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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세례파 유아세례 논쟁
    ◇유아세례가 교회에 들어온 것은 6세기경이다. 교회사가들은 그 이전의 교회역사에서 유아세례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로인하여 중세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 운동’이 생겨났다. 재세례파 운동이란 종교개혁 세력 간에 많은 논쟁과 희생이 따랐던 사건이다. ‘재세례’(再洗禮, anabaptism)란 가톨릭교회의 관례에 따라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신앙고백에 따라 다시 세례(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속키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어서 “믿는 자의 세례”라는 것이 재세례파의 주장이다.◇다음은 종교개혁 당시 유아세례에 대한 재세례파의 주장과 루터의 반박이다. ① 재세례파: “유아세례는 적그리스도인 교황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루터: 재세례파는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 진영의 세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도 속이는 것이다. ② 재세례파: “유아들은 자신들이 받는 세례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후에 부모나 후견인에게 그 의미를 배울 뿐이다.” 루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말이 아니고는 우리의 출생과 그 밖의 많은 것도 아는 것이 없다. ③ 재세례파: “유아들은 믿음을 발휘할 수 없다.” 루터: 그리스도는 천국이 어린아이들에게 적합하다(마 19;14)고 했고,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 믿었다(눅 1:14). ④ 재세례파: “성경에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없다.” 루터: 그러나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라는 주님의 대사명(마 28:19)에는 유아들도 포함된다.◇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가톨릭교회의 유아세례의 전통을 유지했고, 재세례를 이단으로 간주했다. 세례는 일생에서 한번 받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세례의 방식이 쟁점이 아니었다. 루터는 침례를 선호했고, 칼빈은 세례의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농민전쟁과 뮌스터 사건을 거치면서 재세례파의 급진적 개혁운동이 종교개혁 진영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특히 후프마이어를 비롯한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빙자하여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본 것이다.◇지금에 와서 보면, 교회가 ‘유아세례’를 하면 어떻고,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인세례’만을 주장하면 어떻다는 것인가 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재세례파 운동은 종교개혁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재세례파는 로마 가톨릭과 개혁세력 진영 양쪽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들은 자발적 원리의 옹호자들이었으며, 신앙의 자유를 위해 죽어간 순교자들이었다. 현대사회의 정교분리 원칙과 종교의 자유는 그들의 희생에 바탕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그런데 아직도 ‘세례’와 ‘침례’를 가지고 논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 침례파가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에거 다시 침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이단적인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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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7
  • 유아 세례
    ◇예장통합측은 1983년 제68회 총회에서 “유아 세례를 성경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인하며, 구원의 확신이 생긴 후에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로 권신찬 목사를 ‘이단’이라고 규정한 일이 있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는 유아 세례가 6세기 이전에는 기독교에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유아 세례를 베푸는 교단은 흔히 유아 세례의 근거로 사도행전 2장 38-39절을 인용한다. 즉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과, 16장 33절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다.◇여기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약속에 “너희와 너희 자녀”가 포함되고, 또 “그 권속”에는 집안의 어린 아이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를 줌으로써 그 부모가 그 자녀에 대한 책임을 느껴 신앙으로 지도할 의무를 감당하려고 노력하게 되며, 유아 세례를 받는 자는 장성한 후에 자기 자신의 신앙을 당회와 교회 앞에서 직접 고백하는 입교식을 행하기 때문에 유아 세례도 성인의 세례와 동일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예장통합 제68회 총회)는 것이다. 신앙은 교육이고, 전수이며, 유산이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이같은 주장에는 상당한 일리가 있다.◇그러나 문제는 통합측이 “유아 세례를 반대함으로 이단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극히 장로교적인 규정으로 대단히 위험한 결정이다. 