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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직한 삶
    ‘하나님은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 성서의 말씀이다(전7:29). 본래(本來)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 중에 하나가 ‘정직’이다. 이 마음은 바르고 곧아 정직하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은 세상을 구원하러 십자가를 지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한 삶으로 세상의 삶을 이기시는 순수하고 곧은 삶의 사실(fact) 그대로를 보여 주셨다. 이러한 삶을 삶으로 사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대로 삶을 사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인간은 거짓된 모습으로 바르지 않는 삶을 산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뜻)를 배반하고 자기의 욕심의 행위대로 사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에 우리는 뱀처럼 재빠르지 말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시고 정직한 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실한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다. 참과 거짓을 동시에 말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다. 거짓을 상징적으로 배우게 하는 것은 뱀이다. 뱀에게는 두 갈래의 혀가 있다. 두 갈래 혀를 가지는 것은 한 입으로 참과 거짓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이는 참과 거짓이 동시에 존재한다. 예컨대 서부개척기의 혼탁한 미국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덕적 수양을 들고 나온 벤저민 프랑크린(1706.1.17-1790. 4.17)은 미국철학협의회의창립과 미국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잡은 그는 정치, 사회, 과학, 문학 등등의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한 삶에 대하여 원칙’을 세우는 그의 슬로건은 “최상의 정책은 정직”이라 한 말이 요즘 우리 사회의 삶의 정황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니게 한다. 그 예로서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톤이 미국의 처음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마음의 태도는 “정직함“의 실천에 있었다. 조지가 어렸을 때 자기 집 마당에 벚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그 한그루 나무를 호기심에 가득찬 마음으로 자기 도끼가 잘 드는지? 안 드는지? 매우 궁금한 끝에 조지가 힘껏 내리치자 벚나무는 금방 쓰러졌다. 이에 당황한 조지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한참 후에 아버지가 돌아와 보시고 화가 치민 아버지에게 조지는 그 현장에서 숨김없이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말하고 잘못을 구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여기에서 그의 솔직하고 진솔한 사정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당장 웃으시며 ‘솔직하게 말해 고맙구나!’ “너는 정직한 아이로구나”하시며 그를 용서해 주시는 칭찬을 듣게 된 이후 그는 삶의 지표를 ‘정직함’에 두었다. 옛날 우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정직함’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1789년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의 승리로 독립한 후 미국의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은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제2대 대통령만하고 법에 따라 권유하는 3선을 하지 않고 물러나서 세계 최초의 자연스러운 권력 승계가 이루어졌고 이 전통이 세계 모든 나라에 귀감이 되는 민주주의 체제를 이룩하여 세계가 우러러 보는 오늘의 최강대국이 되었다. 지난 우리나라는 11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에 대하여 눈물로 참회하는 모습을 시청하게 되었다. 이는 모든 국민들이 절감하게 느끼는 것은 “정직은 최상의 법”이라고들 한다. 또한 성서의 시편12:1-8에 보면 오늘의 우리나라의 꼴을 장하게 표방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여기에 지도자는 바로 공정한 법으로 악한 사람으로부터 선한 사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어 선한 사람을 압제하는 것은 잘못이다. 문제는 삶의 근본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를 알게 한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삶의 바탕을 이루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삶은 보이기 위해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최선을 위해 ‘정직한 마음으로 그 삶을’ 그대로 삶을 나타내서 사는 것이다. 정직(正直)은 사실이나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참’으로 ‘바르고’ ‘곧장 진실’만 있고 거짓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 정직해야 할 이유를 성서의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는 곧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할 까닭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 중에 하나가 ‘정직’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1-24
  • 최고의 삶의 가치
