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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카라과에 대한 사랑
    몇일 전 남미 니카라과의 마나과에서 사역하고 있는 제자의 방문을 받았다. 그 분은 필자가 속한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의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전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장시간 회사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모든 일에 절도와 정직이 몸에 배어있는 제자였다. 미국의 유학길로 떠나기 앞서 그 쪽 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해서 필자에게 추천서를 부탁하여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어느날 미국에서의 공부를 마침과 아울러 니카라과 선교의 길을 떠난다고 연락이 왔다. 그 후 15년 나의 연구실에 그분이 나타났다. 그리고 장시간을 통해서 니카라과의 선교현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선교사는 문화와 세계관이 다른 것이 얼마나 선교에 힘이드는 요소인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내기 위해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200여명의 학생을 교육하고 있다고 하였다. 경제와 사회적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단돈 1달러라도 학비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결론은 사랑이 없으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사역이 그곳의 사역임을 이야기해 주었다.선교에 가장 귀한 마음이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을 시작 하면서 모든 은사들도 사랑의 동기에서 활용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절-3절은 사랑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4-7절은 사랑의 특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마지막 8-13절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싶다.첫째는 바울은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1-3)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기독교의 진수는 사랑 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김준곤 목사님은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사랑을 거부할 만큼 사랑에 부요한 자도 없으며, 사랑을 주지 못할 만큼 사랑에 가난한자도 없다”라고 언급하였다. 누구 에게나 사랑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용기와 힘은 부모님의 사랑 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많이 본다. 즉 사랑을 계약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합리성에 의하여 내가 이만큼 하니까 당신은 이 정도를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엄청난 사건을 가져 온다는 말이다.둘째는 사랑의 특성(4-7)이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 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사랑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고전 13:5절에는,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 하며,악한 것을 생갖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어서 6절과 7절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여기에서 우리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에 대해서 주목해 보아야 한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한 3서 3-4절에 이르기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말했다. 셋째는 사랑의 영원성(8-13)이다. 13:8절을 시작 하면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로 시작 하였고,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 이라”라고 끝마무리를 하시고 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나 저세상에서 없어져 버리지 않는 영원한 은사가 사랑 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자랑으로 여겼던 예언도 방언도 폐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떨어지다”의 단어는 나뭇잎이나 껍질이 떨어져 버린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돈과, 권력과, 아름다움과, 심지어 남이 모르는 심오한 영적 은사 마져도 낙엽처럼 떨어져 나뒹굴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www.worldc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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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4-16
  • 참된 안식
