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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교회의 정체성과 기독교언론
    인류사에서 현시대만큼 언론의 역할이 증대된 때는 없었다. 인류사회가 지금 누구나 어디서든 실시간 정보를 시시각각 접수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신문에서 방송으로, 방송에서 영상으로, 영상에서 다시 인터넷으로 발전해 온 매체가 이루어놓은 언론의 쾌거이다. 세계가 한 마을처럼 언론을 통해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만큼 언론의 역할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1. 한국기독교의 언론상황과 그 위치한국의 언론자유는 매우 신장되어 있다. 그러나 특수언론 등록제도에 의해 허가된 ‘종교방송’이나 ‘종교신문’은 정치적 기사를 보도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익히 아는 대로 기독교계에는 4~5개의 케이블 TV와 위성방송, 라디오 방송(산하에 다수의 지방 방송이 있음), 인터넷방송 등이 있고, 또 기독교를 대변한다는 일간신문도 있다. 그리고 100여 종의 주간신문(격주간 등 포함) 등이 있다. 이들 방송이나 신문 등의 기사에 있어서 그 편집, 보도 내용이 대체로 기독교 내부 문제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기독교언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리 높지 못한 실정이다.그런데 교계에서 사실상 기독교언론을 대변하고 있는 주간신문의 경우, 크게 교단지와 연합지 그리고 선교단체 등이 그 목적을 위해 발간하는 기관신문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교단지는 그 교단의 정책홍보와 회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 선교단체 등이 발간하는 기관신문 역시 그들 단체의 홍보지에 머물러 있으므로 언론으로 보기에는 매우 미흡하다고 평가된다.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은 초교파 연합지가 그 사명과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글자 그대로 ‘초교파 연합지’란 어느 교단이나 기관에도 소속되지 않으므로써 경제적 영세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시장의 독자들이 신문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부족해 그저 신문용지에다 먹으로 글자가 찍혀 있으면 ‘신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교단지와 연합지를 구분 못해 한 달에 한번 정도 배달되는 교단회보를 받아보면서 ‘나도 교계신문 하나 본다’고 말한다. 2.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언론현대사회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현대인이 처한 이 다원주의사회가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주의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즉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를 뜻한다. 이 상대주의가 종교세계에 들어와 종교다원주의를 낳았다. 종교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가졌든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절대신념체계를 갖는다. “내 종교는 옳고 네 종교는 틀렸다”는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종교를 절대화 할 수 없다는 것이지, 종교다원주의가 ‘종교는 모두 같다’는 종교혼합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상대의 절대신념체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또한 상대가 나의 신앙도 그렇게 대해 줄 것을 기대하는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종교다원주의란 미명하에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한 채로 ‘타종교와의 대화’는 오히려 종교간의 혼돈과 갈등만을 초래하게 될 뿐이다.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타종교인과 무종교인에게 똑같이 이 사실을 증언하되, 그들의 생각과 판단도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가 종교패권주의화 하거나, 또는 타종교가 기독교를 무시하는데 대해서는 기독교언론이 이를 바로 잡고 방어해야 할 책임이 있다.요즘 소위 진보적 언론을 자임하는 일부 기독교매체 가운데도 기독교의 호교(護敎)보다 오히려 ‘개혁’(改革)이란 미명하에 기독교 내부의 약점을 들추어 공격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언론도 있다. 이는 옳은 방향이 아니다.3. 교회의 정체성과 언론의 역할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사건이나 또는 교회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목회자나 교계 지도자들은 한 사람 예외 없이 언론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를 방어하는 교계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교계언론이 중요하다. 신구약 시대를 통털어서 특히 문서운동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시대의 예언자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구두 예언자이고, 다른 하나는 문서 예언자이다. 구두 예언자의 예언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으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왕사(王史)에 몇 줄씩 인용된 내용뿐이다.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위대한 선자자들의 예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서 예언자들의 예언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그대로 남아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문서의 중요성이다.그리고 오늘날 목회자들의 설교 역시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고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그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미치는 것 뿐이다. 그것이 언론을 통할 때 비로소 그 교회 울타리를 넘어 전국교회 또는 우리사회에 보다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이 시대 기독교언론의 역할과 사명 역시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보호하는 호교(護敎)와 선전(宣傳)에 있다. 호교는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고, 선전은 내부의 복음을 외부에 전파하는 ‘창’의 역활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중요이다. 한국교회는 영향력 있고 제대로 된 기독교언론을 육성할 책무가 있다.사실 지금의 한국교회 정도면 신문은 조중동 같은 주류를 대변할 만한 일간지가 한 개 정도는 있어야 하고, 방송은 MBC나 SBS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방송매체가 있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 정체성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와 물신숭배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교계언론의 사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우리사회에 만연한 순수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이미 한국사회는 ‘돈’(Mammon)이라는 유사신(類似神)을 숭배대상으로 찬미한 지가 오래이다. 여기에 교회마저 비판없이 함께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복주의에 사로잡힌 교회가 섬기는 신(神)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일찌기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비신화화 되고 비인격적 힘으로 바뀐 수많은 고대 신들이 무덤에서 나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 들고 그들 사이에 또다시 영원한 싸움이 벌어진다”고 말한 그 고대 신(高代神)들은 맘몬이라는 물신(物神)을 두고 한 말이다.기독교언론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설교되고, 목회자나 교인들이 물욕을 버리며, 정직한 삶을 살 때, 기독교의 정체성은 저절로 확립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설교를 하는 기독교,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 살아나오지 않은 기독교는 ‘가짜 기독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믿습니다. 아멘”의 기독교는 싸구려 은혜에 매달려 있는 낮은 수준의 기독교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한번 콧김으로 ‘후-’하면 다 날아가 버리고 말 가라지인 것이다.4. 교계언론인의 자세교계언론인은 예언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언자는 자기의 유익을 따라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메시지와 하나님의 공의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권력과 충돌하기도 하고, 종교적 기득권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교계언론인의 사명이 예언자적 사명이라면 예언자가 겪은 고난도 함께 따르게 되어 있다. 때로는 자신이 쓴 기사로 인해 고소고발도 당하게 되고, 심지어 원치 않는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계언론인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복음을 변증하다가 감방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일제 시대나 군사독재 시대도 아닌데 교계언론인이 감방 갈 일이 어디 있겠는가’고 생각한다면, 이는 교계언론의 위치나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예수님의 언론관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왜곡과 불의와 부정이 있는가?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다가 권력과 충돌하고 교권과 부딪친다. 그러면 자연히 신변에 위협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내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교계언론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교계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그만 두어야 한다.끝으로, 개 교회와 교계언론은 두 바퀴처럼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비대한데 교계언론은 빈약하다. 그러면 한쪽 바퀴가 너무 작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빙빙 돌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교회는 교계언론을 지원하고, 교계언론은 교회를 보호하는데 힘쓰야 한다. 나는 믿는다. 