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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종교인 분포 조사에 나타난 의미
    서울시민 26.3%가 기독교인(개신교인)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서을시가 2014년 10월 서울시민 4만5496명을 표본조사한 것으로 국민일보가 지난 5월 21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사는 자치구는 용산구(32.8%)이며, 그 뒤를 송파구(32.5%) 도봉구(31.2%) 강동구(29.5%) 영등포구(28.5%)가 따랐다. 비교적 기독교인이 적은 구는 종로구(19.6%) 광진구(16.8%)였다. 이에비해 불교는 전체 10.6%이고, 천주교는 9.4%에 지나지 않았다.또 기독교는 10대(26.9%)에서 60대(25.2%)까지 고루 나타났고, 불교는 50대(13.4%) 이상에서만 10%를 넘었다. 또 남성의 23.8%와 여성의 28.8%가 기독교인이고, 학력별로 보면 기독교는 대졸 이하가 25-26% 정도였고, 대학원 이상에서는 35.8%였다.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대체로 기독교인의 학력이 높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이번 서울시의 종교인구 분포조사는 요즘 제기되고 있는 기독교의 위기론이 근거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최근 안티기독교와 교회 안의 개혁세력 등이 한국교회 일부 대형교회에서 일어난 내부 문제를 확대하여 한국 기독교가 내리막길로 가고 있다는 기독교 위기론을 퍼뜨려 왔다. 그러나 이번 서울시 조사에서 보는 통계는 그같은 위기론이 실체가 없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이같은 현상만 보더라도 오늘날 한국사회의 주류종교는 기독교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자유로운 시민사회는 그 사회의 지도이념은 주류종교에서 나온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이념이 과연 한국기독교에서 나온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좀 회의적이다. 이는 한국기독교가 심각히 분열해 있고, 국가나 민족의 미래를 담보하는 지도력이 불신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서울시 통계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사회가 기독교를 외면하고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아가야 할 사항은 불교에 편중되어 잇는 서울시의 종교문화 지원정책이다. 정부의 불교문화 우대정책에 따라 서울시 종교문화 지원정책도 불교에 편중되어 있다. 서울시는 시민의 26.3%가 기독교인임을 감안해 각 종교지원 등에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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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6-10
  • 불타는 가시덤불
    ◇모세가 그 조상들이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것은 광야에서 불붙은 가시 떨기나무에서이다. 그의 나이 80이 다된 때였다. 모세가 40세 되는 해에 동족을 핍박하는 가해자를 죽이고 해외로 도망쳐 가정을 이루고 산지 오랜 후의 일이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출 3:1-4). 이 때 모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아무도 없는 혼자일 때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모세가 그 부르심에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이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압제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지도자로 부름받는 순간이다. 그 곳은 모세가 평소에 양무리를 이끌고 수없이 다니던 곳으로 모세의 일상이 있는 곳일 뿐, 전혀 새로운 땅이나 거룩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자 거룩한 땅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 하나님이 임재하면 그것이 어디든 거룩한 곳이 된다. 이후 모세는 온갓 시련과 풍상을 겪으며, 이슬라엘 민족을 이끌고 40여년의 긴 광야생활 끝에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야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그곳 느보산에 올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생을 다한다.◇“모세가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이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 그의 소명도, 그의 죽음도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일 뿐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나는 아직 어리니 안된다’고 누가 거부할 수 있는가? 또 ‘나는 아직 힘이 있으니 아직 남아 일을 더해야 한다’고 누가 그것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모세는 눈도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도 쇠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 사명이 다하매 그도 죽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의 정계성이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출 19:18). 시내 산과 광야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과 같이 임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 일상에서도 ‘불’같이 임하신다. 그 강력함에 아무도 그의 부르심을 저항할 수 없다. 그것이 불가항력적 은혜이다.◇광야의 가시덤불은 보잘것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 보잘것 없는 가시덤불에 임하셨을까?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이집트의 온갖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 학문은 광야에서 모세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세는 자신이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다. 내가 광야의 가시덤불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은 나를 찾아아 부르신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일상의 신발을 벗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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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0
