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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엔데믹 시대 속 ‘원 리더십’의 붕괴, 한국교회의 진짜 위기는 무엇인가?
    한때 9부 능선을 넘기도 했던 보수 연합기관 통합 작업이 올 들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 한국교회의 오랜 숙원이었던 ‘대통합’을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서 놓치는 상황을 자초한 것인데, 기대가 워낙 컸던 만큼 아쉬움이 쉽사리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무너진 대통합’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그 결과에 대한 누군가의 잘잘못이나 책임을 분명히 따져야겠지만, 그 전에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한국교회가 처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먼저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년 여 한국교회가 통합을 그토록 외쳤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원 리더십’의 재건에 있었다.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으로 이어지는 보수 연합기관의 3단 분열 이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원 리더십’이 붕괴됐고,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권위는 삽시간에 무너졌었다. 무너진 권위와 사라진 신뢰, 여기에 추가된 목회자들의 도덕적 추락 앞에 한국교회가 쌓아왔던 100년의 공든탑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나마 분열의 화를 피했던 NCCK 등의 진보세력은 건재했지만, 동성애·포괄적차별금지법 등 기독교 본래적 가치마저 이념의 구호로 가리는 반기독교적 행태를 반복하며,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고 말았다. 결국 한국교회 회복의 관건은 보수 연합운동의 재건에 있었고, 그 핵심 작업이 바로 ‘연합기관 대통합’이었던 것이다. 애초 ‘원 리더십’의 붕괴에서 출발했던 한국교회의 위기는 그 유일한 해법으로 꼽힌 ‘연합기관 대통합’이 사실상 좌절되며, 위기 그 자체의 원점으로 돌아왔다. 허나 분명히 깨달아야하는 것은 지금의 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또 위험하다는데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분열의 고착화다. 워낙 목표에 근접하며, 교계 대내외적인 기대를 모았던 만큼, 실패에 따른 후유증 역시 그에 비례하고 있다. 여기에 이러한 과도한 실망은 앞으로도 통합은 절대 불가하다는 좌절로 이어지며, 사실상 통합을 단념케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통합 과정에서 드러난 당사자들의 행태는 한국교회 구성원들의 실망을 배가시키고 있다. 연합기관 대통합이라는 궁극의 염원을 무시한 채, 온갖 이권과 정치적 계산으로 9부능선 앞에 선 통합을 주저앉힌 그들의 행태는 사실상 “교권이 통합을 원치 않는다”는 씁쓸한 결론을 확인시켰다. 한국교회 내부에서 교권에 대한 신뢰가 다시 한 번 무너졌다면, 외부적으로는 ‘원 리더십’이라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더욱 모호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에는 그나마 주요교단들이 참여하는 ‘한교총’이 부족하나마 대사회적 대표 역할을 감당해 왔지만, 올 들어 한기총이 정상화를 이뤄내며, 규모에서 얻어냈던 그 대표성마저 분산되고 있다. 규모에서는 한교총이 압도적일지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한기총의 ‘네임밸류’가 정상화의 기류에 맞춰 최근 급부상하며, 다시 한교총과의 교계 대표 자리를 두고 무한 대립마저 예고하게 된 것이다. 냉정히 이는 오히려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가장 위기에 처해있던 2년 전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그때는 한교총 대표회장이었던 소강석 목사가 분명한 리더십을 갖고, 정부 및 대국민과의 소통을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정부를 상대하는 소 목사의 방식에 대한 반대 여론도 일부 있었지만, 그 반대조차 소 목사를 한국교회 대표로 인정했기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한국교회의 리더십은 하나로 모여 있었던 것이다. 더 큰 부분은 연합기관에 대한 무관심이다. 엔데믹 시대로 접어들며, 한국교회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어느새 국민들은 한국교회의 대표가 누구인지?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곧 대사회적 영향력의 감소로 이어지며, 한국교회의 사회적 존재감이 추락된 상태로 고착하게 만들었다. 한국교회가 가장 우려했던 그 것, 바로 기독교 울타리 안에 갇힌 ‘교회’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직 불씨가 살아있는 대통합 프로젝트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원탁 테이블’ ‘공동성명서’ 등 지난 2년 전 분열 이후 처음으로 이뤄낸 의미있는 성과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 등 사회적 악법의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에, 3개 기관이 함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공동 성명’조차 내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분명한 위기를 느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아직 대통합의 꿈은 끝나지 않았기에 누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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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3-03-20
