 명령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 의무일 뿐, 그 결과에 대한 다른 댓가를 요구할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한다.◇그런데 요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일생동안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교회를 봉사하며 교회와 맺은 ‘새경’은 다 받고도, 은퇴하면서 과도한 예우를 요구해 교회의 분쟁을 야기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여기에는 퇴직하는 목사의 생활비 외에 목회연구비니, 은퇴위로금이니 하는 수억 혹은 수십억원의 돈이 거래된다. 오늘도 전국에 원로목사에 대한 이같은 예우 문제를 놓고 교인들 간에 분쟁하는 교회가 수두룩하다. 아예 대놓고 ‘내가 목회하는 동안 교회 재산을 얼마를 늘렸으니 이만큼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목사도 있고, 자기네 교회의 교단 내 위치와 체면을 내세우며 ‘이 정도는 해 주자’는 당회원들도 있다. 이는 목사가 그리스도의 종이나, 머슴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그것이 지나치지 않다면 교회와 원로, 모두에게 좋은 일일 수이 있지만, 교회의 형편은 무시된채 일부 지지자들의 무리한 주장에 힘입어 교회가 과도한 빚을 지면서까지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되니 끝내 그 교회는 시험에 들고 만다.◇목사는 기업체의 오너가 아니다. 따라서 기업이 이익을 많이 남겨 자산을 늘렸다고 해서 배당금을 받는 간부도 아니다. 배당금이 필요하면 처음부터 대기업에 입사해서야 옳다. 목사는 오로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양무리를 치는 목자요, 그 교회를 돌보는 그리스도의 종일 뿐이다. 목사가 이 종의 신분을 잃고 은퇴하면서 ‘내가 고생한 댓가’라며 교회의 돈을 챙겨가는 것은 교회공동체가 이룬 천재(天財)를 횡령하는 도둑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런 몰지각한 도둑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왜 목사 세계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만들려 하나. 원로목사는 교회가 부담하는 생활비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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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머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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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의 결의
- ◇장로교는 1년에 단 한 번 교단 총회를 개최한다. 총회는 “각 하급 치리회에서 합법적으로 제출한 문의, 헌의, 청원, 행정쟁송, 상고 등의 서류를 접수하여 처리한다.” 그런데 흔히 어떤 사건에 대하여 “우리 총회에서 결의했다”고 하여, 마치 총회의 결의를 어떤 ‘규범’이나 변개할 수 없는 ‘진리’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국 장로교회의 기본 신조를 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1장 제4항은 총회의 결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시대 이후 모든 공의회와 협의회는 총회 차원이든, 지방회 차원이든 항상 과오를 범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실제로 과거의 많은 회의들에서 실수들이 범해졌다. 그러므로 총회의 결의는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절대적 규범의 원천이 될 수 없으며, 신앙과 실제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주게 될 뿐이다.”◇기독교 역사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처럼 총회와 협의회가 과오를 범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국교회도 여러 차례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그 중에 몇 가지 사례를 들면,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3회 총회는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은 2000년 전의 일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는 김춘배 목사의 소위 ‘교회 내 여권 문제’가 이단설로 심각히 대두되었다. 총회는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듬해 제24회 총회에 그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성경은 여자의 교권을 불허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시대 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그 정신 태도가 파괴적 성경비판의 정신 태도와 다름이 없다.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가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와 제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통합측은 1994년 9월 12일 제79회 총회에서 정반대로 여성안수를 통과시켰다. 그러면 어느쪽 총회가 옳은 것인가?◇또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우리는 신사(神社)가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어 신사참배를 솔선여행하고 추이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銃後 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함”이라고 결의했다. 