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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카 와사비 테러와 일본인의 콤플렉스
    10월 초 일본 초밥 체인점 ‘이치바즈시(시장스시)’에서 발생한 일명 ‘고추냉이(와사비) 테러’로 한일 양국 간에 혐한 논란이 일었었다. 시장스시 오사카 도톤보리점을 방문한 한국인 고객들에게 고추냉이를 많이 넣은 초밥을 제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이다. 이에 대해 시장스시 본점은 “평소 해외 고객들이 고추냉이를 많이 넣어달라는 요구가 많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고객들에게 불쾌감을 드린 결과가 됐다”고 해명했지만 오히려 한국 네티즌의 공분만 샀다.SNS에서 ‘고추냉이 테러’가 ‘시장스시 불매운동’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혐한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에서의 ‘고추냉이 테러’는 반일감정에 불을 지핀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적지 않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일본에서의 은근한 한국인 차별을 겪는다. 이러한 처우를 알면서도 묵과하다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은근한 차별’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고추냉이 테러’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이 아닌 언어에 미숙함, 그리고 문화적 차이라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며, 이러한 문화적 테러는 정부 차원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추냉이 테러’는 왜 발생했을까? 그리고 일본에서의 ‘혐한’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예전에는 약했던 ‘혐한’이 왜 ‘지금’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한국이 갑자기 미운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예전에는 몰랐던 한국의 미운털이 갑자기 ‘지금’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국가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갑자기 미움이 싹트는 경우가 발생한다. 수십 년간 알고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미워지는 요인은 수만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 마음에 심한 상처를 내는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질투심’이다. 특히 나보다 못하다고 느끼던 친구가 갑자기 잘 나가고, 상대적으로 내 처지가 안 좋아질 때 나도 모르게 시기·질투심이 생긴다. 아무리 넓은 마음과 아량으로 친구를 바라봐도 마음의 상처만 남는다. 그게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1991년 이래 장기불황이 계속되면서 잃어버린 20년(1991년~2011년)으로 최악의 경제상황을 맞았다. 불황의 시작은 일본의 거품 경제가 무너지면서 시작했다. 금융권의 부실채권이 대량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가 장기간에 걸쳐 침체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인에게 ‘희망’과 ‘도전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20년 동안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일본인은 이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자책하는 대신 잘 나가는 이웃나라 중국과 한국에 대한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2013년부터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 혐한혐중(嫌韓嫌中) 관련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본인의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결코 일본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이제 중국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패기’와 ‘도전 정신’을 찾을 수 없다. 한 때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일본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심하게 훼손된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혐한 현상을 접할 때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미래’와 ‘도전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는 경제적 측면 외에 종교적인 면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기독교의 보편적인 사랑과 희생을 받아들인 한국과 달리 일본은 신도(神道)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009년 일본 문화청 ‘종교연감’에 따르면 일본 종교인 수는 신도가 약 1억843만 명, 불교 8750만 명인 반면, 기독교는 237만 명에 불과하다.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일본은 기독교적인 가치와 서구의 보편타당한 문화가 자리 잡기가 어렵다. 따라서 일본에서 벌어지는 ‘고추냉이 테러’와 같은 은근한 한국인 차별이나 혐한이 기승을 부려도 대국적 입장에서 일본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일본과 같은 수준의 반일감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마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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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02
  • 총회재판국 판결의 오류 시리즈-14
    법정송사·고소·고발 상호 취하는 공평하나불복시엔 상호 아닌 상소인만 이명은 불공평 (승전) 주문: 3 상소인과 피상소인은 상호 세상법정에 고소, 고발한 일체의 건을 취하하고, 향후 이와 관련하여 교회법에 의한 일체의 소 제기 및 사회법에 따른 민, 형사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법정송사는 성경이 금하였으니(고전 5: ~ 6: ), 소 취하와 이와 관련하여 교회법과 사회법에 따르는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 함은 정당하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 이를 금하고 사회법에 의한 송사는 성경이 금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문: 4에서 “주문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시 상소인 신○○ 남○○교회에서 이명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시무장로 직을 원상회복한다는 주문:1을 상소인이 불이행할 리가 없고, 공회 앞에 사과하라는 주문:2와, 법정송사를 취하하고 새로운 소 제기를 금한 주문:3에 대한 불이행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상소인 피상소인 상호라고 표시하고서도 이명하여야 한다는 대상은 상소인에게 국한 시켰으니 피상소인 당회장 황○○는 주문사항을 이행하지 아니해도 무방하다는 뜻이 되었으니 편파적인 상황을 이루지 않았는가? 이미 위에서 여러번 본 것과 같이 이명(移名)은 벌이 아니고, 이사를 갈 때에 행하는 전출입 절차요, 이사를 가거나 아니 갈 자유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유권인데, 총회재판국이 판결에 의해 “이명해야 한다”함은 합당치 아니하다. 장로회정치는 양심자유를 제1원리로 삼고 있으며 국헌(國憲)으로도 거주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니 말이다.다섯째로 서○○노회 김○○ 씨에 대한 수○노회, 남○○노회, 용○노회, 경○○노회 각 개인의 소원건은 주문(김○○목사의 강도권을 제외한 모든 공직을 향후 5년간 정지하고 서○○노회의 총회천서 3년간 제한하기로 한 판결은 “기독신문 사과문 제재”와 “수○신학교 임시당회장 파송 철회”를 이행 완료하는 조건으로 채용하지 않기로 하다)대로 받기로 하다고 하였는데, 이 사건도 어떻게 총회재판국이 판결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기록으로는 알 수가 없다. 