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2(목)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관계의 중요성’(요 1:12-13)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삶은 곧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삶이 형성되기에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관계의 본질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관계가 행복과 성공과 영원을 결정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이웃과도 소통과 공감에 의한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관계가 바르지 않으면 사랑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가 잘 맺어 질 때 수평적 관계도 열리기 때문입니다. 늘 성실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어 나아가면(고후 7:1 ; 요일 1:6) 사람 관계도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묘사했음(시 23편). 그는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운명의 선장이 되려는 현대인들의 사상은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고 이기적인 신앙의 비극을 택하게 한 결과를 빚어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바라보며 실망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신뢰할 수 없으리만치 변화무쌍하여 예측할 수 상황에서도 온 땅을 다스리시며 스스로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줄 모릅니다. 맞닿을 수없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자신의 인생과 관계있는 분으로 삼으며 실제로 하나님과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게 만드는 위대한 힘의 근원은 오직 믿음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일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오 생명과 축복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성패의 최대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수 1:5).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신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나가면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묵상과 간절한 기도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현세와 내세에서의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항상 부족해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물질을, 자녀를, 환경을, 그 어떤 문제를 더 크게 보거나 귀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믿음을 흔들기 위하여 쉬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세상의 파도와 믿음의 시련과 결핍 앞에서 자신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고 나아갈 때 성공된 인생을 사는 첫걸음이 시작되고 풍성함을 맛보며 힘과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6-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50:25). 며칠 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귀한 믿음을 남기시고 가셨다네” 이 말이 저에게는 퍽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들어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요셉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요셉은 큰 권력과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이나, 땅이나, 재물에 대하여 자손들에게 말하는 대신에 가나안 땅으로 그의 해골을 가져갈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체를 귀중히 여겨서 한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은 잠시 머무를 곳이며, 그들이 반드시 가야할 곳은 가나안 땅이다.”라는 점이었습니다. 430년 후 실제로 모세는 출애굽 당시 요셉의 시체를 취하였습니다(출13:19). 그리고 40년 동안 운구하면서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습니다(수24:32). 요셉이 형님들에게 팔려 나갔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신앙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3년 후, 그는 신앙 외에도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자녀들에게 상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겠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매우 잘 경외한 왕이었습니다(대하17:6). 그러나 그가 자녀를 신앙으로 잘 양육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 여호람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이세벨을 모친으로, 아합을 부친으로 둔 아달랴를 택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여호사밧 왕의 손자 아하시야왕이 예후에 의하여 죽자 아달랴는 왕의 씨를 거의 전멸하다시피 합니다(왕하11:1). 여호사밧왕은 여호람 외에도 생전에 여섯명의 아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 지혜롭게 하여 장자인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금은 보화와 유다의 성읍들을 많이 물려주어 그들사이에 다툼이 없도록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왕인 여호람이 동생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는 동생들이 차지한 성읍들과 금은보화가 탐이났던 모양입니다. 여호사밧이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지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못한 결과입니다(대하21:1~4). 자녀들에게 무엇을 상속하시려고 애쓰십니까? 집입니까?직업입니까? 금은 보화입니까? 하나님 경외하기를 심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마6:33).
