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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불 말과 불 수레’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왕하2:11).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하는 곳에 불에 대한 말씀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 제물을 사른 불입니다(왕상18:38). 이 일로 인하여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인을 기손 시내에서 죽입니다. 둘째는 엘리야를 잡기 위하여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보낸 두 오십부장과 각각 오십인 씩 100명의 군사를 사른 불입니다(왕하1:9-12). 세 번째는 본문에 등장한 불말과 불병거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징벌을 의미하며,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여 자대배치를 받고 일병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연대 종합훈련을 처음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임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훈련이 고되다는 것과,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자칫 낙오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기간에 정기휴가가 있는 병사들을 모두 부러워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제가 있던 소대에 전역을 앞둔 선임 병사가 있었습니다. 박 병장이었습니다. 소대는 물론 전 중대원이 존경했으며 심지어 장교나 하사관들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실력이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선임이었습니다. 박 병장은 훈련 기간이 전역하는 날이어서 훈련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훈련을 즐기는 모범 사병들도 있었겠지만, 당시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역을 앞둔 박 병장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훈련 날이 다가오자 우리는 박 병장이 전역을 위하여 당연히 사단본부로 떠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대대장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은 박 병장과 김 병장의 전역 날이다. 그런데 이들은 전역을 미루고 자원하여 훈련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우리 대대에 이런 훌륭한 사병들이 있다는 것을 대대장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모두가 박수를” 그렇게 박 병장 김 병장은 우리와 함께 5일여간 훈련에 참여하였습니다. 박 병장은 나와 같은 화기분대 선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훈련 내내 분대원들과 무거운 M60을 나눠 매면서 이동하였습니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돌아와 연병장에 모였을 때였습니다. ‘붕!’ 하고 사단에서 지프차 한 대가 달려왔습니다. 사단장이 탑승한 차였습니다. 하늘 같은 사단장의 차를 보고 우리는 잔뜩 긴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장은 박 병장과 김 병장을 호명하더니 지프차 뒷좌석에 승차시킨 후 곧장 사단으로 갔습니다. 본문의 불말과 불병거는 저에게 오래 전의 군대 일을 소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엘리야를 엘리사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하여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프차가 다른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전역까지 연기하였던 배려 깊은 두 병사의 영광스러운 전역을 의미하듯이, 불병거와 불말은 하나님께 충성한 엘리야의 아름다운 인생 전역에 대한 면류관이며, 천군 천사의 출동입니다(왕하6:17).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 영광에 힘을 쓰는지 모릅니다. 어디에서든 감투 하나 써보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6-8).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이유는 자기 영광을 위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만드셨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사43:21, 고전6:1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죄는 죄로 여기지만, 명예 영광 허영심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성군 다윗이 저지른 두 가지 큰 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후 그것을 덮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게 한 살인 죄입니다(삼하11장). 이 죄는 오늘날에도 도덕적으로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구조사입니다. 인구조사는 큰 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죗값으로 네 사람이 죽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권을 과시하려 했던 인구조사의 결과 7만 명이 죽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할 때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하는데 다윗이 속전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출30:11-16). 그러나 이면에는 명예영광심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안병모 목사님은 이에 대하여 간음과 살인죄는 육적인 죄인데 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낸 것은 영적인 죄이기 때문에 그 죗값이 더 큰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바울은 세상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그는 위로부터 오는 상급을 바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9). 우리에게도 세상 영광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든지 두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면 세상 것도 필요한 것 만큼 주시지만, 세상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여 엘리야나 바울처럼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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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의 중요성을 아시기에 “나는 인간의 중심,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만큼 인간에게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지키고 관리하는 일이 철저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입니다(23절). 마음은 우리의 모든 언어와 행동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중생한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지켜서 거룩하고 선한 행실과 입술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동이,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위가 나오고(눅 6:45), 말 역시도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8).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가운데 아름다운 것들도 있지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등은 모두 마음에서 시작되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마 15:19). 그러므로 더욱 마음을 잘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은 생각, 사고, 의식의 원천이며, 그 사람의 중심이 되고,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에 마음에서 이기면 다 이기는 것이고, 마음에서 지면 이미 다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잘 살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 하느냐, 불행 하느냐’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증오, 슬픔, 불안, 불평으로 가득 차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지만, 반면에 마음이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고, 평안하고 감사로 가득 찰 때에 행복한 삶을 살며 마음의 천국을 이루어지 때문입니다. 렘 17:9절 이하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말씀과 성령으로 지배를 받아 변화를 받지 못하면 마음을 잘 관리할 수 없고, 온전히 지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 채워지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삶 속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받은 마음,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 화평의 마음은 덕을 나타냅니다. 사람은 마음에 무슨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인격이 결정됩니다. 롬 8:5-6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꾸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6:23). 하나님께서도, 마귀도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 마음을 지킴으로서, 성령님의 끊임없는 역사와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지키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고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인생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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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의뢰하는 양식’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셨도다.”(시105:16). 제가 집에서 사용하는 의자는 등받이가 탄력이 있어서 제가 끝까지 누우면 140도는 기울어집니다. 