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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바른적용 7
- 성경에는 여호와를 가리켜 “용사”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출애굽기 15:3에는 “여호와는 용사이시며(המחלמ שיא הוהי),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이시다.”(출 15:3) 라고 말하고 있으며, 시편 24:8에서는 “이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용맹하신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영웅이시며, 전쟁 영웅이시다(המחלמ רובג הוהי רובג).” 라고 칭하고 있다. “용사”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이쉬 미르하마”(המח,למ שיא) 혹은 “영웅”으로 번역하는 “기볼 미르하마” (המחלמ רובג)라는 말은 다 같이 전쟁에 노련한 장수나 영웅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병사나 군인을 일컫는 “안세 미르하마”(ישנא המחלמ)와는 구별하여 쓴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는 신이시며, 전쟁을 하면 승리하시는 분이시기에 전쟁용사나 혹은 전쟁영웅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부르는 것이다. 성경에는 지상의 전쟁이 천상의 전쟁과 병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에서 신들이 전쟁을 하면 지상에서도 그 신들을 섬기는 백성들이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집트의 신들을 심판하셨다(출 12:12), 혹은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손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친다.”(삼상 5:7)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집트 사람들과 싸우셨다(출 14:25)고 기술하고 있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하여 퍼부으신 재앙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다.”(출 14:14, 25)라고 기록하고, 여호수아는 기브온 전투에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다고 말한다(수 10:14, 42). 이러한 표현들을 종합해볼 때 여호와께서는 여러 이방 신들과 싸우시고, 그들의 백성들과도 싸워 승리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용사, 혹은 영웅이라고 부른다. 이때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위하여 전쟁하시는 여호와의 지상 군사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תא יתאבצ–תא לארשי–ינב ימע, 출 7:4; 12:41)이라고 부르신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자”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용사”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출애굽기 15:3에는 “여호와는 용사이시며(המחלמ שיא הוהי),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이시다.”(출 15:3) 라고 말하고 있으며, 시편 24:8에서는 “이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용맹하신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영웅이시며, 전쟁 영웅이시다(המחלמ רובג הוהי רובג).” 라고 칭하고 있다. “용사”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이쉬 미르하마”(המח,למ שיא) 혹은 “영웅”으로 번역하는 “기볼 미르하마” (המחלמ רובג)라는 말은 다 같이 전쟁에 노련한 장수나 영웅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병사나 군인을 일컫는 “안세 미르하마”(ישנא המחלמ)와는 구별하여 쓴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전쟁을 하는 신이시며, 전쟁을 하면 승리하시는 분이시기에 전쟁용사나 혹은 전쟁영웅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부르는 것이다. 성경에는 지상의 전쟁이 천상의 전쟁과 병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에서 신들이 전쟁을 하면 지상에서도 그 신들을 섬기는 백성들이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집트의 신들을 심판하셨다(출 12:12), 혹은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손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친다.”(삼상 5:7)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집트 사람들과 싸우셨다(출 14:25)고 기술하고 있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하여 퍼부으신 재앙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다.”(출 14:14, 25)라고 기록하고, 여호수아는 기브온 전투에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다고 말한다(수 10:14, 42). 이러한 표현들을 종합해볼 때 여호와께서는 여러 이방 신들과 싸우시고, 그들의 백성들과도 싸워 승리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용사, 혹은 영웅이라고 부른다. 이때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위하여 전쟁하시는 여호와의 지상 군사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תא יתאבצ–תא לארשי–ינב ימע, 출 7:4; 12:41)이라고 부르신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자”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아갈 때에 그 블레셋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 나는 네가 조롱하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니, 오늘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에게 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온 땅이 알게 될 것이고, 이 모든 무리도 여호와의 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될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으니, 그분이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삼상 17:45-47) 여기서 다윗은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선언하며, 자기는 여호와께서자기를 그의 지상 사령관으로 세우셨기에 창과 칼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며,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통한 승리로 이스라엘에 참 하나님이 계심을 온 땅에 알게 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이 수장대결에서 이김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출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자”로 부르게 된 것이다(삼상 17:17; 25:28). 신약성경에서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다.”(엡 6:12)라고 가르친다.