전년도나 금년도의 총회회의 결의 및 요람 헌의부 보고에서 관계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재판사건은 의례히 총회재판국에서 재판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권 제13장 제117조, 동 제124조 2, 동 제134조 2에 의하면 재판사건을 본회가 직할 심리(본회를 재판회로 바꾸어 전체회원이 함께 심리)하여 판결할 수도 있고, 재판국에 위탁하여 재판할 수도 있는데, 이 결정을 헌의부보고에 “본회에서 직할심리할 일이오며” 혹은 “재판국에 위탁하심이 옳은 줄 아오며”라는 보고에 따라 본회(노회, 대회 혹은 총회)가 직접 결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사건도 총회의 위탁결의 없이 총회재판국이 판결한 것이 되니, 잘못은 보고하지 아니한 헌의부에 있을지언정 결과적으로는 총회재판국의 불법재판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치리회간의 소원은 권 제14장 제144조의 규정 “어느 회든지 그 동등한 회를 상대로 소원할 일이 있으면(제84조, 제93조 참조) 한층 높은 상회에 기소할 것이나, 이런 경우에 사건 발생 후 1년 이내에 피고된 회의 서기와 그 상회서기에게 통지한다” 대로 해야 할 것인데, 이 사건의 경우 “서○○노회 김○○ 씨에 대한 수○노회, 남○○노회, 용○노회, 경○○노회 각 개인의 소원건이라고 하였으니, ⅰ피소원인은 이 사건의 경우 수○노회, 남○○노회, 용○노회에 폐단이 되는 처결권 행사가 가능한 서○○노회 일 수는 있어도 그 노회에 속한 김○○ 씨는 그럴 권한도 자격도 없다고 할 것인즉, 이 사건은 피소원인 적격이 없는 사건으로서 각하 대상이라고 여겨진다고 본다. ⅱ 그리고 소원인은 여러 동등한 치리회여야 하는데 이 사건의 경우 여러 노회가 소원인이 된 것이 아니고 여러 노회 “각 개인의 소원”이라고 하였으니, 헌법에 규정된 취지에 반하는 소원이라 할 것인즉 소원인 적격도 없어서 역시 각하대상이라고 본다. “소원은 서면으로 상회에 제출하는 것이니, 하회 관할에 속하여 그 치리권에 복종하는 자 중 1인 혹 1인 이상이 행정사건에 대하여 하회가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아니하거나, 위법한 행동이나 결정에 대하여 변경을 구하는 것…”(권 제9장 제84조)이니, 서○○노회 관할에 속하여 그 치리에 복종하는 자들이 아니고 각기 다른 노회 관할에 속한 분들이니, 서○○노회의 행정처결에 복종할 의무도 간섭할 권리도 없는 자들이니 소원이 아니라 간섭이니 불법이다. 서○○노회 결의가 수○노회, 남○○노회, 경○○노회 용○노회에 폐단이 되었다면 위 각 노회는 노회가 소원하기로 결의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노회 결의 없이 여러 노회의 개인들이 어떻게 다른 노회의 행정처결에 왈가왈부하는가?여섯째로 호○교회 광○○○교회 장○○ 씨 외 12인의 호○노회 김○○ 씨 외 8인에 대한 상소건은 주문(1. 상소가 이유 없으므로 장○○ 씨에 대한 견책 2개월은 기각한다. 2. 상소가 이유 없으므로 장○○ 씨의 상소는 기각한다. 3. 상소이유가 있으므로 최○○ 씨, 김○○ 씨, 손○○ 씨, 최○○ 씨, 김○○ 씨, 오○○ 씨, 송○○ 씨 권계는 원상회복한다. 4. 상소가 이유 있으므로 정○○ 씨, 김○○ 씨 견책 2개월은 원상회복한다)대로 받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이 사건도 제98회 총회(2013년) 총회회의 결의 및 요람에 헌의부를 통해서 총회재판국에 위탁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니 총회재판국이 총회의 위탁결의(혹은 총회개회 이전에 총회서기가 헌의부 실행위원회로 보내고, 헌의부 실행위원회를 통해 총회재판국에 위탁하기로 하였다는 기록)도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장○○ 씨 외 12인이 김○○ 씨 외 8인에 대한 상소건이라고 하였으니 상소인도 여럿이요 피상소인도 역시 여럿이지만 사건은 단일사건으로 표시되었는데 주문 1, 2를 보면 “상소이유가 없으므로”라고 판시하면서도 주문 3, 4 에서는 “상소이유가 있으므로”라고 하였으니 단일 사건에 어떻게 “상소이유가 없다”, “상소이유가 있다”고 상반된 판시를 하고 있는가? 단일사건이 아니면 왜 기록은 단일사건으로 하였으며, 두가지 사건이어서 두가지 주문을 하게 되었으면 왜 두가지 사건으로 기록하지 아니하고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하여 사실 자체를 알 수 없게 했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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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0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6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학으로는 종교개혁의 5솔라들, 즉 ‘오직 성경’을 뜻하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tura), ‘오직 그리스도’를 뜻하는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은혜’를 뜻하는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믿음’을 뜻하는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뜻하는 “솔라 데오 글로리아”(Sola Deo Gloria)가 있다.그리고 회복해야 할 교리로는 복음주의가 주장하는 5대 근본 교리, 즉 성경의 무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의 부할, 그리스도의 재림이다.우리는 세상으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받고 있음(마 28:19)과 동시에, 또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는 명령을 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오늘날 우리는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의 하나로 주신 이성도 있어야 하고, 철학의 하나인 실용주의도 있어야 하고, 과학의 하나인 심리학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도 ‘이성’으로 올바르게 깨달아 알아야 하고, 사람들의 심리 상태도 ‘심리학’적으로 잘 알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도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효과적으로 이루어야 한다.그러므로 우리는 이성과 실용주의(철학)와 심리학(과학)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서 모든 것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계시(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실용주의와 심리학이 그 한계를 넘어설 때 그 폐해가 매우 심각하게 되는데, 현대사회와 현대교회의 실정이 그러하다.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은 초이성적인 것이다. 심리학은 사람의 심리 곧 혼에 관한 것이지 영적인 것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에 기초한 일반 상담은 심리적인 문제, 예를 들면 우울증의 치유 자체가 그 목적이 되지만, 말씀에 기초한 기독교 상담은 우울증의 치유가 아니라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곧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된다. 실용주의도 철학의 하나에 속하지만 그것은 수단이나 방법에 관한 것이지 본질이나 목적에 관한 것은 아니다.그러므로 이성은 초이성적인 것에 대한 한계를 지켜야 하고, 심리학은 영적인 것에 대한 한계를 지켜야 하고, 실용주의는 방법론으로서 본질적인 것을 훼손하지 않도록 그 한계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정하는 것은 물론 그러한 한계를 지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다.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우시고 이땅에 오셔서 참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예수님과 성령님의 합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론과 함께 성령론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님은 신학을 나타내고 능력이신 성령님은 영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말씀과 능력이 함께 역사하는 것과 같이 신학과 영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그런데 계몽주의 이래 이성 중심의 사상이 발달함으로써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학은 발달했으나 영성은 퇴보했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서는 영성은 신학과 함께 결국 실종되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가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성의 회복이 시급하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존재이고, 영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면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저 유명한 ‘참회록’에서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는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그러므로 신학과 영성은 다시 회복되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신학의 실종과 영성의 상실을 가져온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교회가 신학과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통합해야 한다.사도 바울이 사용했던 것처럼 영성의 개념은, 첫째 인간의 전 존재에 대한 성령의 지배를 의미하고, 둘째 인간의 전체 경험의 측면에서 관계 형성의 능력이며, 셋째 영적인 성숙의 목표를 함축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바울이 말하는 영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엡 5:18),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요 16:13), 성령으로 살면서 성령으로 행하는 것(갈 5:25)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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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0
