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해설/기획
Home >  해설/기획  >  손석태

실시간뉴스

실시간 손석태 기사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76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함께 멸망하게 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의 회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이를 실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새로 만들고자 한 세상은 말씀을 통한 평화로운 세상이다(사 2:1-5).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임마누엘을 약속하시고, 한 아기, 한 아들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아이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분인데, 위대한 섭리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불리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심으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해변 길과 요단 건너 갈릴리 등 전에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큰 빛이 비추고, 추수할 때와 전리품을 나눌 때 맛본 것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9장). 이어서 성경은 11장에도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정체와 그가 이루실 세상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본문은 1절에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시작하고 10절에 다시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반복하고 있어서 처음과 나중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의미로 수미상관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사야 11:1-10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문예적 단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새의 뿌리, 줄기, 가지”라는 말은 모두 이새의 후손, 즉 다윗의 후손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사랑하여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의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히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4-17; 시 89:3-4).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약속을 믿고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다윗과 같은 왕을 흠모하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보내주시기를 기다렸다.이새의 줄기에서 나오게 될 왕에 대해서 이미 이사야서 7장과 9장에서는 그가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과는 다른 영적 존재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11장 1-5절에서도 이사야는 다시 그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분별의 영, 권면과 능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머무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의 후손, 메시야로 오실 분을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임할 것이라고 특별한 소개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들을 타락하도록 유혹한 뱀을 심문하시고, 언약적 저주를 내리시는 가운데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결국은 뱀을 사주한 사탄을 짓밟아 진멸시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사탄을 짓밟을 여자의 후손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며, 사탄이라는 영적인 존재를 진멸하려면 사탄보다 더 우월한 영적 존재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며 또한 영적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될 메시야는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시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지혜와 분별의 영은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지혜를 구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분별력, 곧 이해심이다. 지도자, 특히 왕은 그의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이다. 그에게는 권면과 능력의 영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권면이라는 말은 사 9:6에서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했던 것과 같이 사용된 “요에츠”라는 어휘이다. 말하자면 전쟁에서 작전을 짜고 기획을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일종의 책사로서의 영이며, 그것을 전술에 응용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위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권면과 능력의 영”이라는 말은 “전략과 전력의 영”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왕은 전략과 전력이 있어야 그의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은 위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한다. 또한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자 위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잠언 1:9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 걸음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는 데, 히브리어 성경을 정확히 번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2:17)라고 했다. 선과 악이 지식과 동격으로 쓰여져 있다. 여기서 선과 악은 메리즘(merism)으로 지식을 의미한다. 선악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여호와를 경외할 수 없으며,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은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성령으로 잉태하신 메시야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로 듣는 대로 만 재판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봐주고, 부자라고 해서 편견을 갖지 않고, 공정하고 성실한 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한 장의 그림으로 묘사하고 계신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젊은 사자, 살진 짐승과 어린 아이, 암소와 곰, 젖뗀 아이가 독사가 함께 어울려 살며, 사자가 풀을 뜯게 된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태생적인 적대감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 먹어야 하는 먹이 사슬의 구조 속에서는 포식자들의 식습성이 완전히 개조가 되기 전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는 이 적대적인 존재들이 그들의 모든 적대감을 내려놓고 서로 한데 어울려 살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러한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 그리고 메시안익 쥬들 (Messianic Jews)은 이사야서 11장에 그려지는 이 낙원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특히 예루살렘에는 엣 성전이 재건되고,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 의식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11장의 메시야가 오시는 세상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쥐나 바퀴벌레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사자까지 풀을 먹는다니 이 세상에 그 많은 짐승들이 뜯어 먹을 풀이 있겠는가? 한 떼의 메뚜기가 한번만 지나가도 남은 것이 없이 다 황폐화 되버리는 데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러한 세상을 원하실 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비유이다. 서로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 먹히는 이 숨막히는 포식자들의 세계가 메시야의 통치와 판결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림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비유나 은유를 통하여 설명하시는 부분이 많다. 오늘 날 학자들 가운데는 신학 용어가 모두 비유이고 은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저들은 성경 안에 있는 비유나 은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잘못이다.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다윗의 위를 영원히 이으실 그 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며, 이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9).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함으로 약육강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역성경은 여기서 “여호와의 지식”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라고 이중 번역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한 세상이 되어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사야 2:1-5에서도 세상의 민족들이 시온의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을 받음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11장에서도 여호와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함으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불가능한 평화를 이룰 것을 말하고 있다. 세상의 회복과 낙원은 결국 말씀으로 이루실 일이라는 것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타락한 세상을 말씀으로 회복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워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대언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도록 하셨다. 그리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여자의 후손이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싹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는 종말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말씀 사역을 시작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을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시고,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과 우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만물 사이에 비뚤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성탄을 맞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이 종말적인 비전을 바라보며, 선지자적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한 도리가 될 것이다.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76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이사야 11:1-10)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함께 멸망하게 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의 회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이를 실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새로 만들고자 한 세상은 말씀을 통한 평화로운 세상이다(사 2:1-5).