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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만이 사회주의화를 막을 수 있다
    지금 세계는 20세기의 인류 구원의 메시지로 등장했던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또 사회주의 경제로는 국민을 제대로 먹여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나라들도 한때 수정자본주의나 본격적 자본주의 경제질서로 편입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철지난 공산주의 체제와 사회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나라는 후진국으로 전락해 국민을 거지로 만들고 있다. 그 대표적 국가가 북한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를 미국의 억압과 방해 때문이라고 한다. 그건 김일성 일가의 독재체제를 유지하려는 핑계일 뿐, 북한의 경제적 실패는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와 북한 지도자들의 외교적 무능에서 온 결과이다. 그로인해 북한의 주민들은 굶어죽거나, 중국에 팔려가 노예생활을 하거나, 한국으로 도망오고 있다. 북한에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사회에는 그런 북한체제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이론적 배경을 가진 체제라 하더라도 국민을 먹여살릴 수 없는 제도라면 두말할 필요없이 폐기되어야 한다. 중국과 베트남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들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개혁개방으로 제 빨리 수정자본주의로 체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오늘날 문재인의 좌파 정부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헌법가치를 무시하고 사회주의 정책에 맘을 빼앗겨 그것을 기웃거린다. 이미 문 정부의 소득주도성정이라는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이 불과 2년여 만에 서민의 삶을 망가뜨렷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도 4.15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아예 사회주의 정책을 한발짝 더 내딛겼다고 한다. 모두가 그건 아니라는데 여당과 정부는 왜 그 방향으로 계속 끌고 가려하는지 알 수 없다. 자본주의의 부의 집중이 문제라면 세금정책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사회의 성공이 이를 잘 보여준다.특히 사회주의는 종교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모든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는 정부의 사회주의화를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번 4.15 총선이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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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3-02
  • 한국기독교의 윤리적 패배
    미국의 신학자 리차드 니이버는 1054년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열은“기독교의 윤리적 패배”라고 정의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열이란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 논쟁에서 성령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성령발출설(필리오케) 논쟁으로 ‘서방교회’(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그리스정교회)로 분열한 것을 말한다. 세계 기독교는 그때까지 ‘하나의 교회’를 지켜왔다. 그러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온다는 서방교회의 주장과 오로지 “성부로부터” 온다는 동방교회 주장을 조정하지 못한 채 1천년동안 지켜온 하나의 교회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요”라고 노래하던 갈라진 교회는 형제는 커녕, 경쟁 상대를 넘어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성지회복을 명목으로 서방교회가 일으킨 제4차 십자군은 성지로 간 것이 아니라, 1204년 동방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전복시키고 무자비한 약탈과 난동을 일삼았다. 그리고 거기에 라틴제국을 세우고 정교회를 파괴하는 등 기독교 국가 비쟌틴제국을 60여년간 통치했다. 그리하여 국력이 나약해진 비쟌틴제국은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에 멸망당하고 만다. 지금의 터키가 그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분열한 결과이다. 어느 시대나 교회의 분열은 기독교 신앙의 윤리적 패배이다. 신앙과 신학적 견해 차이로 교파가 만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같은 신앙고백과 같은 신학을 공유하는 교파 안에서 교단의 분열은 두말할 필요없이 그 구성원 모두의 패배이다. 한국 기독교는 개혁파 중심의 교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개혁신학을 공유하는 장로교가 약 78%에 이른다. 그런데 처음에 하나로 시작한 그 장로교가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졌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윤리적 패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장로교 지도자들이 ‘총회장’입네, ‘노회장’입네 하며 거들먹거리지는 사이, 한국 교회는 회복하기 어려운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좌파 정권이 기독교를 위협해오고 있다. 어쩌면 저들이 사회주의화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이제 우리 앞에 교회를 위협하는 적이 나타난 이상 뭉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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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3-02