  • 개혁자 루터와 두 가지 개혁운동(1)-이 효 상 목사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교회성가대에서 노래하였으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모금하여 학비를 보충하였다. 그러다 귀족부인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음악적 재능을 눈여겨 보고 수양아들로 데려다 키우며 음악을 가르쳤고 대학까지 보내주었다. 그래서 루터는 성악에도 뛰어났으며, 류트를 비롯한 여러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또한 화성법과 대위법에 대한 약간의 기술이 있어 다성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몇 개의 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로서 음악의 힘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교육적이며 도덕적인 힘도 굳게 믿고 있었다.여러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루터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의 음악관에서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음악을 신앙을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말로 음악의 영적인 힘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음악을 멸시하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인 오르간을 ‘마귀의 유산’이라고 부르며 없애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 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고 역설했다.“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음악은 가장 높은 칭송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주인이며 지배자이다. … 음악은 인간을 조정하고 또한 자주 그들을 압도한다. … 슬픈 자에게 평안을, 경솔한 자에게 자제를, 절망한 자에게 용기를,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흥분되어 있는 자에게 차분함을,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 유화(宥和)한 마음을 주는 데 음악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사제가 된 마르틴 루터는 시편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1534년 간행되는데 이후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그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이런 성경번역에서 영감을 받아 시편 46편을 기초로 작사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은, 대부분 단조 가락이 많던 시절에 강한 장조로 승리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확신 속에 노래하고 있다. 이 찬송은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던 때 지은 것으로 수많은 ‘시편명상’은 그의 신학과 삶의 그루터기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루터의 찬송가는 그의 절친한 친구로서 당대에 유명한 음악가인 요한 발터(Johann Walther, 1496-1570)와 루프(Konrad Ruoff) 등 지지자의 도움으로 출판되었다.루터의 첫 찬송가 <새로운 영적찬송가,1523>(Neue geistlich Gesange)는 4부로 되어 있는데, 현대의 악보와 같이 통합된 피아노 보표는 아니다. 루터가 만든 4부 찬송가는 각 성부가 따로 묶여 있기 때문에 각 권은 각각 해당 성부를 부르는 사람이나 그룹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쉽게 말하면 ‘파트별 찬송가’라 하겠다.루터의 둘째 찬송가는 <몇 편의 그리스도교노래, 1524>(Etlich Christriche Lieder)인데 흔히 <성가8곡집>(Achtliederbuch)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루터가 지은 찬송 4편을 포함해 8편의 코랄이 들어 있다.루터의 셋째 찬송가는 <영적찬송가, 1529>(Enchiridion geistlicher Gesenge)인데, 여기에는 26편의 코랄이 들어 있으며, 가정이나 교회에서 쉽게 사용하도록 만든 회중 찬송가로서 단선율의 곡조찬송가이다.또한 루터를 도왔던 발터는 <신령한노래,1524>(Geistliches Gesangbuchlein)라는 작은 찬송가 모음을 내었는데, 30곡 중 23곡이 루터가 작곡한 것이다. 이 책은 흔히<비텐베르크 찬송가>(Wittenberg Gesangbuchlein) 라고 부른다. 이것은 찬양대를 위한 다성부 코랄집으로 플랑드르악파의 모테트 양식으로 편곡되었고, 주된 가락은 테너 성부에 있다.클루크(Joseph Klug)도 루터의 공인하에 50곡을 담은 <개편 찬송가>(Geistliche Lieder auf gebessert,1529)를 출판하였는데, 앞서 나온 찬송가들보다 많이 불려졌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수록되어 있다.마지막으로 루터의 손을 거쳐 출판된 찬송가<Geystliche Lieder, 1545> (Valentine Bapst)에는 120편의 찬송 가사와 97편의 곡조가 들어 있는데, 루터의 찬송이 28곡 수록되어 있다.마르틴 루터는 신학자이자 음악가였다. 그런 루터는 찬송을 철저히 복음과 연관을 지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복음찬송의 시조’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복음주의 찬송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에게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에서 비롯된 찬송이라 말할 수 있다.-이 효 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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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0
  • 개혁자 루터와 두 가지 개혁운동
    1. 루터의 찬송가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교회성가대에서 노래하였으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모금하여 학비를 보충하였다. 그러다 귀족부인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음악적 재능을 눈여겨보고 수양아들로 데려다 키우며 음악을 가르쳤고 대학까지 보내주었다. 그래서 루터는 성악에도 뛰어났으며, 류트를 비롯한 여러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 또한 화성법과 대위법에 대한 약간의 기술이 있어 다성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몇 개의 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로서 음악의 힘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교육적이며 도덕적인 힘도 굳게 믿고 있었다. 여러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루터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의 음악관에서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음악을 신앙을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말로 음악의 영적인 힘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음악을 멸시하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인 오르간을 ‘마귀의 유산’이라고 부르며 없애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 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고 역설했다.