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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언더우드의 한국종교 이해와 신명 이해 ㅤㅈㅠㄵ
    이 글은 이은선 박사(안양대)가 지난 3월 28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된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사역” 가운데 “언더우드의 한국종교 이해와 신명 이해”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인의 하나님 개념은 지고신으로서 하늘의 주라는의미의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속성과 권능과 일치언더우드의 신명 논쟁국내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처음에 이수정이 1885년에 일본에서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서 언해를 개정하면서 이 성경에서 사용된 “신”의 명칭에 대해 비판이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신(神)”이란 명칭이 귀신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1887년에 개정된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에서는 ‘신’대신 ‘상뎨’를 채택하고 이후 국내성경에서는 ‘신’이란 명칭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명에서는 로스역을 개정할 때에는 하나님을 어원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하ㄴ�님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위원회역에서 압도적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선교사가 순수하게 번역한 성서인 아펜젤러의 1892년의 마태복음에서는 신명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명으로 ‘참신’과 ‘하ㄴ�님’을 병기함으로써, 기존의 이수정역과 로스역 전통에 하나의 타협점을 제시한 듯한 인상을 준다. 게일은 1892년에 사도행전을 간행하는데 신의 명칭으로 ‘상뎨님’을 채용하였고, 이 명칭은 1893년에 펜윅이 번역한 약한의 기록한대로 복음에만 등장하고 이후 한글성경에서 사라지고 만다.이와같이 초기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신명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더우드는 신명과 관련한 용어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1893년 찬양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선호하던 ‘하ㄴ�님’뿐만 아니라 ‘상뎨’를 거부하고 ‘여호와’와 ‘참신’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언더우드는 기독교의 God이란 명칭이 ‘이름’(name)이 아니라 ‘용어’(term)이므로 한 문화권의 신들 이름 가운데 하나가 사용될 경우 거기에는 다른 신들이 함께 연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일반 신들을 배제하는 포괄적인 용어를 선택해야 하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 ‘여호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중국에서 신명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윌리암 분(William J. Boone)을 중심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했던 주장이다.언더우드는 “한국인들이 하ㄴ�님이란 말을 이해하고 이미 그 하ㄴ�님만을 섬겨왔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하ㄴ�님이 한 분뿐이고 유일하신 신이라고 가르치고 그의 속성을 말해 주면 된다”는 손쉬운 해결방안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1893년부터 참신, 여호와, 상뎨, 샹쥬, 하ㄴ�님 등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며 용어 논쟁을 일으켰다. 언더우드가 “하ㄴ�님”이란 용어를 반대한 이유는 이 용어가 유일신의 의미가 아니라 지고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혼합주의 내지는 다신교를 허용하는 인상을 줄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그러나 언더우드는 10년이 지난 1903년 번역자회에서 하ㄴ�님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것을 수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 언더우드는 다른 선교사들의 연구 결과들을 수용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우리나라의 고전문헌들을 연구하여 고구려 시대에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겨 제사한 사실을 알게 되어 하나님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1) 헐버트와 게일의 연구 결과의 수용언더우드가 하나님의 유일신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준 것은 헐버트와 게일의 하ㄴ�님에 대한 논의이다. 게일은 1900년을 전후하여 하ㄴ�님이란 용어가 유일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헐버트는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단군신화를 사용하였다.하나님의 용어 논쟁에서 세 가지 의미에 대한 이해의 논쟁이었다. 하나님이 하늘의 주라는 지고성(heavenliness), 한 분(One), 위대한 분(Greatness)의 세 가지 의미였다. 게일은 1900년에 하나님을 지고신으로서 ‘하늘의 주(Heavenly Lord)’라는 의미에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으로 이해하려는 의미를 덧붙였다. 그는 이 때 하나님을 소개하는 글에 주씨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주씨가 말했다. “우리의 신은 크신 한 분(the Great One)으로 ‘하ㄴ�님’으로 불리는데, ‘하ㄴ�’는 일(一)을 의미하고 ‘님’은 주, 주인. 임금을 뜻한다. 한 크신 창조주가 ‘하ㄴ�님’(Hananim)이다. 우리는 그분을 우주(천지)의 건설과 연결시키며 그래서 그분을 고대의 창조주(조화옹)이라고도 부른다.”게일은 하ㄴ�님이라 표기하고 있으나, 유일하신 창조주의 의미가 강조되는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이다.헐버트는 1895년부터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서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게일은 기자의 우리 민족에 대한 영향력을 강조하면서 단군을 신화로 보았으나, 그 시대 단군의 종교적인 숭배의 정치적인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상호 다른 견해를 가지고 1900년에 충돌하였는데 이들의 견해를 존스(Jones)가 종합하였다. 그는 단군이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헐버트의 견해를 수용하고 기자를 통한 중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게일의 견해도 받아들이면서 샤머니즘이 한국적인 유산들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하였다. 헐버트와 게일은 1901년에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단군에 대한 이해를 상호접근시켰다. 헐버트는 1901년에서 Korean Reviews지에 한국사를 연재하면서 단군신화를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환인을 창조주, 환웅을 성령, 단군을 성육신한 주로 기술하였다. 그는 단군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성령에 의해 잉태된 자, 완벽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로 묘사하였다. 헐버트의 단군신화의 삼위일체 모티브로의 해석은 선교사들 사이에서 단군연구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반면에 게일은 그리스도신문의 기고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역사적인 단군과 그의 신적인 기원을 반박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헐버트는 단군신화가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고, 단군 신화의 환인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로서 창조주요,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고 이것이 용어 논쟁에서 탐구되었다.1900년 전후에 헐버트와 게일은 하나님에 대해 유일하신 창조주라는 개념을 수용하였다. 차이는 헐버트는 단군 신화의 환인을 창조주라고 해석하였고, 게일은 하나님의 주요한 어원을 하나 혹은 연합(unity)이라고 해석하였다.그러는 동안에 1903년에 서울에서 열린 감리회 19차 연회에서 벙커와 존스는 성경에서 천주가 삭제되고 하나님으로 변경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여 통과되었고, 1904년의 신약 시험본은 하나님의 명칭으로만 인쇄되었고, 1906년 공인본에서 출판되었다.이후에 헐버트는 1906년에 아브라함 시대에 단군이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하늘을 감동시키는 제단을 쌓았고, 그 위에서 번제를 드렸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상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종교적인 개념은 외래적인 의식과 아무런 연관이 없고 원시적인 자연숭배와도 거리가 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 하나님이란 단어는 ‘하늘’과 ‘님’의 합성어로서 한자어 천주(天主)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든 한국인들은 이 하나님을 우주의 최고 주재자로 간주한다. 그는 자연계에 횡행하는 여러 영들이나 귀신들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인들은 엄격한 유일신론자들(monotheists)이며, 하나님에 부여된 속성이나 권능은 외국 기독교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가르칠 때 거의 보편적으로 이 용어를 수용할 정도로 여호와의 속성과 권능과 일치한다. 중국에서는 천주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한국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언더우드는 이러한 헐버트와 게일의 연구를 자신의 동아시아 종교에 대한 강연에서 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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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8
  • 학술/ 한목협, ‘해방 분단 70년·선교 130년 이후, 한국교회의 미래를 모색한다’
    공간 안에 갇혀있는 기독교를 밖으로 이끌어 내야사람들에 실제의 삶에서 체험되는 진정성으로 접근해야본고는 지난 23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제17회 전국수련회에서 주제 발제한 임성빈 교수(장신대)의 원고 ‘한국사회의 흐름에 비춰 본 한국교회의 미래: 후기 세속화시대의 공공신학적 관점에서’ 중 ‘한국 교회 위기의 원인 분석과 대안 모색’ 단락을 일부 발췌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 임성빈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한국 교회 위기의 원인 분석과 대안 모색1. 위기의 원인과 의미에 대한 기독교윤리학적 반성 1) 신앙/신학의 위기: 한국 교회의 신앙왜곡과 불신앙, 그로 인한 한국 교회의 위기는 사회적 영향력을 저하시킴으로써 결국 한국사회에 닥친 비극을 예방하지 못하였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건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청지기로서의 일차적 사명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다(요 10:10).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우선시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직면한 한국 교회 위기의 근본원인은 한국 교회의 현실과 문화가 복음적 정체성에 확고한 토대를 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십자가-부활 신학의 부재로 인하여 복음의 핵심적 담론이 실천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히려 기복적 번영신학이 범람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 대신 천민자본주의와 야합한 값싼 은혜의 오염이 주된 요인이다. 이러한 신앙의 왜곡과 불신앙이 곧 오늘 한국 교회 위기의 핵심에 자리한다. 2) 맥락(context) 해석의 위기: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도력의 부재도 오늘의 위기의 주된 원인이다. 21세기 문화가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 소비문화, 정보화라는 사회 문화적 바탕위에 서 있는 반면, 오늘날 교회는 사회 문화 변동에 대한 문화 지체(cultural lagging)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회맥락 이해의 부재 및 문화지체현상은 대사회적 소통의 문제를 야기했을 뿐 아니라, 교회가 교회의 시대적 소임을 오판하는 결과를 낳았다. 3) 행위자(agents) 동원과 자원(resources) 활용의 위기: 한국 교회는 어떤 시민 단체와 기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우수한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 내의 인적, 물적 자원을 통전적으로 활용할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과도한 교직자 중심주의와 일부 중직자 중심의 개교회주의가 고착화 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큰 꿈을 쉽게 이야기하면서도 공동체 안에서 협력과 하나 됨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과감하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내부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수습하지 않고서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4) 연대와 소통의 위기: 오늘의 위기는 사회변화를 선도할 만큼의 실력을 두텁게 쌓지 못한 신앙인들의 얄팍함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다. 소통과 연대는 사회에 대한 지식을 요청하지만 그보다 앞서 전제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확립하는 일이다. 예컨대 기독교회는 권력(power)에 대한 잘못된 사회이론의 무비판적 수용을 경계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이방인의 관행이라고 하였던 정복과 지배로 상징되는 콘스탄틴 식의 권력관을 수용한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정치적인 권력 게임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예컨대 신앙적 배경과 동기를 가지고 정치에 참여한 이들을 당선시키고, 특정한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 정책을 입안하면 사회가 변화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앙인들은 세상적인 힘과 정치적 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결국 세상을 바꾸고자 정치에 참여한 신앙인들이 바로 그 세상을 닮아가 버린, 모순적인 현실을 낳은 것이다. 2. 공공신학적 관점에서의 한국 교회 과제그러나 오늘의 위기(危機)는 문자 그대로 위험한 기회를 뜻하기도 한다. 즉 교회와 신앙의 왜곡과 부족한 신앙과 화석화된 신앙은 복음적 신앙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회복의 기회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와 신앙의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에 대한 함몰로 인한 위기는 신앙의 사사화(privatization) 극복을 통한 신앙의 공공성 회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나라 참여를 위한 만인제사장적 청지기직 회복으로의 부르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공공신학적 관점에서 교회의 교회됨을 모색할 수 있다. 1) 신학적 토대강화-신앙의 공공성 및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의 확립유례없는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의 복음적 정체성 확립을 위한 신학적 토대를 강화해야 한다. 