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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2’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마22:20-21). 온 천하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골1:16-17). 로마시대 가이사는 오늘날 세상 통치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따로 나누신 것은, 비록 만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일지라도, 통치자들의 통치 행위와 거기에 따른 비용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며, 아울러 신앙인들이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한 때 현대에서 그랜저가 최고가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L씨 성을 가진 청년이 K회사에 입사하여 그 회사 사장의 기사로 발탁 되었습니다. 청년이 사장을 잘 섬기다가 여자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어느 날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지, 사장 몰래 사장의 차를 가지고 약속 장소에 갔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회사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청년은 즉시 퇴사를 당하였습니다. 사장은 ‘공과 사가 분명하지 않은 청년이라면, 앞으로 더 큰 문제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회사의 것과 자신의 것에 대한 선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수많은 하나님의 것들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날”은 명칭처럼 주님의 날입니다(계1:10). 주일은 안식일과 의미는 다르지만 행동은 안식일처럼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은 구약의 것으로, 예수님이 오신 후에 폐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폐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완전케 하였다고 하셨습니다(마5:17-1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13:8),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안식일 자체가 잘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사랑 없이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지키는 주일은 일곱째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매 주 첫째 날입니다. 이 날 성령의 감동을 받는 날이며(계1:10), 자기 일을 쉬는 날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날을 주님께 돌려드리며 주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날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만 주의 날이 아니라 온종일이 주의 날입니다. 이 날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국을 소망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위독한 생명과 관련 된 일이 아니라면, 이 날은 온전히 주님께 드려야 하며,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지키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분명히 입게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비롯되었으며, 은혜로 주어진 것이지만, 90%를 우리가 이용하고 10%만 하나님께로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답하는 마음을 쓰게 하여 은혜를 더 풍성하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고,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3:10-12). 신앙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하나님의 것인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 또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합니다(벧전2:9).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면 만물이 다 우리의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만물도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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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7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22:20-21). 유대인들의 집권 세력 가운데 하나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오르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마22:15)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지,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에, 양심에 맞는지 살피지 않고 행여나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을 예수님께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자신이 한 말에 걸려 넘어지도록 올무를 놓은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마22:16b). 그들의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나, 그들이 중심에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올무에 걸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달래는 봄에 피는 꽃인데 종종 계절을 숨긴 늦가을에도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잖아 계절이 발톱을 드러내 잔인하게 서리를 쏟아붓고 맙니다. 그러면 늦게 핀 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싱싱하게 붙어 있는 잎사귀까지도 바짝 마르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한 나중 질문 곧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질문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위장술임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는 대답일 것입니다. 반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대답에도 저 대답에도 빠져나갈 수 없는 교묘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속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를 뻔히 알아차리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속을 환희 들여다보시지만, 대답을 피하시지 않고 모두에게 교훈할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7). 여기 공세는 조세를 말하고, 국세는 관세를 말합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가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이라면 기꺼이 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와 치안, 복지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나 연보 등도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간혹 십일조나 헌금을 구제로 대신 하거나, 구제에 쓸 돈을 십일조나 헌금으로 대신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십일조이며 구제는 구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혼돈되어서는 안 되듯, 연보나 구제는 드리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세금이나 십일조와 같은 금전과 관련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은 살아가면서 육신의 것과 성령의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과 성령은 서로 원수이며 대적의 관계이지 화평의 관계는 아닙니다(갈5:17). 육신의 것이 하나님의 것처럼 등장할 때가 있고 하나님의 것이 육신의 것으로 비난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로 하나님께 분향하려 하다가 둘 모두 하나님의 불에 의하여 살라지고 말았습니다(레10:1~2). 하나님께 분향할 때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단의 불’로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밥할 때 사용하는 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불은 열심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열심이 하나님께 드릴 열심을 대신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단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제단에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증거로 불이 내려진 것처럼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을 내려주십니다. 