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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 ◇한국교회는 참으로 특이한 기록을 많이 가진 교회이다. 첫째는 세계선교 역사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고, 들째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헌금을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새벽기도부터 철야기도까지 기도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돈이 있어야 교인노릇을 한다’는 자조(自嘲)를 자주 듣게 된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돈이 필요치 않은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인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너무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가지게 된다. 이는 교인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다.◇초대교회에는 십일조와 헌물과 연보라는 세 종류의 헌금이 있었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구분해 바치는 것이고, 헌물은 감사함으로 바치는 것이며, 연보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헌금의 종류가 얼마나 되는가. 기본적으로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헌금, 약정헌금, 절기헌금, 특별헌금 등이 있고, 여기에 주일헌금도 주정헌금, 월정헌금이 있으며, 감사헌금에는 생일감사헌금, 심방감사헌금, 부흥회감사헌금, 특별감사헌금 등이 있고, 절기헌금에도 부활절헌금, 고난주일헌금, 성탄절헌금, 어버이주일헌금, 맥주절헌금, 추수감사헌금 등이 있고, 특별주일헌금에도 성서주일헌금, 평신도주일헌금, 신학교주일헌금, 총회주일헌금 등이 있다. 여기에 구역헌금, 선교헌금, 헌신헌금, 건축헌금, 송구영신헌금, 신년헌금, 특별새벽기도헌금, 세레교인 의무헌금이 있고, 여름성경학교, 체육대회, 수련회, 교회창립기념, 각종회비 등이 따른다.◇또 특별한 명목의 감사헌금이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다. 순산헌금, 출생축복헌금, 백일축복헌금, 헌아식헌금, 새차구입헌금, 범사헌금, 개업축복헌금, 사업축복헌금, 가족방문헌금, 이주헌금, 이사헌금, 새집마련헌금, 새로운보금자리헌금, 화목가정행복헌금, 부동산매매헌금, 환갑헌금, 진갑헌금, 장수헌금, 장례헌금, 추모예배헌금, 결혼축복헌금, 결혼기념헌금, 신혼여행축복헌금, 백일기념축복헌금, 가족건강기도헌금, 수술헌금, 치유헌금, 기도응답헌금, 주님영접헌금, 등록헌금, 침례헌금, 교인인도헌금, 주님동행헌금, 주님인도헌금, 주님사랑헌금, 주님은혜헌금, 성령충만헌금, 깨달음헌금, 시험잘친헌금, 합격헌금, 입학헌금, 학업헌금, 졸업헌금, 환란극복헌금, 평안헌금, 말씀헌금, 목사차량헌금, 교회차량헌금, 부지매입헌금, 간증감사헌금, 출장보호헌금, 여행보호헌금, 면허취득헌금, 사고보호헌금, 집수리헌금 등이있다.◇여기에다 최근에 희안한 이름의 헌금이 또 하나 생겨났다. 이름하여 ‘기동헌금’이다. 기둥헌금은 교회의 기둥같은 담임목사의 몫이다. 한국교회에 왜 이처럼 우스깡스런 이름들의 헌금이 나열되고 있는가. 그것은 한국교회가 바로 기복주의 교회로 변했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자유를 얻으러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모임마다 쏟아지는 헌금타령에 마음의 짐이 되어 짓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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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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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귀향
- ◇성경은 인간을 영(πνευμα)과 혼(ψυχη′)과 육(σα′ρξ)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인간론에서 이것을 삼분설이라 하는데, 흔히 영과 혼을 하나의 개념으로 보고 ‘영혼’과 ‘육체’로 이분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는 각기 본래의 고향으로 귀향한다는 개념을 갖는다. 그래서 영혼은 본래의 고향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육은 그 고향인 흙으로 간다. 이를 우리 민족전통은 혼(魂) 귀(鬼) 백(魄)이라 부른다. 혼은 양기(陽氣)의 응집으로 밝고 깨끗하고 청정한 것이어서 하늘로 가고, 귀는 음기(陰氣)의 응집으로 인가(人家)로 들어와 후손으로부터 조위(弔慰)를 받으며, 백은 흙에서 왔음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아무개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죽음관에는 사후 영혼에 대한 몇 가지 설(說)이 있다. 영혼불멸설과 영혼수면설 혹은 영혼죽음설이 그것이다. 영혼불멸설은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원한 것이어서 사람의 죽음 후에도 영원히 산다는 것이고, 영혼수면설은 사람이 죽으면 최후 심판 때까지 잠잔다는 것이며, 영혼멸절설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영혼도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셋은 모두 ‘부활’에서 만난다는 것이 기독교의 사후관이다.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천사장의 마지막 나팔소리에 부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학적 견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는 복음의 진수를 ‘영혼의 귀향’ 즉 ‘영혼의 구원’에서 찾았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하시고,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11,21)라고 말한다. 인간 영혼의 신(神)에 대한 갈망은 영혼은 신과 함께 존재해야 할 것으로 신의 본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천상의 피조물로서 우리의 신적 부분은 우리의 영혼이 최초로 태어난 하늘에 머리를 부착하게 하고 하늘을 향하여 꼿꼿이 서서 살게 한다.” ◇어거스틴은 영혼의 신에게로의 상승(ascent to God)은 “인간 영혼이 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교리에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영혼의 신에 대한 사랑과 동경을 그의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그것은 육체의 아름다운 모양도 아니고, 계절의 질서도 아니고, 눈을 기쁘게 하는 밝은 빛도 아니고, 그렇다고 음악의 아름다운 멜로디나 꽃이나 향유나 향수의 향긋한 냄새도 아니며, 맛나나 꿀맛도 아니고, 육체적 사랑을 할 때 껴안는 즐거움도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내 사랑 속에는 세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을 사랑할 때, 내 영혼 속의 빛과 선율과 향기와 식물을 포옹하기도 합니다. 