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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약속’(창 2:16~17)
    사람의 인생 안에는 알게 모르게 계약, 언약, 혹은 약속의 관계가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계약’이라고 하면, 부동산이나 각종 매매와 사업 관련 계약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 말고도 사람과 사람 간에, 사람과 국가 간에, 그리고 사람과 기업 간에 본의 아니게 각종 계약이나 약속의 관계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와 자녀 간에도 부모로서의 자격과 역할, 자녀로서의 자격과 역할이 주어지게 되어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책임이 생기게 되며, 자녀는 부모의 말씀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가정 내 질서를 따르는 의무가 주어지게 됩니다. 국가와 개인 간에도 이러한 역할이나 책임이 따라오게 되어 국가는 여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국민에 대해 국가로서의 의무와 구제 방안을 시행하는가 하면, 국민은 납세의 의무라든지, 국방의 의무라든지 이러한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인생을 사는 동안, 비록 서류상의 의식적인 결정의 과정이 생략된다 할찌라도 은연중에 각종 계약이나 약속의 관계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병원에서 수술을 할 때나,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는 경우에도 만약의 경우 본인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각서를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에도 분명한 계약과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는 약속과 함께 요구가 들어가게 됩니다.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언약으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 영생과 죽음이 선포된 ‘선악과 언약’이 있고(창 2:16-17), 다시는 물 심판으로 지상의 생물들이 멸망 당하지 않을 것을 선포하신 ‘무지개 언약’이 있으며(창 9:8-11),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시내산 언약’(출 19:5-6)이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각각 모여 목도하게 된 ‘모압 평지에서의 언약’(신 29-30장)이 있습니다. ‘선악과 언약’의 경우 인간의 행위에 의해 복과 저주가 결정되므로 이를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며, 나머지는 주로 ‘은혜언약’으로 부릅니다. 이런 의미 가운데, 본문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의 외출을 앞두고 치명적인 사고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미리 당부해주는, 위험에 대한 경고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과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부모의 선한 의지와 사랑이 담긴 경고나 메시지를 엄수하는 자녀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고 부모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 연속된 축복의 약속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부모의 사랑과 경고를 무시하며 살다가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도 이러한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불순종으로 행하다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까지 죄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만이 아니라 모든 후손들까지 죽음에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 사건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하나님과 그 자녀 된 우리와의 관계, 즉 언약의 관계는 지금도 똑같이 적용되며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을 귀히 여기며 충실히 따르고 적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은혜를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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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28: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항상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요 14장)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마 1:23) 본문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꿈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여호수아에게도(수 1:5), 다윗이 죽은 후 성전을 건축할 솔로몬에게도(대상 28:20), 이 땅 위에 남아 복음전파 사명을 완수해야 할 제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항상 함께 계시는 주님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 31:5)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임종할 때도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창 48: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것은 이미 족장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b)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쫓겨나 광야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주셨습니다.(창 21:2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사람들과도 함께해 주십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아무도 의지할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실 때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과 함께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사 4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역대하 13장을 보면, 아비야와 여로보암의 전쟁에서 유대 왕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12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은 그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사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한 개인에게 임하시면, 성령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도와주실 것을 이미 예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권세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탄의 권세가 지배하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26)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막 13:33)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엡 6:12)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악한 모든 세력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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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비참함에서 벗어남’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위의 말씀을 하셨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을 강조한 새로운 계명을 예고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과 매우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랑이 결핍된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모습입니다. ‘전가’(轉嫁)란, 잘못이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씌우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전가한 사람이 ‘가인’입니다. 가인은 평소에 선을 행하지 않고 사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자, 안색이 변하고, 하나님께 대들었으며,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의 도리를 선하게 잘 감당하고 있는 아벨이 미운 나머지, 동생을 쳐 죽인 인물로 유명합니다. 우리는 가인을 남 보듯 하지만, 그런 기질은 곧잘 따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 가부장 중심적인 사회였을 때, 남편으로부터 ‘쿠사리’, 즉 구박을 받은 아내가 우울한 나머지, 속이 안 풀려 자식들을 향해 훈계를 핑계로 화풀이성 매를 드는 경우가 이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성경에서는 교육적인 차원에서의 매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매를 치는 그 마음에 자기의 화를 담아서 치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매를 맞는 자녀는 어머니의 우울감과 화를 동시에 느끼게 되면서 덩달아 우울한 자녀가 되고 침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교회로 가져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도의 경우 본인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삶을 살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경우 시험에 들게 되는데, 그에 대한 분풀이를 교회에 나와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교회 생활을 하면서 매사에 꼬투리를 잡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니면서 누군가를 계속 비난하거나 누군가의 행동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 타인을 정죄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러한 모습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와 삶을 받지 않았던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도를 왜 받지 않으셨을까요? 왜 그 입술에서 기도와 찬양이 나오지 않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마음 밭이 길 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긴 하지만, 깨닫지 못하거나, 믿음의 뿌리가 부실하거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앞에 넘어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도 우리와 같이 주를 향한 열정과 믿음이 있으면서도 여전히 좌충우돌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음이 부족해 방황했던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온전한 믿음보다는 열정이 앞선 결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던 자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의심많은 도마는 “주님, 저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따져 묻기도 합니다. 그런 도마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미천하고 비참한 인생은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비참함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회가 있으며, 그 말씀을 통해 더욱 새롭게 될 수 있는 은혜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자신의 누추함과 비참함을 버리고, 온전히 예수님과 동행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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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나라를 사랑한다면’(사 32:15-20)
