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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회’와 ‘회개’
    ◇참회(讖悔)와 회개(悔改)는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그 뜻은 많은 차이를 갖는다. 불교에서 쓰는 참회는 뉘우칠 참(讖), 뉘우칠 회(悔)이다. 앞의 뉘우칠 참은 자신이 지난 과거의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고, 뒤의 뉘우칠 회는 앞으로 저지를 수 있는 잘못에 대해 뉘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쓰는 회개는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이다. 앞의 뉘우칠 회는 지난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것이고, 뒤의 고칠 개는 앞으로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일에 대해 두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悔)는 많으나 거기에 개(改)가 따르지 않는다면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없는 것이다.◇회개는 잘못된 죄의 길로 가던 것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 길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길임을 알았다면 돌이켜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는 것이 회개이다. 그런데 상습범들의 회개는 잘못을 깨달았다며 용서해 달라고 울고불고 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 그 길로 들어서 같은 죄를 저지른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회개가 이 상습범들의 회개와 닮았다. 하나님 앞에 모여서 회개기도를 할 때는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놓고 얼마 못가 다시 그 이전의 길로 간다. 죄로부터 잠간 돌이켰다가 다시 되돌아 간 것이다. 그리고는 지난 번에 용서받은 잘못을 또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용서해 달라고 빈다. ◇참회는 스스로 깨달아 조심해 남에게 해(害)를 끼치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며, 회개는 하나님에게 잘못을 용서받고 사람이 완전히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의 주제는 언제나 ‘회개’여야 한다. 회개 없이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회개는 많으나 변화가 없는 이유는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복과 축복은 서로간에 경쟁심만 부추길 뿐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지 못한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회개에 있다.◇천국에 합당한 백성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은 사람들이다(행 3:19).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마 3:2, 8-9)고 선언했다. 예수님 또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설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 것”(행 20:21)이었다. 하나님을 등지고 죄를 향해 가던 사람이 성도(聖徒)가 되려면 그 길을 돌이켜 한번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이것이 즉 ‘구원의 회개’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삶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유혹과 실수에 대한 ‘성화의 회개’도 항상 해야 한다. 이것이 곧 온전한 회개(悔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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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04
  • ‘가나안’교인
    ◇요즘 한국교회에는 ‘가나안’ 교인이란 말이 있다. 이는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교회에는 ‘안나가’는 노미날리티(Nominality)를 이르는 말이다. 노미날리티는 면목상 기독교인, 즉 이름뿐인 기독교인이란 뜻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가나안’교인으로서 노미날리티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세례도 받고, 주일학교 선생이나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거나 집사까지 지내다가, 어느날 어떤 게기로 교회와 멀어진 지식인 가운데 주로 많다. 대부분 목회자나 교인간의 갈등이 그 원인이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가치관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헌금도 하고, 주일날 혼자서라도 하나님께 예배하면 되었지, 굳이 교회에 나가 꼴보기 싫은 사람들과 갈등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에서 노미날리티로 전락한다.◇이같은 기독교의 노미날리즘(Nominalism)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먼저 전통적 기독교 국가인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 인구의 60%는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아시아에는 이제 겨우 10%의 기독교인이 있다. 그러나 그 중 약 44%는 명목상 크리스챤이다. 약 17억 기독교인 중에서 44%에 해당하는 7억2천의 기독교인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인 셈이다. 이들은 유아세례, 장례식, 결혼식 등이 있을 때는교회에 나오지만, 평소에는 교회 예배나 기독교 활동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이들이 명목상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노미날리티라고 해서 기독교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의 의무로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야 한다는 ‘성수주일’(聖守主日)은 반드시 교회에 출석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미날리티들의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노미날리티의 문제는 ‘성도의 교제’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미날리티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인의 신앙 가운데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하고 있다. 거룩한 공회는 예배를 위한 교회이고, 성도의 교제는 예배를 위한 모임이다. 이 교제는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죽음 이후 새예루살렘에까지 이르는 교제이다. 이는 기독교인의 특권이다.◇노미날리티의 형태는 다양하다. 