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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어나 요단을 건너라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1:1-2).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40여년간 광야로 인도한 지도자 모세는 죽고 그 대임을 이어받은 사람은 여호수아였다. 하나님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일어나 요단을 건너라고 명한다. 여호수아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함께 하느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고 백성을 이끌고 요단을 건넜다.◇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요단 동쪽 헤스본과 바산을 정복하여 그 땅에 나라를 세워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 나라를 세울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것을 명했다. 요단 건너 가나안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가나안 7족이 방어하는 곳이다. 또한 마침 그 때가 ‘모맥 거두는 시기’여서 요단의 물이 언덕에 넘쳤다고 했다. 즉 우기(雨期)였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 요단 동쪽이 아니라,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흘러내리던 물이 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나아간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확신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믿음의 약속이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일어나 요단을 건너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전도자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는 큰 특권이 있다. 그것은 곧 구원의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 즉 하나님의 독생자의 도(道)의 비밀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전도자는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10). ◇그것은 곧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빌 2:10-11). 일어나 요단을 건너는 자만이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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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30
  • 한기총 이단검증이 남긴 교훈
    한기총 이단검증특별위원회가 딱 한장의 보고서를 교계에 발표하고 막을 내렸다. 거기에는 기존에 “각 교단이 참여하여 류광수 목사를 검증한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류광수 목사의 다락방 전도운동의 신학검증 결과 보고’를 재심할 만한 추가 자료는 없다고 판단하였다”며, “류광수 목사의 기독론이나 구원론 등의 신학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특별한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았고, 교회론에 있어서 약간의 이견이 있었으나, 이단성을 논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이 이번 이단검증에 대한 한기총의 공식 입장이다.그러나 예장통합측에서 검증위원으로 파송된 한 위원은 한기총의 이 발표에 대해 “검증위원들의 결의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한기총 실행위원회에 보고되고 통과되고 한기총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며 반발했다. 그는 교단에서 파송 당시 교단의 결의와 다른 내용을 수용할 수 없다는 지침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소속 교단의 결정과 다른 의견을 낼 수 없다는 것”과 “기존 2013년 한기총의 이단 해제 결의는 원천 무효라는 것”이라고 밝혔다.그렇다면 통합측은 그냥 공문 한장이면 될 것을 왜 한기총에 검증위원을 파송했는지 알 수 없다. 이는 검증이 아니라 통고이다. 이 검증위원은 통합측의 결정이 지고지순한 것이니 한기총은 통합측의 결정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통고자로 간 셈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 한기총 자신이니 한기총이 이런 수모를 당해도 싼 것은 맞다. 그러나 이번 한기총의 이단 검증위 활동에서 참담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는 것같아 안타깝다.이번 한기총 이단 검증에서 드러난 대로 이단성이 없어도 이단감별사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특정인에 대해 이단시비를 하고, 그것을 대교단이 받아 통과시키면 그는 이단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번 이단이 되면 ‘나는 이단 아니다’라고 아무리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쳐도 “한번 이단은 영원한 이단이니 너는 우리 옆에 오지 말라”는 잔인한 선고를 받는다. 이것이 한국교회이다.의식있는 지도자라면 이번 한기총의 이단검증 결과가 한국교회에 무엇을 던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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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7-24
  • 네 정계성을 지켜라
    신명기 3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40여년간 광야로 인도한 모세가 여리고 맞은 편 느보산에 올라 죽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제 요단만 건너면 하나님이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한 땅, 모세가 그토록 그리던 땅 가나안이 있는데, 그런데도 충성된 종 모세는 요단을 건너지 못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 32:52)고 하셨기 때문이다.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든 헌신되고 충성스러운 일꾼이었다. 그는 평생의 비전이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전 건축이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대상 28:3).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통일왕국의 건국자 다윗은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을 위한 원대한 꿈과 비전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이 충성스러운 일꾼들에게 그 길을 막아 그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지도자들의 정계성(定界性)이다. 