여간 편리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 편안히 기대고 있다가 거기서 잠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여느 때처럼 등을 기대는데 의자가 그만 바닥으로 쿵 하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지나치게 세게 기댄 나머지 무게 중심이 등받이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대면 그런 일이 없을 터인데 제가 지나치게 의자를 믿은 나머지 몸무게에 속도까지 첨가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 아들들이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전적으로 의자를 믿고 있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듯이 이스라엘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양식을 믿고 있다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고 만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동 전 지역의 현상이었으므로 이스라엘도 여기에서 비켜 나갈 수 없었던 일이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뢰하는 양식을 끊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어” 그야말로 믿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양털에게만 비를 내리게 하시고, 사방에는 마르게 하실 수 있고,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비를 내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삿6:36-40). 430년 후 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만 안전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던 하나님은 그냥 두십니다. 여러분이 남의 자녀가 잘못해도 간섭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근실이 채근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면 의뢰하는 것들을 끊으십니다. 돈을 의지하면 돈이 궁색해집니다. 자녀를 의뢰하면 자녀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생깁니다. 권력을 의지하면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검을 의지하면 검으로 망하게 됩니다. 다리가 들노루처럼 빨랐던 아사헬은 자기 다리를 믿고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아브넬의 역공에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하2:23). 뛰어난 모사가였던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자기의 모사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가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삼하17:23). 자기의 지혜를 지나치게 의지한 결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뢰하는 것들을 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파멸의 결과를 낳게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들을 의뢰하는 것이 미혹입니다. 제가 초중고 시절에는 권투의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노는 것도 동네에서는 권투 시합하며 놀았습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동네 골목대장은 동년배 친구들뿐 아니라, 하급생들을 모아 놓고 권투를 가르쳤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잔디가 넓게 깔린 묘지로 데리고 가서 경기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온 동네의 우상은 한국인 세계 챔피언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수는 절대 패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패하는 것을 보고 사람에게 있어서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결코 믿을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앙인들이 믿어야 할 분이 하나님입니다. 의뢰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함은 말씀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뢰하려면 시험이 따라옵니다. 도저히 말씀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시험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으로 보여주신 말씀이, 노예로 팔려 간 요셉에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보였을까요? 현실성으로 따지면 1%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옥중에서조차도 그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능성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만 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시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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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찬양 목사의 ‘주님은 나의 안식처’(삼상 19:18~24)
    성경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안전한 곳’ ‘피난처’가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하면서 노골적으로 다윗에게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에 사울왕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없애려고 계속 살해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했습니다(삼상 19:1-7). 그리고 사울왕의 딸이면서 다윗의 부인인 미갈의 도움을 받아 다윗은 도피생활을 했습니다(삼상 19:8-17).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사울왕은 이번에는 세 차례에 걸쳐 자객을 보내 다윗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다윗이 죽지 않자 이번에는 직접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다윗이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해하려고 다윗이 있는 곳까지 쫓아갔지만 결국에는 자기옷을 벗은 채로 사무엘 앞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4절입니다.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사울 왕이 옷을 벗었다는 말은 그가 왕위에서 폐위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사울 왕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주시니까 사울왕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윗은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피신하였기에 안전했습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라마가 어디입니까? ‘라마’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간 곳인데, 사무엘의 출생지이며 주거지이고 매장지입니다. ‘라마 나욧’도 같은 단어입니다. 라마와 라마 나욧이란 단어는 본문에서 총 7차례 등장합니다. ‘나욧’이란 ‘처소, ‘거처’를 의미합니다. 라마 나욧은 라마 지역에 있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장소입니다. 사무엘 상 7:17입니다.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곳,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의 품’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다윗은 도피하면서 이 라마라는 곳을 안식처로 삼았습니다.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46: 1-3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피난처, 힘, 큰 도움 다 비슷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주시는 피난처요, 힘 이시요. 그리고 큰 도움이 되십니다. 아무리 인생의 지진이 일어나고, 고난의 해일이 덮쳐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은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세상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맞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저와 여러분을 늘 보호하시는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한계 상황을 만날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과 상처와 환난이 저와 여러분을 넘어뜨리려고 수시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한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고통과 환란 때문에 내 인생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우리주님’만 지속적으로 바라보시면 우리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며, 특별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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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환난이 주는 유익’(롬 5:3-4)
    우리의 삶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있습니다.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주신 까닭은 바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무나무에서 고무액을 받을 때는 나무껍질을 찢어놓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을 더욱 복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을 찢어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즉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참는 것은 귀한 축복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신앙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시 40:1-2에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참되고 올바른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나의 조급한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스턴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과 욕구가 지금 당장 만족되어야 하기에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원한다며 안달을 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인내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영적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상에서 고뇌가 계속 되었는데도 끝가지 참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진주를 만들기 위해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겪는 조개처럼, 우리도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고난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고난은 우리의 자아를 깨뜨립니다. 그래서 고난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것은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달콤하고 수지맞는 일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럽고 손해나는 쓰디쓴 고난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쓰디쓴 고난을 주심으로 더 큰 은혜를 받게 하고 더 귀한 그릇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영적 성장을 가져오고, 겸손하게 되며(사 57:15), 연약함과 죄를 깨닫게 되는 유익을 얻게 됩니다(고후 12:9). 