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임마누엘을 약속하시고, 한 아기, 한 아들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 아이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분인데, 위대한 섭리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불리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심으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해변 길과 요단 건너 갈릴리 등 전에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큰 빛이 비추고, 추수할 때와 전리품을 나눌 때 맛본 것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9장). 이어서 성경은 11장에도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정체와 그가 이루실 세상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본문은 1절에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시작하고 10절에 다시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반복하고 있어서 처음과 나중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의미로 수미상관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사야 11:1-10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문예적 단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새의 뿌리, 줄기, 가지”라는 말은 모두 이새의 후손, 즉 다윗의 후손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사랑하여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의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히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4-17; 시 89:3-4).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약속을 믿고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다윗과 같은 왕을 흠모하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보내주시기를 기다렸다.이새의 줄기에서 나오게 될 왕에 대해서 이미 이사야서 7장과 9장에서는 그가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과는 다른 영적 존재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11장 1-5절에서도 이사야는 다시 그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분별의 영, 권면과 능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머무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의 후손, 메시야로 오실 분을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임할 것이라고 특별한 소개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들을 타락하도록 유혹한 뱀을 심문하시고, 언약적 저주를 내리시는 가운데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결국은 뱀을 사주한 사탄을 짓밟아 진멸시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사탄을 짓밟을 여자의 후손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며, 사탄이라는 영적인 존재를 진멸하려면 사탄보다 더 우월한 영적 존재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며 또한 영적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될 메시야는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시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지혜와 분별의 영은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지혜를 구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분별력, 곧 이해심이다. 지도자, 특히 왕은 그의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이다. 그에게는 권면과 능력의 영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권면이라는 말은 사 9:6에서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했던 것과 같이 사용된 “요에츠”()라는 어휘이다. 말하자면 전쟁에서 작전을 짜고 기획을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일종의 책사로서의 영이며, 그것을 전술에 응용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위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권면과 능력의 영”이라는 말은 “전략과 전력의 영”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왕은 전략과 전력이 있어야 그의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은 위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한다. 또한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자 위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잠언 1:9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 걸음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는 데, 히브리어 성경을 정확히 번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2:17)라고 했다. 선과 악이 지식과 동격으로 쓰여져 있다. 여기서 선과 악은 메리즘(merism)으로 지식을 의미한다. 선악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여호와를 경외할 수 없으며,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은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성령으로 잉태하신 메시야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로 듣는 대로 만 재판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봐주고, 부자라고 해서 편견을 갖지 않고, 공정하고 성실한 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한 장의 그림으로 묘사하고 계신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젊은 사자, 살진 짐승과 어린 아이, 암소와 곰, 젖뗀 아이가 독사가 함께 어울려 살며, 사자가 풀을 뜯게 된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태생적인 적대감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 먹어야 하는 먹이 사슬의 구조 속에서는 포식자들의 식습성이 완전히 개조가 되기 전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는 이 적대적인 존재들이 그들의 모든 적대감을 내려놓고 서로 한데 어울려 살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러한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 그리고 메시안익 쥬들 (Messianic Jews)은 이사야서 11장에 그려지는 이 낙원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특히 예루살렘에는 엣 성전이 재건되고,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 의식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11장의 메시야가 오시는 세상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쥐나 바퀴벌레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사자까지 풀을 먹는다니 이 세상에 그 많은 짐승들이 뜯어 먹을 풀이 있겠는가? 한 떼의 메뚜기가 한번만 지나가도 남은 것이 없이 다 황폐화 되버리는 데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러한 세상을 원하실 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비유이다. 서로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 먹히는 이 숨막히는 포식자들의 세계가 메시야의 통치와 판결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림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비유나 은유를 통하여 설명하시는 부분이 많다. 오늘 날 학자들 가운데는 신학 용어가 모두 비유이고 은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저들은 성경 안에 있는 비유나 은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잘못이다.이새의 뿌리에서 나시고, 다윗의 위를 영원히 이으실 그 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며, 이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9).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함으로 약육강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역성경은 여기서 “여호와의 지식”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라고 이중 번역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한 세상이 되어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사야 2:1-5에서도 세상의 민족들이 시온의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을 받음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11장에서도 여호와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함으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는 불가능한 평화를 이룰 것을 말하고 있다. 세상의 회복과 낙원은 결국 말씀으로 이루실 일이라는 것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타락한 세상을 말씀으로 회복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워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대언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도록 하셨다. 그리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여자의 후손이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싹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는 종말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말씀 사역을 시작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을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시고,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과 우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만물 사이에 비뚤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성탄을 맞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이 종말적인 비전을 바라보며, 선지자적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한 도리가 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1-0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5