교계언론이 바로 서면 한국교회가 바로 되고, 한국교회가 바로 되면 한국사회가 개혁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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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8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⑩ 축도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예배는 ‘축도’로 예배를 마친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생활에서 일상화된 표현이다. 그러나 ‘성도’(평신도가 아님) 들이 혼란할 때가 있다. 축도를 할때, 어떤 교회에서는 ‘있을지어다’라고 하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한다.모두들 성경적 배경을 가지고 교단마다 그들의 연구에 따라 결정된 것인 줄 알지만 어느 것이 맞느냐라는 의문을 제가할 수도 있다.문제의 탐색옛날에는 사용하는 찬송가에 따라 소속 교단을 분간할 수 있었다. ‘새찬송가’를 사용하면 장로교 합동이나 고신측으로 이해하였는데, 지금은 찬송가가 하나가 되었으니 축도로 구분할 지경이다.고린도후서 13:13대로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한 교단은 합동, 고신, 개혁, 대신 등 이른바 보수교단들이다. 그러니 축도의 형태로 교단의 색깔을 구분하는 세상이 되었다.사례의 탐구옳고 틀리고를 따지기 보다 어느 것이 성경적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있는 목포재건교회 정낙준 목사에게서 들어본다.김남식(이하 김): 교회예배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도의 근거가 성경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정낙준(이하 정): 목사들이 축도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구절은 두 가지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주 여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고후 13:13).이 두 가지 축도(강복선언) 가운데 고린도후서 13장을 많이 사용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인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은 로마 가톨릭이 사용해온 바울의 축도보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아론의 축도(민 6:25-26)를 더 많이 사용했다.김: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축도가 기도인가? 복의 선언인가? 라는 문제이다. 여기에 따라 축도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는데 그 근거를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정: 축도(benediction)의 문자적인 의미는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다. 이 말의 핵심은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만일 축도를 ‘복의 선언’이 아닌 기도로 받아들이면 ‘축원하옵나이다’. ‘~을 원합니다’로 하게 된다. 하지만 제사장의 축도(민 6:24-25)를 보면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백성에게 사용한 말씀에서 ‘~을 원하노라’를 3번 사용했다. 이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내려주시는 복을 제사장이 선언하는 형식으로 나타났다.고린도후서 3장 13절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씀도 사도적인 축도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로 끝나지만, 이 축복의 내용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상대에게 명령하는 내용을 장엄한 태도로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두 성경구절은 ‘마땅히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선포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축도를 복의 선언임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축도를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봉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축도를 기도가 아닌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김: 그러면 우리 교회들이 가장 성경적인 축도를 시행하여야 하는 신학자들의 바른 해석과 각 교단에서 바른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었으면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정: 축도는 목사가 하나님께 성도의 복을 빌어주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선포이고 선언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축도를 할 때 복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이루어 질 것에 대해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 13절로 축도할 때 종결어미를 ‘축원하옵나이다’ ,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등 기도형식으로 표현하기보다 복의 선언인 ‘있을지어다’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김: 우리가 ‘축도’라고 하면 그 글자에 ‘기도’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에 ‘복을 비는 기도’로 이해하기 쉽다. 성경적 원리에 따른 바른 표현이 필요한데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겠는가?정: 축도는 한자로 ‘祝禱’이다. 축복기도의 불임말로 사용한다. 한자로 보면 축도는 복을 빌어주는 기도이다. 복을 빌어 주는 기도로 사용할 때는 축복(祝禱)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럼 문법상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축도는 기도가 아니라 ‘복의 선언’, ‘복의 선포’라고 했기 때문에 축도의 종결을 ‘~있을지어다’로 해야 하는 것이다.축도에 대한 문자적 의미와 본질적 의미가 서로 상충되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들마다 주보에 표기할 때는 ‘복을 비는 기도’의 의미를 가진 축도로 표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용어 개념을 목사 개인이 정리해서 사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총회적 차원에서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총회적으로 개념을 정리해주면 목사들이 ‘복의 선언’이나 ‘복의 선포’로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기본에의 회귀이 문제는 교단의 문제인 동시에 목사 개인의 신학적 또는 신앙적 자세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교회에서 축도의 성격이 ‘복의 선언’인지 ‘기도’인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강단의 혼돈이 우리 신앙생활의 혼돈으로 이어질까 염려된다.기독교TV 방송들을 통해 많은 교회의 예배들이 방영되고 있다. 보수교단에 속한 어느 목사는 설교 때에 ‘새번역’ 성경을 사용하거나 다른 번역본을 텍스트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본문을 비교 강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옳은 것일까? 인기를 위한 ‘튀는 행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예배 용어의 정비가 필요하다.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로 시작하고 ‘축도’로 마치는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그래서 주보에 ‘복을 비는 기도’라는 의미를 가진 ‘축도’라는 표현을 하지 말고 ‘복의 선언’ 또는 ‘복의 선포’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예배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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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8
  • 학술/ 한복협 5월 월례회 ‘저출산과 가정해체 문제를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본고는 지난 5월 11일 한국중앙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5월 월례회 중 송길원 목사가 발제한 ‘저출산에 대한 가정사역자의 한 시각’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저출산 논의를 시작하며엄청난 고통과 슬픔으로 상징되는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이 밀어 닥치고 있다. ‘저출산으로 인한 사회와 국가의 붕괴’가 바로 그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합계출산율이 1970년 4.53명에서 2003년 1.19명으로 떨어지더니 출산율은 세계 꼴찌, 감소 속도는 세계 1위인 아주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또한 한 연구에 따르면 현 합계출산율(1.2명)이 계속 지속될 때 4846만 명인 한국 인구는 950년 후인 2954년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는 국가가 된다고 한다. 그동안 숱하게 이야기해 왔지만 믿지를 않았다. 이제는 정책 입안자만이 아니다. 전 국민이 진지하게 귀 기울어야 한다. 그리고 비상구를 찾아야 한다. 한국의 저 출산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귀에 익숙한 슬로건들을 정부가 내걸면서 가족계획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62년이었고, 그 정책의 결과로 합계출산율이 2.1명 이하로 떨어진 해가 1983년이었는데도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96년까지 출산 억제 정책이 계속 유지된 것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그 이후엔 저출산 고령화사회 위원회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어졌지만 예산 낭비만 컸고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컸다.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정부에만 돌려댈 일도 아니다. 결혼을 굴레로, 자녀를 혹으로 여기며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만을 추구했던 이기적인 사회 풍조도 한 몫을 했다. 지금도 “하나도 버겁다”고 힘겨워 하고 차라리 잘못 키울 바에야 안 낳는 게 낫다고 포기해 버리는 이들도 많다. 이로 인해 본인과 사회가 겪게 될 부메랑 같은 재앙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물 건너 불구경하듯 팔짱만 끼고 있는 꼴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재빨리 비상구로 안내를 해야 한다. 프랑스나 스웨덴을 뛰어넘는 출산 장려 정책과 복지 시설의 확충, 가정 친화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신혼부부에게 생활수당을 지급하는 다른 여타 나라의 주택 지원을 포함하여 다양한 결혼장려금 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은 비상시국이라는 사실이다.나아가 개인은 개인대로 공동체적 사고로 ‘더불어 살아야 할’ 세상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정신만이 저 출산의 재앙을 피해갈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속히 비상구를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이 세 가지 요소로 다시 돌아설 수는 없을까? 