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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예배의 회복/주필 김형원 장로
    오랜 교회생활에서 예배에 대하여 배우고 깨달은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이고, 예배를 통하여 영적 충전을 하고 영적 갱신을 이루어 낸다. 그러므로 신앙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성도에게 예배가 없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개혁과 갱신을 앞세우고 여러 가지 과제들을 내 놓고 있지만 사실은 예배부터 갱신되고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혁자 칼빈은 ‘오직 성경’이라는 바른 교회질서는 예배의 회복이라고 했다. 어쩌면 종교개혁은 세속화 된 예배 본질 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축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복’받는다는 현세 중심적인 ‘기복’의 개념에서 개혁이 필요하다. 예배가 인간의 의식으로 전락되었고, 예배를 일상의 시간마다 정기적으로 갖는 행사나 의식으로 생각한다. 한 마디로 예배의 신비로움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목회자나 성도 모두가 예배를 하나의 시간을 때우는 식으로 급급하고 있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일어나는 신적인 은사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고 있다. 그냥 설교 듣는 것이 예배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 삼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시간으로 드려져야 한다. 예배에 참석하여 위로받으며, 치료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는 예배의 목적이 아니고 예배자가 받는 응답, 즉 축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성경말씀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교회의 예배가 세속화 된 것에는 여러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세속문화의 침투로 인하여 예배를 변질시키고 있다. 예배를 방해하는 것 중에 인간적인 감정과 흥을 돋우는 음악들은 일소되어야 하고, 거룩하고 경건하며, 영적 깊이를 더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이끄는 아름답고 좋은 음악이 필요하다.그리고 예배에 참석하는 예배자의 자세도 중요하다. 어느 교회 K장로는 주일예배를 위하여 토요일에는 힘이 드는 운동이나 등산을 안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배시간에 졸게 되거나 예배의 자세가 흐트러질까” 해서라고 한다. 또 어느 장로는 주일이면 제일 좋은 양복을 차려입고 새 와이셔츠에 주일에만 매는 넥타이, 심지어 주일날 교회에 갈 때만 신는 구두가 따로 있다고 한다. 모두가 예배를 중요시 하고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교회 헌법 「예배모범」에서는 ‘단정하고 엄숙하며, 예배시간에는 귓속말이나 인사나 곁눈질이나 졸음이나 웃거나 그 밖에 합당치 못한 행동을 일체 하지 말 것이요’ 라고 명시하고 있다.또한 예배를 말하려면 예배의 핵심인 설교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배에 참석하여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은혜와 감동을 받기 위해 원근(遠近)에서 성도들이 모여 온다. 그래서 목회자를 통해 선포되는 설교는 중요한 메시지로서 가슴을 울리는 양질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우리가 설교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준비 되고 능력 있는 설교는 회개와 감사, 결단과 헌신이 일어난다. 그런데 목회자가 교단이나 연합사역에 매여 바쁜 일상의 핑계로 인하여 설교준비에 등한히 하고, 중언부언(重言復言)하면서 설교시간을 때운다면 주일예배를 기다리며 정성으로 준비하여 참석한 교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목회자가 성도들 앞에서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생활을 보여 주지 못하고 설교를 한다면 혹이나 성도 가운데서 “너나 잘 하세요”라고 조소(嘲笑)를 던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7-05-19
  • 데스크칼럼-주필 김형원 장로
    황량했던 대지 위에 파란 새싹들이 돋아나고, 생명들이 용솟음치는 소리가 들리는 부활의 계절이 왔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이 놀랍고 귀한 일이지만, 예수님의 부활 또한 더 큰 의미가 있고 감사함으로 가장 뜻있게 지켜야 할 절기임에 틀림없다.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의 우리 현실은 정치가 곤두박질 치고 경제가 곤핍하게 되고 잦은 시위와 갈등이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어 미래가 암담하다.지난날 전쟁과 가난 속에서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은 흘러가는 저 구름을 바라보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며 ‘주님 고대가’를 불렀다. 오늘도 이 타락하고 혼란한 시대에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오셔서 알곡과 쭉정이를 심판하는 날이 하루속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예수님의 생애가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에게 부활신앙의 소망과 능력을 주셨다는데 감격해야 한다. 