전 세계 환원주의 교회들과 침례파 교회들은 유아 세례를 성경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성경에서는 명시적으로 “유아 세례”의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 세계 개신교 인구의 약 절반에 이르는 그들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자들이 모두 이단이란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학문적 배경을 가졌다 하더라도 ‘무지’(無知)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한국교회에도 침례교, 그리스도교, 오순절 등이 유아 세례를 반대한다. 만약에 “유아 세례를 반대함으로 이단이다”라고 규정하려면, 특정인에게만 그렇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그들 교단들도 모두 이단으로 규정해야 마당하다.◇통합측은 금년에 제100회 총회를 맞아 이번에 ‘총회 특별사면위원회’를 설치하고, 통합측 교단에서 권징을 받은 자들이나 이단으로 규정된 자들에게 사면의 기회를 준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되면 제100회 총회의 표어대로 통합측 총회는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길이 남을 “화해케 하는 일”로 평가될 것이다. 통합측 총회는 그동안 이단으로 규정되어 교계에 물의를 일으킨 집단들에 대해 먼저 사과나 재발방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통합측은 자신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자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통합측 교단 스스로도 타교단 인사들에 대한 이단 시비에서 무리함이 없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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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15
  • 종교정당
    ◇정당 투표제가 생긴 이후인 18대 총선부터 매번 선거 때가 되면 종교의 이름으로 총선에 나서는 정당들이 있다. 그 종교집단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중심이 된 정당들이다. 이번에도 기독교를 앞세운 ‘기독당’들이 창당되어 선거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당은 정당으로서의 인지도는 매우 낮다. 기독당이 한 번도 원내에서 활동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구에서 기독정당의 이름으로 출마하려는 후보는 거의 없다. 그러나 기독당은 18대 총선에서 44만여표를 얻었으나 원내 진출에는 미치지 못했고, 19대 총선에서는 그나마 절반 가까이 줄어 25만여표에 그쳤다. 그런데 이번에 또 그 때 선거를 주도했던 인사들이 기독당을 창당하고 선거에 돌입하고 있다. ◇기독정당은 유럽의 전통적 기독교 국가에는 거의 다 존재한다. 독일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집권당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들 국가의 기독당은 기성정치인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정강정책으로 삼아 만든 정당들이지, 목사나 장로들이 모여 만든 정당은 아니다. 전직 목사나 장로가 그 정당에 참여할 수는 있다. 그러려면 목회를 접고 순수 정치인으로 나서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그들과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현직 목사들이 나서고 있다. 그러다보니 왜 목사들이 정치에 나서나 하는 비판을 받게 되고, 그것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교계 안팎의 신뢰를 얻기도 어렵다. ◇이번에 창당된 ‘기독자유당’의 경우, 그들이 내건 취지문은 8년 전 또는 4년 전 창당 때에 내세운 명분에서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세계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 이혼율 2위, 청소년 흡연율 세계 2위, 교통사고율 1위, 유흥업소 종사자 200만 이상, 양주소비량 1위, 인터넷도메인 음란 접속율 1위, 유네스코 통계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는 반항아 1위, 일하기 싫어하는 니트족 80만명 육박, 무속인 70만명, 한 사회의 사회악을 가늠하는 형사 소송율이 일본의 10배, 대한민국을 위험에 빠트리는 종북좌파세력”의 척결을 위해 기독당을 창당한다는 것이다. 마치 고장난 레코드를 듣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기독정당으로써 어떻게 하겠다는 정책적 대안은 찾아볼 수 없고 안보와 보수주의만 부르짖는다. 심지어 북한에 맞서 우리도 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현재 우리사회에는 기독교인들의 리더십이 두드르지게 나타나고 있다. 기성정치인 가운데 약 40%는 기독교인이다. 19대 국회에도 약 35%에 이르는 기독인이 있고, 전국 지자체에도 많은 기독교인이 포진하고 있었다. 정치인뿐 아니라 장·차관과 고위 공직자, 군 장성, 대학 총장, 각급 학교장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 비율이 매우 높다. 이는 교회가 그만큼 사회적 지도자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왜 기독정당에 참여하려는 이렇다할 정치인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사회에서 아직 기독정당 이름으로는 지역에서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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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6
  • 돈오돈수·돈오점수
    ◇불교에는 깨달음의 방식을 놓고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논쟁이 있다. 돈오돈수는 특별한 수행 없이 어느날 단박에 불교의 진리를 깨쳐서 더 이상 수행(修行)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고, 돈오점수는 불교의 진리를 깨치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체계적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돈오(頓悟)는 갑자기 돈(頓)자와 깨달음 오(悟)자를 써서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고, 점오(漸悟)는 점점 점(漸)자와 깨달음 오(悟)자를 써서 수행을 통해 점점 깊이 깨닫는 것이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 둘이 다 진리를 깨닫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이것을 기독교의 진리를 깨우치는 과정에 대비하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 사도들은 예수를 3년간 따라다니며 하나님 나라 진리를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부활하기 전까지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달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베드로만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마 16:16)고 고백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 15:16). 