  • 한국교회 목자들이여, 모두 예언자가 되라
    기독교의 목사는 구약 성경의 제사장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언자 전통에서 나온다. 제사장은 그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되는 성직이고, 예언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따른 사명자이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아들이 반드시 예언자 되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는 엘리사처럼 밭을 갈다가 부름을 받기도 하고, 아모스처럼 뽕밭에서 일하다가 부름을 받기도 하며, 스가랴처럼 제사를 드리다가 부름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예언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본직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예언자이다. 기독교의 목회자는 그 예언자 전통에 또 주님의 사도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직업 현장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어부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세리 레이와 마태는 세관에서 일하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사도들의 자녀들이 그 자리를 세습하지는 않았다. 현대교회 목회자도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부름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언자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권이나 제사장의 종교권이 그 본디 사명을 일탈해 타락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경고를 그들에게 발한다. 그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왕이나 제사장들이 예언자들의 그 경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고, 교만하여 예언자의 경고를 무시하면 그 사회에 불행이 닥친다. 문제는 예언자로 부름받은 자가 왕권이나 제사장권이 두려워 입을 닫으면 결국 그 화가 예언자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예언자가 요구된다. 한국교회에는 15여 만명에 이르는 목회자가 있다. 교계 일각에서 문재인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주의 정책을 쓴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왜 지금 사회를 향한 예언을 하지 않나? 이런 예언자를 성경은 ‘벙어리 개’(사56:10)라고 부른다. 15만의 목회자들이 다같은 목소리를 내면 투표로 선출되는 정부가 무슨 힘으로 교회의 신앙을 함부로 억압할 수 있겠나. 어쩌면 우리사회는 지금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예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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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2-14
  • 우리사회 희망은 기독교에 있다
    인류사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회의 주류종교가 사회적 가치관을 공급해 왔다. 종교가 그 기능을 제대로 못할 때 결국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그 사회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중세 유럽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사회를 변화시켰지만, 아시아는 클레식 종교들이 정체되어 20세기의 공산주의 운동이 사회적 가치관을 제공하며 나타났다. 20세기는 공산주의야 말로 인류사회의 희망이었으나, 그러나 70여년 만에 인류사회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들 공산주의자들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곧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던 종교는 그 시기에 가장 많이 늘어났다.오늘날 대한민국은 딱히 주류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가 없다. 우리사회에 여러 가지 종교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해서 다종교사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토착된 전통종교로서 불교가 있고, 종교적 기능은 사라졌지만 전통문화로서 유교가 있으며, 뒤늦게 우리사회에 들어온 기독교(천주교와 신교)가 그 세력을 양분하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주류종교가 없다는 뜻에서 우리사회를 다종교사회라고 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불교는 무속과 미신에 너무 깊이 빠져 있고, 유교는 이미 종교로서의 생명을 다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사회적 가치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우리사회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밖에 없다. 그런데 기독교도 분파주의와 기복주의로 얼룩져 사회를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려는 데는 역부족이다. 