신학적 토대 강화는 우리 신앙을 성경적 토대 위에 확고히 서도록 지속적으로 도전하려는 노력을 뜻한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오직 말씀 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충성을 뜻하며,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사적인 영역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야할 공적인 영역까지 끌고 갈 수 있도록, 복음적 신앙과 신앙의 공공성을 함께 담보하는 공공신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관심과 실천적인 노력이 신학자와 신학교, 목회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2) 교회의 인적/물적 자원의 전략적 활용을 위한 공공신학적 토대 강화와 실천 강화한국 교회는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맥락의 이해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인문-사회-자연과학과의 대화를 강화하여 나가야 한다. 이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속한 일반 은총의 영역이다. 이와 함께 기독신앙인으로서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영역에서 활약하는 학자들의 제사장적 청지기 역할을 도전하고 지원하며, 학제간의 대화와 연구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의 전략적 활용은, 하나님 나라 중심의 교회관과 선교관의 확립, 만인제사장직과 청지기 직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토대 위에서 더욱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하나님 나라 중심 신학의 바탕위에서 21세기 사회문화의 특징인 네트워킹을 겸손한 태도로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역교회의 역할을 강화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실천을 공유하는 교회 및 기관들과 에큐메니컬 연대를 이어가는 역할에 이르기까지, 우수한 자원들을 활용해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이 매우 많다. 3) 시민사회와의 긴밀한 소통과 연대 교회는 시민사회를 협력자로 인식해 이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며 선교친화적인 사회 문화 형성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민사회는 여론 선도 집단인 동시에, 탁월한 전문가와 실천가들로 구성된 단체다. 그리고 시민운동단체 안에서 활동하는 운동가들의 상당수는 신앙적인 배경 하에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지니고 있다. 교회는 이들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창구 형성에 힘써야 한다. 다양한 영역에서 특성화된 전문성을 가진 시민단체와 구성원들을 매개하는 허브 역할을 하면서 보다 생산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교적 배경을 지니고 시민사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기관들, 예컨대 기독경영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등의 전문연구기관과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의 시민운동기관, 한국기독교언론포럼 등의 언론 전문기관들과의 긴밀한 연대는 더 중요하다.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시민사회 및 언론, 문화 단체와의 소통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4) 목회적 과제: 4-1)포스트모던 문화와의 만남 이후의 강조점 변화(1) 관계성에 대한 강조포스트 모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은 기존의 조직 교회를 영적 인도자로 보지 않는다. 예컨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로부터 영적 안내를 받기 보다는 영성에 관한 도서에 의존하는 이들이 많다. 반면 영적인 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 교회를 찾는 사람은 여섯 명중 한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91%는 적어도 한 명의 기독신앙인들과 친밀한 관계이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매력적인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초청하기보다는 진정한 영향력을 가진 기독신앙인들을 양육하여 파송하는 전략이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제도화된 조직교회를 찾는 17%의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독신앙을 가진 친구들이 있는 91%의 사람들에게 접근함이 절실한 전략이 아닐까? (2) 진정성과 경험에 대한 강조한때는 탁월함이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관심은 진정성, 즉 실제의 삶에서 체험되는 진정성에 있다. 미디어에서도 체험적인 프로그램 들 즉 리얼러티 쇼가 대세인 이유이기도 하다.요사이 극성을 부리는 이단의 발흥은 나름의 영적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영역에서만 목격되는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 영역에 있어서 익스트림 스포츠의 부상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기독교를 도서관으로부터 거리로 이끌어 내야 한다. 한때 어떤 교회에서는 영적 경험을 추구하려는 것을 정죄한 적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주의에 침잠된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3) 신비성에 대한 강조오늘날 정치와 종교는 사회적 조소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업과 교육, 법조계와 의료계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다. 이것이 권위를 억압으로 간주하는 포스트 모던적 문화현상이다. 사실 포스트모던은 해결책에 연연하지 않는다. 신비감이 해답보다는 매력적이다. 목적지 보다는 여정이라는 개념이 더욱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개신교회는 신비성을 상실함이 가장 치명적 약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가 사도 바울이 교회생활을 묘사할 때 가장 선호했던 단어 중 하나였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4-2) 교회론적 전환(1) 매력적인 교회보다는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매력적 교회란 교회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자원들이 구심적 성향을 가지는 교회를 말한다. 반면에 선교적 교회란 교회 밖으로 사람들과 자원들이 투입되는 원심적 성향을 가지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앉아서 기다리는 곳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내는 곳, 즉 사도적 전승을 가진 곳이다. (2) 고비용 구조로부터의 전환유기적 교회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조직적이며, 구도자에 민감한 교회거나 목적을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다. 그보다 유기적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리스도만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 교회가 하는 사역들이나 설교자나 찬양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실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영적인 관심, 즉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 특별히 대형교회들은 과연 교회를 매력적으로 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을 신자다운 신자되게 함에 더욱 힘을 쏟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물론 교회가 매력적이 된다는 것은 신자들을 신자답게 함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교회 조직 자체를 유지하는 데에 너무 많은 힘을 쏟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사실 교회는 신앙인다운 이들, 즉 제자들에 의하여 출발된 것이다. 교회는 매우 중요하지만 구조나 건물이나 행사로서의 교회보다는 사람으로서의 교회의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3) 교인들을 진정으로 구비시키는 교회로의 전환교인들을 만족시킴으로써 교회성장을 추구하는 교회의 문제점은 결국 새로운 신앙인들이 장성한 신앙에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결국 교회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건강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새로운 신앙인들은 복음을 전달할 접촉 기회에서 제외된다. 예전에 신앙을 영접하기 전에 사귀었던 이들과 급속하게 멀어짐으로써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역시 일터와의 접촉점과 상관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사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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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5-06-23
  • 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6월 월례회 ‘나의 목회의 중심은?’
    개인 영성에 머문 교인들 실천하는 사회적 영성 결여 본고는 지난 6월 12일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목사 허태성)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6월 월례회 ‘나의 목회의 중심은?’에 발제를 맡은 전병금 목사의 원고를 일부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하나로 보는 ‘통합적 구원관’ 시급책임감을 갖고 사회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 양성해야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 한국교회의 위상은 과연 그 바닥이 어디일까 싶을 정도로 끝 모를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목회자들의 일탈행동 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의 대규모 비리 사건까지 겹쳐 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에 일어난 일만 해도, 전 해군참모총장이 방산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더니, 얼마 후 비리를 저지른 방위산업체 회장이 구속되었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그가 교회에 비밀 사무실까지 차려놓고 교회를 이용하여 비리를 저질러왔다고 한다. 또한 전 정권의 자원외교와 관련하여 수사를 받던 전 국회의원인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을 하면서 남긴 유서에 기록된 명단으로 인하여 정치계가 발칵 뒤집혔는데, 그 또한 교회 장로로 알려져 있어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교회와 사회로부터 존경받던 평신도 지도자들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개인적 일탈행위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목회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잠재되어 왔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더 이상 헤어 나올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건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아마도 이들은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인정받는 평신도 지도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적으로 화려한 이력에 기대어 쌓여왔던 세상적인 명성은, 사실 알맹이가 전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었음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이들의 신앙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추구해온 개인영성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주일 예배 출석과 십일조 생활, 그리고 교회 봉사를 기준으로 측정되던 개인 영성에 머물러 있다보니,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회적 영성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는 괜찮은 교인인데, 교회 ‘밖’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비윤리적이고 이기적인 교인들이 양산되어 온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영적인 불균형이 초래되었을까?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참으로 비통하고 심각하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한국교회는 ‘일부의 일탈행위’로 치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탈행위 당사자에게 돌팔매를 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고 넘어왔다. 문제는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열차 자체인데,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 몇 명 탓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해 온 것이다. 누구도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기차의 방향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여 대안을 마련해 가야 할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철저한 신학적 반성이다. 요즘 일련의 문제들을 겪으면서 전통적으로 한국교회가 고수해 온 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개신교의 대표적인 교리인 ‘이신칭의’에 대한 재고와 이를 바탕으로 확산된 ‘안이한 구원론’에 대한 반성 등이 그것이다. 그동안 교회에서 강조되어왔던 교리들은 대부분 개인적 영성을 추구하는 교리로서, 개인의 신앙형성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책임감이 심각하게 결여되었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인들은 개인적 윤리생활에서는 어느 정도 도덕적이었지만, 사회생활 면에서는 세상의 풍조에 매몰되어 세속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개신교회가 사회 구조악의 문제, 인권문제, 정치-경제적 정의 문제, 통일 문제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킨 원인이라고 생각한다.이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는 개인의 영혼구원과 사회적 구원을 하나로 보는 ‘통합적 구원관’을 시급히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즉,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다 된다”는 식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로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하는 것을 목회적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목회하는 교회에서 이러한 통합적 구원관에 입각한 설교와 교육을 하려고 애를 써왔다. 