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연지골
Home >  연지골

실시간뉴스

실시간 연지골 기사

  • 물신에 굴복당한 교회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초대 기독교는 로마사회의 ‘불법적 종교’로 규정되어 박해를 받았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 사회여서 로마가 지배하는 여러 민족의 종교를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합법적 종교’인 유대교가 기독교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기독교 역시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불법적 종교로 취급된 것이다. 로마의 황제는 그가 죽었건, 살아있건 간에 그가 곧 신(神)이었고 법(法)이었다. 그로인해 기독교는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고, 또 그 박해를 이기지 못해 믿음을 떠난 수많은 변절자를 배출했다. 그같은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까지 이어졌다. 기독교는 250년 간의 박해 끝에 드디어 로마사회의 하나의 ‘합법적 종교’로 인정받은 것이다.◇기독교는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392년이 되면 로마사회의 유일종교가 되어 로마의 ‘국교’(國敎)가 된다. 복음의 승리였다. 이젠 황제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한 사람의 신도일 뿐, 더이상 신(神)이 아니었다. 황제를 신도로 거느린 기독교는 이때부터 새로운 교회체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모든 교회의 공의회는 황제의 이름으로 소집되고, 황제가 주재했다. 이제 기독교는 가톨릭(catholic, 보편적)이란 이름아래 황제의 교회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중세 로마사회는 황제와 교황이라는 두 권력이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의 능력을 한껏 과시하며 세속과 종교를 통치했다.◇로마 안에 머무르던 기독교는 로마가 망한 후에 온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완성되어 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전세계에 기독교가 퍼지지 않은 곳은 없다. 다만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서슬퍼러던 로마의 박해 아래서도 복음에 대한 변절을 거부하며 끝내 황제도 굴복시킨 기독교가 현대사회에 이르러 물신(物神)에 굴복하고 있음을 본다. 교회의 강단은 복음이 변질된 ‘값싼 은혜’인 기복주의가 잠식하고, ‘돈이 있어야 교인노릇도 한다’는 지극히 타락한 세속주의가 횡행한다. 그래서 일찌기 예수님이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며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던가!(마 6장).◇기복(祈福)을 팔아 교회가 챙긴 것은 교인들의 삶의 축복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도 아니며, 오로지 목회자들의 윤택뿐이었다. 교회가 달콤한 기복을 팔면 교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고, 목회자는 제사장처럼 행세하며, 교회의 예산이 늘어나 목회자의 생활비가 풍족해진다. 교회가 부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능력을 잃고 재빨리 무속화로 달려간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을 보라. 어디에서 사탄과 싸우는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가. 지상에서 승리하지 못한 교회는 ‘승리자의 교회’(에클레시아 트라움판스), 즉 새예루살렘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10-16
  •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획일 체제
    근래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껏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어느 집필자 자신이 나서서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사회평론가라는 꼬리표를 단 어느 소설가가 나서서 국정화의 논란에 가세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여당의 대표란 사람이 작심하고 뛰어들어 이 논란의 불길을 자기 선에서 끝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목청을 높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어느 개신교 목사까지 그런 운동에 실무 책임자가 되어 동조자를 규합하겠다고 회원 가입을 권유하고 있음도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시민(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음이 사실이다. 왜냐면 지난해 교육 일선에서의 교과서 채택 결과가 교학사 판(版) 교과서 채택 ‘거의 전무(全無)’라는 쪽으로 드러남으로써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출판사나 집필자 쪽이 아닌, 그(역사 교육) 면에선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도 보이는 정부와 여당 쪽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아니 총력을 기울여) 이 문제를 자기들 주장대로 관철시켜 보려고 애 쓰는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극도로 피곤해져 있다.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국정화 변호)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전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경청할 만한 면이 없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논리의 면에서는 어느 한 편이 이기고 지고 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화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처지가 무엇인지는 아무래도 다음의 바탕 위에서 설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첫째는, 국정화 주장의 논리가 힘(권력)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정부의 힘과 여당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그 국정화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와 여당에서 이 논의를 주도해서 주장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집필자 같은 처지의 인사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여당의 배경을 믿고 그들은 일종의 나팔수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는 그런 이들을 일컬어 어용학자라고 칭했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우리들에게 있어 결코 유쾌하지 못하다. 