나는 시공을 초월한 빛이 영혼에 비칠 때, 시간을 초월한 선율이 들릴 때, 바람이 흩어버릴 수 없는 향기를 맡을 때, 먹음으로 줄어들지 않는 양식을 먹을 때, 헤어지지 않는 영원한 포옹으로 안기울 때,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이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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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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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대한 탄핵재판
- ◇중세 기독교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중 하나가 마녀재판이다. 마녀재판은 누군가로부터 신고가 들어오면 종교재판관이 비밀리에 그녀를 소환해 ‘네가 어떤 마녀짓을 했는가’를 이실직고 하라고 한다. 순순히 마녀짓을 했다고 하면 마녀로 판결해 죽이고, ‘나는 마녀가 아니다’라고 하면 더 독한 마녀라며 형언할 수 없는 고문 끝에 마녀로 판결하고 화형시켰다. 이로 인해 죽은 부녀자가 10만명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지적이다. 그런데도 중세교회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를 명쾌히 설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하나는 재침례파 지도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강물에 빠드려 죽인 일인데, 물에 던져서 가라앉으면 이단이니까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다고 판결하고, 발버둥치다 뜨오르면 정말 독한 이단이라며 불태워 죽였다. 마녀든, 이단이든, 일단 혐의를 받으면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현대판 마녀재판이란 비판이 있다. 박근혜 정부는 정치적 불통(不通)과 경제적 실정(失政)으로 실패한 것은 맞다. 더우기 국정조사와 검찰수사에서 드러난대로 청와대의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비서관 등 함양미달의 인사들을 가까이 두고, 문고리 3인방이니, 비선실세니 하는 사람들과 국정을 논의한 것은 분명히 박 대통령의 실책(失策)이다. 그러나 헌재의 선고문에서 “피청구인이 대국민 담화에서 진상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하였으나 정작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하였다. 이 사건 소추사유와 관련한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며, 박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는 이현령 비현령이다.◇자유민주국가에서 국민의 투표로 임기를 정해놓고 뽑은 대통령을 검찰조사에 응하지 않고, 청와대 압수수색을 거부하고, 언행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대통령을 파면할 이유가 되나. 대통령은 법에 의해 검찰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고, 청와대 또한 법에 의해 압수수색을 거부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변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헌재는 이런 사유를 들어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탄핵재판을 외통수에 걸린 마녀재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박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처음부터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불복세력에 의해 추진된 일어어서, 검찰조사에 순순히 응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우리는 대통령에 대한 초유의 탄핵사태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역사의 한 장을 썼다. 이 역사는 중세의 마녀재판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재판에 참가한 재판관의 이름과 함께 교과서를 비롯해 모든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후대 역사가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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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대한 탄핵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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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
- ◇모세가 제사용 장막을 진 밖에 치고 ‘회막’이라 불렀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세키나)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출 33:9,10).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보여준 식양대로 세운 이 장막은 일반 백성이 거주하던 장막과 달리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회막(출 29:42), 성막(출 26:30), 증거막(민 1:53), 법막(대하 24:6), 하나님의 집(삿 18:31), 여호와의 집(삼상 1:7), 하나님의 처소(행 7;46), 세상에 속한 성소(출 25:8) 등이다. 이를 통털어 ‘성막’ 혹은 ‘성소’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로지 이곳에서 만이 제사장의 집례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장막은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다.◇이 장막 안에는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여기에는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 9:2-7). 그러나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히 9:9). 