이 결의로 인해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교역자들은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천만의 행동”이라고 하여 교회에서 모두 쫓겨났다. 그러나 1946년 예장 남부대회와 제34회 총회는 신사참배 결의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취소했다. 이 또한 제27회 총회와 제34회 총회 중 어느쪽이 옳은 것인가?◇그런데 한국교회는 이같은 교회사를 배웠다는 사람들조차 총회의 결의를 앞세워 타인을 정죄하는데 앞장 선다.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총회의 결의에는 이처럼 과오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무조건 “우리 총회가 그같이 결의했다”는 것을 앞세워 어떤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타인을 비난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총회의 결의는 규범이나 진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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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의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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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이 가져온 비극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번영을 누렸으나, 전제 군주 솔로몬이 죽자 불만을 가진 정치세력에 의해 왕국이 분열했다. 북쪽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남쪽에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중심한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만 남아 ‘유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왕궁과 성전을 비롯, 이스라엘의 정통성은 남 유대 예루살렘에 있었다. 처음부터 비정통성에 의해 시작된 북 이스라엘 왕조는 거듭된 혁명에 의해 8번이나 바뀌었다. 당연히 사회는 불안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그러다가 끝내 7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때 남 유다는 앗수르에 봉신 관계를 유지하여 완전 정복은 면했으나, 예루살렘에는 앗수르 문화가 흘러들어와 정치, 종교, 사회, 문화 전반이 친앗수르 정책으로 넘쳤다. 심지어 성전에는 앗수르의 국가 신(神)을 위한 제단이 만들어지고, 여호와 신은 제2차 신(神)으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착수했다. 이는 이사야와 미가 등 예언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바도 있지만, 북 이스라엘의 종교적 혼합주의가 가져온 종말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성전의 앗수르 종교의 의식용 제단을 철거하고, 앗수르와의 정치적 종속 관계를 청산했다. 그러자 앗수르는 701년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유대를 침공해 많은 도시들을 파괴했다. 유대는 앗수르가 요구하는 조공을 받칠 수 밖에 없었다. 히스기야는 내탕고의 금은 보석과 성전기둥에 입힌 금과 은까지 벗겨서 앗수르에 받쳤다.◇그런데 강대국 앗수르도 새로 일어난 갈대아 왕조 신바벨론에 의해 610년 제국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남쪽의 애굽이 병력을 동원하여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것처럼 하다가 시리아와 팔레스틴 땅을 치기 시작했다. 압제자 니느웨(앗수르의 수도)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던 유대의 백성들은 그 기쁨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정복자에 의해 탄식과 불안으로 대치되었다. 애굽은 봉신 관계를 맺은 유대 왕을 마음대로 세우기도 하고 폐위시키기도 했다. 하박국과 예레미야 등이 이러한 정치적 와중에 등장한 예언자이다. 그러나 애굽의 지배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팔레스탄으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유대는 항복했다. 모든 재산과 보물은 약탈당했다 그리고 여호야긴 왕을 포함한 유대의 고위층들은 바밸론으로 끌려갔다. 이것이 1차 유배였다.◇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대항할 아무런 힘이 없었음에도 이웃 국가들(에돔, 암몬, 모압, 두로, 시돈)의 부추김으로 인해 바벨론에 봉기를 들었다. 당시 예레미야는 이러한 왕의 정치적 판단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고 끝까지 반대하다가 반국가적 반역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예루살렘 성벽은 1년 반동안 포위된 가운데 586년 여름에 끝내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은 약탈을 당하고 방화되고 성전은 불탔다. 그리고 유대 영토는 바벨론의 총독이 통치하였다. 왕국의 분열이 가져온 비극의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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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이 가져온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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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 도전
