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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소강석 목사’ ‘정부’ ‘사과’··· 모든 게 ‘인포데믹’
    “소강석 목사는 과연 교회가 정부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그야말로 뜬금없는 주제가 그 진위 여부를 두고 교계에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소강석 목사가 “교회는 정부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었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일부 목회자들은 유튜브 영상까지 찍으며, 소 목사에 대한 맹공을 퍼붓고 있는 실정이다. 허나 이번 논란이 참으로 이상한 것은 최근 1~2년 새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일거수일투족이 교계언론에 공개됐던 소강석 목사인데, 해당 발언은 언론들에게도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해당 주제가 갑자기 논란이 된 것은 최근 교계의 한 원로 목회자가 유튜브 인터뷰에서 소강석 목사를 언급하면서다. 해당 발언을 그대로 옮겨보면 “소강석 목사, 그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하데, 교회가 정부에 사과를 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그것은 나와 생각이 조금 다른데. 정부가 교회에 사과를 해야 하지 않나.”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발언 자체가 매우 파장이 클 수 밖에 없던 것은 현재 한국교회가 마주한 ‘대면예배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한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발언이 진실이라면 그야말로 소 목사는 한국교회의 역적일수도 있다. 헌데 결론부터 말하면 해당 발언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소 목사는 교회가 정부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으며,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도 없다. 전형적인 ‘가짜뉴스’에 의한 ‘인포데믹’일 뿐이다. 가짜뉴스의 핵심 ‘정부’ 그리고 ‘사과’ 기자는 서두에서 이 논란 자체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말했다. 진위를 다투는 사안에 대해 ‘사실 혹은 거짓’이라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기 이전에 이를 굳이 이상하다고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로 목회자가 참고한 발언의 진원지가 다름아닌 ‘기자회견’이었다. 신문과 방송의 시선이 집중되는 기자회견은 그야말로 가장 공개적이고 객관적인 모임 중 하나다. 이 안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행위나 발언들이 즉각 언론에 공개되고, 그 증거들이 그대로 기사로 남는 상황에 이를 두고 진위 여부가 일어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자리는 지난해 11월 3일 예장합동측이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위드(with) 코로나 시대 종교 영향도 인식조사’ 발표 및 특별기자회견이었다. 당시 예장합동측 미래정책전략개발위원회는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코로나 속 종교 영향도에 대한 인식조사 설문을 진행했고, 그 결과를 언론에 공개했었다. 이날 교단 총회장으로 기자회견에 동석했던 소 목사는 기독교가 ‘20~30년 후 가장 쇠퇴할 것 같은 종교 1위’로 뽑힌 참담한 결과에 △한국교회가 시대정신과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으며, △리더십을 세우지 못했다 는 세 가지의 원인을 지적하며, 교회의 자성을 요구했다. 이 외에도 여러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 어떤 누구도 소 목사의 발언에 대한 이의나 문제를 지적치 않았다. 하지만 기자회견이 있을지 1년이 다 된 어느 시점에 뜬금없이 한 원로 목회자에 의해 소 목사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더니, ‘교회가 정부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 소강석 목사’란 전혀 생각치 못한 방향으로 말이 퍼져 나갔다. 이 가짜뉴스의 핵심 단어는 ‘정부’ 그리고 ‘사과’다. 가짜뉴스가 만들어진 과정을 역으로 추측키 위해서는 이 두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당시 기자회견을 보도했던 대부분의 언론들의 기사에서는 이 단어들이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굳이 보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일반언론이 기사에서 <소강석 목사는 3일 "(코로나19 상황 속에) 한국 교회가 세 가지를 잘못했는데 시대 정신과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으며 리더십을 세우지 못했다"고 사과했다.>고 ‘사과’를 언급한 것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소 목사의 발언이 아닌 기자 개인의 해석과 표현이었다. 기자가 소 목사의 자성적인 자세를 사과로 본 것이다. 기자의 이런 해석 자체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소 목사는 분명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인정했고, 굳이 생략했지만, 당연히 사과로 연결될 수 있다. 문제는 사과의 대상이다. 소 목사의 발언에 연관 지을 사과의 대상은 엄밀히 사회와 국민이다. 교회가 제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쳤다는 당연한 반성인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몇몇 대규모 확산이 번진 터라, 교회를 향한 국민들의 여론이 좋을 리가 없었고, 이에 교계 곳곳에서는 자발적으로 국민들을 향해 사과 메시지를 발표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1년의 시간이 지나며 갑작스레 그 사과의 대상이 ‘정부’로 돌변한다. 기자회견이라는 매우 공개된 자리에서의 발언이었고, 언론에 발언 내용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에, ‘정부’라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추가된 것이다. 사실 문제의 시발점이 된 원로 목회자 역시 왜곡된 정보, 가짜뉴스에 의한 인포데믹의 피해자로 보인다. 얼마 전 소강석 목사는 자신의 SNS를 통해 해당 원로 목회자와 대화를 나눴고, 그 분께서 “내가 확인을 못했다. 큰 실례를 범했다. 다음에 해명 방송을 하겠다”고 말했음을 전했다. 이렇게 당사자들 간의 오해를 풀고, 원로 목회자의 사과로 모든 사건은 정리된 것이다. 하지만 일부 목회자들이 최근 해당 사건을 굳이 다시 끄집어 논란을 지속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들은 유튜브를 통해 나름 자료까지 제시하며, 소강석 목사가 ‘한국교회가 정부에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날 기자회견에서는 ‘정부’ ‘사과’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기에, 제시할 증거 역시 있을 리 없다. 