그리하여 그 제사를 온전케 하기 위해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이가 있으니 그는 그리스도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나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라고 했다.◇“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3-26). 모세가 전한 장막은 하늘에 있는 ‘참것’에 대한 모형이고 비유이다. 그것은 곧 인류 구원을 위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대제사장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대제사장으로써 단번에 자신을 드려 그동안 장막에서 드려온 제사를 온전케 하신 것이다.◇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이다. 이 장막은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았기에 낡아지거나 헤어지지도 아니하는 영원한 장막이다. 인간의 타락 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길은 모세의 장막을 통해서였다. 이 장막에서 대제사장이 매년 일차씩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허물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이제 자기를 단번에 드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제사가 온전케 되어 더 이상 손으로 지은 장막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죄를 사함 받으려면 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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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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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구
- ◇오늘날 우리나라처럼 딱히 대표적인 주류종교가 없는 사회를 다종교사회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종교전통별 현황에서 볼 때, 기독교와 불교에 이어 천주교가 세력이 가장 크고, 여기에 유교의 오랜 문화전통과 민족종교로 불리우는 각종 신흥종교가 세를 규합하고 있다. 그럼에도 종교인구는 전체 국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3.9%(2015년 통계청 자료)에 그치고 있다. 이는 10년 전인 2005년 52.9%에 비해 9.0% 감소한 수치이다. 종교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 사회의 종교집단이 영세성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한국기독교에 작은 교회가 늘어나는 원인이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장로교단인 예장통합측의 ‘2015년 교인수별 교회수 분포현황’을 보면, 전국 8843개 교회 중 교인수가 100명 이하인 교회가 무려 5563개(62.9%)로 60%를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 3986개는 50명 미만이다.◇반면 종교가 없는 인구 비율은 2005년 47.1%에서 2015년 56.1%로 증가하여 무종교인구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를 남녀별로 보면, 남자는 60.6%, 여자는 51.6%가 종교가 없다. 또 연령대별로는 10대는 62.0%, 20대는 64.9%, 30대는 61.6%, 40대는 56.8%, 50대는 49.3%, 60대는 42.3%, 70대는 41.8%가 종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2005년에 비해 40대는 13.3% 포인트나 감소하였고, 다음은 20대 12.8%, 10대 12.5%순이다. 이는 교회의 복음 선교에 있어서 다음세대와 관련하여 매우 심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다. ◇지역적으로 기독교 인구비율이 높은 시도순으로는 전북(26.9%)이 가장 높고, 그 다음 서울(24.2%), 전남(23.2%), 인천(23.1%), 경기(23.0%), 대전(21.8%), 충남(20.7%), 광주(20.0%), 세종(19.9%), 강원(17.5%), 충북(15.8%), 경북(13.3%), 부산(12.1%), 대구(12.0%), 울산(10.9%, 경남(10.5%), 제주(10.0%) 순으로 총 19.7%이다. 반면 불교는 울산(29.8%)이 가장 높고, 경남(29.4%), 부산(28.5%), 경북(25.3%), 대구(23.8%), 제주(23.4%), 충북(16.4%), 강원(16.4%), 대전(14%), 세종(13.8%), 충남(13.8), 전남(10.9%), 서울(10.8%), 경기(10.7%), 광주(9.5%), 전북(8.6%), 인천(8.8%) 순으로 기독교 인구는 총 15.5%이다. 이는 뚜렸한 ‘동불서기’(東佛西基) 현상으로 한국교회가 어느 지역을 우선 복음화에 주력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숫자이다.◇이 종교인구 통계는 한국기독교가 다시 한번 70~80년대의 대중전도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할 시점임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60년대의 가정문서선교, 70년대의 빌리그래함 전도와 대학생 전도엑스포, 80년대의 민족복음화대회와 같은 대대적인 대중전도운동이 필요하다. 그때에 비해서 한국교회는 엄청난 전도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원을 엮어내 전도운동을 이끌 영성과 열정을 갖춘 지도자가 일어나야 한다. 문제는 모두가 개인플레이에는 능하나 지역과 전국 교회를 움직일 수 있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기독교는 지금 이때에 대대적 배가운동을 일으켜야 우리사회의 주류종교로 우뚝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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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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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칠한 무덤