둘째로, 그렇다면 그들은 왜 어용학자들까지 생산해 가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핵심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합리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의 역사와 전통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친일과 독재이다. 과거 조상들의 친일행위에 대하여 합리화시키고 또 독재정치에 대해서도 합리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이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겠는데, 그러려면 젊은이 시절부터 그들의 머리에 그런 교육을 시켜 놓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머리에는 공고한 바벨탑의 건설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견고한 바벨탑도 때가 되면 힘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갖가지로 흩어 놓음으로써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하고 결국 그로 인해 그 ‘견고한 축성’을 자랑하던 바벨탑도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창세기 11장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요즘 정부-여당 간의 각종 잡음과 소음(騷音)을 전해 듣게 된 우리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 미리 보는 것 같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안녕하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려하는 바는, 그들은 획일 체제를 수립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방향으로 가르치고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게 하는 획일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세대(世代)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강력히 시도되었던 그 획일 체제 수립 정책을 현 정부가 다시 계승하기 위해서 광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이처럼 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는 단순한 역사 교육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성들의 천국’은 아예 뒷전이고 ‘당신들의 천국’만을 위해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나약한 학자들까지 끌어들여 멍들게 하는 일을 이젠 그만두라고. 그 일은 30여 년 전까지의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10-10
  • 한국교회도 난민 문제에 관심가져야
    세계는 지금 난민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내전 중인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과 아프리카 난민이 유럽으로 몰려드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우리의 이웃인 동남아에서도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난민 문제는 국가차원의 문제이긴 하지만, 국가에만 맡길 일이 결코 아니다. 난민 문제는 정부가 판단하기에는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다.오늘날 난민 문제는 세계 기독교의 양심을 가늠할 중대한 사안이다. 난민 문제에 세계 각국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이 문제에 이미 깊이 관여하고 나섰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를 ‘사이비 기독교’라며 욕하는 사람들은 난민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우리의 행동하는 믿음을 내 보일 때이다. 한국교회도 세계 난민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하는 사람들을 도우는 일에도 나서야 한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현실적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이들 난민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둔 난민 가족들은 더욱 힘겨운 상황을 맞고 있다. 그들이 난민 지위를 획득할 자격이 있는지 여부는 정부가 알아서 살펴야 할 문제이지만, 당장 먹고 자고 거처해야 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 지역의 교회들이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들의 국적이나, 종교나, 사회적 신분 등을 따질 필요는 없다.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교회는 필요한 도움을 나누어 주면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 어디에도 난민 문제를 다루는 기구가 없다. 교회협이나 한기총 등에 전문가들이 모여 난민 문제를 논의하는 기구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그 기구를 통해 정부의 난민 문제에 자문과 후원을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는 그러한 일에 나설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있다.각국 나라에서 외면하는 난민들을 독일교회가 나서서 유럽의 난민 문제의 해결을 촉구함으로써 독일이 난민 문제에 전향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연지골
    • 사설
    2015-10-10