프레임을 위한 누군가의 의도적 ‘거짓’ 문제는 이러한 선동이 대중들을 흥분시키고, 소 목사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을 부추긴다는데 있다. 애초에 사실은 중요치 않은 양 ‘친 정부’ 프레임에 어떻게든 소강석 목사를 엮으려는 듯한 모양새다. 일부 교계 목회자들은 현재 교계 전체를 대상으로 ‘친 정부’와 ‘반 정부’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편가르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 안에 중립은 없고, 평화, 협력, 대화도 없다. 오직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만 있을 뿐이며, 내 편이 아니면 적일 뿐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상대의 의도에 관계없이, 자기 임의로 상대를 특정 프레임에 가두고, 대중들로 하여금 무자비한 심판을 종용한다. 진실이 관계없는 것은 거짓조차도 정의를 위한 수단이라 정당화 하기에, 대중들은 차오르는 양심을 억누르며, 자기도 모르는 진실에 돌을 던지고 있다. ‘정부’란 단어의 등장은 바로 프레임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냈을 철저한 의도적 거짓이다. 애초에 의도한 거짓이기에, 진실이 드러났어도 바로 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논란의 당사자들 역시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국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를 실행키 위한 서로의 방법이 다를 뿐, 그 마음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순간 이를 인정치 않고, 자신들의 방법만을 정답으로 내세우다 보니,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결과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비대면예배, 온라인예배의 정당성을 두고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논란 역시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못한 목회자들의 피토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기인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정이 잘못되어서는 안된다. 대면예배, 비대면예배의 정당성을 논하기 위해 예배에 정치적 이념을 투영하고 있다는 죄악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정치 갈등이 점점 극으로 치닫는 동안 예배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은, 진영 간의 승패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는 처절한 현실이 되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0-26
  • [기자수첩] 한국교회가 정부에 굴복했다고요?
    여론이 등돌린 교회, 여론을 등에 업은 방역 코로나 초 ‘선제적 대처’ 못한 교회, 스스로 위기 자초 위드 코로나 대비한 전략 수립 시급··· 신뢰회복 필수 정부의 사회적거리두기 4단계 조치가 장기화되며, 국민들의 불편이 점차 가중되는 가운데,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소상공인의 호소는 어느 순간 분노가 된지 오래고, 직장을 잃고 주저앉은 가장의 손에 쥐어진 정부의 재난지원금은 오히려 삶의 허탈감만 더할 뿐이다.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국교회 130년 역사상 처음으로 예배가 셧다운 되는 아픔을 겪었고, 그 틈에 등장한 비대면 예배는 여전히 그 정당성을 두고,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유독 교회만 대놓고 차별하는 듯한 정부의 불공정한 방역기준은 정부에 대한 교회의 반감을 폭발시키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정부와 교회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교회 내부의 갈등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며, 여전히 내부 총질에 열을 올리고 있다. 총을 손에 쥔 자는 스스로 시대의 심판자를 자처하며, 철저한 자기기준으로 배교자를 규정하고, 군중으로 하여금 그에게 돌을 던지게 선동했다. 이 뿐 아니라 거듭되는 위기를 틈타 ‘애국’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정치의 지저분한 부산물을 교회 안에 들여 놓았고, 이를 매개로 폭발시킨 정치적 이념 충돌은 교회 본연의 정체성을 지워 버렸다. 오직 아군과 적군만 존재하는 철저한 이분법과 전체주의적 의식이 이성을 지배하며, 애초 교회가 추구했던 합리적인 사고는 총질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선제적 대처’ 자율방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는데··· 합리적 사고를 잃어버린 교회가 코로나 사태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추락한 위상, 국민들의 잃어버린 신뢰, 목회자들의 도덕성 타락, 교계 분열 등코로나 이전부터 최악 그 자체였던 현실은 간과한 채 여전히 한국교회가 우리사회의 리더라는 과거의 영광만을 답습했다. 특히 교계 일부 인사들의 입버릇 같은 “한국교회가 정부에 굴복했다”는 비판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묵과한 왜곡적 사고의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가 발발한 지난해 초로 돌아가 보자.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기미를 보이던 당시, 한국교회는 그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가 이전의 메르스나 신종플루, 사스와 확실히 다른 전파 속도를 보이고, 신천지에서 대규모 확산이 사회 전체에 물의를 일으켰지만, 교계 연합단체와 주요 교단들은 그저 남의 일인 양 관망하기 바빴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시 소강석 목사를 포함해 몇몇 지도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며, 교회의 선제적 대처를 주장했었다. 교회가 스스로 방역의 기준을 세우고, 이를 적용함으로 국가와 국민이 인정하는 안전한 예배환경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코로나 사태 초기, 이러한 ‘선제적 대처’에 대한 조언이 무시됐다는 점은 현 상황에 너무도 아쉬울 수 밖에 없다. 만약 당시 한국교회 스스로 방역, 의료, 차단 등 다방면에 걸쳐 자체적인 방역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지금과 같은 정부의 예배 간섭, 통제는 결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코로나 사태에서 정부의 방역 기준에 교회가 포함된 것은 애초 ‘자율 방역’의 기회를 놓친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정부에 분노하는 교회, 그런 교회에 분노하는 국민 신뢰 회복, 예배 회복 동시 이룰 고도의 전략 필요 반대로 이러한 배경은 정부와 교회의 협상 테이블을 ‘기울어진 운동장’에 고정시켜 놓았다. 교회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완전히 등을 돌려 버린 상황은, 사실 교회로 하여금 쉽사리 어떤 것도 선택치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교회에 대한 부당한 탄압조차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상황에, 그나마 일정 수라도 대면 예배를 유지했던 것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에서 이뤄낸 최선의 결과였다. 