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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5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모두 미래형이다. 그러나 한글 번역 바른 성경은 1절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원문대로 미래형을 쓰고 있다. 그러나 2-6절에 나오는 동사들 “눕게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함께 하십니다” “안위하십니다” “넘칩니다” “따를 것이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미래형이라기보다는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다. 시편 역자는 이 시를 통하여 현재 역경 가운데 있는 자기 자신의 형편을 토로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현재 돕고 계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의미상 뜻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P. C. Craigie (WBC) 는 원문의 뜻을 놓치지 않고 잘 살려 모두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현재 그의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시고, 갈 길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육신의 목자보다는, 장차 자기에게 생명의 떡과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주시고,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의의 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영혼의 목자, 곧 메시야를 바라보고 고대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이제 4절은 그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다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망의 골짜기를 다녀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개역성경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번역했다. 일반적으로 사망이 있는 곳은 어디나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음침하다거나 어둡다거나 하는 표현은 죽음의 분위기를 묘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 마치 어둡고 차거운 동굴 속에서 목을 웅크리고,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괴물과 같은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에 보면 “사망”이라는 말은 없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말은 히브리어 “브게이 찰마벳”()을 번역한 것인데, 이는 “어두운 골짜기”라는 말이다. 아마도 킹제임스 역 (KJV)을 따라 영역본이나 한글 역본들이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라고 번역하며 ESV, NAS 등도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NIV, NET 등은 “가장 어두운 골짜기”(the darkest valley)라고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골짜기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고 있을 수도 있다. 유다광야의 깊은 골짜기는 대낮이라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막하고 무섭다. 한번 들어가 길을 잃으면 나오기가 힘든 곳이 여기저기에 있다. 끝이 곧 나올 것 같은 골짜기를 따라가면서 이제 곧 길이 나오겠지 하고 걷다보면 점 점 더 깊이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 강도나 짐승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시편 84:6에 보면 “바카 벨리”(눈물 골짜기)라는 곳도 있다.사람이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이러한 골짜기를 지나가게 되는 데 다윗은 바로 이러한 때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역 성경에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히브리어 “라아”라는 말은 “악”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더 쉽게 말하면 “나쁜 일”(bad thing)이라고 할 수 있다. “라아”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은 “톱”인데 이는 “좋다, 선하다”(good) “아름답다”(beautiful), “유익하다” 등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선하고, 유익한 것이었다. “좋은 아침”(Good morning)이라는 인사말도 현대 히브리어로는 “보켈 톱”이라고 한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사람이 시험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쁜 일이 생긴 것이다. 제일 나쁜 일이 죽음에 이르는 일, 악한 일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죽음”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망의 그늘 아래 앉아 있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금 지나가고 있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엇인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작은 일을 더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아예 인생이란 불안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존재 자체가 불안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며, 내일 무슨 일이 나와 나의 가족, 나아가서 이 세상에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윗도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다니며 무슨 악한 일, 곧 나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키 아타 임마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함께 하신 주께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안위하신다는 것이다. 안위한다는 말은 “에나하무니”()에서 어간 “니함”이라는 말은 “위로하다”(comffort, console)는 말이다. 목자의 지팡이(, rod)는 주로 사나운 짐승들을 막아내고, 싸울 때 쓰는 무기이고, 막대기(, staff)는 양들을 인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히브리어 원어는 둘 다 막대기라를 뜻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고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을 막아 보호해주시고,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나에게 참 위로와 평안을 주신다는 것이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나와 함께하신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유다 왕 아하스가 북왕국의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군사동맹을 맺고 남왕국 유다왕, 아하스를 폐위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침공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하스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 나라와 이방신을 의지했지만 “임마누엘”이라는 아들을 주셔서 다윗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며 불안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셨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다윗이 사용하는 “임마디”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항상 나 함께 하시며,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목자이신 여호와이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셨다.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그의 복음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사야서 9:1-2의 성취를 선언하신 것이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마 4:12)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리고 죽음의 땅,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백성들에게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 그의 시에서 말하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자기를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실 그 목자,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망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진리의 빛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고쳐주시며,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세상의 빛이라”(요한 9:5)고 선언하시고, 이 맹인을 고쳐주셨다. 사망의 음침한 어둠의 길을 걷던 자를 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교시켰다. 그러자 요한 10장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이 목자가 아니라 강도요, 절도요, 삯군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한 목자 예수님 자신은 죽음의 그늘에 앉아 어둠 속에서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내가 곧 선한 목자이니,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는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어 놓는다.”(요한 10:14-14)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인생들의 그 마음을 아시는 목자이시다. 그리고 이 불안의 근본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지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겠다는 것이다. 다윗이 바라본 그 목자-하나님은 바로 이 예수님이셨다. “임마누엘”(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임마니엘”(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임마디”(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이다. 우리는 바로 이 사망의 음침한 죽음의 계곡에서 진리의 빛으로 오신 목자, 예수님을 믿고 따라 나가야 한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며, 참 빛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참 목자이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8-23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94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자기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며,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눕게한다”(야르비체니), “인도한다”(에나할레니; 얀헤니), “소생시킨다”(에소뱁) 등의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 데, 특히 여호화를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동사 “숲”은 “돌아오다”(return) 의 사역형으로 쓰여져, “돌아오게 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메이 메뉴홋”은 “잔잔한 물가”로 번역하는 것 보다는 “쉴만한 물가”(refreshing water)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여기서 “영혼‘은 무엇이며, 영혼이 어디에 갔기에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그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니쉬맛 하임”(생명의 호흡)을 코에 불어 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네패쉬 하야”(생명체)가 되었다. 