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 모르시나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찾습니다. 1.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공의’는 하나님께도 옳고 타인에게도 옳고 자신의 양심에도 옳은 것을 뜻합니다. 2.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사람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22:30). 여기서 성은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의 성을 쌓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습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같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같이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공감입니다. 4.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겔9:4). 두 종류의 탄식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탄식과 타락한 세상으로 인한 탄식입니다. 롯은 소돔성의 죄로 인하여 날마다 의로운 심령이 상했지만(벧후2:6-8) 자신의 죄로 인한 탄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불 가운데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두 딸과 함께 굴에서 살면서 술로 여생을 보냅니다. 5. 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는 사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우리 마음을 나누게 하는 것, 전심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염려와 재리와 일락입니다(눅8:14). 그것들로 인해 기도해야 합니다. 6.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행하는 사람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인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 하리라”(창18:32). 하나님은 자신이 경건치 못하는 것을 깨닫고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롬4:5). 7.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2-3). 지각으로 하나님을 찾는 행위는 거듭난 양심, 곧 선한 양심을 힘 있게 쓰는 것입니다(벧전3:21). 8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심’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뜻합니다. 9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시89:20). 종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인 한 분의 뜻을 찾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10 길 잃어버린 사람 “인 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목자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것은 ‘양’이지만 양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것은 ‘목자와 길’입니다. 양의 입장에서 온 우주에 충만하신 주님을 왜 잃어버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골1:21). 회복하기 위해서는 순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5-06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모세의 설교’(신 8:11~20)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땅을 목전에 두고 건너편에서 그 땅을 바라보고 섰습니다. 40년동안 광야에서 참 길고 먼 세월을 지나서 왔습니다. 많은 일들을 함께 겪고 드디어 그 땅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 백발이 성성한 모세가 그 앞에서 당부하고 또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말을 듣는 청중은 20대입니다. 20여년 동안 자기가 겪고 보고 아는 것 이상으로는 알 수 없는 세대에게 노인 모세가 120년 동안 자기가 겪고 보고 아는 것을 쏟아놓는 주옥같은 설교입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자 이제 가나안의 그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분명히 복을 주실 것이다. 그때 너희는 ‘하나님을 잊고,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않는 일이 없도록 삼가라 (신 8;11)’ 고 합니다. 세상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으로 세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냥 자기가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것 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번성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자기 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존재하고 번성합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중의 인간을 특히 교회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나를 상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느껴지도록...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대한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가장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기억을 붙잡아서 흘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어떻게 홍해를 갈라 그 백성을 빼내어 오셨는지, 광야에서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불뱀과 전갈이 있는 위험한 광야에는 물도 먹을 양식도 없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40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 하셔서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아무도 몰랐던 신비한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셔서 먹이시면서 그곳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기적입니다. 광야는 내가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보이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 그래서 하나님이 절실하게 필요한 나, 하나님이 아니면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보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의 본질이 다 드러나서 처절하고 비참한 광야가 저주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라 (신 8:16)” 하나님의 본심은 마침내 광야가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장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은 광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복인데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 말씀이 들리니 순종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복은 비로소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 칼럼
    • WAIC 칼럼
    2020-04-2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제가 시골에 살았을 때는 동네에 보일러를 설치해 놓은 집은커녕 연탄을 피우는 가정도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마른 솔잎과 잔솔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을 지피기 마련인데 그런 나무들에는 구들이 쉽게 달궈지지 않았습니다. 도끼로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집어넣어야 달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들이 얇을수록 방은 쉽게 따뜻해졌지만 반면에 두꺼운 구들은 어지간한 장작에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벌써 몇 번은 일어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을 지피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반드시 달궈진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있기에 멈추지 않고 장작을 넣었던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친구가 당시 잘 나갔던 회사에서 사표를 쓰고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니, 왜 그렇게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나왔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너무 쉽게 들어갔기 때문이랍니다. 