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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과 남북교류의 전망/홍 성 표 목사
- 김정은의 파격적인 신년사와 1.9일의 장관급 고위실무회담을 통해서 2년여 동안 중단된 남북의 대화의 자리가 재개 되었다. 마지막 남북 만남의 보루였던 개성공단을 전격적으로 폐쇄하고 빗장을 잠근 반역사적인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건을 촛불혁명으로 극복하고 들어선 문 정부의 2년 차에 이루어진 카이로스적 사건이다. 이러한 결정적 고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단초가 된다. 그것이 하나의 이유든 동기든, 혹은 핑계거리든 남북의 얼어붙은 강물을 뚫고 평화의 이야기가 재개 된 준비 된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임을 자임하고 쌓여 있는 반역사적 반사회적 적폐청산들을 연일 언론 매체에 쏟아 놓고 있다. 검찰개혁과 사법부의 개혁, 공정위를 통한 재벌의 횡포와 중소기업 간의 바른 관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제도적 개선과 방향 모색 등 그동안 불의와 부패의 썩은 고리들을 끊고 정경유착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의 동반 폭력들을 거두어 내고자 한다. 친일과 독재의 세력들은 몸부림을 치면서 이러한 개혁 드라이브를 시기 질투하며 추악한 행패들을 연출하고 있다. 새로운 권력구조 개편을 위하여 개헌을 내세우고 6월 지방선거와 함께 매듭을 짓고자 한다. 검찰공화국의 횡포와 불의와 폭력을 통한 그동안의 민중들에 대한 폭압과 살아 있는 권력에 아부아첨하며 굳어진 고리들도 거두어 내고자 한다. 경찰과의 권력 균형들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경찰들은 법을 지키며 억울한 민중들의 삶을 보살펴 왔는가? 개인과 개인 간의 폭력들로 인하여 상처와 죽음이 닥치기도 하지만 국가의 공권력의 폭력으로 인한 죽음들이 얼마나 많았던 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의 군국주의 아래에서 벌어진 전쟁범죄, 그중에서도 성노예의 잔혹한 일들에 대한 진정한 사좌와 반성과 회개가 없는 마당에서 아직도 정의의 근거는 서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산적한 문제들이 쌓여 있지만 남북의 만남과 대화는 평창의 화두로 시작 되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차관급 실무회담이 진행되고 있다.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의 상봉문제 등과 함께 남쪽에서 요구하는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가 있다. 북쪽의 요구는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과 한반도 평화협정 등이 있고 자주적인 우리들끼리의 민족 주체적 통일의 길을 지향하자는 요구들이 있다. 여기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 기지개를 크게 펴고 있는 러시아와 한반도의 분단을 통하여 새로운 군국주의 부화를 용트림 하는 일본 등의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들의 높은 담들이 있다. 1. 9일 회담에서 남북은 3개항의 공동보도문을 내고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한반도 긴장 완화 공동 노력, 남북 당사자 해결 원칙의 합의 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합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 등을 지금 실무회담을 통해서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고 있다. 남북의 공동 단일팀과 관련해서 여자 아이스학키 선수들과 전부와의 갈등 관계가 있다.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선수들 각자의 땀 흘림과 소위 인권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고 새롭게 열린 모처럼의 남북관계의 시작을 소홀히 할 수도 없다. 서로의 양보와 우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혜를 모아서 할 일이다. 역사의 앞날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우리 앞에 놓인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 될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길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최고의 과제이고 사명이다. 국가당국의 주도로 시작되는 통일운동만으로는 남북의 길이 형식으로 그치기 십상이다. 민중을 주도로 하는 민간 운동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모든 남북의 분야들의 교류가 시작되고 조건 없는 만남들이 물결처럼 파도쳐야 한다. 국제적인 환경과 관계들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남북 주체들이 만나는 것이 이 모든 것의 근본적 해결의 시작이고 완성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만남의 시작이 변질 되어서는 안 된다. 만남은 지속되어야 하고 확장 되어야 하며 활성화 되어야 한다. 평창이 진정한 남북의 만남과 평화 정착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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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과 남북교류의 전망/홍 성 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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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만남이 답이다/홍 성 표 목사
- 2018년 1월 1일은 진실로 역사적인 날이다. 반역사적, 반민족적, 반민중적 정권 이래 무려 10년 만에 새 역사가 열리는 해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만의 역사가 반복되거나 번복되는 역사가 아니다. 분명히 역사는 새날을 통해서 새롭게 되어 진다. 거꾸로 가고 후퇴하는 역사일 지라도 그 것은 새 날과 새 역사를 잉태하고 만다. 배신과 절망의 역사일 지라도 반드시 옳음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흔들리는 갈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어지럽다. 우리는 갈대만 보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생명이 움트는 새로움을 본다. 인간들이 만든 과학과 이성의 문명의 끝이 어디인지 누구도 모르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핵전쟁과 원전사고, 그리고 탐욕으로 빚어지는 생태계의 파괴와 자연의 오염으로 인한 지구의 파멸과 생명체의 단절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창조의 과정은 멈추지 않고 생명과 희망의 씨앗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일제치하의 갖은 고초와 죽음과 어둠의 진흙탕에서도 하나님나라 운동을 그치지 않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외세에 등진 해방과 독립을 맞이하였다. 미소 양 강대국들에 의한 찬탁과 반탁으로 나누어지고 사회주의 운동의 독립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독립주의 진영 운동가들로 하여금 남북은 갈라지고 찢겨진 채로 진정한 해방과 독립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분단과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과 남북의 서로 다른 두 체제는 1992년 유엔에 의해서 두 개의 나라로 승인받게 된다. 그리고 분단 73년을 살고 있다. 우리의 통일운동은 진정한 한반도의 독립운동이다. 우리는 독일과는 다르고 베트남처럼 민족상잔을 겪은 분단의 처절한 아픔을 겪은 민족이다. 그리고 주지하는바 지구상에서 마지막 분단국가의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과 미군정의 결탁, 박정희의 군부 쿠테타와 전두환 노태우를 거쳐 민주화로 가는 길목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에 10년간을 휘둘려 왔다. 