내가 우리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한지는 36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일관되게 통합적 구원관에 입각한 목회를 하고자 하였고 교인들도 이러한 방향성에 호응하고, 개인적 축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오고 있다. 특히, 나는 우리 한국교회에서 전덕기,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김약연, 이상재, 장기려, 문익환 같은,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기독교 신앙으로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제시하고 앞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선각자들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 이 일을 위해 “①세계선교를 하는 교회 ②인재를 양성하는 교회 ③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 ④한국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라는 비전을 설정하여 이런 비전을 이루기 위해 매진해 왔다. 먼저 “세계 선교를 하는 교회”를 위해 “나눔선교재단”을 설립하여 국내외 선교를 보다 체계적,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가고 있으며, “통일시대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초등학생으로부터 고등학생에 이르는 지원자들을 신앙적으로 훈련시키는 “나눔비전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가양5 종합사회복지관을 위탁운영하면서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애쓰고 있다. 우리 교회는 교회의 규모로서가 아니라 이러한 신앙적 헌신을 통해 “한국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를 이루고자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비전은 한국교회의 개인적 영성으로 끝나는 교회가 아니라, 사회적 영성까지 포함하는 통합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신앙인으로서 세우는 일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바울은 또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라고 했는데, 한국교회가 그리스도를 닮아 온 세상에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는 과정은 생략한 채, 사람들 앞에 자신의 지식과 지위와 권세를 드러내려고 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빌 2:8)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본받는다는 것인데, 요즘 물의를 빚고 있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다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만 것이다. 모자란 게 문제가 아니라 넘치는 게 문제인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다음과 같은 바울의 책망을 듣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모르고 자기?의를?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물론 우리 교회도 여러 가지 면에서 감히 한국교회의 모델 교회가 될 정도로 완벽하다고 자부하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는 성도’가 되고자 겸손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에 매진하며, 무엇보다 통합적 사고를 가진 성도들을 키워내는 일에 매진함으로써 그 비전을 이루어 가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신앙이 삶이 되고, 삶이 신앙이 되는 생활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06-18
  • 학술/ 선교적 교회론의 목회적 적용
    교회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에 있어성숙한 교회는 성숙한 구성원들로 구성된다 본고는 지난 3월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개최된 부산장신대학교 총동문회 ‘목회축제 및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의 주요부분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1. ‘선교적 교회론’은 목회를 위한 신학이다.세상에서 말하는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라는 이야기는 학교교육의 허점을 비꼬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학교에서 배우는 이론과 교회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목회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면 이것은 비극이다. 신학은 산 신학이 되어야 하며,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한다. 물론 이론도 중요하고, 실천도 중요하다. 그러나 실천이 없는 사변적인 신학으로 중세의 교회처럼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앉을 수 있을 것인가?”만 토론하다가 타락한 교회가 되게 하였던 전철을 밟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목회자들도 알아야 한다. 계획이 없는 목회는 설계가 없는 건축과 같다. 실제적인 적용 모델은 사적(私的)인 목회 간증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신학적인 이론에 근거한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2. ‘선교적 교회론’과 목회를 위한 주제들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비로소 생령이 되게하셨다(창 2:7).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니라 함께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모여 있는 각 사람들 위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작되었다(행 2:1-4). 교회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정의나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령님과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선교학자 보쉬(David Bosch)에 의하면 성령은 선교를 시작하게 할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떻게 사역하여야 할 것인가를 안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선교는 자기 자신의 계획을 내세워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사역을 이끄시고 안내해 주실 성령님을 기다려야 한다.뉴비긴(Lesslie Newbigin)의 선교적 교회론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의 역동적인 삼위일체적 교회론을 성령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요약하면 대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첫째, 성령님은 선교의 영이시다. 성령님이 교회에 임하신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님이 선교의 동인이 되신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게 한다는 해석은 20세기의 평신도신학(Theology of the laity)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둘째, 성령님은 교회 안에 계신 분이 아니시고 교회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꺼이 따라야 한다. 그의 초기 주장(1940년대)은 성령님은 교회의 범위 안에서 역사한다고 주장하였으나, 1950년대와 60대를 거치면서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른다.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와 일치의 신학을 강조한다. 특히 그의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 일치의 근거는 단순한 십자가의 인내가 아니다. 성령 안에서의 친교(commun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라도 연합하여야 하며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와같은 성령님에 의한 역동적인 교회론 이전에 교회가 교회 존재 자체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선택과 회심, 무엇보다 회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로서의 교회관은 선교적인 목회를 위한 중요한 주제를 제공한다.실제적으로 이 방향은 목회자 중심으로 구분된 교회 안과 밖의 사역 구분이 아니고, 평신도 중심의 사역 방향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것은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인 성도들에게 함께 주어진 명령이다. 안디옥교회는 원심력을 지닌 교회로 큰 무리들이 모였으며, 전도하는 교회였기에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일컬음을 받은 교회이다(행 11:26). 또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행 1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안과 밖의 사역에 대한 구분을 간과할 수는 없다. 예루살렘교회가 ‘구원받는 수를 날마다 더해 가고’(행 2:47), 제자의 수가 삼천 명씩, 오천 명씩 늘어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 원리는 교회 활성화의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된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질적성장, 행 2:42)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내적성장, 행 2:42)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외적성장, 행 2:47),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음”(양적성장, 행 2:47)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성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당장에 밀어닥친 위기극복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예루살렘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디다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하여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교제하고 떡을 나누었으며(코이노니아), 구제와 봉사와 이웃을 섬겼다(디아코니아).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이론을 근거로 교회의 표어를 제시하였다. “누구나 그리워서 찾아오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인 성도들이 “말씀이 그리워서,” “사랑이 그리워서” 찾아오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그리워서”찾아오는 교회가 되게 하여야 한다.3. 역동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한 기구나 조직도 아니지만 영적인 것만 추구하는 모임도 아니다. 더러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교회가 활성화 되어 성장하는 방향을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교회는 생명체이다. 마치 사람을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 버리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시체와 보이지 않은 영혼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교회도 통전적인 성격을 갖는다. 교회의 활성화 방향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사역 자체가 통전적이다. 역동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건강한 교회의 특징은 대개 ①성경적인 교회, 마치 어린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양을 섭취하고, 건강하게 호흡을 하며, 적당한 운동과 친구들끼리도 왕따를 당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자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②성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건을 갖춘 교회, ③건전한 정신과 사고를 가진 구성원들로 구성된 교회, ④좋은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지도자, ⑤치명적인 질병이 없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정리해 보면 결국 선교적 교회론은 이와같은 건강한 교회를 전제로 하는 교회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주님의 교회임을 고백하는 교회론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교회론이다.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론이며, 올바른 지도자와 은혜를 받은 평신도들이 영문 밖으로 나아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자는 이글의 목적은 목회 사례 연구나 교회의 사업을 소개하고 실적을 보고하기 위한 글이 아니고 어떤 방법으로 선교적 교회론을 실제적인 목회에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임으로 마지막 결론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제언으로 마감하려고 한다.첫째, 바른 교회론과 목회관은 언제나 건전한 신학적 바탕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근거가 가장 분명한 교회론이 선교적인 교회론이다.둘째, 성숙한 교회는 언제나 성숙한 성도들로 구성됨을 알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상처와 고통으로 지쳐있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치유를 받아야 하며, 이들을 위한 배려가 시급하다.셋째,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교회라 하나 교회도 엄연히 세상 속에 존재한다. 교회가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넷째, 선교적 교회론은 종말론적인 교회론을 근거로 하는 교회의 신학이다. 앞으로 교회가 겪게 될 교회의 고난과 위기를 간파하고 이에 대하여 대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과의 소통 이전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한다. 앞으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밖에 없다.다섯째, 교회의 학문인 신학의 목표는 선교를 전제로 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실천적인 신학 이론이다. 교회 존재의 궁극적인 이유는 선교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며, 기본에 충실한 목회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론이고, 이같은 교회론의 바른 목회적 적용이 교회가 가야할 바른 길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06-10
  • 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5월 월례회 - 신앙자본 기반의 거룩한 창조적 인재양성