  • 봄철 속의 이 잔인한 달들 -임 영 천 목사
    서양의 어느 시인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당시 그 이름난 시인이 한국의 4월까지를 염두에 두고서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의 결과는 바로 적중된 표현인 것 같다. 적어도 지난해(2014)부터는 더욱더 그러하다는 판단이 앞서는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60년 4월에 이른바 4·19혁명이 일어나 많은 젊은이(특히 대학생)들이 산화했었다. 정치 일선의 실권자들이 물러나고 새 정부가 들어섰으며 새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고작 1년 만에 군부 세력에 의해 소위(所謂)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4·19의 의의는 역사 속에 점차 묻혀져 갔다. 그러나 T.S.엘리엇이 말한바 “4월은 잔인한 달”이란 말속에는 다분히 역설적(逆說的)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4월은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뒤흔든다.”란 유명한 시구에서 볼 때 그 복잡 미묘한 뜻이 독자들에게 뚜렷이 전달된다. 그(시인)에 의하면 4월이 단순히 잔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황무지’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시들어버린 뿌리에서 생명체를 일으켜 세울 봄비를 내리는 계절이라면 4월은 ‘잔인’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의미만을 지닌 계절은 결코 아니란 말이다. 4·19 의거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역시 대단한 의의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정치적으로 이미 죽어버린 땅(死地, 황무지)에서 라일락을 키워보려고 젊은이들이 일으킨 일대 거사였고 이로 인해 이 땅에 일시적으로나마 시들어버린 뿌리에서 무언가 생명이 꿈틀거리게 봄비를 내려 준 의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무수한 젊은이들이 죽고 또 다쳤다면 이런 동력을 제공해 준 4월이 잔인한 달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그런데 지난해(甲午年)에 일어난 4·16 세월호침몰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이 4월이란 계절을 우리나라에서 더욱 잔인한 달로 인식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판단된다. 예부터 무슨 세계7대불가사의란 표현이 자주 사용돼 왔는데, 이 ‘세계’란 말 대신 적어도 ‘한국’이란 말로 바꾸어 사용할만한 거리는 될 수 있는 게 이 사건이 아닌가 한다. 어떻든 세월호 사건은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것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하고 야릇하다.”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사건이었기에 정상적인 인간의 머리로는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이 이상하고 야릇한 사건이었다는 말인가. 이 ‘불가사의한 일’의 실체를 풀어야 할 책무가 ‘흐르는 세월의 배’ 위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얼마 전에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의 재가를 미루고 즉각 재협의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된다. 그 성명의 내용 가운데 그 시행령이 “사실상 조사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공무원이 특조위의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하는 대문이 나오는데,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특조위의 이 시행령이 불가사의해도 보통 불가사의한 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 아닌가. 1961년 5월16일에 소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후에 이 세력은 피의자 8명 처형의 이른바 인혁당 재판이란 극도의 잔인한 사건까지 날조해 가면서 3선 개헌에 득의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했지만 끝내 역사의 엄중한 심판에 의해 그 세력이 소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떤 이의 “나는 잔당이 아니고 본당이다.”라고 큰소리쳤던 것처럼 요즘 그것의 잔당 아닌 본당 세력이 재집권에 진입하면서 한국의 정치적 불운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4월은 잔인한 달에서 이제 5월도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울 성싶은 일이 이어져 가는 편이다.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80년 5월18일에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민중항쟁은 그 하루 전 날 있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잔인한 학살 만행 때문에 촉발된 것이어서, 그 책임을 통감한 당시 집권세력에 의해 이미 보상 절차까지 거의 끝나가는 현 시점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에 의해 북한 공작원 개입 운운의 망발이 발해지고 있음은 매우 유감이라고 하겠다.4·16 세월호 사건, 4·19 의거 사건, 5·16 군사 쿠데타,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등은 한국의 잔인한 집권 세력들과 어떻게든 관련된 사건들이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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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15-05-28