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음악은 가장 높은 칭송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주인이며 지배자이다. … 음악은 인간을 조정하고 또한 자주 그들을 압도한다. … 슬픈 자에게 평안을, 경솔한 자에게 자제를, 절망한 자에게 용기를,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흥분되어 있는 자에게 차분함을,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 유화(宥和)한 마음을 주는 데 음악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사제가 된 마르틴 루터는 시편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1534년 간행되는데 이후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그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이런 성경번역에서 영감을 받아 시편 46편을 기초로 작사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은, 대부분 단조 가락이 많던 시절에 강한 장조로 승리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확신 속에 노래하고 있다. 이 찬송은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던 때 지은 것으로 수많은 ‘시편명상’은 그의 신학과 삶의 그루터기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루터의 찬송가는 그의 절친한 친구로서 당대에 유명한 음악가인 요한 발터(Johann Walther, 1496-1570)와 루프(Konrad Ruoff) 등 지지자의 도움으로 출판되었다. 루터의 첫 찬송가 <새로운 영적찬송가,1523>(Neue geistlich Gesänge)는 4부로 되어 있는데, 현대의 악보와 같이 통합된 피아노 보표는 아니다. 루터가 만든 4부 찬송가는 각 성부가 따로 묶여 있기 때문에 각 권은 각각 해당 성부를 부르는 사람이나 그룹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쉽게 말하면 「파트별 찬송가」라 하겠다. 루터의 둘째 찬송가는 <몇 편의 그리스도교노래,1524>(Etlich Christriche Lieder)인데 흔히 <성가8곡집>(Achtliederbuch)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루터가 지은 찬송 4편을 포함해 8편의 코랄이 들어 있다. 루터의 셋째 찬송가는 <영적찬송가,1529>(Enchiridion geistlicher Gesenge)인데, 여기에는 26편의 코랄이 들어 있으며, 가정이나 교회에서 쉽게 사용하도록 만든 회중 찬송가로서 단선율의 곡조찬송가이다. 또한 루터를 도왔던 발터는 <신령한노래,1524>(Geistliches Gesangbuchlein)라는 작은 찬송가 모음을 내었는데, 30곡 중 23곡이 루터가 작곡한 것이다. 이 책은 흔히<비텐베르크 찬송가>(Wittenberg Gesangbuchlein) 라고 부른다. 이것은 찬양대를 위한 다성부 코랄집으로 플랑드르악파의 모테트 양식으로 편곡되었고, 주된 가락은 테너 성부에 있다. 클루크(Joseph Klug)도 루터의 공인하에 50곡을 담은 <개편 찬송가>(Geistliche Lieder auf gebessert,1529)를 출판하였는데, 앞서 나온 찬송가들보다 많이 불려졌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루터의 손을 거쳐 출판된 찬송가(Valentine Bapst)에는 120편의 찬송 가사와 97편의 곡조가 들어 있는데, 루터의 찬송이 28곡 수록되어 있다. 마르틴 루터는 신학자이자 음악가였다. 그런 루터는 찬송을 철저히 복음과 연관을 지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복음찬송의 시조’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복음주의 찬송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에게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에서 비롯된 찬송이라 말할 수 있다. 2. 종교개혁과 음악개혁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교회 음악개혁도 성취한 인물이며 그의 종교개혁은 찬송으로 이뤄졌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교개혁은 교회음악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의 모든 의식은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성가도 모두 라틴어로 불렀다. 루터는 예배에서 일반 신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교회에서 자기 나라 언어인 독일어 사용을 권장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음악 양식은 오늘날의 찬송가에 해당되는 코랄(chorale)이다. 그전까지 예배의식은 모두 라틴어로 진행되었으며, 노래는 성가대만 불렀다.교인들은 그냥 자리에 앉아서 성가대들이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기만 했지 직접 교회음악에 참여하지 않았다. 부르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해도 아마 한정된 사람만이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래가 너무 어려워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일반 교인들도 음악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코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게 되었다. 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성가의 능력을 믿었다. 성가는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창안한 개신교회의 코랄은 음악을 통해 교인들이 직접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했던 루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루터나 칼쟁, 그리고 츠빙글리 모두 다성음악의 화려한 음악의 모든 부산물들을 과감히 교회 밖으로 던져 버리고, 경건히 그레고리오성가를 부르듯 단선율에 가사를 실어 찬송하게 했다. 코랄이라는 형식을 통해 처음으로 교회음악의 대중화를 실현했다. 그동안 예배의식에서 소외되었던 교인들을 예배찬송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렇듯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음악을 정비하였다.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이고, 웅장하면서도 복잡했던 음악들을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단선율 찬송으로 정리했다. 음악적으로 본다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몇 백년, 아니 아예 처음의 상태로 되돌리는 결과 같았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이 그렇듯이 잘못된 것을 한번에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을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다움과 예배의 회복인 것이다.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교회력에 맞추어 모든 주일에 부를 수 있는 코랄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코랄이라는 양식을 창안한 후 20년동안 찬송 117편이 수록된 찬송가를 발행해 보급했다. 종교개혁 이후 마르틴 루터가 만든 독일 코랄(Chorale)이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의 효시가 된다. 코랄은 현대어로 번역하면 찬송가가 된다. 현대의 찬송가는 모두 4성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최초의 코랄은 화음도 없고 반주도 없이 제창으로 불리는 단순한 노래였다. 하지만 화성과 대위법을 통해 얼마든지 큰 형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음악사는 찬송가의 역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양음악사의 역사는 바로크음악, 고전음악, 낭만음악, 근대음악, 그리고 현대음악으로 이어진다. 종교개혁 이후 찬송가는 교회음악의 전부이며 교회음악사의 중심적 흐름이다. 안타까운 것은 종교개혁 이후 교회음악은 찬송가 외에 특별한 음악 양식을 생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양음악은 오페라, 합주곡, 교향곡 등 수많은 음악 양식을 생산하며 음악계를 주도해가고 있다. 루터의 의해 기초가 세워진 개신 교회음악은 그 후 바흐에 의해 그 화려한 꽃을 피웠다. 특히 바흐는 코랄을 기반으로 코랄 전주곡, 코랄 환상곡 등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루터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음악적 성과였다. 루터는 모든 회중이 함께 찬송 드리기를 원했다. 이런 토양에서 <코랄>이 나오고 하인리히 쉬츠나 요한 세바스찬 바하, 팰릭스 멘델스존, 요하네스 브람스가 배출될 수 있었다. 3. 개혁자들의 음악적 견해 종교개혁(Reformation)은 '교회다움'이라는 개혁운동이었다. 그 개혁운동은 위클리프, 후스 등, 전(前)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별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루터에게도 이어져 왔다. 루터가 말씀을 중심한 종교개혁과 찬송을 통한 음악개혁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루터가 가진 두가지 개혁운동의 축중 하나인 말씀으로 돌아가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하고도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주장이었고 그것은 교회개혁의 본질이었다. 