- ◇한국기독교는 지금 우리 앞에 닥친 도전과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달려있다. 세속적 도전이 지난 세기 겪지 못한 교묘한 방법으로 ‘동성애’니, ‘차별금지법’이니 하는 이름으로 옥죄어 오고 있다. 이 세속적 도전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론부터 바로 정립해야 한다. 교회당 크게 지어놓고 내 교회만 채우면 된다는 이기적 개교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취할 본질이 아니다. 이는 결국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는 길일 뿐이다. 특히 ‘교회당 잘지어 놓았으니 우리교회로 오라’는 교인뺏기 전도는 ‘양도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건 ‘진짜 이단’이 하는 짓이다. 아직도 이런 교회가 있다면 피해를 본 교단차원에서 이런 교회에 이단시해야 마땅하다.◇그러면 교회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기복주의적 근본주의 신앙을 바꾸어야 한다. 기복주의는 그것이 종교성을 띄고 있을지라도 지극히 세속적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세속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기복주의적 근본주의 신앙은 교회와 교인들로 하여금 우민화(愚民化)시켜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유리시킨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을 사회인으로서 당당하지 못한 이중적 인격자로 살아가게 만든다.◇둘째, 물량주의적 성공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많은 교인들을 거느렸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공한 목회는 아니다. 대교회 목사로서 남들보다 비교적 돈을 많이 쓰기 때문에 교계에서 인기를 누리고 어른 대접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소위 대교회에서 밀려난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어디로 떠나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대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은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나 신흥종교로 떠나간다. 성경은 한 영혼이라도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멧돌을 메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했다. 목회자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가치관에 바로 서 있어야 성공한 목회자이다.◇셋째,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만 잘 되면 되는 것이지, 다른 교회는 내가 알바 아니라는 식의 개교회주의를 버려야 한다. 교회는 그것이 어떤 간판을 달았든 ‘하나’이지, 둘이 있을 수 없다. 흥하면 같이 흥하고 망하면 같이 망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원리이다. 뿐만 아니라 개교회주의는 교회들의 연대와 사귐이라는 그리스도교회의 원리마저도 허구화 시키고, 교회를 마치 투전판처럼 이기적 집단으로 전락시킨다. 특히 장로교회의 원리는 독립적 개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파 또는 교단주의에 매몰되어 교회는 ‘하나’라는 원리가 무시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매우 암담하다. 특히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의 교단분열은 매우 한심한 일이다. 개혁주의라는 참 좋은 신앙전통을 받았으나 우리시대 한국교회가 장로교의 전통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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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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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자유의 함정
- ◇세계에서 대한민국만큼 종교자유를 누리는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임에도 아예 종교는 ‘법’ 자체가 없다. 다만 헌법 20조 1, 2항에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고, 그 헌법 정신에 따라 각종 법령이 종교관련 규정을 정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민법 제32조 ‘비영리법인의 설립과 허가’, 사회단체등록에 관한 법률 제2조 ‘적용 배제’, 교육법 제5조 ‘교육방법’, 형법 제158조 ‘장식 등의 방해’, 형사소송법 제149조 ‘업무상 비밀과 증언 거부’, 민사소송법 제286조 ‘증언 거부권’, 행형법 제31조 ‘교회(敎誨)’, 노동조합법 제11조 ‘차별대우의 금지’, 노동기본법 제5조 ‘균등처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5조 ‘적용의 배제’를 비롯하여 기부금품 모집 금지법, 영화법시행령 및 각종 세법 등에서 종교와 관련된 규정을 두고 있다.◇그러다보니 누가 어디에 종교 간판을 내걸든 간섭하는 기관도 없고, 누가 어떤 종류의 신흥종교를 창시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종교인지, 아닌지조차 심의하는 기구도 없다. 