    이사야 9:1-7은 하나님께서 7장에 처녀가 잉태하여 낳게 될 아들, 임마누엘에 대한 약속에 이어 그리스도 탄생에 대한 예고이다. 하나님께서 한 아기, 한 아들을 주셨다는 예고는 8장 마지막 부분에 율법과 증거를 따라 말하지 않는 선지자들 때문에 임하게 될 재난을 그 서막으로 그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새벽이 없고, 역경과 굶주림과 분노 가운데서 그들의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보아도 오직 고난과 흑암과 고통의 어두움 뿐일 것이다. 그들은 흑암 속으로 내 몰릴 것이다.”(사 8:22). 본문은 온 땅이 흑암으로 뒤 덮여 있는 가운데 마치 태양이 어둠을 헤치고 그의 얼굴을 내밀려고 꿈틀거리는 새벽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배경으로부터 한 아기 탄생에 대한 예언이 시작된다. 전에 멸시 당하고 고통 가운데 있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해변길과 요단 건너 이방의 갈릴리를 지명하여 이 땅들은 어두움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꼐서이 땅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다. 이 땅들은 아람과의 국경 지역으로 주전 734-733년에 아시리아가 아람과 에브라임을 정복하고, 이곳 주민을 아시리아 땅으로 소개시키고 아시리아 사람을 이곳으로 이주 시킨 곳이다. 수 백 년 동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살던 자들이, 전쟁에 패배하여 나라가 망하고, 정권이 바뀌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일부는 이방 땅에 노예로 끌려가 죽지 못해 사는 학대를 받았다. 그래서 이 백성을 가리켜 어둠 속을 거닌 백성,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땅에 빛이 비쳤다. 어둠 속을 걷든 이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쳤다. 여호와께서 보응하심으로 이 백성들에게 즐거운 날이 왔다는 것이다. 주께서 민족을 번창케 하시고, 추수하는 날의 기쁨, 승전의 날에 전리품을 나누는 날의 즐거움과 같은 큰 즐거움을 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보응하는 날이며, 그날은 주께서 한 아기, 한 아들을 큰 빛으로 보내시는 날이기 때문이다.여호와께서 큰 빛으로 보내신 한 아이는 보통 우리가 낳고 기르는 아이가 아니다. 그의 어깨에는 통치권이 있고,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이 아이에 대해서 언급하시고, 그에게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이사야서 7장에서 유다왕 아하스가 북왕국의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군사 동맹을 맺고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여 다윗의 후손, 아하스를 그의 왕좌에서 끌어내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떨고 있는 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아하스를 안심시키며 이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징표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 이름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이사야서 8:7-8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북왕국의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을 대적할 아시리아를 일으켜 마치 홍수가 온 땅을 휩쓸어 버리듯이, 이들을 쓸어버릴 것이며, 심지어 유다 땅에도 그 홍수가 목에 까지 차오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아람의 대 아하스를 향한 군사동맹 작전은 실패하고 오히려 그들이 망할 것이라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반면에 주께서는 아하스 왕과 유다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을 주신다. “임마누엘아, 그것이 펼친 날개로 네 온 땅을 뒤덮을 것이다”(사 8:8) … 함께 모의해 보아라. 실패할 것이다. 말을 해보아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물로 뒤덮여도 임마누엘이 그의 팔로 안고 있는 그 땅은 물이 삼키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낳게 될 아들, 임마누엘은 이 심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땅의 백성을 삼키지 못하게 지키시는 방패요 구주가 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아들이기 때문이다.그런데 9장에서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위대한 상담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강의 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두가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름이다. 그 아들은 신적 존재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상담자”라는 이름에 대하여 한글 역본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서양의 역본들도 달리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개역 성경은 KJV 을 따라 “기묘자와 모사”라는 두 이름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그 아이의 이름은 다섯 개가 된 셈이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 왕 등은 모두 앞에 “전능하신”, “영존하시는”, 그리고 “평강의”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그러나 “기묘자”와 “모사”를 나눈다면 본문의 병행어구로서 운율이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둘을 붙여서 쓰는 것이 옳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모사”라고 쓰는 것이 본문의 문맥이나 어휘의 용법에 비춰볼 때 옳지 않다. 따라서 최근의 한글 역본들은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이것도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 “페레 요에츠”()라는 히브리 말 가운데 “페레”라는 말은 “놀랍다” “기이하다”(wonderful)는 의미이다. 문제는 “요에츠”라는 어휘의 의미이다. 히브리어 동사, “야아츠”라는 어휘는 할러데이의 “간추린 히브리어-아람어 사전”(W. Holladay저, 손석태 역)에 의하면 1차적 의미로 “충고하다”(advice), “조언하다”(counsel)는 의미로, 2차적인 의미로 “계획하다” (Plan)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칠십인 역(LXX)에서는 이 어휘를 “부래”(βουλη、)로 번역하고 있는 데 이 말은 역시 “기획하다”(plan)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신약성경 5:38에도 이“부래”(βουλη、)를 사용하고 있는 데, 한글 성경은 “사상”으로 번역하고 있어서 본문과는 너무 빛나간 것 같다. 서양 역본, ESV, TEV, NAS 등은 “plan”으로, KJV 은 “cousel” (상담), NIV “purpose”(목적)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을 고려해보면 “요에츠”라는 어휘를 “상담자”라는 의미보다는“기획하는자” 혹은 “계획을 세우는 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특히 본문에 “옛적에는”어둠과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살던 자들에게, 후에는 이들을 영화롭게 하고, 큰 빛을 보게 하여 기쁘고, 즐거워하게 하시는 분, 또한 그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이제 사사 시대의 기드온을 통하여 미디안을 치던 날 같이 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에브라임과 아람과 아시리아를 손 안에 두고, 마치 장기를 두듯이 이들의 흥망성쇠를 기획하고 작전을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을 기묘자요 모사라고 번역하는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아기의 이름,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과 어울리지 않다. 따라서 기묘자와 모사라는 두 이름으로 나누고, 그 하나를 “모사”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국적인 표현으로는 불경스럽다. TEV는 “비범한 전략가” (Extraordinary Strategist)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러한 군대 용어로 표현하는 것 보다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보다 다듬어진 어휘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기이한 지혜로 세상 만물을 기획하시고,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경영하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섭리”라는 말로 쓴다. 따라서 하나님은 “놀라운 섭리자” 혹은 “기인한 섭리자”이시다. 큰 빛으로 오셔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한 아들로 오시는 임마누엘은 “놀라운 섭리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시다.” 큰 빛, 한 아기, 한 아들로 오시는 임마누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세상을 섭리하시며, 아버지처럼 죄인 된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 평화의 중보자로서 평화의 왕, 그가 바로 오실 그 분이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2-2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4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물 속의 물고기들, 땅 위의 모든 생물들, 그가 이 가운데 배열해 놓은 조직과 질서, 특히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 이 모든 만물의 왕으로 세우신 사람들, 모두 아주 보시기에 좋았고, 흡족해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셨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였다. 그의 창조주와 종주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을 감히 짓밟아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심으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언약적 체계 안에서의 종주로서의 권위를 선포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의 위계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따먹어 버렸다.하나님의 존엄하심과 거룩하심은 인간의 이 반역과 범죄를 묵과하실 수 없어 이들을 문초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들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죽음을 선고하셨다(창 3:19). 그러나 사람의 범죄와 그에 따르는 형벌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아담의 언약적 대표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아담과 함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세우실 때, 우리 사람과 피조물은 하나님 안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죄가 인간의 죄가 되고, 아담에게 내려진 형벌이 사람에게 내려지는 형벌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함께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고, 죄의 삯인 죽음, 곧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롬 5:12). 그리고 사는 날 동안 이마에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야 먹고 살수 있는 고달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언약적 원리 속에서 우리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는 것이고, 결국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언약적 연대성을 부인하고, 원죄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죽음을 맞아야 하는 인간은 죄인일 수 밖에 없다.하나님은 아담에게만 징벌을 내리신 것은 아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과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반역한 여자에게도 따로 징벌을 내리셨다. “내가 너와 그 여자 사이, 그리고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대감을 둘 것이다.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여자와 뱀 사이, 그리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적대감을 두고, 서로 머리와 발을 물고 물리어 상처를 입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뱀과 뱀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오래 가지는 못 할 것이고, 여자와 여자의 후손도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적잖은 부상을 입게 될 것이다. 여기서 뱀이라는 존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뱀은 아니고, 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앞잡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도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 곧 사단의 머리를 짓밟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나뭇잎으로 벌거벗음을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 이 가죽옷은 분명 하나님을 불순종한 반역자, 사형수에게 입히는 죄수복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고 가르친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예식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성령으로 인치신다. 성령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예식이다. 이같은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입혔던 사형수의 죄수복은 언젠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새 옷에 대한 모형이고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장차 사탄의 머리를 짓밟고, 아담 부부에게 입히셨던 그 가죽 옷을 대신한 자유와 생명의 옷을 입히실 구원자에 대한 약속을 주신 것이며, 이는 또한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형상과 모양을 가진 새 아담을 주셔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바울은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었다.”