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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생 제물인 닭의 피가 갖는 선교적 의미
    제사 속에는 희생 제물이 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인류의 죄를 위해서 희생 제물로 받쳐졌다. 모든 사람들은 죄를 위한 희생제사 개념 즉,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해 대신하여 죽임당하는 동물에 대하여 익숙해져 있는 것은 확실하다...죄를 위한 희생은 셈족에게 탁월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아프리카의 몇몇 부족에게도 나타나며, 이로쿠오이스(Iroquois)부족에게는 흰 개를 바치는 희생이 있다. 어쨌든,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사실보다는 그들의 성난 신들과 사악한 영들에게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산에 있는 자연석 제단 위에서 닭 한 마리를 제사하는 남부 멕시코 인디언은 죄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병들게 했던 영들을 달래고자 하며, 희생을 통하여 영의 난폭함과 예측할 수 없는 요구를 만족 시키고자 할 뿐이다.제경실 부부 선교사가 사역을 하던 시부순복음 교회의 현지인 전도사인 로슬린(Rosline)의 할머니가 소천 하여 장례식에 참여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로스린 전도사의 가족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고 고향집 바로옆 자신들의 땅을 하나님께 헌납하여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의 리더로 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모든 장례 절차를 이반족의 전통 관습을 따르지 않고 기독교장으로 치루었고 입관을 마치고 장지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대부분의 장지들은 깊은 산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길이 험하고 좋지 않다. 때로는 아주 작은 강변을 따라 쪽배도 타야하고 오랜시간 정글 길을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서 도시에 사는 이반족들은 공공묘지에 안치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흘림의 제의를 진행한다. 묘지지역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에 칼로 닭의 목을 따서 그 피를 뿌린 이후에 묘지 지역으로 발을 옮겨 들여놓는다. 이들의 사고 가운데는 묘지에는 악한 영들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악한 영들이 닭의 피를 보고 더 이상 이반족에게 접근하지 못한다고 믿는 것이다. 기독교 장례로 치러진 로스린전도사 할머니의 장례식에도 장지로 이동하여 묘지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제의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상주를 비롯한 직계가족들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친척과 친지, 이웃등 장지까지 함께 동행했던 비기독교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보통 한국에서는 망자의 유언이나 상주와 직계가족의 뜻에 따라 기독교 장례로 치러질지 결정이 되고 대부분 문상객들은 종교적으로 맞지 않는다 해도 자신들 나름대로 제의를 진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로슬린 전도사 가족의 장례의식을 통해서 볼 때 건슬란이 얼마나 이반족에게 중요한 의례인지 알게 되었고 그들의 가치관 안에 피 흘림의 제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은 믿지 않는 롱하우스에 복음을 전하러 간 제경실 선교사의 남편이 겪었던 사건이다. 큰 강줄기에서 작은 강줄기를 따라 쪽배를 타고 오랜시간 들어가는 아주 깊은 밀림 안에 있는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에서 건슬란 제의가 시작되었고 남편은 추장의 허락하에 관전 할 수 있게 되었다. 건슬란 제의를 집행하는 집행자는 롱하우스의 추장인 뚜아이 루마였고, 밤새 악몽을 꾼 가족들이 롱하우스 공동 복도인 루아이에 모여 있었다. 뚜아이 루마는 닭의 목을 칼로 따서 그 피를 받아 악몽을 꾼 가족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뚜아이 루마가 제의문을 낭독하기 시작하고 그 뒤에 온 식구들에게 강가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였다. 닭의 피를 뒤집어 쓴 식구들은 마을 앞 강가에 가서 몸을 씻고 그 입었던 옷은 강에 버려진다. 이렇게 씻음받은 사람들이 다시 마을의 공동 복도인 루아이에 앉자 뚜아이 루마는 이들을 향해 선포한다. “당신들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젯밤에 악몽이 더 이상 당신들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건슬란 제의를 지켜보던 남편은 그들의 관습에서 접촉점을 찾아냈다. 그들의 문화안에 녹아있는 건슬란의 제의를 통해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속의 진리를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러한 접촉점으로 많은 롱하우스에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구속적 유비를 통한 복음전도는 훨씬 더 효과적인 반응으로 나타났다. 닭의 피를 통해서 악령을 도말 시키는 말레이시아 이반족의 관습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진리는 구속적 유비에 대한 선교적 이론이다. 이는 닭의 피가 인류 구원을 주는 예수님의 거룩한 피 한방울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법을 접촉점으로 하여 구원의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계기가 선교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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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23
  • 구속적 유비를 통한 이반족 선교
