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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드베르그 변주곡’에 엉킨 이야기
    “연주하다”는 영어로는 play, 프랑스어로는 jouer, 독일어로는 spielen.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희(遊戱)”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 음악이란 놀이로 즐기거나, 그에 따라붙는 재밋거리들도 푸대접해서는 아니된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J. S.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그렇게 이름 붙여 부르게 된 사연이 있다. “골드베르그”란 바흐에게서 크라비아를 배우고 있던 재능 있는 젊은이 “요한 고트리브 골드베르그(1727-1756)”의 이름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것. 바흐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던 카이저링크 백작은 자주 라이프치히에 머물곤 했는데, 골드베르그로 하여금 바흐에게서 크라비아를 공부하게 한 것도 백작이었고, 소년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백작이 잠들때까지 연주하곤 했다. 백작이 바흐에게 숙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크라비아곡을 써달라는 부탁을 한다. 카이저링크 백작의 요청을 따라 바흐가 남긴 단 하나의 변주곡이야말로 오늘 날 모든 음악애호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바로 그 유명한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된 것이다. 백작은 이 변주곡을 “나의 변주곡”이라며 애지중지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언제나 ”골드베르그야, 나의 변주곡을 한곡 연주해주게나.”했다는 것이다. 백작이 바흐에게 준 보수도 화제가 되고 있다. 루이 금화를 100개나 담은 금 술잔을 바흐에게 선물했다나. 아마도 바흐가 받은 작곡보수 가운데는 최고였을 것으로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다. 이야기는 처음 바흐의 전기를 쓴 요한 니코라우스 포르게르의 <바흐전기>에 있는 이야기이지만, 연구가들 중에는 이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연대를 계산해보면 당시 골드베르그의 나이가 열 너덧 살 밖에 되지 않았을 터인데 그 서툰 연주로 감히 백작을 만족하게 할 수 있었을까보냐 하는 것이 설득력을 지닌 이유 중의 하나. 그럼에도 이 에피소드가 호사가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이야기가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풍기는 풍경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설사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흐의 작품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그런 사실과는 관계없이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달고 다니는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떼어내거나 버리려 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우리 또래 친구들이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말할 때면 안주처럼 따라다니는 에피소드가 있다. 곧 아흔을 바라보게 되는 세대가 서양고전음악에 눈뜨기 시작했을 무렵, 그러니까 대학생이었던 1950년대만 해도 음반을 통해서조차 고전음악을 접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막 문을 연 인사동의 “르네상스”는 그래서 강의를 빼먹으면서도 죽치고 앉아있는 곳이 되어 줬지만, 그런다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한 번에 감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따금 DJ노릇을 하고 있던 천상병시인이나 훗날의 칼럼니스트 이규태에게 공갈을 치다 시피 해서야 얻어 들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침 이른 시간에. 그런 날이면 막걸리 잔을 둘러싸고 누구랄 것 없이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공감 correspondence>를 읊곤 했다. “자연은 사원, 그 살아 있는 기둥들/때로 어렴풋한 말들이 새어나오고/사람은 친밀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간다./...”최근에는 피아니스트 주 샤오메이(Zhu Xiao-mei)가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중국 상해 태생인 그녀는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여덟 살에 라디오나 TV에서 연주한다. 북경 중앙음악학원에 재학 중 문화혁명이 터져 5년간 몽골의 재교육수용소에서 지나게 되지만, 그녀는 피아노를 버리지 않았다. 1980년에는 미국에서 1984년에는 파리에서 훈련과 연주를 지속한다. 그녀로 하여금 세계의 주목을 끌게 한 것이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연주 녹음판이었다. 그녀는 베스트셀러 <영원한 피아노>라는 자전에서도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따라 30장으로 꾸며 화제가 되고 있다. 음악은 음악으로만 즐겨야한다는 순수파의 주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보들레르가 <공감>에서 말하듯 “어둠처럼 빛처럼 드넓고/어두우면서도 그윽한 통일 속에서/긴 메아리 멀리서 섞이어 들 듯/색과 향과 소리가 서로 화답...”해오는 풍경들인들 어찌 함부로 대접할 수 있을까. 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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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8
  •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곱다” 맥베스 다시 읽기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의 비극들 중에서 가장 짧은 작품.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 분량이 대략 3분의 2 밖에 되지 않는다. 또 셰익스피어는 끝내 <맥베스>가 책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사가들의 추측은 그럴 듯한 것들만 해도 꽤 많다. 설득력이 있는 것을 고르라면 검열당국의 삭제 설을 들고 싶다. 당시에도, 아니 당시에는, 상연하기 전에 텍스트를 당국에 제출해서 검열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맥베스>는 그 때에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는 설 말이다. <맥베스>의 무대는 11세기의 스코틀랜드.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말하고 싶어 한 것은 11세기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16세기 잉글랜드였으니. 