  • [기자수첩] 4차산업혁명시대 속 러다이트 운동과 기독교
    ◆ 근대 인류 발전의 가장 결정적 사건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으니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변화를 통해 전 세계 사회, 경제, 정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산업혁명'은 인류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는 단초가 된다. '산업혁명'은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힐만한 일이지만, 당시 모든 이의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18~19세기 영국의 가장 보편화된 산업 중 하나가 바로 섬유를 가공하는 '방직업'이었는데,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방직기가 숙련공의 역할을 대신하며, 엄청난 실업자가 발생한 것이다. 모든 공장은 인건비도 들지 않고, 대량생산마저 가능한 방직기를 들여놨고, 그 결과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고,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아침에 삶이 파괴된 노동자들의 분노가 향한 종착지는 바로 '방직기'였다. 방직기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일자리를 잃을 이유도 없고, 또 월급을 받지 못해 굶을 일도 없을테니 말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방직기'를 직접 파괴하기 시작한다. 발전을 거부함으로, 자신들의 잃어버린 위치를 되찾고자 했던 것, 변화와 발전을 거부하는 '러다이트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19세기에 일어났던 '러다이트 운동'은 이후 시대가 한 번씩 크게 도약 발전할 때마다 종종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20세기 후반 컴퓨터의 보급과 맞물린 과학기술시대의 도래는 네오러다이트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러다이트 운동'이 제4차산업혁명시대의 시작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AI가 모든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며, 결국 인간의 존재가치가 없어질 것이라는 본질적이 우려다. 과거 영국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처지와 매우 닮아있는 이 우려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찾기 위한 새로운 '러다이트 운동'을 꿈꾸고 있다. ◆ 제4차산업혁명시대의 '러다이트 운동'은 의외로 기독교계에도 널리 뻗쳐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절대적이라 여겼던 목회자의 영역마저 AI가 침범할 것이라는 우려로, 특히 코로나를 지나며, 새롭게 자리잡은 '온라인 예배' 문화가 'AI 설교'도 마냥 판타지가 아닐 수 있음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 분위기에 일부 목회자들은 제4차산업혁명시대에 보내는 기대의 한 켠에 자신의 존재적 가치마저 혹여 위협받을 수 있다는 걱정과 우려를 토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변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로 이어지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폐쇄적 교회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 역사에서 반복됐던 '러다이트 운동'이 주는 교훈은 하나다. '공의' '공익'을 전제한 시대의 발전과 흐름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이 방직기계를 파괴해 자기 자리를 되찾고자 했지만,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결국 또다른 방직기계였다. 하지만 새롭게 변화한 시대는 인간이 해야 할 또 다른 역할을 선사한다. 네오러다이트운동가들이 컴퓨터의 보급·발전에 반기를 들었지만, 결국 컴퓨터의 발전은 새로운 산업 환경 속에 수많은 직업을 양산해 냈다. 파도가 클수록 이를 넘고자 하는 서퍼들은 결코 파도에 맞서지 않으며, 파도의 흐름에 순응하는 원리와 같다. ◆ 그렇다면, 좀 더 직접으로 기독교 목회자의 영역을 AI가 대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대전 유성에 위치한 국립중앙과학관에는 향후 AI로 인해 사라질 직업군이 나열되어 있다. 그 곳에는 텔레마케터, 계산원, 청소부 등의 서비스업은 물론이고, 촬영기사, 측량기사, 건설 노동자 등의 기술집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판사, 기자, 학자 등 일에 있어 사고와 판단이 고도로 요하는 직업들도 AI가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이 중에 '종교인'은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기술 뿐 아니라 작가의 감정이 요구되는 화가조차 사라지는 직업군에 들어가 있지만, 종교인은 없다. 이 간단한 그림은 목회자의 영역을 결코 과학의 기술로 대체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AI가 대신 전할 수 없는 것은 그 분의 뜻에 대한 근본적 이해도 불가능할 뿐더러, 결정적인 사명이 없기 때문이다. AI는 과학적 기술과 기존에 입력된 통계로 자기 역할에 대한 판단을 한다. 하지만 설교는 단순히 지식과 통계, 정보로 이뤄지는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주권적 관계와 성경에 대한 의미적 해석, 그리고 무엇보다 AI는 결코 담아내지 못하는 목회자의 '감성'이 바로 설교에 녹아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영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희생’이라는 감성은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더욱 빛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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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3-02-23