한 교회가 유아 방을 황토방으로 만들었다. 큰 감동이었다. 유배실과 같던 유아실이 치유실로 바뀐 것이다. 작은 관심이 어머니들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켰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감소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한데 이 아이들에게 글로벌 매너를 가르쳤더니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찾아왔다. 유익이 있어서다. 교회의 커리큐럼을 전면적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우리는 너무 구태의연하다. 개발된 프로그램을 수 십 년 동안 울궈먹고 있다. 스마트 폰에 하루 종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자연으로 돌릴 수는 없을까? 아니 아이들 홀로 버려진 주일학교에 부모들이 함께 뛰어들 수는 없을까?저출산 해법에 대한 비판 하나정부산하 연구기관인 KDI(한국개발연구원)가 저출산 문제 해법으로 ‘혼전동거’와 ‘혼외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혼전동거와 혼외출산을 확산시키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국책연구기관에서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혼전동거를 선택하는 심리에는 복잡한 법적 절차를 생략하고 우선 급한 성적인 만족을 추구하겠다는 동기가 숨겨져 있음을 왜 모르는가? 만약 KDI식 해법을 도입한다면, 대한민국은 ‘동거 공화국’이 될 것이다. 동거 실험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신비로운 성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동거가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완충지대인양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동거가 만연한 서구에서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었다. 영국의 경우 동거 커플이 갈라설 확률은 결혼한 부부보다 3~4배가 된다고 한다. 또한 동거 커플이 자녀를 많이 낳을 것이란 기대도 근거가 부족하다.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혼외출산 비중이 40~60%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내걸지만, 그것은 건전한 가정생활의 파괴현상을 보여줄 뿐이다.교회가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이러 따위의 일을 여전히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레임의 전환-저출산을 다출산으로모든 시작은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주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렇다. 이름부터 부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어지는 게 있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천지창조에 인간을 참여시키면서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했다. 이보다 더 감격스런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이름은 존재 그 자체다. 어떻게 불리어 지느냐가 곧 미래가 된다.강화도를 ‘유배지’로 말하는 순간 버려진 섬이 된다. 하지만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말하는 순간 강화도는 역사 유적지가 된다. 관광지가 되고 유물을 간직한 보물섬이 된다. 이름 지어진 틀(frame)이 성격을 규정한다. 또한 사람들은 정해진 틀을 통해 사건을 해석한다. 네모 창을 통해 달을 보면 달조차도 네모로 보인다. 동그란 창을 통해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푸른 공이 된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존재보다는 프레임에 의해 결정된다.‘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이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었다. 클린턴은 이 한마디로 대선 국면을 경제 문제로 전환시켰다. 이슈를 선점했다. 이래서 선거는 프레임 싸움이다. 정책도 마찬가지다.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3대 과제는 ‘일자리 창출, 4차 산업, 저출산 해소’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대변인은 이렇게 발표했다. “초저출산율을 탈피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구조와 인식, 문화가 함께 바뀌어야 하는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이를 위해 “자녀 양육의 국가 책임 구현과 결혼·출생 양육에 친화적인 사회 제도로의 변화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 전 국가적 총력 대응을 해나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국민들에게 먹혀들까.교회의 과제: 교회 주도형 공공보육“지금까지의 저출산 대책들은 실패했다, 충분하지 못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대통령은 정직했다.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대통령의 말이 아니라도 국민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실패한 것 맞다. 출산 축하금 몇 푼 준다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을. 출산휴가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 휴가를 얻기 위해 아이를 낳지도 않는다. 국민은 영리하다. 선심성 정책은 감동을 못 준다. 감동이 없으니 움직일 리 없다. 구호도 아니다.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 필요했다.대한민국은 2026년이 되면 초고령사회에 접어든다. 2031년이 되면 한국 총인구가 줄어들게 된다. 이미 많은 경고가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고 모른 척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국가의 근간을 흔든다는 이야기도 물 건너 불구경이었다.답은 간단했다. 출산이 아닌 보육이었다. 맞벌이 가구 자녀들이 ‘학원 뺑뺑이’로 내몰리고 있다. 저학년 자녀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엄마들은 1만5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악한 방과 후 돌봄 제도가 젊은 엄마들을 경단녀(경력단절여성)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최근 5년 이내 한 해 평균 퇴사자가 8천명 수준으로 보도되었다. 이러니 누가 기저귀 몇 장 더 나눠준다고 아이를 출산하려 하겠는가?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위원회가 이를 간파했다는 점이다. ‘보육공공성 강화’가 바로 그것이다. 위원회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돌봄 절벽’ 문제 해소를 위해선 초등 돌봄과 방과 후 학교 연계를 강화하고 학교와 지역사회가 협업하는 돌봄 모델 마련과 확산을 위한 논의도 이어갈 방침임을 밝혔다. 이와 관련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국민청원을 내 놓았다. 그 요지가 이렇다.“취학 전 영유아를 가진 젊은 부모들은 공공보육시설 확충을 간절하게 바란다. 하지만 늘어난 국가부채와 낮아진 경제성장률로 인해 재정 여력이 소진된 탓에 정부는 짧은 시간에 공공보육시설을 많이 짓기가 어렵다.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지으려면 많은 돈과 시간이 든다. 학생 수 감소에 따라 생기는 초등학교의 여유 공간 일부를, 다시 말해서 지금 특활공간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교실의 일부를 공공보육시설로 활용할 것을 청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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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6
    그렇다면 시편 본문으로 돌아와서 다윗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셨고, 심지어 그의 후손을 아들로 삼아 영원토록 그의 왕위가 견고하게 세우고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신 것같이 다윗도 버리실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다윗의 언약을 파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다 왕 아하스 때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군사 동맹을 맺고 아하스를 침공하여 그를 다윗의 왕좌에서 폐위시키고, 이름도 잘 모르는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삼겠다고 작전을 세웠다. 이 정보를 들은 아하스와 유대 백성들은 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무릎이 떨렸다고 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이러한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들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징조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임을 알려 주신다. 다윗보다 200년 후의 일이다.이것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버릴 생각은 없으시고, 다윗과의 약속을 변개하실 마음도 없으시다. 그렇다면 다윗이 염려하는 점은 무엇일까?그것은 관계성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의 아들로 삼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의 유업으로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400년이나 노예생활을 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노예에 관한 것 뿐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서 살아가려면 교육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했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바로 노예 근성을 고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정신과 철학과 생활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매도 맞고 채찍도 맞았다. 다윗도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다.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의 죄를 은닉하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암살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 가정에 감내하기 힘든 벌을 내리셨다. 그의 아들 암살롬의 반역으로 왕자들이 몰살 당하고, 그의 아내들은 그의 아들에게 짓밟혔다. 그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궁을 버리고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집안이 하루 아침에 다 풍지박산이 되 버렸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참기 힘든 아픔과 모욕과 환난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처럼 정상적일 수는 없었다. 