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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 주간
    역사적 기독교는 부활절 이전 7주간의 매 주일날을 뺀 40일간을 사순절로 정하고 기도와 금식과 절제로 지켜왔다. 그리고 그 마지막 한 주간을 고난 주간으로 보낸다. 이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명상하며 경건과 함께 결제로 그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기 위함이다.어떤이들은 이것을 중세 가톨릭교회가 제정한 의식이라고 주장하며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역사를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부활절을 앞두고 경건과 절제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하는 일은 가톨릭교회가 확립되기 이전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어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보고 가장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면서 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신비화 하여 그 의미를 왜곡하고 미신화 하는 바람에 종교개혁 시대에 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 고난에 의해 탄생하였으므로 그 고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 첫째,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비밀을 맡은 기관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아 흘린 “자기 피로 사신 것”(행 20:28)이고,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것이다. 또 창세기 2장의 첫 아담의 신부가 아담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지 아니한 것은 그 어떤 것이든 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 교회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따라서 현대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또 우리가 이 시대의 삶 속에서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 주간은 하나의 통과의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점검하는 기간으로 삼는 것이 고난 주간의 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다. 이번 고난주간도 온 교회가 그런 정신으로 맞아 세속에 물들지 않게 경건한 영성적 삶을 살아야겠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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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4-10
  • 목사는 신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 아니다
    중세 종교개혁은 만인사제론이 기본 정신이었다. 그리스도교회에서 본디 ‘사제 계급’은 없었다. 그래서 사도시대의 지도자는 ‘장로’였다. 사도들도 모두 사제나 제사장이 아니라 장로로 불렸다. 이는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직접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러다가 교회가 교권적 제도화를 꾀하면서 그리스도와 사람 사이에 또 하나의 중재자로 끼어넣은 계급이 사제(司祭)이다. 중세 종교개혁은 이것을 본래 자리로 돌려 놓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500여년이 지나다 보니까 이젠 개혁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에도 새로운 사제계급이 나타나고 있다. 이름하여 ‘신령한 목사’라는 사람들이다. 목사는 본래 장로에서 왔다. 장로는 사제가 아니다. 그저 평신도 가운데 교회를 돌보는 지도자로서 세움을 받은 자일 뿐이다. 그런데 목사안수를 받으면 무슨 영적 권능을 받은 것인양 특수한 존재로 변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 노릇을 하려 한다. 이는 만인이 사제인 종교개혁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다.교회에서 목사가 신령한 존재로서 특수계급화 되면 그 교회는 교권주의 교회로 변하게 되고, 목사와 교인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생기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의 저변에는 대부분 바로 이 문제가 깔려있다.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은 신령한 존재가 되어 군림하려 하고, 교인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쪽과 인정하지 않으려는 쪽의 갈등에서 생기는 일이다.목사안수의 라이센스는 교회를 맡아 관리하며 전문 설교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과 교인사이의 중재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목사의 기도를 교인의 기도보다 더 잘 들으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목사나 교인이 똑같은 평신도일 뿐이다.장로교는 목사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교인을 양육하는 목자,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종, 교인의 모범이 되어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깨우치는 교사,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도인, 그리스도가 설립한 율례를 지키는 청지기라고 한다. 어디에도 그리스도교회의 특수계급이라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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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4-05
  • 이단 사이비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말라
    19세기 말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진 이후, 불과 한 세기 만에 기독교인이 1천만 명이 되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한국 기독교 주변에는 수 많은 ‘재림 예수’가 나타났다. 줄잡아 한 스무 명은 넘을 것이다. 어떤 이는 ‘감람나무’, 또 어떤이는 ‘보혜사’ ‘이긴자’ ‘제3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아예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자도 있었다. 이들이 모두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나온 것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가짜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감언이설을 따르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도 요한계시록 가지고 작란 치는 자들이 많다.사람은 영적인 동물이라서, 한번 이런 더러운 영적 물을 먹으면 거기에서 헤어나기가 어렵게 된다. 