    구속적 유비(redemptive analogy)란 “모든 문화는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문화적 지식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돈 리챠드슨(Don Richardson)의 『화해의 아이』(Peace Child)라는 책에서 제안되었다. 리챠드슨은 구속적 유비를 “인간의 여러 문화를 여는 열쇠로 다른 문화권을 상대로 하는 복음전도의 한 방법으로 신약이 인정한 접근방법”이라 말한다. 그와 그의 아내 캐롤은 1962년 네덜란드령 뉴기니아(현재는 인도네시아영토)의 이리안 자야(Irian Jaya)의 사위(Sawi)부족이 거주하는 마을로 들어갔다. 사위족은 적들의 머리를 사냥하여 그 해골을 배게 삼아 자는 아주 호전적인 족속이었고 그들에게는 선교사가 이해할 수 없고 선교의 큰 걸림돌이 되는 아주 독특한 세계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배반”이 그들 부족의 삶의 이상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살인과 배반의 방식은 오랜시간 우정을 가장하여 적을 안심시켜 놓고 살해하는 것이었다. 즉 거짓으로 상대방과 친분을 쌓은 후에 배신하고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세계관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사건을 이야기 했을 때, 그들은 가룟 유다를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은 성경의 내용중에 예수님을 파는 장면에서 환호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리차드슨 선교사는 그들의 문화 안에서 하나의 접촉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화해의 아이”였다. “화해의 아이”란 두 종족 간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두 종족에서 어린 아이 한명씩을 교환하는 것이다. 결국 화해의 아이를 통해 그들은 평화를 이루게 되며 화해의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두 종족간의 평화는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리차드슨 선교사는 이러한 “화해의 아이”를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접촉점으로 삼게 되었다. 결국 그는 “화홰의 아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선교사는 선교지 문화가운데 숨겨져 있는 구속적 유비를 발견해내야 한다. 그를 통해 성경의 구속적 진리를 전달할 때 보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말레이시아 이반족의 동물 희생은 이반족 문화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여러 부족 안에서 발견되고 있다. 허석구는 유진 니다(Eugene A. Nida)의 글을 인용하여 동물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모든 사람들은 죄를 위한 희생제사 개념 즉, 죄를 범한 사람을 위해 대신하여 죽임당하는 동물에 대하여 익숙해져 있는 것은 확실하다... 죄를 위한 희생은 셈족에게 탁월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아프리카의 몇몇 부족에게도 나타나며, 이로쿠오이스(Iroquois)부족에게는 흰 개를 바치는 희생이 있다. 어쨌든,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사실보다는 그들의 성난 신들과 사악한 영들에게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산에 있는 자연석 제단 위에서 닭 한 마리를 제사하는 남부 멕시코 인디언은 죄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병들게 했던 영들을 달래고자 하며, 희생을 통하여 영의 난폭함과 예측할 수 없는 요구를 만족 시키고자 할 뿐이다.이반족 역시 그들의 삶 전체에 동물희생에 대한 관습이 포함되어 있다. 건슬란은 이반족 제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수뜨리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건슬란은 어떤 범칙(犯則)을 무효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종교제의로서 (1) 닭 희생의 피를 흘림 (2) 흘린 그 피를 어떤 이에게 바르거나 접촉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건슬란이 닭의 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반족들은 주로 닭의 사용하지만 사건의 크고 작음에 따라 돼지피를 사용하기도 한다.보르네오의 밀림 깊숙한 정글에서 살던 이반족들은 정령숭배자들이다. 깊은 정글 숲속은 늘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준다. 특히 이반족들은 귀신이나 악몽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느낀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각 롱하우스에 영적 리더인 뚜아이 부롱을 두는 것과 그들의 권한을 봐도 증명이 된다. 이렇듯 이반족들은 농사를 지을때도, 병에 걸렸거나 악몽을 꾸었을 때, 롱하우스를 건축할 때, 약혼·결혼식 및 장례식에도 피흘림의 제의를 실시한다. 오늘은 이반족 속에 있는 문화적 요소들을 찾아내어서 구속적 유비를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기술하였다. 다음 호에서는 구체적인 선교 방법론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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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09
  • 이반(Iban)족의 제사제도인 가와이(Gawai)
    말레이시아 이반족에서 활용되는 가와이(Gawai)라는 말은 제의(祭儀, ritual festivals)이라는 의미이다. 이반족은 영적 세계와 교통하는 두가지 방법을 꿈(Dream)과 가와이라고 꼽는다. 현재 이반족이 보통 말하는 가와이는 정확하게 말하면 “하리 가와이 다약(Hari Gawai Dayak)이다. 이는 이반족 최대 명절로서 공식적으로는 매년 6월1일이지만 그 축제는 일주일 가량 지속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축제는 1965년부터 사라왁주의 공식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었다.보통 하리 가와이가 시작되기 전부터 벌써 온 마을의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인다. 각 가정들마다 도시로 나가서 일을 하던 가족들이 돌아오며 친척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손님들을 초청하여 축제를 즐긴다. 이 시기에는 스스로 제조한 뚜악(Tuak)이라는 술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시며 취하여 지낸다. 하리 가와이 다약은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은 의미이다. 풍년을 주신 그들의 농사신에게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즐긴다. 제의는 인도자가 제의문을 읽음으로 시작되고 이후에 수탉의 피를 제물에 바르면 공식적인 가와이 축제가 시작이 되는 것이다. 라냐이(ranyai)라고 불리우는 나뭇가지를 사용한다. 라냐이는 나무의 이름이 아니라 마을 중앙에 세워놓고 음식물을 매달아 놓은 그것을 일컫는 말로써 라냐이를 만들기 위해 바나나 나무도 사용되고 팜나무등 각종 나무의 가지들이 사용된다. 이것을 루아이 중앙에 꽂아놓고 그 위에 음식물을 매달고 전통복장을 입은 이반족들은 전통 음악에 맞춰 응아잣(Ngajat)이라는 전통 춤을 함께 추면서 라냐이에 매달려 있는 각종 음료와 음식들을 한사람씩 빠랑(Parang)을 이용해서 떼어낸다. 라냐이에 있는 모든 음료와 음식이 따 떼어내 질 때까지 돌아가면서 행한다. 그 이후에는 마을의 각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기도 한다. 이 가와이 축제는 루아이 중앙에 세워졌던 라냐이를 제거함으로 그 막을 내린다. 하지만 원래 가와이는 이반족들의 특이한 제의이며 여러 종류의 가와이가 있다. 데릭 프리만은 많은 가와이 제의들을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였다. 