또 하나의 축은 ‘음악’의 개혁이었다. ‘음악’이라는 새로운 병기가 그에게는 있었다. 루터에게서 음악은 ‘생존’을 위한 위로를 넘어서,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 그를 충만하게 이끌었다. 이러한 두가지 개혁운동은 여러 면에서 교회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다음 해에 스위스 종교 및 정치개혁을 주도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상당한 수준의 음악교육을 받았고, 특히 악기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예배에 음악이 강조되지 않도록 했다. 스위스 독일어 사용권에서 일어난 츠빙글리의 개혁은 프랑스어권인 제네바에서 칼뱅에 의하여 강력하게 추진되는데, 기존 교회의 전통에 대한 칼뱅의 깊은 불신은 예배에서 가톨릭의 전례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등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가공적인 그 어느 것도 허락하질 않았다. 스위스의 츠빙글리도 목사인 동시에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사람이었으며, 프랑스의 신학자 칼빈도 앞의 두 사람 못지 않게 교회음악의 대한 관심과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에 비견되는 그들이 한 목소리로 교회음악의 개혁을 주창한 핵심은 바로 기존의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는 음악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이 교리적인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종교적 부패의 사슬을 끊어야 하며 거기에는 음악적 타락도 포함된다는 점과, 교회음악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사제만이 아닌 모든 회중이 주님의 은총을 직접 맛보는 예배가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당시 교회 음악에 대해서도 개혁하려는 노력을 가져왔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Hymn)라고 알고 있는 찬송은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등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성립된 개신교(Protestant Church)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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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9
  • 총회재판국 판결의 오류 시리즈 -13
    총회의 치리권 ‘헌의부 실행위’에 전권위탁 했나총회 개회 되어도 경과보고 없음은 반역적 불법 (승전) 넷째로 “남○○노회 남○○교회 신○○ 씨의 남○○노회 황○○ 씨에 대한 상소건은(주문 1. 상소인 신○○ 씨의 시무장로 직을 원상회복한다. 2. 상소인 신○○ 씨는 공회 앞에 사과한다. 3. 상소인과 피상소인은 상호 세상법정이 고소, 고발한 일체의 건을 취하하고, 향후 이와 관련하여 교회법에 의한 일체의 소 제기 및 사회법에 따른 민, 형사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 4. 주문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시 상소인 신○○ 씨는 남○○교회에서 이명하여야 한다)대로 받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우선 안건표시부터 더 자세히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상소인 신○○ 씨는 시무장로 직을 원상회복한다”고 하였으니, 상소인은 남○○교회 시무장이었던 것은 밝혀졌으나, 피상소인 ‘남○○노회 황○○ 씨에 대해서는 성직표시가 없어 그 신분을 알 수가 없는데, 제98회 총회(2013년) 회의결의 및 요람(p.296)에 의하면 상소인과 같은 남○○교회 목사로 노회임원인 것을 알 수가 있으니, 그렇다면 피상소인 황○○ 씨는 십중팔구 동 교회의 당회장인데, 어떻게 피상소인이 되었는가? 당회장 황○○ 목사가 당회원인 신○○ 장로를 피고로 남○○교회 당회에 고소하고, 당회장이 원고이니 그 당회에서 재판하지 못하고, 노회에 위탁판결에 따라 노회 판결에서 승소한 경우라면 「남○○교회 당회장 황○○ 씨」가 피상소인이 될 수가 있겠으나, 혹시 당회장 황○○가 고소한 것이 아니고 다른 교인이 원고로 고소했고, 당회가 직접 재판하지 아니하고, 노회에 위탁판결 청구를 해서 원고가 승소한 경우라고 하면, 피상소인은 승소한 원고요 위탁판결을 청구한 당회장이 피상소인이 될 수는 없는데, 이 사건도 총회 회집 전에 총회 모르게 총회재판국에서 판결한 이른 바 상설재판국 사건인지 제98회 총회(2013년) 헌의부 보고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물론 제99회 총회헌의부 보고에도 기록이 없으니, 도대체 총회재판국이 어떻게 이 사건을 재판하게 되었는지, 기록상으로는 총회가 맡기지 아니한 사건을 총회재판국이 직접 재판한 것이 된다. 재판 속결을 위한 이른 바 상설재판사건이라고 해도 총회가 개회하면 총회서기가 접수하고 헌의부 실행위원회가 결의해서 총회재판국으로 보냈다는 보고가 들어가야 할 것인데, 헌의부가 보고를 안하니 총회재판국은 총회가 맡기지 아니한(헌의부 실행위원회에서 맡기기로 하지도 아니한) 사건을 재판한 것처럼 되지 않는가?그리고 주문을 넷으로 나누어 놓아 뚜렷하게 표시한 것은 장점인 것 같으나 “상소인 신○○ 씨의 시무장로 직을 원상회복한다”고 한 것을 보면 상소인이 원심에서 장로직 정직이나 혹은 면직, 수찬정지나, 제명출교 중 어느 한가지 벌을 받았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상소인 신○○ 씨는 이미 권 제9장 제100조(…권계와 견책은 잠시 정지할 것이요, 기타시벌 <즉 정직, 면직, 수찬정지, 제명출교의 벌을 가리킨다. 필자 주:>은 상회판결 나기까지 결정대로 행한다)에 의해 총회재판국 판결이 총회에서 채택되기 이전 기간에는 원심판결대로 정직, 면직, 수찬정지, 제명출교 중 어느 벌을 겪어 오다가, 그것이 원심판결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원상회복이라고 한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상소인 신○○ 씨는 원심판결 후 그동안 억울한 벌을 당해 온 것이 된다. 국법의 경우는 형사피고인으로 구금되었던 자가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에 대하여 보상을 청구하게 되어 있으나, 교회법에는 그런 규정이 없고, 1919년 제8회 총회가 헌법을 해석하는 참고서로 채택한 유일한 공인 참고서인 J.A. Hodge의 교회정치문답조례를 (역술(譯述) 즉 번역한 것만이 아니고 술회(述懷)까지 한) 초대선교사 곽안련(C.A. Clark)의 해석대로 원심판결에 순복하는 입장이 아니면 상소권을 허용치 않는 것이므로 불가불 상소기간 중 무죄확정 핀결 직전까지는 원심판결 아래 있게 된다 함이요, 원심판결에 묶였던 과거가 이제 와보니, 벌 받을 이유가 없음이 밝혀졌어도 이미 벌 받은 사람으로 지나언 과거(이 사건의 겨 경우 떳떳한 시무장로이면서도 당회원으로서의 권리행사를 못했고, 상회총회대로 피선되는 권리도 박탈된 상태를 가리킨다)는 역사화된 그대로 지내야 하고, 그것까지 소급하여 없앨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법관들로 종신형이나 사형 등 중벌을 하게 될 때에는 마지막 결심이 설 때 까지는 얼마나 크게 고심하는지 체중이 줄어드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회법을 다루는 재판관들은 그보다 더 기도하며 고심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는데, 교계 신문에 보도되는 대로는 웬 면직과 제명출교 판결이 그렇게도 많은가? 사람들이 더 악해진 원인일 수는 있으려니와, 보다도 교회재판관들이 중벌을 내려야 재판관들이 숭상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썩어빠진 사고방식 때문은 아니겠는가? 원심의 중벌은 상급심의 무죄확정 이전까지는 원심의 벌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림이 되게 하신 크신 뜻에 합당하게 하는 종들이 되고, 사사로운 생각대로 시벌을 좌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함이다.“주문:2 상소인 신○○ 씨는 공회 앞에 사과한다”고 하였는데, 상소인의 무죄가 밝혀졌기에 주문:1 대로 시무장로 직을 원상회복한다고 했을 터인데, 왜 공회 앞에 사과해야 하는가? 권 제2장 제15조에 의하면 “기소인이 치리회에서 선정한 위원이 아니요, 자의(自意)로 소송한 자이면, 개심(開審)하기 전에 치리회는 먼저 경계하되, 「송사가 허망하여 너의 악의와 결솔한 심사(心思)가발현되면 형제를 훼방하는 자로 처단하겠다」 언명할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피고 아닌 원고도 벌할 수는 있으려니와(피상소인 아닌 상소인을 벌할 수도 있으려니와), 상소인이 옳아 상소인의 시무장로 직을 원상회복한다면서 웬 사과냐? 또 사과를 명하는 일이 옳다고 가정해도 “왜, 무엇을”이라고 밝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그리고 공회라는 막연한 표시보다도 교회 앞에서 혹은 노회 앞에서를 밝혔더라면 더 좋았으리라고 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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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5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그의 나이 35세 때에 올드스게이트 가에서 성령의 감화를 받는 체험을 한다. 