    가정, 교회, 학교를 통합할 수 있는 융합적 교육시스템 구축SNS 활용한 스마트폰 클래스팅 통해 소통 공간 넓혀야 본고는 지난 8일 서울 양재동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목사)에서 발제한 김희자교수의 원고 ‘사회안의 아이들 교육: 신앙자본 기반의 거룩한 창조적 인재양성’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I. 사회안의 아이들 교육의 위기: 혼돈의 가장자리사회안의 우리 아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지난 1월15일 조선일보 5면에 ‘“미생으로 사느니 차라리 내 아이디어로...” 20대 창업 늘었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작년 후반기에 한국사회에는 “미생” 열풍이 불었다. 대학생들에게 요즈음 무슨 드라마를 보느냐 물으면, “미생” 만 본다고 했다. 이유는 자기들의 이야기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최근의 젊은이들의 취업난,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의 불안감, 정규직에 들어가도 금방 질리고, 등의 이유로 새로운 아이디어로 부장한 젊은 창업 열풍이 불고 있다. 중고등학생은 어떠한가? 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소위 “중2병”이라는 인성파괴현상과 더불어 청소년들은 매 75초마다 욕을 하는 언어폭력과 학교폭력이 중고등학교의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반면, 취업과 입시에 유리하다고 현실적으로 판단한 고등학생들은 2010년 이후 이과선택이 증가하다가,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강남소재 한 고등학교의 전공편성이 15반 중 12반이 이과반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그렇다면, 더 내려가서 초등학생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인터넷의 융합환경에서 태어나고, 소셜네트워크, 인공지능 시스템교육의 일환인 디지털교과서나 클래스팅에서 수업자료를 보거나, 일대일 멘토링을 통하여 꿈을 키우고, 교사와 사이버 상담을 할 수 있는 세대이다. 며칠 전 1월15일 매일경제 첫 번째 면 헤드라인에 “12세 소녀의 손편지... 임자도에 기적을 선물하다” 라는 기사가 떴다. 양질의 교육의 기회가 전혀 없을 것 같은 오지의 섬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온라인을 통한 원어민 교사에 의한 외국어교육,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 유학생 20명과 연결하여 일대일 온라인 멘토링 교육을 하며, 글로벌 인재가 되는 꿈을 이룰 준비를 하고 있다. II. 사회안의 아이들 교육의 거시적 환경변화현재 한국 기독교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구조는 근본적인 기독교계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기독교계는 복잡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상황 속에서 정확한 환경의 변화를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교회분쟁사태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미 사회적으로는 최첨단의 정보체계가 가동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계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고 이미 시작된 항구적인 문화전쟁의 아무런 준비를 갖추고 있지 못하며, 급격한 기독교계의 위축과 감소에 대하여 생산적인 대안을 생산하지 못하고, 종교지형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이와같이 기독교계를 둘러싼 복잡한 환경의 변화는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대재앙을 몰고 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는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근본적인 환경변화에 대한 공동의 대응체계가 부재하다. 교회쇠퇴의 외부요인으로는 반기독교 문화전쟁, 반기독교 입법투쟁의 무대응으로 인한 기독교공동체의 붕괴, 내부요인으로는 개교회 중심의 교회이기주의와 공개념의 부재가 결국 주일학교를 더욱 쇠퇴하게 한다. 우리에게 복음과 신학을 전파한 서유럽국가의 많은 교회가 카페, 식당, 여행센터, 또는 경매에 나와 있는 엄중하고도 냉혹한 상황을 보라! 유럽교회가 오랫동안 종교혼합주의에 대하여 다양성과 관용이 미덕인양 기독교계의 붕괴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그 결과로 오늘에 참담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III. 사회안의 아이들 교육의 실천적 방안 : 거룩한 창조적 인재 양성1. 거시적 교육환경의 위기극복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러한 교육환경의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인가? 첫째, 한국교회는 합력하여 복잡도가 높은 한국사회의 다차원적 환경변화에 공동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거시적 사회 환경의 변화에 관한 구체적인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인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둘째 복합적인 사회문제 방향설정을 할 수 있는 기독교 싱크탱크, R&D 센터등을 건립하여 기독교 가치의 사회적 아젠더세팅(agenda setting)을 선제적으로 주도해야한다. 셋째, 기독교에 대하여 추락하고 있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도록 교회가 화목과 일치의 공동체적 문제해결 역량을 발휘하여야 한다. 2008년 1월에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건 발생 시 개신교의 여러교단이 합력하여 한국교회봉사단을 발족하고 100만 명이상이 추운겨울 바람 속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성금을 전달하여 한국사회의 희망의 복음을 전달하며 삶-기독교(bio-Christianity)를 실천할 때 젊은이들은 스스로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2. 교회, 학교, 가정의 유기적 융합시스템 구축성경에 기록된 다음세대 교육은 가정(신6:4-9; 11;18-21; 엡 6:4)과 교회(엡4:11; 고전 12:28; 롬 12:7)에서 책임을 완수해야 할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와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교회는 가정과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기독교교육을 활성화한다. 2013년 한미준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기독교의 청년 84.5%가(중학교 이전에 65.1%와 중학교 이후에 19.4%)부모로부터 신앙이 전승된 소위 “가정종교”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기독교가 여전히 가정을 중심으로 신앙이 전수되고 있다는 장점과 동시에 불신청년들의 전도가 미비함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교회는 부모교육을 강화하여 부모에게 교사의 역량을 키워주어 세대통합과 소통을 통하여 신앙이 전승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가정이 해체되었을 때 서구의 교회가 문들 닫기 시작하였음을 잊지 말고, 가정이 신앙전수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교회는 가정에게 시간을 배려하고, 간세대 교육프로그램을 활성화하여 가정과 교회가 협업체계를 구축하여 무너져가는 주일학교를 바로 세워 신앙을 전승할 때 주일학교를 통한 한국교회는 부흥의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둘째, 가정과 교회, 그리고 학교를 통합할 수 있는 융합적 교육시스템을 구축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기독교 문화적 생태계가 파괴됨으로써 오는 복합적이고 사회적인 문제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언어폭력, 학교폭력, 군대폭력, 청년실업문제, 저출산문제, 가정해체, 국사교과서의 이념논쟁, 학생조례논쟁, 자사고 존폐논쟁, 미디어의 극단적 세속화를 포함한 사회 모든 부분의 공동체 해체에 따른 가치기반 구조의 붕괴, 종교환경의 격변, 디지털의 일상화, 통일의 불확실성 등 다양한 문제를 중첩적으로 안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격변의 상황은 역설적으로 기독교공동체(교회, 가정, 학교)가 강한 세속적 파워를 넘어서는 거룩한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 필연적인 환경으로 대두되고 있다.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좋은 신앙을 확보할 수 있는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 되었고, 어느 때보다도 교회와 가정의 신앙교육, 그리고 기독교세계관에 기초한 학교교육 설립이 중요한 보편적인 시대적 표준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들의 올바른 신앙교육만이 개인의 성장이나 교회와 사회 및 국가의 성장에 최고의 가치로 대두되게 되었다. 3. 디지털 환경에 맞는 역량기반의 스마트 기독교교육 시스템 체계로 전환 주일날 단 몇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교회교육이 과연 디지털환경에서 나고 자란 세대들의 신앙교육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 신학적으로 건전하고 교육할 가치가 있는 기독교 빅데이터와 네트워킹을 활용한 교육시스템 구축으로 기독교가치를 극대화하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인공지능 기독교 시스템교육을 가동하면, 교회학교의 위치나 사이즈에 관계없이 젊은 세대와 소통하며 시공간을 뛰어넘어 교사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일주일 내내 기독교교육을 할 수 있다. 예컨대, 현재 공교육에서 실시하고 있는 클라우드 기반의 스마트교육과 초등학교에서 실행하고 있는 클래스팅(classting)을 활용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클래스팅을 통하여 사이버 공간에서 아이들과 소통하고 공유하며, 비밀보장 상담 및 알림장 기능이 있어서 학부모에게 까지 문자로 전송되기 때문에 학부모가 자연적으로 교회에 관심을 갖고 교회와 가정이 함께 교육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의 SNS를 활용한 클래스팅은 학부모들, 학생들, 교사들의 소통공간을 넓혀줄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05-27
  • 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5월 월례회 -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기’
    한국교회. 입시 신봉하는 사회 풍토에 변혁보다는 순응 선택고통받는 학생들 위로 아닌 오직 ‘합격’ 목표로 한 기도회 번져 본고는 지난 8일 서울 양재동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목사)에서 발제한 박상진교수의 원고 ‘한국교회는 학교를 포기할 것인가?-학교에서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기’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학교를 지배하는 종교: 입시 이데올로기오늘날 한국에서 학교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일종의 종교적 입문으로서 입시 이데올로기라는 종교를 신봉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이 이 종교의 열광적인 신봉자이다. 이들의 종교는 주일에 학생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학원으로 인도하고 교회교육의 부흥이 아니라 사교육의 팽창을 가져온다. 사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많은 부모들은 적어도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이 입시종교를 믿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오늘날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입시 종교, 입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변혁을 시도해 왔는가? 불행히도 한국교회를 포함해 한국의 종교는 이러한 세속적인 종교를 변혁시키기 보다는 순응했고 오히려 강화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종교가 입시경쟁을 개혁하기보다는 이를 강화시키는 다양한 양상이 존재한다. 설교와 예전, 기도, 교제, 봉사, 가르침을 통해 입시경쟁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 가운데서 기도는 입시경쟁을 강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도 입시생을 위한 기도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인데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금식기도회 등 다양한 기도모임을 통해 입시성공을 위해 기도한다. 최근에는 ‘수능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또는 수능 전 40일부터 ‘입시생을 위한 40일 특벽새벽기도회’의 형태로 입시를 위한 기도회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기도회는 입시로 인해 고통당하는 학생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입시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녀의 입시경쟁에서의 성공과 합격만을 위하는 경우가 많다. 입시경쟁의 종교적 강화는 교회 내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한다. 교회에서 광고나 구역모임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입시에서의 성공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등식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 결국 한국의 종교, 특히 기독교와 한국교회는 입시를 변화시키는 영향력보다는 입시경쟁을 강화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학교교육에 대한 기독교적 진단1) 기독교학교(미션스쿨)바로 1974년 고교평준화 이후부터 미션스쿨로서 기독교학교가 그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시작한다. 당시 정부가 사립학교를 포함한 모든 학교를 평준화 정책의 대상으로 삼아 학생들을 배정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미션스쿨은 기독교 사립학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준 공립학교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자유가 박탈되고, 교육과정을 편성할 수 있는 자율성이 없어지고, 등록금을 책정할 수 있는 자율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때부터 지속적으로 정부로부터 예배나 신앙교육을 금지하는 지시를 받게 되었고, 종교과목은 교양과목의 선택과목으로 개설될 수 있지만 그나마도 종교학을 그 내용으로 해야 하고 복수로 개설하여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존의 기독교학교의 성격을 유지하려는 학교와 소수이지만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대광고의 소위 ‘강의석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미션스쿨로서의 기독교학교는 건학이념은 아직도 기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교목이 있고 종교수업이 있지만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학원선교나 기독교교육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에 과연 사립학교가 존재하는가의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사실 부모가 자신이 믿는 신앙의 가치관대로 자녀를 교육할 수 있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헌법적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사립학교가 존립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학교마저 기독교교육의 장이 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2) 기독교대안학교한국에서의 기독교대안학교가 이제는 태동기를 넘어서서 확산기로 접어들고 있고 향후 성숙기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존재’ 자체를 넘어서서 ‘어떤 존재’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이 필요하고, 이미 경험하고 있고 향후 더 심화될 갈등에 대해서 예견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대안학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예언자적 상상력’일 것이다. 