아무리 교회와 민족을 향한 원대한 꿈과 위대한 비전을 가진 훌륭한 지도자라도 하나님이 “너는 여기까지만” 가고 더 가지 말라는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한국교회가 지난 세기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고도 왜 이리 분쟁과 분열이 심각한가? 그것은 일꾼으로 소명받은 지도자들이 그 정계성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질과 명예와 교권에 눈과 귀가 멀어 ‘너는 더 이상 가지 말라’는 음성을 듣지 못했거나 그 음성을 듣고도 외면했기 때문이다. “네 정계성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한 지도자들은 그의 한평생의 헌신도 하루 아침에 부정되고 만다.모세는 느보산에서 죽었지만 영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햇지만 영원한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가문의 영광을 안았다. 하나님은 내 꿈과 비전을 좌절시킨 후에도, 순종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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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07-24
  • 표절 문제로 시끄러운 한국 문단-임영천목사
    최근 한국 문단이 소위 표절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란 장편소설로 국내는 물론, 36개국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널리 그 이름을 날린 신경숙 작가가 요즘 작품 표절 논란의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맨 처음에 이응준 작가가 신 작가의 단편소설 <전설>(1994)에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단편소설 <우국> 표절 혐의가 있다고 지적하고 난 뒤, 이 표절 논란은 일파만파로 크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신경숙뿐만 아니라 이인화 편혜영 이승우 황석영… 등 한국의 모모한 작가들의 이름까지 이 표절 혐의와 연관된 최근의 논의에서 공공연히 노출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응준이 신 작가의 표절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 글이 발표된 지면이 어지간한 사람은 그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듯한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였다는 데 우리는 다소 놀랐다. 좀 우스갯말로 표현해 보자면, 워싱턴포스트라면 몰라도 허핑턴포스트를 어찌 알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아니었지만 허핑턴포스트에 실렸다고 하더라도 그 파급효과가 너무 커진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응준은 이를 위해 무려 8년 전부터 문단에 발을 끊었다고 술회하였다. 일종의 문단생활 포기선언을 했다는 것으로 들리는 대목이다. 자기는 “표절 문제 제기 글을 문예지에 실어보려고 했지만 그 가능성이 제로라는 사실 앞에서 새삼 절망했다.”고 하였다. 그 결과 별로 잘 알려지지도 않은 한 온라인 매체에 그 글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그 글을 수정하는 데도 한 달 반의 시간이 걸렸고, 법률적 검토도 거쳤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변호사 선임까지 마쳤다고 하였다. 이런 그의 굳건한 의지와 자세를 보면, 그 글의 여파가 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자신은 예상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글에 대한 법률적 검토는 물론 변호사 선임까지 마쳤노라고 했는데, 정작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이 신 작가를 사직당국에 고발하자 그는 그 자신의 자세를 이제와는 달리 180도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는 문단의 일은 문인들끼리 해결하도록 해야지 사법 당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기는 약자라서 누군가 자기를 법적으로 압박해 올 것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서도, 그러나 그 자신은 궁지에 몰린 작가를 법에 의해 재단하는 일에는 극구 반대했던 것이다. 혹 그의 이런 자세를 이중적 처신이 아니냐고 비판할는지 몰라도, 이 일은 전혀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보겠다. 사회?정치적 약자가 평소에 타인을 옹호하는 삶의 자세를 지녀왔다고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지 않으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자기보호책을 강구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의 법률적 검토와 변호사 선임까지 해 두었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런데 신 작가는 이번뿐만이 아니고 과거에도 표절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지 않았다. 단편소설 <딸기밭>, 단편소설 <작별인사>,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에서 표절 의혹들을 받아왔다. 금번 이응준의 문제제기 이후 자신의 처신이 매우 난처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우유부단한 자세를 취한 것이 불행의 불씨를 더욱 키웠다고 할 수 있다. 이번의 표절 논의에서 박철화, 정문순, 이명원, 고명철 등의 평론가들이 매파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 셈이고, 논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아리랑>의 조정래 작가가 그 매파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 되었다. 그는, 신 작가 잘못의 첫째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표절을 했다는 점, 둘째는 발각되었을 때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데 즉시 사과하지 않은 점이라고 하였다. 셋째는 그의 표절이 대여섯 번일 정도로 상습적이 돼버렸다는 것이라 했고, 넷째는 하필이면 왜 일본 작가의 작품을 그리 했느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표절 작품 <우국>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일제의 군국주의를 옹호한 극우 작가였다는 사실을 시사(示唆)했던 것이다. 구약 성서 가운데 모세의 십계명 중 제8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되어있고, 제10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돼 있다. 이를 문인들에게 돌려 표현한다면 “글 도적질(표절)하지 말며, 아예, 남(네 이웃)의 글을 탐내지도 말라”고 바꿔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7-24