(Αδ‵αμ ο‛、Vε’στιν τυ、ποVτου˜ με’λλοντοV, 롬 5:14)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아담을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사망에 이르는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와 같은 원리로 “오실 분”(새 아담) 한 사람의 순종과 한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을 대신할 “여자의 후손,” 곧 새 아담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첫째는 그는 분명 여자의 후손이여야 한다. 말하자면 여자의 몸에서 나아야 할 사람이다. 둘째로 그는 단순한 뱀의 머리를 짓밟을 자가 아니라 뱀을 그의 앞잡이로 사용하고 있는 사단을 짓밟을 수 있는 영적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새 아담은 인성과 신성을 가지 존재여야 할 것이다. 셋째로 새 아담은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 할 속죄적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새 아담은 아담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담의 죄를 대속할 자격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모두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모두가 죄인들이다. 죄인이 다른 사람을 속죄할 수 없다. 새 아담은 죄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아담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있는 존재는 그 자격이 없다. 그러한 존재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새 아담을 창조하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오시든지 해야 한다. 넷째는 새 아담은 아담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다면 그는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죽음으로 죄 값을 치뤘기 때문에 더 이상 죄와 죽음이 그를 얽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의 속죄가 온전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무능한 거짓말 쟁이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다섯째, 새 아담이 온전한 속죄를 이루어 그 자신이 다시 살아난다면 당연히 새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자들도 새 아담과 함께 살아 나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상이 아니다. 따라서 새 아담의 부활은 필수적이다. 여섯째로새아담은아담과마찬가지로하나님께서새롭게창조하신피조물세계의왕이되어야한다. 그래서 새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이상을 살펴볼 때에 아담을 대신할 새 아담, 곧 여자의 후손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 이외는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예수님 만이 이러한 전제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 언약의 대표자 이자, 새 언약의 주이시오, 왕 중의 왕, 유일하신 하나님일 수 있다. 성경은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새 아담의 자격과 전제 대한 대답이고, 설명이다. 특히 사도 바울의 모든 신학은 이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의 틀 속에서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개신대학원대학교의 교수 논문집 <개신논집> 제 17호에 게재된 본인의 글, “여자의 후손” 을 참조하기 바람).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73
    창세기 1-2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는 아주 정교한 구성이 있고, 문학적 기교가 있는 창조 기사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1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선언한다. 그리고 바로 창세기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계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세계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 가를 보여준다.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1:1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선언하는 독립구절이자 본문의 시작이며, 1:2-2:4a 는 1:1을 부연 설명하는 삽입구이다. 따라서 1:1은 2:4b로 이어지고 이어서 2:25까지는 인간 창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가운데2:9-14의 에덴동산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도 역시 삽입구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선언에 이어 인간 창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담의 창조에 이어 여자와 가정 창조가 본문의 주요 관심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가운데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어떠한 질서와 조직이 있는가를 보여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저자는 1:2a-2:3을 삽입구로 처리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하다. 이상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구조를 분석해보고, 이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1:1 하나님의 천지 창조 선언1:2-2:4a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삽입구 1:2a-2:4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1:2-13 영역의 창조 1: 3-5 빛 1: 6-10 궁창 1:11-13 땅 1:14-2:3 영역의 주관자를 세움 1:14-18 해, 달, 별 1:19-23 새, 물고기 1:24-31 짐승, 가축, 사람 2:1-3 하나님의 안식2:4-15 아담의 창조와 사명 삽입구(2:9-14 에덴동산) 2:16-17 선악과에 대한 명령2:18-25 여자와 가정의 창조 이 그림을 통해서 보면 분명 사람의 위치는 특별하다. 사람은 6일째 되는 날 동물과 함께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다. 시편 8:6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관”을 쓴 존재, 다시 말하면 왕관을 쓴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사람이 왕이라면 사람에게 왕관을 씌우신 하나님은 대왕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는 언약관계가 있고, 특히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피조물은 사람과 더불어 그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이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진 존재라는 것은 비록 그가 다른 동물과 같이 제6일에 창조되었고, 그래서 동물적인 속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동물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특별하게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관리할 수 있는 지능과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말하거나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람은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로부터 구별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이지만 대왕이신 하나님 위에 설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대왕 되심, 언약적 종주가 되심을 선포하시며, 인간에게 항상 그가 피조물임을 잊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이 세상에 하나님-사람- 만물의 위계 질서를 세우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어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살도록 하셨다. 사람은 창조시부터 일하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에덴이라고 해서 일하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으면 살 수 있도록 만드시지 않았다. 또한 사람은 혼자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지만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이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 교통하며 사는 존재이다.하나님과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 바르고 적절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특별하게 지어진 존재가 있다면 여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지으실 때 남자를 돕는 배필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두고 지으셨다. 이는 분명 생육과 번성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피조물은 무에서 창조하셨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다. 유일하게 기존의 물질로부터 창조하신 것이다. 특별한 존재이다. 그리고 여자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마지막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의 크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어 아담의 아내로 주시고 그들이 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시는 곳에서 창조의 기사가 끝맺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여자와 가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점이다. 사람은 마땅히 가정을 이루어 자식들을 낳고, 양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상을 살펴볼 때, 창세기 1-2장의 주요 관심사는 결코 6일 동안의 만물 창조에 있다기 보다는 사람의 창조와 가정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물의 창조는 1:1에 이미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1:2-2:4 에서는 이것을 삽입구로 취급함으로 저자가 의도하는 본문의 흐름은 사람의 창조로 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창조 기사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그의 가정이다. 그런데 그동안 창세기 연구는 물질의 기원과 연대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답을 추구해왔지만 해답을 얻지 못하고 성경에 대한 불신만 불러왔다. 창조 기사에 대한 바른 연구가 성경 전체의 바른 이해에 대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2-0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시고, 시내 산에 데려와서 언약을 맺어 이들을 그의 백성 삼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40년을 행진해왔다. 지금 같으면 8시간이면 다다를 거리를 40년이나 걸려, 이제 가데스 바네아를 거쳐 요단 건너편 모압 평지에 이르렀다.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건너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반복하여 주신 말씀 중 일부가 바로 신명기 8장의 말씀이다. 모세는 입을 열어 “너는 내가 오늘 너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며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땅에 들어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세는 “너는 내가 오늘 너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온 백성, 그러니까 장정만 60만이 되는 이 백성을 향하여 “너희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단수형 “너는”이라고 말한다. 우리 어법에는 맞지 않지만 모세는 그의 백성 모두를 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특히 신명기를 보면 이러한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부분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이점 때문에 모세 오경의 저작설과 통일성을 부인한다. 