필자가 기독교대안학교 유형화 연구를 통하여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는데, 기독교성, 대안성, 국제성, 수월성, 긍휼성을 어느 정도 강조하느냐에 따라 기독교미인가학교, 대안기독교학교, 기독교국제학교, 기독교수월성학교, 기독교긍휼학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현재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유형은 기독교국제학교, 기독교수월성학교, 기독교미인가학교 순이며 대안기독교학교는 그 비율이 낮으며, 특히 기독교긍휼학교는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즉, 기독교대안학교라고 하지만 국제성과 수월성을 추구하는 학교들이 많은데 이는 입시위주의 교육을 극복하는 진정한 대안이라기보다는 부모들의 세속적 욕망과 자녀교육열에 부응하는 경우가 많음을 의미한다.3) 공교육사실 기독교교육은 학교교육을 포함한다. 기독교인 가정의 자녀들이 가정과 교회에서 신앙적인 교육을 받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교육을 받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만약 기독교인 가정의 자녀들이 공립학교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원칙은 포기될 수 없다. 2007년 제92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에서 채택한 ‘기독교학교교육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모든 기독교인 가정의 자녀는 기독교교육을 받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인 가정의 자녀들이 기독교학교를 통해 기독교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독교학교를 설립, 지원해야할 사명이 있다. 기독교인 부모는 자녀들의 기독교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가정에서 교육하며 교회와 학교에서 기독교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와 기독교학교가 지원, 협력한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 가정의 자녀가 기독교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사 국, 공립학교나 일반 사립학교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그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 가운데 기독교적 가치에 위배되거나 상치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교육으로 보완해 주어야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고, 그 부모가 속해 있는 교회에게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 가정의 자녀는 기독교학교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기독교교육을 받아야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반 기독교적 정서가 팽배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내용 중에 반 기독교적 가치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폭력을 비롯한 학생들의 일탈행위는 이러한 가치관의 영향들로 나타나는 증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적 학교 운동한국의 암울한 학교교육의 현실 속에서도 이를 변혁하려는 의미있는 기독교교육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직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마치 작은 불꽃이 큰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 땅의 교육에 대한 희망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학교를 그 장으로 펼쳐지고 있는 기독교교육운동에는 기독교사운동, 기독교학교정상화운동, 기독교대안학교운동, 기독학부모운동, 그리고 기독교교육시민운동 등이 있다.기독교교육생태계 복원오늘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 어떤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 안타깝게도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라는 울타리 바깥에 대해서는, 특히 학교교육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못했다.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관심의 범주도 주일학교로 제한되었고, 교회출석을 통한 주일학교 부흥과 이로 인한 교회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다음세대 신앙 계승에 관심이 있다면 학교를 끌어안아야 한다. 교회학교 침체와 교회학교 학생수 감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학교만을 들여다 보아서는 안된다. 한 아이가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하듯이, 한 아이가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독교교육생태계가 필요하다.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일관성 있는 기독교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의 교육이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고 기독교 신앙이 격려받는 생태계가 되어야 한다. 학교가 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닌 다른 종교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그로 인해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탈신앙화, 탈종교화가 가속화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태생적으로 학교와 함께 시작되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같은 선교사들이 기독교학교를 세움으로 개신교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1900년대를 전후해서 한국교회 토착민들에 의한 기독초등학교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소위 ‘일교회 일학교’ 운동은 학교를 세워 기독교교육과 민족교육을 실천하고자 한 운동으로서 항일운동과 구국운동의 보루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 정신을 이어받아 학교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독교교육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이것은 교육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한국교회가 기존의 기독교학교가 회복될 수 있도록 지원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대안학교 운동이 건강하게 확장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종교교육의 자유가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에도 관심을 갖고 공동체적 노력을 도모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부터 기독학부모를 세우고, 부모가 자녀 신앙교육의 주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교육하고 격력하고 지원하며, 기독교사운동과 기독교교육시민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질 수 있도록 후원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세대의 신앙계승은 교회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기독교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고, 한국교회가 주일학교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서 학교를 포함한 기독교교육생태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다음세대의 위기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05-14
  • 학술/ 기독교학술원 영성포럼 - 교회개혁과 성령
    본고는 지난 5월 1일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목사)에서 ‘교회개혁과 성령’이란 주제로 개최한 제23회 기독교학술원 영성포럼에서 김영선박사(협성대)가 발표한 ‘18세기 웨슬리의 교회개혁과 성령론: 웨슬리의 교회개혁과 성령의 역사’의 일부분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당시 교회의 기본 구조 뒤흔든 웨슬리의 옥외 설교가난한 노동자들에 복음을 전할 방법으로 옥외설교 선택교회에 대한 이해웨슬리는 성화의 교리를 하나님이 감리교인에게 부여하신 교리로 믿었다. 웨슬리는 교회를 성화를 추구하는 신자들의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는 교회를 신조나 교리위에 구축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화되어 가는 자들의 사랑의 교제,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교회는 본질상 거룩하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이 즉 교회를 세우신 분이 거룩하고, 교회의 모든 제도가 성화를 추구하도록 계획되어 있으며 또한 주님께서 모든 교인들이 거룩하여 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웨슬리에게 성화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본성이 변화를 받아 거듭나서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은총이다. 즉 성화는 성령에 의해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다.웨슬리는 교회란 성령이 충만한 그리고 성령으로 굳게 결합된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명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고 인도하는 주체는 살아계신 성령이라고 하였다. 스타키(L.M. Starkey)에 의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교회의 주요한 표식은 멤버들의 성결한 생활이며 그 근원은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역사가 없다면 교회는 존립할 수가 없다. 교회의 본질은 성령의 공동체이다. 교회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성령의 임재없는 설교는 공허한 말이고, 성령이 떠난 교직제도는 거짓된 것이고, 성령이 떠난 예배는 미신화되고, 성령이 없는 교회는 의미가 없다. 웨슬리는 만약 교회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않는다면 비록 사도적 전통, 정통적 신조를 이야기한다 해도 그 교회는 가짜교회라고 보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생활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할 내적, 영적 측면에 근본을 두고 있지 신조, 성례전이나 교회 정치 등 친교를 형성하는 외적 요소에 있지 않다. 성서, 세례, 성만찬 등은 교회의 은혜의 수단에 속한다. 우리는 이런 교회의 은혜의 수단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능력과 수단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에 의한 설교는 무익한 것이 된다. 따라서 교직과 설교의 직무도 사도 계승적인 교직제도에 의존하기보다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되어야 한다.교회의 교직제도웨슬리는 교회를 어떤 형태와 조직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활동과 기능과 사명의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웨슬리는 교회의 법과 제도, 전통을 존중하였으나 그것들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전도에 지장을 줄 때 과감히 제도와 규율을 뛰어 넘었다. 웨슬리는 교회제도에 대하여 상대적이고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1745년까지의 웨슬리는 감독, 사제, 집사의 직제와, 예전을 유효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감독에 의한 안수례의 필요성을 주장한 고교회주의자였다. 그러나 1746년 1월 20일에 웨슬리가 피터 킹(Lord Peter King)의 저서『원시교회의 제도, 훈련, 일치, 예배』를 통해 감독(Bishop)과 장로(Presbyter)는 초대교회에서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따라서 사제(장로)는 감독과 마찬가지로 안수례를 집행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웨슬리로 하여금 감독의 안수와 마찬가지로 장로의 안수도 똑같이 유효한 것으로 보게 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콕(Thomas Coke, 1737-1814)과 애즈베리(Francis Asbury, 1745-1816)를 북미의 감독자(Superintendent)로 임명 파송하였고, 와트코트(Richard Whatcoat)와 베시(Thomas Vasey)에게 장로직을 주어 세례와 성찬식을 집행할 권한을 부여하였다.교직제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웨슬리는 교직 자체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교직제도를 만든다고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직제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례전도(안수례도 포함하여) 교직자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상황이지만 이것도 사실은 교회 전체의 결정에 위임되어 있는 일로 보아서 목사만이 안수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절대적이라기보다는 교직자만이 예전을 집행하는 편이 교회 전체를 위해서 유익하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배경으로 하여 이행되어져야 한다는 노로요시오의 견해가 대단히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충분한 신학적 작업 없이 성례전은 원리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보아서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안수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웨슬리도 안수는 감독이나 그와 같은 권한을 가진 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교회제도에 대한 웨슬리의 개혁은 평신도 설교자 임명, 옥외설교 시도, 소그룹 제도 시행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웨슬리는 ‘평신도 설교자’들을 임명하여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그 당시 교회에서는 아주 파격적인 시도였다. 평신도 설교자들은 그들이 속한 신도회나 또는 다른 신도회를 인도하는 구역 설교자들(Local Preachers)과 웨슬리의 임명을 받아 신도회를 순회하는 순회 설교자들(Circuit Preachers)로 구분되었다. 웨슬리 목회사역에서 평신도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평신도들의 간증과 정직한 말은 그들의 산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안수 받은 사람의 말보다 더 호소력이 있었다. 물론 평신도는 성서적, 신학적 전문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비주의와 열광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웨슬리는 이들이 극단주의를 피하고 건전한 상식을 중시하고 성경의 한 구절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피하기 위하여 성경전체(the whole tenor of Scripture)를 통해 해석하도록 가르쳤다. 평신도 설교자들은 진정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자들로서 사제와는 구별되어야 하며 또한 성례 집행권을 가진 사제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평신도 설교자가 예전을 집행할 필요가 없다는 웨슬리의 신념이 무너졌다. 