  • 정부의 희안한 문화정책
    지난주 서울을 비롯한 전 대한민국 구석구석은 온통 ‘부처님 오신날’ 경축행사로 들떠 있었다. 누가 봐도 대한민국은 불교국가로 인식할 만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주류종교가 없는 다종교사회이긴 하지만, 딱히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류종교를 꼽는다면 기독교이지 불교가 아니다. 현재 신도수만 따져도 기독교는 신구교를 합해 1600만명에 이른다. 이는 1200만 불자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이다.뿐만 아니라, 불교는 매주 한번씩 절간을 찾아 설법을 듣는 신도수는 전체 신도의 10%도 안된다. 부처님 오신날을 비롯해 1년에 한두번 절간을 찾는 신도가 훨씬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신교의 경우 약 90%가 매주 혹은 매달 한번 이상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 천주교의 경우도 개신교보다는 매주 미사 참석율이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불교보다는 훨씬 높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 신도들이 각 종교에서 배운 종교적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한다고 볼 때, 기독교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또한 우리사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의 신앙 또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국회의원 약 40%가 기독교인이고, 역대 정부의 장차관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으며, 군 장성급이나 문화인들 가운데도 기독교인이 타종교인들보다 많다. 그리고 각 지자체의 의회는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포진해 있다. 그런데 왜 이런 대한민국이 5월만 되면 불교국가로 변하는가? 그것은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언제부터인가 우리정부의 문화정책이 유교는 전통문화로, 불교는 전통종교로, 기독교는 외래종교로 규정하고 있다. 엄격히 따지면 모두가 외래 것인데, 한국 땅에 온지 좀 오래된 것은 ‘전통’이 되고, 좀 늦은 것은 그것이 세계적 종교일지라도 외래종교로 취급받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가 아직도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매년 ‘부처님 오신날’ 행사를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불교에 지원하는 지원금은 그 액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부처님 오신날 연등행사는 불자들의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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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5-28
  • 종교개혁 500주년 대대적 행사로 치루자
    2년 후 2017년 10월 30일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일뿐 아니라, 오늘의 근대사회를 이루는 기초였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중세의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오늘의 시민사회가 형성되었으며, 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싹트 난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 500주년은 인류사가 기념할 만한 중요한 날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한국교회가 하나로 뭉쳐 대대적인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할 것을 제안해 본다.지금 한국교회는 각 교계단체별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각 단체별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대로 추진하고, 별도로 한국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행사를 기획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주최자의 문제, 예산의 문제 등 난간이 많겠지만 그동안 한국교회는 대형집회를 여러 차례 기획하고 치룬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뜻만 모이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다고 본다.지난해에는 천주교가 광화문을 메웠고, 금년에는 불교가 광화문을 메웠다. 후내년에는 개신교가 광화문을 한번 메우면 어떨까.여기에는 기독교계 뿐 아니라, 일반사회의 각계 인사들도 참여시켜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면 분열과 갈등 속에 있는 우리사회의 치유를 위한 좋은 국민적 행사가 될 것이다. 종교개혁의 덕을 본 것은 교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전반에 종교개혁은 영향을 끼쳤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세션에 참여하여 발표도 하고, 공연도 하며, 대대적인 축제의 장을 만든다면, 이 날은 또 한번의 개신교의 날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그러기 위해서는 교회협, 한기총, 한교연을 비롯한 각 교회연합단체들과 주요교단들이 서로의 경쟁을 잠시 접고 한 자리에 모여야 한다. 그래서 조직과 기획은 기독교가 맡아 추진하고, 사회 각계인사들을 참여시킬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 분야의 전문가이면 되었지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따질 필요는 없다.종교개혁이 없어서면 기독교는 아직도 유럽사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종교개혁은 세계교회뿐 아니라, 인류사 전체를 구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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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8