신앙인들의 열심은 십자가를 통과한 열심이어야 합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열심은 하나님이 주신 열심이 아니라 자기 열심입니다. 이런 마음은 은혜 받은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성질을 펄펄 내는 사람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주신 열심은 속에서부터 나오는 능력입니다(골1:29).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마땅히 멸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취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러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울 왕가는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삼상15:17~23). 아말렉은 육신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소욕에서 나오는 것은 선한 것이 없습니다. 육신은 다 멸해야 할 것인데 멸하지 않아서 결국 사울 역시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과 육신의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영이 예민한 사람은 이것을 분별할 수 있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것과 육신의 것이 함께 묻어 나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자기 영광이 섞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선을 행하고도 혹시 섞여 있을지도 모를 ‘자기 의’를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목욕탕에 다녀온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다시 발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요13:10). 우리 모두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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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9
  • [웨이크 칼럼] 한인수 목사의 ‘요나의 표적’(마 12:38~42)
    표적의 헬라어는 “세메이온”이다 세메이온은 어떤 것을 가르치는 표지판이다.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기사와 표적과 이적은 전부 세메이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귀신을 쫒고, 병을 고치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등등의 모든 기사와 이적과 표적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세메이온이다. 히브리어로는 “오트”다. 오트 역시 기호, 증거, 표, 표식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구원의 표 또는 언약의 징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준 표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언약의 징표인 “오트 하베리트”다. 그러므로 표적인 세메이온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나타내는 십자가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으로 압축하신다. 요나는 구약의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동안 있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한다.(요나서 1장) 그리고 물고기가 그를 토해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요나서 2장) 그리고 요나서 3장은 큰 성 니느웨에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뜻하는 복음이 전해지자 왕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다 회개를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여 명이 구원을 받는다. 12는 게마트리어로 “아들”을 상징한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할 때 천은 땅의 수이고 만은 땅에서 완성된 하늘의 수다, 그러므로 십이만 명이라는 뜻은 땅에서 회개하여 하늘에 앉힌바 되는 교회를 상징한다. 본문에서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한다. 왜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을까? 약4;4절은 이렇게 말한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은 늘 표적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요구한다. 그 말은 자신을 굴복시킬 만한 증거나 논증을 대보라는 자기기만 일뿐 그가 자기를 설득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한 말이 아니다. 예수는 내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내안에 찾아와서 나를 설복하실 때 비로소 믿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과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그 자체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 세대에게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은 요나서1,2,3장을 지식과 정서적 감정으로 이해가 되어졌다고 해서 믿음이나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가 그 목적지를 보라고 하는 싸인보드판이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나? 마태복음9:2절에서 중풍 병을 고쳐주시면서 주님은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죄 사함은 요나의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세메이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죄 사함”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마4:17절) 오늘 본문41절에서도 예수님께서 회개를 천명하신다.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의 십자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 사도들도 행2:38절에서 회개와 죄사함의 복음을 외친다. 요나서 3장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왕부터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 그러니 우리도 회개를 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인간은 악하고 음란한 존재이기에 결단코 회개할 수 없는 죄인이다. 아무리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 해도 그것으로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권한이다. 그러니 아무리 회개를 하려고 해도 회개가 내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에 우리는 날마다 절망해야 한다. 그것으로 나의 본성적 자아가 얼마나 양심에 화인 맞았는지 깨달아야한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전한 회개의 복음을 듣고 생명가진 모든 존재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왜 이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기적을 보지 못해서도 아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약4:4절의 말씀대로 나는 지금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삶을 돌이켜보니 정말로 나는 세상과 벗이 되어 “세상 먼저 그리고 하나님 나중의 시간표”를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다. 복음에 관한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첫사랑의 뜨거움을 잃어버린 것은 어디서부터일까? 그래서 성경을 대하면 울고 싶을 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회개시킬 자를 불러 회개의 역사가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오늘도 우리는 요나가 되어 절망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렇군요! 주님 내가 악하고 음란한 놈이네요 요나가 하룻밤에 시들어 버린 박넝쿨을 아꼈듯이 나도 그렇게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을 아꼈나 봅니다. 나도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 배설물로 버렸다고 외침 같이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한주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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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솔로몬에게 주신 기회’