  • [기자수첩] 히틀러의 ‘더 큰 거짓말’과 한기총의 '이단 음모론'
    조작된 논리에 ‘애국’을 가미한 저급한 선동 이대위에 오른 문제적 발언들, 정작 아무도 해명 안해 ◆ 세계 근현대사에 있어 최악의 지도자이자, 그릇된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지목받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유일무이한 당대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연설이었다. 민족 우월주의에 바탕한 그의 탁월한 연설은 그를 희대의 선동가로 만들었다. 대중들을 어떻게 하면 흥분시킬 수 있고, 또 흡수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 그가 바로 히틀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 600만 대학살 등 전 세계가 경악할 엄청난 범죄를 자행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에게 선동당한 대중들의 투쟁적 지지가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완전한 선동을 위해서는 필히 거짓이 동반된다. 그것도 소소한 거짓이 아닌 판 자체를 뒤엎을 어마어마한 거짓을 말이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거짓에 선동된 대중들에 '일말의 의심'은 찾아볼 수 없다. 근거와 이유, 상황과 명분 등 모든 것에 반하는 어처구니없는 거짓일지라도 그들은 그 결론에만 집중하고 흥분할 뿐이다. '음모론'을 즐기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확인을 받기 때문이다. ◆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 관련 이단성 이슈가 연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가 “모세오경만 성경이고, 나머지는 해설서다” “나는 메시아 나라의 왕”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성령의 본체” 등의 발언과 특히 아들 전OO을 '독생자'로 지명한 사실을 문제 삼으며, 이를 "명백한 이단사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연히 전 목사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전 목사는 이단이 결코 아니라는 것인데, 문제는 아무도 왜 전 목사가 이단이 아닌지를 설명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전 목사가 아닌 주변 이슈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모습이다. “메시지에 반박할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공격하라”고 했던가? 한기총의 운영과 임시체제, 이대위 조직 등 별건의 문제를 끄집어 내어, 한기총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거짓이다. 이번 사태에서 이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새로운 주제를 등장시켰다. 바로 소강석 목사, 이들은 전광훈이라는 커다란 이슈를 소강석이라는 더 큰 이슈로 덮으려 했다. 히틀러가 말한 '더 큰 거짓말'을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소강석 목사인 셈이다. 자연스레 소 목사라는 이슈는 음모론으로 조작된다. 북한과 전 정권이 배후에서 소강석을 통해 전광훈을 제거하려 한다는 ‘더 큰 거짓말’은 이슈의 물타기를 위한 철저한 선동이었다. ◆ '애국'이라는 미끼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전체주의적 음모론, "나의 상상이 곧 너희의 세계다"라는 히틀러의 말이 한국교회에서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슈와 선동, 거짓과 음모로 뒤덮인 이번 사태를 한국교회는 다시 담백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 사태의 출발점은 과연 어디인가? 우리의 궁금증은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현재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에 또다시 소명의 기회를 부여했다. 우리는 이제라도 이번 이슈에서 ‘메신저’가 아닌 본래의 ‘메시지’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자신의 아들을 독생자로 지칭한 전 목사의 발언이 한기총에서 어떻게 소명될 수 있을지? 그게 이번 이슈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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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2-12-28
  • [기자수첩] 선 넘은 ‘인포데믹’ 이제 한국교회가 나서야