  • 오늘 당신의 설교가 천년의 교회를 가름한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기독교는 초기부터 두 갈래로 퍼져갔다. 하나는 로마령 안에서 전파된 서방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령 동쪽에서 전파된 동방교회이다. 처음엔 로마 사회의 ‘불법적 종교’로 규정되어 박해를 받으며 로마령 안에서 전파된 기독교는 313년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또 392년에는 로마의 국교가 되어 황제와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그러나 로마령 동쪽에서 전파된 동방교회는 아무런 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한채 자력으로 복음을 전파하다보니 타종교의 시기와 권력자의 탄압의 위협이 항상 따랐다. 그러나 여러 갈래로 번진 이 교회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우쳤다. 인도에는 도마교회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과 몽골에는 레스토리우스교회가 그 몫을 담당했다.오늘날 한국과 중국에서 기독교의 복음 전파가 단기간에 성공한 배경에는 당시 전도자들이 남긴 복음사상이 민간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방에 전파된 기독교가 세력화 하지 못한데는 가톨릭과 같은 강력한 중앙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교리와 성경해석에 있어서 민간신앙이 습합되고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사역과 노고에 빚진 바가 크다할 것이다.기독교는 우주적 종교이다. 세상의 모든 철학과 사상을 담고도 남는다. 그러나 성경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기독교일 수 없다. 오로지 성경 말씀만이 기독교가 이 세상에 증언하고자 하는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성경 한 구절 읽어놓고 자기 생각을 제 멋대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만큼 설교에 신중해야 한다.역사적 기독교는 성경해석이 왜곡될 것을 우려해 중세교회는 자유설교를 금했다. 교회에서는 예전에 따른 메시지만 전달됐다. 이단의 발생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자유설교를 원했다. 그 전통에 따라 오늘날 개신교 목회자들은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롭게 설교한다. 이 설교는 교인들에게 영적 신앙적 힘과 인생관을 심어준다. 설교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지금 우리교회가 500년, 1000년 후에도 이 신앙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도록 오늘 설교해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15-10-10
  • 천국과 지옥 체험 간증
    ◇한국교계에서 상당한 지성인으로 알려져 있던 한 중진 목회자가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다며 남긴 간증문이 보수주의 한국교회의 천국관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슬하다. 그는 어느날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살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퇴원하여 집에서 임종을 맞았는데, 두 천사의 안내로 천국과 지옥을 보고 다시 회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른 천국에는 각자 개인이 사는 집들이 있었는데, 그 집은 땅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재료로 지어진다고 했다. 예배 드리는 시간, 성경 읽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전도하는 시간, 헌금, 십일조, 교회 봉사하는 일 등을 많이 하면 크고 좋은 집이 지어지고, 적게 하면 작은 집이 지어지며, 안 하면 개인 집이 없고 공동주택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자기 집은 어디에 있는가 보고 싶어 천사를 따라 가 보았더니 짓다가 중단된 3층 집을 보여주어 크게 실망했는데, 집안에 들어가 보니 벽면에 상장 2대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18세 때 고아원에서 성탄절을 지키러 교회로 가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에게 잠바를 벗어준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헌금할 돈으로 붕어빵 두 개를 사드린 일이 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여 괘 큰 예배당도 짓고,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했으며, 의지할데 없는 과부들을 위해 교회 옆에 아파트도 지어 나누어 주는 등 가난한 이웃을 위해 많은 힘을 쏟았는데도 그런 것에 대한 상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천사에게 왜 그런 것은 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네가 땅에서 국민훈장도 받고 상을 많이 받아서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고 하더라는 것이다.◇이 간증은 한 마디로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천국이라는 관념에 투사(透射)한 것에 불과하다. 그 자신이 평소에 상상하던 천국의 모습을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려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무당들이 이승의 모든 삶을 저승에 투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서의 처럼 산다고 믿는 것이다. 그의 체험 간증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천국의 집을 얻는 것을 공로사상에 둔다는 점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의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헌금과 십일조와 교회봉사, 이런 것은 모두 믿는 자의 기본생활일 뿐이다.◇또 그는 지옥에서 아우성치며 고통당하는 영혼들 가운데서 한국교회에서 이름있던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도 많이 보았다고 했다. 그들은 태양신을 강요하고, 교권과 명예를 위해 정상적인 신앙을 떠나 자기 유익을 구하고, 교회와 총회에서 싸움과 분열을 일으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찢고 부순 자들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유황 불못에 온 것이라고 천사가 설명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장로교 목사인데 과연 장로교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성도의 견인’은 어디로 가고 그리스도의 피아래 있는 사람들을 지옥에서 보았다고 말하는가?◇천국과 지옥의 체험은 그 자신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타인에게 객관화 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과 지옥은 비유로만 말씀하셨고, 천국을 체험한 사도 바울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고후 12:1-6). 개인의 천국과 지옥 체험에 대한 간증이 한국교회의 천국관을 왜곡시켜 비기독교적으로 이해될 소지가 많다. 유의해야 한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10-08
