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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한국교회, 진짜 위기는 무엇인가?’
    최근에 한국교회 교계 연합 단체가 목회에 관한 데이터연구소를 통하여 한국교회 2,000명 성도들에게 ‘주일 예배 형태’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내용을 밝혔다. 이 자료에 의하면 코비드19가 번지기 시작하던 2020년 4월에는 교회에 출석하여 현장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의 비율이 13.6%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2023년 1월에는 67.5%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반면에 온라인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은 2020년 4월 52.2%에서 2023년 1월에는 16.0%로 대폭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온라인이나 가정 예배, 기독교계 방송 듣기, 다른 교회 예배 참석 등으로 자신이 속한 교회 예배에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비율도 21.6%나 된다. 그리고 아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도 5.8%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회 현장 예배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교회로 인도할 대책을 조속히 강구(講究)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의 숫자도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응답한 것이 2012년에는 22.5%였다면, 2017년에는 20.3%였고, 올해 조사에서는 15%에 그쳤다고 한다. 즉 기독교인의 숫자도 상당히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코비드19는 이래저래 한국교회에 위기를 몰고 온 것이다. 현장 예배의 완전한 회복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성도들이 교회를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유명한(?) 일부 교회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그렇지 못한 교회는 성도들이 줄어들어, 일종의 모이는 교회와 모이지 않는 교회 간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양적인 성장에 목표를 두었다면 이제는 질적 성장을 위한 일에 몰두해야 한다. 과거 한국교회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할 때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불과 2%도 안 되었지만, 엄청난 일을 감당한 적이 있다. 사회적 선한 영향력은 숫자와 비례하지 않을 수 있고, 구원받은 참 성도는 적은 숫자로도 얼마든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코비드19 상황에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어쩌면 교회의 허수(虛數)는 아니었을까? 성도들이 구원받는데 필수적인 것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와 예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시적인 팬데믹 상황이라고 교회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믿음의 분량(分量)으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남은 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질적으로 더욱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지도자가 될 신학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 현재 각 신학교에서는 미달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각 교단들은 같은 교단 안에도 여러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이를 발전적 통•폐합을 통하여 실제적이며 건강한 영적 역량을 기르게 하여 제대로 훈련된 목회자를 배출하는데 힘써야 한다. 한국교회는 코비드19를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문제에서조차 사사기 시대와 같이,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 대처하고 대면 예배를 비난하는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일삼는 일들이 있어, 성도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또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가볍게 보도록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나, 앞으로 유사한 일들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때를 위해서 신학교육을 철저하게 하고 정예화된 지도자를 길러내야 한다. 세 번째는 미자립 및 예배처로 존립하기 어려운 곳들을 조사하여, 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각 교단들은 어려움을 당한 교회의 영적 자원을 최대한 흡수하여 각 교회에 분산하여 사역을 감당하게 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에 상당한 위기가 닥쳐왔는데, 이를 간파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하고, 그 존재감이 사라지고, 선한 영향력이 줄어들도록 궤계(詭計)를 부릴 것이다. 이번에 한국교회 ‘주일 예배 상황’에서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일반인들이 댓글을 단 것을 보면, ‘요즘 보기 드문 반가운 소식이라’는 사람도 있고, ‘(교회)코로나 진원지 역할을 했다’고 왜곡하고, ‘꼭 교회를 나가야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교회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더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교회와 지도자들의 위기를 보는 시각과 그 대처함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본질적인 것(예배를 회복하고 참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에 일치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또 비본질적인 것(기득권, 명예, 분파적 행동)에는 포기하는 자유함을 얻고,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는(한국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일에 하나가 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3-22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수공전도 펼칠 만한 것이었는가’