    기독교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한 끔직한 루머들 한국교회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악성루머 근원지 발본색원해야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자신을 겨냥한 연이은 가짜뉴스에 결국 발끈하고 나섰다. 이번에는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 이단 규정 관련, 그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억측인데, 밑도끝도 없는 가짜뉴스에 소 목사는 "이제 그런 왜곡된 주장은 그만하라"는 정중한 경고를 날렸다. 한기총은 지난 12월 7일 임원회에서 전광훈 목사를 '명백한 이단'이라고 결론내린 이대위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 이를 실행위로 넘긴 바 있다. '독생자' '메시아 나라의 왕' '성령의 본체' 등 전광훈 목사의 여러 발언에 심각한 이단성이 있다는 것으로, 현재 해당 이슈는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다. 문제는 일부 극렬주의자들이 또다시 이번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소강석 목사를 소환해,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강석 목사는 자타공인 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 상당한 유명세와 영향력을 지닌만큼, '소강석' 이라는 '키워드'를 등장시키기만 해도 관심은 폭발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소 목사를 자기 진영의 '주적'으로 설정함으로, 반대로 자신들은 그 영향력의 '피해자'로 만드는 단순하지만 매우 야비한 방법을 차용한다. 지난 수년 간 일부 진영의 정치 집회를 이끌었던 '동력'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마냥 '유명세'라고 하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목회자로서는 차마 상상치 못할 루머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퍼져 나가고 있다. 사실 소 목사는 교단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 등 한국교회 지도자로 올라선 후 줄곧 가짜뉴스에 시달려 왔다. 초기에는 "교계를 편가르기 한다"거나 "정부에 사과했다"는 등 왜곡적 해석을 이용한 교묘한 가짜뉴스가 주를 이뤘다면 나중에는 추측을 넘어 아예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미자립교회 격려금 지원이었다. 코로나로 힘겨워하는 작은교회 목회자들에 100만원의 격려금을 전달한 것을 두고, 소 목사가 목회자들을 정권 규탄 집회에 참여토록 한 것이라는 끔찍한 루머를 퍼뜨린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악성 '인포데믹'에는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양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준과 원칙이 무너진 신앙,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저급한 정치의 하수인을 자처한 종교적 신념은 우리가 같은 신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마저 품게 한다. 이들의 타겟은 비단 소강석 목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한때 교계를 떠돌았던 또다른 가짜뉴스에는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원로), 장종현 목사(백석대 총장),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이재훈 목사(온누리교회), 류영모 목사(한소망교회) 등 대형교회를 담임하거나 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을 친북인사로 명시했었다. 근거나 이유는 중요치 않다. 애초에 대상이 있고 목적이 있는 ‘거짓’에 굳이 공 들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나서 악성루머의 근원지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더 이상 이런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사회 정치에서 방출된 더러운 부산물이 교계를 오염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2-09
  • [기자수첩] 한교총의 무너진 ‘순번제’, 결코 가볍지 않다
    기존 연합단체의 과도한 정치질과 금권을 비판하며 등장한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류영모 목사)이 출범 6년여 만에 정치의 늪에 빠져 또다시 삐걱거릴 태세다. 한교총은 지난 18일 인선위원회를 통해 차기 대표회장에 이영훈 목사(기하성 총회장)와 공동대표회장에 권순웅 목사(합동 총회장), 송홍도 목사(대신 총회장) 그리고 장종현 목사(백석 총회장)를 선임했는데, 이를 두고 애초에 짜여진 판이었다는 나름 근거있는 의심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룰의 파괴를 통한 '새판 짜기' 한교총의 임원 인선은 '선거'가 아닌 '순번제'를 통해 이뤄진다. 교세에 따라 가, 나, 다, 라 군으로 나뉘는데, 각 군에서 순번에 따라 한 명의 대표회장 후보를 추천하고, 이들이 대표회장 혹은 공동대표회장으로 인선받게 된다. 한교총이 5회째 회기가 이어지는 동안 순번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각 군에 속한 교단들은 자기 차례에 대한 인지가 분명했고, 별다른 분란없이 항상 한 명의 군별 대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올해 가군에서 돌연 군별 대표 선출을 놓고 '경선'까지 등장하며, 애초 순번제라는 룰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그리고 순번제에 따라 대다수가 예상했던 장종현 목사(백석 총회장)가 이 경선으로 탈락하게 된다. 룰의 파괴를 통한 '새판 짜기', 하지만 번듯하기만 한 이 새판이 결코 달갑지만 않은 것은 연합운동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신뢰'에 심각한 금을 남겼기 때문이다. ‘순번제’는 한교총의 정체성, 무너진 분열의 명분 한교총은 본래 '분열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한기총에서 한교연으로 그리고 한교연에서 다시 한교총으로... 한국교회 역사의 가장 심각한 오점을 남긴 삼단분열의 결과물이 바로 한교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분열체'임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한교총은 자신들의 창립 명분을 기존 연합단체의 과열된 선거제도에서 찾았다. 