부활의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더러운 흙탕물 가운데서 상처투성이로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죽어도 살겠고, 살든지 죽든지 부활의 소망을 믿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 두렵고 절망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앞에 전개되는 대자연의 섭리처럼 새 생명들이 약동하는 이 부활의 계절에 자신과 교회가 부활신앙의 원동력으로 시대를 일깨우는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가슴에 새기면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실존적인 부활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매년마다 맞이하는 부활절을 교회의 최대의 절기로 지켜야 한다. 최근에 와서 부활절에 대하여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축소 또는 행사를 소규모로 지키는 교회가 많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교회가 경제적 여유를 가지면서 부활신앙에 대한 절실함을 잊어버리고 너무 형식적인 절기로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한국교회가 부활절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부활절을 기독교 최대의 절기로 지켜야 할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제안하고 싶다.△부활절 카드보내기운동-수년전에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위원회’는 부활절에 1천만 성도들이 3천만의 불신자들에게 부활절 카드를 보내고 4천만이 부활의 기쁨을 나누자고 발표했다. 그러나 거기에 큰 호응은 없었다. 이제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탄절보다 부활절에 서로가 축하 카드를 보내고 사랑과 우의를 가지는 기회로 삼는 것이 좋겠다. △범교회적인 부활절 문화행사 시행-교계는 연합적인 모임과 협의를 통해 뜻있는 행사를 성대하게 실시하여 축제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부활신앙의 정신을 일깨우는 기념 세미나, 부화절 칸타타, 축하 음악회, 전시회, 작품 발표회 등등의 행사를 통해 부활절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기쁨과 감사의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적인 비중 있는 절기 행사-부활절을 바로 알리는 설교와 연극공연, 부서별 음악과 장기자랑 등의 발표회, 부활절 신앙을 고취하는 웅변대회, 백일장 등등의 행사를 한다면 교회는 부활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새로워질 것이다. 이러한 행사에 불신자들을 초청하여 복음전도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결실을 얻게 되는 절기가 되지 않을까.한국교회는 부활절을 기독교 최대의 절기로 지키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우리는 부활신앙의 원동력으로 하여 분명히 새로운 역사를 이룩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절기의 축제가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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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14
  • 데스크칼럼-특징 있는 목회자
    목회에 성공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신선한 감동을 주는 특징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필자가 들은 몇 가지 예를 실명을 들어 살펴보려고 한다.남서울중앙교회를 성공적으로 목회하신 한국교회 대표부흥사인 피종진 목사는 누가 전화를 해도 직접 받고 경청한다고 한다. 대형교회 유명 목회자에게 전화 한번 연결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피 목사는 누구에게나 전화를 기피하지 않아 고맙게 생각한다는 것이다.같은 전화 얘기지만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목사는 어느 누구와 전화 통화를 해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고 한다. 유명인사와의 통화는 시간이나 스케줄 때문에 이런 저런 핑계로 시시콜콜 전화 내용을 다 듣기 어렵다.향상교회 정주채 목사는 주일마다 식사 시간에 항상 새신자들과 식사를 같이 한다고 한다. 새신자들에게 담임목사님과 식탁을 같이 한다는 것은 감명 깊은 일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당회장 목사의 식사는 특별하게 차리고 별도의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연신교회 이순창 목사는 매년 당회원인 장로들의 생일을 기억하여 작은 선물을 전한다고 한다. 수십 명 장로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선물을 나눈다는 것은 보통관심을 가지고 하기 어려운 일이다. 장로들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서로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안양신일교회 윤광중 목사는 본 교회를 떠나 타교회 집회에 강사로 나가 받은 강사료 전액을 교회에 내어 놓는다. 성직자라도 돈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교회에서 사례를 받으니 다른 곳에 가더라도 본 교회 사역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또 고인이 되셨지만 중앙성결교회 이만신 목사는 자기 교회 성도들의 결혼주례를 맡을 때 사례를 받지 않고 “정히 인사를 하려면 와이셔츠나 넥타이 하나면 된다”고 전 성도들 앞에서 선언했다고 한다. 최근 교회에서 주례자의 높은 사례비 문제로 말이 많다. 강남의 어느 교회는 주례비로 최하 금액이 100만원이 넘어야 하고, 어느 교회는 주례자에게 양복 한 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혼주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벧엘교회 박광석 목사는 부교역자들에게 구역을 심방하거나 만날 때 절대로 금전을 받거나 식사를 접대 받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심방이나 상담을 할 때에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는 담임목사의 주의사항이다.