먼저는 벼농사와 관련된 가와이 제의, 건강과 장수와 연관된 가와이 제의, 부의 축적과 관련된 가와이 제의와 헤드헌팅과 전쟁(세력확장)을 위한 가와이 제이이다. 벼 농사와 관련된 가와이 제의에는 가와이 바뚜(Gawai Batu), 가와이 브네(Gawai Benih), 가와이 우마이(Gawai Umai), 가와이 버씸판(Gawai Besimpan), 가와이 버반(Gawai Beban)등이 있다. 건강과 장수와 관련된 가와이 제의에는 가와이 싸낏(Gawai Sakit), 가와이 만디 루마(Gawai Mandi Rumah), 가와이 무아이 미앙(Gawai Muai Miang), 가와이 산다우 아리(Gawai Sadau Ari)등이 있다. 부(富)와 관련된 제의에는 가와이 까유 라야(Gawai Kayu Raya), 가와이 낭가 랑잇(Gawai Ngangga Langit)등이 있다. 헤드헌팅과 전쟁(세력확장)에 대한 가와이 제의는 가와이 꺼냘랑(Gawai Kenyalang), 가와이 산다우(Gawai Sandau)등이 있다. 그 외에도 건축할때나 결혼, 약혼, 출생등등 생활 전반에 걸쳐 다양한 제의가 있다. 이렇듯 가와이와 이반족의 삶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가와이를 빼놓고는 이반족을 이야기 할수 없다. 필자는 오늘 말레이시아 이반족 속에서 행해지는 제사제도를 살펴보았다. 종교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신과의 교감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어느 종교학자에 의하면 종교란 사회적 결속으로 해석 하였다. 즉 사회의 집합표상이 개념화된 것이다. 이는 한 종족에세 상징적 의미를 지닌 동물이나 식물을 거룩한 것으로 구분하여 숭배하고 신앙화 한다. 이렇게 볼 때에 예배의 진정한 대상은 토템이 아니라 사회자체가 된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사회나 개인의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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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02
  • 뚜아이 부롱 (Tuai Burong)과 영적 대결
    선교지에서는 항상 영적 대결이 존재한다. 이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적 배경은 사도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선교여행을 실행하는 과정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받은 선교팀은 구부로라는 섬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느 중에 거짓 선지자 바 예수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 당시 그곳을 치리하고 있는 총독 서기오 바울을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방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마술사인 바예수를 야단 치면을 침과 아울러 소경이 되게 만들어 버렸다. 이와 같은 바울의 능력을 체험한 총독 서기오 바울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선교의 후원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선교가 진행되어지는 곳에서는 항상 사단과의 전쟁이 있다. 말레이시아 지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제자인 제경실은 사역 경험 가운데 나타난 영적 대결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토속 종교 가운데 나타난 부롱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부롱(Burong)은 말레이말로 날아다니는 새를 의미한다. 이반족은 조상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들에게 징조를 보여주어 화를 면하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나쁜 꿈을 꾸게 한다거나 새의 소리 동물의 소리나 움직임으로 그것을 알게 해 준다고 한다. 즉 조상들이 전조증상을 알려준다는 것인데 이런한 전조 증상을 해석하는 사람이 뚜아이 부롱(Tuai Burong)이다. 데릭 프리만(Derek Freeman)은 롱하우스 사회에서 모든 제의를 주관하는 자는 뚜아이 루마가 아니라 뚜아이 부롱이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반 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제의가 있고 이들의 관습과 믿음에 따르면 제의를 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어지기에 영적인 측면에서 뚜아이 부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뿐만 아니라 병들거나 자식들이 좋지 않은 일을 당하거나 해도 뚜아이 부롱(Tuai Burong)을 찾아가서 그가 베풀어주는 의식을 통하여 위안을 얻고 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뚜아이 부롱은 롱하우스를 보호하기 위하여 영적인 힘을 빌어 주문을 걸거나 마을 사람들을 악귀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믿기도 한다. 제경실과 남편은 빈툴루(Bintulu) 지역의 한 마을인 루마람뽀(Rumah Lampoh)를 그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과 방문했다가 이유 없이 몸이 아파 3일 동안 일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마을의 영적인 지도자인 뚜아이 부롱이 마을로 자신들의 신념이나 관습, 믿음등을 해하려고 방문하는 모든 방문객들에게, 또는 복음을 전하러 오는 복음전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저주를 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마을에서의 영적 전쟁은 굉장했고 결국 그 지역의 선교사님께서 계속 그 마을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하여 뚜아이 부롱의 세력을 꺽고 그리스도의 깃발을 꽂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후에 그 마을에는 유치원이 세워지고 교회까지 세워져서 마을의 모든 구성원들을 전도하는 전진 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최근 한국에서는 진돗개를 숭배하는 종교가 있었다. 언론에 소개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돗개를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세살배기 아이를 때려 숨지게 하고 시신을 유기한 신도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아이의 어머니는 시신 유기에 동참하고 거짓으로 실종 신고를 했다.이들은 진돗개를 ‘영물’로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서울과 전주 지역에서 진돗개 10여 마리를 키우며 공동생활을 했다. 경찰은 이 종교집단의 신도가 20~30명쯤이며 이중 10여명이 공동생활을 한 것으로 파악했다. 최씨는 2014년 2월 남편과 이혼한 뒤 딸(10)과 아들을 데리고 이 종교집단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씨는 “악귀가 씌어 아이가 고집이 세고 말을 듣지 않는다”며 최씨의 아들을 수차례 폭행해왔다. 아이가 죽자 범행이 들통날까 두려워진 김씨와 최씨는 교주의 아내 이씨와 함께 아이 시신을 나무 상자에 넣어 이 종교집단의 다른 주거지가 있는 전북 전주 완주군으로 가서 근처 야산에 묻었다. 사흘 뒤 교주 안씨가 멧돼지가 시신을 파낼 것을 걱정하자 이들은 시신을 다시 파내 그 자리에서 화장하고 임실군의 한 강변에 유골을 뿌렸다. 이처럼 진리가 없는 인간들은 사단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나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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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08