    • 칼럼
    • WAIC 칼럼
    2024-06-1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가 분명하십니까’(빌 3:12-14)
    이 세상은 막연한 삶이 아닌 목표 중심적 삶을 요구합니다. 목표를 확실하게 정하고 실행해가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큰 성공과 승리가 안겨지게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목표로 삼으나 믿는 우리는 세상 사람과 목표가 다릅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4)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나의 목적과 목표를 일치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마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고, 고전 10:31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승리를 꿈꾸는 사람이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승리를 이미 포기한 것이겠지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곳에 해결책도 있다는 말로도 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간에 수없는 뜻을 정해 보았고 시행착오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하려면 신앙생활의 목표가 명확해야 하며, 목표가 세워지면 즉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앙은 ‘차차 나중에 하겠다’하면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저하고 방황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인생입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뜻을 정했다면 철저하게 지금 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선한 뜻에는 은혜가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필요를 따라 물질도 사람들도 붙여주십니다. 모세는 가나안이라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늘 비판하고 반대하고 원망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없는 배는 방향을 설정할 수 없고, 이러한 배는 이리저리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인데 만일 천성이란 이 목표가 희미하거나 확정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 물결로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생활 뿐 아니라 우리들의 육신의 생활에도 이 진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목표가 분명치 못한 사람은 평생 성공하기 어렵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나 목표가 확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상실하면 그 때부터 방황하며 전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집니까? 목표가 없거나 목표가 있어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 손을 놓치지 마시고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면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미래를 바라보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소망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갔듯이 우리도 이 적극적인 신앙, 좇아가는 신앙을 본받기 바랍니다. 뒤에 있는 것 중에 오늘 푯대를 향해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모두 잊어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표를 세워나가는 사람은 목표 설정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즉각적인 실행에 옮기는 순종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목표를 이룬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있음을 기억합시다(딤후 4:7-8).
    • 칼럼
    • WAIC 칼럼
    2024-06-1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1-5) 가인이라는 말은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최초의 여인일 뿐 아니라 최초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새 아이가 탄생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더군다나 자기의 실수로 인하여 아담과 자기의 영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게 되었고, 에덴 낙원까지 잃게 되어 소망 없이 살았었는데 아들을 낳았느니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낙원을 가인으로 말미암아 회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는 많이 공부를 못했기에 아들 대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시켜 대리만족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정 이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넘어지면 다칠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온갖 정성을 다 쏟았을 것입니다. 행여 풀 밭에 가면 뱀이 나타나 그를 유혹할까 봐 보는 즉시 잡아 죽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들의 기대와 점점 멀어졌습니다. 기만 살아서 한마디 충고도 듣지 못했으며, 자신의 뜻대로 무슨 일이 되지 않으면 성질을 내며 갈수록 난폭해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제는 기쁨보다 가인에 대한 트라우마같은 것이 생겨서 자녀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아벨’ 곧 허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면 실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소망을 갖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으며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십니다(시105:16). 돈을 의뢰하면 돈이 궁핍하게 됩니다. 자식을 의뢰하면 자식이 기대에 어긋나게 됩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자신의 지혜에 속게 됩니다. 이처럼 창조주 외에 그 어느 것도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며 주님을 의뢰하는 생활이 아니면 모두 빈 껍데기이며 허무한 것뿐입니다. 한 배에서 나온 자녀라도 성격이 다르고 소질도 다릅니다. 가인은 농사를 잘하여 농사짓는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을 잘 쳐서 양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은사는 가인과 아벨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은사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속죄하는 제사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는 아벨의 양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인이 농사한 밀, 보리, 수수, 조, 참깨, 들깨 등과 같은 곡식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동생이었기에 필요하면 가인에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은 속죄를 위한 양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최고로 알았기 때문에 아벨의 것을 애써 부인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제도 동생 아벨의 동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가 기른 곡식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드릴 때조차 자신의 곡식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히9:22). 오늘날 신앙인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점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입니다. 내가 형제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형제보다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겸손하게 형제를 찾아 자문을 구하거나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자리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시133).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낼 뿐 아니라 사랑도 기꺼히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6-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값진 인생’(엡 5:15-16)