종교는 완전 자율에 맡겨져 있는 것이 한국사회이다. 그로인해 신도들이 헌납한 종교재산의 ‘사유화’, 종교단체의 ‘사이비성’ 등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종교 내부에서 비판의 자유를 내세워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이단이라며 비난하는 소위 이단연구가들의 주장이 사실 관계가 증명되지 않는 허위나 왜곡에 바탕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의 심각성이다.◇정통성을 담보해야 할 종교에 있어서 그 집단의 정통성이 부정되어 ‘이단’으로 비난받는 것만큼 심대한 타격은 없다. 기독교의 경우, 목사가 이단으로 규정되면 그의 일생의 삶이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고 기피인물이 된다. 사회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인 뿐만 아니라, 그 목사가 이끄는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교인들의 명예와 일상의 생활에도 많은 악영향을 끼친다. 어제까지 정통교회의 일원이었다가 어느날 이단으로 규정되면 신앙으로 만난 관계는 그 날로 단절되고, 직장에서도 따돌림 당하고, 심지어 타교회 교인과의 약혼도 파혼되는 사례가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비판은 ‘진실된 사실’에 바탕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대법원이 ‘과장되거나 부적절한 표현’(사실상 허위나 왜곡이다.)조차 “신학연구나 교리비판의 자유는 고도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위법성이 없다’는 판결을 내고 있는 것은, 종교문제에 있어서만은 개인의 기본권을 법원이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범죄를 방조 내지 부추기는 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단연구가들도 양심에 바탕해 드러난 사실에 대해 객관적이고, 역사적이며, 팩트에 근거한 사실을 제기해야 하는데, 대법원의 판결만 믿고 ‘종교비판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마구잡이 공격을 가한다. 그래도 대법원 판례에 의해 ‘무혐의’ 또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여기에 종교자유의 함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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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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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자유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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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 ◇군복무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로 인해 헌법재판소가 일부 병역법에 대해 헌법불일치 판정을 내림으로써 대체복무제가 도입되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1892년 미국의 찰스 러셀에 의해 설립되어, 현재 전세계 210여 개 국에 국제조직을 가지고 있는 종교집단이다. 미국 뉴욕 부리클린에 세계통치체 본부를 두고 있고, 각 나라에는 지부통치체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1930년대에 들어와 상당한 신도를 갖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조직은 여호와의 조직과 사탄의 조직으로 나누어지는데, 여호와의 증인 조직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조직이고, 그 외의 모든 조직 즉 국가, 사회, 문화, 종교도 모두 사탄의 조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철저한 주입식 의식화 교육을 통해 형성되며, 비밀로 겹겹히 쌓인 그들의 교리만이 진리라고 철저하게 믿는다.◇여호와의 증인은 이 세상의 모든 조직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증인만 남아 구원을 받는 심판의 때가 온다고 믿는데, 그것이 곧 ‘아마겟돈’ 전쟁이다. 계시록 17장과 18장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세상의 모든 종교를 통털어 ‘큰 바벨론’이라 하고, 기독교의 교역자들을 ‘음녀’라고 하며, 모든 국가나 정권 담당자들을 ‘짐승’이라고 한다. 음녀와 짐승이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서 “이제 안전하다, 평안하다”할 때에 홀연히 아마겟돈이라는 큰 환란이 일어나 그들 음녀와 짐승들을 덮쳐 멸망시킨 후에 이 땅에 지상낙원이 이루어지는데, 그때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지상의 군왕이 되어 통치하는 ‘신권 왕국’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는 ‘왕국 회관’이다.◇여호와의 증인은 전혀 종교에 관심이 없는 자들을 ‘이방인’이라 하고, 종교에 관심이 있는 자는 ‘사탄의 새끼’라고 한다. 남편이나 아내, 보모나 자식 누구든지 여호와의 증인을 거부하면 ‘사탄의 새끼’가 된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을 믿지 않는 자녀는 ‘염소 새끼’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 중에 ‘늙은 사탄의 새끼’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이고, “우리 집에 염소 새끼가 몇 있다”고 하면, 믿지 않는 자식들이 한 두 명 있다는 뜻이다. 아마겟돈 때는 믿지 않는 남편이든, 부모든, 자식이든 모두 비참하게 죽게 될 것임으로 지금부터 정을 끊으라고 세뇌한다.