    본문: 열왕기상 11장 7-25절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여호와를 떠났다는 뜻은 말씀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말씀으로 나타나심이기 때문입니다(삼상3:21).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는 크게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다윗은 나단이나 갓과 같은 선지자와, 사독과 아비아달 같은 제사장을 가까이했지만, 솔로몬이 선지자나 제사장을 가까이하였다는 내용은 거의 보기 힘듭니다. 다윗이 선지자를 가까이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제사장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 자신의 허물을 보게 하여 어린 양의 피, 곧 보혈공로를 힘입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아마도 자신의 지혜를 너무나 믿었는지 연설도, 기도도, 축복도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자신이 모두 다 하였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모름지기 ‘내가 선지자나 제사장보다 나아’ 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두뇌를 철저히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외교를 한다며 이방 여인과 연혼정치를 하더니 마침내 그들에게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여호와를 떠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대개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를 독촉하셨는데 솔로몬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독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이미 깊은 관계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 비록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되었어도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불간섭주의로 해요.” “솔로몬, 내가 고국을 떠나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요. 신전 하나만 세워주세요. 그러면 그것으로 나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요.” “솔로몬, 내가 섬기는 신을 섬기라고는 하지 않아요. 그래도 가끔씩 예배에는 동참해주셔야죠.” “솔로몬,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찌 그리도 나의 신에게는 절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점점 강도가 세지는 여인들의 말을 한 발 한 발 들어주다가 수렁에 푹 빠져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정에 얽히고설키는 관계가 되면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새겨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겨준 후에도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기한은 아버지가 축복하기 전까지입니다. 하지만 그는 장자의 명분을 넘겨준 일에 대하여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동생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창27:27-29). 느부갓네살왕이 한 꿈을 꿉니다.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하였습니다. 장차 느부갓네살왕이 소처럼 풀을 먹고 밤이슬에 젖을 터이니,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고, 겸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단4:26-27).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회개할 기간을 1년이나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열 두 달이 지난 후에 그 꿈대로 되고 말았습니다(단4:2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주시고 바로 징계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할 기간을 주십니다. 기회를 주실 때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에서나 사울왕, 느부갓네살왕은 기회를 붙잡지 않아 낭패를 당하였지만, 회개할 기회를 붙잡고 회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음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살인까지 저질렀던 다윗왕이 대표적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였을 때 중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삼하12:13). 그 결과 원수의 조롱을 받았지만, 죽음은 면하게 되었고 왕의 지위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악한 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아합왕은 엘리야가 책망하였을 때 베옷을 입고 행보도 천천히 하여 겸비한 모양을 보였습니다(왕상21:27-29). 그러자 그에게 내릴 형벌이 아들 대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아직 재림하시지 않는 이유가 아무도 멸하지 않고 회개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벧후3:9). 각자가 자신만 아는 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양심을 통하여 “너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너 그렇게 빈둥빈둥하면 안 되지” “너 빨리 술에서 벗어나야지.” “너, 언제까지 그 여자 가까이할 거야? 빨리 헤어져.” 등 각자에게 요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책망하시는 것과 같이 심판이 따라옵니다. 솔로몬에게 내린 심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를 빼앗아 신복에게 주리라는 말씀입니다(왕상11:11). 하지만 다윗과 한 약속 때문에, 솔로몬 당대에 그 일을 행하시지 않고 아들 대에서 하시겠다는 것과 한 지파를 남겨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직접 징벌도 내리셨습니다. 사방에 에돔사람 하닷과, 소바사람 르손과, 그의 신복 여로보암과 같은 대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는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내릴지언정 영혼까지 멸망시키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러니 보답하는 마음으로 지금이 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행동을 바로 고쳐야 합니다.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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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2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21:44).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말씀이 예수님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곧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님의 심판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첫째는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이며 둘째는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에서는 ‘사람이 돌을 공격하는 모습’이며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에서는 ‘돌이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단단히 박혀있지만, 모양은 보잘것없는 바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바위가 싫고 미워졌습니다. 게다가 돌부리에 치여 넘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화가 난 그는 바위를 깨부술 생각으로 바위 위 높이 솟은 봉우리로 올라갔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바위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바위야 부서져라” 외치면서 용감하게 뛰어내렸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어보나 마나 바위를 부서뜨리기 위하여 뛰어내린 사람의 온몸이 깨어지고 뼈가 으스러져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위를 깨뜨릴 생각으로 산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위와 같은 사람입니다. 돌은 반석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은 산 위에 올라 깊이 박힌 바위를 깨뜨리려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곧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온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2:8).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기 예수에게 인사하는 척 하면서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자, 화가 난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말한 때를 기준으로 그 지경 안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도록 하였습니다(마2:16). 물론 아기 예수는 주의 사자의 분부를 받고 애굽으로 피하여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그 후 B.C. 4년 3월경에 추하고 심한 질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이 B.C. 5년 말이나 B.C. 4년 초에 나신 것이 확실하다면 예수님 탄생 후 얼마 못 되어 죽은 것입니다. 