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 전쟁을 치르며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먹이나 창으로 싸우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대적이 악한 영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그의 군사로 모집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이 골리앗과 수장대결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장으로 앞서 나가서 (딤후 2:3-4) 우리를 대신하여 악령들과 싸워주시는 것이다(막 5:1-10; 눅 10:17-20). 우리는 그의 군사들인 만큼 악령들과 직접 싸우지는 않을지라도,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 등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그리스도의 싸움에 참예하여야 한다(엡 6:14-17). 우리 성도들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슨 이유든지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악의 영들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교회에는 다윗처럼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용사들”이 많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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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바른적용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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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바른적용 6
- 감사의 계절이 되었다.. 우리 성도들은 감사해야 할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추수감사절은 일년 중 땀흘려 지은 농사에 풍성한 추수를 하게 하여 한 해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을 마련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일이다. 오늘 날 농사를 짓지 않는 성도들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셔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며, 건강하게 한 해를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을 주시고,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를 더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시편 136편을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여라.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시시기 때문이다”(1)라고 시작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26)라고 맺고 있다. 처음절과 끝절이 같이 시작하여 같이 끝나고, 매 절마다 “... 하신 분(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라는 후렴 구로 끝나고 있는 데 여기에는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사해야 할 제목, 혹은 이유를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감사해야 할 점은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דסה, ḥeseḏ) 라는 말은 우리 개역이나 개역개정판에서는 ”인자“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는 원래 이 어휘가 담고 있는 뜻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 말이다. ”헤세드“(ḥeseḏ)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한번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신할지라도 변함없이 그리고 한량없이 그 언약을 지키기시고 사랑하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어휘는 항상 언약적 맥락에서 쓰여지는 말이다. 어떤이는 ”헤세드“(ḥeseḏ)라는 말은 “steadfast love”(변함없이, 꾸준한 사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covenantal love” (언약적 사랑)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과 달라서 우리의 행함대로 갚지 않으시고 변함없이, 그리고 끝까지 한량없이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의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그 하나님을 ”헤세드“(˙esed)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하다“는 말은 전혀 언약적 의미가 없을뿐더러 이방종교의 색채가 강한 어휘라서, 차라리 ”인애“라는 말이 비록 언약적 의미는 내포된 말이 아니지만 좀 더 부드럽고 이방 종교의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함께하시며, 새언약을 제정하셨다. 성경은 이때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다. (요 13:1). 가룟 유다가 그의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나가면 바로 배신할 줄 아셨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살과 피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에게도 나누어 주셨다. 그게 바로 ”헤세드“(ḥeseḏ)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를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옛 사람, 어부가 되어버린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떡과 물고기를 구워 주시고, 그에게 그의 양떼들을 먹이라고 목자의 직분을 위임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헤세드“(ḥeseḏ), 인애요 사랑이다. 이 시편의 저자는 여호와께 감사는 제목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의 구원하시고 홍해를 건네게 하신 하나님, 홍해를 건너 시혼과 옥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 곧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육체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을 감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감사조건 가운데 다른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감사하는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로마서 1:21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감사드리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의 도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추수감사도 하나님께서 햇볕과 비를 주셔서 곡식을 얻게 하시고, 나에게 일자리를 주셔서 돈을 벌어 양식을 사먹고 살게 하셨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부요함을 감당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인애를 베풓신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인애만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ח될 일도 미리 감사해야 한다. 유다왕 여호사밧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고 감사한 것 같다. 그는 모압과 압몬 자손들이 마온 자손들과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할 때에 레위 자손들을 합창대원으로 세워 공격 편대를 짜고, 적들을 향하여 나아가며, ”여호와께 감사하여라.