    오늘의 인류는 생명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나온 20 세기 이래로 인류의 삶을 지배해 온 문명은 인간과 자연 의 생명 권리를 빼앗아 갔으며 더 나아가 후생들의 생명 권리까지도 빼앗아 간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고 또 인류의 삶에 지대한 유익을 끼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발전에 바탕을 둔 산업화로 말미암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인류와 지구 온 생명체의 생존에 위협을 주고 있음을 보면서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은 신대륙을 찾아 산업혁명 등에서 계속적 인 추진력이 되어 왔기에 밴자민 프랑크린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 서구인을 보게 하면서 “바르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은 거기에 따른 의미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대륙 발견 후에 산업혁명 등에서 계속적인 추진력이 되어 왔으며 그는 삶에 “정직은 최상의 정책”이라는 말을 한 점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를 살다보면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정직과 성실 등의 전통적인 모럴로서는 불가능하여 오늘의 삶의 구조는 융통성과 유연성이 더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는 삶에 실제로 실리주의 사고방식으로 살게 된다는 현실의 삶에서 이를 알게 한다. 즉 현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생활을 하다보면 정직과 성실 등은 바보들이나 사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추세로 살다 보니 여기에서 신앙이나 가치관 등은 도외시 되는 경향으로 살아간다. 여기에 신학자요 신앙가인 ‘본 훼퍼’는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만들어졌기에 절대자를 찾는다.”고 하면서 “인간은 구원받기에 충분하고 그 믿음으로 생명을 산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간 사회의 절대적 가치는 근대화를 탄생한 서구 문명의 정신적 바탕을 생명의 그 역사를 보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그리스 그리고 로마 생활의 삶을 알게 한다. 이 두 가지 정신적 조류는 서 로 상극하면서도 서로 융합되어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서구인의 정신계를 풍요하게 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본주의와 그로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기점으로 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자기 삶에 사명감으로 생명의 삶을 살게 한다. 이는 곧 서구 문명의 윤리기반이 됨을 주목하게 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만들어졌기에 절대자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서는 인간이 구원받기에 충분하여 진리로 통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연계의 힘에 순응하거나 부딪히며 문명을 발전 시켜왔고 과학 등의 발달로 힘이 더 생기자 착취로 나아간 것이 오늘의 우리들의 생명의 삶에 문제를 야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진화론자의 말을 빌리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되었다. 그러나 성서는 모든 피조물이 이런 구속(회복)을 신앙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중세기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도 모든 사람은 신앙을 행동규범의 초석으로 삼아왔다. 여기서 막스 베버가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위 정신”에서 역설했듯이 종교개혁은 근대 자본주의 제도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칼빈주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교리는 경제인들에게도 자기 직업을 하나님으로 부터 일시 위탁받은 청지기의 관리관을 갖게 함으로써 이런 신앙적 사명감과 금욕주의 위해 근세 자본주의제도가 발달하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근대화를 탄생한 서구 문명의 정신적 바탕을 한 절대적 가치에 그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그리스 그리고 로마철학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두 가지 정신적 기류가 서로 상극하면서도 서로 융합되어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서구인의 정신계를 풍요하게 했다.이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본주의와 그로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기점으로 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게 한다. 이것은 서구문명의 기본적 윤리가 됨을 알게 한다. 오늘의 인류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죽을 때 까 지 삶을 누리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을 위해 누리고 산 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의 목적을 가지고 올바른 생명 관으로 이웃과 그리고 자연의 피조세계와 더불어 사는 생명관도 중요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1-10
  •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웃사랑 2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기는 했으나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컸던 19세기 도덕사상가 로서의 인정받고 있다는 점은 정한 이치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기는 했으나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컸던 19세기 도덕사상가로 인정받고 있을 뿐이다. ‘톨스토이즘’의 근간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실체의 파악, 형제애, 범노동, 비폭력, 폭력 혁명에 대한 무저항, 범세계주의, 네 복음서에 기초를 둔 원시(原始) 그리스도교의 확립, 평화주의, 사유 재산의 부정, 모든 문화, 문명, 과학과 예술의 폐기, 국가와 그 모든 제도, 특히 교회의 기피이다.성서에서 사람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삶에 대한 답이다. 신학이나 과학, 철학, 문화, 인류학의 기본적인 물음으로 인간의 내적인 구조와 가치에 대한 의문으로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다. 여기에 인간의 삶의 구성 요소는 무엇이고 사람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 여기에 일반적으로는 ‘영혼(靈魂)’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고 ‘영’과 ‘혼’, ‘육체’의 세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인간은 물질적 요소인 ‘육체’와 비물질적 요소인 ‘영’ 그리고’혼’도 그 구성함을 말한다(창2:7,마6:25,고전5:3,5).이는 창조시 혹은 잉태시부터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으며 죽음을 통해서만 갈라진다. 