    성경에는 우리 인간을 향하여 안식하라는 명령이 분명히 나와 있다. 신명기 5:12-15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안식일의 중요성은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안식하는 것이 축복이 됨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만드시고 7일에 쉬셨습니다. 쉼이 삶의 고정에 필요하다는 교훈이다. 유대교에서 지금도 철저하게 지키는 안식일은 본래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때 까지 이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대신에 주님의 날을 안식하는 날로 지키며 주님을 섬기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안식하는 삶이란 쉽지 않다. 우리 입에는 늘 “피곤하다” “바쁘다”라는 용어를 달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안식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 이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한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이뤄지는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성화의 과정에 필수적인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안식일은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김과 아울러 예배드려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안식일은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피곤을 이기고 근심을 극복하고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교제함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 하게 만든다. 성경 이사야서 58:13-14에 보면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라고 기록되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믿음의 선택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실재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믿음과 신뢰를 택하여 억압과 투쟁적인 세상에서 안식일에 안식함으로써 건강과 안정의 축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안식의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주님과의 더 깊은 관계에 나아가야할 줄 믿는다. 그러나 오늘 필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참된 안식을 생각하고자 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 가서 쉬는 시간이다. 오늘도 선교 현장에서 피곤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선교사님들이 편히 쉴 곳은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임을 인지해 주셨으면 한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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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4-06
  • 폭풍을 다스리신 예수님
    선교사님들의 정신적인 건강과 안녕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중요한 요인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타문화권 선교 현장에서의 다양한 일들로 인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지속되면 마음에 병과 아울러 가족 구성원들은 훼오리 바람의 폭풍을 경험하게 된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을 훈계 하시는 과정 가운데 폭풍을 사용하셨던 예가 있다. 마가복음 4장 35-41을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는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난 광풍을 만나게 된다. 선교사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삶의 여정 가운데 누구든지 광풍이 있다. 비록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만 위태로운 순간들이 존재한다. 삶의 위기가 찾아 올 때에 우리는 매우 당황하기 쉽다.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우리에게 도리어 유익을 주는 결과로 바뀐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과 더욱 가까워 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시 119:71에 의하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는 광풍을 다스리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광풍에 대한 대처는 다양하게 분석해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제자들 대부분이 갈릴리 호수의 어부 출신들이 었다.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은 매우 갈릴리 호수와 바람 그리고 환경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실 예수님은 어부가 아니고 목수 였다. 그러나 예수님 만이 전능의 힘을 통해서 폭풍과 배의 침몰을 다스릴 수 있다. 이는 전능의 힘을 제자들이 알게 하시는 교육의 장을 만들게 되었다. 세번째의 교훈은 믿음을 부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신 분으로 알고는 있었다. 즉 베드로 장모님의 열병을 구하고(막 1:29-31), 나병환자를 고치시고(막 1:40-45),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막 2:1-12), 손 마른 자들을 고치심을(막 3:1-6) 목도하였다. 그러한 기적을 보면서도 막상 광풍이 불어서 죽음에 있게 되자 믿음을 잃어 버렸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막상 위기가 닥치면 제자들처럼 우왕좌왕 알 때가 많다. 서두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삶의 과정 가운데 누구든지 폭풍을 만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우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지 않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심과 아울러 관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강하게 믿는 믿음이다. 사실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참된 안식을 구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된 안식의 품이 된다.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을 때에 모든 상황을 뛰어 넘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된다. 오늘도 선교 현장에서는 타종교와의 영적 싸움 속에서 오는 폭풍, 문화 극복에서 오는 폭풍,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 오는 폭풍, 자녀 교육에서 오는 폭풍 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전 세계가 경험하는 테러ㅗ의 공포 같은 폭풍도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가까이 와 있다. 우리 모두는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의 능력 앞에 더욱 기대는 신앙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3-25