  • 노래 중의 노래
    ◇주후 3세기 초의 동방 교부 오리겐은 성경에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도정(道程)에 불러야 할 일곱 가지 노래가 있다고 했다. 그 첫번째 노래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후 부른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이다. 모세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시리로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1-18)라고 노래했다.◇홍해를 건넌 성도의 영적 여정은 다시 광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광야를 향해 나아간 성도의 갈한 영혼은 민수기 21장의 족장이 판 우물에 이르러서 “우물 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17-18)라고 노래할 수 있다. 그리고 난 후 비로소 가나안 변경 요단 강둑에 서서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세번 째 노래를 부르게 된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1-3)라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그래도 아직 영혼의 도정은 남아 있다. 성도는 가나안의 기업을 얻기 위해 사사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리고 더 진행하여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노래에 이르게 된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2-3)라고 찬양했다. 이것이 성도가 영혼의 도정에서 불러야 할 다섯번째 노래이다.◇그리하여 이사야 5장의 여섯번째 노래에 이른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1). 이 모든 노래를 부른 영혼만이 신랑과 함께 노래 중의 노래 아가를 부를 수 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아 6:3, 2:10).◇그때야 비로소 인생의 겨울에서 만난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죄악의 폭풍을 벗어난 우리의 영혼이 불안한 마음을 접고,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가 성화(聖化)의 꽃으로 피어나고, 또한 우리의 영혼이 반구의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여기가 아가서가 노래한 신랑,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도 아가를 노래하며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신랑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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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3
  • 데스크칼럼-이슬람 여성들에 대한 멍에
    전세계 이슬람권에서는 여성할례가 광법위하게 퍼져 있다. 15세 이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할례는 이슬람 울법에 따라 여성들이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없도록 하는 시술이다. 여성은 오로지 남성의 자식만 낳는 도구로 취급된다. 이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여성에 대한 심각한 성적 학대이고 인권 침해이다. 그래도 이슬람 사회에 사는 여성들은 대부분 그에 대한 불평없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또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부르카도 남성 앞에서는 온몸을 가려야 한다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것이다. 비이슬람 사회에서는 타인이 보기에 불편하다. 이는 모두 여성에 대한 멍에이다. 과연 여성에 대한 인권이 신장되고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고 있는 현대에도 이슬람 여성들에 대한 이같은 멍에는 해소될 수 없는 것인가?한국사회에도 이슬람이 늘어난다는 보고가 있다. 중동 이슬람 국가에서 온 무슬림 남성들을 만난 한국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여성들 가운데 기독교인들도 있다는 말도 들린다. 기독교처럼 여성인권이 신장된 종교는 없다. 인류사회에서 기독교 복음의 덕을 가장 많이 본 계층이 여성과 아동이다. 유교의 성리학에 사로잡혀 있던 구한말 조선의 여인들을 해방시킨 것도 기독교의 복음이었다.그런데 왜 한국여성들은 기독교를 외면하고 이처럼 가혹한 여성 차별을 요구하는 이슬람을 선택하는가. 그것도 기독교의 자유함을 맛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오히려 주체할 수 없는 자유로 인해 스스로를 어딘가에 속박하고자 하는 심리현상에서 오는 것인가.한국의 무슬림 여성들이 딸을 낳아 여성할례를 하고, 거리에서 부르카를 뒤집어 쓴 한국여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것 또한 개인의 선택의 자유이겠으나 우리사회에서 어딘가 어색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동성애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타락한 성문화를 기독교를 비롯한 우리사회의 기성종교가 제어할 수 없다면, 어쩌면 우리사회가 이슬람에서 그 답을 찾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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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15-07-09
  • ‘동성결혼’과 종말을 향한 치달음-이 광 호 목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가 처한 시대를 정확하게 읽고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리석은 자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기를 좋아하며, 그것이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인 양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와 같은 태도가 제 무덤을 파는 위태로운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거에 있지 않았던 이상한 분위기에 빠져 예사롭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죄에 빠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도덕을 소유하고 있었다. 즉 누가 봐도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어느 정도 객관성 있는 윤리적인 척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선지 불과 십 수 년이 지나지 않아 도덕적인 척도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지난 세기 말인 1960년대 경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인해 그와 같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 현재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영역이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관한 문제이다. 