이들의 주장은 어떻게 한 사람이 똑 같은 청중을 앞에 두고 어떤 때는 복수로 “너희가 …” 이렇게 말하다가 금방 대상을 바꿔 단수로 “네가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분명 신명기 내에 둘 혹은 세개의 자료가 편집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온전한 정신을 갖지 않고서야 같은 청중을 향하여 단수 “너”와 복수 “너희”를 구별하지 않고 연설을 하고, 말씀을 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경의 문서편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명기를 오경으로부터 분리하여 모세가 쓴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특히 신명기에 쓰여진 어휘 분석을 통하여 요시아 왕 때에 이스라엘의 종교 개혁 사상에 투철한 제사장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여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명기로 편집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만일에 이러한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신명기를 비롯한 모든 성경 말씀이 무명의 인간들이 지어낸 신앙 서적이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대를 따라 그들의 신, 여호와에 대한 신앙 고백을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다. 이 책을 믿고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지 않은 예수라는 분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 결국 기독교는 허구의 종교가 되고 말 것이며,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서구의 교회는 이 자유주의자들의 양향으로 말미암아 쇠락하게 되었다.그러나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 그의 성령으로 그의 선지자를 감화 감동하여 성경을 쓰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성경에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오류처럼 보이는 불가해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혜나 지능이 아직 그 신비에 미치지 못하거나 하나님께서 일부러 감추어 두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세상의 모든 신비를 다 알기를 원하시지 않는 부분도 있다.신명기에서 모세나 하나님께서 단수 (너)와 복수 (너희)를 혼용하여 쓰고 있는 것은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다. 한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 전부이고, 이스라엘 민족 전부가 한 사람이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한 사람, 한 여자로 부르고,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잘 못하면 모두가 잘못한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잘 하면 각각의 개인이 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한 사람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언약적 저주가 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모압 평지에서 그가 주신 이 말씀을 지켜 행하면 그들이 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이 광야에서 살아 남은 길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첫째는 이스라엘은 40년동안 시내 광야를 돌고 돌았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돌았던 그 모든 길을 다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40년 동안 그들이 다녔던 모든 길을 빠짐 없이 다 기억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는 그들이 격었던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었든지 다 기억하라는 것이다. 아마도 좋은 일보다는 힘들고 고생했던 일을 기억하라는 말씀 같다. 왜 기억하라고 하시는가? “이는 너를 낮추고 시험하셔서 네가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는 지, 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아 보시려는 것이었다.” 는 것이다. 여기서 낮추고 시험하셨다고 했는 데, 낮추다는 말은 “아나”()의 강조형이다. 겸손하게 하다 (humble), 고생시키다. 환난을 당하게 하다(afflicted)라는 의미이다. 또한 “시험하다”는 말도 히브리어 “나사”()의 강조형(Piel)으로 훈련시키다(train), 혹은 “경험하게 하다”(experience)는 뜻이다. 그래서 “이는 너를 낮추시고 시험하셔서”라는 구절은 “이는 너를 고생시키고 훈련시키셔서 네가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는 지 …”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을 더 잘 표현할 것 같다. 이는 구체적으로 광야에서 목마르고 배고프게 하시다가, 반석에 샘물이 나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배부르게 하신 일들을 염두에 두신 말씀 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 만이 자기들의 생명을 살려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 앞뒤가 꽉 막혀 있는 광야에서 물도 없고, 양식도 없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그 백성을 죽게 내 버려 두시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죽을 지경에 이를지라도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과 사경에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여, 사경에 이를지라도 육신의 양식보다는 우리 영혼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양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양식을 친히 주셨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양식만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 40년 동안에 네 몸에 걸친 옷이 헤어지지 않았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4)고 말씀하신다. 옷도 주시고, 건강도 주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육신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셨다. 그래서 광야에서 울면서 이집트로 돌아갈 생각하지 말라. 이 광야 생활을 저주 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마치 아비가 자식을 훈련하듯이 그들을 이스라엘을 아들로 대우하시고 훈련하셨다는 것이다. 놀랍고 감사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광야 길에서 있었던 그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둘째로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점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분명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배불리 먹고, 좋은 집 짓고, 은 금을 비롯하여 가진 것이 풍성해질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배고프고 천대받고 학대 받던 날에 그들을 이끌어내어 해방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된 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반석에 샘물이 나게 하시고 불뱀과 전갈이 있는 광야를 지나며, 만나와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어 이 복지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자가 되어 잘 살게 된 것이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된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다는 것이다. 16-17절 말씀, “광야에서 네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네게 먹이셨으니, 이는 너를 낮추고 시험하여 마침내 네가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게 마음 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잊고 교만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잘 나서 이들에게 복주고, 부자 되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18). 우리 신자들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잘 먹고 잘 수 있게 되어 있다. 번영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복에 취해서 하나님을 잊을 때 하나님은 그를 망하게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성공의 날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선민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을 때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에 종으로 다시 끌려가게 하셨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1-2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1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다 창조하셨다는 것이다.둘째로 창세기 1:1이 의미하는 바는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의 세계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늘과 땅이란 일종의 메리즘(Merism)이다. 메리즘이란 서로 반대의 의미를 가진 어휘를 합성하여 전체나 전량을 의미하는 어법이다. 남녀노소는 서로 반대어를 합성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기가 “헬라인이나 유대인에게 빚진 자”라는 말을 하고 있는 데 이는 선민과 비선민을 대표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가 빚졌다는 의미이다.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라는 의미도 같은 어법이다. 따라서 창세기 1:1의 “하늘과 땅”이라는 말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무”의 세계에서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보통 Creation out of nothing (creatio ex nihilo) 라는 말을 쓴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스스로 생겨난 것은 없다. 자연발생적인 것은 없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자연”이라는 말보다는 “피조물”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보면 우리는 그것들 하나 하나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롬 1:20).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하여 기뻐하시고 만족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의 그의 창조물에 대한 완벽성, 혹은 만족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신 것은 사람을 그를 대신한 만물의 통치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지상의 왕을 신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바빌로니아에서는 하무라비 왕을 마둑의 형상, 느부갓네살을 벨의 형상이라고 하였고, 이집트에서도 바로 왕을 아톰의 형상 혹은 르의 형상이라고 칭하였다. 왕을 가리켜 신의 형상이라고 부른 것은 왕이 지상에서 신들을 대리하여 신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만물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그의 통치권을 사람에게 위임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을 대신한 왕이다. 하나님이 대왕이시라면 사람은 왕이 된 것이다. 따라서 시편 8:5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관”을 씌우셨다고 말하고 있는 데, 여기서 “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타라”를 번역한 것으로 왕관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왕관을 쓴 존재,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은 위로는 대왕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의 대리 통치자로 왕관을 쓴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에는 사람의 보호와 통치를 받아야 하는 만물의 세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는 하나님-사람-만물이라는 위계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은 모든 피조물을 창세기 2:1에는 “만물”이라고 지칭한다. “만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콜-츠바암”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모든 그들의 군대”라는 뜻이다. 