    지금 대한민국은 큰 위기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할 때 유대 나라는 약소국으로서 내외적인 침공으로 존망의 기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 안보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영이 백성에게 부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15절)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파멸과 불안의 시대를 평화와 정의의 시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은 ‘정의의 영’이며 ‘공의의 영’입니다.(16절) 여기서 말하는 정의와 공의는 사회의 약자를 배려하고 약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고 그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즉 정의와 공의의 삶이란 약자 돌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정의의 영과 공의의 영으로 약자들을 돌보면 화평과 평안과 안전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공의의 삶, 즉 약자 돌봄의 삶이 나라에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나라 안보는 공의의 열매이며, 그것은 가난한 자를 돌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주변의 약자를 돌보는 것이 나라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나라 위기의 탈출구는 세상의 권력과 무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굳건한 믿음을 갖는 것이 위기 극복의 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힘을 의지하는 것은 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거역하는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가 계획을 추진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사 30:1)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나라 안보는 강한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역을 행하실 때 성령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까지 공의를 이루실 분입니다. 주님은 약하고 힘들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자유를 되찾아주시며 힘을 북돋워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 정의는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정의를 이루실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다투지도 않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힘없고 연약한 자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마 12:18-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정의를 세우신 주님을 따라가며 우리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대하 7:1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 주님께서 다시 번영시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조용하였고 주님께서 그 나라와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아사 왕은 백성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평안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대하 14장) 우리 민족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성령께서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는 백성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출 32장) 모세야말로 백성을 사랑한 애국자이지요. 우리도 모세처럼 우리 민족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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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성품의 중요성’ 딤후 3:1~5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어려운 때를 만날 것이라고 본문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말할 때면 보통 지진이나 전쟁 등이 떠오르는데, 디모데후서는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이 겪는 고통 중에서도 파괴된 성품에 대해 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5절의 내용은 모두 말세에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고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동성애를 몹쓸 죄악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물론 동성애는 비성경적이고 우리 사회와 문화에 전혀 맞지 않으며, 인륜에 반대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경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은 자아를 존중하는 그런 긍정적인 사랑이 아닌, 극히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방향과 본질이 빗나가 있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속성상 어떤 대상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의 첫 번째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며, 그 다음은 이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만 보더라도 모든 구조가 타인을 위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돈을 버는 일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필요를 충족하는 대가로 지급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점점 자기를 사랑하는데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아니고, 이웃이나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된 것입니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맞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아야 하고, 이웃들로부터 사랑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고 엔돌핀이 생기며, 생기가 돌게 됩니다. 그런데 점점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다 보니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에 집착하다 보니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우울증이 따라다니는 삶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엔돌핀이 아닌 우울과 불안을 동반한 호르몬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생활 속에서도 나타나지만, 교회 안에서 비롯되는 많은 불편하고 빗나간 관계들도 사실상 자기를 위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의지가 굳어져서 나오는 완고한 모습이 발현되는 순간 많은 불협화음이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는” 모습(2절)도 모두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웃을 돕기 위해서 돈에 눈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아는 자가 교만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가 부모를 사랑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사랑의 방향이 자기만을 향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도, 거룩한 마음도 들기 만무한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웃을 향해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며 사나운 데에(3절)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굳이 애걸복걸할 필요 없이 여전히 무정하고 타인을 쉽게 모함하거나 사나운 기질을 고수할지라도 충분히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만을 사랑하는 삶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괴롭습니다.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2천 년 전에 오늘날의 현상을 한치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나열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것은, 어떤 종교적인 모습이 아닌, 제대로 된, 본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순전한 인간의 모습과 성품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대로의 성품을 소유한다면, 그러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러한 사람은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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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성령충만과 상’(출 31:1-5, 고전 9:18)