주변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이 뭘 몰라서 그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끝내는 패가망신 하거나, 자신이 또 다른 재림 예수로 등단해 가짜 대열에 합류한다. 통일교도, 전도관도, 장막성전도 수 많은 아류(亞流)를 양산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 주변의 이단 사이비 신앙의 유형이다.그러면 왜 한국에만 이런 이단 사이비가 많이 나타나는가? 물론 이와 유사한 집단들은 다른 나라들에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유독 더 심하다. 아마도 한국인의 종교심성이 타민족보다 더욱 영성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순진한 종교심성을, 사이비적 욕심으로 경전을 오각(誤覺)한 이단 사이비들이 노리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한국인의 오랜 의식 속에 남사고예언이나 정감록 같은 비결(秘訣, 예언) 신앙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비결을 들고 나오는 사람에게 쉽게 넘어가게 된다.그러나 그런 사상들이나 주장들은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동정녀를 통해 임마누엘로 오리라고 한 초림 예수와 달리, 재림 예수는 더 이상 여인의 몸을 통해 어린 아이로 오지 않는다. 재림 예수는 “너희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행 1:11). 그것도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로 쫓아 강림하신다”(살전 4:16). 어느 날 슬그머니 나타나 ‘내가 재림 예수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발 이단 사이비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말라. 그들에게 속는 자는 남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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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4-05
  • 교회를 자신들의 프레임에 가두려 하지 말라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타도해야 할 대상은 악을 조장하는 사탄의 세력이다. 때때로 사탄이 특정한 사람을 이용해 세상에 악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악한 사상을 퍼뜨리는 자, 인권을 짓밟는 독재권력자,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 가난한 민중을 억압하는 관리 등,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가졌지만 사탄의 편이다. 교회는 이런 자들을 회개하고 그 악에서 돌이키라고 규탄한다. 이것이 전투하는 교회의 사명이다. 그런데 근래에 기독교인 황교안이 자유한국당 대표가 되자, 소위 좌파언론들이 일제히 일어나 우파 기독교가 황교안을 대통령 만들려 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는 기독교를 오해하고 곡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우파도, 좌파도 없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우리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널리 확장시킬 것인가 하는 논리의 차이, 즉 복음전파의 수단으로서 ‘보수’와 ‘진보’라는 ‘예수파’만 있을 뿐이다. 기독교를 우파와 좌파로 나누어, 우파는 야당, 좌파는 여당을 지지한다고 프레임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이간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주류종교는 기독교임에는 틀림없다. 숫적으로나, 사회적 영향력으로나, 종교적 지도력으로나 모두 타종교의 우위에 있다. 따라서 우리사회의 규범이 되는 사회적 가치관을 기독교가 제공해야 한다. 우리 국민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 또는 인간 삶에 있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확실히 증언하는 일이 교회의 몫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 그 역사도 일천할 뿐 아니라, 경험마저도 미숙하여 내부적으로도 하나되지 못한채 갈등과 분쟁을 일삼고 있어 사회에 본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세속의 정치집단과 연계시켜 우파니, 좌파니 하는 논리로 교회를 자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가두고 매도하려 해서는 안된다. 세속언론이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시시콜콜 말하는 것도 사실은 종교자유의 침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공동체로서 자율모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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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3-22
  • 교단헌법에 위배되는 개교회 내규 문제
    지금 서울 대치동 통합측 서울교회 내홍은 교단소속 교회가 교단헌법에 위배되는 개교회 정관(교회 내규)을 만들어 시행한데서 빚어진 충돌이다. 서울교회 담임 박노철 목사 반대파는 박 목사가 교회 내규로 정하고 있는 안식년 규정과 안식년 후 재시무시는 신임투표를 거치도록 한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에 박 목사에 대한 '위임목사(담임목사) 직무권한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지난해 서울중앙지법 민사 41부는 안식년 규정을 따르지 않은 박 목사는 서울교회 위임목사 지위에 있지 않다고 판결했다. 박 목사는 장로교회에서 목사의 신분 및 지위는 노회 관할이라며 이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항소했다. 그러나 지난 12월, 서울고등법원 민사 제38부는 박 목사의 이 항소를 기각해 교회는 박 목사의 지지파와 반대파 간에 혼란에 빠졌다. 박 목사는 현재 대법원에 상고해 그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장로교는 노회가 중심인 교회이다. 노회에서 목사를 양육하고 교회의 청빙에 따라 개교회에 파송한다. 따라서 목사의 신분 및 지위는 노회에 속한다. 그 목사를 개교회가 받을 때나, 배척할 때는 공동의회에서 3분의 2의 동의를 받아 결의토록 되어 있다. 당연히 서울교회처럼 개교회가 멋대로 내규를 만들어 담임목사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은 교단헌법에 위배된다. 통합측 헌법에는 목사에 대한 신임투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문제는 개교회가 교단헌법에 위배되는 정관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데도 교단이 아무런 재제를 하지 않고 있다가, 법원이 개교회의 안식년 규정은 총회 헌법에 구속되지 아니하므로 유효하다는 판결을 하자, 교단에서 재판부터 판결이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며 법원에 탄원서를 내는 등 판결에 항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단 소속 개교회에 정관(내규)을 만들 때는 반드시 교단의 심의를 거치도록 법을 정하고, 그것을 전국교회에 적용해야 한다. 예장통합측은 개교회가 정관을 멋대로 만들어 시행하는 것을 방치한 것이 이번 서울교회 사태를 맞은 근본원인임을 깨닫고 교단법의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이대로 두면 앞으로도 이런 사례가 자주 발생할 것임을 알아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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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3-22