히브리어 “차바”는 군대라는 의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를 때 바로 “차바”라는 어휘를 쓴다. 여호와를 군대를 다스리는 분으로 일컫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2:1은 “하늘과 땅과 그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었다.”(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ir hosts)라고 번역해야 옳다. 그러나 한글 성경은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만물”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말하자면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는 하나님-사람-만물의 위계질서가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마치 군대와 같은 조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위계 질서를 가진 조직이다. 군대 조직은 왕이 통수권자로서 총사령관이라면 그 밑에는 각각 사단장 그리고 연대장을 비롯한 지휘자가 있고, 그 아래에 일반 병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에 어떤 사단장이 총사령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면 그 사단장이 명령불복종의 반역죄로 처벌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단의 병사들도 그들의 사단장과 함께 명령 불복종이나 반역의 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군대 조직은 이와 같은 결속력, 연대성을 가진 조직체이다. 그런데 바로 청세기 1장의 구조가 바로 고대 근동의 군대 조직과 흡사하다. 아담은 대왕이신 하나님의 봉신으로 왕이라 할 수 있다. 왕은 하나님의 봉신으로서 계속 충성할 때 의미가 있다. 왕, 아담은 대왕이신 하나님의 신하로서 백성을 돌보고 다스리며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 복종해야 한다. 명령을 불복종할 때는 그의 통치권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대성을 고대 근동의 봉건제도 곧 계약관계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종주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그의 속주이며, 피조물은 속주의 통치권 아래에 있지만 종주가 내리는 상벌에 있어서는 속주와 연대성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의 관계는 언약관계이다. 사람과 만물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갖는다. 따라서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 불순종의 태도 여하에 따라 피조물의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2-31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날자별로 그 순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1-3일은 빛, 궁창, 육지라는 영역을 창조하시고, 4-5일은 해와 달과 별, 새와 물고기, 그리고 짐승과 가축과 사람 등 각 영역을 무대로 그 무대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를 세우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장은 만물의 기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태초에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을 통하여 우주의 기원이나 생물의 발생 연대를 추측하려고 하는 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의도하는 바와는 맞지 않다. 창세기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상 일어난 모든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책이 아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5천년 혹은 6천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성격을 오해한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특별한 일을 선택적으로 기록한 “구속사”이다. 창세기 1-2 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은 과학적으로 창조의 순서를 기술한 책이 아니다. 시 8편은 창세기 1-2장에 대한 해석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가를 설명하며, 그 창조 세계 가운데 사람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고대 근동의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한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성경적인 관점, 곧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언약 관계성 속에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1-1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0
    성경 구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절이 어떤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을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구절 중에 어떤 것은 가장 중요하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경중을 가릴 수 없이 모두 다 중요한 구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교리와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성경 구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창세기 1장 1절이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1:1이라야 말로 성경의 대전제이고, 이 대전제로부터 신학과 교리와 신앙이 출발하고, 우리의 기독교적인 철학과 사상 체계의 가장 핵심적인 뼈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창세기 1:1을 받아들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기독교 신자는 될 수 없다. 또 창세기 1:1을 확고하게 믿지 않는 사람은 신학자나 목회자가 될 수도 없겠지만 절대로 되어서도 안된다. 창세기 1:1은 하나님께서 온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그리고 시편 8편의 저자의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지은 신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서 세상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만물의 기원을 다루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위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는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있고, 그 사람 아래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돌보도록 맡기신 만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 기사를 읽을 때 이 가운데서 만물의 기원과 우주 만물의 역사적 연대를 추론하거나 창조의 과정을 과학적 이론에 비추어 설명하려는 시도는 전혀 창세기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 기사에 대한 만물의 과학적,역사적 기원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창세이래 지각있는 우리 인간들이 추구해왔지만 해답을 얻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창세기 기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Perspectiv)이 필요하다. 성경적인 관점이다. 성경이 성경을 헤석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다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첫째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것은 모든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로부터 현대 물리학자들에게 까지 끊임없이 물어온 질문이지만 아직도 그들은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셨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누구가 만든 존재도 아니고, 어떤 다른 존재로부터 유출된 존재가 아닌 스스로 존재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알파요 오메가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처음과 나중이라는 의미이다. 온 우주의 맨 처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서 온 우주의 최후도 하나님이 그 마침표를 찍으실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고 그가 정하신 끝을 향하여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분이시라는 것이다.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고대 근동 사람들은 그들이 믿을 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은 다 그들이 믿는 신이 있었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치고, 그것들이 자기들의 앞 일을 알려주고, 자기들의 병을 고쳐주고, 자기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러한 신들의 이야기는 고대 근동 문헌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데 이 신들의 세계에는 가장 큰 힘과 권위를 가진 신을 정점으로 위계 질서가 있고, 신들은 그들의 계급에 따라 일정한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분담되어 있었다. 신들은 남신과 여신이 있어서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기도 한다. 서로 질투하고 싸우고, 죽이며,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그 힘이 쇠하여 젊은 신에게 그의 자리를 물려주거나 빼앗기고 결국은 죽어서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부활도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신들은 그들을 섬기는 민족들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한 민족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면 그들이 섬기는 신도 세력을 얻어 민족을 넘어 세계의 신으로 추앙 받으며, 심지어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로까지 그의 지위가 상승한다. 그러나 그를 섬기는 민족이 멸망하게 되면 그 민족과 더불어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 신도 죽어 이 땅에서 그 이름이 없어진다. 결국 신들의 세계란 인간들의 삶을 모방하여 만든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다. 태초에 스스로 계신 분이다. 그가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가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자들이다. 그러나 무신론도 신앙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무신론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는 진화론으로 비약한다. 따라서 인간들은 항상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자들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들을 통하여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고(Control),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신다고 믿는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무신론이나 유신론이다 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믿듯이,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도 신앙이다. 결국 우리는 무신론과 유신론 가운데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고 믿는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1-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9