쉽게 들어갔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애착이 가지 않아 더 공부해서 자신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직장을 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거나 믿음에서 떠난 주변 사람을 위하여 애타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배우자를 위하여, 혹은 가족이나 친척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는 무관하게 그들이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구들에 불을 지피면 반드시 달구어지리라는 확신처럼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구원은 가족단위입니다. 노아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반항심이 많았던 함도 구원을 받았습니다(창7:6-7).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들을 숨겨주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부모 형제들이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수6:25). 사도행전에 나오는 간수 또한 그의 온 집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16:33). 내가 믿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도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로 믿으면,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형제들에게도 생명이 역사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시작한 지 1년 안에 결실을 거두지만 다른 사람은 10년 혹은 20년이 되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도한 사람이 고인이 되어서야 나타나기도 합니다. 더디거나 느리다 해도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쉽게 달구어진 구들은 곧 식어버리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달구어지는 돌은 쉽게 식지 않듯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간 후에 응답 받은 기도는 그렇지 못한 내용들보다 감사와 기쁨이 더 크며 오래 지속됩니다. 본문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는 말씀은 구원의 때만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모두 적용 됩니다. 육신은 조급한 특징이 있지만 영혼의 성장은 인내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사랑의 감정이 없을지라도 의지를 써서 사랑을 묵상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해 나가면 분명히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 주셔서 사랑의 감정까지 주실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와 간구의 불을 지피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28
  • [WAIC 데일리 기도] 문철진 회장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날 위한 당신 사랑 알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많은 희생 감수하면서까지 날 사랑하시는지요? 그만큼 가치 있는 내 존재인가요?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게지요. 사랑은 사랑하기에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19라는 한낱 미물인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당신의 사랑인 고귀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의료진들의 헌신과 가슴 아픈 사연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던 저희에게 이 비극을 허락하신 이유도 사랑하기 때문인지요? 닥칠 때는 고난이지만 지나고 나면 축복이었던 때가 많았음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개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잘 감당하였을 때 당신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회개의 영을 내려주시옵소서. 가슴치고, 무릎 꿇고 눈물로 회개하는 당신의 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악한 저희로선 당신의 은혜 아니면 그 어떤 거룩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은혜에 의한 회개와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문입니다. 회개합니다. 구원받은 자녀답게 살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저 자신의 안위와 출세에 이용했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이웃 사랑은 말뿐이었고 실천은 저 자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이 먼저였습니다. . . . 긍휼하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죄인이었던 바울에게 내려주신 은혜를 저희에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사랑 아니고는 전혀 변할 수 없는 저희입니다. 염치없게 당신 사랑에 의지합니다. 돌아온 탕자만큼도 못한 저희지만 그래도 당신이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하나님 아버지! 저 멀리서 승리의 나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내주신 불 병거와 천만대군이 마귀들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육안으론 코로나19의 공포를 보지만 영안을 열면 당신 사랑이 충만함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당신 사랑에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죄 많은 저희지만 그래도 사랑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격으로 환희로 세상에 나아갑니다. 거룩한 성결의 삶, 구별된 삶을 살겠습니다. 성령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기드온의 300 용사 삼아주시옵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칼럼
    • WAIC 칼럼
    2020-04-2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앙인에게 고난이란?’(벧전 4:15~16)
    신앙인에게 고난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4장을 통하여 고난의 종류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5절). 신앙인이든 아니든 이러한 죄로 인한 고난은 형벌에 해당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담과 하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 영이 죽게 되었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게다가 아담은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게 되고 하와는 잉태의 고통을 더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죄의 결과입니다(창3:16-19).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지만 죄의 값은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죄를 그치기 위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1절).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갑옷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 고난을 갑옷으로 삼으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알코올에 중독되지도 않고 처음부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금주는 고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고난입니다. 고난이 특별한 고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내게 익숙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고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우리는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을 따라 육신대로 살아가는데 중독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육신대로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니까 고난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니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갑옷으로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셋째는 믿음의 시련을 위한 고난입니다(12절). 우리 하나님은 자녀 된 신앙인들을 그냥 두지 않고 자라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하십니다. 요셉처럼, 욥처럼, 다윗처럼 시련하십니다. 욥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넷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14절).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입니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은 많은 성도들,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이 이에 해당되는 분들입니다. 신앙인들이 고난을 받을 때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받는지 알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잘 못 때문에 받는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생각한다면 회개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믿음의 시련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위에 소개한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신자들에게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시119:71). 