이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 혼이라는 것은 영혼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영혼의 한 속성으로 보며 혼을 인간과 동물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적용함으로 ‘혼’과 ‘영’이 동일한 표현으로 보여 준다. (전3:21, 사42:1, 렘9:9) 다만 인간의 영, 혼은 짐승의 ‘혼’과 질의 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짐승의 혼에는 단순한 의식, 기억, 정신은 있지만 하나님의 속성인 고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없으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이성과 양심과 불멸성은 없다. 여기서 아는 것은 사람에게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불멸의 영혼이 있고 이 영혼은 육이 죽어 썩어 없어질 때에라도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희망으로 가득하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어 마음에 찔림을 받는 가책(呵責)을 갖는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삶은 죄에 의해 양심의 고통을 당하는 생활을 한다. 양심의 고통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에서 용서를 받는다. 마치 빚진 자가 모든 빚을 탕감 받고 그 채무로 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과 같은 진리의 길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삶의 영이 살아난다.우리에 정신인 생각, 지식이 나의 영보다 높아지면, 영으로서 신령한 생명에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혼(魂) 속의 나를 부인(否認)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도 구원된 삶을 살게 된다.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에 일을 생각(혼)하나니 내 속에서 영을 따르려는 생각을 가질 때 내 안에서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영적 전투를 할 수 있는 것(롬8:5)을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6절에서는 “육신의 생각(혼)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영생)과 평안이니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육신은 혼에 무조건 따라 간다. 그러므로 혼이 영에 순종치 못하면 자기 생각이 높아 영의 소욕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교만이다. 사도 바울도 이 교만 때문에 “세상 것과 율법과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함을 알게 한다. “양심과 영혼의 삶”을 살려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요한복음은 말씀하신다. 모든 만물은 심어 거두는 하늘의 이치를 터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썩은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육의 소욕은 옛사람으로서 껍질에 불과 하다. 혼에 의한 몸의 소욕일 뿐이다. 혼 (마음)에 의해서 몸은 움직인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란 주 앞에서의 내가 죽어질 때 성령님이 주시는 영으로 자라서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한다. “영에 소욕과 육신에 소욕은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웃 사랑”을 하는 것이지 자기의 힘이나 소유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1-02
  •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웃사랑 1
    모든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 흔적이 새겨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자유의지가 같이 하는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형상(첼렘)은 ‘그림자’라는 뜻이 있다. 이런 표현에는 인간 성찰을 위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못할 때 그림자처럼 허무하고 헛된 인생살이가 되고 만다는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선포이자 참된 인간성이 회복해야 함을 알게한다. 여기에 삶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과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인간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진지하게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접근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뉴스와 신문을 통하여 전지구적 가난과 전쟁과 분쟁과 갈등의 소식을 듣지만 남의 이야기로 들일 뿐이다. 누군가 해결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지나간다. 세상에는 남이란 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본연의 뜻이 여기에 있다.1890년 말 대기근이 러시아를 덮쳤을 때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등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삶에서 실천한 작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문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톨스토이주의’가 잘 드러나는 그의 후기 작품은 동화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곳곳에 숨겨진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삶의 지혜는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여기에 평생 빈민 운동에 헌신한 프랑스 성직자 ‘아베 피에르’ 주장처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자세를 피력한 신부의 주장을 오늘의 성서의 말씀에서 살피게 한다. 어느날 피에르 신부에게 파산한 기업인이 삶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피에르 신부의 조언을 듣고 싶어서 찾아 왔다. 피에르 신부는 그 날도 노숙인을 찾아다니며 옷과 음식 나누어 주는 사역으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파산한 기업인이 지속적으로 상담을 요청하자 피에르 신부는 지금은 노숙인을 도와야 하니 ‘지금은 나를 좀 도와주고 당신의 긴박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이 끝나고 들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고 이해를 구하고 함께 노숙인 돕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파산한 기업인은 피에르 신부를 돕다가 자신의 삶의 긴박했던 문제를 잊어버리게 되고 자살까지 하려했던 극단적인 생각도 멈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파산한 그 기업인은 피에르 신부의 가장 적극적인 조력자로 인생의 새출발을 했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전 지구적 가난에 직면하여 있다. 