    그리움을 안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고, 다시 한번 그때 그 시절로 돌아 가고 싶은 추억이 있다. 그래서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시를 쓰고, 노래를 한다. 추억이 있고, 사모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퐁요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영영토록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상처가 아무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할 지라도, 무엇인가 한줄기 마음 구석에서 피어 오르는 그리움이라는 것은 없을 수 없다. 성전을 그리워하며 쓴 시편 84편은 우리들의 가슴을 찡하게 하고 눈물이 핑 돌게 한다.이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전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심신이 녹아 내려버릴 것 같이 지쳐 있다. 병이 날 지경에 이른 것 같다. 흔히들 순례자의 노래로 알려진 이 시는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매 연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4), 그 마음에 시온으로 가는 대로가 있는 자(5),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12)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4절씩 3개의 연으로 구성되며,”셀라” 라는 연주 기호로 각 연을 나누고 있다.이 시의 시작은 그의 영혼이 그의 왕이신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기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상사병이 걸린 사람 같다. 주의 궁전은 심지어 참새나 제비들도 집을 얻고,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낳아 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들의 노래와 더불어 주의 전에 사는 자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주의 전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행복을 맛보고 살기를 갈망하는것이다.둘째 연은 역시 복이 주제이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전은 시온에 있다. 대로는 고속도로를 의미한다. 마음 속에 여호와께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항상 그 마음이 여호와께로 향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바카 골짜기와 같은 곳을 지날지라도 여호와께 대한 그리움 때문에 오히려 더 힘을 얻고, 결국에는 여호와를 만나 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카 골짜기”란 말의 “바카”()라는 말은 “뽕나무” 혹은 “뽕나무 열매 오디”를 의미하기도 하고, “눈물” “혹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명으로서의 “바카 골짜기”라기 보다는 여러 역본들은 시어로 “눈물 골찌기”라고 지명을 번역한다. 순례자에게 사막이나 광야를 지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 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오히려 이러한 눈문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마치 가을 비나 오아시스의 샘과 같이 풍부한 물과 쉼을 공급하여 순례자에게 힘을 주어,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움이 온갖 역경을 이기게 한다는 것이다.셋째 연은 드디어 성전에 도착하여 주의 품에 안긴 행복감을 노래하고 있다. 성전에서의 문지기로 하루 사는 것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호의호식하며 천 날을 사는 것보다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태양이시고, 방패이시며,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복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세계의 문헌, 곧 우가릿 문서, 아마르나의 편지, 아시리아의 왕들의 역대기 등과 달리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태양으로 묘사는 곳은 많지 않다. 태양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셰계관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피조물과 동격으로 여호와는 나의 태양이요 방패라는 말 보다는 방패에 대한 수식어로 번역하는 곳도 있다. 태양의 힘과 역할은 모든 피조물을 능가하는 권위와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New English Translation ?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지고의 보호자이시니니(For the Lord God is sovereign protector)라고 번역하고 있다. 열대지방에서 주님의 성전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에게 태양은 오히려 불가항력의 방해꾼이다. 그러한 태양을 찬양하는 듯한 표현은 옳지 않다. 이 시인은 순례 길에서 여호와의 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기대와 소망 때문에 어떤 역경이라도 물리치고 결국 여호와의 전에 이르러 여호와와 함께 거하는 문지기로 사는 단 하루라도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천 날보다 더 낫다는 고백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여호와 전이 없다. 예루살렘에 있던 여호와의 전은 1차로 바빌로나아 사람들이 파괴해버렸고(586 BC), 2차로는 로마 사람들이 산산이 진멸해 버렸다(AD 7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언젠가는 가까운 장래에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이 재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통파 유대인들이 그렇고, 기독교인들 가운데 세대주의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 반면에 예루살렘 성전 대신 현대의 교회를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활동을 제사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목사는 제사장이며,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제물이라고 생각한다. 강단은 제단으로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꼭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은 시를 쓴 시인은 성전을 그리워하고, 성전에 올라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육신이 쇠약할 정도인데, 우리는 과연 교회를 나가기 위하여 그러한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불행하게도 교회에는 제단이나 제물이나 제사장이 없다. 엄격하게 말하면 성전과 교회에는 서로 연속성이 없다.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이나 교회의 본질을 오해한 까닭이다.성전의 원형은 성막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고 마치 남녀가 결혼하면 언약을 맺고 같이 동거에 들어가듯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들과 동거하기 위하여 성막을 짓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성막을 대신하여 견고한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성막이나 성전은 다같이 예수님의 속죄를 나타내는 모형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예수께서 실형으로 오심으로 더 이상 모형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몸으로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 되신 것이다(요한 2장).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전을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성전 되신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기를 열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된 것이다(고후 6:16). 따라서 우리가 사모하고 열망해야 할 성전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살다보면 심지어 내 안에 계신 성령, 예수님을 잊고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바카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자 하는 간절함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자 힘을 써야 한다. 그래야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요 17:21). 요한 계시록을 보면 사도 요한은 위로부터 예루살렘이 임하는 것을 본다. 그런데 그 안에는 성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께서 그 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계21:22).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0-2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8
    전통적인 신학에 있어서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하다. 말씀과 성령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칼빈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명령하는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과 성령의 통일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성경에서 표현하신 그 바로 그 진리 속에서 내재해 계시므로 우리 그 말씀에 정당한 존경과 위엄을 돌릴 때에야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 주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을 통하여 그분의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하나로 묶어 놓으셨기에 성령께서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실 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하여 로버트 레이몬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가르치는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며 “말씀 없는 성령은 망상이요, 성령 없는 말씀은 죽어있다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은 항상 함께 가며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같은 사실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도들이 여러 곳에 다니며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나타난 현상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 집에 청함을 받아 가서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한 사건을 “베드로가 아직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그 말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셨다.”( 행 10:4)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본문은 베드로가 “아직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라는 현재 진행 상황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말씀이 선포되는 그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성령이 임했는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는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베드로는 예수께서 만유의 주되심과 복음 사업 가운데 행하신 착한 일,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 재림, 그리고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전하셨다고 고넬료의 가속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이 임함을 보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동료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며 “내가 말하기를 시작할 때에 성령께서 처음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내려오셨다”(행 11:15)고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임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령을 오게 할 수도 없고, 가게 할 수도 없다(요 3:8). 성령은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아서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움직이고 일하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새롭게 한다. 우리는 성령을 오게 하거나 가게 할 수는 없지만 말씀은 전할 수 있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성령이 자동적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성령이 임해야 말씀이 역사한다고 생각하고 말씀은 제쳐놓고 성령을 간구한다. 물론 성령을 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경우라면 성령이 임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오셔서 역사하시고, 기도를 안 한다고 해서 역사를 안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성령께서는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 28:20)고 사명을 주신다. 