물론 비대면 예배를 결코 제대로 된 예배라 말할 수 없다. 비대면 예배는 어디까지나 임시적 조치일 뿐이다. 허나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가 임시적 방편까지 써가며, 비대면 예배를 해야 했던 이유 역시 명확했다. 만약 교회가 정부의 제재만을 생각했다면, 정부의 방역에 정면으로 맞섰겠지만, 교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을 간과할 수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교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땅바닥에 추락했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한 언론들은 교회를 겨냥한 비판 기사를 쏟아내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사실 코로나 사태에 있어 예배 회복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회복이었고, 이미지 재고였다. 코로나 사태에서 정부의 교회 탄압은 지극히 노골적이었고, 불공정했다. 이에 대한 교회의 분노 역시 당연했고,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분노는 자칫 이런 상황에 이기적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가뜩이나 무너진 국민들의 신뢰가 교회를 향한 분노로 뒤바뀔 수도 있다. ‘악법도 법이다’는 매우 모순적인 명언이 한국교회에 필요했던 것은 사회와 국민 전체를 위해 부당한 탄압조차 스스로 감내하는 희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밖으로는 그 어느 집단보다 방역에 앞장서고, 안으로는 하루 7~8번의 예배를 드리며, 탄압 속에서도 대면예배를 지키려는 노력은 국민들의 등돌린 여론을 조금이나마 환기시키기 충분하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경쟁으로 치닫는 요즘의 시대는 살아남기 위한 ‘고도의 전략’은 필수적이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더 이상 지붕 위에 십자가만 달아도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던 그 시절(?)은 지나갔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드 코로나,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할 동시다발적인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 당연히 내부 총질은 자제해야 한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끝없이 얽힌 요즘 시대에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내부 총질을 자행하는 것은 자멸을 재촉할 뿐이다. 코로나가 정점에 치닫은 현재 시대는 다시 한 번의 선택을 고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교회 역시 살아남을 전략을 고민해야 함이 먼저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0-14
  • [기자수첩] 그들은 기독교의 ‘위인’을 원치 않는다
    반기독교 광풍에 찢겨지는 영웅의 이름 조용기 목사 향한 비난, 결국은 기독교 죽이기 고 조용기 목사를 향한 일각의 비난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이단, 재정 비리, 정치 권력 등 목회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단어들을 나열해 가며, 그의 생전을 흠집 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전쟁의 폐허 위에 주저앉은 민중들에 희망을 노래하고,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에 죽어가던 전 세계인들에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던 조용기 목사,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인으로까지 꼽히는 그의 업적에 왜 저들은 애써 등 돌리며, 어두운 치부만을 들추려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두려움’이다. 저들은 ‘조용기’라는 이름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조용기란 이름으로 인해 다시 회복될 기독교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반기독교 광풍이 세상이 지배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대립과 다툼, 경제침체와 행정의 추락, 지금 사회와 국민을 요동케 하는 온갖 불안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에 물으려 하고 있다. 엄밀히 그들 자신이 받아야 할 국민들의 마땅한 분노를 기독교에 전가하는 지독히도 치졸한 전략인 것이다. 허나 속이 뻔히 보이는 저들의 작태 앞에서도 한국교회가 눈 뜨고 멍하니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반복된 분열로 이에 대응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우리 눈 앞에서 침몰했고, 이를 바라보는 저들의 비웃음은 한국교회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짓밟아 버렸다. 이런 와중에 조용기 목사의 죽음은 저들에게 긴장을 주기 충분한 사건이 됐을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영향력은 이미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선 지 오래로, 그는 전 세계가 존경하고 사랑한 20세기를 대표한 인물이다. 한국교회의 자랑이자, 기독교 부흥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죽음은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고, 이는 곧 한국교회의 회복을 의미하게 된다. 국내 1천만 성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활발하며 적극적인 유일한 집단, 그것이 바로 기독교이며 한국교회다. 대한민국의 건국부터 교육, 복지, 병원, 경제 등 전 부분의 토대를 만들고 이를 발전시켜 온 한국교회의 부활은 가슴에 불의를 품은 이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다. 그렇기에 조용기 목사의 위대한 업적을 애써 가려가며, 그의 죽음이 한국교회의 결집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고군분투 중이다. 조 목사가 생전 자신에 쏟아지던 온갖 중상모략을 이겨내고 대부분 무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언급치 않고, 지금은 한국교회조차 전혀 언급치 않는 수십년 전의 케케묵은 이단시비를 다시 꺼내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정치권력으로 둔갑시키는 저들의 노력은 참으로 처절하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실은 더욱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조 목사의 생전을 목도한 전 세계 수천만 기독교인이 그의 위대함을 증거할 것이다. 그는 분명 기독교의 위인이었고, 전 세계가 사랑한 신실한 목회자였다. 우리는 10여년 전 우리 곁을 떠난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과 불교 법정스님의 죽음을 기억한다. 당시 대다수의 언론은 이들의 정신을 기리고, 생전의 청렴한 삶을 조명하며, ‘성인’으로 추대했다. 이후 천주교와 불교의 대사회적 이미지는 급상승했고, 국민들의 지지도 올라갔다. ‘단 한 명’ 종교 전체를 일으키고, 이미지를 바꾸는데 단 한 명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 조용기 목사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로 그 ‘단 한 명’이다. 오히려 개인수양과 가르침에 충실한 고인들과 달리 전 세계를 누비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몸으로 실천한 조 목사였던 만큼 그의 죽음으로 인한 한국교회와 우리사회의 각성 효과는 더욱 거대할 것으로 보인다. 저들은 지금 빈소에 쓰여진 조용기 목사의 이름을 짓밟으며, 기독교의 ‘위인’ 탄생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를 ‘위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9-17