최근 광화문에서 모인 우파인사들의 중심에 기독교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다는 면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까지는 크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지금 한국 기독교가 진정으로 우리사회를 바로 이끌려면 분파주의와 기복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가 우리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전도를 가로 막는 짓을 계속 고집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러면 결국 하나님도, 국민도 그런 교회를 외면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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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2-14
  • 종교법과 종교자유
    우리나라에는 헌법 20조에 1,2항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있다. 이 종교의 자유에는 신교(信敎)의 자유와 선교(宣敎)의 자유가 있다. 신교의 자유는 내가 무엇을 믿든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내심상(內心上)의 자유이고, 선교의 자유는 내가 믿는 바를 표출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는 외형상(外形上)의 자유이다. 따라서 선교의 자유는 사회질서와 관련해 제한될 수 있다. 종교자유와 관련된 법은 딱 여기까지이다. 그 외에는 몇 가지의 종교 관계 법령 및 규정이 있을 뿐이다.예를 들면, 민족문화 유산을 지키기 위한 불교의 전통사찰보존법, 향교재산의 적절한 관리를 위한 유교의 향교재산법, 종교단체가 사단 및 재단을 설립할 수 있는 민법 32조, 사회단체등록에 관한 법률, 교육법의 교육방법, 형법의 장식 등의 방해, 형사소송법과 민사소송법의 업무상 비밀과 증언거부, 노동조합법, 군인사법, 병역법 등의 종교로 인한 차별대우의금지, 기부금품 모집금지법, 영화법시행령, 세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보니 종교계가 너나할 것없이 이 종교자유를 방임하는 사례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 종교 본래의 사명을 외면하고 사이비짓거리가 만연하고 있다는 말이다. 종교계 지도자들이 종교자유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전파를 내세워 신도들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위해 사이비짓을 하는 사례들이 있다. 그래도 그들이 정통교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치병이나 은사주의를 앞세워 기성 교단 밖에서 헌금을 끌어들여 부동산에 투기하는 등 개인의 사적 재산을 축적한다. 그 재산은 한국 기독교의 공교회를 위해 일체 사용되지 않고 사유화 되어 결국 자식들에게 상속된다. 이것은 분명히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교단법이나 국가법으로도 다스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도 종교법인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우리사회가 종교 문제로 몸살을 앓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한국기독교의 경우, 근래에 교단법이 판결한 재판이 국가법에서 계속 뒤집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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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1-31
  • 복음전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1884년 복음전도가 시작된지 130여년 만에 국민의 20%가 넘는 그리스도인을 얻었다. 개인전도, 대중전도, 교육선교, 의료선교, 학원선교, 군선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전도 열심에 기인한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해야 할 대상은 아직도 4000만명이나 남아 있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이 전도열심이 식어져 가고 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라고 전파하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그 열심이 식어지고, 우리가 이단이라고 부르는 집단들만 나서서 전도에 열중한다. 저들은 도무지 기본상식만 가져도 빠지지 않을 저급한 교리와 성경해석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런 유혹에 넘어지는 기성교인들이 많다. 이는 전도가 아니라 범죄이다. 사도 바울은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라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라고 했다. 하물며 이미 복음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들을 미혹해 자기패를 만들고자 하는 전도방법이야 말로 남의 터를 점유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만희의 신천지 장막성전, 안상홍의 하나님의교회, 여호와의증인 등 수많은 이단집단들이 이미 복음을 받은 기성교인들을 꼬드긴다. 그러나 이만희의 신천지는 하나님의 아들 중보자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중보자를 가진 교주우상주의 집단이고, 안상홍 하나님의교회는 기독교와는 교리가 전혀 다른 다신교 집단이며, 미국에서 건너온 여호와의증인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을 부정하는 타종교이다. 이들의 성경해석을 조금만 유의하고 살펴보면 보편적 기독교와는 다른 집단임을 당장 알아 볼 수 있다.문제는 한국교회가 성공주의와 기복주의에 빠져 교인들에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10년, 20년 교회에 다닌 사람들도 성경의 기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는 난해구절들이 여러 곳 있지만 성경의 기본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 난해 구절들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미혹하는 집단들은 성경의 난해구절들을 자기네 교리에 꿰맞춰 해석하는 것이다. 주님으로 부터 책망받을 범죄이다. 누구나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20-01-31