  • 도시선교의 미래
    이제 세계는 점점 도시화 되어간다. 따라서 인구의 집중과 함께 다양한 문제들이 또한 도시에서 발생된다. 즉, 슬럼화의 문제, 인구집중의 문제, 교통문제, 공해문제 등에서 오는 정신적인 방황과 함께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로 말미암아 선교의 영역은 너무나 넓어진다. 따라서 21세기의 선교 과제는 엄격히 말해서 도시 선교의 성패에 따라서 교회의 활로가 측정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이제 몇 가지 도시선교의 전략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첫째는 도시의 빈민구제 사역을 제언한다. 빈민촌은 도시나 도시의 외곽지역에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삶을 정착하는 곳이다. 빈민촌의 주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불완전한 고용의 문제가 가장 큰 요인이 된다. 영적으로는 자존감의 상실로 말미암아 이웃과 정상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사단은 환경적으로 유혹을 하고 있다. 절도와 도박 그리고 술집과 같은 환경은 절망을 더욱 깊게 만들어 버린다. 빈민촌에 존재하는 악들을 이기는 길은 예수님의 전도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가난한자는 마음에 겸손함을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의 요건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가난은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다. 교회는 세계적인 하위문화가 보편적으로 복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도시 빈민들, 도시 이주자들을 위한 특별한 선교 전략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개방적이면서도, 폐쇄적인 도시민들을 복음 화할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전략도 지녀야 한다. 둘째는 도시 노숙자들을 위한 밥퍼 사역을 제언한다. 산업 사회의 피해 가운데 하나는 직장을 잃고, 삶의 터인 가정마저 파산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을 거리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도시의 노숙자들은 사회문제에 있어서 국가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숙자의 양산은 사회와 교회가 도덕적으로 가장 민감성을 지닌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교회가 이들을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어디에서도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셋째는 가출 청소년 사역을 제언한다. 가출은 가정의 위기로 말미암아 형성된 결과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불화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가출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무작정 가출한 청소년들은 유해 환경에 노출되어 천길 구렁으로 떨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의 가출은 정상적인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특히 소녀들의 경우에는 매춘과 같은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남학생의 경우에도 범죄 소굴의 유혹 속에 쉽게 떨어져서 사회악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바뀌어 질 수 있다. 가정에서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반사회적인 생각들을 가짐으로 살인과 강도 그리고 타인의 것을 탈취하여 교도소에 갇히기도 한다. 교회는 위기 속의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고 선교적 대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역 주변을 중심으로 청소년 쉼터 같은 것을 운영하면서 상담과 치유 그리고 교육 등을 통하여 그들의 앞길을 선도하는 사역이 전게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는 물물 교환 은행의 설립과 나눔을 제언한다. 다양한 사역 가운데에서 도시에서의 사역 가운데 하나는 물물 교환은행의 설립을 통한 나눔의 사역이 중요하다고 본다. 물물 교환이란 자신이 사용했던 물건이나 옷가지들을 교회에 기부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만드는 제도이다. 사회적으로는 “아름다운 가게” 같은 운동이 실시되고 있으며, 기독교를 중심으로 “아나바다”운동 같은 예들이 좋은 선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이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용되어야 하겠다. 필자는 오늘 교회의 도시선교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도시화는 급속도로 되어져 가고 있다. 특히 21세기의 세계는 대부분 도시화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급속한 도시화는 스럼화의 문제, 인구집중의 문제, 교통문제, 공해문제가 도래한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선교의 사명임을 제언하였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3-17
  • 선교지에서의 기도요청