그는 그 전에는 성공회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은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올드스게이트 이후에는 행위 대신에 은혜와 믿음의 방법을 강조했다. 웨슬리의 체험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웨슬리는 올드스게이트에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했다. 그것은 웨슬리에게 구원의 확신과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넣어준 사건이었다. 그는 6월 11일 그가 새로 발견한 신앙의 골자가 들어있는 이른 바 ‘복음 선언’(evangeli cal menifesto)를 발표한다. 그 첫 내용은 구원으로 가는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그의 대속과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웨슬리는 4대째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대와 2대는 청교도 목회자였으나 3대째 웨슬리의 아버지가 영국 국교회로 개종했다. 그래서 웨슬리는 영국의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지만, 올드스게이트 체험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복귀해 영국 국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교리’를 가르쳤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국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칼뱅의 예정론은 반대하였지만, 신교주의(Protestantism)가 마땅히 루터와 칼뱅에 의하여 마련된 기초 위에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웨슬리는 스스로를 ‘한 책의 사람(Man of One Book)’으로 천명하면서 신학의 권위에 있어서 성경의 최고의 우위성을 인정하지만, 성경, 전통, 이성이라는 당시 영국교회의 신학적 권위 외에 경험을 추가한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체험의 신학자라고 불리우고,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을 ‘웨슬리의 4변형’(감리교회 신학의 사중표준)이라고 한다. 즉 성경에서 증언된 교리는 이성에 의하여 해석되어지며, 초대교회 시대부터 강조되어 왔으며(전통), 최종적으로 오늘 신자의 경험으로 확증된다는 것이다.웨슬리는 뛰어난 설교자였다. 동시에 웨슬리는 약 250여 권의 책과 전도 책자를 저술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평신도 설교자들을 임명하고, 이들에게 개인의 영적 각성이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성실하게 가르쳤다.또한 웨슬리는 복음을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하지 않고, 사회의 구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 교인들에게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를 사회적 영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신학의 최종 목표는 성결에 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원래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과정을 의미하고, 성결은 그것이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의 내적 변화를 의미하는 성화 과정은 하나님의 성화 은혜에 대한 인간의 동참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신인 협력설’이다.신학과 영성의 회복신학의 회복신학은 우리가 무엇을 왜 믿는가를 밝혀 준다. 그리고 신학은 단지 객관성만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또한 그가 행하신 일을 아는 인격적 지식이고, 신학자의 역할은 단순히 종교적 공식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의 삶을 신앙적 관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신학이 회복되어야 교리가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귈 때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이는 그 사람과 인격적 관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예수님 곧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인격적인 앎으로서 신학을 포함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신학의 회복은 곧 성경의 권위에 대한 회복이다.기독교 정통신학은 종교개혁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교의는 신앙고백으로 작성되고 있다. 장로교의 신앙고백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든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와 함께, 이를 문답식으로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신앙교육서도 만들었다. 성인용으로는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문답’이 있고, 자녀용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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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2
  • ‘이단 정죄’ 누가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을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당시 이스라엘의 전통을 지키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 주셨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이단이라며 엄청난 핍박을 가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기독교의 전도 대상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구분이 없다. 설렁 상대가 무당 혹은 점쟁이, 불교의 승려, 심지어 살인, 강도라도 누구나 전도 대상이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도 대상자를 선택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지상 명령을 따라 누구에게든 생명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진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느 특정인이나 어느 단체 혹은 교단이 예수 믿는 것을 선별, 결정할 권한이 없다. 필자는 금번 통합측 교단에서 이단으로 지목 받았던 4분(교회)을 이단 해지 했다가 다시 취소하며 성명서로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네 분(교회)은 “자신들의 지난날을 회개하며 이제부터는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감사의 눈물까지 흘렸다. 그런데 며칠이 못되어 다시 이단 되라는 성명서를 보고 얼마나 실망하고 낙심 했겠는가? 안타깝다.자신들의 과거를 회개하고 공식 지면을 통해 잘못을 인정하며 이제부터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하는데 안 된다고 하면서 다시 이단을 하라고 하는 한국교회는 우리 주님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진 것인가 묻고 싶다.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한국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한기총과 한교연이 통합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한교연에서는 한기총과의 통합반대를 위해 다락방을 빌미삼아 안 된다고 괴변하고 있다. 그런데 류광수 목사는 6년 전 개혁교단에 가입을 했고 개혁교단에서는 철저히 검증해 ‘이단성 없음’을 밝혔다. 또한 류광수 목사는 “한국교회가 지적하는 부분이 있으면 겸허히 수용하여 지도를 받겠다”며 각 신문에 그것도 교계뿐 아니라 일간신문(조선 동아일보)에 까지 성명서를 냈다. 그 후에 한기총에서 두 번이나(홍재철 대표회장 때와 현 이영훈 대표회장 재임 시) 검증을 해서 ‘이단성 없음’이 증명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도 없이 그냥 무조건 이단하라는 것이다. 이단이 뭔가? 성경을 부인하고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이다. 진짜 이단은 따로 있다. 설사 그 이단들이 회개하면 그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단을 정죄하는 그 교단에 속한 목회자 중에도 과거 승려 출신이나 이단에 빠졌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 내가 하는 것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것은 잘못 됐다는 것은 아집이다. 