  • 어떤 사회로 통일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매년 새해가 되면 올 해는 남북 문제가 어떻게 풀릴 것인가에 촉각을 세운다. 올 해도 문재인 대통령은 새해 신년사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의 재개를 희망하고 있지만, 유엔의 대북 제재와 북미 대화의 교착상태에서 오히려 남북 관계의 후퇴가 염려된다. 우리의 간절한 염원이 더 멀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언제나 우리는 남북의 통일을 염원한다. 그런데 ‘우리의 통일'은 어떤 통일이어야 하는가? 첫째, 1945년 해방과 함께 각기 나뉘어진 남·북은 분단 70여년만에, 경제는 자유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인 자본주의 사회를 택한 남한이 1인당 국민소득이 31,431불 시대에 이르는 동안,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와 국가경제체제인 사회주의를 택한 북한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74불에 지나지 않아 무려 30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인민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며 민족 분단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입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과연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보다 인민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고 있는가? 둘째, 국민의 삶의 질에 있어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사는가의 문제이다. 북한사회가 남한보다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고 있다면, 왜 3만명이 넘는 북한 주민이 죽음을 무릎쓰고 ‘인민의 낙원'을 탈출해 남한으로 오는가. 이는 두말할 필요없이, 인민이 먹고 사는 문제와 누리고 사는 문제에 있어 남한의 자본주의가 북한의 사회주의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셋째, 개인의 인권 문제에 있어서, 현재 남한과 북한 어느 쪽이 인권을 더 중요시 하는가. 탈북민들은 북한에는 개인의 인권 보장은 고사하고, 아예 인권이란 말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통일은 어떤 체제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미 국민이 먹고 사는 문제와 삶의 질의 문제에 있어서 북한의 사회주의보다는 남한의 자본주의가 훨씬 우월하다는 것이 증명된 마당에 아직도 북한의 사회주의를 두둔하는 세력이 있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후세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 연지골
    • 사설
    2020-01-17
  • 교회여, 목회자 양육에 투자하라
    가톨릭교회는 “주교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 주교가 사제를 양육하고 교구를 세우며 양떼를 모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목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목사가 양떼를 모으고 말씀으로 양육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받아 목회자로 세움을 받은 목사가 중요하다. 어떤 공동체든 지도자가 없으면 그 공동체는 흩어지게 된다. 특히 교회는 훈련받은 지도자가 없으면 믿는 도리를 오해하여 미신에 빠지게 된다. 목회자의 양육이 교회의 존폐를 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목회자 양육은 교회가 교육도, 투자도 직접 감당해야 하는 중대한 선교사역이다. 가톨릭교회는 목회자사제 양육에 있어 그 교육에 필요한 경비를 가족이나 개인에게 일체 지우지 않는다. 전액 소속 교구와 출신 교회가 장학금으로 부담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학교 수업료부터 목사안수에 드는 경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족이나 개인에게 부담시킨다. 몰론 이는 교파마다, 각 지역 교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단 한 푼의 돈도 투자하지 않고 다 양육된 목회자를 월급 몇 푼 주고 일꾼으로 데려다 부려 먹는 것이다. 그러면서 ‘목사의 사명감’ 운운하며 희생을 강요한다. 이런 목회자 양육 시스템으론 좋은 일꾼을 양육하기 어렵다. 요즘 한국교회의 신학대학들도 등록금을 마치 사립대학 수준으로 받고 있다. 가난한 신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신학교는 그 경영을 교단과 개교회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신학생에게는 부담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 일생을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일할 지도자를 양육하면서 경제적 부담까지 지우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신학교를 마치고 나면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으로 인해 돈이 한 푼이라도 더 생기는 임지를 찾게 된다. 이는 참된 목자를 양육하는 태도가 아니다.성경에 자비량하고 군대에 나가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군인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탄과 싸우는 교회가 일꾼을 양육하면서 ‘훈련은 네 돈으로 받아라. 훈련에 합격하면 밥은 먹여주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로 지도자를 양육하는 것은 옳지 않다. 대교단들부터 신학교 운영시스템을 바꾸어라. 오래지 않아 신학 지망생자도 줄어들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20-01-17