다윗은 침상이 썩도록 눈물을 흘렸고, 그의 뼈마디가 흔들리도록 회개했다. 하나님은 그를 받으시고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 “임마누엘” 메시야를 보내셨다(시편 32, 51).우리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죄인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이 되었다. 아담의 나라에서 새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시민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예수님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흰 옷을 입으신 예수님과 높은 보좌에 앉아서 거룩하다고 찬송하는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이전에 그 스스로가 자신을 심판할 것이다. 사실 신자들이 죄를 짓는 것은 고의적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행자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가슴 속에 양심이라는 센서를 부착해 놓으셨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그 센서가 작동하여 경보음을 울리게 되어 있다. 당연히 그때 즉각 범죄 행위를 그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계속하여 짓고, 죄를 즐긴다면 그것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하여 대항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비뚜러지고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져 있을 것이고,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져 있을 것이다.”(마 18:18)라고 가르치셨다. 이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과 그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불편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바를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받기 전에, 그 자신에게 심판을 받은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에 그를 연단 시키고, 훈련시켜 바른 신자가 되도록 만드실 것이다신자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하고, 행실을 고쳐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요일 1:6-7). 죄지은 신자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고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훈련과 권징을 시행하신다. 사람들을 통해서 훈련시키고, 교회를 통해서 훈련을 시키시고, 때로는 직접 채찍을 드신다. 하나님의 채찍은 다윗의 경우처럼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이 땅의 신자들에게 사는 날 동안 필요한 것이고,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훈련과 채찍이 따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5-11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⑨ 성경적 설교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기독교는 설교를 통해 일어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설교는 예배의 핵심이면서 설교자들에게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문제의 탐색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회쳐지는 설교가 성경적이냐?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있게 대답하기에 주저되는 것이 사실이다.오늘의 강단에서 전파되는 설교들 중에는 기복주의적 경향이 많아 모든 것이 축복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설교의 영향으로 성도들은 ‘복받기 위해’ 예수 믿는 기복주의자들이 되었다.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청중들의 기호에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기독교의 본질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분위기에 대항하여 강해설교를 시도하는 목사들이 생겨났고 그 파급 효과가 컸다.이른바 ‘강해설교가’라고 자타가 선전하는 L목사, P목사 같은 이들은 외국의 강해 설교집을 번역 모방하여 설교를 하여 인기를 모았다. 이들은 그 설교들을 책으로 계속 출판하여 강해설교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것이 한국교회 강단의 풍토였다.사례의 탐구목회현장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이것을 40년간 강단에서 강해설교를 한 목사가 있다. 외국 유학을 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아니고 성경을 탐구하여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 단어 빠짐없이 모두 강해하여〈신구약 강해전집 100권〉을 발간한 목사이다.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구 성덕교회에서 사역하다가 정년 은퇴하였고 지금은 대신대학교 목회훈련원장으로 섬기고 있는 윤희주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본다.김남식(이하 김): 한 평생 강해설교를 하여 많은 설교자의 귀감이 된 것에 감사드린다. 한국교회 설교의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윤희주(이하 윤): 지방교회의 목회자로서 한평생을 보낸 사람으로 전체를 평가하기란 조심스러우나 내가 보기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로서의 자세보다 자신의 신앙적 견해나 삶의 철학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성경의 의도를 전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본다.김: 어떤 집회에서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읽었는데 설교가 마칠 때까지 본문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고 자기자과 축복 이야기로 가득한 것을 보았다. 신학교 강의시간에 이 이야기를 하면서 ‘왜 성경본문을 읽었을까?’라고 물으니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다. 나의 정답은 ‘예배 순서에 있기 때문이다’고 하여 한바탕 웃은 바가 있었다.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는 것이 설교자의 소명인데 하나님보다 자기를 내세우는 풍토가 되었다.김: 한 교회에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모두 설교하였는데 어떤 계기로 이런 일을 하였는가?윤: 목회 초년생 시절에 설교 때마다 나의 부족을 절감하였다. 장기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이나 삶의 철학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심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서 시작하였다. 나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고 학교도 기독교계 학교를 다녔다. 교회의 분쟁들을 볼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런 분쟁들은 설교자가 성경이 아닌 자기 생각대로 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회 전기간 성경을 권별로 강해하였다.김: 평생 강해설교를 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는가?윤: 내가 강해설교를 시작한 것은 1967년부터이다. 그 당시에는 성경연구를 위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였다. 그리고 권별 강해를 계속하다보니 그 책에 대한 자료를 찾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특히 사람 이름만 계속 나오는 부분을 강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고 감격 속에서 말씀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이런 강해설교, 즉 성경적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윤: 급격한 변화나 숫적 부흥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나타나지 않았다. 3년 정도 지나면서부터 신앙과 인격과 삶이 변하는 것이 보여지기 시작하였다. 질적 성장이 이루어지자 서서히 양적 성장도 동반하게 되었다. 그 결과 건전한 부흥과 견고한 신앙인으로 양육하게 되었다.김: 한 평생 강해설교를 실천한 설교자로서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보는가?윤: 본문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에스라 7장 10절에 나타난 에스라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에스라는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성도들에게 가르치기를 결심했다고 하였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본받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 자신과 가족이 먼저 큰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후 교회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김: 남들이 하지 못한 큰 일을 하였다. 〈신구약 강해전집 100권〉을 출간하였는데 그 소감은 어떠한가?윤: 처음에는 출판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친구들의 권유로 1986년에 첫 권을 출간하여 2005년에 마쳤다. 그러니 20년이 걸렸다. 의외로 좋은 반응을 받았고 독자들로부터 격려도 많았다. 그러니 ‘한국교회에 말씀을 사랑하는 분들이 많구나’라고 느꼈다.기본에의 회귀한 목회자의 꾸준한 성경적 설교는 설교자와 성도들 그리고 교회를 변화시킴을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설교는 강해설교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은 ‘에스라의 방법’이어야 한다. 주석이나 남의 설교를 표절 또는 짜깁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바른 설교를 해야 한다. 즉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우리 주변에 번영, 축복이 넘쳐나고 자기 지식이나 경험이 난무한다. 성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에 감염되어 ‘축복’이 아니면 설교가 아닌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성경적 설교로 돌아가자. 한평생 하여도 넘치는 자료들이 있지 않는가? 에스라의 자세를 한국교회에서 이루어 나가자.(자료 문의 010-7795-0651)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5-10
  • ■ 학술/ 기윤실 바른가치 세미나 ‘미투와 기독교’