  • 사라왁 이반족의 뚜아이 루마(Head man, Tuai Rumah)
    사라왁 이반족은 마을의 추장을 뚜아이 루마라고 부른다. 그는 마을의 대표이자 행정적인 지도자이며 출생, 결혼, 약혼, 이혼, 장례등 마을에서 행해지는 각종 예식의 중요한 증인이 된다. 뚜아이(Tuai)란 말은 이반어로 우두머리, 어른, 지도자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루마(Rumah)는 집이란 뜻이다. 결국 뚜아이 루마는 그 마을의 지도자, 우두머리, 최고어른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대체적으로 롱하우스의 이름은 뚜아이 루마의 이름을 따서 불리워진다. 예를 들어 루마 우말(Rumah Umar)이라는 마을이 있다면 그 마을, 즉 그 롱하우스의 추장 이름이 우말인 것이다. 만약 뚜아이 루마가 사망하거나 해서 추장이 바뀌게 되면 그 마을의 전체 이름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뚜아이 루마는 보통 롱하우스의 가장 가운데에 거주하게 되는데 이유는 예전에 다른 족속들과 전쟁을 벌일 때 추장(뚜아이 루마)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추장의 집을 중심으로 힘이 있는 순서대로 좌우로 롱하우스의 집을 차지하게 된다. 롱하우스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 누가 추장인지 잘 모를지라도 롱하우스 집들 중 가장 가운데에 사진이나 certificate이 많이 붙어있는 집을 방문하면 거의 틀림없이 추장의 집이다. 뚜아이 루마는 마을의 대표로 롱하우스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만나 롱하우스에 들일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한다. 또한 자신의 마을에 방문한 방문자를 잘 대접하는 것도 추장의 의무이다. 이반 사회에서 뚜아이 루마의 위치는 마을의 지도자 그 이상이다. 뚜이이 루마는 정부의 행정적인 일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는 정부가 주재하는 회의에도 참석을 해야 하고 그 마을에 벌목회사가 나무를 벌목하기 위해 혹은 팜 농장이 생길 때 마을 사람들을 대표하여 회사와 마을의 이익을 위해 협상을 벌여야하기에 이반어 이외에 말레이어나 영어까지 배우도록 마을 사람들이 요구하기도 한다. 뚜아이 루마의 선출은 마을의 기혼 남녀 주민들의 동의에 의해서 결정되며 원칙적으로 임기연한은 없다. 원칙적으로는 세습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세습되는 경향이 있다.이반족이 생각하는 뚜아이 루마의 적격자는 이반족의 전통(Adat)을 잘 이해하는 자라야 하며 그 다음 자격으로는 분쟁이 발생되었을 때 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말을 조리있고 설득력 있게 잘 하는 자여야 한다.뚜아이 루마의 또 다른 업무로는 마을에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다. 아닷(Adat) 이라고 불리우는 자체적으로 만든 규약이 있는데 이는 실제적으로 마을에서 집행된다. 아닷은 일반적으로 이반족 자체적으로 정한 하나의 규약이지만 그들의 마을에서 실제로 집행된다. 왜냐하면 뚜아이 루마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다 모아서 회의를 하고 그 회의의 결과로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규약이기 때문이다.뚜아이 루마는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혼이 많은 이반족들 가운데서도 뚜아이 루마는 이혼하지 않고 한 아내를 혹은 남편인 사람을 뽑는다. 경제적으로도 열심히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기도 해야 한다. 뚜아이 루마의 이미지는 강압적으로 마을을 지배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주님의 의견을 모아 마을을 이끌어가는 모습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뚜아이 루마의 의견을 따르고 존중하기에 추장의 의견에 의해 마을의 중요 사안들이 결정되는 일들이 많다. 뚜아이 루마는 복음을 전할 때도 큰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 말은 일단 뚜아이 루마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마을 주민들도 쉽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곳 선교현장은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마을 주민들이 있어도 뚜아이 루마가 적극적으로 반대하면 마을 주민들은 뚜아이 루마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반면 뚜아이 루마가 복음에 호의적이면 그 마을을 향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기도 한다. 영국의 선교에 있어서 집단개종을 일으켰던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이는 한 사회집단의 지도자를 개종시켰을 때에 복음의 파급은 대단한 힘을 갖고 그 사회에 dudgifdur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는 사라왁 자경의 이반족 선교를 위해서 뚜아이 루마가 복음을 받아드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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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21
  • 이반족의 주거 형태인 롱하우스의 기능
    필자는 오늘 제경실의 연구를 바탕으로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지역의 이반족의 주거 형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인류학적 차원에서의 문화탐방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반족은 주로 강가에 집을 짓고 살아간다. 간혹 깊은 정글 산속위에 집을 짓고 사는 이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강이라도 반드시 마을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혈연관계로 견고히 연결된 혈연 공동체로 지붕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긴 집을 짓고 사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주거 형태를 루마 빤자이(Rumah Panjai)라고 부르는데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롱하우스(Long House)가 된다. 