또는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 16:9)라고 힐란하며,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고 예고 했다.◇그리하여 예수의 부활 승천 후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공동체 전체가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진실로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에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는 음성을 듣고 개인적으로 단번에 그가 곧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다. 이후 기독교 역사에는 수 많은 교부들이 특별한 수행과정 없이 성경의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아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은 곧 ‘돈오돈수’이다. 또 그와 함께 역사적 기독교는 신학훈련과정을 두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목회자를 양육했다. 그것은 곧 ‘돈오점수’인 셈이다.◇한국교회에도 흔히 신학훈련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경만을 깊이 연구해 기독교 진리를 통달한 목회자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성경을 가르치고 열정적 설교도 하지만 비신학적 용어 사용으로 인해 비판을 받는다. 그래서 교회에서 익숙치 않은 그들의 한두 마디 언사로 인해 '이단 시비'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다면 그는 곧 ‘돈오돈수’로 기독교의 진리를 체득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체계적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도 신학적 용어만 바르게 선택해서 사용할 수만 있다면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를 ‘돈오돈수’로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여 우리가 내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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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부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 26:19). 구약성경에는 ‘부활’이란 용어는 없다. 그러나 이처럼 부활을 뜻하는 구절은 많다. 에스겔서 37장은 한 골짜기 지면에 흩어져 있는 뼈들이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4절)라는 에스겔의 대언에 따라 그 뼈들이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살아 일어나서 큰 군대를 이룬 환상을 말하고 있다.◇기독교는 인간 예수의 생(生)과 사(死)와 부활(復活)에 있어서 하나님이 독특한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歷史) 속에 들어오셨다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생애에 관한 이 네 가지 설명을 믿는 사람들이 이것을 ‘복음’(福音, 기쁜 소식)이라고 한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 4복음서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을 믿지 않고는 결코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부활은 그들의 신앙의 초석이었다. 이 부활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은 암혈과 불과 칼의 위협도 감수했던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가 채택한 신조들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첫째, 부활은 예수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증거였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이 그의 메시야, 그의 선택된 대리자를 보내어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정의의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어왔다. 마침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예수가 나타나자 그의 추종자들은 그분이 오래동안 기다리던 메시야가 되어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예수는 많은 사람들이 바래는 메시야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군대를 모우지도 않았고, 왕이 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다 끝내 평법한 죄인의 모습으로 체포되어 멸시를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죽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실패로 보였다. 주변에 모여들었던 무리들도 흩어졌다. 그런데 그가 부활한 것이다. 그의 부활은 결국에 예수가 하나님의 대리자이시며,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둘째,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악의 영보다 예수의 영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묘사하는 한 마디 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보여준 이 하나님의 본성을 전파하기 위해 이방 세계로 나아갔다. 이방 세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라는 말이 이 신앙을 표현하는데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특히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주’(Lord), ‘구세주’(Savior), 또는 ‘독생자’(only begotten Son)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고백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에 바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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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7