고난의 환경은 우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기도하면 응답하셔서 환난 중에 내가 너를 건지고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말씀하셨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만 바라볼 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내로 고난 다음에 올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고난 다음에 주실 은혜와 축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덕분에’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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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적극적인 순종’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30). 감람산은 올리브 산입니다. 거기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제자로 택함을 받았던 가룟 유다의 배반과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올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한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달아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습관을 따라 기도드렸던 곳, 척하면 예수님이 계시는 위치를 짐작할 만한 곳, 그러기에 유다가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함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있는 힘을 다하여 피하고 싶은 곳이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는 찬미하며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가십니다.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이기에 찬미하며 올라가십니다. 순종은 적극적인 순종과 소극적인 순종이 있습니다. 찬미는 적극적인 순종을 드러냅니다. 소극적으로 순종하면 시험이 올 때 돌아서기 쉽습니다. 작은 일에도 유혹을 받아 넘어가고 맙니다. 소돔성이 악하여 하나님께서는 소돔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소돔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롯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소돔성을 멸할 계획을 말씀하시고 그 처와 두 딸이 성 밖으로 나와 산으로 도망할 것을 말합니다. 롯이 산보다 가까운 소알성으로 가겠다고 하자 그것까지 허락하십니다. 순전히 삼촌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소돔에 유황불이 쏟아질 때 롯의 처는 성안에서 나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9:23-29). 롯의 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은 하였지만 그 말씀을 자기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고 억지로 소극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소극적인 순종은 이처럼 실족하기가 쉽습니다.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가 다윗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지 않았습니다. 행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가 그를 죽이고 그 나라를 다윗왕조에게 돌릴까 봐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웠던 것입니다(왕상12:29). 이 소식을 멀리서 들은 유다에 사는 선지자는 매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를 쓰시지 않으시고, 멀리 유다에 사는 선지자를 벧엘에 보내어 여로보암을 책망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내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왕상13:9). 이 말씀에 유다에 사는 선지자는 ‘말씀을 받아 전하면 그만이지 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하셨을까? 왜? 가던 길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돌아올 때는 쉬면서 음식도 보충하고 이미 익숙한 길로 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억지로 소극적으로 순종하다가 그만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의 속임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오던 길로 다시 가지 말라는 말씀,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이 마음에 걸렸는데 자신보다 한참 선배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물과 떡을 주라고 하셨다.”는 말에 그만 마음이 녹아들고 만 것입니다(왕상13:19). 이처럼 순종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때 마귀는 그 틈을 노립니다. 그리고 넘어뜨리고 맙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종종 보았습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 마음이 상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이 하지 말라고 그랬어.” “아버지께서 보지 말라고 그랬어.” 물론 소극적인 순종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소극적인 순종 속에는 자신은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다소 섭섭한 감정과 원망 섞인 감정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순종할 내용에 대하여 다소 왜곡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순종을 피해야 합니다. 어차피 순종할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 복음(롬2:16)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도 함께 주십니다(행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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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살전 1:1-10)
    오늘날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파하는데, 그 열정과 수고에 비해 열매가 빈약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와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대략 3주에서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거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 같은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복음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파되었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사람 앞에 보이는 외식적인 일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루어진 진실한 일이었습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렘 17:9)의 마음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근본적으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덕행과 미덕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권면을 받기도 했기 때문입니다(4:1 ; 5:14). 그럼에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은 현상적인 면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교회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큰 소망을 두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살았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2:13, 히 4:12).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성령의 능력(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은 성령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강한 능력이 내 안에 더러운 것들, 추한 것들, 냄새나는 것들 쏟아내고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영적변화를 이루게 합니다.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를 은혜의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의 내주를 체험하였고, 성령의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영적 기쁨으로 인해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환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성령을 바라보며 담대한 마음을 가지며(요 17:22, 33),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듣고 고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 일과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순종의 생활을 하십시다. 바울사도와 동역하는 전도자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산 결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신앙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한 성도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주위에 저절로 퍼져나갔습니다. 또 데살로니가 교인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소망 역시 오직 재림의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빼놓으면 우리의 신앙은 확신도 없고, 소망도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히 수동적인 자세로 재림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자기의 신앙을 굳게 하며 기쁨으로 환난을 견뎌내는 적극적인 자세로 주님의 날을 예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승패는 영적 분별력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살아간다면 확신과 함께 온전한 믿음으로 설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로 참된 교회를 이루어 각 사람의 믿음의 확신과 소망이 분명해지며 사랑이 뜨거워지는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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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를 분명히 합시다’(빌 3:12-14)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나 목표가 확실해야 합니다.