헨리 8세에서 이어지는 잉글랜드의 공포정치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그리고 싶었으리라. 혹은 가톨릭신자로서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사회를 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작자의 불만도 내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무대에서 국왕을 살해하는 따위의 연기는 할 수 없었기에, 노련한 셰익스피어는 맥베스가 국왕을 살해하는 장면을 무대에 올려놓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관객들로 하여금 칼을 들어 왕을 살해하는 잔혹한 장면을 보는 것 보다 더 짜릿한 스릴을 맛보게 한다. 왕을 살해하기 전과 후에 주인공 맥베스를 휘어잡고 있는 공포감을 과장하는 연출로 법규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관중으로 하여금 그 이상의 긴박감과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왕을 죽인 맥베스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하는 연기를 통해서는 관중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심정을 공감하게도 한다. 이후 맥베스는 여러 차례 살인을 저지른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맥베스> 이전에도 주인공이 살인하는 장면이 적잖이 연출되고 있다. 햄릿은 덴마크 왕 클로디어스를 죽였고,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맥베스의 살인은 그들의 살인과 질적으로 다르다. 햄릿은 아버지의 복수라는 정서적 정당성을 내비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살인은 의도된 것이기 보다는 검술시합을 이용해서 자신을 살해하려드는 음모가 뒤집혀서 발생한 우발적 살인이었다. 또 오셀로가 아내를 살해한 것은 한 사나이의 질투가 낳은 결과였다. 그러나 맥베스가 덩컨 왕을 살해한 것은 누가 봐도 계획적인 범죄일 뿐만 아니라 반역행위이다.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을 부른다 했던가. 이어지는 뱅코와 맥더프 부인, 그리고 그 아들들이 살해된 책임은 전적으로 맥베스의 몫이다. 그럼에도 <맥베스>의 관객들은 주인공 맥베스를 동정하게 된다. <맥베스>는 마녀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관객들이 등장인물의 비극적인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나 알고 보면 악마의 예언은 악마다운 궤변에 불과하다.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곱다.”(1막 1장)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내뱉은 악마의 암시는 충신 맥베스로 하여금 너무나 쉽게 역적으로 돌아서게 한다. “고운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곱다”니. “모순어법(oxymoron) “은 그리스어 oxys(날카롭다)와 mōros(어리석다)를 합성한 단어로 양립할 수 없는 말을 이어붙이는 수사법을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여러 곳에서 모순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맥베스의 첫 번째 대사도 모순어법. “이렇게 더러우면서도 고운 날을 본적이 없다.” 어쩌면 “오늘은 날씨가 거친 날이긴 하지만 전투에 이긴 좋은 날이다.” 하는 뜻으로 한 말일까? 처음에는 그냥 말장난 같던 모순어법이 차차 비극으로 발전한다. 연극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움직이는 숲”이 현실화 되는가 하면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는 사나이”가 주인공의 앞을 가로막는다. 결국 악마의 암시는 맥베스를 끝없는 나락으로 몰고 간다. 맥베스는 울부짖는다. “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한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같은 소음, 광기로 가득하나 전혀 의미는 없다. “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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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1-17
  • ‘황야의 이리’와 ‘한 켤레의 신발’
    <황야의 이리>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고, <한 켤레의 신발>은 반 고호의 그림.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두 작품이 겹쳐지는 환상을 맛본 것이다. 나이 탓인가 생각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이름 지어 준 주인공 하리 할러(Harry Haller)는 사색하는 인간으로 객관적 시야와 풍부한 식견을 갖춘 인물. 그런 그에게는 이리의 성질도 도사리고 있었다. 알고 지내던 한 교수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벽에 걸려 있는 괴테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존경하고 있는 괴테와는 전혀 달리 속물적인 초상이었다. 식사 중에 나눈 대화도 그랬다. 교수가 한 저널리스트의 논문을 두고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반전사상은 조국에 대한 반역이라고 몰아세웠다. 비위를 맞추던 할라가 마침내 이리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 글을 쓴 것은 자신이라고 내뱉고 자리를 나와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자신이 싫어진 할러는 자살을 생각한다. 밤늦도록 거리를 떠돌던 할러가 술집에서 아름다운 창부 헤르미네와 만나게 된다. 그녀의 권에 따라 댄스를 배우게 되고 여자 친구도 소개받는다. 헤르미네가 말한다. 인간은 정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야 한다고. 그것은 이리의 성질을 버리고 시민적 성질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소개해준 친구 파블로는 현실 세계에서 진실한 나라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요하다고 귀띔해준다. 요긴한 것이 아니라면 유머로 흘러버리면 된다는 것. 유머란 대상을 부정하면서도 긍정하는 것,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이상적인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이상이 <황야의 이리>의 줄거리라면 줄거리. 처음 <황야의 이리>를 읽은 것은 50여 년 전 30대 중반이었다. 그때만 해도 50대는 미루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노년이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황야의 이리>는 전적인 공감을 얻을 수 없었던 것 같다. 