이반족에게 있어 롱하우스는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다. 롱하우스는 그들의 삶의 중심이며, 공동체 생활의 근거를 이루는 곳이다. 전통적인 롱하우스의 구조를 살펴보면 롱하우스는 먼저 땅에 기둥을 박고 지상에서부터 2미터 정도 올라간 높이에 집을 짓게 된다. 그리고 지상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통로로는 통나무 사다리를 이용한다. 길이는 각 마을마다 다소 차이가 있을수 있다. 작게는 4-5 가구가 많게는 40가구 이상이 거주하는 롱하우스들도 있다. 롱하우스에는 빌릭(Bilek), 사다우(Sadau), 루아이(Ruai), 딴주(Tanju)라는 공간이 있다. 딴주란 오픈 베란다와 같은 공간으로 보통 그 넓이가 20-25미터 정도 된다. 빨래도 널어놓고 추수한 벼와 후추 등 수확물을 말리기도 하고 고무를 널어놓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공간은 롱하우스 전면에서 가장 바깥쪽에 자리잡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딴주로 올라갈 때는 사다리를 놓는데 이는 적들로부터의 공격과 야생동물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전통적인 롱하우스에는 단지 2개의 사다리가 놓여지는데 현대의 롱하우스에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각 집집마다 현대식 계단을 설치하기도 한다. 이 두 다리는 각각 강의 상류방향과 하류 방향으로 놓여지는 데 상류방향은 롱하우스 정면에 있는 메인 출입구가 되고 하류방향의 다리는 시신이 나가는 통로가 된다. 딴주를 지나 지붕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처음으로 만나는 공간이 “루아이(Ruai)”이다. 이는 지붕이 덮어져 있는 롱하우스 내부의 공동복도이다. 평상시 루아이는 이반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대나무로 돗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마을의 공동 회의가 이루어 지기도 한다. 롱하우스의 결혼식도 루아이에서 진행되고 장례가 났을 때 시신을 멀리 사는 가족 친지들이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시신을 루아이에 눕혀놓기도 한다. 각 가정으로 들어가는 문은 각 1개씩만 루아이와 연결이 되어있다. 즉 이 문은 각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셈이다. 문을 말레이말로는 빈투(Pintu)하고 하는데 빈투를 지나면 가족만의 공간이 시작되고 이것은 영어로 방(room)에 해당하는데 말레이말로는 빌릭(Bilik)이라고 한다. 그래서 롱하우스 규모를 이야기할 때 빈투가 몇 개냐? 혹은 빌릭이 몇 개나 되냐? 고 묻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 롱하우스에 ‘빈투가 10개이다’. 혹은 ‘10개의 빌릭이 있다’는 표현은 그 롱하우스에 10가구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각 가정의 공간을 나타내는 빌릭은 롱하우스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기도하다. 빌릭으로 들어오면 바로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것은 가족들의 거실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거실 뒤쪽에 가족들의 침실이 있고 그 뒤로 부엌과 화장실 등의 공간이 있다. 롱하우스를 방문해 보면 딴주로 시작되는 정면은 일자로 잘 정렬이 된 반면 루아이, 빌릭을 거쳐 화장실이 있는 뒤쪽은 그 규모가 각각 제각각이다. 이는 각 가정의 경제력에 따라 좌우된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은 부엌도 뒤쪽으로 크고 넓게 만들 수 있다. 사다우(Sadau)는 각 빌릭 안쪽에 위치한 다락방 같은 곳이다. 그곳은 루아이의 천장 위에 위치하는 넓은 공간으로 추수한 벼 이삭을 보관하기도 하고 각종 곡류 및 씨앗등의 보관하기도 한다. 또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이반족들의 농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농기구들의 보관창고가 되기도 한다. 보통 롱하우스의 구조를 보면 뚜아이 루마(Tuai Rumah)라고 불리우는 추장의 집이 가장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뚜아이 루마의 집을 중심으로 해서 그 양쪽 옆으로 마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집이 자리하게 된다. 롱하우스를 보면 오픈된 공동체의 공간인 것 같이 보이지만 빌릭으로 부터는 철저히 각각의 가정들의 사생활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오늘 이반족의 주거 형태인 롱하우스의 기능을 살펴보았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4-14
  • 사라왁의 종교와 문화
    우리가 선교를 생각하며 사역을 준비 할 때에 해당 지역의 종교와 문화 연구는 중요한 사역 지침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필자는 제경실의 연구를 근거로 사라왁 지역의 종교와 문화를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필자의 노력이 사라왁 지역을 선교지로 삼고 있는 독자들에게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라왁은 다양한 종족 집단이 함께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의 나름대로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사라왁에 거주하는 종족 집단을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작은 범주로 나누었을 경우는 40개 이상의 종족이 있다고 보지만 대부분 큰 범주 안에서 20여개의 종족이 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중에 가장 많은 수의 인구수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 바로 과거에 바다다약(Sea Dayak)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반족(Iban)이다. 이반이란 말의 뜻은 그들 자신의 언어로는 “Person(사람)”을 의미하지만 꺄얀족(Kayan)의 언어로 “리비안(Livian)”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 의미는 “Wanderer(방랑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반족의 이주습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반족들은 지속적으로 이주해 다녔다. 이반족이 언제부터 사라왁으로 이주해 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반족 이주에 대한 설화를 보면 한 그룹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이주해 왔다고 하고 또 다른 그룹은 캄보디아에서 이주해 왔다고 알려져 있다. 지도자였던 다뚜 아유(Datu Ayu)와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이 북부 보르네오의 머루두만(灣)을 시작으로 남하하면서 빈툴루(Bintulu)까지 이르렀고 다뚜 아유의 아들이 그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지금의 보르네오 서부의 삼바스 지역까지 도달하고 그의 자손들에 의해 삼부스에서 카푸아스로 퍼져나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증거와 자료가 불충분한 낭설일 가능성이 많다.