  • [기자수첩]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을 통해 본 한국교회의 오판
    총 탑승객 155명을 태운 여객기가 활주로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날아오는 새떼와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여객기는 양쪽 엔진 모두를 잃고,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승객들은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비행기를 조종하던 설리 기장은 일단 보조동력을 가동하고 승객들을 살리기 위한 판단을 고민한다. 사고 소식을 접한 관제탑에서는 출발 공항으로 회항하거나, 인근 공항에 착륙할 것을 지시한 상황, 하지만 설리 기장은 850미터 밖에 되지 않은 상공에서 회항은 불가할 것으로 판단하고 결국 관제탑의 지시를 거부하고 인근 허드슨강에 수상 착륙을 시도한다. 그리고 얼마 후, 155명 모두 안전하게 구조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사고는 지난 2009년 1월 15일, 미국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한 US항공 1549편 여객기에게 일어난 실화로, 지난 2016년에는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으로 대중들에 알려졌다. 영화는 단순히 155명을 살린 놀라운 기적 뿐 아니라, 허드슨강에 불시착을 단행한 설리 기장의 판단과 그를 둘러싼 논란들에 포커스를 맞춰 전개되는데, 바로 여기에 우리 한국교회가 눈여겨 봐야 할 주제들이 등장한다. 사고 후, 항공 조사관들은 설리 기장에게 공항으로 회항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판단으로는 충분히 공항 착륙이 가능했고, 시간도 충분했다는 것, 무엇보다 제대로 된 절차와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설리 기장은 그들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계산한 시간과 사고순간에 놓인 현실의 시간이 결코 동일할 수 없고, 생명이 오가는 긴급한 순간, 모든 원칙이 결코 정답이 아님을 항변한다. 교본 속의 매뉴얼이 아닌 생명을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이 더욱 중요했던 것, 결국 설리 기장은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해 낸다. 오랜만에 한국교회에 고조되는 대통합의 열기에 한교총이 절차와 원칙을 내세우며, 제대로 찬물을 끼얹고 있다. 일단 협상부터 완료하고, 통합은 이후에 고민해 보자는 것인데, 현실과 괴리된 한교총의 판단에 교계의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양쪽 엔진을 잃고 추락하는 비행기와 같다. 80~90년대 기적적인 부흥을 경험하며, 워낙 하늘 끝까지 날아 올랐던 터라, 엔진을 잃은 뒤에도 오랜 기간 활강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어느덧 바닥이 보이는 지금 추락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한교총이 고수하는 절차와 원칙은 추락하는 한국교회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장 바닥과 맞닿을지 모르는 상황에, 공항 활주로만 고집해서는 자칫 승객들의 생명을 모두 잃을 뿐이다. 비록 아스팔트가 쭉 뻗은 활주로는 아닐지라도 승객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자갈 가득한 비포장 도로이든, 차가운 한강 한복판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한교총이 망설이는 사이, 한국교회라는 비행기에 탑승한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의 생명은 위태로워 진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영화에서 설리 기장이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며, 추궁하는 조사관들을 향해 부기장 제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딘가에 착륙할 수 있었던 것은 기장의 판단 덕분이다. 규칙대로 했다면 우린 모두 죽었을 것이다” 지금 추락하는 한국교회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관에 갇힌 규칙이 아니라, 당장의 위기를 타개할 현실적인 판단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8-26
  • [기자수첩] ‘선(先)조율 후(後)통합’의 함정 “우리는 시간이 없다”
    예배회복, 반성경적 악법 대처 등 ‘대통합’ 시급 ‘선(先) 통합’ 후 하나된 단체에서 이단 문제 해결해야 모두의 기대 속에 대차게 첫 발을 뗀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가 또다시 제동이 걸릴 태세다. 당장 예배 회복을 필두로 차별금지법과 평등법 저지 등 한국교회에 있어 단 한 시도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사안이 즐비한데 이런 현실은 무시한 채 ‘선(先)조율 후(後)통합’이라는 느긋한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한교총은 교계 대통합을 위한 ‘미래발전위원회’와 실무협상을 책임질 ‘기관통합준비위원회’를 동시에 구성하고 한기총과의 본격적인 통합에 나섰다. 상임위는 소강석 목사(한교총 이사장, 예장합동)와 김태영 목사(한교총 전 공동대표, 예장통합)를 각 위원장으로 만장일치 추대하고, 교계 대통합을 시급히 완수키로 중지를 모았다. 그러나 통합 실무를 맡은 김태영 목사가 최근 소속 교단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기총의 이단 해제, 금권 선거 등의 문제를 언급하며, 해당 문제들의 해결 없이 통합 협상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김 목사의 발상이 한국교회 대통합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비난을 듣는 것은 그것이 한국교회가 분열한 지난시간 간간히 추진됐던 통합 시도를 매번 무산시킨 단골 레퍼토리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단문제는 서로간의 첨예한 이견이 부딪치는 극히 예민한 사안으로, 단순히 조율과 협상으로 이를 해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언제부터인가 이단 문제는 통합 논의에 있어 선결 조건이라기보다는 통합 무산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 김태영 목사가 기관통합준비위원장에 오른 직후, 또다시 이단 문제를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은 오히려 통합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김태영 목사가 주장하는 ‘선(先)조율 후(後)통합’이란 형태는 통합에 있어 매우 이상적임은 분명하다. 