지난 1년간의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은 역사의 적폐청산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친일과 반역사적 , 반인륜적 독재와 학살정권과 함께 다시 반역사적, 반민족적 정권의 찌꺼기들을 청산하지 않고는 역사가 바로 설 수 없고, 역사가 바로 서지 않고는 진정한 독립의 성취와 분단을 극복하는 한반도의 봄은 오지 않는다. 한반도의 봄은 통일이다. 그 통일은 단순히 국토의 통일이 아니라 민족의 지난 아픔들을 치유하고 가슴을 활짝 열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는 구체적인 실천에 있다. 진정한 평화는 차별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주며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너’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다함없는 사랑의 마음이며 행도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분단의 극복을 통해서 통리로 가는 답은 남북이 조건 없이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만남을 통해서 밥상공동체를 이루고 먹고 마시며 속내와 진심을 털어놓고 피차 도울 것은 도우며 함께 더불어의 삶을 순차적으로 실현해 가는 일이다. 말만 무성하고 삶의 실천이 없는 것은 무의미한 소음이 될 뿐이다. 만나서 스킨쉽이 있고 부딪히고 논쟁도 하면서, 타협과 협상을 해가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 평창올림픽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기화로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하고 2015년 이후 끊어진 소통의 전화를 복원하며 이산가족의 상봉과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군사 무력충돌의 상호불가침 약속을 하며 민간교류 운동을 활성화 하고, 개성공단을 다시 열며 금강산 관광의 재개해야 한다. 만나야 사랑도 하고 생명도 잉태한다. 우리는 북조선의 김정은 북한노동당 위원장의 남북 만남의 신년사를 단순한 전략과 제스처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미중과 러일 등 주변 강대국과의 지혜로운 외교채널들을 통해서 이 기회를 분단의 벽을 헐고 통일로 가는 호기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고 교파의 다름이 따로 없으며, 종파의 차이가 따로 없다. 단순히 한미동맹의 차원이 아니라 미중과 북의 비위를 맞추는 차원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대한 시 점, 카이로스의 카이로스로 받아 들여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성패가 바로 이 문제에 달려 있고 북의 조평통 위원장 리선권과 남의 통일부장관 조명균의 첫 회담을 통해서 실타래처럼 얽인 문제의 단초를 풀기를 간절히 기도 한다. 2018년 1월 9일 판문점 평화의 집이 민족의 새 역사를 여는 분단극복과 통일로 가는 잉태의 날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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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만남이 답이다/홍 성 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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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의 성탄절을 보내며-임 영 천 목사
- 정유년(2017) 올해의 성탄절은 다른 해의 성탄절에 비해 크게 다른 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종교개혁 5백주년의 해에 맞이하는 성탄절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촛불집회가 새 정부를 앞당겨 탄생시킨 해에 맞이하는 성탄절이라는 점이다. 이 첫째와 둘째의 일들은 앞으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므로 그 의미와 감회 또한 그만큼 크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탄절은 한 해의 마지막 달(12월)에 있고, 또 날짜도 하순(下旬, 25일)에 위치해 있으므로 이날을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1년을 반성하는(되돌아보는) 날로 삼는 것도 좋을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5백 년 전(1517)에 소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이때의 프로테스탄트는 곧 로마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트(저항)이었다. 기성(旣成) 가톨릭교에 대한 신생(新生) 개신교의 항거였던 것이다. 기성 가톨릭교회의 어떠한 면에 대한 항거였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기성교회(가톨릭)의 악습에 대한 항거였다고 할 것이다. 악습이란 곧 나쁜(좋지 않은) 습관이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지니고 있던 악습들 중의 하나는 바로 ‘세습’ 문제였다고 하겠다. 세습이란 기득권을 무비판적으로 대를 이어 후대에게 물려주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당시(중세)의 기성교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했는데 그런 기성교회를 선대의 주교가 후대의 주교에게, 마치 아비가 자식에게 그러하듯 아무런 거리낌(뉘우침) 없이 주교좌 성당을 물려주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대(代)가 거듭될수록 더욱 타락할 수밖엔…. 결국 종교개혁이란 역풍을 맞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종교개혁 기념행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과거사로 기념하는 일만이 아니라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 교회 지도자들이 기념의 행사에만 열을 올리지,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개신교 울안의 교회세습이란 악습이 자리를 잡아가더라도 무관심 일변도로 지나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대형교회들의 교회세습은 ‘당신들의 천국’ 만들기에 불과할 뿐 우리 모두의 천국(하나님 나라) 건설과는 무관하다. 성탄절 아기 예수께서 그들을 바라보실 때 “저 지독한 욕심꾸러기들!”이란 반응밖에는 달리 무슨 긍정적 반응을 따로 보이실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그 ‘욕심’이란 것에 대해선 또 어떻게 해석되었던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그 결말의 두려움이 이미 적시(摘示)되지 않았던가?작년 10월 29일에 이른바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끝내는 국회를 중심으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뤄내더니, 다음 단계로는 헌재(憲裁)에서의 파면마저 이끌어내어 전(前) 대통령의 권좌로부터의 완전 실각을 성사시켰다. 그리고는 금년 5월 10일에 문 대통령의 새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문 대통령이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정치적 혁신을 이루겠다고 추진하고 있는 강력한 개혁정책이 국민들로부터 지금까지 높은(70% 이상) 지지를 받아왔다. 촛불집회의 정신이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신이었기 때문에 새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아왔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과라고 보아야겠다. 적폐청산(積弊淸算)이란 말을 다른 말로 바꿔 표현해 보자면 곧 파사현정(破邪顯正)이 된다고 보겠다. 교수신문이 내년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을 뽑았다고 한다. 그것은 올해의 적폐청산을 내년에도 파사현정으로 계승하자는 뜻이 되겠다. 교수신문을 통해 전국 교수들이 보여준 진의도 알고 보면 촛불민심과 같다고 생각된다. 