말하자면 이들은 철저하게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제자들을 보면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 성경에 능통한 자들이며, 스데반 같은 집사는 어느 누구 못지 않는 성경신학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솔로몬 행각에서 말씀 전하던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을 체포하여 공회로 끌고 와서 심문을 시작하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본래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들로 알았다가 놀랐으며,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이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행 4:13,14)고 했다. 당대의 최고의 석학들이며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제자들이 본래 무식한 자들로 알았는데 논박할 수 없을 만큼 유식한 자들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텅빈 머릿속에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이들이 필요한 지식들은 주입시키고 할 말을 다 가르쳐 주었다고는 볼 수 없다. 성령의 하시는 일은 이미 예수께로부터 듣고 배운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요 14:26; 16:4).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충분히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구약 성경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즉흥적으로 전하는 자들만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배와 창자에 가득 채우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이마가 굳고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족속에게 나아가 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이마를 부싯돌보다 굳은 다이아몬드처럼 만들어 그들의 이마에 맞설 수 있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신다(겔 3:1-9). 그러면서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모든 말을 네 마음에 받으며 귀로 듣고, 포로가 된 네 백성의 자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여라.”(겔 3:10-11) 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주님의 영이 그를 들어 올리시고(겔 3:12), 여호와의 손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였다고 했다(겔 3:14). 에스겔은 그의 백성들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배와 창자에 가득 채워야 했으며, 그때에 하나님의 영과 능력이 그에게 힘 있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이 성령의 충만한 사역을 기대하려면 그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고 넘쳐야 한다. (손석태 저 “말씀과 성령” 96-101)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0-1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7
    룻기를 읽은 사람은 모압 여인, 룻이라는 과부가 보아스라는 유대 사람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동네 여자들은 룻의 득남을 축하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어주고,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축복하는 사실을 의아해 할 것이다. 오벳은 며느리 룻이 낳았는 데, 사람들은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났다고 축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훙년을 피하기 위하여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이민을 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아들 말론과 기룐을 장가 보내어 모압 여자,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얻었다. 그러나 잘 살기 위해서 찾아온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두 며느리만 남아 한 집에서 세 과부가 살게 되었다. 이러한 나오미가 이방 땅에 정을 붙이고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봇짐을 싸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맘 먹었다. 다행이 이제 베들레헴의 흉년도 지나가고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도 들렸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두 며느리 때문에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새 남편을 얻어서 잘 살라고 간곡하게 타일렀는데 큰 며느리 오르바는 오던 길을 돌아갔지만 작은 며느리 룻은 시모인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 가겠다고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특히 시모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심지어 시모인 나오미가 가는 곳이면 무덤까지도 같이 가겠다고 시모를 붙들었다. 할 수 없이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그들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나이든 나오미는 일을 할 수 없고, 할 수 없이 룻이 밖에 나가 일하여 생활비를 벌어야 할 상황이었다. 마침 보리 추수하는 때인 만큼 룻은 보리타작하는 농부들의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우러 나가게 되었다. 룻이 보리 이삭을 주우러 간 곳은 뜻 밖에 자기의 고엘 (), 곧 유업을 물어줄 사람, 보아스의 밭이었다. 그는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으로 나오미의 불행을 도와주어야 할 법적인 의무를 가진 자였다. 보아스는 룻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다른 사람의 밭에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점심 식사도 자기의 일꾼들과 같이 하라는 배려도 해 주었다. 룻이 주워온 보리나 보아스의 일꾼들과 먹다 남겨 온 음식을 먹고 지내는 나오미에게는 두 가지 짐이 있었다. 첫째는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대를 잇는 것과 둘째는 며느리 룻에게 남편을 얻어 주어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나오미는 이 두 문제를 자기에게 남겨진 남편 이름의 밭을 팔아 해결하려고 한 것 같다.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나누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은 지파의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그 소유가 넘어가는 것을 금한다. 다른 사람에게 밭을 부득이 팔아야 할 경우, 그의 “고엘”(, 유업 무를자)이 대신 사주거나 팔려간 땅을 되 사서 원 주인에게 돌려주고, 땅 주인은 후에 여유가 있을 때에 그 땅 값을 그의 고엘에게 돌려주어야 했다(레 25:23-55). 또한 근동 세계에서 여자와 자식들은 땅과 더불어 남편의 소유이며, 딸과 달리 아내는 남편의 소유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민 27:1-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일 보아스가 룻의 죽은 남편 보아스의 땅을 사서 그 소유권을 차지 하게 될 경우, 보아스는 엘리멜렉에게 속한 모든 재산, 나오미와 룻과 그리고 나오미 남편의 땅이 다 그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룻 4:5).여기서 한 가지 더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스라엘 안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시형제 결혼, 혹은 계대결혼 (levirate marriage)이다. 나오미는 그가 말한대로 당장 남편을 얻어서라도 아들을 잉태하여 기룐을 대신하여 룻에게 남편으로 주어야 맞다(룻 1:12-13). 이미 유다는 과부가 된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둘째 아들, 오난을 주었던 것과 같이 셋째 셀라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이 창기로 변장하여 그의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유다의 큰 아들, 엘의 대를 잇게 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유다의 대를 이은 것이 되었다.나오미는 그의 남편의 엘리멜렉의 밭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밭을 사게되는 고엘은 나오미와 동침하고 나오미는 고엘의 아이를 낳아,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야 하며, 그 아이가 룻의 남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오미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만큼 젊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땅과 룻과 더불어 고엘의 소유가 되는 길을 택한 것 같다. 나오미는 룻을 타작마당에서 밤잠을 자는 보아스에게 보내며 보아스가 그들의 친족, 곧 고엘 임을 주지 시킨다(3:1).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있다가 잠이 깬 보아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룻은 “저는 어르신의 여종 룻입니다. 어르신의 날개로 이 여종을 덮어 주십시오. 이는 어른께서 저희 유업을 물어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3:9)라고 말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보아스는 룻의 고엘이 아니라 나오미의 고엘인데, 보아스에게 그의 고엘이 되어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다. 룻이 보아스에게 그의 날개로 자기를 덮어 달라는 표현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널리 사용하는 결혼을 청하는 관용어구이다(겔 16:8). 보아스는 자기를 찾아온 룻을 칭찬하며 그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순서상 더 가까운 고엘이 있기 때문에 그와 담판이 필요했다.보아스는 자기보다 가까운 친족을 만나 성읍의 장로들과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나오미의 고엘로서 나오미가 팔려고 내놓은 밭을 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오미의 밭을 살 경우에 룻도 함께 아내로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손해나기 때문에 나오미의 고엘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결국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밭을 삼으로 엘리멜렉의 소유인 나오미와 룻을 그의 소유로 삼게 되었다.이러한 과정 가운데 베들레헴의 장로들과 성읍 사람들은 보아스에게 의미있는 두 가지 축하의 말을 한다(룻 4:11-12). 첫째는 이 나오미와 룻이 야곱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와 같이 되고, 둘째는 룻에게서 낳게 될 후손이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선뜻 이해가 안되는 말들이다. 야곱은 라헬과 레아 두 자매를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이루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은 자매 간이 아니라 고부 간이다. 그런데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소유의 밭을 삼으로 나오미와 룻은 이제 보아스의 여자들이 된 것이다. 보아스에게 이들은 다같이 라헬과 레아처럼 자매 간이 되고, 둘 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다. 또한 유다와 다말은 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시형제 결혼은 형제간 끼리의 관계이다. 다말은 엘과 오난에 이어 셀라와 동침해야지 그의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아스는 나오미와 동침해야지 룻과 동침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와 유다는 서로 반대되는 경우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관계는 용납이 되고 있다.그렇다면 룻이 낳은 아들이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나오미가 룻이 낳은 자기 손자, 오뱃을 아들로 입양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야곱이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기 아들로 삼은 것처럼…. (창 48장). 그러나 나오미의 경우는 그렇게까지 확대 해석해야 필요가 없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9-2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