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대하 20:21)라고 노래하며 나아갔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미사일을 쏘아대고, 스텔스 기능을 갖춘 무인 비행체를 띄어 전쟁을 하는 시대에 군종 병과 군악대를 앞세워 군사분계선을 넘어 진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일은 지휘관은 물론 병사들도 다 미쳐서 우리 다 죽자 하는 각오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미치광이 짓이다. 그러나 여호사밧과 그의 군대는 전투를 아직 시작하지 않았는 데, 마치 승리한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인애를 감사하며 나아갔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싸우시고, 승리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를 더하시는 분이시다. 매사에 감사가 마르지 않는 사람은 매사에 하나님을 그의 삶의 주관자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의식하고 믿는 자이다. 그가 가진 모든 재물과 영광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고백하고 영광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감사가 없는 사람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고, 우리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여호사밧과 그의 찬양대원들은 ”여호와께 감사하여라“는 사역형 명령어(ודוה)를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여라“(Give thanks to the Lord)고 번역하지만 문자적인 번역이라면 ”감사하게 하라“는 표현이 더 옳을 수 있다. 이 말은 감사하는 것을 가르치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어린 아아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꼭 하도록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도 여호와께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베푸신다. 그의 백성된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한다. 여호와사밧과 그의 백성들처럼 전장에 죽으러 나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애를 감사하는 것이 신앙이다. 강아지나 짐승들도 감사할 줄 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여호와께 감사하여라. 그분의 인애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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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바른적용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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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 번역,바른해석, 바른적용 (5)
- 시내산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던 백성들이 만나 먹기에 지쳤고, 그들의 기력이 날로 쇠하여 졌다면서 고기를 달라고 울면서 모세를 원망한다. 이들의 우는 소리를 들은 모세는 이 백성들의 짐을 혼자 지기에는 너무 무겁다며,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차라리 자기를 죽여 이 백성들의 악한 꼴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이 때에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장로들 중 70명을 모아 그들을 장막에 둘러서게 하였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구름에 휩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명의 장로들에게도 주시자, 그 영이 그들 위에 머물때에 그들이 예언하였으나 다시는 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 여호와께서 모세의 동역자를 세우는 임명식, 혹은 위임식임에 틀림없다. 모세에게 주신 똑같은 영을 이들에게도 주심으로 이들이 모세와 일체성을 가지고, 모세가 맡았던 것과 같은 일, 즉 여호와의 백성을 돌보는 목자나 어미와 같은 일을 하게 하고, 이것을 사람들이 보고 인정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12). 70명의 부름받은 장로들은 모세에게 임했던 그 영이 그들 위에 머무를 때에 예언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예언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나바”(אבנ)를 번역한 것인데, 성경에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있었던 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혹은 미래에 있을 일을 그의 선지자에게 알려 주고 그를 대신 하여 그의 백성에게 말하고 가르치라고 하신다. 따라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의 종, “나비”(יאיבנ)를 “예언자”라고 번역하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대언자” 혹은 “선지자”라고 하는 것이 “나비”(יאיבנ)의 본 뜻을 이해하는 데 혼란을 피할 수 있다. 여기서 70명이 회막에 둘러서서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겠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정확하게 그것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나바”(אבנ)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만을 대언하는 것은 아니고 “선지자적 행동”(prophetic action)이라고 지칭하는 특이란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울처럼 누워서 황홀경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고(삼상 19:23-24), 이사야처럼 알몸으로 사는 경우도 있다(사 20:2). 따라서 선지자는 다양한 형태의 언행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 곧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여줄 뿐 아니라, 그의 이러한 행동이 앞으로 있을 그의 반역적인 백성에게 내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상징적으로 선포한다. 그런데 원래 이 70명의 명단에 들어 있었던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장로는 회막에 나가지 않고 그들의 진영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언을 하였다. 이것을 안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이들의 행위를 금하도록 청하였는데 모세는 오히려 여호수아를 책망하며,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그의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가 되게 하였으면 좋겠다.”(민 11:29)고 말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세우신 이 70명의 장로들은 실상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세우신 것이며, 이들은 앞으로 여호와의 율법과 계명을 가르치며 훈련시키는 모세의 말씀 사역을 도울 동역자인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70명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선지자 역할을 하기를 바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이스라엘을 그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출 19:6),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 주어 그들이 예언하게 하여 그의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은 이 언약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선지자적 사명이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지자 요엘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줄 것이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하고, 늙은 이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에는 내가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실 것이다.”