인종적, 민족적 연대감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 부모의 신앙이 기독교임으로 자연히 그 자녀도 기독교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기독교 종교의식에는 참여하지만 내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 기독교에 대해여 기대를 버린 사람들, 교회 안에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기독교 신앙과 일상생활과의 적절한 관련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기독교 신앙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가치와 원리들은 지지하는 사람들 등등 이들 중에는 교회 명부에만 이름을 올리고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는 기독교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믿음을 가지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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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명한다. 그리고 또 성경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라고 말한다. 성경 어디에도 그 자식이 무슨 이유로든 그 부모를 잘 모시지 않고도 복음 받는다는 구절이 없다. 예수님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라고 한 것이, 마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회자는 그 부모를 외면해도 좋다고 한 것인양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상한 풍조가 일고 있다.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함에 있어서 그 목회자가 부모 모시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성경의 명령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고 싶어도 교회가 이를 좋게 보지 않는 이상한 풍조가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가 그 부모와 함께 살면 교회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한국교회에 망조(亡兆)가 들려니 교회 안에 별 희안한 사조가 다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목회자에게 자녀가 많아도 청빙에 지장이 있다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하면 자식을 더 많이 낳을 수 있게 할 것인가 고민하며 장려하고 있고, 교회는 주일학교에 아이들이 없어서 ‘다음세대’를 걱정하고 있는 마당에, 목회자가 자녀가 많다고 하여 청빙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이는 교회가 왜 이 땅에 존재하는가 하는 그 존재 이유와 교회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은채, 순전히 돈 몇푼 아끼려는 개교회의 세속적 이기주의가 보여주는 사례이다. 목회자가 그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모습을 보인다면, 교인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설교 10번 하는 것보다 더 큰 감동과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교회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매우 큰 교훈이 된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하면서 부모 모시는 것을 꺼리고, 자녀가 많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풍조가 일고 있다니, 이런 교회가 어떻게 우리사회를 인도하고, 교회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리석은 짓이다.◇교회는 오히려 부모를 모시는 목회자에게 그 형편대로 ‘부모 수당’을 드리고, ‘다자녀’ 목회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교학에서는 가장 확실한 최상의 선교방법이 신자들이 자식을 많이 낳는 ‘생물학적 성장’이라고 한다. 한국교회도 이제까지 이 생물학적 성장에 기대온 바가 크다. 또한 이는 지금 전 세계 이슬람이 추구하고 있는 선교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사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왜 이 좋은 교회성장 방안을 외면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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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4
  • 일어나 요단을 건너라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1:1-2).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40여년간 광야로 인도한 지도자 모세는 죽고 그 대임을 이어받은 사람은 여호수아였다. 하나님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일어나 요단을 건너라고 명한다. 여호수아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함께 하느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고 백성을 이끌고 요단을 건넜다.◇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요단 동쪽 헤스본과 바산을 정복하여 그 땅에 나라를 세워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 나라를 세울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것을 명했다. 요단 건너 가나안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가나안 7족이 방어하는 곳이다. 또한 마침 그 때가 ‘모맥 거두는 시기’여서 요단의 물이 언덕에 넘쳤다고 했다. 즉 우기(雨期)였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 요단 동쪽이 아니라,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흘러내리던 물이 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나아간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확신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믿음의 약속이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일어나 요단을 건너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전도자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는 큰 특권이 있다. 그것은 곧 구원의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 즉 하나님의 독생자의 도(道)의 비밀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전도자는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10). ◇그것은 곧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빌 2:10-11). 일어나 요단을 건너는 자만이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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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30
  • 노래 중의 노래