개역성경은 “니쉬맛 하임”을 “생기”로 “네패쉬 하야”는 “생령”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께서 생기라는 특별한 기운을 흙으로 빚은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므로 사람이 “생령”이라고 하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믿는다. 그러나 “네패쉬 하야”라는 말은 생명체, 영어로는 living soul, living being, living creature 라는 말이다. 여기서 living soul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 혹은 피조물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므로 그것이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어떤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패쉬 하야”는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함께 쓰여지고 있는 어휘이다(창 1:20, 24, 30; 2:19). 이 경우 “네패쉬”를 “영혼”으로 번역하면, 마치 동물들도 사람처럼 영혼을 가진 존재로 오해하기 쉽다. 따라서 한글 역본에서는 “생물”로, 영어로는 “living creature”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는 다같이 “네패쉬 하야”를 쓰고 있기 때문에 마치 사람과 동물 사이에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거나 동물도 사람과 같은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동물도 “네패쉬 하야”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이성과 감성과 지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동물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생명체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이외의 어떤 피조물에게도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을 넣어주셨다는 언급이 없다.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불어 넣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되었다, 따라서 사람은 육체와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생명체이다. 그래서 사람은 육체와 구별되는 요소로서 “영혼을 가진 존재,” 말하자면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패쉬 하야”를 “영혼”이라고 번역을 할 경우, 이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생명의 호흡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생명체와, 동물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이 주어지지 않는 생물을 다같이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용법에 주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생물”을 사람과 같은 “영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또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창세기 2:7은 결코 사람의 구성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의 호흡을 그의 코에 불어 넣으시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이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이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우리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되어 생명이 유지 되었고, 이 세상에 나와 탯줄을 끊어도, 우리 마음속에 어머니의 존재와 그 품속을 떠날 수 없듯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를 가진 존재이다. 우리는 영혼아 있는, 곧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체이다. 따라서 생명의 호흡이 끊긴 인간은 흙덩이에 불과하다. 영혼이 떠난 인간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곧 네패쉬를 소생시키셨다고 말한다. 소생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그의 영혼이 죽어가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다윗의 생애가 결코 평안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사실 다윗은 그의 아비 집에서 목동 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면 블레셋 사람, 골라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민족의 영웅이 된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죽을 때까지 하루 한 날 평안한 날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다윗의 인생이 결코 꽃 방석에 앉아 신선놀음을 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 안에서 부요함을 누린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의 목자로 묘사하며, 그 목자의 보살핌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번 돌이켜 보면 다윗이 누비고 다녔던 유다 광야에 푸른 초장이나 잔잔히 흐르는 물가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 시는 현실적인 자기의 모습을 적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적인 표현이고 비유라고 해야 맞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그는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인도해주셨다는 고백적인 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고, 40년 동안의 광야 훈련을 거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역사적인 사실을 돌이켜 보며, 그들을 목자처럼 인도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는 고백적인 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 시의 시제(tense)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자들은 1절은 미래형, 그리고 나머지는 현재형으로, 그리고 어떤 곳은 시제를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P. C. Craigie (WBC) 는 원문을 잘 살려 모두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자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과거처럼 그들을 돌보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실 목자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로 소개하며, 자신은 목숨을 내어놓을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바로 하나님, 곧 하나님-목자로 소개하고 선언하신다(요한 10:15, 18). 그리고 목마른 영혼들에게(시 42:1) 자기에게 나아와 참 쉼을 얻으라고 초청하신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 11:28-29)여기서 예수께서는 인생살이에 피곤하고 지친 자들에게 영혼의 안식, 곧 영혼의 쉼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고, 생명수이며, 더 나아가 그의 살과 피가 바로 영원히 살게 할 참된 양식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참되 음료라고 말씀하신다(요한 4:14; 6:31; 54-56). 아마도 다윗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마시고 마셔도 목마른 이 세상의 떡이나 세상의 물과는 다른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형으로 말한다. 다윗이 찬양하고 감사하는 목자는 현재 목 마르고 배고픈 인생들에게 잠간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마른 목을 추겨줄 수 있는 모세와 같은 목자라기보다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의 양식을 주실 목자, 그의 피곤한 영혼에 참 휴식을 줄 수 있는 목자를 바라보고 이 시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바로 그 “생명의 양식”이라고 응답하시고, 자기가 그 양식을 주실 수 있다고 선언하신다.“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 데,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요 10:53-56)다윗은 그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성경에서 “의”(righteousness)라는 말은 보통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표현은 예수님과의 뗄려야 뗄 수 없는 최고의 관계, 곧 최고 극치의 “의”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영혼의 양식을 주셔서 우리의 생명이 풍성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살려 참다운 의의 관계로 인도하실 선한 목자시라는 것이다. 다윗은 분명 이러한 목자를 마음에 두고, 그리면서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want)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목자가 참 목자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8-09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⑰ 소도시 개척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1970년대 한국교회가 폭발적 성장을 하였을 때 하루에 7~8개 교회가 개척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옛 이야기에 불과하고 지금은 ‘개척 볼모의 시대’를 맞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사회경제학적 요인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필요성이 쇠퇴해지는 사회 분위기이다. 또 대형교회들로 인해 성도들이 개척교회에 나가기를 기피하는 현상도 있다.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설립되어야 하고 복음은 확산되어야 한다. 이런 절대 절명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문제의 탐색하나의 건물에 장로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등이 입주해 있던 때가 있었다. 가히 ‘교회 백화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임대교회들의 꿈은 자체 예배당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대도시의 경우에는 어려움도 있으나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그러나 소도시의 경우는 절박한 처지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사례의 탐구교회개척의 꿈을 안고 헌신하는 사역자들이 수 없이 있다. 