금권과 비리로 가득한 대표회장 선거로 인해 연합운동의 본질이 깨지고, 또 지도자의 자리는 심히 권력화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교총이 대표회장 선출에 있어 '선거'가 아닌 '순번제'를 택하고, 1인체제가 아닌 3인의 공동 대표회장 체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분열'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신들의 명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번제'는 안으로는 한교총의 정체성이자, 밖으로는 정의와 신뢰로 새롭게 탄생한 새 연합단체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그렇기에 이번 대표회장 인선 과정에서 '순번제'가 깨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교총의 정체성이 깨어진 것, 분열의 명분이 무너진 것, 이번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는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더욱이 과도한 정치질을 방지코자 택했던 '순번제'가 무너진 것은 앞으로 한교총에 본격적인 정치 다툼이 이뤄질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케 된다. 무엇보다 '경선'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임원회와 인선위가 과도한 권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차라리 모든 총대가 동등히 참여하는 한기총이나 한교연의 선거보다 훨씬 폐쇄적이기까지 하다. 애초에 순번제가 가지는 단점은 분명했다. '인물'에 대한 선택이 불가하다는 것, 얼마 전까지 합동측이 총회장 선거의 과열을 막고자 치렀던 '맛디아식' 선거의 부정적 요소와 일맥상통한다. 이런 리스크를 감안하면서까지 순번제를 택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선거 자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부작용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번 대표회장 인선 과정은 ‘순번제’에 정치가 대놓고 개입한 형국이다. 이도저도 아닌 부작용의 결정체, 이를 일각에서 ‘정치력’이라는 단어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심히 불편한 것은 정치의 개입은 한국교회의 수많은 분열의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 간 한국교회의 가장 큰 이슈였던 ‘연합운동 통합’에 대한 관심은 어느새 한교총의 재분열에 대한 우려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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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2-11-30
  • [기자수첩] 양심에 화인 맞은 한기총의 '꾼'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한기총의 임시 체제가 오랜 기간 지속되며, 대표회장 선출을 위한 총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연합기관 통합 결의에 따른 임시총회의 조치로 쉽사리 새 총회를 열지 못하는 임원회의 속사정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2년 넘게 계속되어온 임시체제에 대한 불만 역시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 조만간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결단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다만 문제는 혼란 중에 본색을 드러낸 소위 '꾼'들의 난립이다. 겉으로는 한기총의 정상화를 부르짖으며, 뒤로는 자신의 잇속을 먼저 탐내는 이들 '꾼'들이 오히려 한기총의 정상화를 가로 막는 주범이 되고 있다. 특히 현 임원진에 반발해 세워진 한 비상 조직은 그야말로 '꾼' 정치의 정점을 찍고 있다. 각각 나뉘어진 정치적 진영에 양다리, 세다리를 걸치며, 매일 자신의 살 곳을 옮겨 다니고 있는 이들이 이 조직에 모여 스스로를 한기총의 양심이라 자랑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보인다. 어제 자신들이 속한 진영에서 함께 비난하고, 욕을 토해냈던 상대에게 오늘은 뒤로 몰래 손 내밀며 아부하는 모습은 자신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상황에 맞춰 배신 가능한 인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양심이 화인 맞아 불타 없어진 양, 스스로 행한 일조차 남의 탓으로만 몰아가는 후안무치적 행태는 왜 이들이 '꾼'이 될 수 밖에 없는지를 나타낸다. 최근 한기총의 가장 큰 이슈인 '경매 사태'를 비난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상당수가 임대료 체납이 시작됐던 당시부터 현재까지 주요 임원진으로서 한기총을 직접 운영해 온 당사자였다. 사무총장, 공동회장, 서기, 각 위원장까지 섭렵하며, 한기총의 주요 요직에 있는 동안 이들은 매월 쌓여가던 임대료 체납 문제를 모른 채 방치했었다. 한기총의 최고 조직인 임원진으로서 방치했었던 일들을 이제와 뒤늦게 몇몇에게만 책임을 몰아가는 것을 과연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심지어 체납이 시작된 당시의 사무총장과 근 수 개월 전까지 임원을 맡았던 인물들이 이러한 비난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늘상 자신들이 한기총을 지키고, 수호했던 진정한 ‘주인’들이라 자처했던 이들이, 정작 한기총의 위기 앞에서는 남의 집 불타는 것 바라보며 그저 궁시렁대는 무지렁이 ‘객’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이들 중 그 누구도 이번 경매 위기에서 단돈 1만원도 내놓은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한기총이 처한 진짜 위기가 무엇인지를 반증하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1-15
  • [기자수첩] 이건희 회장과 소강석 목사, 그들은 왜 변화를 말했나?