  • 일제 왜색종교 경계
    현재 우리사회에는 일본의 왜색종교가 시민사회를 깊이 파고 들고 있다. 일련정종, 입정교성회 등 일본불교 계열의 종파뿐 아니라, 천리교와 선린교, 세계구세교, 세계메시아교 등 왜색종교들이 우리사회를 파고 들어 상당한 교세를 늘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남묘호렝게교(南無妙法蓮華經)’로 알려진 일련정종과 19세기 일본 나까야마 미끼에 의해 창교된 천리교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 침탈에 앞장 섰고, 2차 대전 당시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신시참배를 장려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전쟁승리를 위해 총력을 다한 집단이다. 특히 이들은 우리 민족정신을 파괴시키고, 태양신 천황 숭배에 굴복시키려는 데 앞장 섰던 종교집단들이다. 그런데도 해방 후 단 한 차례도 그 잘못을 반성하거나 우리에게 사과한 일 없이, 지금도 버젓이 우리사회에 ‘동방요배’를 강요하는 일제 종교를 퍼뜨리고 있다. 우리 민족정신을 파괴하는데 앞장 서고,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훼방해 온 일제종교가 아무런 제재도 없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문화원’이란 이름으로 곳곳에 건물을 짓고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민족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심지어 수년전 서울시는 이런 집단에 법인설립허가를 해 주기도 했다. 이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대한민국은 물론 종교의 자유가 있다. 누구나 종교신앙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포교의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 민족정신을 파괴하거나 좀 먹는 종교는 그것이 세계적 클래식종교라 할지라도 우리사회에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종교에 차별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민족자존을 위한 국민의 정신교육 차원에서 계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뿐만 아니라, 이들 일제종교들은 명목상 한국인을 교단본부의 책임자들로 세우고, 교단은 일본인들이 뒤에서 직접운영하며 부동산을 늘리고 있다. 교당이나 지역본부라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매입되는 그 부동산 구입비는 모두 한국 신도들에게서 거둔 돈이다. 그러나 종교단체 이름으로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건립함으로 세제혜택도 받고 있다. 정부 관련부처가 심각히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다.
    • 연지골
    • 사설
    2020-01-06
  • 닮은 꼴, 연동형 비례대표 선거법
    연동형 비례대표 선거법이 정당의 난립을 부추겨 우리 정당사에 그 유래가 없는 해괴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어쩌면 정당이 100여 개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한국기독교의 교단 난립이 그것이다. 80년대 초 신군부는 무인가로 운영되는 한국교회 신학교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땐 교파나 교단을 통틀어서 34개 정도가 있었고, 그들 교파나 교단들은 모두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운영했다. 그런데 그 신학교들 가운데 대학인가를 받은 학교는 10여 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인가였다. 교육당국이 이들 무인가 신학교를 어떻게 양성화 할 것인가를 논의하다가 교계의 어떤 인사로부터 1교단 1신학교 정책을 건의받았다. 자격을 갖춘 1교단에 한해 1개 대학을 인가하자는 것이었다.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드러났다. 1교단 1신학교 정책이 발표되자, 우후죽순 교단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교단운영에서 좀 소외된 목사들이 10여명씩 다방이나 커피솝에 모여 앉아 교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전국 곳곳에서 20~30여평 되는 건물을 임대해 대한예수교장로회 00교회 개척간판을 내걸며 그 옆에 00총회본부, 00총회신학교 간판이 같은 날 나란히 내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단간판이 이제는 300여 개가 휠씬 넘고 있다. 1교단 1신학교 정책 입안자들은 헌법상 종교자유에 의해 교단설립을 막을 법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연동형 비례대표 선거법이 이것과 꼭 닮아 있다.정의당을 비롯한 여당의 2중대들이 공수처법을 원하는 민주당을 압박해 무리수를 두면서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비례대표 선거법을 만든 데까지는 성공했다. 21대 총선을 이 선거법대로 치루면 자신들의 의석이 상당수 늘어날 것이라고 들떠 있었다. 거기에 비례대표에서 한두 석이라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우후죽순 군소정당들이 생겨나고 있다. 거기에다가 야당에서 ‘비례한국당’을 만들겠다고 하니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정부의 정책이나 국가근간을 이루는 법을 조령모개(朝令暮改)로 만드니 이런 꼴이 벌어지는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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