헌신자의 길을 가면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보리라는 열망들이 있다.소도시에서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목회자를 만났다. 경남 김해 큰빛교회 김승윤 목사이다. 그는 해양대학교 출신으로 외항선 기관장으로 세계를 누비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니 ‘바다에서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김남식(이하 김): 김해 지역에서 어려운 사역을 하고 있다. 언제 개척을 시작하였나?김승윤(이하 승): 1994년에 개척하였으니 벌써 25년이 되어가고 있다.김: 당시 김해의 사정이 어떠하였나?승: 부산의 위성도시이며 농업을 주로 하는 곡창지대이다. 지역 정서가 보수적이고 외부인이 끼어들기 어려운 풍토였다. 기독교의 상황을 보면 복음화율이 10% 미만이고 예장고신측 교회들이 자리잡고 있어 보수적 신앙 풍토였다. 지금은 김해 지역에 하나의 노회가 될 정도로 고신측의 교세가 막강하다. 그러니 개척교회가 성장하기란 어려운 여건이었다.김: 어떻게 개척을 시작하였나?승: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 하나만 가지고 시작했다. 몇 명의 교인들과 8평짜리 방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죽기살기로 전도에 몰두하였다. 개척 6개월 만에 80평 지하실을 임대하여 이전하였다. 그때의 감격은 꿈같았다. 대형교회 목사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8평에서 80평으로 옮겨간 그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교회는 계속 성장하였으나 2009년경 출석교인 300명 정도에서 성장이 멈추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보니 ‘지하예배당의 한계’였다. 새 교회당 건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김: 새로운 예배당을 어떻게 건축하였나?승: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대지 500평을 구입하고 연건평 1천 평 규모의 건축을 시작하여 2011년에 입당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헌신하였다. 또 은행 융자로 건축비를 감당했다.김: 어떤 교회들은 무리한 융자금 상환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가?승: 이자와 원금을 조금씩 갚아간다. 문제는 여기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프로그램들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우리 교회의 경우는 어렵지만 겨우 유지해 가고 있다.김: 소도시에서 교회 개척을 하였는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승: 소도시에서의 교회 개척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움이 많다. 대부분 준비없이 개척하는데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려움을 겪을 때 대체 능력이 없고, 사역에 대한 멘토도 없기에 혼자서 헤메여야 했다. 그러니 길은 하나 밖에 없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전도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밖에 없으니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을 하였다.김: 교회 안팎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승: 왜 없겠는가? 지역교회에서의 비난을 참고 가겠으나 교회 내부에서의 문제도 불거져 나왔다. 사람이 모인 곳이니 문제가 있기 마련인데 목사가 무엇이라고 하겠나? 참고 기도하는 일밖에 무엇을 하겠나? 기도하며 나아가니 하나님이 문제들을 막아주심을 체험할 수 있었다.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승: 교회개척 때부터 교회 예산의 10%를 선교비로 사용하였다. 지하교회가 이렇게 하니 웃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3년만에 교회재정이 10배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20%를 선교비로 사용한다. 앞으로는 90%까지를 사용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지기를 열망한다.김: 큰빛교회를 볼 때 놀라운 일이 많다. 부목사가 19년째 사역하고 있는데 내가 부목사에게 ‘20년 채우고 독립해야지’라고 하니 그는 ‘아닙니다. 담임목사님 은퇴하실 때까지 제가 모셔야지요’라고 했다. 여기서 교회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승: 제가 무엇을 하나? 부교역자들이 헌신해 주니 너무 감사하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것이 없다. ‘기본에 충실한 교회가 되기 원한다.’ ‘최고는 아니어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기본에의 회귀개척교회 세우기란 힘들고 꿈같은 이야기이다. 3년 만에 혹은 5년 만에 몇 명이 되었다는 설교나 간증을 들을 때 힘이 빠지고 주눅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교회들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한다. 교회 개척과 성장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일을 감당한다.수많은 지하 교회당 또는 상가 임대교회당들은 어려움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해야 한다. 외로움과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개척 전도자의 손을 붙잡아 주자.길은 하나 밖에 없다. “믿고 기도하고 전도하자”. 또 ‘참고 기도하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8-0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3
    야곱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워 오자 자기의 자식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한다. 이때 요셉을 축복하며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겼던 하나님, 오늘날까지 내 일생 동안 나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창 48:15)이라고 부른다. 개역성경은 KJV는 의 분사형을 대부분의 다른 역본과는 달리 “먹이다”혹은 “기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먹이고, 기르는 것이 꼭 양떼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동사의 원래의 뜻대로 양을 먹인다는 의미에서 “목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야곱은 돌이켜 보면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쌍둥이의 동생으로 태어나 형에게 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아비를 속여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연유로 그를 죽이려는 형의 칼을 피해 집에서 도망 나온 이후, 그는 일생을 나그네로 살면서 그의 고백대로 130년 동안 험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창 47:9). 그런데 그는 그의 일생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셨다고 고백한다.야곱뿐만 아니라 다윗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름 없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서 철없이 살다가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트린 후, 일약 민족적인 영웅이 되고 왕이 되었지만 그의 인생은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산 사람이었다. 밧세바와의 사건이 그의 온 인생을 뒤바꿔 놓은 것이다. 외적과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죽이려고 끈질지게 쫓아다니는 그의 장인 사울 왕을 피해 적군의 진지로 피신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자식들의 불화로 하루아침에 왕자들이 몰살당하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을 떠나 피신해야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다.그런데 고대 근동 세계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민족적 지도자나 왕을 그들의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는 그의 법전 서문에서 자신을 목자로 지칭하고, 아시리아의 산헤립도 그의 역대기에 자신을 목자로 부르고 있다. 성경에서도 모세는 그의 사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하나님께 자기 뒤를 이어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세워 그의 백성들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민 27:16-17).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왕과 백성 관계를 맺는 언약을 세웠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왕이기 때문에 여호와는 그들의 목자이고, 자기들을 여호와의 양으로 간주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시편 79:13에는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목장의 양이오니 우리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며 대대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노래하며, 시편 80:1에서는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간청한다. 시편 95:6-7에서는 “오라 우리가 경배하며 절하자. 우리를 만드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 손의 양이기 때문이다.”라고 제안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되는 점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한 민족이 그들의 민족 신을 향하여 “목자”에 비유하며 목자로 부르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얼마나 인격적이고 친밀하며 깊은 내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점이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소유주인 동시에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소유주인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히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들을 목자로 세우고 그를 대신하여 그의 양을 치게 하신다. 여기서도 고대 근동의 봉건 정치 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떼를 잘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목자의 일은 첫째로 양들을 목마르지 않고 배부르게 먹이고 보살피는 일을 해야 한다. 둘째로 양들을 초장과 물가, 그리고 우리 안으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는 양들을 야생의 맹수나 도적들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일이다. 그러나 에스겔 3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먹고 사는 일에만 열심이지 양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이스라엘의 목자를 향하여 “자기만 먹고 내 양떼를 먹이지 않았다”(34:1-8)고 책망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불충실하고 책임감 없고 탐욕스럽고 희생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의 목자를 해고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양들의 목자가 될 것을 선언하신다. “참으로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한다. 