    전투 중에는 화공(火攻)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때로는 수공(水攻)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사자성어 속에는 화공 관련 책임론이 내재되어 있다. 촉나라의 마속 장군이 제갈량의 분부를 무시하고 자행자지함으로써 적(위병)의 화공을 받아 패전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참수형을 받은 비극이 그 말 속에는 들어 있다. 불이 난 뒤엔 남는 것이라도 있지만 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터도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마속(馬謖)의 비극에서 보듯이 화공도 무섭기는 하지만, 다른 사례에서 볼 때 수공은 더 무서운 데가 있다고 표현해 볼 수도 있겠다. <초한지>에는 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楚)나라가 서로 싸우는 중에 전자를 대표하는 한신 장군과 후자의 항장(降將; 투항 장군) 장한 사이에 벌어진 폐구성 전투에서 한신이 펼친 수공전(水攻戰)으로 인해 장한의 폐구성 수비군이 전멸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괴된 잔도가 복구되지 않는 한 한나라 군대가 쉽게 자기의 폐구성을 공격해 올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장한 장군은, 그만큼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서도, 갑자기 들이닥친 한나라 병사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게 사면초가라고 판단되자 장한 장군은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삼국지>에는 수공전의 실상이 더러 나타난다. 위나라의 조조가 하비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여포를 잡기 위해 수공전을 펼친 것이 주효해 마침내 여포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또 조조가 원소의 본거지 기주성을 포위해 수공 작전을 편 결과 끝내 그 성을 함락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소 조조에 대하여 다소 불안감을 지닌 <삼국지> 독자들에게 조조의 수공 성공 사례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질 리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볼 때 다음(관우)의 수공전이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지 않을까 싶다. 관운장에게 밀린 번성의 조인(조조의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조조가 우금과 방덕 두 장수를 파견하였다. 노련한 우금을 대장으로 삼고 젊은 방덕을 선봉장으로 삼아 대대적인 군대를 동원해 번성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런데 선봉장 방덕이 관운장과 맞붙어 싸울 때, 첫 날은 100여 합을 겨루고도 결판이 나지 않아 관운장을 놀라게 했는데, 둘째 날 50여 합을 겨루고도 결판이 나지 않은 채 돌연 방덕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라오는 관운장을 향해 방덕이 갑자기 화살을 쏘아 관우의 왼쪽 팔을 관통시켰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우금이 방덕을 불러들이고 나서, 관우와 방덕 간의 직접적인 병기 대결은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금·방덕의 군사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번성의 뒤쪽으로 주둔지를 옮기고 나자 관운장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는 수하들에게 곧 우금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공전을 펼치겠다는 의미였다. 그때 연일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주변 양강의 물이 불어나고 있었으며, 우금의 병사들은 좁은 증구천 골짜기로 몰려 있었기 때문에 관우는 자기 병사들로 하여금 상류의 물을 가두었다가 적시에 그 물을 터뜨릴 계획이었다. 며칠 뒤 실제로 큰물이 번성 주변으로 넘쳐흐르며 우금의 병사들을 덮쳤을 때, 관우와 우금 간의 싸움은 관우 쪽으로 결정적 승리가 찾아와버렸던 것이다. 우금은 사로잡혔고, 방덕 역시 물에 빠진 채로 사로잡혔다.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나버린 것이다. 이제는 유럽 쪽의 수공전 이야기로 가 보기로 하겠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속국(?)인 네덜란드마저 가톨릭 획일 국가로 만들기 위해 일명 ‘피의 법정’이라고 불렸던 그 무서운 재판소를 과도기로 하여, 종국엔 저네들 식의 종교재판소를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안에도 설치하겠다고 나오자 지금껏 지배국 스페인에게 순종적이기만 했던 네덜란드인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성상파괴운동을 시발로 하여 터진 무장투쟁의 저항운동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확대되었으니, 곧 저항군 세력의 거점이었던 레이덴에서 맞붙은 양쪽의 전투(1574)는 그들의 생명줄이라고 할 제방을 허물어 물바다를 만들며 결사 항전한 네덜란드 군의 우세 쪽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어 갔던 것이다. 사실 스페인군이 레이덴을 포위했을 때의 레이덴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1년 가까운 포위 작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나 있었으며, 그 결과 아사(餓死)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시민군은 저항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패망해 죽을 바엔 지금껏 그들의 생명줄로 여겨왔던 둑(제방)을 무너뜨림으로써 스페인군을 몰아낼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고, 게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해, 결국 스페인군은 거센 바다물결 앞에 맥없이 패퇴하고 말았다. 수공전도 정당방위의 목적에서라면 용인될 수 있는 일임이 입증된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2-2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분열을 치유하는데 교회가 앞장서야’
    우리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어디를 보아도 분열이 없고 다툼이 없고 분파로 쪼개져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정치와 이념성은 가족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도 심각하다고 한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 권사님이 전해 준 이야기이다. 지난해 치러진 대선을 앞두고 딸과 사위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한다. ‘어머님 이번에 00후보(진보성향 후보)를 찍지 않으면 어머님과 3년 동안 왕래를 끊을 것입니다’ 또 다른 권사님은 딸과 사위가 어른을 뵙기 위해 왔는데,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진보 후보와 보수 후보를 각각 지지하는 발언으로 다투더라는 것이다. 최근에 모 신문사가 지난해 말 여론조사를 했는데,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이 특정 법무법인 변호사 30여 명과 새벽까지 술자리를 했다는 것이 거짓으로 판명이 났는데도, 정당을 지지하는 것에 따라 의식 차이가 확연하게 달랐다고 한다. 즉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짓일 것’으로 믿는 사람이 77.9%이고, 아직도 ‘사실일 것’이라고 답한 것이 13.9%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사실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69.6%를 차지하고 거짓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11.5%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슈화된 사건이 진실이 밝혀져도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에서 철회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조사에 의하면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식사 자리(술 자리 포함)는 ‘불편하다’가 40.7%로 나타났고,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은 ‘불편하다’가 43.6%로 더 높게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당을 지지하는 층이나 야당을 지지하는 층이나 비슷한 양상이라고 한다. 