적폐는 청산되어야 하며, 또한 사악(사특)한 세력은 파멸되고 올바른 이들이 크게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지식인이요 지성인인 전국 교수들이 풀뿌리 서민들의 촛불혁명 대열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비교적 다른 이익집단에 덜 유착되어 있고 이해관계에 있어서 비교적 거리를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자 모세가 적폐세력인 애굽 왕 바로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광야로 진격하고 있었을 때, 그 성과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자 불만세력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모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민수기 14장). 지금 우리나라의 사정이 그와 매우 흡사한 것 같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있듯이, 물색 모르고 날뛰는 이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진격하는 모세의 군대를 훼방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의 진격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방해꾼들의 패배와 파멸(민 14:26~)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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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의 성탄절을 보내며-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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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강 경 신 목사
- “큰 교회는 십자가, 누가 이 큰 십자가를 지겠나” 이 말은 최근에 세습 문제로 시끄러운 한 대형교회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기독교 안팎에서 세습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여전한데, 이 교회는 정면돌파로 세습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온갖 말들이 무성하고, 이 일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화제 거리가 되었다. 언론과 TV매체들이 연일 이 문제를 보도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지탄을 받았다. 어쩌면, 종교개혁 5백주년의 해에 그 교회는 가장 큰 일(?)을 행하였다. 이제 그 교회는 한국교회의 선두주자가 되어, 부흥의 견인차가 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대물림은 결코 사욕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부흥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교회들과 가슴을 졸이며 애를 태우는 목회자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자랑하며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세상의 시선이 차갑고,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데, 무슨 수로 다시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아도 좋으니 내 교회만 더 크게 되고 잘되면 된다는 말인가? 최근에 발표된 ‘2017 소형교회 리포트’는 한국교회 목회자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설문조사에 응답한 목회자들의 거의 절반은 현 상태로 교회가 유지될 수 있을 지를 심각하게 우려하며 걱정하고 있다. 이들은 사례비를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교회가 성장하지 않아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이들이 추구하는 목회가 ‘교회성장’(33.5%) 보다는 ‘건강한 교회’(66.5%)라는 것이다. 비록 교인 수가 늘지 않아 교회성장이 안되고 교회 재정이 열악하여 사례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도, “자신의 목회에 만족한다”(73.3%)고 한다. 이들에게 십자가는 무엇일까? 그들은 교회가 작아서 작은 십자가를 져서 만족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들에게 십자가는 더욱 크고 무거운 것이다. 과연 십자가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십자가는 참 십자가가 아니다. 나아가 십자가는 사명이다. 내가 좋아서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싫어도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지는 것이다. 아무리 십자가가 고난과 희생을 요구할지라도 묵묵히 지고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너도 나도 지기를 원하는 대중적인 십자가로 바꾸었다. 십자가를 성공의 통로요, 번영의 도구요, 영광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성공적인 기업처럼 부러워하며,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성공한 CEO처럼 우러러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아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다. 이들이 큰 교회를 세웠다고 해서 큰 십자가를 지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라고 명령하신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이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대로 십자가이다. 고난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가 될 수 없다. 다시 대림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가? 오늘의 교회는 주님의 오심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우리에게 십자가의 신앙을 올곧게 가르쳐 주신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시를 쓰셨다. “주님을 따르다가 옥에 갇히어/ 온갖 고생 다하다가 죽을지라도/ 십자가의 큰 고난 생각을 하면/ 아직도 내 고생이 부족하구나/ 깨어라. 주께서 오신다/ 주님 위해 살다가 목숨 바치자.” 그렇다. 십자가의 큰 고난을 받는 사람이 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큰 교회가 큰 십자가가 아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말자.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로 세워졌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신앙은 십자가이다. 이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목숨까지 십자가의 제물로 기꺼이 바쳤던 것이다.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주기철 목사님은 외치셨다. “깨어라. 주께서 오신다. 주님 위해 살다가 목숨 바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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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강 경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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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과세 무엇이 문제인가?-장 헌 일 목사