특히 서민경제의 파탄소식이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 우리나라의 서민들의 삶도 생활자금을 대출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듣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실적 삶에 대하여 잠언은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여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를 하나님의 지혜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톨스토이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정부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믿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했고,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인 경제결정론이나 폭력적 계급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0-21
  • 시대정신은 궁극적 관심
    한 시대의 그 사회에 널리 퍼져 그 시대를 지배하거나 특징짓는 정신을 시대정신이라 한다면 그 시대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 역사가의 사관(史觀)이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역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점을 전제하고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다. 시대정신은 역사의 과정과 결부시켜 그것을 개개인의 정신을 넘어선 보편적 정신세계가 역사 속에서 삶을 전개 시켜나간다. 고대에서 근세까지 정신의 발전 단계를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3단계로 나누어 왔다. 그리하여 유물사관적 입장에서 보면 시대정신은 이데올로기로서 각 시대의 경제적 구조에 의존되어 왔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은 독일의 J.G.헤르더가 1769년에 맨 처음 사용했다고 하며, J.W.괴테도 《파우스트》 속에서 이 말을 썼으며, 시대정신을 역사의 과정과 결부시켜 그것을 개개의 인간정신을 넘어선 보편적 정신세계가 역사 속에서 자기를 전개시켜나가는 각 과정에서 취하는 형태로 본 것이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그것을 또한 민족정신과 결부시켜 동양·그리스·로마·게르만의 4단계로 구분하였다. 또한 A.콩트는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기까지의 개인의 정신적 성장과정과 비교하여 고대에서 근세까지의 정신의 발전단계를 신학적·형이상학적·실증적 3단계로 나누었는데, 이것도 시대정신을 구분하는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대정신은 이데올로기로서 각 시대의 경제적 구조에 의존하게 된다. 여기에 정신적 경향이 무엇을 움직이는가? 하는 점을 갖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시대의 물질적 생산이나 경제적 풍요한 생활에 거리를 갖게 되는 점을 감안하게 한다. 교회는 인생의 목적에 대한 질문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 혹은 ‘예수를 따르는 삶(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다운 삶, 제자도)’j이라고 일러준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표현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백성(=시민)이라 일러준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하고 그 첫 번째 열매가 되신 예수를 따르는 삶을 따르라고 가르쳐 준다.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궁극적인 언어가 거침없이 선포되지만 그 내용이 전혀 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구원, 창조, 종말, 사랑, 칭의, 하나님나라, 회심, 섭리, 예정, 성령, 삼위일체 같은 궁극적인 용어들이 중구난방으로 선포될 뿐이지 실제로는 그것의 궁극적 현실성을 상실한 설교가 오늘 한국교회 강단을 지배하고 있다.그것은 현실(reality)인가, 관념(idea)인가? 그것은 생명을 담지한 세계인가, 공허한 언어로 가득함을 알게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계획과 통치에 영혼을 의지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현재 잘 살고 못사는 결과만으로 어떤 사상과 정치이념들을 재단할 수는 없다. 다만 “궁극적 관심”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정신”은 “궁극적인 관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까지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지는 못한다. 이 궁극적 관심을 갖느냐 안 갖는가만이 문제 해결이다. 우리의 실존적인 존재 또는 비존재를 결정한다. 세상의 한정적으로 좋은 것 거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면 신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폴 틸리히’가 보기에 신앙은 어떤 진리 또는 교리에 의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바른 사고의 방법이나 지식이나 희생이나 교리 같은 괴상한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만으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고 하는 신학자 ‘폴 틸리히는 “사람은 직접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 속에서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된다” 고 한다. 이 “궁극적인 관심”이 유한하고 실존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자는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그 자세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다. 반면에 신학자는 실존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우리를 위한 존재의 의미에 관심을 갖는다.”그러므로 구도자는 ‘자신의 궁극적 관심이 머무는 곳’을 보아야한다. 구도자는 삶에서 일어나는 실존적인 질문과 신앙적인 답변에 의존해서 신앙의 내용으로 삶을 살도록 노력하며 기도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0-12