    사람은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그 시간은 시 90:10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칠십 혹은 강건하면 팔십의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천년만 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실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생의 시간이란 한정적이고 짧습니다. 이처럼 짧은 인생의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니 이 귀한 시간들을 우리의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시간은 생명이며 보화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이만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를 지혜롭게 생각하여 주어진 시간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15-16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정신없이 살다보면 시간을 낭비하고 헛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게으름 역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데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획 있게 쓰지 않으면 분명 후회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시간을 사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삶에서 우선순위가 세워지지 않으면 삶을 닥치는 대로 살게 됩니다. 시간을 관리하지 않으면 시간에 떠밀려서 살게 되며, 시간을 헛되고 무의미하게 사용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시간을 써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도록,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를 지으셨는데(사 43:7, 21), 우리가 ‘하루의 얼마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 시간은 우리의 인생을 반드시 바뀌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주시고 새 옷을 입혀주실 뿐 아니라 은혜가 채워지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산다고 똑 같은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유익한 것입니다. 내 멋대로 산 시간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서 늘 그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은 본래 뜻은 “시간을 사다”입니다. 시간을 산다면 얼마나 아끼며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신속히 날아가는 인생의 세월을 아끼지 않으면 그 값진 시간이 그냥 흘러가 버리고 의미 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합니다. 잃은 돈은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지나버린 시간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위대한 일을 이룹니다. 점이 모여 선이 되듯이 하루하루가 모여 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입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 받는 것도 바로 지금입니다(고후 6:2). 매 순간의 삶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생명 같은 시간이 낭비되어는 안 됩니다. 인생이 너무 나 짧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시간은 현재입니다. 현재를 일어버린 사람은 미래도 다 잃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며, 시간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십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5-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붙드심’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3,24) 20년도 넘는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A 자매에게 이웃집에 사는 분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일 년 안에 돌려받겠다는 조건으로 천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은행 이자보다 싼 이자였습니다. 자신도 힘들지만 평소 싹싹하고 친절한 사람이기에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은 몇 달 동안은 꼭꼭 이자를 보내주더니 어느 날 밤 이사 간다는 말도 없이 그 지역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이사한 지역을 찾아보았지만 주민등록마저 말소됐는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신뢰했던 사람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A자매는 며칠 동안 앓아누웠습니다. 침대에서 분을 삭이고 있는데 문득 내면에서 “돈을 뜯긴 너 보다 못 갚고 달아난 그가 더 불쌍하지 않느냐?”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불쌍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이웃이야, 나는 빌려줄 돈이라도 있었지만 그는 갚을 돈마저 없었던 사람이지. 하나님, 그 분의 형편이 풀리게 하시고 영육 간에 은혜를 내려주세요.'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후에 그 돈에 대하여 빌려 간 사람이 직접 들고 찾아오면 받을지언정 자신이 애써 수소문하고 고소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 작정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어찌나 가볍고 기뻤는지 '성령의 위로가 바로 이런 것이 구나.'라고 그 자매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다 5 년도 넘게 지난 어느 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전철 안 맞은편에서 수심 깊은 표정으로 옆 사람과 대화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A 자매의 돈을 빌려갔던 이웃이었습니다. 정면이 아니었기에 그 쪽에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보통 마음으로는 그녀 앞에 가서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 끌어내리고 싶었을 텐데, 자신도 의심하리만큼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녀 눈길을 피해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했는데도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A 자매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야무지고 똑똑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인데, 그런 마음 가지고는 결코 그냥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그녀를 보는 순간 왜 그렇게 편안한지 왜 그렇게 불쌍하게만 느껴졌는지. 나 아닌 전혀 다른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은혜란 바로 주님이 붙잡아 주시는 새 마음 같아요.” 그렇습니다. 은혜란 내 능력이 아니라, 내 힘이 아니라 전혀 다른 능력으로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구원 받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조롱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어떤 죄를 지을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이 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능 만점을 받았었던 의대생이 여친의 이별 통보에 격분하여 여친을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막아주시지 않는다면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하나님께서 막아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도 다 살인, 간음, 도둑, 사기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죄 짓는 일을 막아주실까요?