-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본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셨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3-5)라고 했다. 복음서 기자는 바리새인들이 “고소할 조건을 찾고자 예수를 시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는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라고 했다. 법대로 하면 간음 현장에서 잡힌 그 여자는 돌에 맞아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은 끌고오면서 왜 현장에서 잡힌 간부는 데려오지 않았을까?◇만약에 예수님이 그 여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돌로 치는 것을 반대하면 예수는 그 사회의 기본가치인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는데 동의하면 이제까지 설파해 온 예수님의 사랑의 메시지는 허위로 폭로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라고 했다. 이 때 예수님이 땅에 쓴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복음서가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여 예수님도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그런 법이 있고, 또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 여인이 과연 살아남았을까.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오히려 그같은 죄를 저지른 자가 자신은 깨끗한 체 가장하며 먼저 돌을 던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면 너도나도 돌을 던지는 것이 더러운 인간의 악한 심성이다. 만약 지금 우리사회에서 돌을 먼저 내려놓고 그 자리를 뜨는 자가 있다면 십중팔구 ‘저 놈도 그런 짓을 했구나’하는 비난과 온갖 허위 중상모략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 소위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태도만 봐도 우리사회가 얼마나 깊은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자기 편이 한 짓은 ‘로맨스’이고, 정적(政敵)이 한 짓은 모두 ‘스캔달’로 보는 태도, 이것이 정치권 인사들의 추악한 심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정권만 잡았다 하면 전 정권의 비리를 파는데 국력을 소모하고, 국론을 분열시켜서라도 자기 편에 유리하게 만들어 ‘다음 정권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에만 급급한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온갖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음해하는 일뿐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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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칠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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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틴들의 저항
- ◇“사방에서 개들이 저를 향해 짖어대고 있습니다. 어디서든 저는 '이단자'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중상 비방이 저에게 퍼부어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저의 회중 가운데 있는 적들이 교황파 가운데 있는 공공연한 대적들보다 더욱 잔인하게 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이 오랜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제네바를 성시화 했다고 평가받는 칼빈도 수많은 대적자들에게 둘러 싸여있었다. 칼빈의 대적자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애국파들로서,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에게 반대하였고, 다른 하나는 리버틴이라고 부르는 종교적 자유주의자들이다.◇애국파는 제네바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영향력이 큰 집안 출신들로서, 제네바 시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공헌한 사람들이거나 그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그 정치적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제네바에 종교개혁을 도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단정적인 교리(敎理)나 치리(治理)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자유와 기호(嗜好)를 침해하는 모든 조처에 저항하였다. 또 리버틴은 반율법주의자거나 혹은 도덕률 폐기론자들로, 칼빈의 엄격한 도덕적 치리를 극단적으로 반대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의 자유를 핑계로 옳고 그름의 경계를 혼동하여 육체의 무제한적 방종을 옹호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재물과 여성을 공유하라고 가르쳤으며, 영적인 결혼을 법적인 결혼보다 더 우위에 놓았다. 법적인 결혼은 단지 육욕을 위한 것 뿐이고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었다.◇리버틴들 중에는 심지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축복을 ‘성도의 교제의 교리’라며 남녀의 자유 연애론을 합리화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성경을 풍유적 은어를 사용하여 엉뚱한 해석을 시도하였으며, 노골적인 무신론과 신성모독적인 반 기독교로 기울어갔다. 그런 제네바를 칼빈은 성경의 진리를 최상의 변호로 투쟁한 결과 새로운 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그가 수많은 난관을 무릎쓰고 제네바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동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중요시 했을 뿐, 물욕이나 명에욕을 탐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그 도덕적 수준과 영적 수준이 오늘날까지 수 세대동안 그 어떤 기독교 도시보다 더 수준 높은 시민의식과 도덕적이고 물질적인 번영을 구가하는 도시로 만들 수 있었다.◇오늘날에도 사회와 교회의 개혁을 말하는 지도자는 똑 같은 저항에 부딪친다. 사회에도 교회에도 리버틴들은 어디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법을 따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사심 없이 분명히 말한다면, 그 어떤 반 기독교적 리버틴들의 저항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때대로 우리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헌신적인 목회자에게서 이런 지도력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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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틴들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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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전쟁