    ◇주후 3세기 초의 동방 교부 오리겐은 성경에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도정(道程)에 불러야 할 일곱 가지 노래가 있다고 했다. 그 첫번째 노래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후 부른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이다. 모세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시리로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1-18)라고 노래했다.◇홍해를 건넌 성도의 영적 여정은 다시 광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광야를 향해 나아간 성도의 갈한 영혼은 민수기 21장의 족장이 판 우물에 이르러서 “우물 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17-18)라고 노래할 수 있다. 그리고 난 후 비로소 가나안 변경 요단 강둑에 서서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세번 째 노래를 부르게 된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1-3)라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그래도 아직 영혼의 도정은 남아 있다. 성도는 가나안의 기업을 얻기 위해 사사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리고 더 진행하여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노래에 이르게 된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2-3)라고 찬양했다. 이것이 성도가 영혼의 도정에서 불러야 할 다섯번째 노래이다.◇그리하여 이사야 5장의 여섯번째 노래에 이른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1). 이 모든 노래를 부른 영혼만이 신랑과 함께 노래 중의 노래 아가를 부를 수 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아 6:3, 2:10).◇그때야 비로소 인생의 겨울에서 만난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죄악의 폭풍을 벗어난 우리의 영혼이 불안한 마음을 접고,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가 성화(聖化)의 꽃으로 피어나고, 또한 우리의 영혼이 반구의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여기가 아가서가 노래한 신랑,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도 아가를 노래하며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신랑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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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3
  • 동성애
    동성애 ◇성경은 동성애(同性愛)가 인류의 타락으로 생겨난 오랜 역사를 가진 더러운 성문화로서 사회악임을 밝히고 있다. 먼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동성애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두 천사가 날이 저물 때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찾아 소돔 성에 들어갔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4-5). 이에 롯은 소돔 백성들을 향해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고 당부한다. 이로인해 ‘소도미(sodomite)’라는 말이 생겨났다. 소도미는 동성애자, 수간자(獸姦者), 이상(異常) 성행위자를 일컫는 말이다.◇레위기는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18:22)고 했고,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 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갈지니라”(레 20:13)고 하여, 동성애가 심각한 사회악임을 규정하고 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온 나라에 우상숭배가 만연하자,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좇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 14:23-24)고 했다. 우상숭배와 타락한 성문화는 함께 간다. 따라서 남색자는 짐승과 교합하는 수간자와 같은 가증한 사회악으로 규정되었다.◇신약에도 남색자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 또 남색은 존속상해, 살인, 음행, 거짓말, 거짓 맹세, 사람을 탈취하는 행위와 같이 율법을 위반하는 사회악으로 취급된다(딤전 1:10). 또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느니라”(롬 1:27)고 하여 동성애는 하나님의 분노가 임하는 죄악일뿐 아니라, 동성애자 자신들이 무서운 질병에 노출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동성애는 인류의 타락과 함께 인류 사회에 들어온 더러운 성문화이다. 소수자의 인권이나 개인의 성적 취향에 맡겨두어도 좋은 ‘하나의 성문화’가 아니다. 한 사회의 미풍양속을 파괴하고 가정과 가족 질서를 더럽히는 사회악이다. 더우기 동성애 문제는 차별의 문제도 아니고, 소수자의 인권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앓고 있는 그들도 이같은 병리현상에서 해방되어 건강한 사회구성원들이 되도록 그들을 도와야 할 책임이 국가와 사회에 있다. 동성애 치유는 교회만 나설 일이 아니다. 우리사회 전체의 윤리와 도덕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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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8
  • 교리 논쟁
    ◇종교는 무엇을 믿는가 하는 교리체계를 갖는다. 성경의 종교인 기독교는 더욱 그러하다. 교리(敎理)는 성경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으로, 내가 믿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전파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따라서 교리는 내가 믿는 신앙을 선전하고 다른 사람이 내 신앙을 공격할 때 방어하는 ‘방패’(防牌)의 역활을 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신앙적 헛점을 공격하는 ‘창’(槍)도 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특별히 믿는 교리가 없고 성경만을 믿는다”고 말한다. 이 또한 그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성경구절이 곧 교리인 셈이다. ◇역사적 기독교에 교파가 생겨나기 전, 기독교가 ‘하나’였을 때 모두가 동의하여 민든 교리를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삼위일체 교리)라고 하고, 중세 이후 여러 교파로 갈라진 이후에는 그 교파가 강조하는 각 교파별 전통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 교리가 추가 되었다. 이 역시 모두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성경을 보는 관점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교리가 다르다며 이단으로 규정할 땐, 교파별 전통에 따른 ‘내가 믿는 바’와 다른 점을 기준 삼을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바’가 성경과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기준 삼아야 한다.