보아라, 나 곧 내가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 필 것이다. 자기 양떼를 흩어졌을 때 목자가 그 양떼를 돌보는 것 같이, 나 역시 내 양떼를 돌보아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겔 34:11-12). 특히 여러 민족들 가운데 흩어진 그의 양떼들을 모으시고 상한 것을 싸매주고 병든 것을 고쳐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나아가서 23절에는 “내가 그들을 먹이는 한 목자, 곧 내 종 다윗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니,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는 그들에게 목자가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다윗은 이미 5백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여기서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말씀은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신 목자, 그리고 다윗과 같은 목자가 오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시자,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목자가 나타나 자기들을 모으고, 먹이고, 인도하고, 돌보며, 보호해줄 목자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요한복음 10장에는 갑자기 예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한 강론을 시작하신다. 그러나 갑자기가 아니라 사실은 9장의 연속이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게 되자 그를 선지자로 인정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가르침과 법을 따르지 않는 그를 출교한 사건을 두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강도와 절도와 삯꾼에, 소경되었던 자를 양에 비유하시며, 자신이 참된 목자이심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선한 목자는 무엇보다 양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아는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시고, 심지어 자기는 양떼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희생한다고 말씀하시다. 마치 다윗이 양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사자나 곰들과 싸웠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과 다른 목자였다. 예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데, 자기는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신다(요한 10:18).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에스겔 34장에서 약속하신 자신이 한편으로는 목자 같은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목자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 죄와 죽음의 세력에 갇힌 양들과 같이 무기력한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강도와 절도와 삯꾼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셨다. 그리고 그의 우리(축사)로 인도하시고(요 10:16), 그의 양을 삼고, 먹이고, 보살피고, 인도하시며, 보호하고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를 불러 그의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도록 목자의 사명을 주셨다(요한 21장). 베드로는 목자가 된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곳곳에 다니며 목자 노릇을 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양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에 자기들만이 아니고 장로들과 신자들을 다 목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삯꾼 목자가 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목자가 되고,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한다. 그리하면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목자장으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벧후 5:1-4).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으로 부르고 있다. 예수님은 목자장이시고, 우리는 모두 목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만족해야 한다. 우리도 어쩌면 야곱이나 다윗에게 비할 바는 못되지만 다 나름대로 험난한 인생을 살아 온 자들이다.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잘 나서, 혹은 능력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 남은 것이 기적이고 신비이다. 오로지 감사할 뿐이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어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 고백이 매일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도 목자가 되어야 한다. 항상 양 노릇만 할 수은 없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7-26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⑯ 십일조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남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이다. 이것은 신실한 신앙인의 삶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주일성수나 십일조는 이른바 율법주의로 매도당하는 듯한 경향들을 나타내고 있다.문제의 탐색십일조를 강조하면 율법주의자 또는 교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 등으로 비난을 받는 세태가 되었다. 심지어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싫어한다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기피하는 형편이다. 과연 이래도 될까?사례의 탐구성경적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로교 로고스 총회 소속 일신교회(광명시 소재) 박정희 목사를 만나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김남식(이하 김): 십일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이라고 보는가?박정희(이하 박): ① 십일조는 하나님 자신의 명령이다(레 27:30, 말 3:10, 잠 3:9-10). 이렇게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십일조 할 것을 명하셨다. ② 예수님께서도 시인하셨다(마 6:19, 20). 특히 십일조를 철저히 행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 23:23) 하시면서 십일조 행위를 버리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③ 성령님께서도 사도들을 감동시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케 했고 성도 중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지고 각 사람의 필요한대로 나누게 했다(행 4:32, 31).김: 현대교회의 십일조 경시 풍조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박: 십일조를 사람들은 흔히 ‘十一租’라고 생각하여 마치 인간이 하나님께 바 치는 세금같이 여기고 있다. 또 우리말 국어사전에도 ‘중세 유럽교회가 교구민에게 징수한 세’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십일조의 한문은 ‘十一條’이다. 따라서 십일조행위는 결코 세금개념이 아니다. 세금은 물질이 나의 소유라는 개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의 십일조 경시 풍조는 모든 소유물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 ‘내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다하겠다. 김: 십일조 폐지론자들의 주장이 무엇으로 보는가?박: 구원받은 성도가 구약 율법에 더 이상 매일 필요가 없으므로 십일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옹호하는 구절들(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단순히 구약시대의 말씀이니, 지금 신약시대(율법시대가 아닌 은혜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굳이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즉 ① 십계명 가운데 십일조에 대한 항목은 나오지 않는다. ② 신약성경에는 십일조를 하라는 분명한 명령이 없다. ③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셨는데 구태여 나의 연보를 십일조 테두리에 가두워야만 하는가? 라는 주장 ④ 레위기 27:30에 나타나 있는 십일조 말씀은 레위기 시대의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지금의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김: 현대교회의 십일조에 대한 바른 실시 방안을 어떻게 해야 할까?박: ① 우선 신약시대 들어와서도 십일조 생활은 계속되었는가?이다. 이는 예수 님 당시 바리새인의 기도 중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2)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 시대에도 백성들이 계속하여 십일조 생활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하여 두 가지 면에서 언급하셨는데 한 번은 십일조 생활에 대해 칭찬하셨고, 한 번은 부족한 점을 꾸짖으셨다(마 23:23, 눅 11:42).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십일조에 대해 강조하실 필요가 없었다. 백성들은 이미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부족한 것만 경고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십일조는 안식일 준수문제에 대해 비평을 받으셨어도 십일조에 대하여는 한 번도 비판을 받으신 적이 없으셨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도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셨던 것을 알 수 있고, 예수님 스스로는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키러 왔다고 하셨다(마 5:17). 한편 초대교회는 오순절 이후 율법적 유대교가 복음적 그리스도교회로 변혁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행15장)를 통해 이방인 할례문제와 주일문제 등이 해결되었으나, 십일조에 대하여는 율법주의라고 변경했거나 폐지된 흔적은 한 곳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초대교회는 십일조 제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십일조 제도 이상의 헌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행 2:44-47, 4:32-35). 십일조 연보는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물질 축복들 가운데 명하신 최저 기본선의 의무이다. 십의 십이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이를 인정하여 그 중의 십분의 일을 그 증거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물질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과 관계하는 출발선이라 할 수 있다. 신약교회가 십일조 이상의 것을 서로 교회에서 통용한 것은 이 최저의 기본선을 넘어 간 것이다.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생활의 표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에게 십일조에 대하여 몇 가지 원칙을 가르쳐야 한다. ① 십일조는 모든 성도 곧 어린 아이부터 성인까지 모두 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 ② 십일조는 수입액의 순이득에서가 아닌 총수입에서 드려야 한다. 그것이 온전한 십일조 정신이다. ③ 십일조는 반드시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드려야 한다. ④ 십일조는 생활비보다 먼저 구별해 놓아야 한다. ⑤ 설사 교회재정 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십일조는 반드시 드려야 한다. 김: 십일조 생활을 기복신앙으로 보는 관점도 있는데….박: 먼저 확실히 말해 둘 것이 있다. 십일조의 축복은 상리적(商利的) 행위에서나 기복관념의 행위에서나, 어떤 논공행위에 대한 보상관념에서 해석될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온전한 십일조 행위는 하나님 명령에 대한 순종의 행위이고 바로 그 자체가 신앙고백의 표현이 된다. 따라서 그 신앙고백은 바로 믿는 대로 되어지는 체험을 수반하게 된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 행위는 하늘의 문이 열려지는 축복이 약속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믿음의 행위에서 나온 열매의 축복이다. 이는 이것을 실행한 모든 개인, 가정, 교회, 나라가 온갖 물질적인 축복을 누린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기본에의 회귀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실시한다. 이것은 율법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현이다. 우리는 물질의 십일조만이 아니라 시간, 재능의 십일조도 드리는 ‘전인적 드림의 삶’을 영위하고 이것을 통해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7-25