  • 한국교회, 언제까지 ‘개신교’라고 불려야 하나?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성령체험을 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증거하기 시작한 무리들을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행 11:26). 그들이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곧 그리스도(메시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 공동체를 ‘그리스도교’라고 불렀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한 그 교회이다. 따라서 우리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초기에 중국교회의 영향을 받아 그 이름을 ‘기독교’(基督敎)라고 불렀다. 기독교라는 말은 중국교회가 그리스도를 ‘기리사독’(基利斯督)으로 음역한 데서 온 것이다. 즉 기리사독을 줄여서 ‘기독’(基督)이라고 부른 데서 기독교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그 이름의 정체성조차 모호한 ‘개신교’(改新敎)라고 부른다. 개신교라는 말은 ‘새로 고친 종교’라는 뜻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19세기 말,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종교를 ‘예수교’라고 했다. 또 천주교를 향해서는 ‘로마교’(羅馬敎)라고 불렀다. 천주교(天主敎)는 로마 가톨릭이 중국선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명(神名)을 ‘천주’(天主)라고 부른데서 나온 이름이다. 천주교측은 예수교를 향해 자신들에게서 분열해 나간 ‘열교’(裂敎)라고 했다. 그리고 정부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구분하는 용어로 ‘구교’(舊敎)와 ‘신교’(新敎)로 불렀다.그런데 개신교는 어디에서 왔는가? 더 이상한 것은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어찌해서 그 이름이 개신교가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대해 누가 언제 무슨 연유로 개신교라는 용어를 붙이게 되었는지 한국교회사 학자들 중에도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는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종교 공동체의 이름은 그 종교가 갖는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를 선포한 교주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예수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개신교라고 한다. 언제까지 우리가 개신교 신자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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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3-08
  • 사순절은 경건과 영성을 훈련하는 기간
    2019년 사순절은 3월 6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4월 20일 토요일까지 매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이다. 역사적 교회는 이 기간 주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고 금식하며 자신의 신앙적 삶을 돌아보는 참회의 기간으로 삼았다.‘40일’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함축하며, 부활절에 행하는 세례지원자들의 마음가짐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 기간 교회는 대체로 하루에 한 끼만 허용하고 육류의 흰살코기는 금지했다. 또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등 음주가무가 동반하는 잔치 행사는 사순절 기간을 피해 이루어졌다. 서방교회나 동방교회 또는 루터파 교회력이나 개혁파도 사순절은 들어있다.현대교회는 사순절 특별새벽기도나 성경공부 등 특별시간을 갖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이 기간 개인의 경건과 영성을 위해 가능하면 하루 한 끼, 혹은 금요일이나 주일에 금식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교인들을 가르친다. 신앙훈련에 있어서 사순절만큼 좋은 기회가 따로 없다.사순절은 역사적 기독교가 맨 처음 정한 교회의 절기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만든 절기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갖는 특권이다. 따라서 현대교회의 성도들도 사순절 기간은 모든 일에 절제하는 자세를 가져야 옳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중세교회가 지킨 절기는 모두 로마교회의 산물로 여기고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은 결코 형식주의가 아니다. 바로 이런 절기를 통해 주님을 더 깊이 생각하고, 주님이 가르친 교훈을 우리의 신앙적 삶의 지표로 삼으려 하는데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현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역사적 기독교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사순절 기간동안에 술집과 노래방 출입 등 음주가무를 절제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사순절을 맞은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본분이다.이런 것이 모두 경건을 위한 연습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해 네가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3:16,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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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8
  • 이젠 ‘목민 목회자’ 양육이 필요하다
    1919년 이 땅에 전래된지 34년에 지나지 않고, 2000만 국민의 1.5%인 30여 만명에 불과하던 신생 기독교가 3.1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는 전 국민의 20%에 이르는 1천만명을 거느리는 종교가 되었다. 실로 그 성장이 눈부시다.한국기독교는 처음부터 우리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교육과 국민의 삶 전반에 걸친 사회변화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사회각계에 배출해왔다. 그로인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이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공산진영의 그 엄청난 이념공격에도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교회의 역할이 컸다.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날 기독교는 커진 덩치에 비해 그 지도력은 왜소하기 짝이 없다. 교계에 세상이 존경할 만한 인물들도 보이지 않고, 사회를 변화시킬 가치관을 가진 지도자도 찾아보기 어렵다. 교계가 그만큼 가벼워진 탓이다. 