백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는 매주 교회 재정 수입과 지출 사항을 주보와 함께 성도들에게 알린다고 한다. 목회자의 사례금부터 전화료, 기름값, 도로통행료 등등 빠짐없이 내용을 기록하여 보고한다. 투명한 재정현황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헌금을 낸 성도들의 자부심을 키워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성락성결교회를 담임했던 박태희 목사는 승용차 트렁크에 가정생활용품 치약이나 비누, 또는 라면과 쌀 등을 싣고 다니면서 성도들을 심방할 때마다 빈손으로 가지 않고 형편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시도(試圖) 없는 곳에 성공 없다”는 말처럼 아무튼 목회자의 아름다운 시도는 교회가 성장하는 길이요, 또 존경받는 목회자의 특징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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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24
  • 데스크칼럼/교회는 복음전파를 위해 기독언론을 육성해야 한다
    기독언론은 교회의 개혁과 갱신, 복음전파와 선교에 대한 사명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언론을 지원하고 육성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된다. 언론은 교회의 복음전파과 선교를 위해서 유익한 길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 기능을 살려 나가는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에서 이탈될 때 기독언론은 그 존재 가치가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언론은 언제나 교회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서 기독언론이야 말로 선교적인 차원에서 최선봉에 서 있다고 하겠다.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입이 마르도록 언론의 사명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모두가 언론의 사명이 중요하다고는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언론을 위한 육성이나 지원에는 매우 인색하다.지난 연말 어느 단체에서 ‘언론인의 밤’이라는 행사를 주최한 자리가 있엇다. 그 자리에는 교계중진 목회자 몇 분이 토론자로 나와 언론의 사명과 책임을 강조하면서 어쩌면 교계언론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고 질책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았다.L목사는 교단총회장과 한기총 대표회장을 역임한 분이고, 또 한 분도 총회장을 역임하고 일선목회를 은퇴하신 존경받는 인물이며, 또다른 한 분은 현직목회를 은퇴하고 연합단체서 대표회장직을 맡고 있는 분이다. 과연 이 분들이 언론의 책임과 사명을 강조하는 만큼 교계언론을 위해서 얼마나 지원하고 협력했는가를 묻고 싶다. 이들은 현직에서 꽤 큰 교회를 담임하면서 언론의 발전을 위해 금일봉을 지원하는 것은 고사하고, 성탄절과 부활절에도 언론에 광고 한 번 지원하지 않은 사람들이다.한국교회가 말로는 언론의 사명과 역할을 수없이 논하고 있지만 언론의 육성 발전을 위해서 지원하고 협력하는 일에는 너무 관심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언론은 결코 진공상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특히 기독언론은 교회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해 왔고, 선교에 중요한 매체로서 역할을 감당해 왔기 때문에 육성하고 지원해야 마땅하다. 기독언론이 바로 서 있을 때 교회를 올바르게 이끌어가고 세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열악한 환경에서 경영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언론사를 교회는 가장 중요한 선교차원에서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언론의 자유”라고 어떤 유명인은 말했지만 언론이 치우치지 않고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교회는 책임감 있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기독언론이 선교적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기독언론사는 경영이 열악하기 때문에 일부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자와 광고주 등의 눈치를 보면서 바른 언론의 책임을 다하기가 어려운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언론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위치에서 바른 판단과 명철한 두뇌로 사건의 방향을 볼 줄 알고,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으로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대안있는 비판과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본질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언론의 목적은 사실을 바로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언론은 교회의 미래를 향한 유익이 무엇인가를 항상 고민하고 있다. 책임있는 기독언론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사실은 한국교회 중견교회들이 부활절과 성탄절에 단 한 번씩만 광고 등으로 협찬을 해 준다면 기독언론사에는 매우 큰 유익이 되고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 한국교회는 기독언론을 선교차원에서 진심어린 지원이 요망된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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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4
  • 개혁측, 전도협회 탈퇴에도 현실 직시 못하나?