- 현행 종교인소득 과세 체계는 종교인들이 종교단체로부터 받는 소득을 기타소득 중 ‘종교인소득’으로 규정하되, 종교인이 원하는 경우에는 ‘근로소득’으로 신고·납부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매월 종교단체가 종교인소득을 지급할 때 근로소득과 같이 원천징수 납부할 수 있다. 그러나 작년 10월부터 소위 ‘탄핵정국’ 이후 관련 매뉴얼 등이 준비될 수 없었고, 이는 올해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과세당국이 종교인소득 과세를 위한 준비를 지난 6월에서야 뒤늦게 시작하면서 교계에서는 종교인 과세가 47년 만에 시행되기 때문에 종교의 고유한 역할과 사명을 간과한 채 만약 일방적으로 과세를 시행한다면 많은 문제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어 지난 6월 19일 여의도 CCMM에서 국민일보와 한국공공정책개발연구원(원장 장헌일)이 공동주최한 제5차 ‘종교인과세대책을 위한 컨퍼런스’를 통해 종교인과세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례비로 제한하여 과세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한바가 있었지만, 8월에 가서야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등 정부 측과 한국교회 TF팀이 처음으로 간담회를 가졌다.이러한 가운데 지난 9월 9일 정부는 돌연 주요 종교기관들을 향해 ‘세부과세 기준 자료(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종교인 과세가 아니라, ‘종교과세로 종교활동과세, 종교침해과세’ 성격을 띠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특히 심각한 종교편향성까지 보이고 있어 정부는 종교단체들과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한 대비가 없다면 향후 조세마찰 등으로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될 것이 명약관화 하다.실제 각 종단 별로 수입금액의 종류와 비용인정 범위가 상이함에도 국세청과 종단 간에 상호 협의된 상세한 과세기준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 또한 지금까지 종교인소득이 과세되지 않은 상황에서 종교인소득을 계산하는 회계와 종교단체의 회계를 구분하지 않고 운영해 왔다. 따라서 종교인 회계와 종교단체 회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수입금액의 종류와 비용범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엇이 종교인 소득이고 무엇이 종단 소득인지 등에 대해 국세청와 종교단체 간의 폭넓은 협의와 홍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탈세관련 제보로 인해 세무조사가 이뤄질 경우 제보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그 사실이 언론 등에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해당 종교인 및 종교단체의 도덕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고, 국가권력과 종교 간의 마찰이 불가피한데 이에 대한 대책이 전무한 실정이다. 따라서 처음 시행되는 종교인소득 과세제도의 연착륙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종합적인 검토와 면밀한 준비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첫째, 과세당국은 종교인 소득회계와 종교단체 회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고, 각 종교, 종단 등과 긴밀히 협의하여 종교인 소득에 포함되는 종교단체별로 다양한 소득원천과 비용인정 범위, 징수방법에 대하여 상세한 과세기준을 협의·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종단별 소득구조 특성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며, 세부 과세기준에 따른 과세 및 징수에 대한 예행연습을 통해 문제점을 보완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둘째, 탈세관련 제보가 있을 경우에는 영리법인에 대한 세무조사와 마찬가지로 세무조사권이 신중하게 발동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일선 세무서에서 받은 탈세제보는 국세청으로 이첩하여 국세청이 수집 분석한 과세자료와 대조를 통해 명백한 탈세 혐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 종단에 넘겨 추가 자진신고 납부를 하도록 규정할 필요가 있다(실제 대부분의 선진국의 경우 과세당국과 종교단체 간에 사전에 협의된 구체적인 과세기준에 따라 자진신고하면 납세의무가 종료되는 ‘협의과세제도’를 운용하고 있음).셋째, 현재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에만 적용되는 근로장려세제를 모든 종교인소득에 대해서는 근로소득으로 신고·납부 선택 여부를 불문하고 적용될 수 있도록 금년 중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이 필요하다.지난 대선 때 각 당 대선후보들은 헌법에 명시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정교분리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조세저항과 사회와 국가적인 혼란과 국론분열을 일으키지 않도록 종교의 역할과 중요성을 감안하여 종교인과세를 2년간 유예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정부는 종교인들이 조세저항 없이 자진납세 할 수 있는 기준과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종교의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제20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불변의 가치이며 어떤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는 천부적 가치이다. 종교의 특성과 목회자 사역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않은 정부의 종교정책은 갈등과 혼란을 야기할 뿐이기 때문에, 정부는 종교인과세를 졸속행정으로 종교간 갈등을 유발 시켜 국민화합을 저해하는 불행한 일이 없도록 충분한 시간을 갖고 협의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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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과세 무엇이 문제인가?-장 헌 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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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으로서의 기독언론-임 영 천 목사
- 지금으로부터 만 일년 전인, 2016년 10월 2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일단의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는 이른바 촛불집회의 시발이었다. 시민들의 이 자발적인 모임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거의 매주 토요일에 어김없이 모이되, 그 숫자도 점차로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거대한 집단의 위력은 대단하여 끝내는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루어내더니, 다음 단계로는 헌재(憲裁)에서의 파면마저 끌어내어 그의 독재권좌로부터의 완전 실각을 성사시켰다. 그리고는 금년 5월 10일 문재인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 정치적 혁신을 이루겠다고 추진하고 있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국민 대다수가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음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끊임없는 인사정책의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음은 국민들을 매우 실망스럽게 하고 있다. 어느 후보자가 실정법적으로 문제가 없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관습법이나 도덕법에서도 별 하자가 없는 후보자가 내세워질 때 국민들은 소위 ‘개혁’지향적이라는 새 정부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핵 위기 조성 국면을 빌미 삼아 심화되고 있는 트럼프 미 행정부의 군사 외교 면에서의 남한 정치에의 과도한 개입이 국내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상당한 위구(危懼)의 감(感)을 자아내게 하고 있음도 사실이어서, 이 혼란한 정국을 문재인 새 정부가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지 우려되는 바 없지 않다. 