또 현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대응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을 여당을 지지하는 층에서는 87.6%를 차지하고 있으나, 야당을 지지하는 층에서는 32.2%만이 잘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전 정권이 방역을 잘한다고 지지했던 사람들이 84%나 된다. 그야말로 내가 지지하는 정권은 어떻게 해도 지지하고, 내가 싫어하는 정권에 대해서는 ‘묻지마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언론사에서 역시 지난해 말, 여•야 국회의원 170명을 대상으로 ‘현 정부가 진행 중인 수사가 과거 정치보복 논란과 비교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여당 쪽의 의원들은 정치보복 성격을 느낄 수 없다가 80.6%, 달라진 것이 없다가 7.5%, 정치보복 성격이 약해졌다가(오히려) 4.5%, 정치보복 성격이 강해졌다가 1.5%, 모르겠다가 6.0%를 차지했다. 반면에 야당쪽 의원들은 정치보복 성격이 매우 강해졌다가 91.8%, 정치보복 성격이 조금 강해졌다가 6.2%, 달라진 것이 없다가 1.0%, 정치보복 성격 느낄 수 없다가 1.0%였다. 정치에 대하여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 국회의원 사이에서도 자가당착(自家撞着)이 매우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야당 대표 수사 후 분열된 국론을 어떻게 봉합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여당 의원들의 40.3%는 ‘법적 시비는 법정에 맡기고 언론•정치권은 수사 확대 해석을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야당 쪽에서는 33.0%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수사 과정과 결과를 철저히 공개해 의혹을 불식해야한다’는 응답이 여•야 각각 29.9%, 18.6%로 나타났다. 그리고 여당 의원들은 ‘법치국가에서 법대로 수사하는데 국론분열 발생 시각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이 28.4%,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야당 지도부와 대화 등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44.3%를 차지하였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갈등요인이 있다. 이념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 빈부갈등, 도농(都農)갈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최대 246조원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었는데, 이는 OECD 국가 가운데 갈등지수가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갈등을 유발시키는 세력은 무엇보다 정치권이다. 그들의 목적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고 국가의 발전과 근간을 세우는 일보다,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능한 집단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그들을 비난만 하고 있을 것인가? 교회부터 앞장서서 우리 사회 분열을 치유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지역색을 띤 모임부터 모두 해체해야 한다. 선교든 친교든 이런 모임 자체가 망국적 지역색을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이 힘을 합해 총회 임원을 선출하는 행위들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특정 정파를 지지하여 표를 ‘몰빵’하는 독재적, 독단적 행위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분열과 갈등 속에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패를 쪼개고 편을 갈라서 으르렁거리는 반신앙적 반성경적 세속 행위를 묵인하고 따르겠는가? 한국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나가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1-21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총성(銃聲)을 멈춘 성탄절’
    성탄절이다.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오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다. 정말 우리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어떤 때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아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다기보다는 자신을 더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주장이 앞서가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혹은 하나님보다 먼저 세상의 허다한 것들을 앞세우는 모습들도 본다. 복음보다 사상과 이념, 정치적 견해, 지역색, 세속적 가치를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허물어트리는 악한 일들에 동조하는 지도자들도 있다. 그가 영(靈)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육에 속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또 우리에게 평화의 모습은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화평(평화)케 하는 ‘하나님 자녀’의 성품은 있는가? 어떤 지도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사납고, 거칠고, 막 나가고, 일방적이고, 자기 우월적이고, 상대를 무시하며, 하나님을 자신과 동격으로 여기는듯한, 매우 모독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잘못했다는 마음이나 사과하는 것에 인색한 것을 본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많은 인물들을 만난다. 그들 가운데 한때는 하나님께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았지만, 나중에 사단의 조종을 받고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져, 하나님께 버림받은 교만한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2022년 성탄절을 맞으면서, 성도(聖徒)된 우리의 모습을 겸손하게 하고 그 행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지켜 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다툼이 없는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역사를 살펴보면, 성탄의 주님은 전쟁 가운데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멈추게 한 적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4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인데, 이날은 이상하게 총을 쏘고 대포를 발사하는 일이 없이 잠시 조용해졌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독일군 부대에서 먼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찬송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프랑스군 병사는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밤 10시경 독일군이 찬송을 부르니, 우리들은 프랑스 국가(國歌)를 부르고, 독일군은 다시 자신들의 국가를 부르고, 우리는 출정가를 불러 서로 응답하면서, 남자 수천 명이 노래를 부르니 마치 동화(童話)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죽음의 한복판 전장(戰場)에서 연속적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전투를 쉬고, 적군을 향하여 총을 쏘는 대신 노래를 부르고, 서로 휴식시간을 갖고, 상대편을 찾아와서 고향을 묻고, 담배를 권하고 초콜릿을 나눠주고 기념품을 교환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받은 훈장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이런 성탄절 휴전을 경험한 병사들이 1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주님께서 주신 성탄의 평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사납고 날카로와진 우리의 모습을 평화로 바꾸면 어떨까? 