    전도협회가 결국 한기총 이대위의 무리한 행정보류에 대해 “한기총을 탈퇴하라는 뜻인 줄로 알겠다”는 입장표명을 끝으로 탈퇴를 결정했다.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 추진, 거기에 한교총의 출범과 맞물려 갑작스레 대두된 전도협회의 이단성 조사와 행정보류에 대해 한기총의 실무자는 대놓고 정치적 결정임을 밝히기도 했지만, 결국 당사자인 전도협회가 탈퇴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 됐다. 이번 한기총 이대위의 전도협회 행정보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스스로 실사위원회를 통해 이단성 심사를 마친 회원 단체를 향해 가입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이단성을 검증하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이단성 심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선 행정보류, 후 이단성 조사라는 원칙없는 결의는 시기적으로 전도협회가 당장 행정보류가 되어야 하는 배후를 짐작케 하고 있다. 그런 의심 속에 한기총 사무총장은 이튿날 모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행정보류에 대해 한교연과의 통합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한기총 수뇌부는 이영훈 대표회장의 명의로 주요 교단들에 전도협회를 행정보류 했으니 복귀하라는 내용의 공문까지 띄웠다. 이 모두가 임원회나 실행위원회, 그 어떤 결의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일이다. 그러나 전도협회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동안에도 개혁측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전도협회는 초교파적 선교단체지만, 대다수의 인사들이 개혁측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전도협회에 대한 행정보류는 사실상 개혁측을 향한 간적접인 공격이라고 봐도 무방하기에 이번 개혁측의 침묵에 대해 교계 언론들마저 이를 의아해하고 나섰다. 그리고 개혁측의 침묵 속에 결국 전도협회는 유감 표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탈퇴를 결정했다. 전도협회가 탈퇴 입장문에 “한기총을 탈퇴하라는 뜻인 줄로 알겠다”라고 말한 것은 이번 탈퇴 결정이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닌, 한기총의 압력에 따른 것임을 내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압력의 화살은 전도협회와 개혁측의 관계를 고려할 때 단순히 전도협회에 그치지 않고, 개혁측의 심장부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최근 열린 개혁측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의가 쏟아졌으며, 이에 개혁측 임원진은 10일 열리는 한기총 실행위원회에서 이를 강력히 어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10일 한기총 실행위에서는 이 문제가 유야무야 넘어갔다. 개혁측 김송수 목사가 이 문제를 거론하며,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와 사무총장 박중선 목사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으나, 사과는커녕 유감 표명조차 없었다. 오히려 절차상 하자가 없다는 짤막한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결국 전도협회의 행정보류와 탈퇴 사태는 절차상 하자가 없는 한기총의 결정이었고, 그저 전도협회는 자의적으로 탈퇴한 것으로 마무리 됐다. 문제는 한교연이 통합의 조건으로 전도협회가 아닌 개혁측을 직접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기총 수뇌부가 지금처럼 또다시 한교연과의 통합을 이유로 개혁측을 향해 막무가내식 공격을 퍼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개혁측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해결에 나서야 한다. 전도협회 사태를 남의 집 불구경 하는 것인 양 방관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는 크나큰 실책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7-01-12
  • 개혁측, 전도협회 탈퇴에도 현실 직시 못하나?