훗날 50대가 되면 다시 읽으리라 다짐했다. 50년이 지나고 80대 중반이 되어서야 <황야의 이리>를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주인공과 꽤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책 페이지 공백에서 어른거리는 그림 하나를 눈치채게 된 것은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잠시 책을 엎어두고 머리를 식히며 눈을 감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림, 그것은 영락없이 반 고호의 <한 켤레의 신발>(1887) 그것이었다. 사이버를 뒤져 그림을 찾아냈다. 영락없이 환상으로 본 그 그림이었다.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뒹굴던 아버지 집을 떠나 파리에서 화상을 하는 아우 테오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은 1886년 27세 때였다. 목사가 되려다 좌절한 고흐는 농민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당시로써는 상당히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이전 네덜란드에 있을 때도 <감자를 먹는 사람들>과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다. 당시는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화상을 그리기 이전까지 화가들은 자아와 세계 사이에서 두드러진 대립 관계를 느끼지는 않았다. 조화롭고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신의 뜻에 순종하면 그만이었으니. 그러니까 네덜란드에서는 신앙인 고흐와 화가 고흐 사이에도 갈등이 끼어들지 않았다. 신앙인으로서는 좌절을 맛본 터였으나, 이제 예술가로서의 자신과 전도자로서의 자신을 양립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농민화가가 되려 했던 것도 그와 같은 생각에서였을 터이다. 그러던 그가 파리에서 자화상이란 것을 그리게 된다. 그런 일련의 작업 중에 태어난 작품이 <한 켤레의 신발>이다. 고갱의 말에 따르면, 고흐가 아를르의 “노란 집”에 살고 있을 때, 한 켤레의 낡은 신발이 벽에 걸려있었는데, 왜 하고 묻는 고갱의 물음에 대한 고흐의 대답은 대강 아래와 같았다. 목사 되기를 포기한 고흐가 화가가 되겠다고 나서기 전, 탄광에서 전도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탄광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중상을 입은 갱부 하나를 간호하고 있었는데 거의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가 살아난 것이다. 그 사나이에게서 고흐는 부활한 예수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 “이것은 당시 힘들었던 나날을 견디며 부활을 만났을 때, 신었던 신발”이라고 고흐가 말했다는 것.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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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7-11-06
  • 이누가이 미치코(犬養道子)
    일본의 작가이자 사회사업가 이누가이 미치코(犬養道子)의 부음을 접하게 된 것은 일본의 종합월간지 <분게이 순주(文藝春秋)> 2017년 10월호의 “부음란”을 통해서였다. 그 대강을 간추려본다.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누가이 미치코는 2차 대전 후 일찍부터 유럽과 미국을 다니며 체험기를 발표하는가 하면, 성서연구와 난민 지원을 계속했다.1932년 5월 15일 저녁나절, 친척집에서 놀고 있는데, 총리인 할아버지 이누가이 츠요시(犬養毅)가 관저에서 해군장교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다. 할아버지는 “아홉 발 쏘았는데 세발 밖에 맞지 않았어.” 하고 농담을 할 만큼 의식이 뚜렷했었는데, 밤 11시가 지나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녀는 1921년 동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누가이 츠요시의 3남이고, 어머니는 남작 나가요 쇼키치의 딸. 미치코는 명가의 규수로 자란다. 할아버지 츠요시는 영특하고 활달한 손녀를 그지없이 귀여워했다. 11살 나던 해에, 그녀는 할아버지가 암살당하는 “5.15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당시 내각 수상이었던 할아버지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내닫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기에 군부, 중에서도 해군 청년장교들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쿠데타는 실패하지만, 이후 가파르게 일본은 군국주의로 내닫게 되었고,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5.15 사건”이라 부르게 되었다. 미치코가 그때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이후 그녀는 그 때 그 사건과 자신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줄곧 되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물음이 동기가 되어 그녀는 가톨릭으로 입문하게 된다. 당시는 이차대전 중이어서 그만한 집안 출신의 규수가 적성 종교로 인정받고 있던 가톨릭에 입문하는 일은 꽤나 어려운 결단이었을 터인데도 기어이 그녀는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는다. 종전 후 일본의 한 대학을 거쳐 1948년에 미국에 유학하지만, 결핵 진단을 받고 요양소에 수용된다. 그런데 요양을 하는 중에, 전쟁이 끝나고 폐기 상태에 있던 낙하산의 끈을 이용해서 밴드를 만든 것이 큰돈을 벌게 해준 것이다.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에서 성서학을 공부하는 한편, 옛 성을 빌려서는 유학생들이 서로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는 둥, 그녀는 언제나 열린 미래를 향하여 달려갔다. 1957년에 귀국한 후 10년에 걸친 유럽과 미국에서의 경험을 자료로 <아가씨의 방랑기>를 써서 일약 인기작가가 된다. “일본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이집트 오지에서 악어사냥을 하러 가겠다고 기염을 토하자 모두들 웃으며 상대해주지도 않았다.”며 당시를 회고하는 그녀는 NHK 방송국 해설자로 활동하는 한편 많은 체험기와 에세이를 발표한다. 1970년 대 이후 그녀는 아예 거처를 유럽으로 정하고, “이누가이 기금”을 설립해서 난민문제와 함께 했다. 1990년대에 막 발발한 구 유고슬라비아 분쟁 때에는 아예 현지에 들어가서 활동하는가 하면, 1999년에는 다시 크로아티아로 가서 난민을 돕는 사업을 펼쳐나갔다. 일본 안에서의 비판이 만만치 않았다. “해외에서 난민을 도울 수 있다면 차라리 국내에서 어려운 이들을 도우라!”는 것. 이에 대해서 그녀는 격한 어조로 반론했다. “난민이란 그냥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이 아니다. 인권의 마지막 한 점(목숨)까지도 잃어가고 있는 사람이다.”하고. 1995년부터는 <성서를 여행하다>(10권)을 출판하기 시작해서 2003년에 완성했다. 그녀는 말하곤 했다. ”나는 성서를 터전으로 해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난민구제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고. 