    사울은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춤추며 예언을 하였습니다.(삼상 10:10)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주님의 영이 떠났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습니다.(삼상 16:14)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왔을 때 뉘우치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시 51:11)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충만은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 브살렐은 성령충만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직분을 감당할 때 성령충만하였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신 3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영적인 안목이 밝아져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백성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트집을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어디서든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 특징은 정상적인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하면 부부관계, 자녀관계, 고용주 관계 등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엡 5-6장)성령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성령의 열매(fruit)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하나입니다. 그 방법이 여덟 가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려면,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음 없음을 깨달을 때 믿음이 돈독해집니다. 믿음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 9:24)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사 55:8) 셋째,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행 2:38-39) 회개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 12: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를 드리도록 인도하시며,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해주시는 성령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존재를 믿고,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로 있어야 상을 주시는데, 사역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상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칭찬받을 수 있는데 칭찬을 안 받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주신 사명 위해 충성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자기 인생을 마라톤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을 달려가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행 20:24) 바울은 지나간 것으로 만족하거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복음 전파와 계속 성장해야 할 자신의 신앙을 추구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성령충만함으로 미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며 주님의 상을 바라보고 복음 전파와 자신의 신앙 성장에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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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3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의 흔적’(갈 6:17-18)
    한평생 주님의 사도로 신실하게 살았던 바울에게는 입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전도자들과 달리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며 깊은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흔적이라는 말은 ‘스티그마’라는 단어인데 고대사회에서 주인들이 자기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노예의 어깨나 엉덩이에 화인을 찍은 데서 유래했습니다. 불에 달군 쇠를 노예의 살 위에 찍어 자기의 소유임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낙인(烙印)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종임을 당당하게 말했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인 사실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그리스도의 소유됨과 고난의 상처로 대변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도 아니요, 마귀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사 43:1).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면서 하나님의 것이지(고전 3:23) 그 외에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속했으면 주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고 또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최대의 기쁨과 최대의 영광으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음으로 예수의 흔적은 고난의 상처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따라가느라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핍박을 당했습니까? 바울의 몸은 고난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그는 희생적인 복음의 사자로서 숱한 고난의 흔적 영육 간에 증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고후 11:23-27). 고후 4:10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대속의 희생으로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예수님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바울은 도리어 그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말했습니다. 그 해답은 마 5:11-12절에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매 맞는 것 주님을 위하여 욕먹는 것 주님을 위하여 원망 듣는 것 주님을 위하여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가운데 고난과 눈물과 희생이 따를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과 발에 못 박힌 상처, 주님의 옆구리에 난 창자국 가시관을 쓴 자리에 난 주님의 머리의 상처는 누구를 위한 상처입니까? 모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요 눈물의 흔적이요 매 맞은 흔적이요 찔린 흔적이요 피의 흔적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묻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나는 발자취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발자취를 존귀케 여기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녀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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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시선을 주님께’(마 2:1-18)
    시선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의 시선을 살펴보고, 베드로의 시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시선, 가나안 여자의 시선, 바울의 시선을 살펴봅니다. 그들이 주님께 시선을 집중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고, 시선을 집중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살펴봅니다. 첫째, 동방박사들의 시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찾아온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간 그 아기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아기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의 시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천사가 전하여준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듣고 별을 따라서 가다가 그만 잠시 별을 보지 않고 헤롯 궁을 바라보았습니다. 