    전도협회가 결국 한기총 이대위의 무리한 행정보류에 대해 “한기총을 탈퇴하라는 뜻인 줄로 알겠다”는 입장표명을 끝으로 탈퇴를 결정했다.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 추진, 거기에 한교총의 출범과 맞물려 갑작스레 대두된 전도협회의 이단성 조사와 행정보류에 대해 한기총의 실무자는 대놓고 정치적 결정임을 밝히기도 했지만, 결국 당사자인 전도협회가 탈퇴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 됐다. 이번 한기총 이대위의 전도협회 행정보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스스로 실사위원회를 통해 이단성 심사를 마친 회원 단체를 향해 가입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단성을 검증하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이단성 심사에 문제가 있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선 행정보류, 후 이단성 조사라는 원칙없는 결의는 시기적으로 전도협회가 당장 행정보류가 되어야 하는 배후를 짐작케 하고 있다. 그런 의심 속에 한기총 사무총장은 이튿날 모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행정보류에 대해 한교연과의 통합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한기총 수뇌부는 이영훈 대표회장의 명의로 주요 교단들에 전도협회를 행정보류 했으니 복귀하라는 내용의 공문까지 띄웠다. 이 모두가 임원회나 실행위원회, 그 어떤 결의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일이다. 그러나 전도협회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동안에도 개혁측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전도협회는 초교파적 선교단체지만, 대다수의 인사들이 개혁측에 속해있다는 점에서 전도협회에 대한 행정보류는 사실상 개혁측을 향한 간적접인 공격이라고 봐도 무방하기에 이번 개혁측의 침묵에 대해 교계 언론들마저 이를 의아해하고 나섰다. 그리고 개혁측의 침묵 속에 결국 전도협회는 유감 표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탈퇴를 결정했다. 전도협회가 탈퇴 입장문에 “한기총을 탈퇴하라는 뜻인 줄로 알겠다”라고 말한 것은 이번 탈퇴 결정이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닌, 한기총의 압력에 따른 것임을 내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압력의 화살은 전도협회와 개혁측의 관계를 고려할 때 단순히 전도협회에 그치지 않고, 개혁측의 심장부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침묵하는 개혁측을 향해 언론에서는 현 임원진들의 면면을 거론하며, 괜한 풍파에 휘말릴까 눈치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제기했다. 특히 현 총회장은 전도협회 직전 회장 출신이며, 총무도 렘넌트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이와 관련한 연관성을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열린 개혁측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의가 쏟아졌으며, 이에 개혁측 임원진은 적극적인 해명과 함께 10일 열리는 한기총 실행위원회에서 이를 강력히 어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10일 한기총 실행위에서는 이 문제가 유야무야 넘어갔다. 개혁측 김송수 목사가 이 문제를 거론하며,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와 사무총장 박중선 목사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으나, 사과는커녕 유감 표명조차 없었다. 오히려 절차상 하자가 없다는 짤막한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개혁측 임원진의 침묵에 대해 “도대체 왜!”라는 의문은 다시금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전도협회의 행정보류와 탈퇴 사태는 절차상 하자가 없는 한기총의 결정이었고, 그저 전도협회는 자의적으로 탈퇴한 것으로 마무리 됐다. 문제는 한교연이 통합의 조건으로 전도협회가 아닌 개혁측을 직접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것은 한기총 수뇌부가 지금처럼 또다시 한교연과의 통합을 이유로 개혁측을 향해 막무가내식 공격을 퍼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개혁측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해결에 나서야 한다. 전도협회 사태를 남의 집 불구경 하는 것인 양 방관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는 크나큰 실수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7-01-11
  • 데스크칼럼/기도만능(祈禱萬能)