그녀는 지난 7월 24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남들이 하지 않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을 저질러 놓곤 했다. 내가 그녀의 저서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녀가 <성서의 말씀>을 출간한 1986년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만 해도 명동에는 외국서적을 거래하는 점포가 더러 남아있었고, 그 중 한 두 곳은 단골이 되어 있었다. 감히 단골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너 평도 되지 않는 가게에 얼굴을 내밀라치면 점주가 고무줄로 동여맨 신간서적들을 건네주는데, 집에 와서 펼쳐보면 바로 내가 찾던 책이 되었다는 농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말했다. 이누가이와도 단골 서점주가 그렇게 맺어준 인연이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7-10-27
  • 거울 앞에서
    “미러 테스트(mirror test)”란 학술용어가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이라고 “인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테스트란다. 극성스러워야 버틸 수 있다는 학문세계라고는 하지만, 그까짓 것까지 시험할 것이 뭐냐 하고 핀잔을 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가 않다지 않은가. 인간을 제외한 동물 중에서 이 테스트를 통과한 것들, 그러니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들이라고는 기껏 침팬지, 오랑우탄, 돌고래, 아세아 코끼리와 까치 등 수종에 불과하다니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노라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껏 뽐내고 있는 호모사피엔스 중에도 이 “미러 테스트”란 것을 통과하지 못할 법한 인사들이 적잖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침팬지 앞에 거울을 두면, 처음에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인 줄 모르고, 다른 침팬지가 침입해온 줄로만 알고, 거울 속의 자신을 위협하거나 겁을 먹고 눈치를 살핀다. 그러는 사이, 자신이 손을 들면 거울 속의 녀석도 손을 들어 올리고, 입을 벌려 이빨을 드러내 보이면, 녀석도 그렇게 따라 한다. 마침내 원숭이는 자신의 동작과 거울 속의 녀석의 동작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이 자신을 인식할 때에, 자신의 사고나 행동 자체를 대상화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인지능력(認知能力=Metacognitive Ability)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자신이 있어 자신을 보고 있는 셈이다. “메타인지”의 “메타”가 “‘더 높은” 혹은 “초월적”이란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이름을 붙인 학자들의 속내를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미러 테스트”를 통과한 동물은 공통으로 동료와 마음을 통할 수 있는 능력,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들 말한다. 아세아 코끼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고 있다.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상대방의 마음을 관찰하려는 지성 즉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이 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래서 공감능력이 높은 아세아 코끼리라면 미러 테스트에 합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검사를 해보았더니, 보기 좋게 합격했다는 것. 이처럼 ‘상대방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을 떠받치고 있는 “뇌신경세포”를 “미러 뉴런”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원숭이의 뇌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인간의 대뇌피질의 전두엽에서도 같은 부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상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상대의 뇌가 움직이는 궤적을 추적할 수 있는 “미러 뉴런”이 있기 때문이고, 미러 뉴런이 있어 타자의 동작을 보고 있는 중에 자신도 그런 행위를 하고 있을 때와 같은 활동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러 뉴런”은 자신의 마음을 인식할 때에도 작용한다. 자신의 마음을 인식한다는 표현이 껄끄럽게 여겨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생각해보자.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려면 거울이 필요하듯이 자신의 마음도 거울에 비추어보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미러 뉴런”이니 “메타인식”과 같은 인간의 기능에 대해서는 과학을 모르는 옛 성인들도 보다 친숙한 어법으로 이미 말해주었던 것도 같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거수일투족을 이벤트 전문가의 연출에 의존하면서 “소통을 하고 있습네.” 하고 응석을 부리고 있는 명색이 지도자들의 눈에는 거울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히틀러는 콧수염을 기르고 자신을 흉내 내는 찰리 채플린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아마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보다 채플린의 모습이 더 히틀러답다고 대중들이 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동갑내기 친구가 성능이 좋은 고가의 면도기 자랑을 했다. 미국 사는 아들이 생일선물로 사주었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자랑하는 친구의 볼에는 미쳐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눈에 띄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성능이 좋은 면도기보다는 노안에도 볼 수 있는 확대 거울일 텐데 하고. 어느 시인이 가을은 거울 앞에 서는 계절이라 했다던가.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7-10-13
  • 질투(嫉妬)와 시기(猜忌)