  • ‘목회자 납세’ 결의의 의의
    목회자 납세의 문제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미 지난 수년간 이 문제로 인하여 많은 논쟁이 활발하게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는 정부나 국회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뜨거운 감자’처럼 되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 문제로 인하여 교단별로 혹은 교회별로 서로 다른 입장과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9월 16일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총회에서 근로소득세 수용을 결의하였다. 개신교에서는 처음으로 목회자 납세를 교단차원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러자 여러 언론과 TV 매체들이 이 일을 보도하며 환영하였다. 그동안 목회자 과세는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일부 기독교 단체들의 반대로 계속 미루어져 왔다. 정부나 입법기관에서는 교회의 완강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 눈치를 살피며 시행을 유보하여 왔다. 하지만, 목회자 납세의 문제에 대해 교회는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거부의사를 밝히거나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독교가 목회자 납세의 문제로 자칫 국민들의 눈에 이기적인 종교집단으로 비춰져서는 안된다. 일반 국민은 기독교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정부가 종교인 과세를 추진했지만, 개신교의 강한 반발로 시행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천주교는 1994년부터 교구별로 근로자 납세를 하고 있고, 불교계는 종교인 과세를 반대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이 이 문제를 성역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서 완강하게 거부하여 온 것이다. 언젠가부터 기독교는 일반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사회적인 신뢰도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게 되었다.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기독교가 침체기를 맞이하면서 교회내부에서 마구 자성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대로는 안된다. 교회가 변해야 산다.’는 등등 교회개혁에 대한 말들을 이구동성으로 하였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세상과 벽을 쌓고, 자기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형국이다. 입만 열면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기독교가 정작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시대는 급속도로 변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요지부동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이 찬성하는 종교인 납세 문제를 교회가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칫 명분도 잃어버리고 실리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 납세 문제를 교회개혁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정부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국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무거운 세금으로 힘겨워하고 있다. 특히 영세 자영업자와 근로자의 세금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이 때에 교회가 납세 문제로 인하여 오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목회자 납세 문제가 일반 국민들에게 기독교의 납세 저항으로 비춰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교회가 이런 문제를 두고 마치 세를 과시하거나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넣는 것처럼 보여서도 안된다. 목회자의 사역을 노동의 개념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옳은 말이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사례비로 받지만 근로수당으로 받지 않는다는 것도 다들 공감한다. 하지만, 목회자도 일반 국민과 같이 똑같이 납세의 의무를 갖는다는 것은 국민의 정서요, 일반의 논리이다. 그동안 기독교는 계속하여 국민에게 신뢰를 잃어버렸다. 특히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금전문제로 인한 도덕적 해이와 교회의 분쟁이 얼마나 사회적 신뢰도를 추락시켰는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총회에서 목회자 납세를 결의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아주 잘한 일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인하여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목회자 납세를 과감하게 수용해야 한다. 교단이 앞장서서 결정하고 각 교회와 목회자가 이 일을 자진해서 풀어야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번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결정은 그 영향이 미미하다. 기장은 원래 진보적인 성향의 교단이며 교세도 크지 않다. 그러니 개신교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니다. 이번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결정은 시대적 요구에 대한 바른 응답이며, 대다수 국민의 마음을 헤아린 지혜로운 결정이다. 정치권에 휘둘리거나 등 떠밀려 하지 않은 자주적인 결정이다. 아무쪼록 기장의 목회자 납세 결정이 일대 전환점이 되고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10-02
  • 왜 똑같은 신앙과 신학을 갖고 통합 못하나?