  • 학술/ 아동 세례 및 세례·입교 연령에 관한 연구
    본고는 지난 7월 9일 예장통합측이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어린이(아동)세례 및 세례·입교 연령에 관한 연구위원회 보고서’ 김세광 교수의 원고 중 주요 부분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유아세례는 만 2세까지만 허용만 2세 이후의 아동들은 성인세례 연령 15세까지 기다려야 세례 받을 수 있어유아세례와 성인세례 연령의 사이에 있는 아동들에게 세례 필요성 대두 1. 연구의 필요성16세기 역사적 교회 이래 갈등을 빚어왔던 유아세례 논쟁은 에큐메니즘 시대인 지금에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유아세례 관습을 유지해 온 전통에서는 유아 이후 입교까지의 연령층에 해당하는 아동들은 성례전적 과정에서 제외되어 왔다. 현재 한국의 주요 장로교회들은 만 2세까지의 유아세례만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만2세 이후의 아동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 성인 세례 연령 자격인 15세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성례전 관습이 형성된 이유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나 신학적 근거를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13년이란 기간 동안 성례전과 관련한 목회적 지침이나 교육을 찾아보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2. 다음세대 교육·선교적 관점에서의 연구아동 세례교육 및 세례식의 현장은 다음세대 아이들을 향한 보다 적극적인 신앙교육 및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양육이 일어나는 교육선교의 장이 되리라 기대된다.첫째, 아동 세례식의 교육여정은 세례대상이 되는 아이들의 신앙이 인습적인 신앙에서 고백적인 신앙이 되도록 보다 체계적이고 일관적인 신앙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본적인 신앙교육인 주일예배와 성경공부의 자리는 아동기에 해당하는 아이들의 신앙이 합당하게 양육받기에는 많은 제한들이 있다. 가장 먼저는 제한된 신앙양육시간이다. 또 하나는 그들의 연령별 성장단계에 따른 합당한 교육방법과 교육내용도 충분치 않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아동 세례교육은 매우 시의적절한 신앙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배워왔던 성경의 이야기와 신앙적인 핵심내용들을 비교적 적절한 시간과 성서적이고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내용으로 구성된 커리큘럼 안에서 체계적이고 일관적으로 교육을 받는다면, 이 과정은 현재 예장통합측 고학년 아동부로 올라갈수록 더욱 높아지고 있는 주일학교 출석률 감소 추세를 막을 수 있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둘째, 아동 세례식의 교육여정은 세례대상의 부모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부여하신 자녀를 향한 가정 신앙교사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대하여 다시금 교육을 받고 새롭게 헌신을 할 수 있는 영적인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가정이 다음세대 신앙양육의 핵심현장이요, 부모가 가정의 신앙교사가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셨던 교회 안에서의 일관적인 역사적 기록이었다. 초대교회 교부들, 16세기 종교개혁시대, 17세기 청교도들의 미국 부흥주의 운동은 물론이고, 한국 선교초기의 문헌들에 나오는 자료들을 보면, 한국교회가 선교사로부터 받았던 믿음의 유산에는 가정을 얼마나 중요한 신양양육의 현장으로 여겼으며, 부모를 핵심적인 신앙양육의 중요한 파트너로 여겼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아동 세례교육의 과정은 세례받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합당한 신앙부모로서의 훈련을 받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러한 아동 세례교육의 과정으로서 부모가 교회로부터 신앙적 부모교육을 받을 때에, 부모는 가정의 신앙교사이자 교회의 공동체일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발견하고 결단하며, 더불어 아동 세례가 의미하는 신학적, 성서적, 교육적 변화의 여정에 보다 의식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즉 아동 세례식의 교육여정은 다음세대의 신앙교사로 부름받은 교회학교 교사와 가정의 신앙인 믿음의 부모가 함께 세례대상이 되는 아이들의 신앙을 협력하여 양육하는 책임을 감당하게 한다. 이러한 아동 세례교육을 통한 부모신앙교육은 한국교회가 앞으로 더욱 지향해야 할 가정과 교회가 긴밀한 동역을 통하여 다음세대를 양육하는 신양변혁적인 사건의 중요한 자리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3. 아동세례와 입교아동세례의 도입으로 입교의 목적과 시기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입교에 대해 두 가지 같은 이해를 지닌다. 즉 자신의 신앙을 서약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입문 의식이 그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성찬과의 관련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입교를 성찬 참여 자격을 주는 예식으로 보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다.한국의 대부분 주요 교단들은 입교를 성찬 참여 자격을 주는 예식으로 본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입교인은 세례교인을 말하는데, 유아세례교인이 15세가 되었을 때 받을 수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그 연령이 18세 이상이다. 이들 교회에서 입교의 목적은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 장성해서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촌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을 하도록 하는 예식이다. 회중들은 전 세계 교회를 대신하여 세례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기도와 사랑으로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유아세례의 경우도 부모는 수세자가 성장하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신앙공동체 안에서 양육과 지도의 책임을 진다.독일계 미국개혁교회(RCUS)에서도 입교는 성찬을 받게 하기 위한 서약이다. 가능한 하아델베르그 교리 전체를 암송하는 것을 목표로 교육한다. 또 보수적인 미국장로교회(PCA)도 입교의 시기와 목적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데,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유아세례자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 그들은 기득권으로 교회의 교인이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며, 성찬에 참여할 것을 추구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요 특권이라고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상기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미국장로교회(PCUSA)에서 입교는 유아세례자들이 대상이지만 성찬의 자격이 시작되는 예식은 아니다. 입교의 시기는 정하지 않고 당회의 재량에 맡긴다. 당회는 신중하게 시험한 후 입교 지원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임무를 지닌다. 입교의 목적은 입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섬기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특히 카나다연합교회에서 입교는 성찬의 자격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서약하는 동시에 카나다연합교회의 일원이 되는 입문의식이다. 세례 시에 한 약속을 책임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나서는 것이다.입교의 목적에 대해 본인의 신앙고백을 하는 ‘성인예식’, 성장과정에 따른 ‘성장예식’, 세례-입교- 성찬의 하나됨의 ‘통합예식’, 지교회의 정교인이 되는 ‘회원예식’ 등 다섯가지 의미가 있다. 또 입교의 목적이 그동안 행해왔던 의식들, 즉 성만찬에 자격을 주는 의식과 교리문답 교육을 통하여 개인이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는 의식에 더하여 발달 단계적인 입장에서 행하는 세례 언약의 재확인 같은 의식들이 있다. 1세기 방식으로 돌아가서 입교를 세례와 연결하여 하나의 성례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입교의 목적을 정리하면 5가지가 있다. 즉, 성찬 자격, 유아세례자의 신앙고백, 세례 언약의 재확인예식, 신앙교육을 통한 성장예식이다. 4. 결론오늘 세계교회의 입문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동세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성례예식이라는 판단이 선다. 세계의 각 교회들이 아동세례 도입을 위해 오랜 기간 신학적 연구를 통해 논의한 준거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을 향한 절대적 은총의 선물인 유아세례를 보존해 온 개혁교육 전통에서 아동세례를 금하고 있었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신학적 근거나 목회적 통찰이나 고려 없이 전통을 답습해 온 것에 대해 그 원인을 규명해 보고 이제 세계교회의 변화와 그들의 통찰을 겸허히 수렴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아동세례는 이미 통합교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지적(발달)장애인 세례에서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녀들이 그들의 나이와 믿음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작년에 통합측 총회에서 허락된 유아세례자 성찬에 이어서 아동세례의 시행은 회중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성례전적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살 수 있게 하고, 목회자들에게는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을 성례전적으로 안내할 수 있는 목회적 환경을 제공해 줄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8-07-2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2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왕들이다그러나 그 왕도에 익숙치 못한 사람들이다예수님의 왕도는 섬기고 살리는 일이다그때 인생은 부요해지고 충만해진다우리 신자들은 우리가 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갖고 왕 다운 언행을 하며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 대리통치자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고대 근동 세계 사람들은 왕을 가리켜 신의 형상이라고 불렀다. 