    어느 설교자가 ‘기도만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우리에게 가로놓인 문제들 앞에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해결할 길이 없을 때,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 밖에 없다.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작금의 대한민국이 위기와 시련에 봉착했으나, 상황인식을 바로 하여 문제 해결에 나서는 정치인이나 지식인 언론인들이 없다. 말만 무성할 뿐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시계(視界)제로의 상태가 되었다. 위기와 시련의 절정에 서 있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질서 있고 확실한 길을 열어 갈 것인가를 고민해 보지만 뽀족한 묘책이 없어 답답하기만 한 것이다.‘최순실 국정농단’이란 엄청난 충격에 분노하는 국민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가운데 이제 대통령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박근혜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혼란과 분란으로 패망할 것만 같은 절박한 현실 상황을 맞고 있다.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자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그 답을 찾을 수가 없고, 캄캄한 어둠이 깃든 밤을 맞았다는 느낌이다.어느 인문학자가 말한 것처럼 아포리아(Aporia) ‘길 없음의 시대’를 맞은 것인가? 아니면 촛불이 꺼진 암흑의 시기를 맞은 것인가? 이 위기와 시련의 절정에서 몸부림하는 대한민국은 지금 촉수(觸手)잃은 곤충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됐다.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은 “위기와 시련은 진리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다”라고 했다. 우리에게 부닥친 현실을 원망과 불만으로 표출하는 분노를 가지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촛불을 들고 외쳐도 해결의 길은 쉽지 않지만 인내하고 참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위기와 시련을 통해 높고 넓게 바라보는 여유로움으로 진리의 길로 통하는 단계로 도약하고 변혁하여 탈바꿈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와 시련의 고통은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아픔과 같고, 새싹이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생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국가는 국가대로 위기와 시련이 왔지만 국가와 사회를 선도해야 할 한국교회도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연합단체가 분열되고 중견교회가 분쟁으로 무너져 가고 있으며, 지도자들의 일탈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 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목회자는 영성이 떨어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했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우리 크리스챤에게 가장 위대한 해답과 해결의 길이 바로 그 분,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는 기도가 아닌가? 진실로 세계와 열방을 가슴에 품고 기도할 수 있다는 이 특권이야 말로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귀한 일인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킨’ 저력으로 우리는 위기와 시련의 절정에서 이 시대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자. 그러면 분명히 더 좋은 내일이 열릴 것이다. 오늘의 문제해결의 길을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찾을 수는 없다.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지라도 연약한 손을 잡아 주실 분은 하나님 한분 뿐 이다.“기도합시다.” “기도해 주세요.”라는 노력의 열정은 크리스챤의 일상에 담겨있는 바램과 희망의 언덕이 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기도만능’이라는 확신이 더욱 필요한 것 같다.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 연지골
    • 기자수첩
    2016-12-07
  • 데스크칼럼-신뢰받는 당회
    장로교회에서 당회(堂會)는 일당 백이다. 당회가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신뢰받는 당회서게 된다. 당회가 교인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없다. 그래서 장로교회 당회원은 당회가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당회는 교인들의 대표인 시무장로와 개체교회의 담임목사로 조직되는 대의정치기구이다. 당회의 직무는 교인들의 신앙과 행위를 총찰, 제반 예배의 주관, 학습 입교 및 세례 문답과, 성찬예식의 주관, 공동의회 소집권, 집사와 권사의 선택, 고시 및 임직, 장로의 피택 요청과 임직, 교회 직원의 임면(任免), 각종 헌금의 실시와 재정 감독, 노회의 총대파송, 소속기관과 단체, 부설기관 감독 지도, 교회의 기본재산 관리 등이다.그러므로 교회 전반에 걸쳐 지도 감독하고 치리(治理)를 담당해야 하는 당회는 장로교회의 가장 책임있는 교회중심기관이다.당회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견인역할을 바로 감당해야 한다. 당회가 어떤 결정과 정책을 추진한다면 교인들이 확신있는 믿음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장로로서 당회원은 예배생활과 헌금생활, 주일성수 등 신앙생활에서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책임성이 필요하고, 언행일치의 인격자로 살아야 하는 도덕성이 강조되는 것이다.당회는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고 실천하여 교인들에게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 교회행정에 있어서도 정확하고 공평한 기준에서 치우치지 않고 시행되어져야 한다. 