    <로마인의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대강 이렇게 간추린다. “자신감에 차 있던 한 사나이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던 넘치는 행운을 잡은 탓에, 오히려 자신을 지탱하여 온 사나이로서의 자신감이 균형을 잃게 되면서 시작되는 비극”이라고. 주인공 오셀로는 귀족 출신이 아닐 뿐 아니라, 굴러 들어온 용병 출신으로 제대로 시민권조차 갖추지 못한 처지다. 그럼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군사령관이라는 중책을 거머쥔다. 적잖이 나이든 무어인(흑인)인 그가 언감생심 데스데모나와 같이 젊고 아름다운 귀족의 딸을 넘보기라도 할 처지이던가. 그런데 바로 그 데스데모나가 자신에게 반해 준 것이다. 그만한 횡재라면 오셀로가 아니더라도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도 모른다. 데스데모나가 부친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집을 도망쳐주다니. 오셀로는 자다가도 자신의 뺨을 꼬집을 지경이었을 터이다. 행운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 했던가. 꿈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은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어 하는 두려움으로 연결되게 마련이고, 그 두려움이 인생을 지옥으로 끌어내려 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보면, 간악한 이야고의 꼬드김이 거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셀로의 절정은 이미 낭떠러지로 기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오노 나나미는 말했다. “질투와 시기는 아주 비슷해서 겉보기에는 그 차이를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둘은 아주 다르다. ‘질투’가 본질적으로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시기’는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가지고 싶어 하는데도 손에 넣거나 성취될 성싶지는 않은지라...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품게 되는 감정이다.” “질투”에 시달리는 오셀로와 “시기”의 화신이 된 이야고가 엮어내는 <오셀로>는, 비극으로서의 흥미만이 아니라 인생교훈까지를 재공 한다. 이야고, 그는 오셀로와는 달리 백인이었고 당시의 강대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떳떳한 시민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무어인 오셀로의 부하가 되었고, 그나마 바라던 부관의 자리마저도 경쟁자 캐시오 에게 빼앗기도 만다. 그가 시기의 화신이 된다고 해서 독자나 관객이 어색해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간교한 이야고는 오셀로의 질투심을 부추기기 위해서 “질투심을 조심해요”하는 경구를 들고 다가선다. “질투는 무서운 거랍니다/푸른 눈을 가진 괴물이거든요/그렇고말고요/이놈은 사람의 마음을 먹이로 해서/괴롭히며 가지고 논답니다.“은근히 경고하는 척, 실제로는 질투의 불씨를 심어주는 간교한 심리조작 술을 들고 나온다. 한 인간을 질투에 사로잡히게 하려고, 먼저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철저하게 인식하게 한다. 이제 질투는 그의 불안을 타고 자기증식을 하게 되고. 혈안이 된 오셀로가 젊은 아내의 부정을 증명해줄 물증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만만한 이야고의 가슴을 움켜잡고 소리친다. 증거를 보이라고. 그러나 오셀로에게 손수건이라는 먹이를 던져준 이야고는 혼자 중얼거린다. “비록 공기처럼 가벼운 것일지라도 질투에 취해있는 자에게는 성경 말씀처럼 무거운 것이 되는 것을.” 오셀로는 한 장의 손수건 때문에 아내의 목을 조르고 자신의 목숨도 버리게 되는데...오셀로가 소리친다. “제발, 있었던 그대로를 전해주시기를. 사랑할 줄 모르면서도 너무 사랑한 사나이의 이야기라고”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는 많은 현대인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준다. 간교한 이야고의 시기는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현실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 <오셀로>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희생자가 된다. 희생자는 스스로 희생자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노라 하는 푸념을 남기곤 하지만, 그렇다고 정작 본인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계면쩍어하는 정서적 반응까지를 리얼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읽고 싶다. 이야고의 아내 에밀리야는 말한다. “질투란 제멋대로 잉태해서 제멋대로 태어나는 괴물”이라고. enoin34@n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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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7-09-22
  • “압살롬의 난”에서 설득력을 배운다
    <사무엘서>가 그리는 “압살롬의 난”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신앙적 교훈 말고도 많은 것을 읽게 하는 인간드라마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성문 거리에서 백성의 불평을 부추기며 자신이 더 나은 정부를 만들어 보겠노라며 선동해온 “압살롬이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15:2)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압살롬에게 기울었다는 전령의 귀띔을 접하자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신하들에게 대피령을 내리고 자신도 성을 떠난다. 그러나 다윗은 종교지도자들이 법궤를 메고 따라나서는 것을 보고서는 돌려 보낸다. 민심이 동요하는 그때야말로 법궤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시점 일터인데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은 다윗 자신이었다. 그러나 아니 그랬기에, 다윗은 법궤를 전리품이나 왕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하지 않으려 했을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올리브 산을 오르며 계속 우는 다윗. 요단강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을 만난다. 다윗을 저주하는 시무이의 작태는 오히려 다윗을 따르는 이들의 면면을 두드러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의 장면이 두고 온 예루살렘으로 바뀐다. 예루살렘의 주인은 압살롬이 되어 있고 다윗에게 실망한 아히도벨이 그를 돕고 있는 판에, 후새가 얼굴을 내민 것이다. 관객은 그를 알고 있다. 연출자는 그렇게 판을 짜둔 것이다. 앞선 장면, 쫓기고 있는 다윗이 허둥지둥 산꼭대기에 이르러 한숨 돌리려는 참에, 아렉 사람 후새가 겉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고 다윗을 맞았을 때, 다윗이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압살롬의 참모가 되어 아히도벨의 계략을 실패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한 바로 그 인물이 아니던가. 