    본고는 기윤실이 지난 4월 23일 개최한 바른가치 세미나 ‘미투와 기독교’ 중 최순양 교수(이화여대)가 발제한 ‘#Me Too, 기독교의 시선으로 보다(기독교의 입장에서 살펴본 미투운동)’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 편집자 주 중층화된 여성과 남성의 관계 ‘평신도와 목회자’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고 비하하거나 대상화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할 때,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성성폭력의 사례들은 그 층위가 좀 더 복잡해진다.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가지고 있는 혐오적 생각들에 더하여져서 목회자라고 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상대적으로 약자인 평신도 여성에게 성폭력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1) 교회 여성의 이중적 억압 현실교회 내에 존재하는 신앙적이고 신학적 기반들이 성폭력을 더 은폐하면서 한 편으로는 강화시키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남성목회자들은 자신이 목회자라고 하는 권위를 근거로 하여 여성들을 이중으로 대상화시키고 있다.(여성이라는 이유와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평신도라는 두가지 변수를 이용하고 있다.) 교회 여성들이 주로 당하는 성폭력은 목회자들로부터 행해지는 데, 이 경우 교회의 신조나 믿음체계, 그리고 여성들의 신앙 교육 등을 악용해서 발생할 때가 많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의 성적 결정권이 교묘하게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규정하는 성역할과 성적 차이보다도 더 교회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이분법적 종속적 관계로 규정하면서, 그 안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의 ‘머리’이며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 게다가 그러한 남성들의 지도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게다가 남성은 지도력으로 여성은 그 지도력에 순종하고 종속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된다고 하는 잠재적 동의가 존재한다.남성 목회자들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범한 성폭력의 형태는 대개의 경우 목회적 업무의 일환으로 행해지게 된다. 심방을 가서, 위로해주기 위해서라고 미화한다거나, 본인의 거룩함이 이어지기 위해서, 신체적 친밀감은 필수적인 것으로 해야 된다는 둥, 혹은 아버지가 딸을 돌보는 돌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한다.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성폭행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대리하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일반 남성을 대할 때처럼 방어적일 수 없고, 즉각적인 거부의사를 표현하기가 더 어렵다는 현실적 자각의식이 있어야 한다.평신도들이 남성 목회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심리적 상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가지고 있는 그것과 같지 않다. 목회자에 대해서 자신을 매우 약하고 의존적 존재로 정의내릴 때가 많다. 목회자가 하는 말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의문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이 깊고, 교회생활을 많이 한 여성 평신도들에게 더 강화되어 나타난다. 실제로 일반남자가 아니라 남성 ‘목회자’이기 때문에 폭행을 당하더라도 저항할 수 없이 무력해졌다는 경험담을 토로하는 피해자들이 있었다.더군다나 목회자가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거나 신앙적 조언을 하면서 성폭행을 강요할 경우 그것이 성폭행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심한 경우, 남성목회자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그냥 남자가 아니라 ‘목사님’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어떤 목회자는 모세가 구스 여인을 선택한 것 같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면서 세 명의 여신도를 자신의 아파트로 불러 성행위를 하고 안마를 요구했다.(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도 바쳐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피해자인 여신도는 그 상황이 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성폭행을 당했고, 자신의 신학적 체계 안에서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목회자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라이즈업 대표직을 했던 목사의 이야기나 성폭행 양상을 살펴보면, 여성들에게 성폭행을 가하면서도 그 폭력을 ‘목사’이자 권력을 가진 이로서 약자인 여성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로 포장을 하거나 협박을 하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혹은 그러한 목사(교수)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신앙이 좋은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면서 감행하였다.이렇듯이 교회 내에서는 남성 대 여성의 이분법적 구조에 덧붙여서 목사와 평신도라고 하는 권력의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구조가 있다. 사회에서의 여성보다 교회내의 여성들은 더 중첩된 이중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있는 셈이다.2) 교회 내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정형화’된 성역할교회에서 바람직한 여성신도의 모습으로 제시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이 존재하는 데, 그러한 모습에 대한 내면화가 정작 여신도들이 목회자로부터 성적 폭력을 당했을 때에도 그것을 부당하다거나, 저항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이상적인 여성상의 모습은 봉사하고 남성에게 순종하는 여성들의 모습이다. 따라서 목회자가 무엇을 요구하든 –심지어 성폭력을 행사할지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저항하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대처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두 번째 여성상은 자신의 고난을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는 여성상이다. 성폭행을 당하고서도 자신이 감내하고 목회자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 목회자를 고소하지 않겠다고 하는 대응을 하게 되는 것도 여성은 고난을 감수해야 하며, 그것이 여성의 신앙적 미덕이라고 교육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제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도 우리교회 목사님이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존경받고 쓰임 받는 목사님이니까 치유되시길 기도해드릴 뿐 제가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그 다음으로 우리가 문제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여성은 유혹적이고, 남성보다 본능적이며 악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상이다. 창조설화에서부터 하와는 뱀에게 유혹을 당해서 아담까지 타락시키게 만든 원인으로 투영되어서 비추어졌다. 사마리아 여인이나 막달라 마리아도 성서에서는 유혹적이고 부정적이고 죄가 많은 여성으로 해석되어왔다. 실제로, J목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여신도를(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음성파일을 공개하였다) 일부러 그 목사를 유혹해서 넘어뜨리려고 녹음기까지 준비한 신천지 교인이라고까지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3) 남성성과 신성함- 하나님의 대리자, 남성 목사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서는 많은 경우, 여성의 종속과 순종을 강요하기 위해 읽혀져 왔다. 성서적 인간이해가 남성의 경험이나 관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성서의 주요 이야기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남성들이고, 여성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남성의 관점에서 읽혀진 여성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의 여성들은 ‘여성은 남성보다 못하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다’ 혹은 ‘여성은 자손을 낳기 위한 성적 도구이다’ 등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 왕의 아내로 삼게 하는 이야기(창 12장), 롯이 소돔 시민들로부터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배에게 자기 딸을 겁탈하도록 내어 놓은 이야기(창 19장), 레위인의 첩이야기 –남편으로부터 방치되어 베냐민 사람들에게 겁탈당하고 문밖에서 비참하게 죽는다(삿19장).– 혹은 입다가 전쟁에서 돌아와 처음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고서 그 서원대로 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의 대를 잇게 한다고 자매가 아버지의 침소에 드는 이야기 등등 여성에 대한 기본적인 인권조차 존중되지 않은 이야기가 성서에는 너무도 많이 등장한다. 또한 이러한 성서의 여성이해는 피해자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성폭력의 경험을 바르게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마비시킨다. 많은 경우,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성서를 읽으면서 그 속에서 답을 찾기 보다는 더 좌절하거나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여성의 성폭력 경험에서 문제시 되는 신학적 메시지 중에는 기독교 전통 속에서 오랫동안 내면화되어 온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들 수가 있다. 기독교 교육 속에 익숙해있던 여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나 남편, 혹은 남성 목회자와 더 쉽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많다. 따라서 성폭력 상황에서도 여성은 하나님이 남편이나 남성 목회자의 편에 서서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신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남성 이미지는 피해자 여성들에게 묘한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성폭력 피해를 받은 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신앙이 부족하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주신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것과 남성목회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생각은 목회자의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 목회자가 평신도에게 줄 수 있는 수혜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목회자를 범죄자로 인식하지 않게 만든다.성폭력으로 기소된 어느 목회자의 경우도 피해자인 20대 여성이 “그 동안 목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하게끔 훈련을 받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목사님이 대신한다고 믿었다(보이는 목사님을 하나님처럼 믿고 섬겼다).”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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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