    선교지에서의 기도 요청은 항상 응급한 경우가 많다. 오늘의 기도 제목도 그렇다. 필자의 동료 미국인 교수였던 세섬 가족이 보내온 기도 제목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러한 사연들 가운데 세섬 선교사가 겪고 있는 건강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왜냐 하면 전립선 암을 이번에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섬 선교사님과 필자는 한세대학에서 동료 교수로 만났다. 처음 우리학교에 왔을 때에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에 이 분이 목사님이시면서 선교에 열정을 가지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교과목에 대한 권한으로 선교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배려 해 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 더 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세섬 교수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신지 몇 년이 지나 네팔로 선교사역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충성 스럽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켜 나가고 있다. 한 달 전의 편지에 의하면 생명샘 바이블 트레이닝 센터에는 현재 남학생 28명과 여학생 22명이 새 학기를 시작하여 잘 진행 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진으로 지난 6개월 동안 닫혀 있던 국경도 열리면서 기름도 들어오고, 봉쇄 되었던 국도도 열리면서 인도와의 왕래도 좀 더 원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역 가운데 진행된 문맹인 프로그램도 23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두 군데에서 네팔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글자를 읽어 보거나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이란다. 이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신 후원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이러한 긍정적 소식과 아울러 긴급 기도제목을 올렸다. 세섬 선교사는 지난 몇 년간 전립선염으로 조용히 통증을 참아오고 있었는데 최근 점점 심해져서 커피와 차, 청량음료도 마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몇 년 전 한국과 미국의 두 의사 에게 상의해 보았지만 크게 염려해야할 상태는 아니라고 하여 지어준 항생제만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한국에 오는 길에 검사를 받게 되었다. 뜻 밖에도 피검사와 초음파 그리고 조직 검사를 통해 전립선암 초기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다행으로 의사 선생님의 의견은 아직 전립선 제거 수술 보다는 6개월 마다 한번씩 재검진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상황을 지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였단다. 선교사님의 형편은 2014년 11월 한세대를 퇴직하여 건강보험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이러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전립선 검사를 받는 동안에도 세섬 선교사는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찬 간증을 보내왔다. 조직검사를 위해 삼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5인 병실 속에서 55세의 한 남성분이 저의 침대 바로 앞에 간암 말기로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환자의 아내는 그리스도인이었고 병든 남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병든 남편을 돌보느라 지쳐있었으며, 그녀의 믿음도 바닥이 나 하나님을 원망하며 혼돈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내 연희는 그 재매를 위해 위로와 격려의 기도로 도와준 후,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자매의 남편께 기도와 복음을 나눌수 있겠느냐 물어봤더니 쾌히 승낙하였단다. 우린 그 자매의 남편과 함께 네팔과 우리 삶을 간단하게 나눈 후 그분의 피로에 지친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로마서 10장 8-10절을 나누었단다. 나눈 후 그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주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고개 숙여 절하면서 승낙했다. 이후에 주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고백함으로 새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이었다. 아내와 그 자매는 더 친교를 위해 병실 밖으로 나갔고 우리 둘은 각자 침대에서 쉬고 있는데 얼마 되지않아 누군가 침대에서 요동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나 얼른 일어나 봤더니, 앞에 누워있던 그 형제분이 화장실에 가려다가 떨어진 거였다.그분은 삼일 밤낯 동안 소변과 대변을 보지 못해 의사와 간호사 모두가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린후 기도 받고 몇분 되지 않아 막혔던 것들이 다 풀어졌단다. 우리와 함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었다. 떠나는 그 두 분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자비의 하나님을 경배했단다. 이어서 세섬 선교사님의 기도요청은 “지난 오년 반동안 우리 가족을 네팔로 보내셔 함께 해주심을 감사드리며, 주님의 온전한 치유의 기적이 나에게도 부어주시길 함께 기도 부탁드립니다.”였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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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3-11