- ◇기독교는 전쟁을 지지하는가? 아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평화의 종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네 오른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네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나는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군인이 될 수 없다'며 평화주의에 따라 군대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 면면이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일부 교파에서 제기되고 있는 평화주의를 표방한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제기되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윤리적, 철학적, 정치적 동기 등으로 인해 형성된 개인의 양심상의 결정에 따라서 병역이나 집총을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양심의 자유권이다.◇그러나 중세 기독교 국가들은 십자군 전쟁 외에도 많은 전쟁을 했다. 전쟁의 불기피성을 인식하고 있는 신학자들은 그래서 '정당한 전쟁'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정당한 전쟁이란 전통적으로 공격이 아니라 방어하는 전쟁,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가 그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방어적이며 불의를 바로 잡는 전쟁",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공적인 인물이 수행하는 전쟁", 독재자나 해적 등으로부터 "참된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세우기 위한 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예컨대 식인종, 해적, 양민 학살자, 반인륜적인 자식들은 자연법에 의해서도 처벌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정당한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으로 진화해나갔다. 오늘날에는 이를 '합법적 전쟁'이라고 부른다.◇기독교는 종교개혁 시대에 수많은 종교전쟁을 겪었다. 스위스에서는 가톨릭측과 개혁파 간의 내란으로 1529년과 1531년 2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 카펠 전투라고 불리우는 이 전쟁에서 양측은 많은 희생을 내었고, 1531년 11월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을 맺음으로 끝났다. 또 프랑스에서의 종교전쟁은 1562년 바시 학살로 시작되어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종결될 때까지 여덟 차례의 전쟁을 치루었다. 그들은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라는 확고한 신념 아래 가톨릭 이외에는 모두 '이단'으로 보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프랑스 내의 개신교도들을 근절하려 했다. 그리고 네델란드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 거기에 맞서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개신교도들도 전쟁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로마서 12장 21절에는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아가을 이기라”고 말한다. 남의 국토와 재산을 빼앗기 위한 침략전쟁은 반대해야 하지만, 폭력과 불의로부터 신의 영광, 양심의 자유, 국가의 평안, 재산과 생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 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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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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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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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자질
- ◇한 때 목회자 양성과정에 있는 신학생들 간에 ‘골품 제도’란 말이 유행했다. 신라 시대 귀족사회가 ‘성골’과 ‘진골’에 따라 그 신분이 나누어지듯이, 한국교회 신학생들도 그 집안의 신앙 배경에 따라 지위가 달라진다는 내용의 자조(自嘲)이다. 신학생들 간에 ‘성골’은 아버지가 목회자로서 노회장이나 총회장을 지냈거나, 또는 아버지로부터 수천명 모이는 교회를 세습 받을 기회가 있는 신학생을 이르는 말이고, ‘진골’은 친가나 처가쪽에 명망있는 목사나 장로가 있어 언제든지 괜찮은 교회에 부임해 갈 수 있는 신학생을 이르는 말이며, ‘잡골’은 집안의 신앙 배경이 없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야 할 처지에 있는 신학생을 이르는 말이다. 요즈음은 이를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고 부른다.◇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 목회자로 부름받은 사람은 오랜 훈련과정을 통해 그 직을 수행해 왔다. 소위 명문대를 나와 지식이 많고, 집안의 좋은 신앙적 배경을 가졌다고 해서 어느날 수천명씩 모이는 교회를 맡아 담임목사가 되는 일은 없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도로 부름받은 후 3년동안 아라비아에서 고뇌하며 기도와 명상과 영성의 훈련을 쌓았다. 바울이 학문이 모자라서 아라비아로 갔는가, 누가 가라고 해서 사막으로 갔는가? 아니다. 그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공부했다. 