왕의 기능이 신을 대신한 지상 통치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는 사람이 왕이라는 의미이다. 시편 기자는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가리켜 “관”을 쓴 존재라고 지칭한다(시 8:6). 여기서 “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타라”는 “모자, 왕관”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세상 만물을 그의 발아래, 곧 통치 아래 두셨음을 깨닫고, 사람을 향한 그의 배려에 대하여 놀라고 찬양한다(시 8:5-6). 아담은 창조 시부터 대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한 왕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대왕)-아담(왕)-만물의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만물이라는 어휘가 “콜 츠바암”(모든 그들의 군대, 창 2:1)의 해석적 번역이며, 군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일종의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있는 전형적인 군대의 조직처럼 창조된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조직은 바로 (강대국의) 대왕-(분봉)왕-(약소국의)백성의 질세 체계로 이루어진 고대 근동의 봉건체제를 유지시켰던 계약관계와 서로 유사성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께서 대왕이 되시고, 아담은 왕, 그리고 백성들은 신민이라고 보고, 하나님 앞에서 아담, 곧 인간은 그가 다스리고 돌봐야 할 만물과 언약적 연대성을 이루고 있어서, 아담과 생사를 같이 하는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그의 대왕에게 충성하면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아담과 함께 복을 받고, 반면에 아담이 그의 대왕이신 하나님께 반역할 때는 만물은 아담과 함께 대왕의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창조시부터 왕이었고,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 함께한 만물의 왕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은 결국 아담의 타락을 불렀고, 사람은 아담과 함께 타락한 왕이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괴물이 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왕이지만 대왕이 되고자하는 탐심과 역심으로 오히려 죄와 죽음에 갇히게 된 반역의 왕이 된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이 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하나님의 심판과 처형을 기다리는 타락한 왕과 만물에게 구원은 오로지 대왕이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밖에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왕을 세우고, 그가 아담의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새 왕에 대하여 첫째는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 따라서 여자의 후손인 사람인 동시에 뱀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영적인 존재를 제압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신적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사람임을 암시하신다. 따라서 새 아담은 처녀의 몸에서 낳게 될 “임마누엘”임을 계시하시고(사 7:14), 전능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으로 소개한다(사 9:6). 말하자면 “사람”(인자)의 아들”(Son of Man)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새 아담이 왕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 아담도 왕이어야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아담을 중심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고 하시기 때문에, 새 아담은 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 아담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계속 언급되고 있다 (사 9:6-7; 11:1). 이사야 9장에는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났는데, 그는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고, 이름은 위대한 섭리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며 평강의 왕이라는 것이다 (9:6). 대왕이신 하나님과 그 권위와 능력이 동일하신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로 그는 아담의 죄 값을 치러야 할 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아담이 죽든지, 아담을 대신한 다른 존재가 대신 죄 값을 치르든지 해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서고, 권위가 보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새 아담이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신 것이다. 새 아담은 아담의 범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매맞고 고난당하고 죽어야 한다. 그러나 부활해야 만이 죄 값이 온전히 치러졌음이 증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 아담이 옛 아담의 죄 값을 온전히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권세가 새 아담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은 바로 새 아담의 속죄 사역이 잘 예언되어 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아담을 대신한 새 왕이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와서 고난당하고 죽고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왕, 그리스도가 되셨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했다(행 2:36). 물론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고백했었다(마 16:16). 그리스도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골로새서 1:15은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의 형상으로 만드셨듯이, 새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보좌들과 주권들과 통치들과 권세들이 그 안에서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가 바로 만물의 으뜸, 곧 머리라는 것이다. 새 아담이 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주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왕이라는 사실은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왕 되심을 인식하고 믿고, 대우하고, 그를 경배하며 충성하며 찬양해야 한다. “왕의 왕, 주의 주”라고 찬송하고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다.새 하늘과 새 땅, 곧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새 나라의 왕으로 임명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왕,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서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은 이제 새 아담, 새로운 왕 앞에 나와 그가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는 새 왕국,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자가 되면 그리스도의 백성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되는 것이다. 롬 5:17에는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스렸다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더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스리다”는 말을 헬라어 “바시레위오”(βασιλευ、ω)를 번역한 것인데 “왕이 되다”(be king), “다스리다”(rule), “통치하다”(reign) 등의 의미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왕노릇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은혜와 선물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 곧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을 이룬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죽음을 무기로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왕, 생명을 살리는 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룬다. 예수님과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성령으로 인치시고, 인증하는 예식이 바로 세례이다. 예수께서 왕이 되셨으며,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한 왕이 된 것이다. 로마서 8:14-17에는 누구든지 하나니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고 했다.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왕이 되지만, 실제로는 왕으로서 실감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왕이라는 자부심이 없이 살아 살아간다. 비록 우리는 세상 나라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왕답게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세속적인 왕이 있는 반면,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왕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은 돈과 권세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삼고 싶어한다. 그래서 세상의 권세를 탐하고,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왕이 되고 싶어 한다.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살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상의 권세와 부와 명예를 탐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작은 자가 되고, 섬김을 받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대속물로 주고자 한다고 말씀하신다 (막 10:42-45). 그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매맞고, 찢기고, 상처받고, 고난 받으시며,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다. 