    한국기독교를 흔히 세계 선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교회라고 한다. 1세기 남짓 기간에 1천만의 기독교인이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한국교회만큼 수준미달의 기독교 집단도 없다. 신학과 신앙을 같이 하는 한 교파에서 수백개의 교단을 만들어놓고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한국 장로교회는 1947년 고신측의 분열 이후 똑같은 이름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300여개나 만들어냈다. 이들 중에는 완전히 특정 지도자의 사적(私的) 종교집단으로 운영되는 교단이 대다수이다. 그러다보니 1년에 한번 개최되는 총회에서 제대로 임원이 개선되는 총회는 20여개에 불과하고, 나머지 총회는 설립자가 죽거나 노망이 들어 그 활동이 불가능할 때까지 총회장 자리를 내려놓지 않는다. 모두 몇푼 안되는 세속적 유익을 노리는 것이다.대관절 이런 교단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무당 절간처럼, ‘배운게 도둑질’이라는 속담처럼 아는 것이 성경 몇 구절과 신학교에서 배운 어설픈 신학지식으로 종교적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성령을 팔아서 ‘영적인 것’운운하며 밥벌이나 해먹고 사는 일인가.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모이는 현장에 가보면 어디나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주장을 하는데, 어째서 교단이 나누어져 있어야 하는가. 한기총이나 한교연 등에는 아랭이자랭이 장로교 간판이 수십개씩 늘어서 있고, 한국교회에는 아예 장로교만 모인 연합단체가 열 손가락을 꼽을 지경이다.그런데 이들이 이런 교단을 만들어 놓고 무얼하는가. 극히 질낮은 목화자를 양산하는 일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신앙과 신학이 같고 선교적 지향점이 같다면 두말할 필요없이 ‘하나’여야 한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라고 역사 속에서 부름받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어떤 이유로 교파가 생겼다면 그 교파의 특색을 분명히 하여 세계선교에 이바지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처럼 똑같은 신앙고백, 똑같은 신학,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너도나도 교단을 만들어 간판을 내거는 이런 기독교가 한국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 연지골
    • 사설
    2015-10-02
  • 장로교 제100회 총회를 보고
    지난 주 한국의 주요 장로교단들은 일제히 제100회 총회를 열었다. 그러나 교단별로 가진 제100회 총회 기념예배 외에는 어느 교단도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만한 어떤 결의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저 매년 열리는 일과성 총회로 끝난 것이다. 그나마 백석과 대신측의 일부가 통합하고, 고신과 고려측이 통합해 한국교회에 상당한 희망을 걸게 했다.사실 장로교(presbyterian)는 세계교회에서 소수 종파이다. 장로교가 대세를 이루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화란과 스코틀랜드 정도이다. 그 가운데 한국기독교는 대표적 장로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는 장로교의 순수 원리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어 곳곳에서 분쟁과 갈등이 일고 있다.장로교회는 본래 평신도 교회로서 철저한 대의제(代議制)로 운영되는 교회이다. 설교자도 개교회의 청빙에 의해 선택되고, 교회의 대표자인 장로도 평신도 가운데서 나온다. 이들이 모여 논의하는 곳이 당회(堂會)이고, 노회(老會)이고, 총회(總會)이다. 그런데 한국장로교회는 ‘목사 교회’로 전락되어 ‘목사감독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설교자와 교회대표인 장로 간에 갈등을 유발한다. 이런 갈등은 장로교 법치대로 돌아가면 문제가 없을 일들이다.교회가 목사를 청빙하여 설교와 교회행정 전반을 위임했다고 하여 목사 멋대로 교회를 운영하라는 뜻이 아니다. 목사는 그 교회의 대표자로 선택된 장로들과 시비 없는 논의를 통해 교회를 이끌어 달라고 맡긴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설교자로, 또는 지도자로서 교인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을 기화로 교회재정을 자기 유익을 위해 함부로 사용하거나, 자기 뜻에 맡는 직원을 선택하는 등 목사 중심의 교회로 운영하는 것은 장로교회다운 것이 아니다.특히 목사가 부임한지 오래지 않아 그 교회가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보편적이고 지역 대표성이 있는 교회 이름을 요상한 형용사로 바꾸는 등 별 의미도 없는 문제를 들고 나와 자기 목회에 맞추려고 시도하다가 교인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리석은 짓이다.한국장로교회는 100회 총회를 맞은 장로교답게 사소한 문제로 생긴 교회분쟁을 접고 민족복음화에 나서자는 대화합 선언이라도 했어야 했다.