  • 기독교의 불관용
    ◇초기 로마사회에서 ‘불법적 종교’로 박해받던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합법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자 바로 직전 디오클레티아누스(245-312) 황제의 박해 시절에 그 박해에 굴복한 ‘배신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성경’을 내어놓으라는 당국의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을 거부하고 순교한 사람들도 있었고, 마지 못해 성경을 넘겨 준 자들도 있었다. 당국과 타협한 자들은 분노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타협하지 않은 자들은 타협한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세력은 갈라져 서로를 비난하며 싸웠다. 거기에 당국이 몰수했던 교회 건물들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주라는 황제의 명령이 나오자 그 건물을 차지하려고 서로 죽이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기독교는 박해 아래 있어서 한번도 전체회의를 통한 교리를 확정하지 못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기독론’이었다. 나사렛 예수가 과연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성부)과 똑같은 신(神)이냐, 아니면 하나님보다는 좀 낮은 단계의 신(神)이냐(아리우스주의)를 놓고 갈라졌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에서 기독교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그때까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세례를 받은 것은 337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공의회의 결과 아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공표됐다. 그럼에도 제국의 절반은 아리우스주의를 선호했다.◇공의회 이후 양쪽은 서로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며 죽였다. 366년에는 한 교회에서만 서로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137명이나 되었다. 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3만명이 죽었다.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200년이 지난 527년에 왕좌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아리우스파인 반달 족과 북유럽의 고트 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파견했다. 그 시대 최고의 군사적 천재였던 벨리사리우스는 끝까지 아리우스주의를 고집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몰아 5년여에 걸쳐 모두 죽였다. 그래도 아리우스주의 신앙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유스티아누스는 기독교를 거부한 제국내 엄청난 수의 이교도들도 모두 죽였다.◇이는 초기 기독교가 '교리'를 바로 세운다는 미명하에 저지른 불관용이 낳은 비극이다. 이후에도 기독교는 이단 논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불태워 죽이고, 물에 빠트려 죽이고, 고문해 죽였다. 2000년의 방대한 교회사에는 페이지마다 그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오늘날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교회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을 뿐, 자신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아 사회적 종교적 사형을 언도하고 있다. 그러면 이단으로 몰린 그들은 사회적 활동이나 결혼, 가족 관계 등에 엄청난 불이익을 당한다. 거기에 교회사가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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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0
  • 배교자
    ◇배교자(背敎者)는 초대교회에도 있었다. 배교자는 한때 믿음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빛을 경험했으나, 어떤 유혹에 빠져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 2:19)라고 했다. 또 히브리서 10장 29절은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한다. 이는 모두 배교자의 받을 형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배교자와 타락자는 다르다. 타락자는 일시적으로 믿음을 떠나 죄아래 있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회개할 기회가 있다. 배교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알고, 그의 피가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사실도 알지만, 끝내는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낸다. 장로교의 '성도의 견인'은 타락자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배교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배교자는 복음의 진리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부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거부하며, 또 은혜의 성령을 거부한다. 히브리서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고 지적한 자들이 그들이다.