  • 선교사의 아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군사가 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메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라고 했다. 이는 선교사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대비해서 필자는 오늘 선교사의 아내라는 주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선교를 수행 하는데 있어서 부부간의 팀웍이나 커뮤니케이션은 너무나 중요한 사항이다. 특히 선교사의 아내들은 항상 정상적인 가정의 패턴을 꿈꾸며 살고 있다. 그러나 사역지의 다양한 상황들이 부부간의 정상적인 삶의 패턴을 빼앗아 가버릴 때가 많다. 이럴 경우 아내는 심한 우울증이나 탈진과 같은 신체적 질병까지도 얻어서 불행스러운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이럴 경우 힘든 과정을 잘 이겨나갈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문제를 안고 생활할 경우에는 더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최근에 선교사의 아내로서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임현수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있는 글을 올려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잔잔히 울리고 있다. 북한의 감옥에서 고생하실 남편의 안위를 생각할 때에 한없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질 만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당당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 군사의 아내로서 우리에게 귀감을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사모님께서 임 목사님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카나다 토론토의 큰 빛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울고 싶고, 무어라 표현이 잘 안되네요.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토론토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복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세계 교인들이, 아니 안 믿는 사람들 조차도 임현수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 감사합니다. 한국 교회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지게 되자 저는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내가 아파하고 힘들어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억류되면서 많은 생각이 저를 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지금은 너무 감사하다는 마음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요.교인들이 함께 모여 중보기도 한다는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목사님이 억류되고 일주일 되던 어느 새벽에 주님이 확실하게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너의 남편 북한에 보냈어. 염려 하지마라. 내가 함께 하고 있단다” 라고. 전 그 말씀에 너무 감사해서 펑펑 소리내어 얼마동안 울었습니다. 그 후 위로부터 사람이 형용할 수없는 감사한 마음을 마구 내려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걱정없이 염려없이 감사하며 만나는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무 정확하시고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신실하십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저희 가정에 이런 사건이 생기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정확한 시간에 억류하셨다는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지금 남북한의 상황을 보면 정말 겁이 날 정도로 어수선합니다. 그러나 그 땅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어느 누군가의 밀알이 있어야하는데 그 사람이 목사님이라는 생각에 저는 또 한번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손해 보실 분이 아니시니...그 땅의 영혼은 누가 책임지겠습니까.목사님 종신 노역형 이라는 죄명을 받았을 때 저는 주님 또 살려주셨네요. 분명 사명이 있겠다고 혼자서 감사기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 날 함께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펑펑 울었습니다. 주님이 좋아 하는걸 우리 교회가 하고 있다는 것이 감사해서 우리 교회가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우리 한번 사는 인생. 주님 나라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하고, 목숨 걸고 전도하고, 목숨 걸고 사랑하는 큰빛교회가 되길 그리고 마음껏 축복해드리고 싶습니다.목사님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해 주십시오. 어둠의 땅이지만 빛의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만 바라보고 감사하는 시간 갖도록, 아버지의 마음 더 많이 주시도록,”당당히 선교사 아내의 길을 가신 사모님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것을 믿는다. 이제 우리 모두는 사모님에게 힘찬 응원을 보내야할 시간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2-25
  • 목사가 사람을 죽여!
    최근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이 있었다. 세계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독일의 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유명한 신학대학의 외래교수로 활동 중인 목사님이 자신의 막내딸을 매질하여 죽자 14개월째 납골 상태로 방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목사가 사람을 죽였다고 언론이 극단적으로 보도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에게 심한 고통을 준 자녀 살인사건의 내막을 포털의 기사를 인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살 소녀’ 부천 여중생의 사망 원인은 결국 현직 목사인 아버지의 폭행으로 드러났다.지난 3일 경기도 부천소사경찰서는 자신의 딸(사망 당시 14살)을 폭행해 살해한 혐의(살인 및 폭행)로 이 모(47)씨를 긴급체포했다. 계모인 백 모(40)씨 또한 폭행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다. 목사인 아버지가 중학생 막내딸을 사망 당일 5시간 동안 빗자루 등으로 무차별 폭행했으며, 결국 사망 이후 딸의 시신을 11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 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또 이런 무차별 폭행에는 이양의 계모 또한 가담했으며, 이씨 부부는 딸의 사망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 가출신고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버지 이씨는 국내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서 신약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모 신학대학교의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고등학생인 첫째 아들 등 1남 2녀를 슬하에 두고 있다.