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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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축도’로 예배를 마친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생활에서 일상화된 표현이다. 그러나 ‘성도’(평신도가 아님) 들이 혼란할 때가 있다. 축도를 할때, 어떤 교회에서는 ‘있을지어다’라고 하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한다.
모두들 성경적 배경을 가지고 교단마다 그들의 연구에 따라 결정된 것인 줄 알지만 어느 것이 맞느냐라는 의문을 제가할 수도 있다.

문제의 탐색
옛날에는 사용하는 찬송가에 따라 소속 교단을 분간할 수 있었다. ‘새찬송가’를 사용하면 장로교 합동이나 고신측으로 이해하였는데, 지금은 찬송가가 하나가 되었으니 축도로 구분할 지경이다.
고린도후서 13:13대로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한 교단은 합동, 고신, 개혁, 대신 등 이른바 보수교단들이다. 그러니 축도의 형태로 교단의 색깔을 구분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례의 탐구
옳고 틀리고를 따지기 보다 어느 것이 성경적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있는 목포재건교회 정낙준 목사에게서 들어본다.
김남식(이하 김): 교회예배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도의 근거가 성경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정낙준(이하 정): 목사들이 축도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구절은 두 가지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주 여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고후 13:13).
이 두 가지 축도(강복선언) 가운데 고린도후서 13장을 많이 사용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인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은 로마 가톨릭이 사용해온 바울의 축도보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아론의 축도(민 6:25-26)를 더 많이 사용했다.
김: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축도가 기도인가? 복의 선언인가? 라는 문제이다. 여기에 따라 축도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는데 그 근거를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 축도(benediction)의 문자적인 의미는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다. 이 말의 핵심은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만일 축도를 ‘복의 선언’이 아닌 기도로 받아들이면 ‘축원하옵나이다’. ‘~을 원합니다’로 하게 된다. 하지만 제사장의 축도(민 6:24-25)를 보면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백성에게 사용한 말씀에서 ‘~을 원하노라’를 3번 사용했다. 이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내려주시는 복을 제사장이 선언하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고린도후서 3장 13절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씀도 사도적인 축도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로 끝나지만, 이 축복의 내용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상대에게 명령하는 내용을 장엄한 태도로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두 성경구절은 ‘마땅히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선포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축도를 복의 선언임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축도를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봉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축도를 기도가 아닌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김: 그러면 우리 교회들이 가장 성경적인 축도를 시행하여야 하는 신학자들의 바른 해석과 각 교단에서 바른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었으면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정: 축도는 목사가 하나님께 성도의 복을 빌어주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선포이고 선언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축도를 할 때 복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이루어 질 것에 대해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 13절로 축도할 때 종결어미를 ‘축원하옵나이다’ ,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등 기도형식으로 표현하기보다 복의 선언인 ‘있을지어다’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김: 우리가 ‘축도’라고 하면 그 글자에 ‘기도’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에 ‘복을 비는 기도’로 이해하기 쉽다. 성경적 원리에 따른 바른 표현이 필요한데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겠는가?
정: 축도는 한자로 ‘祝禱’이다. 축복기도의 불임말로 사용한다. 한자로 보면 축도는 복을 빌어주는 기도이다. 복을 빌어 주는 기도로 사용할 때는 축복(祝禱)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럼 문법상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축도는 기도가 아니라 ‘복의 선언’, ‘복의 선포’라고 했기 때문에 축도의 종결을 ‘~있을지어다’로 해야 하는 것이다.
축도에 대한 문자적 의미와 본질적 의미가 서로 상충되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들마다 주보에 표기할 때는 ‘복을 비는 기도’의 의미를 가진 축도로 표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용어 개념을 목사 개인이 정리해서 사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총회적 차원에서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총회적으로 개념을 정리해주면 목사들이 ‘복의 선언’이나 ‘복의 선포’로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에의 회귀
이 문제는 교단의 문제인 동시에 목사 개인의 신학적 또는 신앙적 자세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교회에서 축도의 성격이 ‘복의 선언’인지 ‘기도’인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강단의 혼돈이 우리 신앙생활의 혼돈으로 이어질까 염려된다.
기독교TV 방송들을 통해 많은 교회의 예배들이 방영되고 있다. 보수교단에 속한 어느 목사는 설교 때에 ‘새번역’ 성경을 사용하거나 다른 번역본을 텍스트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본문을 비교 강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옳은 것일까? 인기를 위한 ‘튀는 행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배 용어의 정비가 필요하다.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로 시작하고 ‘축도’로 마치는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
그래서 주보에 ‘복을 비는 기도’라는 의미를 가진 ‘축도’라는 표현을 하지 말고 ‘복의 선언’ 또는 ‘복의 선포’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예배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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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⑩ 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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