트럼프가 남북 상호간의 군사적 대결을 부추김으로써 미국의 대량 무기판매를 기도(企圖)하는 것까지야 지나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예기치 않게 남북 간에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거나 나아가 세계대전으로 확전(擴戰)되는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볼 때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역할(대처능력)이 매우 중차대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한국사회는 빈부 간의 격차가 심하고, 보혁(保革) 간의 대립이 심하며, 거기에다 동서의 지역 간 골도 깊어서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의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게 아니라 근래, 또는 현재 터지고 있다고 보아서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라는 형식을 통해서 금년 내내 터지고 있어 왔다고 하겠다. 실은 이 두 가지의 대립적인 집회가 빈부의 격차와 보혁의 대립, 그리고 지역 간의 골 문제 등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정치인들도 이들 어느 한쪽 집회의 암시성에 잘못 이끌리면 자기처신의 불투명성까지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전에 거대 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바른정당이란 신당을 만들었던 의원들이 최근 자기들이 만든 그 정당이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던지 옛 정당으로 다시 복귀하고 만 사건도 알고 보면 그 어느 한 집회의 잘못된 암시성에 스스로가 최면당해 일어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로 인해 다른 정당들 상호간의 지각변동과 한국정계의 혼란상마저 부추기고 있음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세속사회의 실상이 이렇다면 그럼 기독교계는 어떤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 세속사회가 저러한데 기독교계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라고 자위하려는 사람들이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 문제를 그렇게 보아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왜냐면 예수께서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속사회가 혼탁하니 우리 기독교계도 별 수 없이 부패해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니라, 그 부패해지려는 세상을 ‘소금’으로 바로잡아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게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회(곧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기독교계가 어떤가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한마디로 말해 한숨부터 나온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특별히 올해가 종교개혁 5백주년의 해여서 이런 심정은 더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종교개혁가들이 도전했던 대상은 바로 로마교회의 왕권의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교회의 잘못된 제왕의식으로부터 모든 교계의 비리와 부정부패가 흘러나왔었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것들을 우상파괴정신으로 분쇄하려고 했던 게 바로 종교개혁가들의 위업(偉業)이었다고 보겠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오늘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스스로 자기정화를 하기는 어렵다는 게 교회세습과도 같은, 기독교계의 악습(제왕의식의 분출)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한다면, 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교정하도록 끊임없이 지도 편달하는 소금의 역할은 기독언론밖에 없다고 볼 때, 창립27주년을 맞은 <교회연합신문>의 사명이 그만큼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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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토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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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으로서의 기독언론-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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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에만 에이즈 환자가 늘고 있는가? -심 만 섭 목사
-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만이 유일할 정도로,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이 질병관리본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에이즈 환자가 총 13,584명인데, 이는 10년 전인 2007년에 비해 2.6배 증가한 것이며, 특히 10대의 경우, 지난 2007년에는 99명이었는데, 지난해에는 417명으로 4.2배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또 20대가 1,243명에서 3,523명으로 2.8배 증가하였으며, 30대도 1,759명에서 3,699명으로 2.1배 증가하는 등, 젊은이들 사이에서 급격히 번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인재근 의원은 ‘10대 청소년의 높은 증가율은 국민 건강 차원은 물론, 국가재정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 다른 의원인 자유한국당의 윤종필 의원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에이즈 환자 치료에 들어간 국가 재정은 연간 1,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윤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에이즈 환자 치료비는 2014년에 714억 원, 2015년에 810억 원, 2016년에 921억 원으로 해마다 크게 늘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에이즈 환자는 제3군 감염병으로 치료비를 국가에서 전액 지원하고 있는데, 국민건강보험공단이 90%, 나머지 5%는 국가(질병관리본부)에서 지원하고, 그 나머지 5%는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므로, 결국은 100% 국민 세금으로 부담하는 것이 된다. 거기에다 간병인비까지 지원하고 있어, 이제는 해마다 1,000억 원이 넘는 국가재정을 에이즈 환자 치료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5년부터 2016년까지 건강보험공단이 에이즈 치료를 위해 지출한 재정은 5,415억 원이나 된다. 여기에다 국가와 지자체와 간병인비 등을 포함하면, 그 재정은 훨씬 초과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대처가 없이는 국민들이 내는 세금에서 막대한 재정 지출이 늘어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물론, 국가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치료비가 들어가고, 장기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에이즈 환자에 대하여 치료비를 지원하는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그들도 우리 국민이며, 국가가 보호하고 치료해 주어야 하니까.그러나 문제는 왜 한국에는 에이즈 환자가 줄지 않고 계속 늘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번 국감에서 자유한국당 성일종 의원이 밝힌 바에 의하면, 에이즈의 주 감염 원인이 남성 동성애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동안 에이즈의 치료와 예방의 주무 기관인 질병관리본부는 우리나라 에이즈 환자의 감염 경로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었다. 질병관리본부는 2011년까지는 에이즈의 발생 원인이 ‘이성·동성 간 성 접촉’으로 표시했다가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성 접촉’으로 표시하는 등, 애매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에이즈 환자의 92%는 남성이다. 