그것은 우리 교계가 ‘목민 목회자’의 양육에는 관심이 없고, ‘목양 목회자’의 양육에만 관심을 쏟아온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국에 6만여개에 이르는 개교회의 성장을 이루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지역사회를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만드는데는 아직 미흡하다. 지역사회에 기독교 지도자의 빈곤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사실 우리사회 지도층에는 기독교 인사들이 많이 있다. 정계, 학계,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각계에 기독교인들이 포진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기독교적 가치관 확립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이제부터라도 한국교회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하늘나라 가치관을 전파시킬 ‘목민 목회자’의 양육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사회를 변화사켜야 하는 기독교의 사명이다. 기독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난 후 영원한 나라를 고대해야 한다. 이것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영원한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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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2-22
  • 안양대학교 어디로 가고 있나
    김치선 박사의 대한신학교로 출발한 학교법인 우일학원 안양대학교가 기독교교육을 근간으로 한다는 건학이념과는 전혀 다른 신흥종교집단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런데 안양대학교에는 아직도 목사후보를 양육하는 신학대학과 신대원이 존재해 있고, 교회음악과도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양대학교 신학대학 출신들이 예장대신측 교단몫으로 군종목사로 파송되기도 한다. 기독교계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학교이다.그런데 안양대학교는 사립학교임으로 학교운영상의 어려움이 생기면 사랍학교법에 따라 이사회의 구성원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건학이념과는 전혀 다른 종교집단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사회가 학교운영에 실패하여 빚을 지고, 그 빚을 정상적 운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학교를 제3의 운영자에게 넘기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안양대학교는 그냥 일반적 사립학교가 아니라, 처음부터 기독교 목회자 양성을 위한 대학으로 출발했고, 아직도 대신교단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대학이 교단에 동의도 구하지 않고, ‘우리는 대신측 교단과 무관하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타종교에 매각한다는 것이 정상이라 볼 수 있겠는가?우일학원측은 증산교 계열의 대진성주회 인사들을 이사회에 끌어들인 일을 마치 종교간 상생원리처럼 말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를 너무 우습게 보는 처사이다. 이미 8명의 이사 중에 4명을 특정종교집단의 인사들로 세워놓고, 국제경쟁력을 위한 조치라고 변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더 이상 학교경영이 어려워 수혈이 필요하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기독교 건학이념에 공감하는 제3의 경영자를 찾든지, 기독교계에서는 마땅한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함이 솔직한 일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안양대학교가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학교운영을 포기하려면 정관부터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신학대학을 비롯한 기독교 관련 학과를 없애는 일을 먼저해야 할 일이다.그 후에 제3의 경영자를 찾는 것이 옳다. 지금의 상태로는 대학경영에 어려움만 가중될 뿐이다. 구성원 전체가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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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2-22
  • 교계 삼일절 100주년 기념행사 하나로 가야
    3.1절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각 관련 단체는 그들 단체대로 각기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기독교계도 마찬가지이다.그런데 이번에야 말로 하나로 똘똘 뭉쳐야 할 기독교가 삼일절 100주년 기념행사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몇개 단체가 각기 따로 준비한다는 말이 들린다.사실 1919년 외교에 무능했던 대한제국이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그 당시 각 종교계 지도자들이 앞장섰지만, 가장 주도적으로 참여한 종파는 기독교였다. 따라서 일제의 보복으로 기독교가 가장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민족 앞에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당시 2000만 국민 가운데 1.5%에 지나지 않는 30여만명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이 약 89%가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그로인해 체포된 기독교인은 3,050명에 이르고,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망명하거나 피신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47개의 교회와 8개의 미션계 학교가 완전 파괴되었다. 그러다보니 상해임시정부에도 기독교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기독교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은 3.1만세운동에서 기독교가 한 일이 뭐가 있느냐고 폄하한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견디다 못해 부역한 몇몇 기독교 대표 민족지도자들의 친일행위를 내세워 한국 기독교 전체의 3.1만세운동을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가 이번 삼일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교회적으로 준비하여 민족 앞에 다시 한번 교회의 애국심을 드러내 보일 때이다. 그런데 이처럼 의미있고 중요한 국가적 민족적 행사에마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교계 단체들끼리도 따로 행사를 준비한다는 속식을 듣게 된다. 이는 옳은 판단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따로 놀지 말고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옳다. 더욱이 기독교적 기념행사는 반드시 하나로 모여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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