◇세계 기독교는 처음에는 하나였으나 시간이 지나고 수많은 문화권과 만나면서 같은 성경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여 교파가 나누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의 교리가 다르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다르며, 개신교 내에서도 각 교파별 전통에 따라 다르게 고백된다. 중세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의 로마 가톨릭 개혁에 만족하지 않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거나 또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한 ‘환원주의’ 교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가톨릭의 전통과 신앙고백을 부정했다. 그래서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전통적 관행을 고친 ‘개혁교회’가 아니라, 이들을 초대교회로 돌아간 ‘환원주의 교회’라고 부른다. 엄격히 말하면 사실상 이들은 프로테스탄트이긴 하지만, 개신교(改新敎)는 아닌 셈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개신교로 분류되어 한기총에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한다.◇그런데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안에서 회원교단 간 교리적 논쟁에 이단 시비가 붙었다. 문제는 한기총 소속 환원주의 교단의 한 인사가 그 교단 대학의 총장을 지내면서 ‘유아세례’가 아니라 ‘성인세례’를 받고 그 대학 교수로 임용된 타교단 출신 목사에게 다시 ‘침례’를 받을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에서이다. 개신교는 ‘세례’와 ‘침례’는 형식의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침례는 믿는 자의 세례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대속주로 믿는다는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다시 ‘침례’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면, 먼저 받은 세례는 부정한 셈이 된다. 한기총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아주 미묘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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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9
  • 영성 결핍 시대
    ◇공산주의 교육에 심취했던 사람들은 인간에게 ‘영혼’(靈魂)이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똑같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내면의 갈등은 심리적인 현상일 뿐, 영적 문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혼이나 사후세계를 말하는 종교인은 인민의 정신을 좀먹는 사기꾼쯤으로 여겨져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에는 기독교 목회자들은 모두 체포돼 집단농장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급속도로 늘어나 지금은 약 8천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중국의 기독교인은 대부분 한족(漢族)이다. 13억 인구의 중국은 한족이 92%를 차지한다.◇20세기 들어 유물론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지성인들 가운데는 ‘종교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인간의 내세 따위를 ‘영직 진리’를 논하는 종교는 그것이 전통 클레식 종교라 할지라도 과학이라는 ‘세속적 진리’에 밀려나 설자리를 잃고 말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 60억 인구 중 그 3분의 2가 넘는 약 42억만명이 어떤 모양으로든 종교를 믿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시대인 셈이다. 따라서 현대사회는 경제, 정치, 문화 전반이 종교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행태는 세계 평화와 글로벌 사회의 정치 경제 문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또한 종교적 세속화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인류역사는 그 어느 시대나 세속화의 시대요, 종말론적 시대로 여겨져 왔지만, 현대야 말로 그 어느 시대보다 세속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시대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영적인 삶을 사는 영성(靈性)이다. 그럼에도 현대교회는 무섭게 영적 침체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현대교회의 병리현상, 또는 현대교회의 위기를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영성 결핍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 교인도 늘어나고, 교회도 많아지는데, 이같은 영성 결핍의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신앙의 영적 체험이 가벼운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현대인의 종교가 대체로 경전을 중심한 형식주의에 빠져 이론과 조직 체계에만 매달릴뿐, 그 그릇이 담고 있는 영성적 내용을 추구하려는 삶은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총을 깊이 체득해야 하는데, 신학이라는 이름의 교리공부와 목회적 테크닉에만 머물러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골 1:26-27, 엡 3:3-6, 빌 2:5-11). 그러다보니 목회자의 설교가 가벼워져 깊은 영감을 끌어낼 수 없고, 청중의 감동을 불러오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단지 종교적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기복과 축복신앙이 복음으로 오도되고 있는 것이다. 기복과 축복신앙으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들 수 없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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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8
  • 불타는 가시덤불