바위를 깨뜨리려 하다가 자신이 깨어진 것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 하수에 던지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들 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노예 삼아 민족을 파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모세를 보내셨고 그 모세를 통하여 애굽을 거의 초토화하다시피하고 그들 땅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애굽이 도리어 망할 직전까지 간 것입니다. 성경 ‘에스더’에서 아말렉 사람 하만은 모르드개로 인하여, 모르드개는 물론 모르드개가 속한 민족 유대인까지 모조리 멸하려고 계획하고 아하수에르 왕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만의 계획을 방관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아하수에르 왕에게 하만의 가족과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음은 ‘사람 위에 떨어진 돌’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잊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알리셨습니다(다니엘 2장).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은 꿈에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머리는 정금으로 되어 있고, 가슴까지는 은으로 되어 있고, 허벅지까지는 동으로 되어 있으며 종아리는 철로 되어 있고 발은 얼마는 철이며, 얼마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뜨인 돌을 던져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신상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자리에 서 있는 제국들을 심판하십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멸망했고, 바벨론 제국 역시 멸망하였습니다. 페르시아제국이 멸망하였고, 헬라제국 역시 멸망했습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였고, 왕을 천황이라고 하며, 신의 위치에 올려놓았던 제국주의 일본 역시 멸망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무신론이며 유물론 위에 세운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가루로 만드십니다.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사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40:11-14). 교만은 하나님의 대적입니다(욥15:25).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예수님을 대적하거나 신앙인을 박해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멸을 택한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떨어진 돌'은 국가든 개인이든 교만하여 하나님 자리에 오른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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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3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건축자들의 버린 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21:42). 왕명에 의하여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리석을 골라 궁궐을 짓는 건축자가 있었습니다. 돕는 자가 끙끙거리며 돌 하나를 주워 왔습니다. 그러자 건축자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이봐. 지금 우리는 임금님의 전을 짓고 있는 거야. 여긴 아름답고 멋진 돌이어야 해. 이따위 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이야. 당장 버리도록 해” 그러자 돌을 지게에 지고 왔던 사람은 절벽이 보이는 곳에 그 돌을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절벽 위에 간신히 걸쳐 있는 한 돌을 발견하였습니다. ‘오! 훌륭한 산 돌인걸. 이렇게 좋은 돌을 버리다니. 이 돌을 주춧돌로 삼아 언젠가 잠시 머무를지 모를 왕의 처소를 마련해야지’라고 하며 여러 해에 걸쳐 사람들을 동원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몇 년 후, 왕은 자기의 궁궐을 짓도록 명했던 건축자를 찾아갔습니다. 건축자는 매우 화려하고 빛나는 궁전을 임금님께 보였습니다. “음, 훌륭하군!” 임금님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미세하지만 한쪽으로 기울고 있는 기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이 준엄하게 건축가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집은 궁전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구나.” 임금님은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궁내로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신하 한 사람과 함께 잠행하였습니다. 어떤 한적한 곳에 이르자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견고해 보였고, 주변 경관과 잘 조화된 운치 있는 집이었습니다. 주춧돌과 기둥을 보았는데 어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선비로 변장한 임금님은 건물주에게 그 집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건물주는 자기가 임금님을 사모하는데 언젠가는 자신의 집에 머물 거로 생각하여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감격하였지만, 이내 모르는 척하고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동행하였던 신하를 보내어 건물주를 데려오게 한 후 큰 포상과 함께, 많은 돈을 들여 그 집을 샀습니다. 이 글은 본문과 연결 지어 만들어 본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나온 건축자들은 그토록 훌륭한 산 돌을 왜 버렸을까요? 성경에서는 건축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전3:10). 여기 ‘지혜로운 건축자’로 표현된 것처럼 본문에서 나오는 건축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19-20).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예수님을 버렸고 자기 꾀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자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라고 말씀하시자 말씀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그들에게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 외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7-68). 육신은 무익하다는 말씀에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 제자들은 거기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버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육적인 것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성공, 물질적인 복, 건강, 명예 영광 등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가 그런 것들이 차지 않았을 때 실망하여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안 것은 혈육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16:17). 혈육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혈육이란 친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혈과 육, 곧 육신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리게 되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마16:16). 이상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관원들이 왜 예수님을 버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혈과 육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분별하게 됩니다(사5:21).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것뿐입니다. 더욱 겸손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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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1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점점 빛나는 의인의 길’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 가끔 동이 터 오르기 전에 제가 사는 곳에 있는 산에 올라 아침을 맞이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부터는 태양은 거침없이 어둠을 삼키고 새로운 세계를 펼칩니다. 그렇다면 태양은 지난 밤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잠자고 있었을까요? 그 시간 동안 단절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나긴 밤에도 그들은 모태에 있는 어린 아이가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점점 자라고 있듯 끊임없이 아침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임계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액체가 기체로 변화하기 직전 상태로 물질이 구조와 성질을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의 온도와 압력을 말합니다. 