또 최근 신규 감염자의 94.3%가 남성이다. 이를 감안하면, 에이즈의 감염 원인이 남성 간 성 접촉에 의한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그 동안 시민 단체나 기독교계에서 질병관리본부에 정확한 실태파악을 위한 제언과 감염의 주 요인에 대하여 홈페이지에 표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국감에서 성일종 의원이 보건복지부장관과 질병관리본부장에게 여러 자료를 보이면서, 에이즈의 주요 감염 원인이 남성 동성애에 의한 것임을 묻자, 이를 시인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에이즈 환자 증가와 그 실태는 분명, 이에 대한 행정의 문제와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서, 잘못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일본, 호주 등은 에이즈 감염자가 줄고 있는 상황(특히 가장 많은 에이즈 환자를 보유했던 아프리카에서는 급격히 줄고 있음)에서 우리나라만 늘어나고 있어, 국민 건강에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10대와 젊은 층에서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대단히 우려할 일이다(2016년 에이즈 신규 감염자 수는 1,062명으로, 이 중에 20대가 360명-33.9%, 30대 241명-22.7%, 40대 193명-18.2%로 20~40대가 전체의 74.8%를 차지함)그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는 무분별한 ‘쿼어축제’의 허용으로 본다. 현재 서울과 대구에서 허용하고 있고, 부산에서도 열렸고, 제주에서도 허용된 상태이다. 마치 동성애가 축제처럼 보이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동성애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가 확산되는 것이다. 둘째는 언론들의 ‘인권보도준칙’에 의한, 에이즈의 문제점에 대한 실태와 정확한 원인을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의 경각심이 무너진 것이다. 셋째는 정부의 안일한 행정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에이즈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본다. 넷째는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과 일선 교육청에서의 동성애 조항을 포함시킨,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것들이 무비판적으로 만들어져, 청소년과 젊은 층에게 동성애를 권장한 꼴이 되었다. 다섯째는 일부 정치인들이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지는 못할망정, 비호하고 두둔하는 행태를 보인 때문이다. 이번 국회 국감에서도 일부 지자체장들이 동성애를 옹호한 것에 대하여 질의하면, 정치적 견해를 다르게 하는 의원들이 이를 차단하는 등,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보였다. 마지막으로는 일부 목회자들이 ‘쿼어 신학’이니, 뭐니, 하면서 성경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에이즈의 증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상당히 밝혀졌다. 그러므로 국민의 건강을 위한 일에 여·야가 따로 없고,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있을 수 없으며, 민·관이 따로 없다. 이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지혜를 모아, 에이즈를 예방하는데 주력해야 하고, 확산되는 원인을 차단하는데, 뜻을 보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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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토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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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에만 에이즈 환자가 늘고 있는가? -심 만 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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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꿈마저 빼앗지 말라- 임 영 천 목사
- 지난 11일 제59회 사법시험(제2차)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응시자 186명 중 55명이었다. 131명은 탈락의 고배를 마신 셈이다. 과거에는 불합격자라도 “내년에 재도전하면 되지” 하고 마음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왜냐면 이번 시험을 끝으로 앞으로 사법시험은 실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른바 ‘고시 낭인들’을 숱하게 배출하는 역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사시(司試)는 많은 청년들의 꿈이었다. 젊어서 시인 되려고 하지 않은 자 없듯이, 청년 시절 고시(고등고시) 보려고 꿈꾸지 않은 자 없다고 할 만큼 사시는 젊은이들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아무리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머리만 좋으면 이 고시(사시) 한번 쳐서 합격되고 그 팔자도 고쳐버렸다. 가난해서, 또는 다른 이유로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이 시험 한번 치르고 용 되는 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실로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상고만 나왔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실제 사례였다. 그는 그런 불운한 이들의 슬픔을 알았기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그 슬픈 이들의 마음을 날래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제도 자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지금 개천의 물고기들이 용 되기를 꿈꿀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새 제도인 로스쿨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천의 평범한 물고기들이 로스쿨에 가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것을 어찌하랴. 로스쿨의 입학제도 때문에 그런 것이다. 돈 없는 청년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거액의 등록금인데다 면접이란 관문에서 모모 인사들의 자제들이 그 자리를 다 차지해 버려 개천의 물고기들이 들어갈 자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선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다. 애초에 그 개천의 미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것이라고 말이다. 개천의 미물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러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이런 답들이 오가고 있다. 그들이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들은 건전한 사회의 미꾸라지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그들 속에서 시위자들이 나오고 데모꾼들이 나오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가 혼탁하니까 그들이 시위를 하고 데모를 주도하는 점은 도외시하고 보이는 겉모습만 가지고 그렇게 평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일 사시에 응시하고 합격을 하게 된다면 그 동료 미물들에 대하여 온정적인 태도로 나올 것이 뻔하니, 그들을 아예 시험제도 자체를 바꿔 사회(법조계)에서 격리시켜 버리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결과 로스쿨 제도를 도입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미물들이 아닌 귀족의 자제들로 채우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법조인 등용문 제도를 바꿨다고 보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음서제(蔭敍制)를 오늘에 다시 도입한 셈이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들을 채용하던 인재선발 제도 때문에 길(관직)이 막혔던 양반(귀족)의 자제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관직에 쉽게 나가게 했던 편법이 오늘날 되살아난 셈이다. 