    "마누라 자식 빼곤 다 바꿔라" -고 이건희 회장- "변화해야 할 것에는 빨리 순응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소중하게 지켜라" -소강석 목사- 현대사회의 최대 재앙으로까지 꼽혔던 코로나 펜데믹이 지난 3년의 광포한 시간을 뒤로한 채 서서히 막을 내려 가고 있다. 서로의 얼굴을 가렸던 마스크가 점차 사라지고, 가다서다를 반복했던 학교와 직장의 일상은 이제 대부분 정상으로 회귀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혼란하기 그지없다. 마치 코로나의 후폭풍이 교회에만 매섭게 잔존하는 듯, 한국교회의 코로나는 여전히 'Ing'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교회 스스로를 향해 냉철한 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왜 한국교회의 코로나는 끝나지 않고 있는가? 무엇이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나약하게 만든 것인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패착은 변화에 대한 실패다. 70~80년대 기적과도 같은 부흥을 겪은 한국교회는 그때의 감흥을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가장 부흥했던 그때의 모습을 교회의 모범으로 정형화 시킨 점이다. 한국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뒤쳐질 수 밖에 없던 것은 '변화' 자체를 스스로 정한 '모범'에서 벗어난 반교회적 사고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결국 한국교회를 매우 약하게 만들었다. 자그마한 물결에도 흔들리는 조각배가 되어, 막막한 망망대해 위에서 불안한 항해를 계속해 왔다. 변화를 거부하며 위기대응능력을 전혀 키우지 못한 한국교회에 있어 코로나 펜데믹이 집채만한 해일처럼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것이다. 1517년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 교회의 모습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변화해 왔다. 장로교회의 핵심인 개혁(Reformed)은 바로 온전한 변화에서 출발한다. 개혁을 거부하고 변화를 멈추는 교회는 결코 온전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 새에덴교회의 모습은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코로나 초기 방역 대응부터 예배 대처, 지역사회와의 관계 등 모든 면에서 차별화된 선진성을 보여줬다. 여기에 최근에는 엔데믹 시대에 걸맞는 시스템, 엔데믹의 이후를 대비한 목회 전략 등을 선보이며, 다시 한 번 관심을 받고 있다. 새에덴교회의 돋보이는 위기대처 비결의 바탕에는 '변화'에 주저하지 않았던 개혁정신이 있었다. 끊임없이 갈고 닦은 변화를 통해 갖춘 '기본기'는 지난 3년 간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를 가능케 했고, 변화가 곧 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고 이건희 회장과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는 개혁에 대한 공통적 시각을 견지한다. 지킬 것은 철저히 지키되 바꿀 것은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시대적 비전이다. 이러한 그들의 추진력은 세계 최고의 기업 '삼성'을 만들었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된 '새에덴교회'를 있게 했다. 지난 코로나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모범적 모습에 대한 새로운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당연한 정답들이 때로는 시대에 뒤처진 케케묵은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 바로 그것이 변화의 출발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0-26
  • [기자수첩] 그들은 왜 소강석 목사를 공격하는가?