새 하늘, 새 땅, 새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죽어가는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 제물로 주시겠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도리는 아니다. 이 세상나라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고, 자기가 섬김을 받기 위하여 남을 짓밟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섬기고 살리는 나라이며, 왕은 예수님처럼 섬기고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7-13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⑮ 교회의 용어 문제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언어는 사상의 표현이다.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사상들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하여 전달된다.오늘날 우리는 언어의 혼란을 경험한다. 특히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인해 약어나 비속어 등이 판을 친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치닫는다. 또 성인 세대와 젊은 세대의 언어적 장벽이 생기고 같은 말을 해도 서로 알아듣지 못한다. 문제의 탐색언어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있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어떤 것은 일제의 잔재로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 목회자들의 강단언어는 우리의 신앙적 척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이다.교회의 언어 문제를 성경에 맞게, 또 어법이나 예의에 맞게 사용해야 하는데 여기에 관심을 모울 필요가 있다.교회의 언어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으나 이것이 제대로 실천되고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한국교회의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에 온 힘을 쏟고 있는 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장 장영학 목사와 이야기를 나눈다.김남식(이하 김): 교회 안에서 성경의 원리나 시대에 맞지 않는 용어들을 흔히 쓰고 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다 같이 묵도하므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보는가?장영학(이하 장): ‘묵도’는 일제에 의해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예배의 시작을 소위 천황과 전쟁에 나간 용사들을 위해 예를 표한 것이다. 이것은 소위 일제의 잘못된 신앙을 강조한 예배의 용어이다. 그 이전에는 대개 찬송으로 예배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찬송이나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는 것이 옳다.그런데 어떻게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로 거부되었는데 해방 후 오늘날까지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의 잔재인 ‘묵도’가 그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김: 어떤 교회는 “성가대”라고 하고 어떤 데서는 “찬양대”라고 하는데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할까?장: 성가대보다는 찬양대가 좋다. 성가대는 노래를 부른다는 개념이고 찬양대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이기에 찬양대가 옳다.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보다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좋은 점이다.김: 목회자나 교회 중직자들 가운데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교계신문에 나오는 광고에도 ‘일요일’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고쳐야 하고 ‘주의 날’의 의미를 명확히 하여야 한다.장: 일요일은 7번 요일 중에 들어있는 개념으로 휴일이다. 그러나 주일은 주의 날이기에 우리는 일요일이라는 말보다는 주일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 주의 날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란 의미이다. 김: 일부 교회에서 ‘일천번제’라는 구약의 개념을 실시하고 있고, 심지어는 ‘이천번제’ ‘삼천번제’로까지 하는 것을 보았다. 헌금을 ‘모금’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에 들어 온 방법인데, 그 배후에는 기복주의 사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교회들이 버려야 할 기복주의와 세속주의가 어우러져서 이런 현상을 만들었다고 본다. 여기에다 ‘천민자본주의’까지 겹쳐 헌금의 참의미를 상실하게 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까?장: 헌금은 얼마를 드리느냐와 몇 번을 드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항상 가진 것 중에 정성을 다하여 귀하게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일천번제는 여러 번 드리는 제사를 말하는 것이지 헌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천 번 헌금을 드리도록 만든 일천번제는 대표적인 한국교회의 기복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헌금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목회자의 꿈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출을 받아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나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 곤욕을 치루는 교회들을 많이 보았다. 또 예배당을 건축하고 ‘○○성전’이라는 식의 구약개념을 적용하고 있는데 정말 민망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성경적 개념에 따라 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장: 교회는 포괄적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부름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교회의 사명은 예배와 전도이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예배가 거룩하고 성도들도 거룩한 자이기에 그들이 모인 곳도 거룩한 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성전은 성도 자신이고 성도가 서 있는 곳도 어디든지 성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으로 ‘예배당’ 혹은 교회 공동체가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로 ‘교회당’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기본에의 회귀광명시에 있는 한 교회의 헌신예배 강사로 초청받아 갔다. 새로 지은 교회당 현판이 ‘××교회 예배당’이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주보를 보니 모두 ‘찬양대’로 이름하였다.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다. 성경의 가르침이 표준이 되는 그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버젓이 ‘일요일’이라고 광고하면서 별다른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을 어떻게 할까?이런 주장을 하면 ‘율법주의자’ ‘외식주의자’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아니다. 우리는 ‘성경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정제된 바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7-1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1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나름대로의 머리 속에 담아 둔 이미지가 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절을 짜맞추어 생각해낸 것도 있지만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 꾼들의 만담을 듣다 보니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이 나도 모르게 머리 속에 굳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 참다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좀 더 분명한 그림과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 곧 자기가 태어난 나라, 자기를 길러주고, 자기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주고, 언젠가 자기가 묻혀야 할 자기 조국을 모른다면 그는 그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는 거주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하려 간다고 너희에게 말하였을 것이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할 것이다.” (요한 14: 2-3)예수님의 이 말씀을 되새겨 보면 예수께서 세상을 떠날 날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신다. 그곳은 아버지 집 안에 있는 곳이다. 그곳은 앞으로 제자들이 거주할 곳이다. 이곳은 분명 우리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서울시 몇 번지가 아니고,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미지의 세계 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곳, 그래서 하나님이 왕이신 그곳에 제자들이 있을 곳을 예수께서 마련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과는 별개의 세상이 존재함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떤 모양인지,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계시적인 기록이 없다. 우리가 본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 뿐이다. 그는 분명 우리와 똑 같이 숨을 쉬고, 먹을 것을 잡수신다. 그러나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움직이고 이동하시며, 우리의 시야에서 자유롭게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신다. 전혀 다른 기능을 한 사람의 모습니다. 아마도 우리도 그러한 새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령한 사람들이 신령한 몸을 입고, 신령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와 함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이 세상 만물의 통치자이시다. 모든 만물의 왕이신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고 이 만물의 통치권을 아담에게 넘겨 주셨다. 자신은 대왕이 되시고, 아담은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반란으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멸의 대상이 되 버렸다. 그러나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함으로 아담과 그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죄와 죽음의 심판을 내리신 그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똑같이 적용하여 새 아담을 세우고, 새 아담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살리시려는 계획을 세우신다. 그리하여 첫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위로는 하나님, 그리고 그의 대리통치자인 새 아담과 그와 언약적 연대성을 맺은 새로운 피조물들,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려는 것이다. 