그래서 로스쿨제도를 ‘현대판 음서제’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합격자 발표가 있기 하루 전(10일)에 헌법재판소 앞에 일군의 청년들이 모였다. 귀족들이 싫어하는 한판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전국수험생유권자연대란 단체였다. 그들은 “고졸과 서민의 법조인 진출을 막는 로스쿨 제도는 위헌”이라고 하면서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그들은 “사법시험이나 변호사 예비시험... 등 국민 누구나 법조인이 될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로스쿨 제도는 국민 기본권인 평등권과 직업의 자유, 공무 담임권을 침해한다”고 하였다. 이날 그들이 내세운 피켓의 구호는 “누구나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세상!!”과 “청년의 꿈마저 빼앗지 말라!!”였다. 호소력이 매우 큰 구호였다. 요즘 소위 ‘고시 낭인들’이 상당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고시 탈락자들을 무조건 낭인들이라고만 보지 말고 ‘앞날의 꿈을 위해 끝없이 도전해온 불운한 이들’ 정도로 봐줄 수도 있을 줄 안다. 그들에도 빛들 날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들의 구호를 감안해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본다면, 새 제도인 로스쿨이 위헌이므로 폐지하라고 할 수 없다면, 지난 사시와 유사한 어떤 시험제도를 병행해 그들의 행복권을 보장해주는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법조인이 되는 것이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직업이 될 수도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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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토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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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꿈마저 빼앗지 말라- 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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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이후를 생각하다/ 이효상 목사
- “이대로는 안된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한국교회도 구호로 무성하다. 그런데 아쉽고 안타깝게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종교개혁에 교회개혁이 없다. 중세교회의 타락이었던 성지순례,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추모미사, 성물숭배, 종교적 고행 행위 등이 전염병처럼 이어지고 있다. 종교개혁을 빙자해 기념메달을 만들어 팔고, 기념 세미나를 여는 등 50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들을 연다. 그 어디에도 담론만 무성하지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의 실타래를 풀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아무런 감흥도 울림도 없음은 언론 홍보용 행사는 아니었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종교개혁에 열심을 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그 정신을 이어 갈 것인지 묻게 된다. 이렇게 종교개혁 500주년이 이렇게 단회적 이벤트로 끝낼 것인가? 모먼텀이 되고 있는가? 다시 500년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 5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준비하는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일부 교단장을 중심으로 빅텐트를 치겠다고 하는 것은 진정 한국교회를 위한 빅텐트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이합집산을 도모하는 또 하나의 분열이 될 것인가? 교회는 덩치로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다. 덩치는 큰데도 지금의 개신교는 한국사회의 주류종교로서 그 방향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해 대사회적 영향력은 사라지고 있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 영향력이 있다. 종교개혁에 있어 사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길만큼 지름길은 없다. 종교개혁의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지만 진정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복음을 복음답게 하는 복음적이고 개혁적인 메시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목회현장에서 지속적으로 그 정신을 적용하고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로 나가려는 의지는 더 없어 보인다. 여러 목회자들을 꾸준히 만나보면 목회현장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생각 외로 크다. 교회가 분열과 상처로 주저앉은 상황이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프로테스탄트’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이다. 이들은 영적인 갈증과 욕구를 지니고 있었기에 습관적인 가르침이나 형식적인 관계를 통하여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허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프로테스탄트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모험적인 삶의 행태가 거대한 전통을 거부하고 형식적이 되어가는 신앙과 신앙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의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면서 몰락해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현실을 냉철히 통찰하여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회개와 더불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말씀 중심의 복음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회개의 목소리와 함께 말씀의 실천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 사실 다른 해답이 없다. 내적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말씀 중심의 복음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자성과 회개의 소리가 그립다. 진리와 믿음을 향한 그 정신을 루터는 신학이 아니라 그것을 호흡하는 사람들의 심장에 이미 존재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루터는 바로 거기에서 참된 교회의 미래를 보았고 눈에 보이는 중세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말씀중심의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앞에서>라는 다섯가지 핵심 정신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현재진행형으로 적용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골 골짜기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개혁자들, 프로테스탄트들이 출현해야 한다. 