왕궁에서 왕이 태어나실 줄 알고 생각의 시선대로 찾아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자 당황한 헤롯은 결국 베들레헴과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에서 잠깐 시선을 떼자 바라보지 않아야 할 곳을 바라본 것이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 생각의 시선대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다가 잠깐이라도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도록 시선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 베드로의 시선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물 때에 제자들이 탄 배가 육지에서 멀리 떠나서 강풍으로 고난당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인 줄 모르고 유령이라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이 물 위로 걸어가도록 예수께 부탁하고,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시선을 주님께 집중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께 시선을 떼는 순간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다가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며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가벼운 사람은 풍랑을 만날 때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선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셋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시선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으나 두 제자는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얼마나 무디던지,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빵을 떼어주실 때야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두 제자처럼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면서 말씀해주시고, 들어주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얼마나 무디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넷째, 가나안 여자의 시선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와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쳐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께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신의 간청에 거절당하자 더욱 주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다가가 마침내 딸의 병을 치유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여자의 시선입니다. 가나안 여자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시선을 집중할 수 있습니까? 다섯째, 바울의 시선입니다. 바울은 성령님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고,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이면 가고 싶어도 가지 않았습니다.(행 20장) 이것이 바울의 시선입니다. 바울은 생명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고후 5:14-15) 바울은 다양한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약한 것 때문에 기도를 더 많이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시선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시선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시선을 주님께 집중하여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힘을 다해 동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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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반석에서 생수를 주신 교훈과 의미’(출 17:1-7)
    모든 인생들은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험악한 인생행로에서 목마르고 갈증 난 인생들은 저마다 갈증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생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공허합니다. 본문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던 중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물이 없어 아우성치며 원망한 사건을 일어났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기도하니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샘을 파라하지 않으시고 반석을 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사고력을 길러주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여호와의 명령대로 나갔음에도 물이 없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만납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이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 갈증의 고통입니다. 인생행로에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나 고통이 있을지라도 성급하게 불평하거나 원망치 말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깊은 뜻을 분별해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얻게 하신 데에는 단순히 기적으로 물을 먹게 했다는 뜻 이외에 깊은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모세가 친 반석은 호렙산에 있는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반석이었습니다. 이 반석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여 주신 반석입니다. 이스라엘이 마신 그 물은 신기한 기적의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10:4에서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해석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적 갈증에 허덕이는 인생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 물을 얻기 위해서 세속적인 쾌락의 강을 찾기도 하고 철학의 시내를 찾기도 하며 부의 샘물을 파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배척을 받고 슬픔과 애통을 맛본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인 생수가 나오며 그 생수만이 영혼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요 7:38-39). 사 55:1에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값없이 와서” 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하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요 4:14). 이 세상의 향락이나 물질이나 아름다움이나 명예나 사상의 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바닷물처럼 더욱 심한 갈증을 가져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십니다. 혼미해지고 배고프고 목마를 때마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만족하려 하지 말고 차라리 때리시더라도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품을 찾아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양식으로 충족함을 얻고 참된 생수로 만족함을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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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비하신 예수님’(마 4:23-25)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자비를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긍휼을 받을 만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주시는 것이지요. 죄인인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죄와 사망을 다스려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모든 환자를 데리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자비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보시고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자비하다’는 ‘긍휼히 여긴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은 ‘함께 고통을 당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긍휼은 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불쌍한 자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같은 감정으로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한 형식뿐인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죄인인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받은 은혜대로, 나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공감하며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긍휼한 마음으로 도와준 것을, 주님을 섬긴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자비의 마음으로 기쁘게 섬겨줍니다. 약자나 장애인을 섬기는 삶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레 19:13-14)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말씀을 상징하며(렘 23:9), 기름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즉 상처는 말씀과 성령님의 도움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긍휼이란 자기를 희생하면서 불쌍한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은 주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아그립바 왕을 긍휼히 여겨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라고 바울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아그립바는 애매한 대답으로 바울의 질문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뵙니다.”(행 26:2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긍휼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8장을 보면, 굶주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즉 동정함으로 선행을 행하면, 죄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항상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영혼육의 건강함과 풍성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10-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와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마땅히 행할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엡 4:32) 진정한 긍휼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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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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