물론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그의 백성들의 마음 판에 새겨 두어, 다시는 말씀을 버릴 수도, 변개할 수도 없이 말씀과 함께 죽고 말씀과 함께 사는 새 사람들이 될 것이며, 이때는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넘치는 세상(사 11:9),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이웃에게 여호와를 알라고 전도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렘 31:3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의 위치이다. 아담과 새 아담은 다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운 왕들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셨다. 반면 새 아담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동정녀의 몸에서 낳게 하셨다. 그래서 새 아담, 예수님도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아담과 비교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도 아담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며, 통치자이고, 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담보다 모든 면에서 수월한 통치자이시다. 그의 출생 이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땅에 오셔서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왕으로서의 위치에 있어서 그는 아담과 비교 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영광을 갖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왕의 왕이 되시고 그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예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면 언제 시작된 것인가? 예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곳에 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다. 그리고 그가 부활하신 그 순간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를 그의 권세 아래 가두어 둘 수가 없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속죄적 죽음이 아담과 그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의 죄 값을 충분히 치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와 죽음이 더 이상 아담과 그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붙들어 메고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며, 새 아담이 되신 것이다. 새 아담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께서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의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왕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던 자들은 이제 새 아담이 새 나라의 통치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고백을 함으로 새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묶이게 되는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가, 새 아담의 의로운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적용된 것이다 (롬 5:14).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창조된 세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바로 예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왕노릇하시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순간에 시작된 것이며, 예수님의 왕권은 바로 부활의 순간에 선포되고 그의 통치는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자기 백성을 모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눅 13:33). 세상 나라 사람들,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제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몰려오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새 나라의 백성의 인침을 받는 것이다 (사 2:1-4; 11:9; 요 12:20-26).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새 하늘이고 새 땅이다.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있고, 우리 가정에 있고, 우리 교회에 있고, 우리가 서 있는 그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거처로 갈 것이다. 우리들의 이 육신의 몸이 변화되어 신령한 몸이 되고(고전 15:4),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움직일 수 있는 참다운 자유의 몸이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이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마치고 가야 할 그곳, 곧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그 거처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 저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거하기가 불편할 것 같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6-30
  • 해설 / 한국교회 ‘통합’ 이대로 좋은가?
    덮어놓고 무조건 ‘통합’, 새로운 ‘분열’ 야기할 뿐 지난 2015년 9월, 한국교회 대통합의 서막을 열겠다던 대신-백석의 통합이 결국 법원에 의해 무효로 돌아갔다. 서울고법은 지난 6월 15일 예장백석측과의 통합을 결의한 지난 2015년 9월 예장대신측(당시 총회장 전광훈 목사)의 총회에 대해 다시 한 번 불법임을 확인했다. 1심에 이어 또다시 내려진 이번 판결로 사실상 대신-백석의 통합은 무효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이번 판결로 대신(백석)측 내부는 이미 심각한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구 백석 수호파는 지난 9월 총회의 결의대로 하루빨리 임시총회를 열고, 백석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통합 합의서의 내용을 대신측이 어겼으니, 구 대신측에 부여된 총대권과 임원권한까지도 모두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는 모두 어설픈 통합이 가져온 결과다. 통합은 무조건 옳다는 전제로 민의를 철저히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추진한 통합의 처참한 결과물인 것이다. 대신-백석의 통합 무효 사태가 통합 과정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시키기는 했지만, 한국교회는 이미 지난 역사에서 이와 같은 불의한 사건을 이미 수차례나 반복해서 겪어왔다. 통합과 분열의 반복되는 연결고리한국교회는 초대 하나의 장로교에서 출발해 현재는 300개가 넘는 교단으로 갈라졌다. 하나같이 돈과 권력과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다툰 끝에 결국은 분열을 택한 결과다. 한국교회가 80~90년대 한강의 기적에 견줄만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이뤘다고 자부하지만, 그 이면에는 처절한 분열이 자리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과거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분열과 함께 해왔다. 다툼->분열->신학교 설립->교세 성장->다툼->분열 등의 반복되는 분열의 굴레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독한 추락과 맞닿아 있다. 그런 와중에 어느 순간 한국교회에 ‘통합은 무조건 옳다’는 정서가 자리했다. 워낙 분열에 익숙해있던 한국교회다 보니, 크든 작든 일단 통합은 반기는 분위기였다. 물론 통합은 옳다. 300개가 넘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통합은 한국교회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과정이다. 통합은 무조건 옳다는 식의 일방적인 논리가 그 과정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렸다. 대신-백석의 통합도 문제는 과정에 있었다. 양 교단이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통합을 하겠다는 공의적인 목적에는 결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지만 계속되는 거짓말, 회원들의 반대를 무시한 일방적 행보, 결정적으로 통합의 결의까지도 불법으로 진행하면서도 “통합은 무조건 옳기에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애초 통합의 목적인 ‘공의’를 거스르는 처사다. 과정의 중요성을 무시한 통합은 엄청난 후유증을 남긴다. 대신측은 한국교회 유일의 자생교단이라는 자부심을 갖던 교단이었으나, 통합 과정을 통해 수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먼저 석수측이 분열해 나갔고, 이후 일부는 세력을 구성해 합동측에 들어갔다. 그리고 결국 대신(백석)측과 수호측으로 완전히 분열했다. 두 세력이 하나가 되고자 했던 통합이 결국은 셋이 되고, 넷이 되는 씁쓸한 기적은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일반적인 통합양상이다. 문제는 통합의 ‘과정’한국교회에 있어 통합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숙제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조건 GO”를 외치며, 과정은 생략하는 통합 방식은 결코 하나를 이뤄낼 수 없다. 특히 교단 뿐 아니라 교계 연합단체까지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는 와중에 이러한 통합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며, 교계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지금 교계에 있어 진심이 완전히 배제된 ‘통합’은 그저 허울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한교총을 비롯해 연합단체들이 통합을 외치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진지한 논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통합’은 곧 정의라는 일반적인 인식에 응답하고자, 그저 남보다 먼저 통합을 부르짖을 뿐이다. 지금 여타 사회가 그렇듯 교계는 진보와 보수로 심각한 대립을 겪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WCC에 대한 이견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지금이라도 먼저 WCC에 대한 보수와 진보간의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전제되지 않고서 일단 합치고 보자는 식의 통합이 계속된다면 내부의 반발은 반복될 것이고, 그것은 곧 또다른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여기에 대신-백석 통합 무효의 교훈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정이 잘못된 통합은 그게 몇 년이 됐든 결국은 치명적 문제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통합’, 그 첫걸음은 무엇인지 다시 진지한 고민을 펼쳐야 할 때다.<차진태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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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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