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염화칼슘으로 보이는 흰색 가루를 비롯해 방향제, 향초, 습기 제거제 등에 대해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딸에게 훈계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었다. 이불로 덮어놨는데 냄새가 나 방향제를 뿌려두고 주검을 집에 두었다”고 진술했다. 이어 이씨는 “기도를 하면 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딸 주검 주변에서 초를 켜고 기도를 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의 신앙 현실을 직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문제의 발단은 사모님과 사별 한 이후에 재혼으로 말미암은 자녀들의 문제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재혼 이후로 함께 해야 할 자녀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생활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룬 사모님의 책임을 추궁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한 것은 재혼을 통해서 발생하는 자녀 케어 문제들에 대해서 부부는 충분한 대책속에서 대화를 했어야 했다. 둘째는 적절한 신분 보장의 문제를 들 수 있겠다. 독일에서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귀국 하였을 때에는 걸 맞는 자리가 보장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대 심리가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짐을 통해서 좌절과 절망의 마음이 깊게 자리잡아 풀 곳을 찾던 중에 대상이 자녀였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이는 한국의 교육계의 현실 속에 느낄 수 있는 지성인의 자화상일 수 있다. 셋째는 신비적 신앙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본인의 말대로 “기도를 통해서 부활을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죽음자의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바로 인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 신비가 보편적 사건으로 격하 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인 조일래 목사는 “오늘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향해 꾸짖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번 참극은 우리 모두의 감춰진 맨얼굴 중 그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미 드러난 일보다 숨겨지고 감추어진 더 크고 끔찍한 죄악에 대해서도 언젠가 밝히 드러내 꾸짖으시고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 사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한국교회는 더 깊은 나락에 떨어져 사회로부터 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려져 밟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이 사건을 접한 날부터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까지 필자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두고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 앞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셨다. 누가 누구를 정죄 하겠는가? 인간이 가진 한계점을 다시 한번 드러내 주는 사건이라 본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은 지울 수 없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2-19
  • 교회의 성장 기능은 연합
    2016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성장 기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교회는 성장하는 기능이 있다. 사도행전 6:7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수적 성장 혹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셨다. 예수님은 3명의 수제자, 12명의 측근 제자그룹, 70여명의 제자, 50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곳 저곳(막 1:38)에서 전도 하셨다. 그리고 수 천명 앞에서 설교하시며 전도하셨다. 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온 땅에 복음을 증거 하여 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최근에 서울의 양재동 부근에 교회를 이전 개척한 제자가 있다. 그 목사님의 계획은 매원 10가정을 전도하여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목표로 뛰고 있다. 벌써 두달 만에 10가정을 전도하여 함께 예배드린다고 하였다. 자신의 전도 경험을 말하면서 열심히 뛰어 다니다 보니까 전도가 쉬워 졌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는 전도가 안된다고 주저앉아 있는 교회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통해서 신앙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다양한 상황들을 유추해 보았을 때에 오늘날 보다 더욱 더 전도와 신앙생활이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도행전 2:47절에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교회의 본질은 부흥의 역사위에 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 이다. 다만 교회가 병들지 않고 정상적인 기능만 발휘해 준다면 시간에 따라서 성장토록 되어 있는 것이 교회의 기능 이다.