그 후새가 “임금님 만세!”를 외치며 압살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관객의 눈은 이제 후새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된다. 적잖이 놀란 압살롬이 “왜 친구를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주께서 뽑으시고 이 백성과 이스라엘 사람이 뽑아 세운 분의 편이 되어서 그분과 함께 지낼 작정입니다.”(16:18) 하는 후새의 능청맞은 응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왕궁을 점령한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다음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자문하자, 아히도벨은 부왕의 후궁들을 범하기를 권한다. “임금님께서 부왕의 미움을 받을 일을 하였다는 소문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면 임금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더욱 힘을 낼 것입니다.”(16:21)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압살롬이 왕으로서의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압살롬도 선듯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압살롬을 설득한 아히도벨의 권고가 아직 우왕좌왕 서성거리고 있을 백성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궁중에서 활개치던 예언자들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보자는 아히도벨의 속내가 아들이 부왕의 후실을 범한다는 패륜까지를 감쌀 수 있었을까. 아히도벨의 권고는 이어진다. 그날 밤 안으로 군사 1만 2천을 거느리고 다윗을 급습하란다. 그러면 따르던 백성이 모두 달아날 것이고, 외톨이가 된 다윗을 쉽게 쳐 죽일 수 있다는 계산. 그것은 다윗을 따르던 백성을 압살롬 쪽으로 돌아서게 할 것이라는 전망도 일러준다. 동석한 모든 장로가 동의한다. 이제 후새가 아히도벨의 논리를 부정하고 나선다. 노련한 전략가 다윗이라면, 백성과 함께 밤을 보내지 않고 굴속에 숨어 있을 것이니 쉽게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 게다가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잔뜩 화가 치밀어 있을 다윗이 압살롬의 군사 몇을 쓰러뜨릴 것이고, 그것이 곧 패전 소문으로 과장 되어 마침내는 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대신 승승장구하고 있는 신왕 압살롬이 위풍당당하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온 땅에 내리는 이슬처럼 많은 지지자를 지휘해서 왕자답게 전투를 펼쳐야 한다는 것. 후새는 압살롬의 성격적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누이를 범한 암논을 복수하기 위해 두 해를 기다렸고, 다윗에게 반기를 들기까지 무려 4년을 기다려야 할 만큼 소심한 데다, 성문에서 사람들의 환심에 우쭐해 하는 왕자는 검고 긴 머리칼이 자랑스러운 풋내기이기도 했다. 젊은 왕자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후새의 설득술은 수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히도벨을 압도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가 목매어 죽는다. 반란군을 설득한 후새는 곧 제사장 사둑과 아비아달을 통해서 다윗에게 이쪽 사정을 통보한다. 그 일에도 많은 사람의 헌신적인 협조가 따랐고, 곧 전세는 역전된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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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7-09-08
  • 스퐁의 소도미(sodomy)이해
    미국 감독교회 뉴왁 교구 감독이었던 존 쉘비 스퐁이 <성경과 폭력(The Sins of Scripture)> 4장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면서 <소돔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먼저 “소돔” 이야기는 전체의 맥락에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창세기> 18장 1절에서 19장 38절까지를 한 묶음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나무 곁에서 세 사람의 나그네를 맞는 일에서 시작하여, 롯과 그의 딸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을 피해 나온 후, 부녀간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을 출산하는 일로 끝을 맺는 모든 이야기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이 이야기가 자주 “동성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적인 입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라는 것. 일부 해석자들의 편견이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해서 근친상간을 하는 이야기를 비열한 인간성의 한 측면을 부추기는 반 동성애적 본문으로 둔갑하게 만든 책임을 묻기도 했다. 아브라함이 주님이라 부르는 분과 후에 천사로 확인되는 두 사람을 극진히 대접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의 임신을 예고한다. 엿듣고 있던 사라가 기력이 쇠진한 그녀에게 어찌 그런 즐거움이 있으랴(창 18:15)하며 웃음을 터뜨리자, 천사가 그녀를 나무랐고, 웃지 않았다며 시치미를 떼는 사라에게 ”아니다. 너는 웃었다“ 하고 윽박지른다. 무대는 소돔으로 바뀐다. 주님이 장차 크고 강한 나라의 조상이 될 아브라함에게 소돔 성 징벌을 귀띔해주자,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하고 아브라함이 흥정에 나선다. 소돔에 거주하는 조카 롯과 그 가족을 염두에 두었을까, 흥정은 의인 50명에서 시작하여 10명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이어진다. 이제 이야기는 두 천사가 소돔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진전되는데... 고대세계에서는 거주민이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는 한, 나그네는 안전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통상적으로 여인이 낯선 고을을 여행하기는 어려웠고, 남성이라 할지라도 성적 학대의 대상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해질 무렵 소돔의 사나이들이 낯선 두 남자를 찾아 나서지만, 롯이 집에 보호하고 있는 지라,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19:4) 롯의 집을 둘러싸고 성적 유희를 하도록 두 사람을 내놓으라고 강요한다. 롯이 타일러 보지만,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자신의 두 딸을 내줄 터이니 “자네들 좋은 대로 하게” 하고 제안한다. 