죄 값으로 받는 고난은 회개하기에 유익하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받는 고난이나,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이거나,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며 또 위로가 따르기 때문입니다(고후1:5).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받는 형벌을 제외한 위 세 가지 고난들을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겨주십니다(벧전4:12-13).신촌예배당은 안병모 목사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세상을 떠난 안 목사의 뒤를 이어 강성률 목사가 신앙의 공동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청교도 정신과 말씀 중심,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온 성도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2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손’(창 39: 1~6)
    본문은 요셉이 바로의 신하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비참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이 비참한 스토리와 연결이 안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 ‘요셉은 형통한자가 되어’ 상식적으로 어떻게 노예가 형통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노예 요셉이 형통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예가 형통 할 수 있는 것은 주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통은 살면서 가장 무너진 곳 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형통한 사람 요셉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습니다, 상처가 가족 입니다. 요셉은 열 일곱 살 때 형들이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서 애굽 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가해자가 가족입니다. 살다 보면 내 잘못도, 내 선택도 아닌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남에 의해서 내 삶이 처절하게 무너지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겨야 하나요? 생각하고 분석해 봐도 억울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자고 하면서 음식을 먹고 있는 형들의 소리를 듣고 있던 우물 속, 노예로 거래가 되어 집을 떠나 멀리 이집트로 끌려가는 길, 애굽에 도착해서 보디발 저택의 대문을 처음으로 본 그날,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일생일대 위기가 정신없이 착착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계속해서 여호와를 붙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와 함께 계셔 주세요, 나를 놓지 마세요, 내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시 50:15)” 하나님은 말씀대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들어갈 때 이미 형통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였던 요셉에게 이미 총리대신의 자리를 주셨고 요셉은 자기가 받은 복을 일생을 통하여 취하여 마침내 총리대신으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노예소년 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노예소년 요셉 안에 총리대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간보다 크신 하나님은 시간의 밖에서 보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 모습이 구원의 기준에 미달 되는 형편 없는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미래에 구원받은 완전한 나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십니다. 형통한 요셉은 마침내 우여곡절을 다 겪어내고서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저는 요셉이 하나님을 믿고 성공하고 잘되었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소명을 이룬 것입니다. 그 소명을 위하여 총리대신 이라는 자리를 주셨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고, 자기가 받은 것을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쓴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주신 축복을 받아서 취하였고, 그 자리에서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망은 환경이 아닙니다. 소명을 잃어버린 것이 절망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처참하게 불행한 요셉의 가족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면 얼마나 불완전하고 비뚤어진 인생인지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믿고 소망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집니다. 흑암 같은 요셉의 잔혹한 가정사에도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이 있으면 빛나는 영광으로 변화됩니다. 할렐루야!
    • 칼럼
    • WAIC 칼럼
    2020-04-2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하신 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11:6). 아직은 젊고 건강하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어느 날 갑자기 병들었습니다. 병은 의원을 찾아갈 틈도 없이, 간호할 틈도 없이 빠르게 악화되었습니다. 목숨이 경각간에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38년 된 불치 병자를 고치시고,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며, 중풍병자를 고치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부탁하면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특별한 관계에 있는 두 자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위해서라면 열 일 다 제쳐 놓고 오실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도 그들의 기대처럼 곧바로 오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그리고는 마치 나사로가 죽는 날을 기다리기라도 하신 것처럼 나사로가 죽은 후에 비로소 베다니를 향하여 떠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육안으로 보기에 모두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나사로처럼 갑자기 병들 수도 있고, 또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일도 어그러지고 풍비박산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기도가 즉각 응답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건너편에 머무시는 동안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서는 애타게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오히려 상태가 더 악화 되어 죽음까지 가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이 간혹 우리의 기대에 맞지 않는다 해도 신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욥36:24). 신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의 지각을 초월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고전2:9).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야곱 생각에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타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의 뜻대로 안 되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22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공개된 지성소’(마 27:45~5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신 후, 성소에 있던 휘장이 갑자기 위로부터 아래 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누가 힘을 써서 찢기도 어려운 휘장이 갑자기 찢어진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후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 되었습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관계가 있는 사이입니다. 관계없는 사이가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그분의 백성“의 관계 입니다. 둘의 관계가 서로의 말을 들어 주는 것으로 유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관계가 유지됩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 하겠다고 했고, 그 언약은 피로 서명을 했습니다.