그렇게 된 까닭은 첫째로, 대다수 국교회 교직자들이 의도적으로 메소디스트의 수찬을 거부하였고, 둘째는 메소디스트들은 자신들의 설교자들이 그들의 예전을 집행해주기를 원하였고, 셋째는 스코틀랜드(Scotland)와 아메리카의 전도자를 위하여 안수례를 집행하였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1784년 9월 1일과 2일에 아메리카 합중국이 독립하게 되자 약간의 평신도 전도자에게 안수하여 지도자로 임명하였다.웨슬리는 옥외에서 설교하였다. 옥외 설교는 그 당시의 교회의 기본 구조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옥외 설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옥외 설교를 감행하였다. 옥외 설교는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당시 교회가 수용할 수 없는 많은 대중을 만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웨슬리로 하여금 남루한 옷과 때 묻은 몸으로 예배 장소에 감히 찾아 올 수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만나게 하였다. 웨슬리는 1739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 약 500회 설교하였는데 교회에서 한 것은 불과 8회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웨슬리가 옥외 설교의 가치와 효력을 크게 인정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웨슬리는 옥외 설교의 효과와 편리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였다. 옥외 설교라는 비전통적인 방법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웨슬리는 그것에 대하여 변호하였다. 그는 1772년 9월 6일자 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날까지 야외 설교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명을 인식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 이것 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사회개혁에 앞장서는 교회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종교이며,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복음을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의 구원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웨슬리는 교회가 복음만 설교할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등 사회적 제반 문제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메소디스트 교인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웨슬리에게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구원으로부터 시작되고, 개인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로 나아간다. 웨슬리의 일차적 관심은 영혼의 구원(개인의 성결)에 두었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 구원(사회적 성결)으로 나아가고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사회구원과 사회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복음 운동은 무의미하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이야말로 이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웨슬리는 삶의 개혁이 메소디스트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메소디스트회는 지상에서 사라질 것을 염려하였다. 웨슬리 신학 속에는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통하여 우리 사회를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어 보자는 사회적 개혁주의 사상(social reformism)이 내포되어 있다. 웨슬리는 사회의 소외계층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은 활동들을 통해 사회 문제 해결을 시도하였다.1.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감리교인들로 하여금 모금 운동을 하게 하였다. 모금된 금액은 세심한 논의를 거쳐 필요한 이들에게 배분되었다. 감리교회는 가난하고 재난을 만난 사람들을 책임지고 돕는 것을 그들의 중요한 선교 사업으로 생각하였고,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감리교인들에게 내린 특별한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2. 웨슬리는 대여금고(lending stock)를 설립하여 가난한 자들과 형편이 어려운 자들에게 무이자로 빌려주어 고리대금업자들에게 가는 것을 막고, 또한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로 인해 감옥에 가는 것을 막았다.3. 형편이 어려운 자들을 위한 처소를 마련해 주었다. 웨슬리는 런던에 “구빈원”(The Poor House)을 세워 가난한 과부들을 돌보았는데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1766년에는 “과부의 집”을 세워 전쟁 미망인을 위한 과부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가난한 과부들만이 아니라 혼자된 남자 노인들을 돌보는 “노인들을 위한 감리교 집”(Methodist House for the Aged), 그리고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숙소와 식사를 겸한 안식처인 “나그네 동무회”(The Strangers' Friendly Society)를 설립하였다.4. 웨슬리는 신도회를 통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현금, 의복, 생활필수품, 연탄은 물론 의약품도 나누어주었다. 또한 의사, 약제사, 약국의 협조를 얻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진료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웨슬리는 의료팀을 조직하여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브리스톨 광산촌에서 무상으로 약을 주었다. 무상 의료활동은 영국 역사상 웨슬리가 처음으로 실천한 운동이었다.5. 웨슬리는 재소자를 위한 활동과 교도소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웨슬리는 여러 신문과 단행본을 통하여 지옥과 같이 어둡고, 불결한 교도소들의 환경을 개선할 것을 촉구했고, 교도소의 생활이 오히려 범죄를 배우는 생활이 되고 있음을 경고하였으며, 긴 재판과정과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에 대한 불공평한 재판처리에 항의하였다. 웨슬리에 의해서 촉발된 교도소 방문은 1743년에 감리교회의 규칙이 되었고, 1778년 연회에서 교도소에서의 봉사활동은 모든 감리교 설교자들의 의무로 규정되었다.6. 웨슬리 당시의 공공학교는 오직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만 다닐 수 있었다. 가난한 자들은 교육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웨슬리는 1739년 킹스우드에 광부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같은 해 런던에도 학교를 세웠다. 웨슬리의 교육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와 국가에 쓰임받는 사람을 양육하는데 있었다.7. 18세기의 사회적 문제들 가운데 노예문제가 최악의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영국 정부는 노예 사업의 보호와 발전을 도모하였으며 영국 국교회도 노예매매제도를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박해와 학대 또는 폭행의 부당성을 과감하게 주장하고 1770년부터 노예 제도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웨슬리는 식민지에서 가족들이 헤어지고 팔려가는 노예시장의 야만적 행위를 목도하고 노예제도를 “모든 악랄한 것의 저주스러운 총체”로 규정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다. 웨슬리는 노예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입장 표명이나 또는 노예해방을 위한 기도와 금식을 요구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참여하여 국회에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관철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감리교 연회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서명운동과 국회청원운동을 하였다.웨슬리는 이외에도 여권신장(女權伸張), 전쟁의 추방, 투표권 포기 금지 등은 물론 사회개선책의 하나로 1742년에 관습개혁 협회(Society for Reformation of Manners)를 조직하였다.성령의 역사에 의한 교회와 사회 개혁웨슬리는 그의 회심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령과 동행한 성령의 사도였다.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을 소생시키고, 그의 목표를 재설정하도록 한 것은 성령의 역사였으며, 웨슬리의 교회 개혁을 위한 모든 활동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아니했다면 웨슬리의 개혁 작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웨슬리의 교회와 사회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와 사회 개혁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성령은 창조 이전부터 역사하여, 예언자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마리아에게도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시고, 구세주의 활동에 독특한 방법으로 임재하였으나 오순절 이전까지는 성령은 성결케하는 영으로 온 인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오직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율법시대에 가능하지 못했던 성결의 영이 주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성령의 증거가 있는 사람들의 가장 궁극적이며 결정적인 표식은 성령의 열매를 가지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는 그 열매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다고 본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령의 증거없는 성령의 열매란 있을 수 없으며, 역으로 성령의 열매 없는 성령의 증거도 있을 수 없다. 웨슬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사실을 믿기 위하여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하지만 성령을 받는 것이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믿음과 평화와 기쁨, 그리고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요한복음 3:1-18의 주해를 통해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웨슬리 자신도 회심 체험 이전에는 아들의 신앙(복음적 신앙)이 아니라 종의 신앙(율법적 신앙)을 가졌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성령을 체험한 후에 온전한 신앙관을 정립하였고, 하나님의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으며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웨슬리는 성령의 역사가 보편적임을 말한다. 성령의 역사는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다. 성령의 역사는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진지하게 살고 있는 현장에서 나타난다.웨슬리에게 있어서 성령의 활동은 자유로운 것이다. 성령은 교회 밖에서도, 다른 종교 안에서도 역사하신다. 성령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활동할 수 있으며, 이교도들도 이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응답 여하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영원 전부터 선택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영이 보편적으로 미리 예비적으로 모든 사람 안에 역사하고 있다고 믿는다.인간은 성령의 역사에 응답할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성령의 역사는 결코 인간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설득하고 종용한다는 것을 빠트리고 싶지 않은 것이 웨슬리의 입장이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오성, 감정, 의지를 포함한 인간의 인격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올바르게 지도하여 비이성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웨슬리는 이성의 활동을 존중한다. 그러나 구원의 궁극적 주도권과 완성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05-07
  • 학술/ 한복협 4월 월례회 ‘온전한 주일성수 신앙의 회복을 염원하며’
    오정호 목사 (한복협 부회장, 새로남교회 담임)본고는 지난 10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가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서 연 4월 월례회에서 오정호목사가 발제한 원고 ‘기술집약적 사회에서 주도적 믿음을 회복하기’를 편집한 것이다. 오후예배에서 붙박이 저녁예배로 전환하라.발제자는 지난 2011년 2월 본 한복협에서 <주일성수와 예배의 부흥을 주시옵소서>라는 주제로 모일 때 ‘주일저녁예배 회복을 중심으로’의 내용으로 발표한바 있다. 그때는 발제자가 속한 총회의 예배모범과 성경적 근거와, 교회사적 근거 그리고 주일저녁예배의 유익의 목회적 관점으로 다루었다.이 시간은 지난번 발제에 이어 성도의 관점에서 주일저녁예배의 실제적 유익을 찾아보기를 원한다. 한사람의 신앙고백이 생활신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신앙의 의식화, 신앙의 인격화, 신앙의 생활화, 신앙의 공동체화, 신앙의 문화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처음 교회문턱을 넘은 성도가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외없이 자신을 예배자로, 봉사자로, 전도자로 인지하고 자기 정체성을 실생활로 옮겨놓는 영적 작업이 필요하다. 이 과정가운데서는 신앙성숙에 영향을 끼치는 1:1의 관계, 구역이나 목장모임을 통한 소그룹관계, 주일 낮 예배를 통한 전체 성도들과의 교제와 예배자로서의 자기인식이 길러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신앙성숙과정에서 단절의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처음 믿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먼저 믿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신앙의 인격화와 생활화를 경험한다. 문제는 기성신자 가운데서 일주일에 한번 주일 낮 예배로 끝나는 성도의 비율이 점점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가운데 시간적으로 늦게 교회 생활하는 새로운 교우들은 전세대가 주일저녁 예배를 통하여 누리던 교회생활 즉 신앙생활의 심화를 경험하기가 매우 힘든 구조 속에 들어와 있다. 심지어 주일저녁예배가 오후로 옮겨지거나(각 지역교회의 여러 가지 목회적 사정이나, 지역 특성이 개입되어 있다) 아예 오전부터 드리는 몇 차례의 예배가 오후로 이어지면서 저녁예배를 자연스럽게 각 부별 예배로 포함시키는 경우도 발생한다. 문제는 이러나저러나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성도들에게 주일 저녁예배의 흡인력이 상실된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그 속성상 끝없는 편리주의를 추구한다. 당위성보다는 편의성을 앞세운다. 왜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오직 예배를 위하여 시간과 장소를 따로 구별하라고 요구하셨을까? 