먼저 상대편의 입장을 바꿔 놓고 배려해 보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비판하고 판단할 일이 있을 때, 상대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억울하지 않을까?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상대편의 명예와 인권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그가 속한 공동체를 허무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되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런 성숙한 생각들이 평화를 만들어 간다고 본다. 그리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기죽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인정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우리가 겪는바 평화(화평)를 깨는 요인은 남을 무시하는데 있다. 남은 변두리에 두고 자기가 중심에 서려는데 있다. 성탄의 주로 오신 예수님은 본체(本體)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종(從)의 형체로 오셔서 사람의 모습으로 낮추시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런 주님을 닮지 않고는 성탄의 참 평화를 맞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총구(銃口)를 겨누고 있는가? 그 총을 내려놓아야 한다. 미움과 시기와 분쟁과 다툼을 멈추고, 남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바꾸는 마음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낮아진 마음으로, ‘고요하고 거룩한 밤’을 진심으로 맞아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12-2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언론은 권리만 있고, 책무는 없는가? ’
    최근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일정 가운데 MBC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시킬 수 없다고 하여 시끄러웠다. 이에 대하여 MBC와 언론 단체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런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대통령실에서 그런 조치를 내렸다면, 이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MBC의 제3노조가 발표한 성명에 보면, 왜 MBC가 그런 조치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제3노조가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MBC는 얼마 전 대통령이 미국을 순방할 때 사석 발언을 타사 기자들에게 알렸고, 또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자막에까지 넣어 방송하였다. 그리고 특파원들이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의원들을 욕을 했다고 백악관과 국무성에도 알렸다. 그리고 전에도 MBC가 보도한 행태를 지적했는데,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손혜원 의원 투기 의혹 보도를 미적거렸고, 조국 법무부장관 의혹에 침묵했고, 울산시장 관권 선거 의혹을 사실상 은폐했고, 똑같은 총선용 비례대표정당을 민주당에는 ‘의병정당’으로, 야당에는 ‘위성정당’이라 불렀고, 천문학적 피해를 일으킨 라임 펀드와 옵티머스 자산운용 사건을 축소 보도하였고, 대장동 비리 의혹을 외면하다 유00로 꼬리를 자르려 한 의혹을 받았고, 공수처의 전방위 통신사찰에 대하여 침묵했다는 것이다. 또 지난 3월 대선 100일간 선거 기간에는 단 하루도 예외 없이 편파 보도를 하면서, 윤석열 후보 인터뷰를 방송하면서 ‘거짓말’이라는 노래를 틀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MBC는 편파 보도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로는 진영을 뛰어 넘는 언론노조가 되자고 하면서, 지난 2017년 MBC의 비민주노총 기자 88명이 기자 업무를 빼앗길 때 침묵했다고 꼬집는다. 그렇기 때문에 ‘MBC 구성원들은 지금이라도 특정 정당의 선전도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언론의 본모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언론자유를 주장할 자격이 생긴다’고 피끓는 호소를 하고 있다. 흔히 MBC를 ‘노영방송’(勞營放送)이라고 한다, 노조(勞組)에 의하여 움직이는 방송이요, 언론이라는 것이다. MBC는 과거 2007년 5월 노무현 정부가 정부의 37개 부처 기자실을 3곳으로 통•폐합하여 언론에 대못을 박았고, 기자들도 허가 없이 공무원을 만나지 못하게 할 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확연하게 편파, 왜곡 보도를 하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대통령실의 국익을 위한 조치에는 한껏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MBC의 불공정 보도를 우려하고 비판하는 일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MBC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이미 잃어버렸는데도, 그에 대한 반성은 없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아주 빈약하다. MBC의 이런 태도에 보조를 맞춘 것은 한겨레와 경향신문 정도이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언론들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등록된 우리나라 언론은 총 5,154개(일간전국종합신문 23개, 일간지역종합신문 124개, 경제일간신문 13개, 스포츠일간신문 6개, 일간외국어신문 2개, 기타전문일간신문 55개, 무료일간신문 1개, 전국종합주간신문 33개, 지역종합주간신문 554개, 전문주간신문 673개, 공영방송 19개, 민영방송 12개, 종교특수방송 8개, 종편보도채널방송 6개, 지상파 DMB 3개, 인터넷언론 3,594개, 통신사 28개)이다.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만도 62,80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언론들이 있는데, 이제는 편파, 왜곡을 일삼는 MBC 방송의 영향력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에 즈음하여 사회 일각에서는 MBC 폐방 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언론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언론의 역할과 영향은 지대하다. 