롯은 딸들과 논의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두 딸의 약혼자들이 폭도들 틈에 끼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같은 일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흡사한 이야기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삿 19장 참조)사나이들이 집안으로 쳐들어오려 하자, 천사들이 롯과 그 가족에게 성을 떠나기를 강권한다. 결국 의인 열을 찾지 못한 소돔은 멸망하는데, 폭력에 개입했던 딸들의 약혼자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을 터이지만, 천사가 눈을 멀게 한 때문인지 그들은 기회를 흘려보내고 만다. 롯의 가족이 성을 떠나자 유황불이 내리친다. 처음에는 소알 성으로 들어갈까 생각하던 롯은, 의지할 곳이 없는 이방인이 당할 고초를 떠올리고, 산으로 오른다.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해 소금 기둥이 되고. 동굴 속에 기거하는 롯과 두 딸. 딸들은 보장받을 수 없는 앞날을 두고 고민한다. 아버지만이 이용 가능한 유일한 남자임을 어쩌랴. 아비를 만취케 하여 잠자리를 함께 하는데... 근친상간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들이 모압과 암몬. 고대 성경에서 원시적인 신관들이 얼굴을 내미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더러 이런 이야기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적 견해를 과시하기 위해서 이용되어 오곤했다. 소돔과 고모라의 남자들이 두 방문객을 윤간하겠다고 열을 올리는 이야기로만 읽어서, 신실하게 사랑하는 동성애자들까지도 저주하기 위한 문헌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 비뚤어진 축자 화(literalization)를 통한 왜곡된 메시지로 동성애에 대한 혐오적인 편견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것이 스퐁의 이해이고 보면...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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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7-08-25
  • 사람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비극 ‘리어왕’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그것을 다룬 걸작. 그것도 코미디 터치가 아니라, 비참한 비극으로 완성한 것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있어서였을까. 한마디로 <리어왕>은 인간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시작된 비극인 동시에 인간을 알게 되었기에 그나마 행복을 알게 되는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리어왕>에서는 “Know+사람”이라는 문체가 자주 등장한다. 1막 1장, 리어왕이 국토를 딸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자, 입에 발린 소리로 아첨을 떨어 국토를 양분해서 받아낸 두 언니와 아무 것도 받지 못한 막내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막내 코델리어가 언니들에게 말한다. “나는 언니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오.(I know you what you are.”) 이 대사는 드라마의 프로세스를 예고하는 듯하다. 대조적으로, 코델리어가 사라지자, 언니 리건이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을 알지 못했었지( He hath ever but slenderly known himself.)”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안다”는 범위는 타자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포함된다는 진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 자매는 그러한 아버지를 이용해서 막내 몫까지 나누어 받았다는 속내를 보여주는 것일까. 이렇게 대사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노라면 작품은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연극이 시작되면서, 여든을 넘긴 늙은이 리어왕이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장 깊은 녀석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겠다고 선언한다. 첫째와 둘째는 입에 발린 소리로 아첨해서 땅을 차지하지만, 셋째 코델리어는 아비에 대한 마음이 깊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막내의 그런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늙은이는 그녀를 물리쳐 버리는데,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국토의 반씩을 나누어준 바 있는 두 딸에게서 유유자적하는 노후생활을 계획하고 있었던 리어왕은 두 딸 모두에게서 쫓겨나 폭풍우 치는 광야를 헤매는 신세가 되는데, 리어왕을 구하려고 계획을 짜던 충직한 신하 글로스터 백작 또한 의붓아들 에드먼드가 쳐 둔 덫에 걸려 배신자가 되고 곧 두 눈을 잃는다. 리어와 글로스터는 사람을 알지 못했던 탓으로 권력투쟁에서 완패하게 된 것이다. 리어왕과 글로스터 백작은 비참하도록 고통의 밑바닥을 핥는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는 지혜와 권력과 책략과 정보망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협력체제도 완벽해서, 정적 리어왕과 글로스터 백작을 사정없이 몰아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연극들도 그렇지만, <리어왕>이 재미있는 것은, 완패한 두 노인이 비극의 한가운데로 몰리게 되면서야 비로소 참다운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된다는 메시지를 감추어 두었기 때문. 몰락한 지난날의 권력자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리어와 글로스터는 굳건히 자신답게 살아가려 안간힘을 다한다. 리어는 실성하고 글로스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지만... 주인공 리어는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결연히 맞선다. “나는 너희들의 노예가 되었다. 불쌍하고 가냘파 무시당하고 있는 노인일 뿐이다.” 동정을 얻으려는 푸념이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함으로 억누르고 있는 중압과 맞서려는 투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리어가 실성하게 된 것은 인격적으로 허물어졌기 때문은 아니다. 끝없는 압력을 견디며 스스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요, 자기 의지의 한계를 지키려는 사투였다. 실성했어도 그는 엄연히 리어였다.