필자는 통합교단이 이단을 안 하겠다는 사람들을 ‘절대 안 된다’ 그냥 이단하라고 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이단을 안 하고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겠다. 진심으로 과거를 회개 한다”고 하는 그들을 무슨 권한으로 정죄 하는가 이다.예수님은 요일 1:9에서 “만일 우리가 죄를 자복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지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고, 행 16:31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목회 전선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불철주야 애쓰는 목회자들에게도 묻고 싶다. 여러분들도 전도할 때 사람을 구별해서 전도 하는가 이다. 인간은 주님 앞에서 서기 까지는 누구나 다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우리가 무엇인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진정한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서두에 말한 대로 우리의 전도 대상은 ‘누구나’ 이다. 심지어 타 종교를 믿는 사람도 전도 대상인데 과거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들을 '안 된다 너희는 계속 이단하라'고 한다면 과연 주님께서 그들에게 뭐라고 하실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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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2
  • 수필 - 최건차목사
    C-레이션(Combat Ration)은 미군들의 전투식량으로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이다.내가 C-레이션을 처음 접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었다. 남한에 사는 국민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보내준 옥수수가루와 분유를 받아먹을 때였다. 한번은 갈색종이상자에 든 것을 배급받았다. 그것도 가구당 1개 정도는 다 받았던 것 같다.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크고 부자이기에 옥수수가루와 우유가루에 이런 것까지 다 보내주는가 싶어 감격했고 몹시 부러웠다.우리는 영어를 읽을 줄 몰라 그냥 열고 보니 국방색 깡통이 쏟아져 나왔다. 깡통따개가 들어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수단방법을 다 써서 뚜껑을 열고 보니 각각 다른 음식물이 여러 가지가 들어있었다. 빵, 복숭아통조림, 콩이 섞인 돼지고기, 감자를 으깨어 섞은 닭고기볶음, 비스킷 등이었다. 그 외에도 작은 약봉지 같은 질긴 갈색종이봉지에는 설탕, 분유, 검정가루, 소금, 후추가루가 들어있었고, 별도로 카멜양담배 4개비에 성냥과 바둑 껌까지 들어있어 요즘의 표현으로 환상적인 종합선물세트였다.그 중에 작은 종이봉지에 든 설탕과 분유는 달고 좋았는데, 알 수 없는 검정가루가 무엇인지 궁금한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급한 김에 설탕처럼 먹어보려다 소태처럼 쓴맛에 놀라 내버려뒀는데 침이 묻은 부분이 굳어져서 고약처럼 돼 버렸다. 누군가가 다친데 바르라는 약인 게라고 해서 환처에다 발랐는데 나았다는 것이다. 나도 다친 무릎에다 그것을 발랐다.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몰려든 부산에서는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이 C-레이션 박스를 많이 사용했다. 나는 6·25 전쟁 때부터 시작하여 카투사와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C-레이션을 많이도 먹었다. 카투사하사관으로 왜관 캠프캐롤에서 복무하던 1965년 여름, 폭우로 전방의 미군진지에 피해가 발생했다. 내가 소속한 미44공병부대가 화물열차에 장비와 C-레이션을 잔득 의정부로 향했다. 한강을 건너 동부이촌동을 지나게 되는데 철로주변이 온통 판자집들이라 천천히 달리게 되었다. 미군 화물열차를 보고 아이들이 달려 나와 무엇을 달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화차 뒤 칸에 잔득 실린 박스를 풀어 무조건 밖으로 던지게 했다. 그것은 그냥 싣고 갈뿐 그 숫자나 처리에는 무관심 할 정도로 물자가 풍성했고, 화차에 실린 것은 내 책임으로 처분할 수가 있었기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맘껏 인심을 써버렸다.의정부역에 도착하여 트럭에 옮겨 타고 달려간 곳은 경기도의 끝자락 운천이었다. 그곳에는 캠프 카이져라는 병영에 미7사단의 1개 여단이 주둔하고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리틀타이거라는 태국군 부대가 있었다. 캠프내의 제반시설이 왜관 캠프캐롤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해 보였고 서울에도 잔디구장이 없을 때인데 야구를 즐기며 미식축구를 하느라 잔디가 넓게 깔려 있는 것을 보고 심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C-레이션은 관심 밖이었고 식당에서 A-레이션으로 제때 조리해 주는 식사를 하면서 한 달여를 지내다가 왜관 캠프캐롤로 복귀했다. 1940대로부터 60년대까지가 미국의 최전성기였다. 해외주둔미군들에 대한 예우는 당시 미국의 중산층이 먹는 식단과 생활수준이라고 했다.미군들 식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상이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훈련된 미군이 세계유일의 최강의 군대인 것을 식사에서부터 알아볼 수가 있었다.A-레이션(A-Ration)은 고정된 부대에서 일상적으로 빵을 굽고 계란, 고기류, 신선한 야채 등으로 조리를 해서 먹는 식사다. B-레이션(B-Ration)은 야외에서 집단으로 훈련을 할 때 간단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식단을 말한다. 나는 미군들과 문화탐방과 해수욕을 갈 때나 밖으로 외출을 할 때 식당에서 싸주는 점심을 가지고 다녔다. 아무데서나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샌드위치와 종이팩에든 우유나 주스, 오렌지나 사과를 봉투에 넣어 다녔는데 그런 게 B-레이션이었다.C-레이션은 문자 그대로는 전투를 할 때 먹는 비상식량이다. 미군은 1950년대로부터 60년대까지는 상당히 개량된 것으로 한 박스에 12개가 들어 있었다. 간단하게 한 박스만 가지면 참호에 들어가 조리를 하지 않아도 골고루 먹으면서 나흘이상 싸울 수가 있었으니 대단한 아이디어의 전투식량이었다.베트남전이 한창일 때는 그것이 미군과 한국군의 전투식량이었지만 베트남인들이 더 좋아했고 베트콩들에게도 이상적인 전투식량이 되는 생명줄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미군들의 보급기지 캄란에서 그것을 트럭이나 큰 트레일러로 싣고 나오다 샛길로 빠져 정글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게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결국에는 베트콩들의 전투식량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군과 적이 미군의 전투식량을 나누어 먹으면서 전쟁을 했던 것이다.나는 베트남에서 얼마간 보급차량을 호송하는 칸보이 소대장이었다. 처음 나간 작전이 C-레이션과 철조망, 판자, 양철, 모기장 등을 12대의 트럭에 싣고 캄란에서 베트콩 소탕작전을 벌이는 팜랑까지 운송하는 작전이었다. 선두의 지프차에는 나와 운전병 이외도 뒤좌석에 기관총사수와 또 한 명의 무전병이 탑승하고 있었다. 위장한 철모에 미제 방탄조끼를 입고 완전무장으로 출동을 하지만 베트남전에서 가장 위험하고 적의 타깃이 되는 것이 바로 병력과 보급품 수송 차량의 선두호송차량이었다. 각 트럭에는 운전병과 조수가 M16으로 무장을 한 상태로 식사용 C-레이션을 싣고 다녔다. 정글사이나 들판을 지나 해안가로 가는 곳도 있었지만 도로의 사정이 좋지 않아 기습을 받을 우려가 많았다.어느 날은 캄란에서 17대의 차량에 C-레이션과 보급품을 실고 투이호아로 가는 작전이었다. 캄란기지를 벗어나 해안가에서 휴식을 하게 되었을 때 선임하사관이 소대장님을 위하여 특식을 만들겠다며 수류탄 투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요청했다. 조심하라고 허락하였더니 바다로 흐르는 물에다 수류탄 몇 발을 투척하여 숭어를 잔득 건져와 전투식량에서 나온 소금을 쳐서 구워먹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요즘도 그때의 정경이 가끔 떠오른다.투이호아는 백마부대가 맹호부대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최북쪽으로 지형이 험난한 곳이라고 했다. 차량 17대를 이끌고 백마사단사령부가 있는 닌호아의 해변 야자수 아래에서 C-레이션으로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해풍을 맞으러 놀러 나온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자니 전쟁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장거리 소풍을 가는 것처럼 투이호아를 향해 이동하는데 해안이 끝나면서 큰 산악이 앞을 가로 막았다. 간이역이 있는 마을 앞 철로에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베트콩들에게 당한 기관차와 객차가 넘어져 불에 타고 있었다. 