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상실하면 그 때부터 방황하며 전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표가 없거나 목표가 있어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자가 쟁기를 잡고 뒤돌아다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 9:62). 쟁기를 잡은 자가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돌아다보면 밭고랑이 갈지(之)자로 파이지 똑바로 파일 수가 없습니다. 목표를 향해 분명히 견고히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는 사람은 온전히 그 목표를 바라보고, 온전히 달려가야 승리의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였다”(고전 9:26)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경주자에게 목표가 중요한 이유는 목표가 노력을 크게 증대시키고, 노력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에 보면 시간관리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관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같이 정신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목표를 향해서 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천성이란 이 목표가 희미하거나 확정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 물결에 휩싸이거나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우왕좌왕하게 되고, 또한 세상의 화려한 유혹에 빠지게 되어 깊은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이라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았기에, 백성들이 늘 비판하고 반대하고 원망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자만하지 않고 설정한 목표를 향해 질주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2절)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만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되, 계속해서 추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단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쫓아갔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취해야 할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잡념에 시달리거나 얽매이는 장애물이 있으면 달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여 온전히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들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바울이 달려가는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었습니다(14절). 우리의 관심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해 열심히 달려갑시다. 하나님께서 주실 칭찬과 위로와 영광이 분명히 있음을 확신하며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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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존귀한 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히틀러? 네로? 김일성? 이런 사람들도 당연히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특별히 택함을 받은 제자였지만, 그리스도를 팔아넘김으로 가장 파렴치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미국인 조선 독립운동가 헐버트(1863-1949)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1886년 그의 나이 23세 때 선교사로 조선에 왔습니다. 헐버트는 여느 선교사처럼 조선에서 고생할 각오를 하고 왔지만, 막상 와보니 조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습니다. 그는 ‘선교사라면 자신이 선교하는 나라의 지리 역사 문헌 등에 대하여 특별히 공부하고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조선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흘 만에 한글을 깨우쳤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언어 자질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 익히기 쉬운 한글의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훌륭한 글자를 만들 수 있는 민족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조선에 애정을 가지고 조선을 위하여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훈민정음을 보고 세 가지 면에서 놀랐습니다. 첫째는 매우 과학적인 것에 놀랐고, 둘째는 가장 익히기 쉬우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넓은 점에서 놀랐고, 셋째는 이런 글자를 국민들이 무시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매우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익히고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천시하는 것을 보고 만일 조선이 훈민정음을 중요시 여겼다면 그토록 낙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제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제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30).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위임 받은 심판의 권세와 영생 상속이었습니다. 계시록에는 열 두 사도에게 주어지는 다음과 같은 상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계21:14). 그들은 하나님 나라 성벽의 주춧돌이 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영광을 받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현 위치가 어떤 상황인지 안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형편 나의 처지는 존귀한 위치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복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때로는 시험들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고 모든 것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한 가룟유다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라서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고라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 지파에 속한 것에 대하여 귀중함을 모르고 제사장 직분을 탐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민16:9). 우리가 가진 명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존귀한지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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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치료의 하나님’(출 15:22-2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낙심되는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때 이 어려운 과정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홍해를 건너 3일 동안 수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마실 물이 없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마라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진퇴양난에 처하며 위기를 만났습니다. 애굽의 병사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홍해를 건넜던 3일 전의 감사와 감격, 기쁨과 찬양은 온데간데없고, 모세를 원망하고 낙심하며 좌절했으며, 백성들의 불평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25절상). 하나님께서는 쓴 것을 달게도 만드십니다. 이 같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치료자가 되심을 계시해주셨습니다(26절).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성도의 아픔을 치료하십니다. 깨어지고 불행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역사를 나뭇가지가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모세가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불신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불신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인생에서 만나는 마라의 쓴물(재물, 건강, 각종 문제들)을 단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원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제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욥은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럴 때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롬 8:28).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한 나무는 물가 가까이에 있었듯이, 이 세상 마라의 쓴물 때문에 고생하는 우리 곁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라에서 붙든 나뭇가지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생존을 지켜주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다짐하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도 힘들고 어려운 마라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치료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치료의 말씀을 듣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이며, 역사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마라를 지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27절). ‘엘림’이란 오아시스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라는 고통과 고난을 잘 이겨내고 통과했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 출애굽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며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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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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