    저급한 정치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자칭 기독교인들 "새에덴교회 소강석이가 목사들 집합하여 성경 세미나한다는 명목하에 목회자 천명 모여 1인당 100만원씩 나눠주는 댓가로 광화문 윤석열대통령퇴진 외치는 촛불집회 모이도록 하였다고 하니 큰일입니다" 새에덴교회를 향한 도를 넘는 악의적 비방이 최근 SNS를 통해 무분별하게 유포되며, 교계 전체를 경악케 하고 있다. 새에덴교회가 광화문 촛불집회의 배후에 있다는 뜬금없는 억측인데, 'X눈에는 X만 보인다더니···' 몰지각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저급한 정치질에 한국교회의 애먼 이미지만 또다시 추락하고 있다. 새에덴교회는 지난 20일 미자립교회 목회자 1,200여명을 초청해 엔데믹 시대의 교회 회복 노하우를 공유하는 ‘2023 목회, Restart 컨퍼런스’를 개최한 바 있다. 특히 이 자리에서 미자립교회 500곳에 각 100만원의 회복 지원금이 전달됐는데, 일부 극성 정치 추종자들이 이를두고 허위 악성루머를 퍼뜨리고 있다. 이날 행사의 주제는 '엔데믹 시대의 교회 회복',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는 이를 위한 철저한 섬김의 역할일 뿐, 그 이상의 어떠한 목적도 이유도 없었다. 당연히 정치적 의도나 그 이상의 해석 자체가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이날 행사를 온종일 직접 취재하며 목도한 증인으로서, 결백(?)을 굳이 증언치 않는 것은 의도된 거짓에 해명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루머', 사실상 범죄에 가까운 ‘허위사실 유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코로나로 피해입은 미자립교회를 돕고자하는 순수한 섬김까지도 왜곡해 이들이 얻고자 하는 노림수는 무엇인가? 사실 새에덴교회의 미자립교회 지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새에덴교회는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 회복을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번 세미나는 미자립교회를 상대로 한 세번째 섬김 시간이었다. 지난해 11월에는 100만원씩 600곳을 지원키도 했었다. 소강석 목사는 예장합동측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을 거쳐, 한국교회의 대표 지도자로 올라선 뒤, 줄곧 극단적 정치권의 타겟이 되어왔다. 온갖 추문과 허위사실, 왜곡과 편집은 이름만 같은 그들만의 ‘소강석’을 만들어냈다. 현장예배 수호와 포괄적차별금지법 저지를 위해 한국교회 최일선에서 정부와 진보 정치권의 횡포를 모두 막아낸 그를 ‘좌파’로 못박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설명 못할 아이러니일 것이다. 결국 극단적인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이란 이름의 유명세였던 듯 보인다. 자타공인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소강석’이란 이름을 언급함으로서 받게 되는 관심과 신뢰는 그들 스스로는 결코 얻지 못할 결과물이며, 소 목사에 맞서는 듯한 그들만의 퍼포먼스는 자신들 역시 그와 동급의 인물로 인식케 하는 효과가 있다. ‘관종’(관심종자)이 판치는 정치에 더 이상 계파간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구나 그러한 저급한 정치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관종’보다도 못한 비열함을 전제한다. 지난 3월 대선 이후,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정치판은 더욱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굳이 논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의 정치적 성향을 딱히 규정짓지 않아도, 최소한 교회가 이 더러운 정치판의 하수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0-25
  • [기자수첩] 교계 대통합 꿈 “아직 끝나지 않았다”
    2년 전 소강석 목사의 외침에 모두 아니라 했지만··· 9부능선 넘어 각 단체 자존심 내려놓고, 오직 ‘한국교회’에 집중해야 주변의 많은 관심과 기대가 집중됐던 각 교단 9월 총회가 지나고, 이제 다시 교계의 시선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향하고 있다. 연합기관 대통합이라는 한국교회의 크나큰 숙원이 올해 안에 반드시 이뤄지길 바라는 기대가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인데, 9부 능선 언저리에서 마지막 방점을 찍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들의 모습이 다소 답답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 프로젝트 자체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2년 전 소강석 목사가 연합기관 대통합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교계의 시선은 대부분 회의적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보수 연합운동이 분열한 지난 십수년 동안 일일이 세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통합 시도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순간 ‘통합’이라는 주제를 자기 단체의 존립 정당성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며, ‘통합’이란 단어의 신뢰는 추락했고, 그 무게는 심히 가벼워지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 등장한 소강석 목사의 대통합 프로젝트가 그리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대부분 그럴듯한 구호만 외치다, 몇 개월 내 사그러들 것이라며, 그저 스쳐가는 바람인양 이를 지켜봤던게 사실이다. 통합의 당사자 및 지도자들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매 한가지다. 어차피 되지 않은 ‘통합’, 굳이 에너지를 낭비해 가며,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해(害)통합’의 화살만 피하겠다는 구색맞추기에 열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대통합 프로젝트는 엄청난 진전을 이뤘다. 한교총은 소 목사가 대표회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통합추진위원회를 발족해 ‘기본합의 –> 상세합의-> 임시총회 –> 통합총회 –> 정기총회’로 이어지는 통합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했고, 실제 한기총과 기본합의에 이어 상세합의까지 이뤄냈다. 