이로써 교인들이 불만하거나 불평이 없게 해야 된다. 당회원은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이 교회에 유익이 되는가, 성경적으로 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예를 들어서 당회의 결정으로 공동의회가 열리게 된다면 그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의 신뢰를 받아 당회가 회부한 내용이 통과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당회가 공동의회에 회부한 안건이 부결된다면 이는 당회가 불신임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이러한 현상이 계속된다면 교회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될 수도 있고, 교회 내부의 엇갈린 주장과 논란으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나고 교회분열로 까지도 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교계의 여러 교회 당회가 중심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는 교회가 많다. 실제로 합동측 교단의 J교회, 통합측 교단의 K교회 등 중견교회들이 오랜 기간 동안 분쟁을 해 왔고 결국은 분열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는 당회의 책임이 매우 크다.어느 교회의 얘기다. 당회가 담임목사청빙을 위하여 당회원 만장일치로 공동의회에 안건을 회부했는데, 투표 결과 3분의 2 찬성이 되지 못해 부결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당회는 교인들로부터 신뢰성을 잃게 되는 결과가 되었고, 당회서기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여론이 나누어지고 서로가 반목하여 큰 시험을 가져올 수 있게 되고 담임목사 청빙을 계기로 분쟁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다.당회가 하나가 되어 교회정책을 결정할 때 일체감을 가지고 뜻을 모아 간다면 교인들은 당회를 신뢰하게 되고 평온한 가운데 교회 본래의 사명과 복음전도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당회원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서도 치우치거나 편 가르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장로교회의 당회는 교단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 가야 하고, 교회를 지키는 주인의식이 확고해야 한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6-09-22
  • 데스크칼럼 / 숨을 은, 물러날 퇴
    은퇴라는 말을 한자어에서는 숨을 은(隱), 물러날 퇴(退)로 읽고 있다. 절실하게 와 닿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은퇴했으면 조용히 물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우리사회가 고령사회로 가면서 현역에서 은퇴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은퇴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 드려지고 있다. 그러나 역시 은퇴는 은퇴로 받아져야 한다. 은퇴를 하고서도 무엇을 하겠다고 노욕을 부리는 모습은 추하고 볼썽사납기만 하다. 은퇴했으면 내려놓고, 포기하고, 양보하고, 비우는 자세로 일상의 모순을 걷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최근 은퇴한 교계 목사 장로들이 연합으로 기도모임을 가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국가와 사회,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시간적으로 자유로운 은퇴자의 참 좋은 역할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은퇴한 사람들이 무슨 단체 이사장을 맡고, 무슨 선교기관과 연구소를 설립하고, 공기관과 연합기관의 임원과 이사, 감사 등등을 맡는가 하면, 사무실을 번듯하게 개설하고 신분을 과시하기도 한다.하지만 그보다는 노년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서는 평생 동안 닦아온 경험과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자문하면서 편안한 시간을 여유롭게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어느 교회의 예(例)로서 자신이 개척하여 크게 성장한 교회를 은퇴하고 아들에게 후임을 세습하였지만 여전히 설교도 자주하면서 더 나아가 교회행정에 사사건건 간섭을 많이 했다고 한다. 원로목사의 간섭이 너무 지나쳐서 참다못한 당회는 법원에 원로목사의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고 한다.그리고 어떤 교회는 원로목사의 사무실을 교회에 마련해 주어 매일 출근을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후임 목사청빙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해외 선교한다, 연구소 운영한다, 연합단체 사역 한다 는 등 여러 모양으로 자신의 활동에 대해 교회에 재정지원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는 은퇴한 목사의 무리한 행패인지도 모르겠다.그리고 은퇴한 장로가 시무 당회원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면서 교회행정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냉소적인 비판을 일삼는 경우가 있다. 