그만큼 언론이 잘못된 보도를 할 경우, 돌이키기 어려운 폐해를 사회와 국가와 국민들에게 끼치게 된다. 자신들은 공정한 방송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언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형성시키고, 더 나아가 국익을 손상시켜 국민들을 피로감에 시달리게 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주장한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탄한 소리인가? 언론은 권리만 있고, 책임과 의무는 없다는 것인가? 남을 비판하고 사회적 부정과 부패를 찾아내고 알리는 언론이야말로, 가장 공정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자리에 있어야 그 일들이 인정을 받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맞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계 언론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흔히 말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거기에다 선교적 사명까지 감당해야 한다. 교회연합신문이 창간기념일을 맞는다. 축하드리며, 지금까지도 어렵게 교회의 현장을 지키면서 기독교 언론 역사를 만들어 왔지만, 앞으로도 한국교회를 지키는 보루(堡壘)의 역할에 더욱 매진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11-19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피난처’와 ‘안네의 일기’의 나라
    요즘 우연한 기회에 네덜란드(화란)의 역사를 좀 들춰보는 일이 있게 되었다. 아니,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상호 ‘침략과 방어’의 역사에 더 관심이 갔기 때문에 지난 16세기 전후의 네덜란드 역사를 그 관점에서 주로 살펴보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스페인의 군주는 펠리페 2세였는데, 그는 특히 가톨릭 옹호자로 이름을 날렸고, 그 때문에 반(反)종교개혁 운동가로서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칼뱅주의 개혁의 바람이 크게 불어 닥침으로써 결국 개신교(개혁 교회)가 강화돼버린 네덜란드를 그대로 놔둘 수가 없다고 판단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어떤 강경책을 써서라도 네덜란드를 스페인처럼 획일적인 가톨릭 국가로 만들 방책으로 ‘스페인 식 종교재판소’를 네덜란드에도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자국 스페인과 이웃 포르투갈에 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가톨릭 강화(획일화)에 크게 득을 보았던 스페인의 군주는 네덜란드에도 그 종교재판소를 두어 가톨릭 일원화를 획책하려고 하였다. 이 스페인 식 종교재판소가 어떤 기관이었는지 이미 정평이 나 있어서 그 악명을 귀로 듣기만 해도 사람들이 소름 끼칠 정도였는데, 종교 면에서 자유와 관용을 사랑하는 네덜란드인들에게 이 소식은 마치 푸른 하늘에 날벼락(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19세기 후반에 창작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최후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 속의 ‘대심문관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이야기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내려오신 때는 종교재판소의 ‘엄한 화형(火刑)의 뜰’에서 100여 명에 가까운 이단자들이 대심문관인 주교의 지휘 아래 대거 분형(화형)에 처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 이야기는 15세기 스페인의 도시 세비야, 그러니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성취되기 직전 시기에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는 속칭 이단자들에 맞서 교황이 시작한 이를테면 고전적인 종교재판의 성격이 강했지만, 그 재판이 스페인이란 나라에서 그들의 특성에 맞게 발전해(?) 나간, 즉 15세기 후반(1478)부터 스페인에서 시작된 ‘스페인 식 종교재판’이란 것은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 스페인 식 종교재판이란 것은 유대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을 했다곤 하지만 진심으로 개종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들을 심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악명 높은 이 재판에서는 정치경찰과 정보원들의 활약에 힘입어, 사실을 그대로 자백하라고 유대인들을 고문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또한 무슨 법적 테두리에 구애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 뒤 소위 알함브라 칙령(1492)이 발표되고 난 후 유대인들에게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갔다. 스페인 정부는 유대인들이 가톨릭교로 개종하는 걸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아예 스페인에서 “모두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4개월 안으로 떠나라는 칙령에 의해, 지금껏 개종을 거부하고 이제야 추방령을 수용한 17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갑자기 그 나라를 떠나면서 질병과 아사(餓死) 등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무자비한 스페인 정부가 이제는 네덜란드마저 가톨릭 획일 국가로 만들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겠다고 나오자 지금껏 지배국 스페인에 대하여 순종적이기만 했던 네덜란드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성상파괴운동(1566)을 시발로 해서 터진 저항운동은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 양상의 무장투쟁으로 확대되었고, 북부 의 도시 레이덴에서 맞붙은 양군(兩軍)의 전투(1574)는 그들의 생명줄인 제방을 허물어 물바다를 만들며 결사 항전한 네덜란드 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란 원칙에 따라 그들의 종교(개혁교회)를 그대로 지켜나갈 수 있었고, 특히 유대인들과 같은 수난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17세기의 황금시대를 열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 나치 군의 침략을 받아 자기네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영입한 유대인들마저 극도의 박해를 받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일은 그들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난의 유대인들을 도운 코리 텐 붐 일가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신앙수기 <피난처>가 이 나라에서 나오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고, 또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와 그 가족의 고통스런 삶이 기록된 <안네의 일기>마저 이 나라에서 탄생하게 된 일은 더 큰 축복이었다. 유대인들이 최후의 피난처로 삼았던 이 관용의 나라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결과는 결코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10-22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무속 세계에 얽힌 사연들'