◇로마사회의 불법적 종교로 취급되어 오랜 박해아래 있던 초대 기독교회에서는 복음을 배반한 배교자도 많았고, 타의에 의해 복음을 떠나 타락한 생활을 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 당시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체포해 노예로 전락시켰다. 이런 대우를 참을 수 없어 그리스도교를 떠난 배교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군인이나 고위 공직자의 부인들도 있었고, 교회 안에서 상당한 지위를 얻은 성직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가 로마사회에서 공인되자, 교회로 다시 돌아오고는 하는 배교자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를 놓고 교회에 분쟁이 일기도 했다.◇진리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이처럼 언제나 배교자와 타락자가 있었다. 한국교회에서는 일제 시대와 북한 공산정권 아래에서 심했다. 교회의 중직자로 세움을 받았다가 자신의 세속적 유익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보더 더 앞세워 교회와 그리스도를 파는 가룟 유다의 길을 간 사람들이다. 이런 배교자는 우리 시대에도 있다. 교회가 어떤 계기로 외부로부터 공격받을 때 그들의 활동이 더 두더러지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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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6
  • 장로교 300개 교단 시대
    ◇1912년 하나의 장로교단으로 시작된 한국장로교는 딱 1백년만에 300개 교단으로 나뉘었다. 원인은 단 한 가지, 일제하에 저지른 신사참배 문제를 해방 후 '회개'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개신교회와 한국 개신교회는 그 처지가 비슷했다. 둘 다 정치권력의 어용교회로 전락한 것이다. 독일교회는 90% 이상이 나치의 어용교회였다. 니뮬러와 본훼퍼, 그리고 칼 바르트 등이 이끈 고백교회는 채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을 통해 교회는 정치권력의 어용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나치권력에 협력을 반대했다. 지도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구속되거나 사형당했다.◇처음에는 일제에 항거해 온 한국교회는 식민지배가 길어지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회유에 넘어간 장로교가 앞장 서서 1938년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반대세력은 기껏 50%도 되지 않았다. 총회는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일뿐, 종교적 행위가 아니므로 죄가 아나라고 했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천조대신(天照大神) 앞에 절하는 행위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 행위라고 맞섰다. 그리하여 신사참배 반대파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나고, 교단에서는 목사직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런 종전(終戰)이 없었다면 그들은 대부분 사형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그 범죄 행위에 대한 회개 과정이다. 독일교회는 1945년 히틀러 정권이 몰락하고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통해 나치의 어용교회(DC: 독일기독교도)를 부정하고, 고백교회를 중심한 독일복음주의교회(EKD)를 설립했다. EKD는 1948년 루터의 고향인 아이제나흐에서 모여 루터파, 개혁파, 연합파 교회들의 연맹임을 천명했다. 이후 독일교회는 이 바르멘 신학선언과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의 정신아래 결속되었다.◇그러나 한국교회는 달랐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나 죄책고백도 없었고, 신학선언도 없었다. '옥중성도'(獄中聖徒)라고 불리운 신사참배 반대파의 회개와 자숙 촉구에도, 한국교회는 반대했다. 신사참배 지지자들은 오히려 신사참배 반대파를 교단에서 몰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결과 1948년에 신사참배 반대파로 구성된 고신측이 분열했다. 그리고 1953년에는 기장이 분열하고, 1959에는 합동과 통합이 분열하고, 1979년에는 합동측이 주류와 비주류로 분열한 이후, 명분 없는 핵분열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300여 개에 이르는 장로교단이 생겨났다. ◇장로교가 70%에 이르는 한국교회가 그 정체성을 의심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하 신사참배로 신앙의 정통성을 상실한 세력이 교회의 대표성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헌법상 양심의 자유는 무시되고, 교권주의가 극대화 되어, 노회와 총회의 지상주의가 만연했다. 그리하여 노회나 총회의 결의가 곧 진리가 되었다. 노회나 총회의 결의는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 규범이 될 수 없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31장4항).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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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8
  • 콘스탄츠 공의회