교회의 정책과 사역, 행사 등에 대하여 후배 당회원이나 집사들이 잘 해 나가기를 바라고 협력하고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때로는 당회가 결정한 일에 대하여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교인들을 선동하는 은퇴 장로도 있다. 은퇴장로가 교회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교회발전에 전혀 유익하지 못한 일이다.내가 개척한 교회인데, 내가 부흥시킨 교회인데, 내가 오랫동안 목회한 교회인데... 라고 하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교회 운영에 간섭하려고 하는 은퇴목사는 자숙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은퇴한 장로도 마음을 비우고 후배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교회행정에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한다. 여전히 시무장로처럼 간섭하고 따지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모름지기 은퇴를 했으면 편안하게 기도와 성경연구에 심취하여 지난날을 회고하며 조용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좋겠는가. 고불사지심(高不事之心, 은퇴한 것을 고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실로 숨을 은(隱) 물러날 퇴(退), 귀감이 되는 이 글귀를 의미심장하게 받아드려야 할 것 같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6-08-18
  • 단순하게 살자
    최근 우리사회가 많이 가진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이 오히려 베풀기보다 ‘더 많이, 더 높이’를 추구하며 사회를 혼란케 만든다. 유명 변호사가 불법을 행하며 오피스텔을 100채 이상을 가지고 부동산회사를 운영하고 있는가 하면, 현직 검사장이 120억원대의 주식이익을 남겨 검찰에 조사를 받기도 하고, 방위산업 비리, 대우조선 사건, 연예인의 일탈 등등 복잡하게 얽혀있는 삶을 백이나 천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모두가 지나친 욕심과 과대한 명예욕 등으로 자신들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 모두가 생활이 어려워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일자리가 없어 실업자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 사회는 이렇게 더 가지고 싶은 욕망과 더 높아지고 싶은 명예욕으로 인하여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그리고 이런 세속적 욕심에서 해방을 추구하는 성직자라는 목회자들과 신앙인이라는 장로와 성도들 또한 이러한 욕심과 명예의 카테고리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것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자연히 삶은 복잡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고, 세상의 죄와 욕심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다. 모름지기 목회자는 목양일념(牧羊一念)의 덕목이 필요한 것이다. 돈과 명예를 바라보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이것저것을 섭렵하고 다닌다면 목회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세속적인 허욕(虛慾)을 버리고 성령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한다.특히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과도한 성취욕에 빠지지 말고 일과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많이 위임해야 덜 복잡해 질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애국이며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좌우로 치우쳐 살면서 인간관계에서 어두운 긴장감을 가지고 복잡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현직에서 은퇴하고서도 이것저것을 가지려 하고 명예를 바란다면 그것은 분명히 노욕(老慾)이고, 노년의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양보하고, 비우는 삶이 단순하게 사는 것 아닐까? 너무 많아서 복잡해지고 너무 많은 것을 빈틈없이 지켜나가려고 하는 고민들이 삶을 복잡하게 하기 때문이다.번역된 책 중에 「단순하게 살아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단순하게 사는 것은 쉽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지 못한다. 모든 것이 얼마나 단순한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이 책은 물건과 재정 상태, 시간과 건강, 인간관계를 단순화 시키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목표를 향하는 길이라고도 했다.우리에게 지나친 완벽주의는 사람을 병들게 하고 각종 회의와 스케줄에 쫓기면서 매일같이 긴장이 고조되는 일과(日課)는 삶의 균형을 잃게 만든다.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살지 말고, 우리네 삶을 여유롭고 단순하게 해야 한다. “참으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단순하다”고 했다. 우리 시대에 단순하게 살아가는 황금원칙이 필요하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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