서로 다른 두 단체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해결하고, 조율해야 할 문제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런 느긋한 여유를 허락치 않는다. ‘원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상황에 정부의 방역정책에 끌려다니기 바쁘고, 급기야 예배 인원을 방역당국이 정하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 여기에 일부 정치계에서는 교회와 사회의 전통 규범을 위협하는 독소조항을 다수 포함시킨 비슷한 법안(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이상민 법), 건강가정기본법 수정안, 평등법(박주민 법))들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과거 하나된 한국교회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사분오열된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위급한 현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선(先)조율 후(後)통합’이 아닌 ‘선(先)통합 후(後)조율’이 해답임을 알려주고 있다. 현 한국교회에 있어 ‘예배회복’이 가장 시급한 난제라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고, 분열된 힘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모두가 공감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해묵은 문제는 일단 뒤로 잠시 넘겨두고, 예배 회복과 코로나 대처라는 대의적인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당연히 통합이 먼저다. 이단 문제는 통합된 단체에서 회원들의 다수결을 통해 이를 처리하면 될 뿐이다. 그게 법이고, 원칙이다. 오히려 현 상황에서 이단 문제의 해결을 강조하는 것은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단’의 기준은 각 교단마다 다르고, 서로가 이단으로 정죄한 집단, 인물, 단체가 매우 상이하다. 예장통합측의 기준에서 판단한 한기총 내부의 이단 문제와 합동, 기성, 기침, 기감 등 여타 한교총 회원교단들의 입장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김태영 목사가 단순히 자기 교단의 이단 기준만 들이대 한기총을 판단한 것 자체가 애초에 모순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자칫 한교총 스스로가 자가당착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한교총 회원교단 사이에서도 상대 교단의 인물이나 단체를 이단 혹은 교류금지 등으로 정죄한 사례가 많은데 그런 상황에 굳이 한기총을 향해서만 이단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한교총 자체의 이단 기준이 서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더욱이 한교총이 ‘선(先) 통합’ 없이 ‘이단 문제’를 선결과제로 고집한다면, 한기총 역시도 WCC를 선결과제로 끄집어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WCC는 한국교회가 지난 숱한 분열 속에서도 60년간 전혀 의견을 좁히지 못한 사안, 만약 이번 통합 논의에 WCC가 등장한다면, 이 통합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단 문제는 하나된 통합 단체에서 이를 논의하고 해결해야 함이 옳다. 논란이 되는 교단이나 인물이 있다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잔류, 퇴출 등을 결정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오직 한국교회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장 무너져 가는 예배를 회복하고, 반성경적 악법을 저지키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일의 선제조건은 당연히 대통합이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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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6
  • [데스크칼럼] 부패 완판
    현 정부 여당이 검찰개혁이란 명분 아래 '검수완박'을 말하자, 당시 검찰총장 윤석열은 검수완박은 곧 '부패완판'이라고 응수했다. 검수완박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는 뜻이다. 이에 윤석열은 그렇게 되면 부패가 완전히 판치게 될 것이라고 맞 받은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정치권과 검찰과의 권력 다툼의 한 단면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말이다. 에덴에서 타락한 인간은 욕망과 욕심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인간의 그 욕심은 끝이 없다. 그것이 재물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거기에 욕심이 개입되면 쌓고 또 쌓아도 한이 없다. 특히 재물에 대한 욕심은 인류 사회에 물질문명의 번영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윤리를 일탈하면 인간 사회 전체를 타락시킨다. 인간의 이 욕심을 다스리기 위해 나타난 것이 종교(宗敎)이다. 모든 종교의 근본은 타락한 인간이 가진 욕심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인간 본디 모습을 회복하라고 가르치는 데 있다. 축(軸)의 시대에 나타난 인류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욕심을 경계했다. 그래서 종교의 교조들을 모두가 존중하고 그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다. 인류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회적 가치관은 그 사회의 주류종교에서 나온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20세기에 공산주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었지만, 공산주의는 한 세기가 다하기 전에 소멸해 가고, 역시 그 자리를 종교가 대체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막중한 사명을 가진 종교마저 교권화 되고 세속화 되어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종교와 함께 그 사회도 결국 망하고 만다. 그것은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진 클래식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와 종교가 한 배를 탄 꼴이다. 그리하여 종교가 그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재물이나 명예심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 종교는 진리를 설파하는 '참된 종교'가 아니라 '세속주의화 된 종교'로 전락한 것이다. 그것은 간판에 붙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무늬만 종교일 뿐, 그런 종교는 사람을 회개시키거나 또 사회를 변화시키는 아무런 영적 능력도 갖지 못한다. 오로지 사회 구성원의 한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한다. 빛과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이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여 사회에 부패가 완전하게 판치게 된다면 그거야 말로 사회를 타락케 하는 적폐이다. 이 때는 반드시 부패를 막아야 할 사명이 있는 종교가 나서야 한다. 종교가 헌법상 정교(政敎) 분리원칙만 되뇌이며 부패한 권력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 앞과 그 사회에 죄를 짓는 것이다. 사회적 부패를 막아야 할 책무가 종교에 있기 때문이다. 검찰총장 윤석열의 '부패완판'(腐敗完판)이란 화두가 새롭게 다가온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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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기자수첩] 한국교회 대통합 “모든 준비는 끝났다”