    2018-05-10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5
    요한은 본문을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이야기라고 명시하고 있다(14).이 사건 이전에 예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20:19). 8일 후 예수께서는 두 번째 도마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못자국난 손과 구멍 뚫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그가 확실히 죽은 후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 시켜 주셨다. 8일 후에 다시 나타나신 것은 안식 후 첫 날에 나타나심이 결코 예수께서 잠간 기절했다거나 잠간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확증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 20:20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내보신 것처럼 제자들을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세상에 내보내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21절에서는 이들에게 숨을 내쉰 후,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신다.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할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숨을 제자들을 향하여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동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리고 그는 이것을 말씀하시며 숨을 쉬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으라.’”숨을 쉬셨다는 뜻의 “에네푸세센”(ε’νεφυ、σησεν)은 과거부정형(Aorist) 형이다. 이미 숨 쉬는 동작이 끝났다. 분사형으로 “(성령을) 받으라”(람배태, λα、βετε)는 말을 수식하지 않는다. “이것을 말씀하시며”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앞 절의 사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내보낸다는 것을 이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때는 “말씀하신다”(λε、γει)라는 말은 현재형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마치 숨을 내 쉬신 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 일로 번역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서양의 대부분의 역본이나 한글 역본들은 숨을 내시며 동시에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하신 것처럼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선입견을 가지고 본문을 대하는 주의깊지 못한 번역들이다.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마태복음(28:16-20)과 사도행전(1:1-2:4)에서는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첫 번째 성령세례이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두 번째 성령 세례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복음서 저자들은 같은 사건을 각각 다른 시각과 강조점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의 이 기록을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염두에 둔 예비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공관 복음이나 요한복음이 다같이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기원하고, 이들을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내 보내시며, 이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임을 확증하고 인치는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이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세례의 사건을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고 있다. 요한의 강조점은 낙향한 제자들을 찾아가시어 아침밥을 먹이는 사건에 두고 있는 것 같다.이제 21장에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마지막 부탁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낙향하여 옛 사람, 어부들이 되어 버렸다. 이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는 나름대로 꿈이 있었고, 소망이 있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 그때에는 자기들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그들의 인생을 올인한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마치 왕이 대관식을 하기 위하여 입성하는 걸로 생각하고 그들의 옷을 벗어 양탄자를 대신하며 호산나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어 버렸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모든 꿈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들에게 부할하신 예수께서 주신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라는 선지자적 사명은 그들의 낙향과 함께 그들의 마음을 떠나고 없었다. 그들은 실망과 좌절을 안고 이제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다.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잡힌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3년 전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밤과 마찬가지로 빈 그물이었다. 날이 밝아 오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신 예수께서 이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애들아 너희들에게 물고기가 하나도 없느냐?”고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얘들아!”하고 부르신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부르고, 선생님이 그의 학생들을 부르듯이 정감어린 어투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애들아 좀 고기를 잡았느냐?”하고 부르시지 않고 “애들아 너희에게 물고기가 하나도 없느냐?”하고 부정적으로 물으신다. 아마도 “아니요”라는 대답보다는 “예”라는 대답을 더 원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얘들아” 하고 불렀을 때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음즉도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내리라고 했을 때도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다. 고기를 잡아 돌아와야 할 아침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더구나 조그마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든 왼쪽에 내리든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생각이 있는 어부라면 이 말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대하여 한마디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정체불명의 그 사람의 말대로 그물을 내리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따질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 고기 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절실한 문제였지 않나 생각된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리라고는 전혀 그들의 의식 속에 없는 것 같다. 예수께서 보실 때 이 제자들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살 길을 찾아간 한심스러운 자들이었다. 베드로는 이미 대제사장의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그의 선생을 모른다고 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둘 때에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제자 중 제일 먼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발걸음을 갈릴리로 옮긴 사람이었다. 이들은 배신자들이다. 어쩌면 가룟 유다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들을 찾아 오셨다. 이때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예수라는 분이 지워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 배신자들을 찾아오시어 추위에 떨고 있을 제자들이 몸을 녹이도록 불을 피우고, 아침 식사를 마련하여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내게 어땋게 이럴 수 있어?”하며 한 마디라도 섭섭한 마음의 표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이런 배은망덕한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고기를 잡도록 도와주시고, 아침상을 마련하신 것이다. 책망이나 원망은커녕 오히려 이들의 상실한 마음을 위로하시는 것이다.요한은 성만찬 기사를 기술하며,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 13:1)라고 시작하고, 자기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자기 곁을 떠나는 유다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조각을 떼어 주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예수께서 이제는 자기를 버리고 제 갈 길을 간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다시 밥상을 차리고 제자들을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컷 찍은 것이다.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하기 힘든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리들의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중심적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동물적인 사랑은 세리들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마5:46). 구약성경의 “헤세드”(דסח)는 변함없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사랑하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랑도 같은 “헤세드”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밥상을 차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선지자적 사명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위하여 조반을 차리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4-26