(출 24:7~8) 피는 생명입니다, 이 언약은 생명 걸고 지켜야 하는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시작했습니다. 그 언약 후에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성막 안에 있는 첫째 방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면전이라 두려워서 아무도 함부로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잘못하면 죽으니까 아무나 함부로 못들어갑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습니다. 온 백성 중에서 대표인 대제사장 한사람 만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갑니다. 그것도 피 없이는 안되었습니다. 이 피는 자기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야 통과되었다, 그런데 그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니 지성소가 다 드러나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안전했던 것은 피를 들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피의 정체가 무엇인가? 짐승의 피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짐승 피가 아닙니다. 내 대신 죽은 짐승의 피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하는 데 그 언약서 대로 다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못 들어 갑니다. 게다가 생명 걸고 맺은 언약이니 말씀을 못 지키면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내 생명을 다시 살게 하시려고 제단에서 동물의 생명을 나에게 대신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레 17:11) 짐승의 생명을 가지고 가서 내 생명을 다시 받아오는 것입니다. 짐승의 생명이 피입니다. 모든 육신의 생명은 그 피가 생명 입니다, 생명과 피는 동일하게 봅니다. 의학적인 전문지식이 진리 안에 들어있습니다. (레 17:14) 그래서 짐승의 생명인 피를 들고 갑니다. 그러면 안전합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이 피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고 들어 가면 안전했던 그 피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서 대로 약속하신 말씀을 다 못 지킬 것을 아시고 이렇게 지시하신 것입니다. 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꼭 짐승의 피여야만 합니까, 다른 것으로는 안됩니까? 생명은 생명으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 계산이 정확합니다.(출 21:23~2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하늘의 성소로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은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동물의 피가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피가 십자가에서 땅 위로 떨어질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지성소의 문이 활짝 열려져 버렸습니다. 지성소의 문이 공개되었으니 이제 아무나 절차와 관문 없이 지성소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피를 믿는 자는 누구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1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부활의 권능’(빌3:10-12)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생명에는 부활의 권능이 있습니다. 부활의 권능은 낙심과 실망,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권능입니다. 최후 만찬이 끝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때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1-35)라고 말합니다. 이렇던 베드로가 서슬 퍼런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자신만만한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고(눅22:31),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었으므로 주님을 위하여 자신이 한 결심을 이룰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베드로는 낙심과 실망, 좌절, 심한 죄책감을 극복하고 일어나 오순절 후에 삼 천 명이나 회개시키는 사도가 됩니다(행2:41). 나중엔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순교까지 합니다. 이처럼 부활의 권능은 실망과 좌절에서 일어서게 하며, 주님을 위한 선한 뜻을 이루게 합니다. 부활의 권능은 옛 자아를 깨뜨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 신앙인들을 훼방하고 핍박하고 폭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딤전1:13). 심지어 여인들까지 옥에 가두는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행22:4). 이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권능을 받은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행15:26). 눈물이 많은 사도가 되었습니다(빌3:18). 이처럼 부활의 권능은 믿기 전과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되도록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을 이타적인 사람으로 바꾸고, 인색한 사람을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바꿉니다. 탐욕적인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부활의 권세는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눅10:19). 뱀과 전갈은 사탄의 두 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뱀은 유혹하는 특징이 있습니다(창3:1-6). 전갈은 쏘는 특징이 있습니다. 부활의 권세는 유혹하며 참소하는 자를 물리칠 권세입니다. 사람의 두뇌가 발전한 것처럼 사탄도 발전하였습니다. 옛 뱀이 지금 용이 된 것입니다(계12:9). 온 천하를 꾀는 마귀를 어떻게 분별하며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독수리의 두 날개, 기도의 날개로 이길 수 있습니다(계12:14). 온갖 못된 말들로 참소하는 마귀를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찬미와 감사입니다(시8:2). 기도와 하나님을 높이는 찬미는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유혹이 옵니까? 기도하십시오. 여러 가지 상처 주는 말이나, 불안하게 하는 생각들이 파고듭니까? 하나님을 믿고 감사와 찬미를 부르십시오. 감사와 찬미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일하실 근거이며, 마귀를 질식하게 만듭니다. 부활의 권능은 낙심과 좌절에서 일어나게 하는 권능이며,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능이며, 우리를 유혹하고 참소하는 마귀를 물리치는 권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 권능이 나타나도록 죽으심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14
  • [WAIC 데일리 기도] 곽수정 전도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도문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며 지켜주시고 어떠한 상황 속에도 주님만을 바라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적 균형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됨을 망각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는 죄악성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무지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음행이 난무하고 사이비 이단이 판치면서 우리의 죄는 갈수록 악행으로 번져가는 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멀어졌다면 저희들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지금은 죽음의 기로에서서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하는 성숙치 못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 용서하시고, 코로나19로 인하여 전 세계가 떨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비눗물로 손 씻고 마스크 쓰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를 건강하게 지켜주신 하나님 질병도 주의 손에 있음을 믿으며 기도하오니 바이러스의 확산을 하루속히 종식되게 하시고 감염자들이 속히 회복되게 도와주소서. 질병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기관과 의료진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합당한 치료약이 개발되게 하소서. 우리 기독인들은 나라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의 모범이 되게 하소서. 하루속히 본당 예배가 준비되게 하시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게 하옵소서. 살아 역사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칼럼
    • WAIC 칼럼
    2020-04-1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