  • 정통과 이단의 척도
    ◇기독교는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성경’과 ‘고대 에규메니칼 교리’에 둔다. 그리고 여기에 교파별 전통의 교리가 참고된다. 따라서 개신교는 성경에 근거해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규정했고, 천주교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성경 이외의 것에 근거해서 개신교를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개신교 내에서도 칼빈주의는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을 이단적이라 비판했다. 그 이전 이미 1054년에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하고 갈라섰다. 이로써 세계 기독교는 모두가 이단이란 딱지를 붙이게 되었다. ◇정통과 이단의 규정을 ‘성경’과 ‘고대 에규메니칼 교리’에 두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고,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는 기독교가 갈라지기전 세계교회가 ‘하나’였을 때 만들어진 교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교파별 전통이 갖는 교리 역시 성경적이다. 그러나 그들 교리는 그 교파가 갖는 신학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학을 가진 교파를 그 교리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때때로 자기네 교파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이단 정죄에 교파별 교리가 이용된다. 이는 모순이다.◇그러면서 문제는 자신들은 모두가 “성경대로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이단들도 “성경대로 하는데 왜 우리가 이단이냐”고 항변한다. 그러면 성경에 있는 대로 하면 모두 정통인가? 아니다. 그 성경해석이 보편성을 떠나 특정한 목적을 위해 해석될 때는 이단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부류가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대로 한다고 해서, 성경의 문자주의에 빠져 시민사회를 해치는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어 성경에는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지니라”(출 22:18)고 했고, 또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고도 했다. 그렇다고 성경대로 한다면서 무당을 죽이고 그 집을 불태운다면 그런 종교를 그 사회가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은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에 따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바로 신학의 문제이다. 그래서 성경해석에서는 신학이 중요하다. 오늘날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계를 향해 테러를 감행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면서도 ‘코란에 기록된 알라의 뜻’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코란에 대한 보편성을 갖는 신학적 해석이 따르지 못한 결과이다. ◇성경은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태양상을 찍으라”(대하 34:7)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타종교의 상징물들을 파괴하고 그 제사장들을 죽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경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도록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통과 이단이 나누이는 척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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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7
  • 한기총, 이단 검증 기준부터 정하라
    한기총 이단검증특위원회는 지난 22일 한기총이 이단을 해제한 류광수목사와 박윤식목사에 대한 재검증 전문위원을 위촉했다. 각 교단에서 파송한 전문위원은 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 기독교한국침례회,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예장백석, 예장통합소속이고,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개인자격으로 위촉됐다. 그리고 한두 사람에게 더 합류를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류광수목사와 박윤식목사에 대해 이미 이단으로( 규정해 놓은 교단의 대표도 있고, 예단(豫斷)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한기총은 이들과 같은 사안을 놓고 오랜 재판을 한 사람에게도 합류를 권하고 있다고 한다.그 사람들은 이미 그 두 목사를 이단으로 결정해 놓고 있는데, 무엇을 더 검증하겠다고 합류를 한다는 말인가? 재검증은 예단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선입관을 접고 참여해야 한다. 이미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한 사람들은 배제되는 것이 옳다.류광수목사나 박윤식목사에 대한 교계의 검증은 이번이 네번 혹은 다섯번째이다. 