그런데 교회의 기능이 죽지 않게 만드는 데는 몇 가지의 중요한 방법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2:46절에 보았더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 하며,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다. 교회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연합된 힘이 필요하다. 즉 교회성장을 위한 연합의 기능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며, 성장은 연합 속에서 만이 이룩될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결국 연합이란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들이 총동원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짐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연합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 시켰던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고전 1:23-24을 보면 “전도하는 성도들”의 모습, 행 2:42 “가르치고 배우는 성도들”, 롬 12:5 “섬김는 성도들”, 행 2:46-47 “찬양을 통한 성도들의 부흥”, 행 2:46 “교제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는 연합된 힘을 가질 수 있었다.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달란트를 주님을 위해서 연합된 힘으로 모아져야 하겠습니다. 즉 사업가, 의사, 예술가, 교수, 이러한 직업등의 어느 직분을 가지셨든지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하겠다는 것이 연합의 마음이다. 사실 연합이 되지 못한 교회는 결국 성장할 수 없다(12:6-8)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다. 잘나가는 집과, 잘나가지 못한 집은 연합의 차이 이다. 잘되는 집의 형제들은 “형님 먼저, 아우먼저”이지만, 못된 집의 형제들은 “왜 내 떡을 네가 먹느냐”고 싸우는 경우다.얼마 안 있으면 국가적으로는 총선이 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다양한 당이 나와서 자신의 정견을 국민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국민들을 호도하여 판단력을 흐리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기독교 내에서도 교단 총회가 각 교단별로 많이 예정되어 있다. 선거 때에는 다양한 목소리들로 말미암아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리곤 한다. 전도하기 어려울 때일수록 연합된 힘을 가지고 선교에 힘써주는 한국교회가 될 것을 기대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2-04
  • 천륜(天倫)과 종교
    기독교는 부모 공경에 대해서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십계명 가운데 제 5계명을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기록되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라고 권면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부모와 자신과의 관계를 세속적인 단어로는 천륜이라고 볼 수 있다. 천륜의 사전적 의미는 “부모와 자식 간에 하늘의 인연으로 정하여져 있는 사회적, 혈연적 관계”라고 나와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천륜지간 이라는 글을 검색했더니 다음과 같은 글이 나왔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지간[天倫之間]입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귀한 인연[人緣]이지요. 이것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절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순 없습니다. 가버린 세월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가 버리면 되돌아 오지 않는것이 세월이요. 떠나시면 모시고자 해도 따를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나무는 고요하고 싶어도 바람이 그치질 아니하고 부모님을 모시려 하나 세월이 기다려 주지를 않습니다. 살아 생전 부모님을 잘 섬김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천륜지간[天倫之間]의 도리입니다. 이 글을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논어(論語)가 생각나서 기슬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016년을 희망찬 날들로 채우기를 원하는 나에게 무겁게만 들려오는 소식들로 가득차 있다. 참으로 암담한 사실은 ‘천륜 짓밟은 냉혈한’ IS대원, 탈출 설득 어머니 공개처형, 이라는 소식이다. 인터넷 기사에 의하면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20대 대원이 탈출하자고 설득하는 어머니를 공개 처형했다고 BBC방송과 AP통신 등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에 따르면 IS 대원인 알리 사크르(21)는 지난 7일 IS가 점령한 시리아 락까에서 어머니 레나 알-카셈(45)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공개 처형은 카셈이 일하는 우체국 건물 인근에서 이뤄졌다. SOHR는 카셈이 아들에게 IS 조직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떠나자고 설득했기 때문에 공개 처형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미군 주도 연합군의 공습이 IS를 쓸어버릴 수 있다면서 아들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은 어머니 말을 IS에 그대로 전했고 IS는 공개 처형을 명령했다. 다른 인권단체인 ‘락까는 조용히 학살당하고 있다’(RBSS)도 어머니의 공개 처형 소식을 전하면서 처형 이유를 ‘배교’라고 설명했다. IS는 동성애, 배교 등을 이유로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최근 들어 IS의 근거지 락까에 대한 연합군은 공습이 심해지자 탈출 의지 등을 꺾기 위한 IS의 공개 처형 사례도 늘고 있다. 한 젊은 여성은 IS 점령 아래서의 도시 생활을 담은 글을 썼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았다. SOHR는 IS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2014년 이후 동성애와 배교 등으로 살해된 사람이 2천 명이 넘는다고 전했다.