  • 추수감사절과 추석
    음력으로 8월15일은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로 추석, 한가위, 가배, 중추절로 지내게 된다. 여기에 중추절은 가을을 초추, 중추, 종추 3달로 나누어 음력8월이 중간에 들었음으로 중추절이라 한다. 이때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로 음식을 장만하여 차례를 지낸 명절이다. 한국의 전통 4명절인 설날, 한식, 중추, 동지에는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추석 차례 또한 조상을 기리는 추원보본(追源報本) 행사이다. 호남지방에서는 '올벼심리'라 하여 그 해 난 올벼를 조상에게 철을 따라 새로 나는 물건을 먼저 신에게 올리는 일(薦新)로 천신제를 지내며 영남 지방에서는 '풋바심'이라 하여 채 익지 않은 곡식을 천신 할 목적으로 베어 감사하는 제사를 지낸다. 말하자면 추석은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로서 조상들의 은덕을 감사하여 조상들에게 성묘를 하며 제사를 지낸다. 추수감사절도 전통적인 북아메리카의 휴일로 가조들끼리 모여 칠면조를 비롯한 여러 음식을 만들어 먹고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미국에 도착하여 농사를 지은 후에 첫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지낸대서 시작함을 알게 한다. 성서의 유대인의 명절인 수장절. 맥추절을 지키며 여기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전통으로 지내오고 있다.오늘의 교회는 절기 예배와 여기에 걸맞은 그 시절의 절기 문화와의 접근이 필요하다. 자연적인 가정의 형성에서 같은 혈통으로 된 할아버지 이상의 대대의 어른. 선인. 조상들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풍습과 오늘의 후손들이 신앙하는 예법에 따른 의식을 감안하여 예의를 갖추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지키어야 한다. 여기에 따르는 교회는 전통문화와 교회절기 문화갱신이 필요하다. 이는 '나눔과 섬김'이라는 교회 본래의 의미로 돌아가 이웃과 민족을 위한 공동체의 거듭남을 지키어야 한다. 이는 곧 교회 절기문화의 갱신으로 민주적 개선과 교회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예배와 문화의 갱신으로 절기문화를 생각해야 한다. 이는 서구문화 중심의 예배의식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민족 고유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 주체적으로 이를 하나님께 예배하는 중점으로 드려지는 예절을 찾아야 한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선교2세기를 맞는 예배 순서를 심도 있게 신학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이제는 교회가 사회봉사와 선교에 지향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 실례로 보면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의 3대 명절은 유월절과 오순절, 장막절이다. 이 절기 문화가 가나안 점령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가나안 문화와 복합하여 토착화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면서 알게 하는 것은 개신교도들이 유럽에서 부터 크리스마스를 거부해 왔음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미대륙으로 와서는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거부해 오다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청교도 신앙의 차원에서 절기문화를 수용함에 청교도 문화를 새로이 하여 11월 셋째주일을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크리스마스 절기를 지키어 왔음을 알게 한다. 교회는 성숙하여 삶의 공동체로 삶의 질을 가지고 성장 성숙해 가야한다. 오늘의 교회가 성장만을 위하여 경제적 원리에 사로 잡혀 예배의 구성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며 설교위주의 화끈한 말들에 양적인 성장으로 일이 되어 가는 모양이나 그 결과로 인본주의에 길 들여져 있어 교회의 모든 에너지는 양적인 팽창으로 규모가 커지거나 수량이 늘어남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이는 최고의 가치가 교회에도 맘모니즘으로 부자, 재산, 돈, 소유, 재물 등 물질을 축복으로 이해한다. 본디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의 그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나눔을 통해 그늘진 곳에 복음의 빛을 발휘해야 한다. 절기의 모든 의미는 내가 가진 것을 이웃을 위해 나눔에 있다. 여기에 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교회의 본래 의미의 예배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한 예배를 교회의 문화의 갱신으로 서구 문화 중심의 예배의식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 주체적으로, 신학적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려지기 위해 예배 진행의 절차를 연구하고 기도해야 할 시기를 오늘의 교회는 바로 눈앞에 당면하고 있다. 이는 오늘의 한국 교회가 사회봉사와 선교에 사용하는 선교 지향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9-23
  • 계시 받은 신앙 2
    신앙과 계시 중에서 무엇이 먼저 인가? 계시를 계시로 인식하려면 신앙이 필요한가? 아니면 신앙을 갖기 위해서 계시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제시하려면 내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며 나의 순종을 요구하시며 하나님은 나를 위해 모든 능력을 가진 분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의 말씀의 결합이라 한다.(고전1:24,요한1:14). 예수는 말씀하는 자, 궁극적으로 메시지를 주는 자, 그리고 메시지의 내용은 모두 한분으로 같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언자들은 자신의 권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와 메시지의 주인에게서 비롯되는 권위로 말하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계시의 충만함이다(요한14:9). 그러나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계시의 업적보다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세움이나 화해, 속죄, 등의 업적에 많은 강조를 두고 있다. 그러기에 계시와 구원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게 한다. 신약성서의 특별 계시는 예수라는 사람의 말씀과 행동이 합한 형태를 가진다. 