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 거듭난 자라도 죄를 짓는 것을 우리는 목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잘 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위의 말씀 ‘하나님께로 난 자’는 영이지 육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일지라도 영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육신을 따라 살아간다면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붙드심을 체험하려면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죄를 짓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A 자매가 체험했던 것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상대에게 복을 빌어주게 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5-2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골 2:6-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예수님을 닮기 위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 역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축복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숙의 열매를 맺기 위한 비결로서 “예수님 안에서 행하라”(6절)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사랑,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동행과 친밀한 연합을 말합니다. 깊숙한 친밀함은 가까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연합은 하나가 되고 주님이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계획하며, 시작되고, 진행되고, 끝이 나고, 평가되며, 변화되고 생명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과 지혜와 뜻을 따르고 철저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를 달라지게 학고 변화시키며 인생을 역전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모습과 방법을 따라 삽시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때 모든 것을 감당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임. 바울 사도는 빌 4:4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현실임에도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몸은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바울은 ‘주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그러한 삶의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베풀고 섬기는 삶, 이것이 우리이 사명이요, 책임인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 인생의 기초로 삼아야 하겠습니다(7절).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나타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엡 2:7).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그 사실, 십자가와 부활 그 사실이 오는 세대에 계속해서 복음이 되어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오늘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그러한 삶의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사실 때 주님 자신이 우리의 부요가 되시며,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막 9:23). 주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세상 영광, 사람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구원, 사랑, 평강, 은혜, 능력, 인내, 지혜, 기쁨과 만족을 주시지만, 주님 자신이 복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을 모시고 살아감으로서 복 되신 주님 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인생을 이루어 가십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5-1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믿음 저축’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왕하6:24,25). 이 말씀은 아람 왕 벤하닷이 북왕국 이스라엘 왕을 포위한 내용입니다. 사마리아는 왕궁이 있는 성이었습니다. 성이 포위되었으니, 사마리아는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굶주림이 심하여 자신이 낳은 아이까지 먹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에 이미 예고 된 일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하여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없는 연고일 것이며”(신28:54-55).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신28:47). 이유는 풍족할 때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앞 사건에서 이스라엘 왕은 그가 하나님 앞에 선한 왕이 아니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신 내용이 나옵니다. 아람 왕이 신하들과 의논하여 이스라엘 어느 한 곳에 진을 치고 그들을 치려 하면, 엘리사는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왕은 그곳에 사람을 보내 방어하도록 하여 화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그런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아람 왕은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첩자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왕하6:8-11). 이러한 일들을 몸소 겪으면서도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였으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기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벤하닷으로 사마리아를 포위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비하심을 무시하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이용하여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은혜가 뚝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고삐풀린 송아지가 울타리 밖을 벗어나 마음대로 다니는 것처럼 도저히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악에 빠지게 되어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땅, 건건한 땅에 거하게 됩니다(렘17:6).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와 그의 꿈 자랑으로 형님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님들의 질시로 애굽에 팔려나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가 해석한 대로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 차례로 임하였습니다. 당시 주변 나라들이 굶주림에 허덕였지만,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 말미암아 7년 풍년 때 모아 두었던 곡식으로 7년 흉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년과 흉년은 요셉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사는 가나안 땅에도 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7년 풍년 뒤 7년 흉년이 임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알았다면 절제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제하지 않고 곡식을 거두는 족족 다 소비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7년 흉년이 왔을 때 그들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말하면 7년 풍년은 엘리사가 아람 왕의 침입 계획을 미리 알려준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으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다스리려고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몽둥이를 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힘써야 할 것은 평화로울 때의 신앙 저축입니다. 이때 힘써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과 예배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될 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환난을 감하십니다. 설령 극심한 환난이 임한다고 할지라도 평소에 쌓아 두었던 신앙이 그를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환난 앞에 이스라엘 왕은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왕좌왕하며 심지어 엘리사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왕하6:31).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때 믿음을 충분히 쌓아 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쌓아 두는 신앙생활이 장차 올 시험의 때를 자신도 모르게 지나가게 하거나, 그 시험을 넉넉히 이기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시기를 바랍니다(롬8:37).