인간의 임의성에 맡기지 않고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제도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펼쳐내셨을까? <우리나라 일주일 TV시청 통계>가 보여주듯 TV나 스마트폰과 취미생활에 투자되는 시간은 불가침의 영역처럼 강력하게 상승되고 있지만, 예배는 언제든지 손대어 가감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현대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Ⅰ. 어떤 동기로 주일저녁예배를 드리는가?주일저녁예배와 주일 낮 예배에 임하는 예배자로서의 동기는 결코 차이가 있을 수 없다.단 주일저녁 예배자는 주일 낮 예배자들과는 다르게 예배자로서 뿐 아니라 온전한 주일성수자로서의 자기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성숙에 대한 열망, 공동체에 대한 이해, 시간활용에 대한 전략적 사고, 공동체를 세우고자하는 복된 마음이 있을 때 저녁예배자로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예배를 드리는 현장은 주님과의 만남의 현장, 성도의 교제의 현장, 예배자로서의 예배의 훈련(말씀, 기도, 찬양, 교제)에 대한 열린 공간으로 제공된다. 또한 바쁜 도시인의 쉼터로서의 기능도 감당할 수 있다. 또한 부모의 신앙이 자녀손들에게 세대계승되기 위해서는 사적인 공간인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뿐 아니라 공적인 공간인 예배당에서 역시 예배자로서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전수하여야 한다. 발제자가 섬기는 새로남교회에서는 특정한 광역도시에서 상징적인 예배시간을 제공함으로 지역민뿐 아니라 방문자, 예배에 대하여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열린 공간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Ⅱ. 어떤 방법으로 드리는가?1. 시간과 장소를 붙박이로 진행한다. 계절에 관계없이 주일낮예배를 드리는 예배실에서 오후 7:30분으로 고정하여 저녁예배를 드린다.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고정시키는 이유는 대내외적으로 주일저녁예배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 예배생활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이다.2. 메시지를 전하는 강사는 본 교회 담임목사나 부교역자 그리고 외부에서 모셔오는 특별강사로 진행한다.3. 교회의 전체흐름을 주도하는 중직자들은 주일 낮 예배처럼 존중하기를 원한다. 직분자들의 영적침체와 불순종 그리고 영계의 혼란은 개인예배생활의 침체와 혼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분자의 은혜성이 교회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논리적인 공동체성 함량을 뛰어넘는, 실생활의 공동체성을 경험한다. Ⅲ. 주일저녁예배를 통한 어떤 열매가 있는가?1. 생활신앙인으로 드려지는 은혜가 있다. 예배도 훈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훈련된 예배자가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영적인 선순환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결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2. 강단교류를 통한 은혜의 다양성을 체험한다. 발제자가 섬기는 교회는 장로교단에 속해 있다.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교인은 자기교파 중심으로 사고가 형성되기에 배타성이 강하다는 평판이 없지 않다. 여러 교단에 속한 훌륭한 강사를 모시면 은혜도 다양하게 체험할 뿐 아니라, 지역교회의 장벽과 교파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기에 주일저녁예배는 장로교회 교우들에게 큰 유익을 준다. 나를 열지 않고서는 타인의 마음을 열수 없다는 원리이다.3. 세대통합예배를 드리게 된다. 발제자의 교회에는 대학부가 2부서, 청년부가 3부서가 있다. 우리 청년들은 우리교회의 미래이다. 그런데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는 교회는 실상 미래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도 함께 드릴 수 있는 예배, 함께 공동체성을 경험할 수 있는 예배는 세대통합과 세대계승의 현장으로 쓰임 받는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현장에 어찌 기성세대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의 대학 청년들이 직장과 결혼을 따라 전국 어느 곳에 흩어져 산다 할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아내며 또한 교회봉사자로서 쓰임받기를 기대하기에 대학 청년들의 주일저녁예배를 강권하고 있다. 4. 은사로 섬기는 기회를 제공한다.주차, 찬양, 특별순서등 주일낮 예배 시간을 통하여 소화해 낼 수 없는 봉사를 저녁예배 시간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다. 발제자의 교회에서는 제자훈련에 들어오면 무조건 주일저녁예배 주차봉사로 일정기간을 섬겨야 한다. 주차 봉사를 경험한 성도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소 주차 봉사자들에 대한 시각에서 더욱 진일보한 시각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믿음의 성숙이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5. 교구 예배를 드린다.분기별로 교구예배를 기획하여 드리기를 힘쓰고 있다. 교회 규모가 커져갈수록 오붓한 자기지역만의 시간이 필요함을 공감하여 각 홀에서 교구예배를 기획하여 드린다. 교구를 담당한 교역자가 설교자가 되고 그 교구에 속한 직분자들이 순서담당자가 된다. 찬양팀이나 찬양대는 오직 그 교구에 속해 있는 교우로서 구성된다. 교구 예배를 드린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감사와 의미와 재미를 이야기하였다. 물론 상호 비교를 통한 도전을 받아 미비한 부분을 보완해야 되는 작업도 필요하였다. 6. 담임목사의 안목이 확장 심화되었다.이 부분은 지역과 교파를 초월한 저명한 강사를 초청하여 믿음의 교제를 나눔으로 성도들의 성장뿐 아니라, 담임목사인 발제자도 많이 배우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담임목사의 안목이 자기중심적인 안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주일저녁예배가 활성화 되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는 유익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7. 부부화목의 기회를 제공한다.금이 가고 있는 가정이 많은 현실이다. 소문난 가정생활세미나 한두 번 참석한다고 하여 그 가정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보장은 없다. 세미나마다 특성이 있으니 동기유발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부부가 함께 계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참여할 수 있는 예배는 부부간의 마음의 거리를 좁혀줄 뿐 아니라, 저녁예배 참여하는 많은 가정들이 건강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화목한 가정을 세우는 일에 도움이 된다. 8. 기독교 문화를 심화확산한다.발제자의 교회는 국제교회(영어, 중국어, 일어)와 농아교회가 있다. 또한 기독학교를 운영한다. 도저히 주일 낮 예배로 소화시킬 수 없는 만남과 프로그램을 저녁 예배시에 실행하여 상호 영적유익을 도모할 뿐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국제교회 주도로 예배를 기획하여 드리는 것과 농아교회와 기독교학교 현장을 공개하는 예배시간을 가짐으로 장애인이나 다문화에 대한 시각을 성경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 특히 영상과 음악을 통한 소개와 새로운 경험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기성세대에도 관심과 기대를 선물한다. 9. 부교역자를 세우고 격려한다.한 지역교회의 책무는 교우들을 각성시켜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세우는데 있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목회적인 안목과 능력 그리고 균형 잡힌 인격을 가진 부교역자들을 배출하여 한국교회에 기여하는 일 또한 소중한 일이다. 규모 있는 교회일수록 주일저녁예배는 부교역자들에게 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자신을 다듬고 성도들과의 관계를 증진하는 일에 매우 유익한 기회를 제공한다.앞에 제시한 몇 가지 외에도 복합적으로 누리는 은혜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성도가 예배자로서 평생을 살아갈 때에 은혜로우신 주님과 말씀에 대한 갈망,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한 열린 마음, 민족복음화에 대한 책임의식, 지구촌시대의 선교에 대한 열린 의식이 주일 낮 예배시간과 소그룹을 통하여서만 경험된다고 제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또한 이성적으로 매우 조심스러운 주제가 된다. 어쨌든 발제자의 교회는 발제자가 교회부임이후부터 주일저녁예배를 마음에 둔 바 받은 은혜가 남다르기에, 온전한 주일성수 속에는 주일저녁예배에 대한 헌신도 자리 잡고 있다고 믿는다. 나가는 말어떤 이들은 피곤한 현대인들에게 주일저녁예배까지 요구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짐을 더 지우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발제자의 생각은 다르다. 노동집약적으로 살았던 농경시대는 그 나름대로 피곤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기술 집약적인 시대에 사는 우리 역시 수많은 유용한 기계발명의 결과로 시간활용의 폭이 넓어졌다할지라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국민 스트레스가 가중되었다는 보고가 많다. 그렇다면 언제 한국교회는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예배중심의 삶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쓸 시간 다 쓰고, 쉴 시간 다 쉬고 나머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예배자로서의 체면만 살리겠다는 생각자체가 문제의 출발이라 여겨진다. 우선순위에서 밀린 예배는 참된 예배로서 품격을 상실한 것이다. 어떤 이는 교회안에서의 예배자이기 보다, 일상의 예배자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를 향한 일리 있는 지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주일성수의 훈련이 선행되지 않고 일상의 예배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삶을 살아내는 한국교회 성도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논산에 자리 잡고 있는 육군훈련소는 <정병육성>의 요람이라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발제자도 육군훈련소 출신이다. 훈련소에서 기본훈련이 튼실하지 않으면 그 병사가 자대에 배치되어서 잘한다는 보장이 없다. 율법적이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주일저녁예배를 포함한 주일성수는 더욱 강화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주일성수는 한국교회의 건강을 위하여 허락하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아버지의 특별한 선물이라 확신한다. 특별한 선물을 가치 없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선물은 물론 선물한 이에게까지 무례하게 행하는 것이다. 주님 오실 때까지 한국교회가 온전히 예배하는 교회로 주님께 발견되어 쓰임받기를 기원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04-22
  • “이슬람과 평화는 애초에 공존하지 않아”
    예총연, 제12회 신학세미나 열고 이슬람의 실체 고발 한국교회의 건강한 장로교 교단들이 연합해, 기독교 교회제모습찾기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건강한 회복과 발전을 도모하는 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연합회(대표회장 유영섭목사)가 국가와 국민의 삶을 건강히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이슬람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하고 나섰다. 예총연은 지난 2일 산하기관인 신학협의회(회장 강용희목사)와 함께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제12회 신학세미나를 개최하고 이슬람 바로 알기에 나섰다. 지난해 11회 신학세미나에서 ‘카톨릭과 바람난 한국교회’란 주제로, 카톨릭의 위협과 실체에 대해 신랄히 비판했던 예총연은 금번에는 납치, 테러 등 폭력으로 무장한 이슬람 IS 세력과 그들의 교리에 대해 자세히 파헤쳤다. 이날 세미나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계기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슬람 지원정책이 발표되는 등 우려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뤄진 것으로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상당한 관심이 이어졌다. 백주년기념관 강당을 완전히 꽉메운 가운데 열린 이날 세미나에서 강사로 초청된 주영근목사(대신총회신학연구원 성경신학 교수)는 ‘이슬람과 IS와의 역학관계’를 주제로 왜곡된 이슬람의 역사를 조명하고, IS의 정체성을 밝혀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을 일깨웠다.주목사는 “태생부터 매우 사악하고 잔인한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슬람을 사악한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우리가 과거에 알고 있던 호전적이고 비타협적인 이슬람교가 어느덧 관용과 평화의 종교로 다가와 있다”고 심각성을 전했다.특히 자신의 강의에 대해 “이슬람권에서조차 부인할 수 없는 팩트에 근거하여 명명백백히 증언할 뿐이다”고 소개한 주목사는 “이슬람의 어원이 되는 아랍어 ‘아슬라마(aslama)’는 복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 학자들은 오랫동안 호전적인 이슬람의 대외적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평화와 복종이라는 두 단어의 연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고 밝혔다.이어 “이슬람은 신께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어, 이슬람 백성들의 일반적인 소견은 알라의 뜻에 일치하지 않을 경우 결코 들어줄 수가 없는 체제이기 때문에 이슬람과 평화란 단어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면서 “하지만 이슬람 학자들은 모든 인류가 알라(Allah) 앞에 절대 복종하면 그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주장하고, 지금은 그 진정한 우주적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투쟁 즉 ‘지하드’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모순을 지적했다.또 “이슬람이 코란에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내용이 없다며 평화적인 종교로 역사까지 왜곡해 왔지만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테러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면서 “역사를 왜곡해 교육함으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호전적인 무슬림들이 휘두르는 시퍼런 칼날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해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초기에 정통 칼리파 시대(Rightly Guided Caliphate)부터 현대에 등장한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소속 테러리스트들과 IS에 이르기까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작금에 IS나 보코하람(Boko Haram)의 출현을 돌연변이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슬람이 추구하는 이상에 의한 사필귀정이요, 이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알카에다’나 탈레반의 출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도 덧붙였다.주목사는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코란을 봐야 한다고 피력했다. 코란이 사랑과 평화를 말한다면 이슬람은 사랑과 평화의 종교가 분명하지만 코란이 전쟁과 폭력을 말한다면 이슬람은 전쟁과 폭력의 종교라며 “코란을 제대로 읽어보면 이슬람의 호전성에 대해서는 코란 자체가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심지어 “코란에 명시된 내용은 매우 호전적이고 평화와는 거리가 먼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번역 확대 적용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희석하거나 온화한 표현으로 바꾸고 있다”며 코란의 본문을 제시하며 설명했다.또 “코란의 뜻을 알리기 위해 각국의 언어로 번역을 허락했지만 번역되어진 코란 낭송은 낭송이 아니라 코란의 해석 정도에 불과하다”며 “이슬람에선 코란을 결코 다른 언어로 낭송하지 않는다”고 주장을 뒷받침했다.1시간여의 강의를 마친 주목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다양한 통로를 통해 밀어 닥치는 이슬람의 영향력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는 사안은 분명 아니”라면서 “이슬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이슬람에 대해 저와 더불어 세미나에 참석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동안 어설프게 알고 있었거나 귀동냥으로 대충 들어서 잘못 알고 있는 내용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당부했다.이날 세미나를 준비한 예총연 사무총장 반정웅목사는 “한국교회의 건강한 회복을 기원하는 예총연이 이제는 기독교를 넘어 거짓되고 왜곡된 종교 정보로 피해를 입는 국가와 국민들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려 한다”며 “하나님의 성경과 진리를 모순되게 얘기하는 세력이 더 이상 활개치지 못하도록 예총연이 한국교회를 대신해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예총연은 매년 한 차례씩 신학세미나를 개최하고 회원교단 목회자들의 신앙 성장과 신학 정립을 돕고 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04-07