    20년 전(2002년)에 어느 방송사가 방영했던 TV극 <장희빈>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즘 한창 재(再)방영하고 있어서 자연히 그 내용에 끌려 시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회(79~80회)에서는 좀 특이한 장면이 나와서 그것에 끌려 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보았던 기억이다. 희빈 장씨가 막례란 무녀를 끌어들여 중전을 음해하는 공작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취선당에 차려놓은 신당에 미리 마련된 중전(왕후 민씨)의 얼굴을 표적삼아 화살을 겨냥해 과녁(눈알)을 명중시키는 짓거리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무당 막례가 몇 차례 화살을 당기다가, 직접 쏘아보라고 희빈 장씨에게 활을 넘겨주니까 거침없이 화살을 당기고 있다. 중전 민씨가 큰 타격을 받아 빨리 죽도록 만들어 보려는 무당 막례의 계획된 만행에 서슴없이 가담하는 희빈 장씨의 잔인한 모습이다. 장희빈은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죽게 되면 그 자리에 다시 자기가 오를 것을 걸기대(乞期待)하며 그런 저주의식을 주저 없이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민씨 사후(死後)에 최숙빈의 발고(發告)로써 밝혀짐으로 인해 그녀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술(巫術)과 부패 권력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서로 손을 잡은 사례를 볼 수 있다. 김동리 작가의 장편소설 <을화>(1978)에는 주인공인 어미 을화와 아들 영술 사이의 기막힌 이야기가 들어 있다. 어미 을화(乙火)는 무당 신분이고 그녀의 아들 영술이는 예수교 신자이다. 영술이가 마을 교회엘 들렀다가 우연히 그의 생부를 만나게 된 뒤로, 그가 아비 집에 찾아가거나 머무는 일이 잦아진 것을 극력 반대하는 어미 을화와 아들 영술 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게 된다. 어미와의 대립 끝에 영술이 나흘간이나 귀가하지 않는 동안, 을화는 아들의 귀가를 고대하며 식음을 전폐한 채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영술이, 지난 제 감정적 처사를 반성하며 귀가한 다음날 새벽, 을화는 아들의 성경책을 몰래 빼내 불에 태우며 굿을 벌이고 있었고, 이 현장을 목격한 영술이 그 불을 끄려고 근처의 물그릇을 집어든 순간, 을화의 식칼이 아들의 왼쪽 가슴을 찔러버린 것이다. 칼을 맞은 영술은 다음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무당에게는 모자지간의 관계조차 제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무슨 불가침의 영역이 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녀의 양심(또는 사랑)이란 것이 그녀 특유의 ‘엑스터시(황홀경)의 유지’만큼도 그 자신에게 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기원 작가의 장편 역사소설 <조선백자 마리아상>(1979)에는 사기장이[陶工] 김신봉이란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상당히 늦게 예수교도(속칭 천주학쟁이)가 된 편이기는 하지만 신앙만은 아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는 청년 신도이다. 그런데 그의 사기장촌에도 ‘천주학쟁이’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이 불어닥쳤고, 그도 동료 도공들이 먼저 잡혀간 광주목의 관아로 자수 형식으로 걸어들어갔다. 이가환 광주 목사(부윤)의 온갖 회유와 협박, 아니 견디기 힘든 장타(곤장 타격) 등의 악형에도 굴하지 않던 신봉이가 그만 마지막 한 순간에 힘없이 무너지면서 “소인은 하느님을 모릅니다.”라고 배교를 선언해버리고 만다. 이는 무당인 장모의 딸, 곧 ‘신봉의 아내’가 벌인 고도의 심리전술에 그가 휘말린 때문이었다. 남편을 어떻게 해서든 배교자로 만들고서 자기들의 무속 세계로 그를 끌어들여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그녀가 남편이 취조 받는 옥으로 갓난아기까지 안고 들어와서는 남편 대신 자기가 처벌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게 무당인 그의 장모의 머리에서 미리 짜낸 작전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장판(杖板) 위의 아내가 곤장을 맞는 소리, 거기에 놀란 아이의 자지러진 울음소리…. 게다가 매질에 축 늘어져 있던 아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하느님 같은 건 모른다고 제발 어서 말씀드리세요.”라고 애걸하는 속에서, 결국 신봉이는 속절없이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무속세계의 끈질긴 대결의식과 그 만만찮은 파괴력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껏 우리는 한 사극과 두 소설 작품들 속에 나타난 무속 세계의 권력지향 성향과 대(對)기독교 파괴력의 실상 등을 살펴보았다. 문제는 이런 것이 사극이나 문학작품 속에 보이는, 그 수준에 그치는 실상일 뿐이냐는 것이다. 이런 무당 이야기들은 결코 작품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실제론 우리 삶의 현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것이다. 전(前) 박 정부 시절, 최 모(某)란 무녀가 국정 책임자를 맘대로 좌지우지하다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그 책임자도 몰락하게 한 사례를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07-25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어른의 고집이 아이들의 교육을 망친다’
    6월 1일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에서는 광역 단체장, 국회의원 보궐, 기초단체장, 지역 광역의원, 비례대표 광역의원, 지역구 기초의원, 비례대표 기초의원, 그리고 광역 교육감을 선출하는 선거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현 여당인 국민의 힘이 상당수의 자리를 탈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는 광역시·도 교육감 선거라고 본다. 교육감은 매년 100조원에 가까운 예산을 사용하면서, 대한민국의 교육과 학생들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자리이다. 그 동안 우리 교육 현장은 대부분 진보 계통의 교육감들이 교육을 좌지우지해 왔다. 전국 17개 광역시•도 교육감 가운데 14명이 진보였다(전교조 출신이 10명, 민교협 출신이 4명) 그 동안 진보 교육감들이 벌여온 교육 행정은 학생인권조례, 혁신학교, 무상급식 등 진보 정치의 실험 무대처럼 여겨졌다. 진보 교육감들은 학생들에게 시험에서 해방, 인권 강화 등을 시키는데 주력했는데,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도 학력 저하, 사교육비 급등 등의 부작용을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진보 교육감들이 지난 10여년 간 주력하여 만든 혁신학교는 전체에서 22.6%나 차지하는 2,696개교나 된다. 고등학교 혁신학교의 경우 전국 평균보다 3배 가까이 기초학력이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치지 않아 실력이 뒤떨어지는 학생들이 서야할 곳은 어디이겠는가? 학생들을 과도하게 공부하는데 몰아넣어서도 안 되지만, 당연히 갖춰야할 실력을 쌓을 기회조차 낭비한다면, 이것은 바른 교육이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이번 2022년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교육감들이 남아 있는 곳에서는 계속 혁신학교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의 성적 하향화는 학생들의 개인 문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가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진보 교육감들은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학생들이 누리지 않아도 될 과도한 권리를 주어서, 피교육자 신분인 자신들을 망치고, 교권이 흔들리는 일들을 해 왔다. 