결정적으로 한기총이 지난 6월 임시총회를 통해 ‘상세합의서’를 최종 추인한 것은 연합기관 관계자들조차 놀란 결과였다. 이제 한교총의 ‘임시총회’만 거친다면, 말 그대로 통합총회를 목전에 둔 상황, 9부 능선을 넘었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 답보상태처럼 보이는 연합기관의 통합 논의를 보면서, 일부 교계는 다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오히려 ‘통합’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며 발생하는 단체 내부의 혼란을 마치 통합의 부작용인 듯 비판하기도 한다. 허나 냉정히 볼 때, 지금 교계 연합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뜨거운 순간이다.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여전히 살아있고, 실제 그에 부합할 결과가 우리 눈 앞에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실망하거나 비판할 이유는 전혀 없다. 애초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통합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대부분이 외면했고, 방해키도 했다. 오히려 그 모두를 이겨내고 이룬 이만큼의 성과는 차라리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는 편이 옳을 지경이다. 허나 그렇기에 아직 넘지 못한 마지막 능선이 너무도 간절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밟고 있는 9부능선의 고지조차 단 한 번도 경험치 못한 곳, 어쩌면 이대로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분명한 확신을 주고 있다. 연합기관 내부의 혼란에 굳이 심각해질 필요도 없다. 분열 이후 연합기관들이 달리 평온한 적도 없었지만, ‘통합’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겪는 시련이라면 그 가치는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 번데기의 모습이 아무리 흉하다 하여도 이를 거치지 않고 하늘로 날 수 있는 나비는 없기 때문이다. 가수 고 신해철 씨의 ‘민물장어의 꿈’이란 곡에 이런 구절이 있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지금 우리가 도달해야 할 ‘대통합’이라는 문은 각각 덩치만 커진 연합기관들이 한 번에 통과하기에 결코 크지 않다. 각자가 스스로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질 때, 함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고지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확실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된 한국교회에 갖고 들어갈 자존심은 없다는 사실이다. 나를 버리고, 스스로를 내려 놓을 때, 한국교회는 산다. 그것이 이번 연합기관 대통합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한 핵심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10-04
  • [기자수첩] 합동측 부총회장 선거 유감··· 그렇게 이기고 싶은가?
    모 후보의 선거법 위반 논란으로 한동안 들끓었던 예장합동측 부총회장 선거판이 결전을 코앞에 두고 점차 막장으로 치닫으며, 교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치열하다 못해 이제는 치졸해진 모습인데, 한국교회 장자교단을 자처하는 합동측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회의가 일 정도다. 최근 합동측은 부총회장 선거와 관련해 선거법 위반 논란 외에도, 합동측 내 언론들 간의 접전도 나름의 관심을 모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선거판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비평을 통해 총대들의 관심을 모은 것인데, 어느순간 그 도를 심각히 넘어서며, 교단 내부의 커다란 반발까지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논란의 시작은 특정후보를 겨냥한 몇몇 언론들의 '묻지마식 비난'에서 출발한다. 그저 비판을 넘어선 비난, 그저 비난 자체가 목적인 비난을 가하는 것인데, 애초 언론의 '중립'까지는 기대치 않더라도, 이를 흉내조차 내지않으려는 이들의 태도는 심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대부분의 기사가 글쓴이 개인의 감정과 해석에 완전히 편중되어, 기사 자체의 요건은 내다 버린지 오래다. 마치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심각히 난무했던 무분별한 SNS 비방이 언론의 이름으로 포장된 듯한 모양새다. 여기에 이제는 하다하다 못해 특정 후보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과거 논란까지 억지로 끄집어 내어 비난하는 모습은 교회의 지도자를 뽑겠다는 선거 본연의 목적을 무색케 하고 있다. 마치 장관 후보자를 대상으로 한 국회 청문회처럼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싹 다 훑어 단 하나의 티끌이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물어뜯겠다는 태도인데, 과연 이 치욕스런 이전투구에서 얻게되는 승리는 누구를 위한 영광이 될지 심히 궁금해지기 까지 한다. 물론 언론의 비판 기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론의 비판 기능이 더욱 존중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존중은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때에 가능한 얘기다. 적어도 선거판에서는 선거만을 해석하고 비판해야 한다. 결코 그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때부터는 비판이 아닌 비난이 되기 때문이다. 합동측은 최근 몇년 간 지도자들의 분발로, 한국교회의 자타공인 장자교단의 위치에 올랐다.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을 이끌며, 정부와 국민들을 상대로 교회를 대변할 위치에 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부총회장 선거판은 이러한 금자탑을 허물다 못해, 밟아 짓이기고 있다. 진정 묻고 싶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고 싶은가?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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