그러나 외적으로 추락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할 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사회는 교회와 크리스천에게 기대하는 바가 분명 있다. 교회는 이런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고 돌아 보아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세상에 속해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대로 살고, 세상 사람들을 잘 섬기기 위해서이다. 지금 타종교는 차세대 인물들을 정책적으로 키우고 사회와 소통하는 지도자를 만드는 일에 열심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아직도 쉰세대 어르신들이 그 영향력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누리려는 허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교회세습과 대형교회의 천민 자본주의화는 공교회성을 훼손하고 사교회화 하는 행위는 건강한 교회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이다 향후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의 20년, 30년을 이끌 40대지도자, 50대지도자가 준비되어 있는가? 지금 이대로 더 추락할 것인가? 사회를 선도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인가?는 개혁자들의 정신을 가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에 달려있다. 그가 바로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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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토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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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이후를 생각하다/ 이효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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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균형-홍 성 표 목사
- ‘힘의 균형’ 논리는 1920-1960 사이의 라인홀드 니버에 의한 세력균형 논리이다. 소위 평화적 수단 전략의 한 이데올로기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는 미소 두 강대국에 의한 냉전으로 패권 경쟁을 가열차게 하게 되고 이러한 경쟁은 가공할만한 살상무기 그 중에서도 핵탄두 군비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겪은 민족세계전쟁(6.25)은 1-2차 세계 대전의 피해보다 더 크고 참혹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민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단의 고착화, 영구화를 가져오고 중국과 일본, 미국 등은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내지는 안정화 시키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한반도의 희생을 통한 주변국과 강대국들의 이익창출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막말수위가 도를 넘고 최근에는 B-1B ‘죽음의 백조’ 폭격기가 북한 항공까지 침투하였다. 소위 협상과 장사꾼의 ‘거래의 기술’를 통한’전략적 혼돈 전략’을 통한 협상전략의 압박 행동이다. 일단은 협박을 하면서 평화적 협상의 테이블로 이끌어 낸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무모한 전략이다. 만일 북한 상공의 침투에 대한 북한의 실수든 정당방어든 간에 어떠한 시비가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파멸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소의 무기, 군비경쟁은 핵탄두의 경쟁이 되어 우리가 사는 지구를 수십 번씩 태워버리는 가공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역사의 현장은 저출산, 양극화 고령화와 함께 자살율 제 1위( OECD 경제개발협력국)를 살고 있다. 분단과 동서와 소위 진보와 보수, 친일세력과 민족적 민주 통일세력들의 내적 갈등의 삶을 살고 있다. 남북의 대치와 북미의 위험한 말장난을 통한 전쟁 놀음의 모험이 현실화 될 수도 있는 지경을 걷고 있다. 어느 조직이나 헤게모니의 싸움과 주도권 싸움은 지속된다. 정의의 개념마저도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메이컵되고, 페인트모션 된다. 종교집단이나 세속적 정치집단,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민중을 착취의 수단으로 살고 있는 기업들 모두가 실은 자기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야누스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우리의 삶의 푯대가 되는 예수의 이해나 성서적 해석도 천차만별 사실은 자기입장의 실존이나 이익집단들에 의해서 오도 되는 자기경험이라는 한계의 틀 안에 갇혀 있을 때가 허다하다. 민중의 해방을 말하는 가운데서도 실은 민중들을 앞 세운 전도된 가치를 고집하는 예가 허다하다. ‘죽음의 백조’가 한반도의 상공을 마음 대로 떠 다니고 핵잠수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동해를 휩쓸고 다닌다. 우리가 의지하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로 위로와 희망을 창조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누가 더 선하고 악한 것인가의 평가는 역사가 증명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가 역시 역사적 평가에 맡긴다. 역사적 평가는 상식이고 진리이다. 어떤 부류가 평가하는 것인가도 중요하다. 어느 때이건 힘 없고 가진것 없이 소외되고 착취당하며, 멸시받는 부류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정확하다. 춥고 배고프며, 어떤 일을 하고도 그 대접으로부터 주변부나 변두리에 있는 자의 평가가 정의인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는 불쌍한 자이다. 우리 모두는 티끌과 먼지로 돌아갈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상처받고 그 상처들을 치유해야할 어리석은 존재들이다.‘죽음의 백조’를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 하늘이나 바다나 땅 위에 죽음의 존재들과 가치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애초부터 인간들에게 큰 희망을 두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겸손한 자도 없고 신의를 지키는 자도 없으며, 정의로운 자도 없다. 진실로 기도의 제목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고, 세계 어는 곳에서나 전쟁이 없으며, 죄 없는 민중들의 삶이 파괴되는 일들이 없기를 기도한다. 한반도를 둘러 싼 우리의 삶의 현장은 전쟁 놀음을 경쟁하고 있다. 이 와중에 트럼프의 무기장사는 호재를 부르고 약자라고 생각하는 무능한 사람들은 무기를 사들이기에 바쁘다. 우리가 믿는 것은 창조주와 예수그리스도 성령이시다. 우리가 믿는 것은 거짓 없는 정의와 용서와 사랑 뿐이다. 인간들의 적대적 행위와 중상모략은 계속된다. 인간들의 이해관계와 힘의 균형은 하나의 위험한 경쟁을 불러 일으킨다. 백조가 춤을 춘다. 그것은 평화의 백조가 아니라 죽음의 백조이다. 청일과 러일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였듯이, 북미의 말 경쟁이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중일과 러시아가 함께 유익만을 계산할 때는 아니다. 지금의 현실은 과거 전쟁 때와는 그 위력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인간으로부터 올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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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균형-홍 성 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