    코로나 위기로 ‘대통합’의 필요성 절감 소강석 목사의 ‘7단계 통합안’ 실현 가능성 높여 어느덧 2021년 새해도 중반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한동안 주춤했던 교계 대통합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조되고 있다. 오랜만에 교계 대다수가 한 자리에 함께하며, 대통합의 가능성을 내비친 지난 부활절연합예배가 새 시대를 향한 한국교회 변화와 각성의 새로운 시발점이 된 것이다. 가뜩이나 다툼과 분열로 얼룩졌던 한국교회에 깊게 스며든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이념 갈등이 교계의 통합마저 정면으로 가로막던 불의한 상황에, 금번 부활절은 복음 안에서 진보와 보수도 하나라는 부활절연합예배 본래의 취지를 그대로 되살리며, 꺼져가던 대통합의 불씨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론 한국교회의 통합이 당장 어제 오늘만의 주제는 아니었다. 지난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 이후, 현재까지 한국교회에 발표된 통합선언만 무려 4차례에 달했고, 특히 한교총과 한교연은 통합총회까지 열었지만, 결국 통합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에 있어 통합이라는 단어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처럼, 어떠한 신뢰도, 감동도 주지 못하게 됐다. 그저 때 되면 벌어지는 교계 정치꾼들의 허울좋은 ‘이벤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교계의 움직임은 확실히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단체의 수뇌부 혹은 정치꾼들이 무언가를 취하기 위한 꿍꿍이가 아니라 순수한 ‘통합’ 그 자체만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다. 한국교회 전체에서 모이는 기대가 결코 아깝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대통합’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수년 째 계속된 한국교회의 추락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바닥 끝에 맞닿아 있다. 형제간의 다툼도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한 집안에서나 가능한 일, 코로나 이전부터 계속된 한국교회의 오랜 침체는 연합단체의 운영마저 힘들게 만들었다. 존립할 능력도, 이유도, 명분도 없는 상황이 점차 고조되는 것은 반대로 대통합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하고 있다. 둘째는 코로나 펜데믹의 충격이다. 코로나가 한국교회를 큰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한국교회를 각성케 한 계기가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딱히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심각했고, 계속 진행 중이었다. 더욱이 당시 한국교회는 지속적인 다툼과 분열, 맘몬에 오히려 무너지는 천장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위기에 둔감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전례 없는 펜데믹을 가져온 코로나는 위기에 물든 한국교회에 매우 효과적인 충격요법으로 작용했다. 결정적으로 코로나는 이념 갈등에 신음하는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발생 이후, 정부의 부당한 예배제재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황,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은 한국교회가 하나로 힘을 합칠 명분을 제공했다. 물론 대정부 정책을 놓고, 내부의 이견이 심각히 갈린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교회의 보호’라는 궁극적 목표가 같다는 점은 통합을 위한 충분한 합의점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한국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의 결단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사실 위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도, 교계 지도자들이 서로 손을 잡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통합에 이를 수 없다. 그간 한국교회가 수차례가 통합을 논의하면서도, 정작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탓이 바로 이들의 정치적 경쟁과 실무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이라는 거대한 명제를 위해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를 희생했어야 할 이들이 욕심 앞에 단 하나도 내려놓지 못했기에,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했었다. 올해가 기대되는 것은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통적인 문제제기에, 모든 교계 지도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금번 부활절연합예배에 한국교회의 참여율이 더욱 돋보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바탕에 있다. 여기에 현재 한국교회의 최일선에서 통합 작업을 이끌고 있는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의 존재는 대통합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이고 있다. 지난 9월 예장합동 총회장, 12월 한교총 이사장에 오른 소 목사는 근 2년 새,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로 우뚝 섰다. 그런 소 목사가 취임 이후, 자신이 가진 거대한 내·외적 영향력을 오직 ‘통합’에 쏟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에 상당한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최근 소 목사가 발표한 ‘7단계 통합안’은 통합을 위한 전제부터, 행동요소, 시간별 추진 사안 등 통합을 위한 실제적인 요소를 담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이전 통합 논의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것으로, 소 목사는 그간 통합을 가로막았던 여러 방해요소들을 가감없이 지적하는 등, 한국교회의 분열과 통합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대통합을 위해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목표로 삼은 통합을 위한 최종 시한은 고작 6개월 남짓,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통합에 대한 당위성이 섰고, 의견이 뭉쳤으며, 실행을 위한 모든 분석과 준비가 끝난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다. 남은 것은 바로 이 글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결단이다. 지금 교계에 뜨겁게 불어닥친 ‘대통합’의 열기가 반드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바로 당신부터 하나됨을 위한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4-27