    ◇초대 기독교에는 집사, 장로, 감독이라는 세 가지 직책이 있었다. 이것이 가톨릭교회로 넘어오면서 부제(집사), 사제(장로), 주교(감독)로 바뀌었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미사를 집전할 때 사제를 도울 보조자로서 시종(侍從)이 필요했다. 이를 차부제(次副祭)라고 불렀다. 차부제라는 말은 부제 아래 있는 직제라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1972년에 폐지된 제도이지만, 동방정교회에는 아직도 있는 제도이다. 그런데 ‘추기경’은 이 세 가지 직제에 해당되지 않는 가톨릭교회의 교황제를 위해 존재하는 귀족계급으로서 부제나 사제 또는 주교가 아니라도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차부제 가운데서도 추기경이 탄생했다.◇중세교회에는 차부제에서 교황이 된 사람도 있었다. 중세 교회대분열을 종식시킨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출된 오도 콜로나 추기경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오도 콜로나는 당시 로마 교황(그레고리우스 12세), 아비뇽 교황(베네딕투스 13세), 피사 교황(요한 23세)으로 갈라져 있던 세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1417년 11월 11일 새교황에 뽑힌 마르티누스 5세이다. 그는 이탈리아 명문 가문의 귀족으로써 추기경의 지위를 가졌지만 교회에서는 차부제에 지나지 않았다. 교황에 선출된 그는 11월 12일에 부제로 임명되고, 11월 13일에 사제로 임명되고, 11월 14일에는 주교로 임명된 뒤, 한 주 뒤인 11월 21일에 교황으로서 축성했다.◇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와 피사계 교황 요한 23세가 합의해 소집한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4년 11월 1일 부터 1418년 4월 22일까지 45차례 열렸됐다. 당시 불과 5,500명의 인구가 살고 있던 이 도시에 8만에서 10만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공의회에는 추기경 33명, 총대주교 5명, 대주교 47명, 주교 145명, 명의주교 93명, 신학교수 217명, 교회법과 세속법 교수 361명, 의학 교수 171명, 그 외에도 37개 대학교에서 파견한 많은 수의 인문학 교수들, 83명의 왕과 제후가 파견한 대표단들, 공작 38명, 백작 173명, 남작 71명, 기사 1500명이 모였고, 이들의 대규모 수행원들과 교구 직원들, 마부들, 필경사들, 빵굽는 자들, 금세공가들, 온갖 부류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었다.◇콘스탄츠는 독일 남부 보덴 호수가에 있는 도시로, 호수 건너 멀리 남쪽으로는 알프스가 둘러쳐 있고, 밭과 초지와 포도원 등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는 휴양지이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중요한 이유는 갈라져 있던 교회를 통합시켰다는 것과 함께 교회의 최고 권위가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에 있음을 확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점이다. 이 성명서는 “공의회는 성령 안에서 합법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자체가 에큐메니칼 공의회로서 온 교회를 대신하며,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권위를 부여받으며, 교황을 비롯한 모든 직위의 사람들이 교회의 신앙과 개혁에 관해 공의회가 내리는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고 공포한 것이다.◇그런데 콘스탄츠 공의회가 교회사에 남긴 오점도 있었다.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화형시킨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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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2
  • 신년사 / 새해 한국교회 전도운동체제로 바꾸자
    또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해는 한국교회가 우리사회에 빛이 되자 못한 사건사고가 많았던 한 해였다. 목회자들의 도덕성 문제, 교회재정 횡령 등 사법적 범죄가 교회 담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 크게 회자된 한 해였다. 교회 안에서 살면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로 인한 문제였다. 2015년은 특히 목회자들의 일탈이 심했다.한국교회는 90년대 이후 안수받은 목사수가 갑지기 늘어나 지금은 12~13만명에 이른다. 그러다보니 그들 가운데는 지적이나 영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자질이 모자란 사람들도 다수 섞여 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의 수준차이의 폭이 매우 크다. 학문적 수준이나 신학적 훈련정도도 각기 다르다. 그래도 그들이 한국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목회자로 나선 이상 그들은 모두 한그물에 쌓인 물고기와 같다. 소위 엘리트 목회자들은 ‘나와 그들은 다르다’라는 말로 위안을 받으려 할지 모르지만 우리사회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한 사람의 목회자의 일탈은 곧 한국교회 전체 목사들의 문제가 된다. 이는 전도 문을 막는 일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그런데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는 커녕, 그리스도인들끼리 싸우고 쪼개져 하나님을 욕먹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지금 전국교회에는 둘로 갈라놓지 않으면 안될 교회가 수두록하다.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기 대문이다. 이런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 사회의 빛이 되게 하자.우리사회에는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이웃이 4천만명이나 남아 있다. 이제 겨우 25%의 민족복음화를 이루어 놓고, 그것으로 자족하지 말고, 모든 교회는 7~80년대의 열정으로 전도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전략적 전도운동 없이는 기독교의 성장이나 교회의 부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개인뿐 아니라, 교회적으로, 총회적으로, 지역적으로 전도 바람이 불어야 한다. 여태까지 전개해온 학원선교, 군인선교, 산업선교도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새해부터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을 전도운동체제로 바꾸자.교회의 존재 목적은 사회복지사업도 아니고, 교육개량사업도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업에 있다. 이웃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구령사업이 먼저이다. 그들을 늙고 병든 후에 요단강 건너 저 세상으로 보내려 하지 말고, 온갖 고뇌와 고통이 함께 동반하는 이 세상이 곧 요단강 건너 땅임을 먼저 인식시켜야 한다. 그것이 곧 세상에서 ‘전투하는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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