  • 학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회
    본고는 지난 13일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회 ‘3.1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한의 평화통일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종교인의 사명과 역할’ 중 손인웅목사가 발제한 ‘3.1정신 이어받아 한반도 통일 앞당기자’를 발췌한 것이다. 통일 위해 모든 종단, 종파 간에 연합과 일치를 이뤄야종교간 함께 펼치는 지역의 실천운동이 통일의 첩경 될 것 1. 한민족의 영성과 문화와 종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이집트의 고대문화나 히브리문화, 이슬람문화, 인도문화, 서구의 기독교문화 같은 경우는 단일신을 섬기는 단일 테마가 수천년 이어져 내려오면서 그 신(神)에 대한 충성심으로 형성된 종교문화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문화의 특징은 각 시대에 따라 종교가 교체되면서 문화단절과 문화혼합현상이 심했다. 불교문화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약 1,000여 년간 유교문화를 고려 말부터 이조를 거쳐서 약 600여 년간 강세를 보였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가 약 300여 년간 개화의 물결을 타고 가장 빠른 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무교,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가 주류종교였지만 19세기 동학운동을 비롯한 민족종교들도 그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한민족의 다종교문화는 다종교사회를 형성하였고 다종교간의 이해와 협력을 가능케 하여 융합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창조적 민족이 되고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유동식 교수는 한국인에게는 5,000여 년 동안 끊어지지 않고 큰 물줄기를 형성하여 내려오는 영성이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풍류사상이라고 하면 한의 영성(종교) 멋(예술) 삶(생활)의 혼연일체를 강조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 풍류사상의 뿌리이며, 풍류도가 유불선 3교를 포함 종합하면서도 섞이지 않고 각각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경재는 한국인의 영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네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 공동체 영성, 둘째 한의 영성, 전일성, 온전성, 셋째 축제적 놀이(신바람놀이), 넷째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는 원융적 전일성을 이끌어 가는데 사람이 그 촉매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의 일체성과 다양성의 존재양식과 활동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의 영성이 어떤 종교와 만났을 때 대체로 옥토와 같은 밭이 되어줌으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였다. 한국의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의 부흥이 좋은 실례이다. 그럴 때마다 외래종교를 한국적인 종교로 상당부분 토착화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영성의 힘이 강하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한민족은 한 덩어리를 융합하는 힘이 깊은 곳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위기를 만날 때 대동단결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3.1운동의 정신을 일깨우고 발휘할 수 있었다. 유교의 분파분열, 기독교의 교파운동, 서구 개인주의의 이기주의화 등으로 공동체 의식이 약화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한국인의 영성을 뿌리로 하는 3.1정신으로 돌아가서 민족통일의 동력을 삼아야만 할 것이다. 2. 3.1운동의 종교간 협력과 세력 확산 3.1운동 제96주년을 맞이하여 복음주의협의회가 주관하는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발표할 원고를 준비하기 위해서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3.1운동비사(秘史)라는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숙독하면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3.1운동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에서 나오는 수많은 인사들의 매국행위들과 친일인사들의 비열함과 애국투사들의 고결한 생애와 자기생명을 초개같이 희생한 순국선열들의 위대한 생애를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어서 숙연한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고 새삼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을 저술한 이병헌 선생은 3.1운동 거사 준비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깊이 참여한 청년운동가로서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의 활동상황을 매일매일 일지를 기록하고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운동의 상황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정리해서 정보를 독립운동본부요원들에게 제공하여 정세를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후세를 위해 자료보존을 위한 소중한 사명을 수행했던 인사였다. 역사는 기억이요, 기억은 기록으로 남아야 역사자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도 열심히 목숨 걸고 투쟁한 독립운동 비사(秘史)가 정확한 기록으로 남지 않았으면 모든 역사가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3.1운동은 종교인들이 계획하고 주동하여 거국적으로 결집하여 전 국민을 일깨우고 동참하게 하는 추동세력이었다. 33인중에 천도교 대표 손병희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애국심, 기독교 대표 이승훈 선생의 추진력이 탁월하였던 점과 애국충정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불교 대표의 백용성 선생의 협력 등을 생각할 때 3.1운동은 종교인들의 구국적 신앙심이 순교적 결단으로 결집된 운동체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인들이 일어나 앞장서서 구국일선에서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해낸 사례를 보면 건전한 종교들은 신도들에게 대의를 가르치고 애국적 신앙을 실천하는 것을 가르친 것에서 비롯된 것을 삼일운동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3.1운동은 망국의 설움을 안고 고종황제의 승하에 대한 의혹과 함께 슬픔에 빠져있었던 민중들이 3월 1일 황제의 인산일을 기해서 거국적인 만세운동으로 민중봉기를 가능케 한 것이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수가 202만여 명, 시위횟수가 1,542회, 사망자가 7,500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차 46,948명, 파괴 및 전소된 민가 715동, 교회 74개소, 학교 2개 등이었다. 3.1운동에는 기독교인 16인, 천도교인 15인, 불교 2인 등 33인이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로 서명하였고 그 외에 17명이 주요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3.1운동은 전 국민이 전국적으로 참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대사를 결정하는 데는 그 중심세력이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3.1운동에 천도교인들이 가장 열심히 참여한 것은 그들은 동학농민운동으로 농민전쟁까지 치르고 극심한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역사의식이 강하였고 전국적 조직과 훈련된 투사들이 많아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무엇보다 손병희 선생과 최린 선생과 같은 지도자들의 신념과 애국충성심과 전국적 조직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재정을 상당부분 부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지도자인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선생, 정춘수, 박희도, 함태영 목사 같은 지도자가 전국교회와 신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기독교지도자들이 전국교회와 노회의 조직을 통해서 경향 각지의 모든 신자들을 일시에 동력화 할 수 있다. 3.1운동의 특징 중에 하나가 천도교와 기독교가 상극의 관계에서 있었지만 정부로부터 사교라고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민족독립이라는 애국심으로 연대하여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수난시대를 겪으면서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투쟁할 때 세계 역사의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소민족들의 고통을 굽어 살피셨다. 그래서 세계1차 대전을 일으킨 동맹국의 패배와 함께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으로 하여금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게 함으로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산업혁명, 문예부흥, 시민혁명 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리학의 퇴보와 함께 봉건사회의 붕괴를 재촉하여 인간존엄사상으로 자유, 평등사상이 싹터서 세계적인 근대화 물결이 밀려오게 되었다. 동학운동의 민중봉기와 기독교의 민주화, 인권운동이 결속하여 민족해방운동의 폭발적인 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민족의 자주독립의 원동력이 되었던 종교 간의 대화에 협력의 모델을 발전시켜서 남북한 평화통일 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종교인들이 준비해야할 것이다. 3. 구체적 실천운동 지구상에서 우리민족은 가장 대화가 부족하고 대화의 기술과 대화의 위력을 불신하고 있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과 평화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가장 절실히 필요한 일이 대화이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큉은 세계윤리구상이라는 책에서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국가 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지구를 위한 공동의 윤리적 규범을 고려하지 않고는 종교 간의 성공적인 대화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지구윤리가 없어서는 우리의 지구의 생존은 없을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3.1운동은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에서 자유와 평등사상, 인권과 약자보호사상에 근거한 민족자결주의가 잉태되어 민족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통일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통일이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고려해서 사용하자는 것이다. 적화통일, 무력통일, 북진통일, 흡수통일, 합의통일, 평화통일 등의 용어에 대한 잘못된 기억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화해협력을 통한 양진영의 평화로운 합의과정을 통한 평화를 목표로 하는 평화를 공유하는 평화통일을 추구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을 생산하는 종교계가 불신을 물리치고 신뢰를 쌓아가면서 서로가 동족에게 인도적인 사랑을 나누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통일작업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한결같이 사람과 사람간의 공감과 통합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사람중심의 통일정책이어야 하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는 일차적으로 생명과 관계되는 가장 시급한 굶주림과 질병과 의식주 문제가 연관된 경제협력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문화와 생태환경, 가족, 행복추구 등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정치적인 문제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정치적 문제나 체제와 이념문제를 앞세움으로 대화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종교계가 앞장서야할 것이다. 종교계가 사회통합과 민족통일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모든 종단, 종파, 간에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할 것이다. 모든 종교계가 분쟁하지 말고 평화로워야할 것이고 그 다음에 모두가 힘을 합해서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할 것이다. 한국 종교계가 성북동과 수유리와 같이 종교 간에 함께 손을 잡고 지역사회문제를 해결하며 지역의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운동이 바로 사회통합과 민족통일의 첩경이 될 것이다. 한반도 화해와 협력과 평화를 위한 범종단협의회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활동해야만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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