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반족 학자인 산단(Sandan)의 주장인데 다음과 같다. 그는 이반 족의 조상은 중동에서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Sumatera)로 수마트라에서 보르네오섬 깔리만탄(Kalimantan)지역으로 이동해온 자들이 다시 사라왁 지역으로 넘어 와서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주장한다. 까딧(Kadit)도 이반족은 16세기 중반에 인도네시아 까리만탄의 카푸아스(Kapuas)계곡을 따라 사라왁에 들어온 것이 확실시 된다고 주장한다. 카푸아스 계곡을 통해 들어온 이반족들은 사라왁의 제2구역(Second Division)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게 된다. 그들은 카푸아스 계곡을 통해 흩어져 있던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였고 운둡(Undup)강, 바탕아이(Batang Ai)강, 스크랑(Skrang)강, 사리바스(Saribas)강을 끼고 흩어졌다. 그래서 부룩시대 이전에는 강 이름을 떠서 운둡이반, 바탕아이아반, 스크랑이반, 사리바스이반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이반족의 이주는 2세기에 걸쳐 사라왁의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이반족의 이주는 사라왁의 인구분포를 바꿔놓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반족은 사라왁의 주 종족이 되었다. 이반족의 삶은 자연만물 과 초자연적 모든 만물들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삶이다. 이는 그들의 세계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반족은 모든 것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영혼이 있는 인간들은 먼시아(Mensia)라고 말하고 선신(善神, good spirits)은 뻐타라(Petara)이고 악신(惡神, evil spirits)은 안뚜(Antu)이다. 이들은 우주를 몇 개의 차원(Dimension)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지상 세계(earthly dimension), 영들의 세계(dimension of spirits), 신들의 세계(dimension of gods), 그리고는 스바얀(Sebayan)이라고 불리는 사후 세계(After-world)이다. 즉 하늘에는 신령인 뻐다라(Petara)가 살고 이 세상은 인간과 자연계의 동식물들이 사는 곳이며 머노아(Menoa)는 중간세계로 안뚜와 귀신의 메신저인 일곱 새가 사는 곳이며 사후세계인 스바얀은 모든 망자가 가서 사는 곳이라고 믿는다. 데릭 프레만에 의하면 이 일곱 새는 모두 초자연적인 존재들이었는데 육체를 입은 형태로 나타났고 모든 제의에 참석하다고 이반족들이 믿고 있다고 하였다. 이 일곱 새들의 이름은 꺼뚜뽕(Ketupong), 버잠뽕(Bejampong), 버라가이(Beragai), 음부아스(Embuas), 빵카스(Pangkas), 빠빠우(Papau) 와 넌닥(Nendak)이다. 스바얀은 이 세상과 같은 세상이라 믿기에 이반족 장례문화를 보면 망자가 살았을 때 아꼈던 물건들을 스뱌얀에 가서 사용하라고 함께 무덤에 매장하기도 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3-31
  • 영국식민지 시대의 사라왁 선교
    바이너 부룩이 시대인 1941년 12월 16일 베트남을 정복한 일본군이 미리(Miri)을 침략하였다. 미리로부터 두 부대로 나뉘어져 한 부대는 쿠칭을 거쳐 시부를 정복하고 또 다른 부대는 라부안(Labuan)을 거쳐 사바(Sabah)주의 산다칸(Sandakan)을 정복하게 되면서 보르네오의 일본식민지 시대가 열리게 된다. 하지만 바이너 부룩은 일본이 사라왁을 정복하기 이전에 사라왁을 버리고 호주로 도망을 간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1946년 다시 사라왁으로 돌아오지만 더 이상 사라왁을 통치하지 못하고 1946년 7월 1일 사라왁의 지배권은 영국에게 이양한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1941년 제임스 부룩으로부터 시작된 White Rajah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영국의 통치는 사라왁의 재건에 그 초점이 맞추었다. 이 기간은 1946년 에서1963으로 잡는다. 사라왁에 자치 정부를 수립할수 있는 확고한 정치체계를 구축하고 경제적 발전과, 사회,교육 서비스의 향상과 삶의 질의 향상이 그 목표였다. 영국의 식민지 시대는 3단계의 시기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1946년에서 1952년은 전쟁이 종식되고 재건에 초점을 맞추는 시기이며 두 번째 단계는 1953년에서 1958년으로 정치적 안정과 발전의 단계이며 세 번째는 1963년 말레이연방에 합류하기 전단계로 정치적 변화, 정당창설이 창설되하고 일련의 정부의 체계가 구축되는 단계이다. 이러한 정치적 발전을 위협하는 두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는 1946년에서 50년간 지속된 영토 이양반대 운동(anti-cession movement)이다. 이양반대 운동은 영국의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White Rajah 시대가 사라왁을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한 국가로 인도할 것이라는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바이너 부룩은 현지 원주민의 어떤 지지도 없이 독단적으로 사라왁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 귀속을 결정하게 되자 말레이족과 다약족을 비롯한 많은 원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영국에로의 지배권 이양을 반대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공산당의 위협이었다.영국식민지 시기의 기독교 선교 정책은 부룩가가 통치하던 시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BEM은 전쟁이 종식된 이후 림방을 넘어 더 내륙 안쪽으로 뻗어나가 바클라란(Ba Kelalan)과 인도네시아 국경까지 뻗어나가게 되었다. 부룩의 시대에는 뚜렷한 교육정책의 부재로 인해 사라왁의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영국 정부는 확고한 공립 교육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이것이 다문화적 요소가 강한 사라왁의 모든 족속들을 사라왁인으로 묶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또한 밀려드는 공산주의 사상을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도시뿐 아니라 외곽지역에도 초등학교 설립을 장려하였고 그 이전에 지어진 모든 학교들에 대해서도 공립 학교로 전속되어 정부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공립 교육을 체계화 시켜나가면서 영국 정부는 영어로 교육하고 커리쿨럼에 관여하는 조건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을 교사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정부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저변에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차원이 있었다. 