이번에 검증위원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앞서 한 검증에 대해서는 일체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검증 잣대가 다른데, 검증 기준도 없이 그들이 모여 무엇을 어떻게 검증한다는 말인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최소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검증 기준부터 정해져야 한다. 성경 해석 몇 구절 들추어서 이단이네, 아니네 하는 논쟁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고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한국교회에서 이단은 두 종류의 이단이 있다. 하나는 '교주우상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교리적' 이단이다. 교주우상주의는 그 집단의 지도자를 신적 존재로 추종하는 경우이고, 교리적 이단은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부정하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같은 검증 기준없이 설교시간에 내뱉은 몇 마디 신학적 용어 따위를 문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이번에 한기총이 한국교회에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이단 검증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해 앞으로 이단시비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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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5-26
  • 죽었으나 산 자의 오월은 진동한다-홍 성 표 목사
    지금부터 35년전 오월 18일 광주는 억압과 폭정에 맞서 불법 신군부 쿠테타에 의해서 오직 하나 뿐인 생명을 내걸고 싸웠다. 박정희의 종말과 함께 그의 가지인 전두환의 권력욕과 파시즘적 지배 욕망이 광주의 하늘과 땅을 피빛으로 물들게 한 것이다. 필자는 그 오월의 한 해 전 79년에 기장 전국청년광주대회에 참석하여 박정희의 18년 절대 권력의 통치에 저항하는 기도를 드리며 광주의 시내 금남로를 거닐었다. 일제의 청산을 묻고 반토막의 나라 분단의 땅에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민족의 독립과 투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피의 갑을 외면한 채 권력의 욕정에 빠져 4.19의 맨 가슴에 무너지고, 무능한 민주당 정권을 짓밟고 나선 박정희의 군화 발에 민족과 민중의 꽃은 무참히도 폭압에 스러져 갔다. 그 어둠과 죽음의 가지인 신군부 전두환의 공중권세가 민주를 부르짖는 하늘의 소리를 총과 탱크와 무자비한 학살과 살육으로 붉은 선혈로 광주를 덮은 것이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의 세계가 무너진 지 몇 성상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분단의 무거운 벽이 둘러 선 이 땅에는 반도의 냉전으로 악한 권력과 탐욕을 유지 하고 있다.신군부가 권좌에서 형식상 물러가고 87년의 신군부 끄나풀인 거짓 보통의 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수용한 87년 6.29 그날의 일이 꽤 오래 지나갔지만, 여전히 부정과 간교로 부활한 악의 세력은 민족과 민중의 눈과 귀를 속이며 조중동 더러운 언론과 아부와 아첨을 떠는 존재들과 함께 보수의 찌꺼기의 이름으로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있다. 역사를 왜곡시키고 호도하며 민중의 심장과 가슴을 도려내는 사기극을 연출하고 있다. 밥벌이에 여념 없는 어용 지식인들과 비굴하고 비열한 반역사적 종교인들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역사의 어둠을 깊이 하고 있다. 오월의 피는 아직도 식지 않고 뜨겁게 끓고 있는데 허리 잘린 반도의 몸은 타 들어 가고 있다. 불의와 거짓에는 침묵하고 썩을 것들에는 존재와 가치를 썩고 있다. 무어라 말해도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붙잡고 허덕이고 허기진 속을 채우기는 역사의 텅 빈 공간의 계곡은 수천 길 낭떠러지다. 조용히 걷고 싶은 오솔길은 역사의 심장을 두드린다. 오월의 소리를 억압하고 외면하고 등 돌리는 울음들이 내 발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요동치게 한다. 체념과 갈등과 전쟁과 싸움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허무와 허무주의로 유혹한다. 신자본주의와 그 끝자락으로 치닫는 인간의 탐욕들이 존재와 가치의 의미들을 희석시키는데 신록은 짙푸르러만 간다. 오월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땅과 하늘을 진동시키던 날에 애절한 생명의 미소 머금고 잠벵이 걸치며 이슬 내린 논둑길을 걸어간다. 푸른 보리밭은 바람에 춤추고 수줍은 봄은 태양을 품속에 안는다. 오월은 죽지 않는다. 오월의 노래는 그치지 않는다. 세월호가 이 땅을 메아리 치고 큰 물결 새로이 잦아든다. 죽은 자여 부활 하고 산자는 춤을 추라. 제주의 한라에서 뜨겁게 끓고 있는 백두의 심장까지 부서지고 깨어진 몸을 다시금 고추 세워 살지 못한 한의 응어리들을 풀어 가리라. 존재의 깊이와 높음과 넓이를 다하여 거친 땅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 기필코 만들어 간다. 죽은 민주 살려내고 상처 입은 나뭇가지 손등으로 막아서서 내 작은 가슴으로 호흡하리라. 일어서야 한다. 소리쳐야 한다. 살려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포기해서는 아니된다. 가쁜 숨 몰아쉬고 새벽처럼 달려가야 한다. 산과 강을 넘고 바다도 단숨에 건너 가서 잃어버린 혼을 찾아와야 한다. 허물 수 없는 벽을 허물고 잃은 땅 회복하여 다시 세상 섬겨야 한다. 아직도 더럽고 추한 이름 하여 보수언론들은 오월을 종북과 빨갱이로 매도하며 그들의 피 흘리는 가슴을 후벼 판다. 거짓과 불의를 밥 먹듯이 하여 밥벌이 욕망을 채우는 악한 세력들이 오월의 자존을 짓밟아도 역사는 죽은 것이 아니다. 한 생명 바쳐 그래도 민주의 이름은 얻었지만 살아 있는 부끄러움은 여전하다. 광주의 오월, 금남로의 오월 분단의 오월, 그리고 언제인가 반드시 오고야 말 통일의 오월, 기다리던 님 그 오월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푸른 하늘과 생명의 땅을 이어가리라. -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5-15
  • 부교역자들의 자괴감