  • [기자수첩] “목사도 아프다. 단지 견디고 있을 뿐···”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향한 국민들의 비난이 거센 때다. 정부와 언론에 의해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된 교회는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바닥 끝에 맞닿아 있다. “예배 내 감염은 없었다”는 정부의 마지못한 인정이 이제 와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여전히 교회 예배를 코로나 확산의 분기점으로 몰아가려는 그들의 의도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교회의 잘못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 교회로 인한 감염은 있었고, 그것이 국민들의 염려를 산 것은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굳이 확산 규모로만 잘못의 크기를 가늠하려는 일부의 잣대는 스스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자처한 교회의 사명에 모순될 뿐이다. 교회를 향한 부조리한 탄압과 부정할 수 없는 죄책이 공존하는 시대는 목사들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 진실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진 교회를 지켜내야 하는 목사들이지만, 그 어느 쪽을 택해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한겨울 찬서리 가득한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가 지배했던 지난 1년은 목사들에게 있어 초창기 한국교회 못지않은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목사들은 결코 아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힘겨워 하는 성도들의 고통을 온전히 나눠야 했던 목사들은 그들의 아픔 위에 자신의 아픔을 더할 겨를도, 여력도 없다. 아픔을 덜고자 찾아오는 성도들 앞에 자신의 아픔을 드러낼 수는 없는 법, 사람들의 모든 걱정을 대신 짊어진다는 옛 인디언의 ‘걱정인형’처럼 목사들은 현재 이 시대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 매일 같이 한국교회와 국민들을 향해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한 목사가 떠오른다. 정부에 굴복했다는 내부의 질책과 예배강행은 종교이기주의라는 국민들의 비난 사이에 그 모든 책임을 온 몸에 떠안으려 하는 그를 보며, 어느 순간 목사에 대한 비난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진 이 시대가 참으로 안타깝고, 불편하다. 하지만 목사도 아프다. 단지 목사이기에, 주님을 닮아야 하는 사명자이기에, 매일 지옥같은 아픔을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3-18
  • [기자수첩] ‘코로나와 한국교회’ 국민들의 신뢰회복이 먼저
    새해 초부터 교회와 관련한 계속되는 코로나 확산 사태에 국민들이 또다시 염려하고 있다. 어느 순간 코로나 시대의 ‘슈퍼 전파자’로 전락한 교회에 대해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공격적 여론이 심히 과도한 것은 사실이다. 교회 관련 시설에서 일부 코로나 확산이 이뤄진 것을 부정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교회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억울한 면이 크다. 지금 언론은 교회 확진 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은 뒤로한 채, 일부 국민들의 반교회적 정서를 자극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언론들의 입장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기사는 독자들에 소위 ‘먹히는 장사’인 것이다. 코로나 시대 교회가 감염의 원흉이 된 것은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과 이에 호응하는 언론들이 크게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두를 정부와 언론의 탓만 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지난 1년여 간 교회 혹은 교회 관련시설에서 수많은 확진 사태가 발생했다는 1차적 전제는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매개라는 부정키 어려운 증명이 되고 있다. 정부와 언론들은 교회가 제공한 작은 매개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200% 활용했을 뿐이다. 그러한 행태가 심히 저급하고, 다소 억울하기까지 하지만, 지금도 계속 출몰하는 새로운 교회 관련 확산은 그 억울함에 대한 자그마한 동정조차 불허하고 있다. 백신이 개발됐다고는 하지만 지속적인 변이의 출연과 백신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은 올해 역시 지난해와 다름없는 한 해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측 속에 교회는 어떠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인가? 또다시 별다른 대비없이 그저 그때 그때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에만 1차적으로 반응할 것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코로나 정책에 있어 분명 패배했다. 실패라는 표현보다 패배라는 말이 적당한 것은 코로나 확산에 따른 예배 제재가 단순히 과학적 영역만이 아닌 정치적 영역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변화가 없는 한 한국교회는 올해 또 다시 패배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 싸움이다. 한국교회의 지난해 모습은 작전도, 대책도 없이 그저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혈기 가득한 병사와도 같았다. 한국교회를 위한다는 그 신념은 분명 높이 사야하지만, 그것이 결코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각자가 품은 신념이 서로 다른 상황은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잃게 만들었다. ‘내분’ 전쟁의 패배를 담보하는 최악의 상황을 한국교회가 자초한 것이다.