공산주의 사상이 확대되어 사라왁이 공산화 되는 것 보다 선교사들이 나서서 영어로 교육하고 서양의 교육 커리큘럼으로 교육하는 것이 영국의 지배권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BEM과 협력하며 공교육 체계를 구축해 나갔고 BEM 소속 선교사들은 교육을 통해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사라왁의 노년층을 보면 자신들의 모국어 외에도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세운 영어 학교에서 공립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후에 정부가 모든 공립학교 교육권을 관리하게 되고 나서 BEM은 성경학교로 그 교육의 무게중심을 옮겨 성경학교를 통한 현지인 사역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또한 BEM 선교는 름바왕족속의 삶을 향상시켰으며 제 4, 5 구역의 구석구석까지 비행기로 넘나들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쿠칭에 있는 국토부의 요청으로 제 4, 5 지역의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BEM은 점점 더 원주민들 사이에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비행기로 깊은 내륙까지 들어가는 것이 안전성의 문제에 봉착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는데 BEM에서 수년간 비행기를 타고 내륙의 깊은 곳까지 복음 전파하러 다니는 것을 본 후 비행 항로의 안전성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BEM이 사라왁의 원주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그 중심에는 허드슨 사우스 웰 선교사가 있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3-24
  • 챨스 바이너 부룩 통치아래의 사라왁 선교
    필자는 계속해서 제경실에 의해서 연구된 사라왁의 선교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1917년 챨스 부룩이 죽자 사라왁의 통치권은 그의 아들인 챨스 바이너 부룩(Charles Vyner Brooke, 1917-1941)에게 이양되었다. 바이너 부룩도 선대에 따라 기독교 선교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는 1917년 5월 24일 즉위식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나는 어떠한 상황에도 무슬림의 신앙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종교나 사람들의 신념에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이러한 그의 선포는 사라왁의 기독교 선교에 있어 엄청난 파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챨스 부룩시대 이루어졌던 기독교선교 지역분할을 훼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챨스 부룩이 어떤 종교나 사람들의 신앙과 신념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이 결국 사라왁내에 어떤 종교집단이라도 자체의 사역과 사업을 어디서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발언을 발판삼아 싱가폴의 제7일 안식일예수재림교는 서둘러 사라왁 선교의 물꼬를 텄다. 이로써 사라왁에 기독교 이단이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싱가폴 SDA는 1918년 사라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점점 교세를 키워 현지 다약족을 향한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한편, 1928년 11월 호주인 선교사 허드슨 사우스웰(Hudson Southwell)이 쿠칭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바이너 부룩에게 선교사역을 허가받고 바로 한번도 선교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제5구역인 림방(Limbang)으로 파견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BEM(Borneo Evangelical Mission)의 보르네오의 첫 사역이 되었다. BEM은 보르네오 선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사라왁의 부흥을 이끌었다. BEM은 멜번 신학교(Melbourne Bible Institute)몇몇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보르네오 선교를 위해 발족했으며 보르네오 최대 현지 교단인 SIB(Sidang Injil Borneo)의 전신으로 볼수 있다. 보르네오섬에 있는 대부분의 현지 원주민 교회는 모두 SIB 교단에 소속이 되어있다. 이렇게 시작된 BEM의 사역은 많은 결실을 맺게 된다. 복음의 힘으로 변화할수 있을까 의심하며 그저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파견된 선교사에 의해 거칠고 게으른 원주민들의 삶이 변화하는 것을 목격한 바이너 부룩은 BEM의 선교사 허드슨 사우스웰의 사역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이러한 선교의 결실을 반신반의했던 바이너 부룩은 1940년 직접 크루산 지역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선교의 결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이너 부룩은 허드슨 사우스 웰과 BEM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림방에 이어 라와스 지역까지 복음의 확산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BEM의 선교적 철학은 정부에 의해 허락된 것에 한하여 모든 선교사업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림방을 넘어 라와스까지의 확장을 허락했을 때 라와스 지역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교육사역을 시작하라 했을 때 학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다른 교단의 교육선교를 보면 대체로 기독교 공립학교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BEM은 신학교 건립에 주력하였다. 그것은 보르네오 구석구석까지 복음의 전파하겠다는 BEM의 신념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바이너의 통치는 실패한 통치라 볼 수 있다. 하지만 1917년 그의 선언으로 인해 영국이 성공회 뿐 아니라 많은 타 교단 선교가 시작될수 있었고, 그의 소심하고 확신없는 성향이 기독교 선교에는 더욱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BEM선교사들의 선교를 허락하고 비록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오지로 그들의 선교지역을 확정하였지만 그것은 사라왁이 현지 복음화에 엄청난 반전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라왁에는 3번의 영적 대부흥이 있었는데 1930년대 룬바왕 족속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는 클라빗(Kelabit)족속, 1980년대에는 다시 룬바왕족속에게 대부흥이 일어났다. 지금까지도 사라왁 현지 목회자들의 종족 분포도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룬바왕이나 클라빗족속에서 나왔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실로 사라왁의 기독교 확산을 이룬 족속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현지 기독교 발전는 이반족을 비롯한 많은 다른 족속들에게도 복음의 영향을 미치는 결과가 되었다고 본다.호주 선교사인 허드슨 사우스웰(Hudson Southwell)은 사라왁지역 선교를 위해서 준비된 사역자이다. 그의 사역은 그곳을 다스리고 있는 챨스 바이너 부룩의 마음까지 감복시키는 선교였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3-17