동성애가 고대로부터 있어온 죄악이었다면 동성결혼이란 우리 시대에 생겨난 신개념으로써 원리상 그 용어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이 가득한 현대 사회에는 그에 대한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동성결혼은 이미 서구의 많은 나라들에서 합법화된 상태이지만, 그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중세 유럽에서 신앙의 박해가 일어날 때 참된 신앙을 유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삭막한 땅인 신대륙으로 이주해갔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식을 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며, 화폐에는 ‘IN GOD WE TRUST’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불과 며칠 전인 지난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결혼 합법화를 선언했고, 대통령 오바마는 그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거기다가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도 그에 적극 합세했다. 그들은 시대적 형편과 인권을 명분으로 앞세워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게 되자 처세술에 능한 자들은 앞 다투어 그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계적인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지금도 전체 인류를 외면한 채 세상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어가는 무책임한 행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들의 판단과 행동은 결코 세계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도리어 온 세계와 순박한 사람들을 악의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다.시류에 편승하고자 하는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혼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은 결국 가정을 파괴하는 양상을 몰고 오게 된다. 앞으로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혹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부부관계를 맺는 복수 관계의 결혼마저도 허용될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 장차 상상을 초월한 형태의 결혼이 허용될 것이며 인간들의 가정은 치명적인 위기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인권을 앞세워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세계 지도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만일 저들이 진심으로 동성결혼을 수용한다면 저들의 자식이나 손자, 손녀가 동성결혼을 하려고 할 때 기쁜 마음으로 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동성결혼은 지지하면서 자기 자식에 대해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처세술에 의한 위선적인 반응 이상이 아니다.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관한 문제는 어떤 전염병보다도 무서운 기능을 하고 있다. 이미 터진 물줄기를 다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는 안타까운 교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동성애, 동성결혼 문제에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그에 맞서 대항하며 세상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그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지상 교회는 급속히 본질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복음을 상속받게 될 다음 세대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겉보기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세계 지도자 행세를 하는 자들에 의해 유혹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무리 유능한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희생적인 평화 운동을 펼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어긋난 주장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정신 차려 저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자! -이 광 호 목사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7-09
  • 구원론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현상
    만국 장로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믿음의 은혜는 선택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영혼이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심령 속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제14장)라고 했다. 즉 인간의 구원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믿음을 결코 인간들이 스스로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그런데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은 신앙을 가진 기독교 안에도 믿음과 구원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논쟁이 계속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쟁이들은 모이면 말이 많다”고 하는 것 같다.개신교회는 믿음으로 신앙의 모든 것이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믿음은 기본이고, 거기에 행함이 있어야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는 거절할 수도 있다는 자유의지를 내세운다. 