인격적 하나님은 오직 한 인간의 삶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해서만 올바르고 충분히 계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의 말씀의 결합임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계시는 난해할 필요가 없고 위험해서도 안 된다. 요한계시록 첫 세 장의 실제 저자는 예수다. 예수가 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일곱 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전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뿐이다. 예수는 그들의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격려하고 있다. 그런데 4장의 첫머리부터 천사나 용 같은 상징들이 나오면서 내용이 난해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기본 메시지는 단순하다. 성인들은 세속의 권력이 가하는 무시무시한 박해를 견뎌낼 것이고, 결국 신이 승리해 박해받던 자들이 천상의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내용일 뿐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도들은 수백 년 동안 요한계시록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신앙적 박해가 근절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도들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성서의 말씀들은 신앙의 기록이다. 성서의 ‘계시’ 수용은 초자연적으로 전달된 명제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성서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과 대면하는 살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을 말한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챙겨야 할 것은 계시신앙의 개념은 계시에 대한 비성서적인 관점이 포함되며 자연신학은 계시신학에 못지않게 계시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구분은 자연신앙이 계시신학에 못지않게 계시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구분법은 자연신앙이 계시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이지 못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자연신앙을 복권시키기 위해 실제로 자연신앙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철학이나 변증으로 분석하여 종합적으로 증명해 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계시를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다.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피조세계나 인간의 도덕적 의식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일반 계시’를 받고 살아간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로서 고백하면서 인격적으로 정의 실현과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역사의 과정과 인간의 이성 속에 있는 계시를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으로 표출된 삶의 길을 가야 한다. 피조물은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반영해야 한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나, 그리스도의 삶에서 나타내 보이신 많은 사건들 속에 '특별계시'로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들 속에 나나내 (자기를 나타내 보이심과 같이)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신앙과 교회생활에서 이를 알고 믿어 이를 증언할 수 있을까? 하는 신앙을 가져본다. 성서의 말씀들은 신앙의 기록이다. 성서의 계시 수용은 초자연적으로 전달된 명제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성서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과 대면하는 살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을 말한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나, 그리스도의 삶에서 나타내 보이신 많은 사건들 속에 ‘특별계시’로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들 속에 나나내 자기를 나타내 보이심과 같이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의 게시’를 어떻게 신앙과 교회생활에서 이를 알고 믿어 이를 증언할 수 있을까? 하는 ‘계시 받은 신앙’을 가져본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9-08
  • 계시 받은 신앙 1
    사람은 흙과 같은 물질이며 동시에 풀이나 새와 같은 생명의 존재요 인격과 정신을 가진 영적 존재이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물 중에서도 영묘한 능력을 지닌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영장이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대한 질문은 “하나님, 인간, 세상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실제의 문제 제기에서 이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기초이며 내용이 된다. 또 ‘하나님, 인간, 세상에 대해 어떻게 말 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여기에 계시(啓示revelation)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며 내용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리스도교의 신앙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신성에 대해 계시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내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라는 단어는 계시하는 행위와 계시된 내용을 가르키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격에서 이를 알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격성이 그러한 것과 비슷하게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신다. 그러므로 계시(revelation)를 이해하는 유비(類比analogy)는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볼 수 있다.계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기초이며 내용이다. 