그리고 잘못된 성 평등, 성 교육을 통하여 아이들의 인성을 망치게 하지 않았는가? 학교에서 젠더교육, 성적 자기 결정권, 콘돔사용, 피임법 등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거기에다 좌편향 인권교육, 이데올로기를 대입한 민주교육 등은 결국 진보 교육감들의 성향에 맞춰 학생들을 이념의 아바타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닌가? 교육감 선거에서는 매번 2,000억원 정도의 선거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 많은 선거비를 국민의 세금에서 지출하고, 각자 들어간 선거 비용을 뽑아내기 위하여 부정은 없을까? 일선 교육감들이 집행하는 돈은 엄청나다. 2022년 교육부 예산이 89조 원이다. 이 중 상당수가 각 교육청을 통하여 집행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은 14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서울시의 교육감 선거는 상당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위 말하는 진보 교육감을 교체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은 38.1%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보수 교육감 후보 3명이 받은 득표율은 53.2%이다. 보수 교육감 후보들이 우리 교육의 미래를 위하여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서울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면, 당연히 보수 교육감이 당선될뿐더러, 진보 교육이 망쳐놓은 공교육을 되돌릴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왕설래하던 후보 단일화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은 쪼개진 상태로 교육감 선거를 치르게 됨으로, 뻔히 알면서도 진보 교육감 후보에게 교육감 자리를 헌납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어른들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이 계속 멍들게 될 것이다. 물론 단일화라는 형식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들이 교육을 망치는 것을 보면서(보수 후보들도 이 문제를 다 지적함) 자기들의 정치적 야망과 권력의 욕심으로 이런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낸 것은 매우 지탄받아야 할 일이다. 우리 아이들 교육의 미래와 공교육 회복을 감히 자신들의 욕심으로 채우려다, 망쳐버린 결과는 교육의 미래를 위해 간절히 바라던 국민들의 바람도 헌신짝처럼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2022년 6·1지방선거의 최대 잘못은 서울시 교육감 보수 후보의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일이며, 이것 때문에 또다시 교육 망가지기를 지켜보아야 하는 국민들의 안타까움과 실망은 크다. 이제는 진보 교육감들의 교육 행태에 대한 국민들과 학부모들의 감시가 강화되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06-14
  • [토요시평] 대통령 취임식장의 인사(人事)법
    지난 5월 10일 국회의사당에서는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이뤄지고(윤석열 대통령은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으로 분류되었고, 문 대통령 시절에 승승장구하여 검찰총장까지 지냈지만, 문재인 정권하의 절대권력을 수사한 것 때문에 갈등을 겪다가 결국 검찰총장직을 물러나고, 정치에 입문한 지 8개월 만에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음) 역사적인 취임식까지 거행하게 된 것이다. 위대한 국민이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직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되게 한 촛불세력에 의하여 탄핵되어 4년 9개월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풀려나서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전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아직도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과, 고 전두환 대통령 부인, 노태우 대통령 딸도 뒷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입장하기 전 다른 분들은 단상에 앉아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마지막으로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때 나는 문 대통령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전직 대통령과 다른 전직 대통령 가족들과 손이라도 잡으면서 인사를 나눌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문 대통령 내외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서일까? 무안해서일까? 미처 보지 못해서일까? 사실 그런 인사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자리가 아니면 좀처럼 나누기 어려운 기회일 것으로 본다. 전직 대통령과 물러나는 대통령이 지난 시간들 속에서 이유야 어찌 되었든,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여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했다면, 마음이야 어떻든지 간에 ‘미안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건강하십시요’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면 얼마나 국민들이 보기 좋았을까? 우리나라는 현재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하여 열세 분의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그중에 한 분은 망명지에서 돌아가시고, 두 분은 짧은 임기를 마쳤고, 네 분은 감옥에 갔었고, 한 분은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아직도 한 분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다. 국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었고, 국민을 위한 가장 큰 봉사의 자리에 있었지만, 결말은 불행한 경우들이 많았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때는 미국의 생존한 전직 대통령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국가 원로의 모습을 보일 때,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그것이 왜 안 될까? 우리나라는 정치적 견해가 다르고, 정당이 다르면 마치 원수 대하듯, 특히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았던 분들이 정치적 견해의 다름으로, 줄줄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면 민망하다. 정치색이 다르다고, 후대의 잣대로 선대의 지도자를 평가하여 문제가 있다며 보복을 한다면, 이는 국민이 불행하고 국가의 품격이 떨어진다. 역대 대통령을 지낸 분들도 그 당시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 아닌가? 또 나름대로 업적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적을 대하듯 하는 모습은 어쩐지 슬픈 일이다. 