◇‘파이오니아’란 세상 일을 다 제쳐놓고 전도만 하는 신도를 말하는데, 일단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으면 그와 동시에 전도인이 되고, 다시 전도인에서 보조 파이오니아가 되고, 한달에 약 60시간 정도를 더 전도하는 생활을 하면 정규 파이오나아가 된다. 또 거리거리마다 책자를 펴놓고 전도하는 것을 ‘야와 봉사’라 하고, 집집을 찾아다나며 전도하는 것을 ‘호별 봉사’라 한다. 이들은 상대가 어떤 종교를 가졌는가를 먼저 파악한 후에, 불교인을 만났을 때와 기독교인을 만났을 때 할 말을 다 예행연습을 통해 습득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의 말씀을 따르지만, 예수를 ‘여호와의 증인’으로 부르며,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한다. 따라서 성경을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지만 정통 기독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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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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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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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난민
- ◇제주도에 상륙한 예멘 난민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예멘 난민이 제주도를 거쳐 다른 나라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난민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예멘 난민은 모두 이슬람 신앙을 가진 무슬림(이슬람교 신도)이다. 지금 전세계 난민은 거의 이슬람권에서 생성되고 있다. 그만큼 이슬람권 사회가 정치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음을 뜻한다. 문제는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묶여있다는 점이다. 코란의 종교적 율법인 샤리아법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최상의 사회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 이미 이슬람이 오래 전부터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고, 수십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 노동자와 관광객 들어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간이 만료되면 언제든지 떠날 사람들이어서 아직 우리사회에 하나의 무슬림 사회를 이루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백명이 한꺼번에 우리사회 일원으로 정당하게 받아들여져 한 지역에 정착하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지금 전세계에서 폭탄테러로 매일 억울한 죽음이 일어나는 곳은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는 곳이다. 이슬람 사회에 끊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가 정치적이라는데 있다. 종교의 이름을 빌려 세속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슬람 정치집단들이 젊은이들에게 폭탄을 짊어지고 무고한 시민들을 해치는 테러로 내모는 것이다. 이슬람은 모든 국민들이 무슬림이 되어 한 사회가 이슬람화 되면 모두가 형제가 되는 사회가 되어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폭탄테러로 희생되는 사회는 모두가 이슬람화 된 사회이다. 정치 세력이 권력 쟁취를 위해 자신들이 ‘형제’라고 부르는 무슬림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아시아와 아프리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잇는 폭동과 소요사태는 모두 이슬람 정치세력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사건들이다.◇미국 CIA가 2007년 발간한 이슬람의 전략에 의하면, 1단계로, 한 국가에서 무슬림 인구가 1% 내외일 때는 ‘평화를 사랑하는’ 소수 그룹을 지향하며 조용히 포교활동을 한다. 2단계로, 무슬림 인구가 2~3%가 되면 감옥에 수감된 재소자들을 집중적으로 이슬람화 시켜 자기네 편을 만든다. 3단계로 무슬림 인구가 5%를 넘을 때 중동의 전통 이슬람 국가들이 경제적 지원과 외교활동 등을 통해 무슬림 인구 비율을 더욱 높이기 위해 본격적인 전략이 시도된다. 4단계로, 무슬림 인구가 20%를 넘으면 그 사회에 폭동과 소요사태를 일으켜 기독교회나 유대교회에 대한 방화와 파괴를 일삼는다. 5단계로, 무슬림 인구가 40%를 돌파하면 광범위한 학살이 자행되고 조직화 된 세력에 의한 테러가 시작된다. 6단계로, 무슬림 인구가 60%를 넘어서면 이슬람 국가가 되어 전혀 구속받지 않고 기독교와 타종교를 박해하고 탄압한다. 7단계로, 무슬림 인구가 80%를 넘어서면 국가적 주도로 대규모 인종청소와 비무슬림에 대한 대학살이 자행된다. 8단게로, 전국민이 무슬림이 되어 이슬람의 샤리아법이 국가 최고법으로 헌법에 우선하는 ‘신정일치체제’를 구현한다. 한국사회에 무슬림이 늘어나게 되면 종교간 분쟁이 끊이지 않게 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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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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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