가령 물일 때는 온도는 섭씨 100도가 임계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도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액체 상태로 있다고 해서 그 물은 기체로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일단 100도가 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변화의 속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노력을 해도 진척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안 돼’ 하면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하는 자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임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긴 시간동안 정체 되어 있는 듯 하지만 태양은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듯이(전1:5), 우리의 기도와 수고와 땀이 헛된 듯 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솥뚜껑 안에 있는 물은 기체가 되기 위하여 달궈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임계점이 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 영역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앙으로 말하면 가장 기본적인 것, 실제 삶에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은 비록 그가 형님들에 의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 나갔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그가 형님들을 다스리게 될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꿈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30세 되던 해 바로의 꿈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13년의 기간 자칫 슬픔과 탄식의 시간이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의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 그는 죽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양을 치면서 이스라엘 목자가 되는 훈련을 단단히 받았을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날들이 기약 없어 보였지만 그 날들은 헛된 것이 아니라 그가 왕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다 채우자 그는 거침 없이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인 모두에게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그 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죽은 자 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것을 박차고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임계점은 거기서부터 가시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하는 임계점이란 신앙의 성숙 영적인 성숙 속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우리 모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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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8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과 화합’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왕상8:61).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지만(잠27:17),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방죽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연합이 잘못되면 함께 망하는 길로 가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1980년대 구소련에 연합된 나라들의 종말을 보면서, 잘못된 연합의 해악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처럼 해악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나라가 있습니다. 복되게도 지금 우리 앞에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길이 펼쳐 있습니다. 화합이란 화동하여 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인들의 평생소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과 연합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빌2:5).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비느하스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25:10-11).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에 대하여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같은 질투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합하려면 주님과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은 주님이 보시는 대로 봅니다. 주님이 싫어하면 자신도 싫어하고, 주님이 기뻐하면 자신도 기뻐합니다. 주님이 아파하면 자신도 아파하고, 주님이 만족하면 자신도 만족합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주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이스라엘의 남북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왕상12:25-3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사는 벧엘에 있는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고 멀리 있는 유다 선지자를 보내셔서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로보암을 책망하도록 하셨습니다(왕상13). 왜 가까이 사는 벧엘에 있는 선지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비록 선지자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느끼지 않았고, 하나님과 같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이유는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였기 때문입니다(행13:22). 사울은 하나님과 전혀 다른 마음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한 것입니다(삼상15:22-23). 성경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였습니다(창5:22).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25:12-13). 평강의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께 합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아서,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였던 히스기야왕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습니다(왕하18:6-7).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5).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주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주님 안에 들어가려면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요15:10). 지킨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며, 순종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롬1:5).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순종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며, 주님 또한 순종하는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믿어 거듭났다고 하여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라면 아직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의 영은 새로워졌지만 마음까지는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몸을 드려야 합니다(롬12:1-2). 하나님께서는 몸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몸 드리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롬6:16). 하나님은 몸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욥22:21-23).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교훈을 받고 말씀을 마음에 두며,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려야 합니다. 