하나님에게서 자기 계시가 없다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리스도교의 신앙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신성에 대해 계시(啓示)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내용을 이룬다. 여기에 ‘계시’라는 단어는 사람의 지혜로는 알지 못할 일을 하나님이 깨우쳐 보이게 하시는 행위와 계시된 내용 모두를 가리킨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계시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이시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는 계시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유비는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신적인 현실이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참고로 이해해야 할 것은 19세기 이전의 그리스도교에서는 계시를 다르게 이해했다. 계시의 전통적인 견해는 성서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 기초한다. 즉 성서는 성령에 의해서 한 단어씩 구술된 것이며(축자영감설), 그것은 축자영감된 것이므로 오류가 없고 틀림이 없다고 본 이 관점은 초기 원시 그리스도교 교회가 유대주의와 가졌던 구약성서의 관점을 유산으로 받고 이것을 곧 바로 신약성서에 적용함으로 성립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의 이성만 가지고는 얻을 수 없는 신적인 진리의 자료집으로 인정하여 이러한 진리는 초자연적인 기원과 무오류성은 기록된 사건들에 동반하는 기적들과 수세기 후의 일을 예언 할 수 있는 예언자들의 기적적인 힘에 의해서 증명되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신약성서가 정경화 되면서 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계시는 성서의 문자적 영감에 의한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전달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후에 오늘에 이르기 까지 게시의 진리를 말하는 방법과 그것을 인간의 이성만으로 얻는 이성의 진리로 부터 구별하는 방법이 발전되어 온 점을 역사적으로 그 과정을 알게 한다. 이는 중세 시대에 잘 설명되고 아퀴나스에 의해 논의되어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구분이 되었다. 즉 인간의 이성으로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최초의 원인자, 우주의 지적인 통괄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은 영원한, 필연적, 순수한 활동이시며 형체가 없고, 순전하고, 하나이시며, 완전하고, 선하고, 무한하고, 모든 것을 아는 분이심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히 만물 앞에 계신 존재로서 만물을 직접적으로 또한 객관적으로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감정에 좌우되지 않으신 분으로써 영혼의 불멸성, 의지의 자유, 천사의 존재 등을 알 수 있으신 분이심을 신앙으로 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신앙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얻을 수 없으나 그러나 여기에 이성과는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성육신과 삼위일체와 같은 성서의 신적 계시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오늘날에는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9-01
  • 하나 되게 한다 2
    남북 화해는 정상들의 협의서나 체결만으로 또는 정치가들의 논의만으로 아니 되고 화해는 남과 북이 그대로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인 국민들의 이해도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를 기도해야 한다.사드(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미사일을 요격하는 종말 모드와 X밴드 레이더로 수천km내의 시설을 탐지하는 전방배치 모드가 있는데 한국과 미국은 사드를 종말 모드로 배치한다고 한다. 정부는 지난 7월 13일 오후 사드를 경상북도 성주군 성산포대에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배치하는 장점은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로 적의 미사일을 고도의 높이에서 요격 격추시키는 무기이다. 이는 수 천km까지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이다. 또 여기 따르는 문제는 X밴드는 레이더에는 엄청난 양의 전자파가 나와 100m 내에 있는 사람은 사망할 수 있고 3,5Km내에는 특수 장비를 갖춘 사람만이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고도에서 격추시키기 때문에 지상으로 파편이 떨어지면 수도권과 충청권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중요하지만 지난 천안함폭침사건에서 보듯이 미국의 항공모함 서해진입을 극구 반대하던 중국은 자기들이 설정한 도련선(중국이 스스로 설정한 해상 방어망)안에 있기에 최신 무기인 사드가 도련선 안에 배치된 현실에 신경을 쓴 이유도 알게 하며 탈냉전 이후 중국과 러시아는 상호 전략적 협력을 위해 기회를 가지려함과 그동안 20년 동안 대내적 상황과 국제적 위상이 크게 달라지면 미국을 겨냥한 전략적 협력의 수준의 변화에 공세적 패권적 외교에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게 된 점에 유의한다. 통일을 바라는 것은 한 민족이라는 긍지 차원에서 한 국가가 되면 국가신용등급 상승으로 당당한 통일국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미사일을 계속 발사하고 실제로 위협요소를 해 나갈수록 국외의 투자자들은 투자 심리가 위축되고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불안심리가 증가하게 된다. 지금까지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이산가족의 만남을 위한 한 겨레의 아픔을 목숨이 끊기기 전에 그동안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기다린 민족적 비원을 풀어 주어야 한다. 통일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만의 것이다.에베소4:3-4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희망도 하나였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이른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으로 알려진 이 법은 보복을 하게 만드는 법이 아니었다. 