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리어가 권력을 잃고 보통사람이 되어 갈 때, 또 하나의 리어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쳐다보며 그제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정서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포로가 되어 사랑하는 막내 고델리어와 함께 감옥으로 가고 있는 리어. “두 딸 고넬리와 리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묻는 코델리어에게 대답한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자 감옥으로 가자, 둘이서만. 새장의 새처럼 노래하며 살자구나. 네가 나에게 축복을 구하면, 나는 무릎 꿇고 그대의 용서를 빌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자. 기도하고, 노래하고, 옛이야기를 나누며...”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 14명 중 8명이 죽음을 맞는 비극. 리어왕이 코델리어의 시신을 안고 등장하는 것이 연극의 끝 장면이 된다. “울어라, 울어, 왜 울지 않는가! 목석들인가?...개, 말, 쥐도, 생명을 지니는데, 너는 숨을 멈추었단 말인가? 이제 돌아오지 않는가?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리어도 숨을 거둔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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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7-08-11
  • 사울과 악령
    사울은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었고, 키도 보통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삼상 9:2)외모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고 찾아오라고 했을 때는 그 넓은 광야를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고도 찾을 수 없자, 종에게 “그만 돌아가자. 아버지께서 암나귀들보다 오히려 우리 걱정을 하시겠다.” 고 말할 줄 알았다. 청년 사울은 순종의 미덕만이 아니라 상황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왕이 된 사울은 병사들의 수고를 따뜻하게 위로할 줄 알았다. 과격파들로부터 우유부단하다는 힐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싸움에서 패한 장병들을 함부로 처단하기를 삼가는 아량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감정의 오르내림이 심해지고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은 사울이 나쁜 영에 사로잡혔다고 수군거렸다. 음악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충고를 받아들인 사울은 비파를 잘 타는 이를 물색하던 끝에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이세의 막내아들 다윗을 데려온다. 혈색이 좋고 눈이 아름다운 젊은이. 손에 비파를 들고 있던 젊은이는 곧 근위병으로 채용된다. 별것도 아닌 소박한 악기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다듬어 낼 줄이야! 사울은 기뻐했다. 마음이 우울해지고 가까이에 “나쁜 영”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다윗을 부르곤 했다. 그의 비파 소리는 부드럽게 사울을 감싸주는 것이었다. 마음이 안정을 얻게 되고 악령도 그의 곁을 떠나는 것 같았다. 다윗의 진가는 싸움터에서 두드러진다. 왕의 명령이라면 자리를 가리지 않았고, 누구보다도 많은 공을 세웠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해서 둘이 형제의 의를 맺는 데야. 요나단은 겉옷과 전투복 그리고 검과 활 띠마저도 다윗에게 주어버린다. 다윗은 사울의 병사들에게서도 사랑받았다. 겉보기로 사울의 다윗 채용은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 성공으로 해서 세인의 이목이 다윗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는 사울의 마음은 오히려 괴로워진다. 현대인이라면 그를 조울증으로 진단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울을 평가한 이스라엘 사가들의 필치는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사울 평가는 거의 모두가 다윗왕궁에 속해있던 사가들의 손에서 쓰인 것일 텐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사울의 평가를 남긴 사가들은, 오랜 세월 사울과 다툰 끝에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다윗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 사가는 다윗의 정통성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지닌 사가였을 터인데도, 정작 그들이 적어놓은 사울의 모습은 비극적인 인물일지언정, 결코 악질이거나 미워할 만한 인물로는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는 말이다. 사울을 괴롭힌 “악령” 흔히 “악령”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루아흐 라아”는 <구약성서>에서 모두 여덟 차례 쓰이고 있다는데, 그중 일곱 차례는 사울의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를테면, <사무엘 상> 18장 10절,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에게 내리 덮치자, 사울은 궁궐에서 미친 듯이 헛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서 온 악령이 사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셈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울을 괴롭힌 “악령” “루아흐”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울을 의도적으로 괴롭힌 것으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물론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하는 사가들의 마음가짐도 반영되었을 터이지만, 그것 보다는 사울이라는 한 인물의 아픔은 사울만의 것이기보다는, 평균적인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는 아픔이었기 때문이라고 읽어보면 어떨까. “자기의 기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이 무너져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잠언 25:28)는 <잠언>을 알고 있는 평균적 히브리인들. 그들인들 어찌 격정 대신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또 사울인들...“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만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을 평균적인 히브리인들이 이룩해놓은 역사는 평안이 아니라 격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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