그는 유대사회를 혼란케 하는 이단을 척결하는 데도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단의 괴수’(예수)를 옹호하고 그의 사도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스펙을 갖고 있었다.◇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으로 그의 소명이 무엇인지 확신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라고 고백하면서도,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롬 11:13)라고 말했다. 이는 전도자로서 고난을 스스로 자초하면서도 그 소명을 깨달은 지도자의 자세이다.◇똑 같은 시간을 들이고, 똑 같은 교육을 받고도, 흙수저는 ‘개척교회’라는 이름으로 배고픔을 참으며 20~30년 ‘사막의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목회환경을, 오늘날 아버지 잘 만난 금수저는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천명씩 모이는 교회를 꿰찬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사회와 교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막의 고뇌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40년의 광야훈련을 통해 민족 구원의 지도자가 되었다. 목회자는 뼈를 깍는 고뇌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그 자질을 인정받을 수 있다. 2015년 통계청 종교인구조사에서 10년 전에 비해 불교의 인구가 많은 수로 줄어든 것은 한국불교에 ‘탁발’이 사라진 것과 무관치 않다. 성직자의 배가 부르면 그 종교의 중흥도 중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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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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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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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 2017 다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 2017년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박대통령의 탄핵으로 온 나라가 혼돈에 빠져있고, 촛불로 대변되는 지금의 사회적 혼란은 대선이 끝날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도 정치권은 파벌을 만들어 자기네 유익만을 쫓아 이합집산할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정치인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해에는 어느 때보다 사회적 혼란을 틈탄 안보위협이 우려되는 해이다.거기에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주한 미군에 대한 방위비 부담 등 외교 갈등도 예상된다. 이 모두는 우리 국민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새 해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을 페지하고 국정원을 해체하라’는 구호가 난무하는 촛불집회에 동참하고 있다. 심지어 유력한 대권주자가 혁명을 운운하며,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가 답이다’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세우자’는 구호까지 내걸고 있다. 2017년 한 해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이 혼란한 시대를 바로 이끌 것인가?또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매우 의미있는 해이다. 역사적 기독교는 중세를 거치며 가톨릭이라는 별종의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가톨릭은 교황제도를 만들고 기독교를 성경보다 교권과 교리가 지배하는 이교적 교회로 변질시켰다. 인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갖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고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 탄생한 기독교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한 것이다. 그로인해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마녀’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생명이 묵숨을 잃었다. 이는 모두 교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저지른 중세 교회의 죄악이다.1517년 시작된 종교개혁은 이 모든 교회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었다. 또한 이로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와 덴마크와 스코틀랜드에서 수백만의 희생을 딛고 얻어낸 신앙의 자유가 오늘의 개신교이다. 그런데 50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목숨을 바쳐 지키려했던 개신교 신앙이 그 옛날 타락한 로마 가톨릭의 것과 닮아가고 있다. 이는 두말할 필요없이 기독교의 타락이다.2017년은 다시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하는 한 해가 되어야겠다. 그리하여 혼란한 한국사회를 구원하는 민족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겠다. 그러려면 우리교회가 먼저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지난 수년간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많은 신뢰를 잃었다. 교회지도자들이 세속적 욕심을 과도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새 해에 한국교회는 우리사회에서 그동안 잃은 신뢰를 말끔히 회복하고, 지금의 혼란한 사회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이것이 새 해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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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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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 2017 다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