    • 연지골
    • 사설
    2015-10-02
  • ‘씨알’과 ‘거룩한 씨’
    ◇함석헌은 “정신이나, 물질이나, 인생이나, 자연이나, 존재라는 존재, 또 그 존재들의 하는 변천이란 변천이 다 한 뜻인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그 하나님의 뜻 없이는 한 물건, 한 일도 없다고 본다”고 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뜻을 우주와 역사를 영원히 새로워지려는 운동으로 보고, 이 운동의 주체가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 즉 씨알이라고 했다. 유영모나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얼’을 살려야 참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몸에서 맘을 살리고 맘에서 얼을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씨알 정신은 몸을 위한 물질보다 ‘뜻’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인간 생명의 기본이 되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주체가 되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함석헌은 또 “우주안의 생명은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이지만, 그 자기 스스로 함이란 영원한 뜻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 의미와 근거를 갖게 된다... 시시각각으로 낡아가는 세계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원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지만 시시각각으로 사랑의 손을 아낌없이 대신한다. 이리하여 영원히 새로워지는 생명의 역사바퀴는 구른다”(새 삶의 길, 1959년)고 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곧 ‘씨알’의 정신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씨알 운동은 우주 전체의 뜻인 하나님과 관련을 벗어나 추구되지 않는다.◇이사야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마음이 둔한 백성들로 인해 성읍들은 황폐하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토지가 전폐되는’ 시대가 도래하여,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사 6:13)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던 인간들이 전쟁과 환란으로 모두 죽거나 끌려가고 보잘 것 없이 그 땅에 남아 있던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돋아 ‘거룩한 씨’가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그러면 ‘씨알’은 누구이며, ‘거룩한 씨’는 누구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모두 같은 사람은 아니다. 인권 차원에서는 인간은 모두 같은 존재이지만, 신앙과 철학의 문제에 가면 각기 다른 존재가 된다. 몸은 맘을 위해 필요하고 맘은 얼을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몸만 중시해 세속적 물질주의에 빠져 있다. 과학과 현대주의가 낳은 병폐이다. 그로인해 종교는 초자연적 유신론으로 치닫고 과학과 철학은 무신론적 자연주의로 매몰돼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구원하기 위한 ‘씨알’과 ‘거룩한 씨’가 요청된다. 여기에 부름받은 소명자가 필요한 것이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10-02
  • 누가 가정을 파괴했는가?-차진태 기자
    예장합신측으로부터 지난해 이단으로 규정된 은혜로교회의 성도들이 최근 매우 흥미로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은혜로교회는 오래 전부터 특정 이단감별사들이나 예장합신 이대위에 맞서고 있는 바, 이들의 기자회견 내용이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날의 기자회견 내용에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단 문제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요 몇 년 새 가정이 완전히 파탄 난 자들이다. 부부간의 이혼은 허다했고, 심지어는 가정에서 완전히 쫓겨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밖으로는 동네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완전히 이단에 빠져버린 마치 ‘마귀’와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고 밝혔다. 여기까지 보면 우린 여태까지 그랬듯 “역시 이단은 무섭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단에 빠져 이혼하고, 가정에서 쫓겨나고 결국 가정이 완전히 파탄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다르다. 자신들의 가정이 파탄난 것은 자기가 ‘이단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이단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공통된 주장은 하나같이 본래 자신들의 가정은 아무 문제 없었고, 화목했지만, 이단감별사들에 의해 이단 문제가 제기된 이후, 혹은 가족들이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본 이후, 불화가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말하는 불화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말다툼이 심해져 폭행으로 번지기도 했고, 심지어는 칼을 들이대며, 교회에 나가지 말 것을 종용키도 했다. 이런 불화는 어쩌면 당연하다. 자기 가족이 출석하는 교회가 알고 보니 무시무시한 ‘이단’이었다면 그 누구라고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에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고,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말대로 이단 시비 전까지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던 가정이었다면, 과연 이들의 가정이 완전히 파탄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공교단이 특정 교회나 인물을 이단으로 정죄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곳에 몸을 담고 있는 성도들과 가족들 모두에 이단이라는 낙인이 새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연구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며, 결코 정치적이나 지업적인 이유가 고려되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이단 규정이 몇몇의 이단감별사들에 의해 좌지우지 돼서는 안된다. 철부지 어린애가 아무생각 없이 던진 돌멩이가 지나가는 개구리에게는 그 어떤 폭탄보다도 무섭게 내려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한국교회 공교단의 총대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발언권과 투표권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를 다시 한 번 인지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5-09-2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