일단은 경계를 하면서도 병사들은 비슷한 광경을 늘 보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들이다. 우리는 차량들을 세우고 경계를 하면서 마을로 들어갔다. 우리가 온 것을 보고 몰려나온 어린아이들과 주민들에게 C-레이션을 나누어 주면서 야자수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총으로 쏴서 따먹으라는 것이다.선임하사관과 고참병들이 M16을 냅다 쏘아 올려 야자수열매를 몽땅 떨어뜨렸다. 온수가 되어버린 수통의 물 대신 시원한 야자수액을 양껏 마시고 몇 개씩을 챙긴 다음 대관령 같은 험준한 바위산 길에 접어들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베트콩이 수류탄을 던지며 기습을 해올 것 같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때 갑자기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여 꼼짝없이 당했구나 싶어 순간적으로 고국에 두고 온 아내와 첫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 이르면 오히려 차분해 지고 중요한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가 싶었다. 내 지프차에서도 기관총이 발사되면서 커브를 도는데 아군 뒤를 돌아보니 헬기가 기총사격을 해대는 게 보였다. 내 뒤로 보급차량이 오리새끼들처럼 따라오고 있었다.베트남에서 돌아 온지도 반세기가 다 됐다. 6·25 전쟁까지 심하게 겪은 탓에 늘 먼 곳으로 피하고 싶어져서 깊고 낮설은 산을 찾아 오르며 C-레이션을 떠 올린다. 적이 공격해 올 것 같은 생각에 경계를 하며 계절과 웬만한 날씨에도 산행을 하면서 배가 고파 도시락을 먹을 때면 피난 때의 치열한 전황을 떠올리게 된다.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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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2
  • (특별기고) 570돌 한글날과 한글민족
    얼마 전 「사민필지」를 접하게 되어 130여 년 전의 감동을 받으며 읽게 되었다. 「사민필지」는 고종황제가 1884년 육영공원을 세우고 미국정부에 교사를 초청해 헐버트선교사가 조선에 온 지 3년 만인 1890년 출간된 한글전용 교과서이다. 헐버트 선교사는 한글의 과학적인 구조와 그 편리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았고 또한 이렇게 뛰어난 한글이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홀대받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세계의 지리지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이자 지리총서로 세계를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세계를 알리고, 한국을 모르는 세계인들에게 책으로 한국과 한글을 알린 것이다. 한글로 편찬하여 배포한 결과 한글보급은 물론 육영공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인기가 높았지만 순한글로 기록했다는 이유로 순한문으로 다시 출판되기도 했다. 한글 보급 역사상 최초의 「한불자전」과 「한영자전」 등을 만든 것도 선교사들의 역할이었다. 특히 1884년부터 펴낸 쪽복음과 「예수성교전서」를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선교사 중에는 언더우드와 게일의 역할이 컸다. 그들의 한글사용이 오늘날 한글민족과 문맹 제로의 국가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 1894년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박사도 순 한글 신문을 제작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인 경술국치를 맞았다. 이런 시대상황에서도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 당시 주시경 선생의 「국어문법」과 「말의소리」는 우리말의 체계를 정립한 최고의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한반도에 대한 문화 정치 시대에 우리말을 연구하는 내국인 학자들이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말 사정, 외래어 표기법 등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우리말 연구 기관일 뿐만 아니라, 우리말과 우리글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나아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우리 민족 모두에게 알린 실천 기관이며 민족 기관이기도 했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 선생 등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전에 창립되어 식민지 기간을 거쳐 오면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큰일을 감당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란 기구를 만들어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가장 어려운 고통은 정신문화를 말살하고자 한 창씨개명과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특히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신사참배는 교회핍박이었다. 일본은 한글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다. 교과과정에서 한글 교육은 사라졌다. 특히 찬송가와 예배순서에도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기미가요를 부르게 했으며 일왕이 있는 곳을 향해 절하도록 했다. 전국의 학교와 면소재지에 신사를 세워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세계 문자 가운데 한글, 특히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한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이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다. 그래서 한글은, 정확히 말해 [훈민정음 해례본]은 진즉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실 한글은 우리 민족이 창조해낸 위대한 문자이며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의 미래이다. 한글은 표음문자(사람의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문자)로서,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쓰이게 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음절구성의 원리가 간단하여 배우기가 쉬운 문자로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금년은 570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이자 오늘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1443(세종 25)년에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모두 28자로 이루어졌다.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했는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9일이 된다고 한다. 이 때 [훈민정음 해례본]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반포할 때에 찍어 낸 판각 원본으로 전권 33장 1책으로 되어 있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서문인 예의(例義)와 정인지 등이 지은 해례와 정인지 서(序)로 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이자 현재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국보 제1호는 남대문이다. 남대문은 1933년 조선총독부가 국보(당시 명칭 보물)를 지정하면서 그 첫 번째 목록에 올렸다. 숭례문은 광복 7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국보 1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얼마 전엔 화재와 부실시공 논란에 휩싸이면서 국보 1호로서 품격 등에 큰 손상을 입었다. 더 이상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숭례문은 대한민국 국보 1호로 자격도 없어 보인다. 이제는 건축물에서 정신문화의 상징인 훈민정음으로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한글의 투쟁」 서문에서 최현배 선생은 쓴 길이 기억난다. “한글은 우리 겨레의 정신문화의 최대의 선물이며, 세계 온 인류의 글자문화의 최상의 공탑이다. 이는 우리의 자랑인 동시에 또 우리의 무기이다. 이를 사랑하며 이를 기르며, 이를 갈아 이를 부리는 데에만, 우리의 생명이 뛰놀며, 우리의 희망이 솟아나며, 우리의 행복이 약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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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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