  • 챨스 존슨 부록 지배아래의 사라왁 선교
    지난 호에서는 제임스 부록의 사라왁 선교를 다루어 보았다. 정치와 선교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비록 사라왁은 영국인에 의해서 지배되었지만 기독교선교는 이러한 정치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발전되어 지기도 한다. 사실 현대선교를 진행하면서 서구의 제삼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는 나름대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사라왁 선교의 역사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챨스 존슨 부룩(Charles Johnson Brooke)은 제임스 부룩의 조카로 1852년 처음으로 룬두(Lundu)지역을 다시리는 통치자로 임명받으면서 제임스 부룩을 도와 사라왁을 다스렸다. 1863년 제임스 부룩은 건강악화로 영국으로 돌아가고 1868년 제임스 부룩이 세상을 떠나면서 챨스 부룩이 공식적으로 사라왁의 왕으로 임명받아 1917년까지 49년동안 사라왁의 제 2대 White Rajah로 통치하게 된다.사라왁의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이양 받던 1968년은 13년이나 지속되는 이반족과의 대립도 1857년 중국인들의 반란도, 그 다음해인 1859년 말레이족의 반란도 모두 제압되고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많은 여려움을 겪는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챨스 부룩의 통치를 세단계로 나누어 보는데 첫 번째는 처음으로 룬두지역을 다스렸다. 1852년부터 공식적인 왕으로 임명되기 전인 1865년까지로 이시기는 헤드헌터(Head Hunter)들을 소탕하는 시기였고 두 번째 단계는 1865년부터 1878년까지 다약족을 이용해 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는 단계였고 세 번째는 1878년에서 1917년까지로 나라를 어지럽혔던 모든 위협들을 종식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취득하고 경제적 성장을 도모하는 단계이다. 결국 제임스 부룩과 챨스 부룩이 사라왁을 통치한던 시기에 지금의 사라왁의 영토까지 확장하게 되었고 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 선교에 대한 그의 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교회와 정부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회가 점점 그 세력이 커짐에 있어 정부에 도전하는 단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정치와 종교를 완전 분리하여 정치는 정치에 종교는 종교에만 몰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무슬림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제임스 부룩과 다르지 않았다. 말레이족에 대한 개종에 대해서는 사라왁 정부가 종교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으며 기독교 선교로부터 말레이족들이 개종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나갔다. 셋째로 챨스 부룩은 말레이족과는 달리 다약족의 개종에는 좀 더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마치 제임스 부룩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을 안정화하는 수단으로 기독교 선교를 이용한 것처럼 다약족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그의 정치적 권한을 더욱 견교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넷째로, 제임스 부룩 시기에는 사라왁의 선교가 성공회 교단에만 허락되어진 반면 챨스 부룩 시대에 이르러서는 선교의 문이 가톨릭과 감리교까지 확장되었다. 이에 챨스 부룩은 각 교단별로 지역을 할당하여 선교지를 배분하였다. 이는 챨스 부룩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사라왁 전역에 기독교가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가톨릭이 사라왁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81년이며 1879년에서 1981년 3년동안 성공회 주교의 공백시기였다. 챨스 부룩은 성공회 주교의 공백이 길어지고 라장강 유역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가톨릭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챨스 부룩 정부는 가톨릭 선교회가 라장강 유역의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성공회교단에게는 사라왁의 제1, 2 구역(First and Second Division), 그리고 가톨릭은 제3구역(Third Division)을 할당하였다. 하지만 가톨릭교단의 본부와 학교는 제 1구역의 쿠칭지역에 설립하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천여명의 기독교인 푸짜오 중국인(Foochow Chinese)들이 라장강을 따라 제 3 구역인 시부지역으로 이주하게 되고 제임스 후버(James Hoover)선교사가 파송을 받아 시부로 들어와 이들을 돌보게 된다. 결국 챨스 부룩은 가 감리교단을 중국인들을 위해 선교를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고 그것을 통해 농업발전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챨스 부룩은 사라왁의 기독교 선교에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무슬림 선교를 지양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제임스 부룩처럼 기독교 선교를 한낱 구제와 교육 사업등 사회사업을 통한 구제로 국한시키며 도전적이며 열정적 복음 전도는 회피했던 반면, 챨스 부룩의 시대에 접어들면서는 여러 기독교 교단의 선교사업이 허용되었고 자칫 주(州)수도인 쿠칭지역에 밀집될 수 있던 선교의 터전을 구역을 할당함으로 인해 사라왁의 내지 지역까지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큰 공헌이 있다고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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