  • 기획기사 / 성서총회, ‘4월 17일 예수 부활절’ 기념예배 드리다
    ‘부활주일’은 춘분 후 첫 만월 지난 주일로… ‘부활절’은 4월 17일로 해야 맞아 예장성서총회(총회장 김노아 목사)는 지난 4월 17일 서울 솔밭로 28 세광중앙교회에서 “예수 부활의 날 특별 대성회”를 가졌다. 이날 부할절 기념성회는 김영환 목사의 사회와 총회총무 송재량 목사의 총회약력 보고, 조영구 목사의 축사, 유재일 목사의 고난주간 메시야 행적, 모상금 목사의 유다 절기 낭독, 신승도 목사의 대표기도, 총회장 김노아 목사의 말씀선포로 진행됐다. 김 목사는 ‘예수 부활의 실상’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부활체는 곧 영광의 빛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라며, “영안이 열리지 않은 육신의 눈으로는 부활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의 무덤에 가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지만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알지 못했다(요 20:9). 부활 예수가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부활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았다(요 20:14).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자 그 목소리는 알아보고 ‘랍오니’여 하고 달려들었다. 그때 부활 주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알리라’고 했다. 따라서 부활체는 현재의 육체의 모양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김 목사는 “병고침 받고, 떡 얻어 먹으며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만 본 자는 다 도망갔으나, 영안이 열려 부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증인이 되어 세상을 바꾸었다”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따라, 흔들리지 말고 주의 영이 향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에 굳게 서라”고 당부했다. 부활절과 부활주일의 유래초대교회는 부활절을 파스카(passcha)라고 불렀는데, 이는 구약의 유월절을 뜻하는 ‘페사흐’(passover)에서 나온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으로 우리를 위해 구속 희생을 당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이 파스카 축제는 주후 4세기 경에는 부활절 일요일이란 의미를 갖게 되었고, 거룩한 절기 구속의 파스카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이 축제는 지방의 교회마다 조금씩 그 날짜와 내용이 달랐다. 소아시아 교회와 이집트 교회 그리고 로마의 어떤 교회는 니산월 14일로 지키고, 또 다른 교회들은 그 주간의 일요일에 지켰다. 그러자 부활절을 통일시키자는 제안이 제기되어 주후 325년 최초의 세계기독교공의회인 니케아회의에서 부활주일을 “춘분 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통일한 것이 오늘날 부활주일이다. 즉 어떤 특정 날짜를 기념하는 ‘부활절’은 사라지고, 주일을 중심한 ‘부활주일’로 지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춘분은 태양력으로 항상 3월 21일에 있게 되므로 부활주일은 3월 22일보다 빠를 수 없고, 4월 25일보다 늦을 수 없다는 원칙이 적용되어 부활주일은 해마다 그 날짜가 다르게 되었다.“성경을 기준하지 않는 부활주일은 비성경적이다”이에 대해 김 목사는 성경을 기준하지 않고 춘분을 기준한 부활주일은 비성경적이라며, 4월 17일을 성경적 부활절로 지킨다. 김 목사는 첫째 춘분은 성경과 상관이 없는 절기이고, 둘째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의 제2 탄생일과 같은 부활절을 해마다 다른 날짜에 지키는 것은 이치와 도리에 맞지 않으며, 셋째는 부활하신 날이 들어있는 주일로 부활주일을 지켜야 하는데, 대부분 부활하신 날이 들어 있지 않은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게 되며, 넷째는 천하의 모든 기념일은 날짜로 지키고 있는데 부활절만 요일로 지키는 것은 모순이고, 다섯째는 쌍춘절이 돌아오는 해는 1년에 두 번 부활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된다며 춘분을 기준으로 한 부활주일 계산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성경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고(마 16:21, 20:19, 27:63, 막 8:31, 9:31, 10:34, 눅 9:22, 18:33, 요 2:19-22), 그리고 유월절에 운명하셨다(마 26:2, 막 14:1-2, 14:12-16, 눅 22:7-13, 고전 5:7). 예수님은 유월절 첫날 만찬을 하셨고(눅22:14-23), 그날 밤에 가룟 유다를 앞세운 악당들에게 붙잡히셨으며(눅 22: 47-53),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았고(눅 22:54-62), 그 다음날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심문을 받았으며(눅 66-41), 다시 빌라도의 법정을 거쳐 십자가에 운명하신 것이다(눅 23장). 그리고 예수님은 운명하신 날로부터 제삼일(사흘만)에 부활하셨다(눅 24장). 그러므로 유월절이 시작되는 유태력 1월 14일(태양력 4월 14일) 저녁 때에 붙잡히시고, 다음날 15일에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셨으며, 사흘째 되는 17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것이다.김 목사는 “이렇듯 명백하게 예수님의 부활의 날짜가 성경에 밝히 드러나 있는데, 세계교회가 굳이 춘분을 기준으로 한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성경대로 “한국교회가 4월 17일을 부활절로 지키는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성서총회는 주후 325년 니케아회의가 결정한 춘분 후 첫 만월 다음 일요일을 ‘부활주일’로 지키는 것과는 달리 예수의 부활이 유태력 3790년 아빕월(니산월) 16일로서 양력 4월 17일임을 확정하고 그 날을 기념하는 특별성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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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2018-04-26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⑧ ‘평신도’라는 용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용하고 있는 ‘평신도’라는 용어가 과연 성경적이며 우리들이 그대로 사용해도 좋은 용어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때가 되었다.문제의 탐색만인제사장론을 주창한 기독교회가 계급주의적 사고와 표현들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통용화 되고 있는 ‘평신도’라는 단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어느 목사가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내고 제자훈련을 시작하여 폭발적 호응을 받았다. 그 여파는 아니어도 이 용어가 한국교회의 계급주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평신도’라는 용어는 성직자가 아닌 일반교인을 의미하는데 그러면 성직자는 ‘고(등)신도’나 ‘특(별)신도’인가? 그런데 근래에 와서 계급이 세분화 되어 ‘중직자’라는 단어가 생겼다. 목사는 성직자, 장로·안수집사·권사 등은 중직자, 서리집사와 일반 교인들은 평신도라는 3계급이 된 것이다. 앞으로 이것이 더 세분화될까 염려된다. 장교도 위관, 영관, 장군으로 나누어지듯이 성직자도 이렇게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까?사례의 탐구의식있는 목사들 가운데 이런 용어의 사용을 바꾸자고 하는 이들이 많다. 그 중 부산 제2영도교회 신인범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신 목사는 개혁신학을 파수하고 실천하는 현장사역자이다.김남식(이하 김):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교회 용어 중에 성경적이 아닌 것이 많다. 그 중 하나가 ‘평신도’라는 용어이다. 이 어휘의 유래가 무엇인가?신인범(이하 신): ‘평신도’라는 어휘의 유래로 영어 단어 ‘Laity’는 ‘평신도’를 뜻하는 말인데, 헬라어인 라이코스(laikos)로 라오스(laos)에서 파생된 말이다. 즉 ‘일반백성’을 의미한다.김: 교회사적 측면에서 이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가?신: ‘평신도’라는 말은 주후 2세기 경 클레멘스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때 처음으로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과 구별되고 직분 없는 자들을 ‘평신도’로 불렀다고 한다. 그 이후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성직자와 평신도’의 혼인에 대하여 언급하는 부분에서 사제와 대조시켜 ‘평신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로마 가톨릭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김춘근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평신도 제도는 계급구조가 분명한 천주교에서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 직위를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성직자 그리고 평신도로 나눈다. 또한 1950년대 가톨릭 신학자 핸드릭 그래머, 반 룰러, 이반 콩가르가 평신도 신학을 주창해 ‘평신도 개념’을 고착화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김: 그러면 ‘평신도’라는 용어가 성경에 나와 있는가?신: 평신도란 용어는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평신도’의 어원인 라오스(laos)는 일반교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로 ‘백성 전부 혹은 교회공동체 전체’를 뜻하는 말이다. ‘라이코스’ 혹은 ‘라오스’라는 말은 사도행전 4장 10절에서 처음에는 이방인과 대조되는 구약백성으로, 그 후에는 사도행전 15장 14절에서 예수를 믿는 이방인을 포함한 새 이스라엘, 즉 신약교회를 가리키는데 사용됐다.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 용어는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김: 기독교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이 용어가 주는 문제점은 무엇인가?신: 교회를 계급으로 전제해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개념으로 사용됐다. 교회는 직분이 있을 뿐이지, 상하계급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공동체의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섬기는 한 지체, 한 형제 자매이다. 주안에서 서로 돕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이분법으로 교회공동체의 조직을 구분하는 것은 교회의 참모습을 훼손하는 것이다.김: 그러면 성경에서 ‘평신도’라는 용어 대신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는가?