    ◇모세가 그 조상들이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것은 광야에서 불붙은 가시 떨기나무에서이다. 그의 나이 80이 다된 때였다. 모세가 40세 되는 해에 동족을 핍박하는 가해자를 죽이고 해외로 도망쳐 가정을 이루고 산지 오랜 후의 일이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출 3:1-4). 이 때 모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아무도 없는 혼자일 때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모세가 그 부르심에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이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압제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지도자로 부름받는 순간이다. 그 곳은 모세가 평소에 양무리를 이끌고 수없이 다니던 곳으로 모세의 일상이 있는 곳일 뿐, 전혀 새로운 땅이나 거룩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자 거룩한 땅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 하나님이 임재하면 그것이 어디든 거룩한 곳이 된다. 이후 모세는 온갓 시련과 풍상을 겪으며, 이슬라엘 민족을 이끌고 40여년의 긴 광야생활 끝에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야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그곳 느보산에 올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생을 다한다.◇“모세가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이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 그의 소명도, 그의 죽음도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일 뿐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나는 아직 어리니 안된다’고 누가 거부할 수 있는가? 또 ‘나는 아직 힘이 있으니 아직 남아 일을 더해야 한다’고 누가 그것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모세는 눈도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도 쇠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 사명이 다하매 그도 죽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의 정계성이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출 19:18). 시내 산과 광야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과 같이 임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 일상에서도 ‘불’같이 임하신다. 그 강력함에 아무도 그의 부르심을 저항할 수 없다. 그것이 불가항력적 은혜이다.◇광야의 가시덤불은 보잘것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 보잘것 없는 가시덤불에 임하셨을까?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이집트의 온갖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 학문은 광야에서 모세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세는 자신이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다. 내가 광야의 가시덤불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은 나를 찾아아 부르신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일상의 신발을 벗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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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0
  • 정통과 이단의 척도
    ◇기독교는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성경’과 ‘고대 에규메니칼 교리’에 둔다. 그리고 여기에 교파별 전통의 교리가 참고된다. 따라서 개신교는 성경에 근거해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규정했고, 천주교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성경 이외의 것에 근거해서 개신교를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개신교 내에서도 칼빈주의는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을 이단적이라 비판했다. 그 이전 이미 1054년에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하고 갈라섰다. 이로써 세계 기독교는 모두가 이단이란 딱지를 붙이게 되었다. ◇정통과 이단의 규정을 ‘성경’과 ‘고대 에규메니칼 교리’에 두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고,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는 기독교가 갈라지기전 세계교회가 ‘하나’였을 때 만들어진 교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교파별 전통이 갖는 교리 역시 성경적이다. 그러나 그들 교리는 그 교파가 갖는 신학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학을 가진 교파를 그 교리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때때로 자기네 교파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이단 정죄에 교파별 교리가 이용된다. 이는 모순이다.◇그러면서 문제는 자신들은 모두가 “성경대로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이단들도 “성경대로 하는데 왜 우리가 이단이냐”고 항변한다. 그러면 성경에 있는 대로 하면 모두 정통인가? 아니다. 그 성경해석이 보편성을 떠나 특정한 목적을 위해 해석될 때는 이단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부류가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대로 한다고 해서, 성경의 문자주의에 빠져 시민사회를 해치는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어 성경에는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지니라”(출 22:18)고 했고, 또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고도 했다. 그렇다고 성경대로 한다면서 무당을 죽이고 그 집을 불태운다면 그런 종교를 그 사회가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은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에 따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바로 신학의 문제이다. 그래서 성경해석에서는 신학이 중요하다. 오늘날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계를 향해 테러를 감행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면서도 ‘코란에 기록된 알라의 뜻’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코란에 대한 보편성을 갖는 신학적 해석이 따르지 못한 결과이다. ◇성경은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태양상을 찍으라”(대하 34:7)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타종교의 상징물들을 파괴하고 그 제사장들을 죽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경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도록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통과 이단이 나누이는 척도이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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