그저 한 자리에 어렵게 모였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분이 거침없이 손을 내밀고 짧은 인사라도 나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면에 취임하는 대통령과 부인은 깎듯이 직전 대통령과 전임 대통령을 예우하는 것을 보았다. 온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넓은 마음으로 덥석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아량이 있다면, 대통령들이 국민통합이니, 협치니, 상호 갈등 해소니 하는 정치공학적이고 공허한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국민들 앞에서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실제 모습은 아닌 것을 보노라면, 우리나라 정치가 지금까지 저래왔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걱정이 된다. 정치가들은 흔히 국제적으로 유명 정치인이 사망하면, 조문(弔問)을 가는데, 그곳에서도 각국의 정상 사이에 ‘조문 외교’가 벌어진다. 국제회의에 참석하면 역시 그곳에서도 ‘막후 외교’가 벌어진다. 정치를 하는 분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고 본다. 그런 감각이 있다면,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경축의 자리에서 어찌 ‘경축식 인사’나 ‘취임식 인사’로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까? 성경에 보면, 화평하게 하는 것, 화목하게 하는 것, 용서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말씀한다. 대통령을 지낸 분들은 자신의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온 국민의 대통령이며, 국민 대통합의 정신과 자세를 항상 잃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의 인사법, 아쉬움으로 남는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05-21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뻐꾸기 둥지에 얽힌 사연'
    윤모촌 수필가가 <서울 뻐꾸기>란 이름의 수필을 쓴 적이 있다. 이를 표제로 한 수필집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만큼 <서울 뻐꾸기>는 꽤나 이름난 수필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문점이 없지 않다. 왜 하필이면 ‘서울 뻐꾸기’일까? 한국인들 모두의 새라면 ‘한국 뻐꾸기’도 될 수 있고, 그의 고향 이름을 따서 ‘연천 뻐꾸기’라고 했더라면 훨씬 더 정감이 느껴지는 그런 이름이 되었을 법도 한데 왜 하필 ‘서울 뻐꾸기’란 말인가, 의문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무 근거 없는 의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광섭 시인이 자신의 시 한 편에다가 <성북동 비둘기>란 이름을 붙여 발표한 적이 있다. 성북동이 서울의 한 동네이니까 만일 그 시에다 ‘서울 비둘기’란 이름을 붙여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도 되지만 왠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름인 것 같다. 역시 그 시는 <성북동 비둘기>여야 했다고, 역시 근거 없는 단안이 한 순간 내려진다. 마찬가지로 윤모촌의 수필에다가도 ‘성북동 뻐꾸기’, 또는 그가 살았던 어떤 동네 이름을 붙여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번엔 예상 밖으로 신속하게 ‘역시 <서울 뻐꾸기>여야 해’, 라는 근거 없는 확답이 따라 나오고야 만다. 결국은 기성 명칭이 지니는 기득권의 위력이 그만큼 크다는 결론 아닌 결론이 나오고야 만 셈이다. 윤모촌의 <서울 뻐꾸기>는 뻐꾸기란 새의 아주 어렸을 때의 배은망덕的 만행(?)에 대하여 리얼하게 묘파해 놓고 있다. 남(개개비)의 둥지 속에서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것이 어찌 못되게 구는가를 그는 이렇게 그려 놓은 것이다. “털도 나지 않은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필사적으로 개개비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천길 만길 아래로 밀어내뜨리는 것이다. 저를 품어 키우는 은인의 알을 하나도 남김없이 밀어내고, 그놈은 개개비의 품을 독점하는 것이다.” 실로 사람들의 심금을 휘어잡는 구슬픈 울음을 울어대는 뻐꾸기의, 선천적으로 못된 습벽(習癖)을 이 수필이 완전히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았다고 보겠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습벽’이란 말을 풀이해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행동, =버릇”이라고 했는데, 이 말 풀이처럼 알에서 먼저 깨어난 어린 뻐꾸기가 주인(은인)인 개개비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의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못된 행동(버릇)’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수필(‘서울 뻐꾸기’)의 작가인 윤모촌은 이해하기 힘든 이 동물을 가리켜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이라고 하면서도, 이어서 또 이렇게도 반응하였다. “알 수 없는 것이 조물주의 그 조화”라고 말이다. 또 비슷한 이런 표현, 곧 “배은망덕으로 생존을 잇게 한 신의 의지와 섭리가 알 수 없는 일”이란 해석(표현)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제목에 의할 것 같으면 새들의 둥지에는 ‘개개비 둥지’만이 있는 게 아니라 ‘뻐꾸기 둥지’란 것도 있어서 다른 새(이를테면 개개비 같은 새)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게 한다. 나는 생물학자도, 조류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개개비 둥지’ 아닌 ‘뻐꾸기 둥지’란 게 따로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한다. 켄 키지의 소설에 ‘뻐꾸기 둥지’란 말이 분명히 쓰인 것을 보면 그런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으로만 쓰이지 실제로 ‘뻐꾸기 둥지’ 같은 게 있을 리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뻐꾸기는 개개비 둥지에서 실제적으로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 새이기 때문에 따로 무슨 ‘뻐꾸기 둥지’ 같은 것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켄 키지의 그 소설 속에서도 무슨 뻐꾸기 둥지라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단지 은유적 공간으로만 그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사례로써 분명한 실증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즉 ‘뻐꾸기 둥지’는 하나의 은유적 공간일 뿐이다, 라고 말이다. 실제로 ‘뻐꾸기 둥지’는 그 소설 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못된 뻐꾸기들이 득실거리는 권력집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 집단이 뻐꾸기 둥지로서의 성격을 지닌 이상, 그 구성원들이란, 개개비를 이유 없이 밀어내는 뻐꾸기와도 같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근성의 소유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이 될는지도 모르겠고, 또는 그들에게 “배은망덕으로(라도) 생존을 잇게 한” 조물주(神)의 섭리마저 의심케 만들 그런 존재가 되고 말지, 우리는 오늘의 ‘서울 뻐꾸기’들의 앞으로의 행태를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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