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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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곱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워 오자 자기의 자식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한다. 이때 요셉을 축복하며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겼던 하나님, 오늘날까지 내 일생 동안 나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창 48:15)이라고 부른다. 개역성경은 KJV는 의 분사형을 대부분의 다른 역본과는 달리 “먹이다”혹은 “기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먹이고, 기르는 것이 꼭 양떼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동사의 원래의 뜻대로 양을 먹인다는 의미에서 “목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야곱은 돌이켜 보면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쌍둥이의 동생으로 태어나 형에게 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아비를 속여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연유로 그를 죽이려는 형의 칼을 피해 집에서 도망 나온 이후, 그는 일생을 나그네로 살면서 그의 고백대로 130년 동안 험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창 47:9). 그런데 그는 그의 일생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셨다고 고백한다.
야곱뿐만 아니라 다윗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름 없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서 철없이 살다가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트린 후, 일약 민족적인 영웅이 되고 왕이 되었지만 그의 인생은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산 사람이었다. 밧세바와의 사건이 그의 온 인생을 뒤바꿔 놓은 것이다. 외적과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죽이려고 끈질지게 쫓아다니는 그의 장인 사울 왕을 피해 적군의 진지로 피신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자식들의 불화로 하루아침에 왕자들이 몰살당하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을 떠나 피신해야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고대 근동 세계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민족적 지도자나 왕을 그들의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는 그의 법전 서문에서 자신을 목자로 지칭하고, 아시리아의 산헤립도 그의 역대기에 자신을 목자로 부르고 있다. 성경에서도 모세는 그의 사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고  하나님께 자기 뒤를 이어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세워 그의 백성들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민 27:16-17).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왕과 백성 관계를 맺는 언약을 세웠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왕이기 때문에 여호와는 그들의 목자이고, 자기들을 여호와의 양으로 간주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시편 79:13에는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목장의 양이오니 우리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며 대대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노래하며, 시편 80:1에서는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간청한다. 시편 95:6-7에서는 “오라 우리가 경배하며 절하자. 우리를 만드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 손의 양이기 때문이다.”라고 제안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되는 점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한 민족이 그들의 민족 신을 향하여 “목자”에 비유하며 목자로 부르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얼마나 인격적이고 친밀하며 깊은 내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점이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소유주인 동시에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소유주인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히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들을 목자로 세우고 그를 대신하여 그의 양을 치게 하신다. 여기서도 고대 근동의 봉건 정치 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떼를 잘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목자의 일은 첫째로 양들을 목마르지 않고 배부르게 먹이고 보살피는 일을 해야 한다. 둘째로 양들을 초장과 물가, 그리고 우리 안으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는 양들을 야생의 맹수나 도적들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일이다. 그러나 에스겔 3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먹고 사는 일에만 열심이지 양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이스라엘의 목자를 향하여 “자기만 먹고 내 양떼를 먹이지 않았다”(34:1-8)고 책망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불충실하고 책임감 없고 탐욕스럽고 희생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의 목자를 해고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양들의 목자가 될 것을 선언하신다. “참으로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한다. 보아라, 나 곧 내가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 필 것이다. 자기 양떼를 흩어졌을 때 목자가 그 양떼를 돌보는 것 같이, 나 역시 내 양떼를 돌보아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겔 34:11-12). 특히 여러 민족들 가운데 흩어진 그의 양떼들을 모으시고 상한 것을 싸매주고 병든 것을 고쳐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나아가서 23절에는 “내가 그들을 먹이는 한 목자, 곧 내 종 다윗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니,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는 그들에게 목자가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다윗은 이미 5백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여기서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말씀은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신 목자, 그리고 다윗과 같은 목자가 오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시자,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목자가 나타나 자기들을 모으고, 먹이고, 인도하고, 돌보며, 보호해줄 목자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10장에는 갑자기 예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한 강론을 시작하신다. 그러나 갑자기가 아니라 사실은 9장의 연속이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게 되자 그를 선지자로 인정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가르침과 법을 따르지 않는 그를 출교한 사건을 두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강도와 절도와 삯꾼에, 소경되었던 자를 양에 비유하시며, 자신이 참된 목자이심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선한 목자는 무엇보다 양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아는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시고, 심지어 자기는 양떼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희생한다고 말씀하시다. 마치 다윗이 양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사자나 곰들과 싸웠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과 다른 목자였다. 예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데, 자기는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신다(요한 10:18).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에스겔 34장에서 약속하신 자신이 한편으로는 목자 같은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목자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 죄와 죽음의 세력에 갇힌 양들과 같이 무기력한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강도와 절도와 삯꾼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셨다. 그리고 그의 우리(축사)로 인도하시고(요 10:16), 그의 양을 삼고, 먹이고, 보살피고, 인도하시며, 보호하고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를 불러 그의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도록 목자의 사명을 주셨다(요한 21장). 베드로는 목자가 된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곳곳에 다니며 목자 노릇을 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양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에 자기들만이 아니고 장로들과 신자들을 다 목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삯꾼 목자가 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목자가 되고,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한다. 그리하면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목자장으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벧후 5:1-4).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으로 부르고 있다. 예수님은 목자장이시고, 우리는 모두 목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만족해야 한다.
우리도 어쩌면 야곱이나 다윗에게 비할 바는 못되지만 다 나름대로 험난한 인생을 살아 온 자들이다.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잘 나서, 혹은 능력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 남은 것이 기적이고 신비이다. 오로지 감사할 뿐이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어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 고백이 매일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도 목자가 되어야 한다. 항상 양 노릇만 할 수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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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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