보도에 의하면 자식의 안위가 걱정이 된 어머니가 IS조직을 떠나서 안전지대로 탈출하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는 자식을 낳아서 성장시킨 어머니의 당연한 자식사랑이다. 성경은 자식사랑에 대해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ㅈ불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면서 부자간의 관계를 언급하셨다. 어머니를 공개 처형장으로 내몰아 버린 자식은 종교적 맹신에 의해서 천륜을 내 팽개쳤다.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인간 교육 중에서 최고의 경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어머니를 총알 바지로 만드는 종교를 좋은 종교라고 볼 수 있는가.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기를 바란다.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를 반면교사 (反面敎師)로 삼아야 하겠다. 오늘도 우리는 신앙심을 이유로 가정과 자녀를 팽개침과 아울러 책임을 회피하고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1-21
  • 선교역전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동안에는 서구에서 제 3세계로 향하는 것이 대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역전이라는 어휘가 왠지 새롭지 않다. 필자는 오늘 Allan L. Effa, 박사에 의해서 쓰여진 논문 “세계 기독교속에서 나이지리아의 요소”가운데에서 발췌된 글을 소개함하고자 한다. 이 글의 하반부에는 “선교 역전: 나이지리아인에 의해 시작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교회들”이라고 쓰여져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선교 운동의 주류는 남에서 북으로, 가난한 세계에서 부자 세계로, 변두리에서 힘의 중심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고 있다. 복음은 이민의 막대한 물결에 기인하여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다. 비구조화된 방법 안에서, 그리고 선교의 본부의 통제 밖에서 많은 시간동안 그것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복음은 가장 기대되지 않는 곳에 도달한다. 그 곳이 어디든지 성령이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감동시키신다.한 번에 많은 선교사를 보낸 땅에 있는 나라들에 거주했던 서아프리카 크리스천들은 이민을 통하여 오늘에는 영국 땅에 수 없이 많이 거주하면서 신앙 생할을 하고 있다. 비록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주로 경제적 이유로 유럽에 왔을지라도, 서방의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가져가기 위한 선교의 열정적 감각이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나라들로부터 온 많은 나라들이 오늘날 영국에서 섬기는 50개국으로부터 온 약 1,500명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크리스천들은 주류에서 영적 집과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복음주의 교회를 발견하는 반면, 최근 몇 년 동안 다수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시작된 교회가 생겨나고 있다. 이 교회들은 두 개의 폭넓은 부문 속에 포함되어있다.첫 번째 부문은 아프리카에서 비롯된 교회의 유럽 또는 북아메리카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의 부분은, 영국의 경우에서 특히, 1960년대만큼의 이른 시기로 소급된다. 이것들의 예는 Aladura 교회, 더 깊은 삶, 하나님의 구속된 크리스천 교회 (모든 교회는 기원에 나이지리아인이 있다.) 그리고 오순절 가나 교회이다. 이것들 중 몇몇은 함께 모인 이민자의 작은 그룹에 의해 발견되었고 결국 모임으로 조직화되거나 다른 경우, 계획된 선교 아웃리치 노력들을 통해서, 나이지리아나 가나의 국외로 추방된 사람들 중에서 일하기 위하여 교회 심기 목사들의 파송을 포함한다. 두 번째 부문은 유럽에서 시작된 교회들을 포함한다. 이 교회들 중 몇몇은 이어서 아프리카와 세계의 다른 부분에서 분파를 설립했다.이 두 형태의 교회들은 유럽 기독교의 지형을 바꾸기 위해 돕고, 성장하는 세계적 선교의 힘이다. 우리는 이미 영국의 교회 출석률이 주로 이민 요소 때문에 감소를 멈췄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것은 주로 “흑인이 대다수인 교회들”의 생명력 때문이다. 크리스천 연구의 Peter Brierly는 런던 안에 교회 출석의 51%가 흑인과 소수민족으로 구성된다고 평가했다. Gerrie ter Haar는 1997년에 가나인들에 의해 알려진 그들의 대부분인 약 40개의 아프리카인에 의해 시작된 교회들은 암스테르담에 존재한다고 보고했다. 교회의 첫 번째 부문의 예로써, 간단히 하나님의 구속된 크리스천 교회(RCCG)를 고찰하도록 하자. 그 구속된 교회는 무교육자지만 능력있는 설교자, Josiah Akindayomi의 목회에 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RCCG가 되는 것을 시작하기 위해 Cherubim과 Seraphin 교회를 남겼다. 강력한 선교 명령은 교회를 바로 사작하도록 교회를 특징지운다. 1981년까지는 그렇지 않았지만 Enoch Adeboys가 교회의 리더십을 취할 때 그 운동은 수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RCCG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독교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나이지리아 자체 안에서 적어도 4,000개의 RCCG 교구와 5백만 가량의 지지자가 있었다. Lagos의 동북쪽으로 45킬로미터에서 있었던, ”구원 캠프“에서 특별한 모임은 한 번에 일백만 명 정도의 많은 사람들을 끌었다. 그들의 컨퍼런스 장소는 쉽게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 교회의 목회는 대학교, 영화 스튜디오, 위성 텔레비전, 그리고 Wi-Fi 인터넷 공급자를 포함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검은 대륙의 땅이라고 지칭하는 아프리카인들이 현대선교의 아버지를 배출한 영국의 기독교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따라서 이를 선교역전이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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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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