    한국교회에는 줄잡아 약 14만명 정도의 목사와 전도사가 있다. 이들 중 교회의 담임목사는 약 6만명쯤 된다. 나머지는 소위 부목사, 전도사 등 부교역자에 속하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가 매우 부실해 자신들의 사역과 관련 경제적 만족도 및 자존감 정도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이미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바이긴 하지만, 지난 8일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서울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가진 “한국교회 부교역자를 생각하다”라는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부교역자 94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로 더욱 명확해졌다. 이 설문조사 결과는 현재 한국교회 부교역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사역의 불안정성과 과도한 업무에 힘겨워하고 있으며, 인격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체감하는 경제사정은, 매우 어렵다(17.6%), 어렵다(46.6%), 보통이다(30.6%), 만족하다(4.4%), 매우 만족하다(0.8%)로 나타나, 64.2%가 아렵다고 답했고, 55.7%가 현재의 사례비로는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답했다.그러면 현재 한국교회 부교역자가 받는 사례비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현재 평균 사례비는 전임 부목사 204만원, 전임 전도사 148만원, 파트타임 전도사 125만원으로 조사됐다. 파트타임 전도사는 81.7%가 100만원 수준이고, 전임 전도사는 48.7%가 100-150만원 정도이며, 전임 부목사의 34.6%가 150-200만원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또 현재 한국교회의 부교역자의 현실을 묻는 주관식 응답에는 743명 중 80명이 종, 머슴, 노예와 같다고 했고, 60명이 계약직, 비정규직, 인턴, 일용직, 임시직이라고 생각했으며, 41명은 담임목사의 종, 하인, 하수인으로, 39명은 소모품, 부속품 정도라고 응답했다. 이는 소명에 의해 사명현장에 나선 목회자의 자존감과 관련하여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매우 우려되는 현실이다. 소명감으로 목회길에 나선 교역자들이 목회현장에서 처음부터 좌괴감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담임목사들의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문제는 이런 목회현장의 풍토가 대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담임목사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교역자는 자신이 담임목사가 되면 부교역자의 처우를 그같이 대우하게 된다는 말이다.
    • 연지골
    • 사설
    2015-05-15
  • 가정의 달에 보는 가장의 소망
    요즘 인터넷에는 ‘앞으로 살 날이 1년 밖에 안남았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꿈과 돈 5억원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는 청소년들과 가장(家長)들의 의식조사 내용이 떠있다. 청소년들은 모두가 꿈을 택했다. 꿈을 이루고 5억은 벌면 된다는 것이다. 당연하고 훌륭한 대답이다. 청소년들이 꿈을 포기하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그러나 죽기 전에 꼭 해고 싶은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 질문에, 아버지들은 대부분 꿈이 아니라 5억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그 5억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자신은 돈이 없어서 그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식들이라도 그 꿈을 이루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우리사회 부모님들의 정신세계는 건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주제이다. 많은 소시민적 부모들은 누구나 이제 내 때는 지나갔으니, 자식들이나 제 꿈을 이루며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책임감 있는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또 다른 우리사회의 한 모습도 접하게 된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는 일그러진 모습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문제가 결국은 사회적 짐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이제까지 우리사회에서 대부분의 부모는 그 자식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 왔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그러한 부모 자식간의 사랑의 정신이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이번 의식조사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있다는 우리사회 아버지들의 한결같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천륜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회적 변천에 따라 문화적 현상이 급속히 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미풍양속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가정의 달이 핵가족화 해 가는 우리사회에서 가족간 유대와 친목을 도모하고, 부모님들의 정신과 가풍을 이어가며, 유산과 유지를 받드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을 비롯하여 지자체 등에서도 그런 방향의 문화적 행사를 많이 준비해 가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1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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