보배를 진토에 버려야 하고,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 우상을 멀리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 “예수님과 하나 됨”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가 되어 예수님과 사귀고 예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요일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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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4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잘못된 사랑’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1-3). 어떤 할머니가 젊었을 때 남편하고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의 남편은 몸이 약해 직장을 쉬고 있었고, 대신 아내가 나가서 일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보통 가정들과는 다르게 남편이 가정주부가 된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남편은 언제부터인가 가물치를 푹 고아서 즙을 만들어 아내가 출근하기 전에 한 잔씩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내는 그렇게 한 잔씩 마시며 다녔는데, 하루는 가물치 맛이 이상하여 ‘양념을 첨가했나 보다’ 하고 지나쳤습니다. 그 맛도 며칠 동안 계속되다 보니 적응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주는 남편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얼마간 마신 후에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요 며칠 마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그러자 아내가 대답하였습니다. “가물치라고 했잖아요?” 남편이 다시 말하였습니다. “음........실은 그것 구렁이지요.” 깜짝 놀란 아내는 기겁하며 “뭐라고요? 그게 사실이란 말에요?” 하며 재차 물었습니다.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모두 게워내고 싶었지만 이미 흡수된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 어르신의 남편은 아내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의 뜻이 무엇인지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구렁이를 끔찍이 싫어하는 아내는 구렁이의 몸이 자신의 몸 조직 일부분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꽤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사랑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며(마22:37-40),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하지만 사랑에는 지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잘못된 열심이요, 정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1-3). 신약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이 옳게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였습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하기 전까지 잘못된 열심 때문에 핍박자가 되었고 훼방자가 되었고 폭행자가 되었습니다(딤전1:1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을 따르지 않은 결과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행13:36). 참으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찾아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점이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이기 때문입니다. 장모를 사랑하는 사위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사서 자신만 실컷 먹고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모가 쇠고기를 좋아한다면 쇠고기를 들고 갈 것입니다. 굴비를 좋아한다면 굴비를 사서 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어르신의 남편과 같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니까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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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1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시기와 때’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9:11). 올 봄에 옥상에 식물들을 심었습니다. 상추와 가지와 고추는 직접 모종을 하였고, 들깨와 백일홍 맨드라미는 작년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은 후 화분에 떨어진 씨가 새싹이 돋고 자라서 핀 꽃과 잎들입니다. 봄에 가장 늦게 싹이 돋고, 늦게 자라고, 늦게 꽃이 핀 것은 맨드라미입니다. 다른 식물들이 앞다투어 새싹을 돋고 열매를 맺어갈 때, 맨드라미는 싹 돋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년에도 경험한 바여서 늦게라도 나오리라 생각은 하였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하나도 안 돋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간혹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역전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늦게 세미하게 싹이 돋더니 계속 위로 솟아오르면서 제일 큰 꽃나무가 되었습니다. 꽃 역시 두 손바닥만 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느낀 바를 쓴 책입니다. 내린 결론 가운데 하나는 빠른 경주자라고 해서 그보다 늦은 경주자보다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보다 많이 처진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시기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때와 시기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면 엉뚱한 일을 저지르거나 시기를 놓치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하여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은 결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6:15-16). 사울은 사무엘이 올 때까지 이레를 충분히 채우지 못하여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신이 직접 드린 결과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사무엘의 경고를 들어야 했습니다(삼상13:14). 둘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반면 부주의 방심하다가 기회를 놓친 예도 있습니다. 에서는 사냥놀이에 빠져서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더니(창25:33), 아버지의 축복까지 도둑맞고 말았습니다(창27:30). 그가 울면서 후회를 하였지만 회개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등을 가진 열 처녀 가운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제때 준비하지 않은 결과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 왔을 때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여 이미 문이 닫힌 후였습니다(마25:10). 노아의 방주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홍수를 내려 사람들을 땅과 함께 모두 멸망시킨다.’라고 전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들조차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방주를 예비하는 데 참여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자신들이 참여한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홍수에 의하여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애원할 때는 이미 문이 굳게 닫힌 후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를 흘려보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에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다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깨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어 있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고전15:34). 깨어 있는 것은 근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8). 깨어 있는 것은 기도와 감사를 의미합니다(골4:2).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은 조급한 자를 기다리는 자로 만들고 나태한 자를 근신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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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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