신: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성도’(61회)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마 27:52).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행 9:41). 이외에도 수많은 성경에서 ‘성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을 지칭할 때는 ‘평신도’보다는 ‘성도’라는 용어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김: 우리는 사제와 신도로 구분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에서 벗어나 개혁자들이 주장한 만인제사장설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를 계급화 하고 있는데,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신: 모든 성도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사제로서의 중재자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모두가 만인제사장(벧전 2:9)이 되기 때문이다.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해 볼 때에 기능상으로는 교역자와 성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계급상의 구분이 아니기에 굳이 ‘평신도 용어를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김: 용어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우리의 사상을 표출한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여야 할까?신: ‘평신도’란 말 자체는 성직자라는 개념과 구분을 지으려는 의도에서 생긴 말이고, 또한 구교의 잔재이고, 권위의 산물로 변질된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평신도’ 대신에 ‘성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지 않을까?기본에의 복귀언어는 사상의 표현이다. 교회를 계급주의의 틀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하고, 이것이 더 세분화되어 가는 우리의 현실에서 ‘성경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중 성경적이 아닌 것을 고쳐야 한다.‘평신도’라는 용어를 ‘성도’로 바꾸어 사용하자. 이것은 성경적 신앙을 추구하는 기본이다. 교회는 계급이 아니라 직분이 있을 뿐이다. ‘성도’들은 각자의 직분에 충성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4-25
  • ■ 학술/ ‘한국교회 지난 시대의 선교와 통계, 앞으로의 전망’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4월 13일 성락성결교회에서 개최한 4월 월례회 ‘한국교회 선교의 현황과 방향’ 중 한정국 선교사가 발제한 ‘한국교회 지난 시대의 선교와 통계, 앞으로의 전망’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건이 또 있을까?”할 정도로 한국선교는 지난 38년간 엄청난 발전을 해왔다. 1980년 우리나라에서 파송된 선교사 수가 100명을 겨우 넘었었는데, 38년이 지난 2017년 말 27,436명이 되어 275배의 증가를 기록하였다. 1980년 초에 100명이 1990년에 1,000명을 넘어 2000년에는 11,000명 그리고 2010년에 22,000명으로 거침없이 증가하였다. 한국교회는 세계 모든 나라 교회에 비하여 선교에 열린 교회로서, AD 1913년에 첫 해외선교사 박태로 목사를 중국 산동성에 파송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급증한 한국 선교사는 양적으로 미국 다음으로 많으나, 교회수/교인수에 비교하면 세계 제일이다. 이것은 랄프 윈터 박사가 소천 2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필자에게 한 말이다. 필자는 세계 많은 나라 교회를 방문하여 선교하는 교회를 많이 관찰해왔다. 그러나 한국교회만큼 선교에 열심이고, 선교사에게 너그러운 교회를 본 적이 없다. 그런 한국교회가 지난 15년간 깊은 몸살을 앓으면서 신음하고 있다. Ⅰ. 한국교회와 한국선교 한국선교의 모판은 한국교회이며, 한국선교는 한국교회와 너무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간 은혜로 받아 오기만 했던 한국선교계가 한국교회에 보답을 할 때가 왔다. 저는 한국선교계가 한국교회를 위해 다음과 같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1. 선교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 성장을 새롭게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GP선교회 이사이며, 중국선교사 출신인 김대영 목사는 “한국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한국목회자들에게 제공하면 목회에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2. 한국교회는 Reformed Theology(종교개혁 신학)에 너무 함몰되어 있다.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다른 교단과 다른 지도자를 자신의 개혁 잣대로 쉽게 정죄하고, 이것은 SNS를 통해 세상에 널리 퍼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 내에 큰 문제가 난 줄 알고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AD 1517년 당시 모든 유럽 사람이 예수를 부르는 시대에는 썩어빠진 교계를 향해 종교개혁이 필요했다. 그 때는 유럽에 이교도가 없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수의 이교도에 한국교회가 둘러싸였는데, 소수의 한국교회가 서로 옳다며 상대를 정죄하기에 바쁘다. 물론 교회는 계속 개혁(갱신)할 필요가 있다. 저는 요즘에는 개혁보다 변혁이 더 필요한 시대적 상황이라고 본다. 그래서 Transforming Theology (변혁 신학)가 더 연구되고 실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교회가 단합하여 세상을 더 변화시켜야 할 때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민족사의 수많은 위기 속에서 한국사회를 변혁시킨 역동적 교회였다. 그러나 급속한 교회 성장 후 이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관심보다 내부 문제 제기에 너무 힘을 쏟고 있다. 너무 지나친 이단 논쟁으로 풍비박산되는 한국교회가 너무도 안타깝다. 3. 한 국가의 기독교는 생성, 발전, 부흥 그리고 쇠퇴기를 경험하는 사이클이 대체로 존재한다. 유럽과 미국을 바라봐도 그렇다. 한국교회는 100년이 지난 1985년에 좀 더 심각한 한국교회 미래에 대한 고민을 했어야 했다. 더불어 급속한 교회성장은 급속한 교회 쇠퇴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고 미리 대비를 했어야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도취해 그만 실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반전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본다. 교회사에서도 부흥이 오는 새로운 반전의 경우가 있기도 하다. 1960년대 미국사회의 혼란과 교회의 대처 미흡에 새롭게 나타난 아주사와 애즈버리 대학교의 부흥 그리고 Jesus People Movement가 그 일례일 것이다. 그리고 마틴 킹 목사의 열매를 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사회는 흑인 인권운동의 신장 그리고 교회는 선교의 괄목할 만한 지도력으로 세계선교계를 리드하게 되었다.Ⅱ. 한국 선교계의 자구책 노력 한국선교는 현재 약 28,000 명의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당분간 이 추세는 계속 되겠으나 우리는 다음의 노력으로 미래를 대비하고 개척하여야겠다. 1. 이제 질적 성숙에 더 강조를 양적성장을 배제할 순 없으나 질적 성숙을 가속화 시켜야 한국선교의 미래가 보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매년 KWMA 총회에 발표되는 양적 통계를 지양하고, 질적인 성숙 상황을 보고하는 식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2. 자신학과 자선교학을 개발하여야한국교회는 그간 서구 기독교를 모방 추적 성장해왔고 상당한 효과도 보았다. 그러나 그런 추세로 달리다 보니 서구 기독교의 쇠퇴요인도 수입하여 적용하는 우도 범하고 함께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건전한 자신학과 자선교학이 없거나 부족함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선교계는 선교학 관점에서 본 자신학으로서의 한국 신학과 자선교학으로서의 한국 선교학을 정립하여 한국교회에 이바지해야 한다.3. RCOWE (Regional Consultation on World Evangelization; 지역별 선교 전략회의)세계와 한국선교계는 지난 30년간 주로 한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회의 포멧을 보여 왔으나, 그러나 이제는 한국선교계가 선교지역을 18개 권역으로 전략적으로 분류, 현지로 찾아가 선교전략을 토론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것은 특정 해에 하는 것이 아닌 상시적으로 필요에 따라 개최함이 좋은 것으로 사료 되며, 일본선교 Network가 좋은 선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의 최초 타문화권 선교사 박태로 목사가 중국 산동성에 도착한 100년을 기점으로 2013년 5월 6일부터 RCOWE를 가동하게 되었다. 4. 창조적 선교 시스템을 개척서구에는 은퇴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한국선교계는 10년 전 한국선교지도자포럼에서 Memorandum형식이지만 은퇴 없이 선교지에서 일하는 한국선교의 창조적 시스템을 결의한 바 있다. 그리고 각 선교지에서 한국형 양화진 묘를 마련하자고도 하였다. 안식년도 본국사역으로 대체하여 시도하자는 것도 한국선교계는 15년 전 연구와 토론을 거쳐 본국 지도자의 동의를 통해 결의한 바 있다. 선교사는 본국사역시 선교지에서 얻은 새로운 인사이트를 한국목회자들과 공유하고, 목회의 더 깊은 차원을 한국 목사님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Ⅲ. 결어한국교회는 한국선교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선교계가 방황하는 한국교회를 위해 새로운 길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 모든 한국교회 통계가 암울한 이때 한국선교가 계속 발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한국교회의 기도와 물질 지원 덕분이다. 이제 한국선교는 서구 주도 선교시대에서 2/3세계 주도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새로운 향도의 구실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서구선교의 면류관이고 멋진 열매이다. 비록 최근에 많은 시름에 쌍여 있지만, 한국 개신교 133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행전은 우리에게 21세기 선교의 큰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서구 중심의 선교에서 비서구 선교가 괄목할 만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이때에 한국선교는 서구선교의 자랑이자 비서구선교계의 좋은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다. 또한 한국선교가 한국교회의 현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마지막 등불로서 기여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서구교회와 비서구교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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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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