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힘의 결집이다. 각자의 신념보다 한국교회 전체의 대의를 우선해야 한다. 어차피 방법이 다를 뿐 한국교회를 위한다는 모두의 생각은 같은 터, 대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힘을 한 곳에 모을 필요가 있다. 정부와 방역정책에 대한 협의를 담당하고 있는 한교총이 지난해 나름의 여러 전략들을 내놓았지만, 만족할만한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그 전략을 실현시켜줄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협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보다 우위에 서는 것인데, 지난해 코로나 정국에서 이러한 모습은 연출되지 못했다. 오히려 교계 내부에서 이를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듯한 모습은 반대로 정부에 힘만 실어 주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예배를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일부의 비난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나마 정말 힘겹게라도 예배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새해 한국교회의 예배 회복을 위한 코로나 전략이 성공키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론이 중요하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여론 정책에 완전히 실패했다. 앞서 언급했던 언론들의 왜곡보도를 제대로 바로 잡지 못했고,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치를 전혀 충족치 못했다. 가뜩이나 코로나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던 상황에, 코로나란 극한의 위기상황에서 드러난 교회의 이기적인 모습은 국민들의 실망을 분노로 뒤바꾼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교계 내부의 지지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여론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 한국교회의 코로나 전략이 힘을 발휘할리는 만무하다. 더구나 이런 정서에 아랑곳 않고, 자기의 신학적 신념만 우선하는 일부 교회의 태도는 국민들의 공감을 전혀 얻지 못한 채, 종교 이기주의의 표본으로 굳어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정국에 있어 분명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침해 당했고, 대부분 올바르게 방역지침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는 억울한 오해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억울함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이 없다면, 코로나 정국에 있어 한국교회는 영원히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새해 방역 협상 일선에서 펼치는 한국교회의 전략이 효율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교계는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하나됨은 교회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우선된 전제다. 여기에 교회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교회가 국민들과 대립해서는 안된다. 그 어떤 교회 역사에서도 국민들과 대립하는 교회가 부흥한 적은 없었다. 새해 하나됨으로 승리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해 본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2-01
  • [기자수첩] “정인아 미안해”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실험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 손에 겨우 감길만한 16개월 된 아기가 온 몸의 뼈는 골절되고, 장이 터져 나갔다. 뱃속 가득히 피가 고여 울음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폭력은 계속됐을 것이다. 정말 악마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의 잔인함이다. 뉴스를 보며 ‘악마를 보았다’는 말이 무색한 것은 악마를 넘어선 잔인함은 물론이고, 일말의 죄책조차 없는 뻔뻔함 때문이다. 제발 이 뉴스가 현실 아닌 영화이길 바랄 정도로, 눈을 감고 싶었고, 귀를 닫고 싶었다.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상상하려만 해도 발끝부터 저려오는 몸서림은 정인이가 겪었을 고통의 1/100도 체감치 못할 비겁한 어른의 무관심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 모든 학대의 주범으로 의심받는 양모의 부친이 바로 목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준다. 더구나 목사의 사모이자 양모의 모친은 바로 어린이집의 원장, 윤리와 도덕, 사랑과 포용의 상징적 인물인 그들은 ‘악마’를 키워낸 장본인들이었다. 정인의 양모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온 ‘악마’는 아니었을 테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싹틔웠을 악의 씨앗이 목회자 부모가 일군 결과물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다. 양모가 보여준 악마의 끔직한 본성은 그 부모의 얼굴을 투영한다. ‘목사와 악마’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두 존재의 공존을 목도함은 우리 의 역사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긋남의 시작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어느 순간 한국교회의 윤리 기준은 그 중심점이 심히 낮아졌다. 종교인으로서의 완벽한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함으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해가 자연스러워졌다. 목회자의 양심도 법이 판단하는 시대가 된 것은 ‘최소한의 도덕’일 뿐인 법을 지키며, 그것을 심히 당당해 하는 씁쓸하기 그지없는 윤리 의식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이 절대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의 현실을 대변할 수는 없다. 냉정히 지극히 예외인 경우로, 이를 교회, 목회자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죄해야 한다. 정인이의 죽음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무관심의 학대였다. 모두가 가해자였고, 죄인이다. 이러한 사건이 우리사회에 일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교회는 책임이 있다. 윤리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책임은 정인이에 대한 사죄와 별개로 우리가 마땅한 짊어져야 할 몫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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