    • 칼럼
    • WAIC 칼럼
    2024-05-0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유혹을 이기려면’(엡 4:22-24)
    인생에서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 전체가 유혹과 싸워야 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 연령기에 따라 각종 유혹이 끊임없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인류가 시작되면서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뱀이 시험을 할 때에도 사람의 내면에 있는 유혹의 욕심을 이용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뱀의 유혹은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며, 명예 영광심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들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시험에 잘 빠집니다. 시험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약 1:14).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앞세우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요, 명예를 진리보다 더 앞세우는 것도 마귀의 미혹이요, 세상 권세를 하나님의 권세보다 앞세우는 것도 마귀의 미혹입니다. 솔로몬 역시 세상 유혹에 이끌려 살다가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고, 삼손은 이방 여자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다윗 같은 성군도 밧세바의 유혹에 무너져 인생에서 큰 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온갖 유혹을 이기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각종의 유혹을 이겨야만 인생에서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깨어 있어 각종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유혹은 항상 있으며 유혹은 욕심에서 옵니다. 욕심 때문에 유혹에 이끌리게 되고, 유혹에 끌리게 되면 죄를 낳고,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이처럼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썩어질 생활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해야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요? 엡 4:22-24에서 대답해줍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옛 사람, 곧 욕심으로 가득 찬 구습에 젖어버린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믿음으로 심령이 새로워진 새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속사람이 은혜가 충만해지면 저절로 벗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되었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하게 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새사람이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새사람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말과 행실이 모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새사람은 전인격과 삶 전체가 하나님을 따르는 자이므로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세상을 유혹을 물리치고 살아가며, 시대의 유행에 휩쓸리는 자가 아니라 시대의 표적을 읽어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인생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을 이기고 승리함으로 아름다운 생을 살아갑시다. 시험이 오면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새사람을 교회로 불러 모으시고 말씀의 생수를 흘려보내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우리의 심령이 늘 새롭게 되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4-3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앙에서 많고 적음’
    “대답하되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왕하6:16). 본문에서는 엘리사와 아람군대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아람 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스라엘을 칠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아무 곳에 진을 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람 왕의 군대가 진을 칠 곳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진을 치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은 그의 신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하 중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6:12). 그러자 아람 왕은 도단에 있는 엘리사를 잡아오도록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드디어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왔을 때, 엘리사의 사환은 많은 군사들이 그들을 포위한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에워싼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왕하6:14-18). 엘리사의 사환이 본 것과, 엘리사가 본 것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육신의 눈으로 표면적인 숫자를 본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영안으로 보이지 않는 숫자를 본 것입니다. 우리도 일어나는 모든 환경에서 상대의 보이는 숫자에 눌려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꼭 숫자가 아니더라도, 상대의 기세에 눌려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많고 적음은 보이는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유무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압제를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기드온이 택함을 받았습니다. 당시 미디안과 연합했던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의 숫자는 메뚜기떼처럼 많았고, 약대 또한 무수하다고 했습니다(삿7:12). 반면에 이스라엘의 군대는 간추리고 간추려서 300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적은 숫자만 가지도록 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긍하여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300명은 1개 대대 병력도 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그 숫자로 메뚜기떼와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미디안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중과부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스라엘 군대는 달랐습니다. 300명의 군인만으로도 미디안의 두 왕은 물론, 미디안과 연합한 대군 12만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수가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적은 수 가지고 많은 수를 이길 수 있습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수가 많건 적건 상관 없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만, 사람 편에 서 있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은 수가 많다고 해서 자고할 필요도 없고, 적다고 해서 오랫동안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가 하나님 반대 편에 서 있다면 비록 그 단체에 속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해도 모래 이에 쌓은 누각일 뿐입니다. 이처럼 승리는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녀 포함 무리 1만 여명 이상을 먹이실 수 있는 것처럼 적은 인원으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항상 승리하게 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4-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