이 법은 개인적으로 필요 이상의 과도한 보복을 삼가고, 해를 가한 만큼만 처벌을 받는 공의로운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올바른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당시 고대 중근동 나라들의 다른 법체계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이 같은 동해보복의 법 원리는 오늘날까지도 사법적인 판결에 있어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여기 신약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사랑과 용서의 법은 구약의 동해보복법을 뛰어넘는 위대한 것임을 여기에 밝힌다.마태복음5:38-39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시편 46: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부러뜨리고 창을 꺽고 방패를 불사르신다.”마태복음 26:52,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에베소 4:3-4,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희망도 하나였다.”한국교회는 민족공동체와 인류공동체와 생명공동체로 복음 안에서 화해와 우호증진에 많은 기도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교회부터 하나되어 화해를 위하여 일하는 축복을 일구어 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8-18
  • 하나 되게 한다 1
    8.15 해방주일을 맞을 때마다 생각하게 하는 것은 광복 이후 해방과 분단은 민족의 자주독립이 아니라 강대국의 열세에 의한 외적인 벗어남과 붙들림의 와중의 역사이기에 우리 민족의 광복은 치욕의 해방으로 보아야 한다. 회고해 보면 우리는 광복 이후 한 민족의 역사는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분단시대의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60,70년대는 식민주의의 사관의 극복으로 민족사관의 수립이라는 기치에 역점을 가지게 했고, 분단된 조국은 7.4남북공동성명을 내고 종속적인 체제의 현상유지를 극복하는 실현으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모색을 하게 되었다. 80년대 이후로는 역사의 주체, 발전방향 등에 관련하여 진보적인 역사관이 대두됨으로 냉전 속에서 서로 긴장되어온 사관의 장벽을 헐고 그 지평을 넓혀 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90년대는 세계사적인 현실로 세계질서의 형성, 미국, 일본, EU를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의 블록화와 그로 인한 국가 간에 빈부격차의 심화, 또한 민족주의의 물결의 고조와 이로 인한 민족 갈등의 심화와 여기에 정보산업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산업구조의 개편, 민족문화 정체성의 위기 등을 직면하고 있다.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토를 국가라 하며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는 나라의 다스림을 나라라고 말하고 민족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몇 가지 문화적 공통사항을 지표로 하여 상호간에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민족의 문화적 사항에는 언어, 종교, 세계관, 사회조직, 경제생활, 그 외 생활양식 등이 포함하여 민족은 문화적 특징을 바탕으로 설정된 범주를 말한다. 민족을 구분하는 기준은 언어이기에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이 대 전제이고 사람의 사고방식과 심성을 가장 잘 들어내 보인다. 그러므로 민족의식은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됨을 알게한다. 남과 북은 하나의 민족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민족의 애환이 서린 동질성의 피붙이 이다.민족은 고도의 공동사회 성격을 갖춘 사회집단으로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강한 동질적 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 민족은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면서 서서히 그 집단적 확대와 통일을 실현했으며 대민족으로서 우리 같은 집단이라는 자기 정체성(Identity)을 가지게 되어 능동적인 민족적 자의식이 성립하게 되어있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에 합리적익 사상적인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애국사상의 근거로 자기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긍지를 가지게 한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어디서나 사회의 전형이 합리적인 이기주의와 타산적인 행동인 이익사회(Gesellschaft)로 지향함을 본다.그리스도교는 분열과 싸움으로 얼룩진 세상에 화해로 가꾸는 믿음을 갖는다. 해방 된지 오늘까지 우리민족이 분단으로 살아 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는 반신불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이념의 후유증으로 두 나라가 되어 서로 극우와 극좌만을 우대하는 나라의 이념으로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죽이며 살고 있다. 상대방의 피 흘림을 보면서 그것이 승리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다.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여 상대방이 쓰러질 때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고 상대방이 무너질 때 우리는 축배를 들었다. 과연 그것은 누구의 승리이며 누구의 기쁨이라는 말인가? 우리가 남의 힘을 빌려 자기 형제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으니 이 세상 천지에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이 어디에 또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 평화통일을 지향하려는 때에 불신 풍조가 만연하여 평화통일 운운하는 사람들을 회색분자로 몰아 그 정당성마저도 빼앗겨 왔다. 지금도 이 생각 때문에 민족분단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극심한 계층분열, 지역분열, 계파분열 등 마음 아프다.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 땅위에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인권, 민주화를 위해 기도해 왔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으로 부터 창조함을 받은 공동체로서 이 사회에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분열시키고 노예로 만든 모든 악의 근본이 조국과 민족의 분단에 있음을 통회 자복한 회개는 이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민족통일은 국민 모두의 회개와 화해하는 길밖에 없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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