가톨릭은 인간은 원죄로 인해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을 박탈당했지만 인간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제405조)라고 믿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선행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구원적 신앙이 아니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행(信行)에 있어서 가툴릭이 개신교보다 적극적이고 윤리적일 것 같은데, 그 열매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최근 그리스로부터 벌어지고 있는 유럽사회의 디폴트 가능성은 모두가 가톨릭 국가나 정교회 등 구교권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체로 종교개혁을 거치지 않은 구교권 사회가 윤리성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민성이 게으르고 근면성실하지 않으며, 이웃에 대한 책임의식이 빈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그러나 범죄 이후 인간의 상태는 전적으로 타락되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영적으로 전적 무능해졌음으로 인간의 선행이 구원에 공로가 될 수는 없다고 믿는 개신교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은총이 강조되고 있어 윤리성이 강하다. 이는 구원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연지골
    • 사설
    2015-07-09
  •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자살 바이러스
    메르스가 진정국면에 들었다. 방역당국과 의료진 그리고 국민들의 선진의식이 그나마 무서운 바이러스를 이 정도에서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6일 현재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는 33명이다. 메르스 바이러스가 나타난지 한달 보름여 만의 일이다.그런데 우리사회에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오래동안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것 같다. 바로 매일 평균 40여명이 넘게 죽어나가는 ‘자살’ 바이러스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한달이면 1,200명, 일년에 1만6000여명에 이른다.자살 바이러스에 쓰러져 가는 사람에는 대통령도 있고, 대기업 회장도 있으며, 인기연예인도 있다. 한달 보름여 만에 33명이 죽어나간 전염병 메르스에는 온 사회가 무너져 가는 것처럼 야단법석이면서, 어쩌다 우리사회가 이처럼 무서운 자살 바이러스에 대한 대책에는 등한한지 알 수 없다.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온갖 유형이 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 사업에 실패한 사람, 오랜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 경제문제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 우울증을 앓는 사람, 모두 그 삶의 위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경제가 어렵고 삶이 팍팍할 때는 그래도 잘 견뎌낸 사람들도, 이젠 경제적 여유가 좀 생겨 우리사회에 보편적 복지가 늘아나 절대빈곤층이 사라져 가는데도 자살율은 높아져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이는 우리사회의 이기적 경쟁심 때문이다. 이기적 경쟁심을 부추기는 것은 기복주의이다. 교회 안에도 만연해 있는 기복주의는 경쟁심만 부추길 뿐 인간의 정신세계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기복 행위의 대상은 구체적인 현세적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복 행위를 하는 인간은 구체적으로 바라는 것들이 채워질 때 비로소 행복해질 뿐이다.기복 행위는 언제나 행위자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갖는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이기적인 욕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 이기적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이 길을 가르치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종교는 이기적 욕망을 억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 연지골
    • 사설
    2015-07-09
  • 동성애
    동성애 ◇성경은 동성애(同性愛)가 인류의 타락으로 생겨난 오랜 역사를 가진 더러운 성문화로서 사회악임을 밝히고 있다. 먼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동성애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두 천사가 날이 저물 때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찾아 소돔 성에 들어갔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4-5). 이에 롯은 소돔 백성들을 향해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고 당부한다. 이로인해 ‘소도미(sodomite)’라는 말이 생겨났다. 소도미는 동성애자, 수간자(獸姦者), 이상(異常) 성행위자를 일컫는 말이다.◇레위기는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18:22)고 했고,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 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갈지니라”(레 20:13)고 하여, 동성애가 심각한 사회악임을 규정하고 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온 나라에 우상숭배가 만연하자,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좇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 14:23-24)고 했다. 우상숭배와 타락한 성문화는 함께 간다. 따라서 남색자는 짐승과 교합하는 수간자와 같은 가증한 사회악으로 규정되었다.◇신약에도 남색자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 또 남색은 존속상해, 살인, 음행, 거짓말, 거짓 맹세, 사람을 탈취하는 행위와 같이 율법을 위반하는 사회악으로 취급된다(딤전 1:10). 또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느니라”(롬 1:27)고 하여 동성애는 하나님의 분노가 임하는 죄악일뿐 아니라, 동성애자 자신들이 무서운 질병에 노출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동성애는 인류의 타락과 함께 인류 사회에 들어온 더러운 성문화이다. 소수자의 인권이나 개인의 성적 취향에 맡겨두어도 좋은 ‘하나의 성문화’가 아니다. 한 사회의 미풍양속을 파괴하고 가정과 가족 질서를 더럽히는 사회악이다. 더우기 동성애 문제는 차별의 문제도 아니고, 소수자의 인권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앓고 있는 그들도 이같은 병리현상에서 해방되어 건강한 사회구성원들이 되도록 그들을 도와야 할 책임이 국가와 사회에 있다. 동성애 치유는 교회만 나설 일이 아니다. 우리사회 전체의 윤리와 도덕의 문제이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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