(욜 2:28-29)라고 적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날에 있을 일을 말씀하신 것으로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 주어 그의 자녀들이 예언하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지자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고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4). 여기서 “다른 방언들”이란 “다른 언어들”(ἑτέραις γλώσσαις, other languages, ESV)이라고 번역해야 정확하다. 왜냐하면 이는 분명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 말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자칫하면 한 순간에 술주정벵이들의 술타령으로 인식될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기들이 술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로서 예언을 하고 있다고 변증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하는 데(행 2:17-18), 여기서 베드로는 요엘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그들이 예언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마지막에 첨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실 것이며, “그때에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베드로의 요엘서에 대한 해석이요 적용으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예수님의 제자, 자신들을 가르키고 있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영을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내주셨다는 것을 길게 설명한다. 따라서 소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라고 칭하는 베드로의 연설은 베드로의 선지자로서의 자기 변증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를 “피 아도나이”(הוהי יפ), 곧 “여호와의 입”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고 보내실 때는 그의 손을 선지자의 입에 댔다 (렘 1:9; 사 6:7). 선지자에게 그의 말씀을 대언하는 그의 입이라는 것을 인치시는 것이다. 마치 “너는 내 입이다.”라고 안수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실 때도 불과 같이 갈라진 혀들이 제자들 위에 임했고, 제자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성령이 그들의 입을 여시고 말하게 하신 것이다. 이 때에 불이 임한 것이 아니고 “불과 같이 갈라진 혀들”(διαμεριζόμεναι γλῶσσαι ὡσεὶ πυρὸς)이 임한 것이다. 이는 분명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는 위임식임에 틀림없다. 이 오순절의 성령세례 사건은 마태복음 28:16-20 이나 누가복음 24:46-48에 기록된 사건에 연이은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이들을 인치시고,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백성들 앞에 공포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는 그의 백성이 모두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기를 원했다. 요엘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보내주신 성령을 받아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었는 데 세상 끝날까지 모든 족속을 제자 삼는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모두 선지자가 되어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성령세례”에 대하여 바르게 번역하고, 해석하며,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우리는 모두 말씀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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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④
- 예수께서 밤에 그를 찾아온 유대의 종교 지도자요, 정치 지도지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알려진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구할 때,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고 말씀하셨다. 개역성경에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게네데 아노덴”(γεννηθῆ ἄνωθεν)이라는 말을 여러 영역본에서 “다시 낳는다”(born again)로 번역한다. 아마도 한글 역본도 이를 따라서 “거듭나다”로 번역한 것 같다. 니고데모도 그렇게 이해한 것 같다. 그래서 예수께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자기 어머니 뱃속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다시 낳는다고 할 때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니고데모와 같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낳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게네데 아노덴”(γεννηθῆ ἄνωθεν)이라는 말은 “위로 낳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육신적으로 다시 낳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으로 새로 낳는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다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라고 말씀하신다(5). 여기서 성령이라는 말은 우리가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은 데 도대체 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씀인가? 어떤 사람들은 물을 성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에스겔 47장에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나,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요 7:37) 고 말씀하시며,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다.” (38)라고 말씀하셨는 데 이것은 그분을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39) 해석을 해주셨기 때문에 물은 보통 성령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것이 옳은 해석이라면 “물과 성령” 이라는 밀씀이 예수께서 “성령과 성령”이라고 이중으로 말씀하신 것 같이 되는 데, 예수께서 이것을 이중 의미로 말씀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성경에는 물을 성령으로 이해하는 부분도 많지만 말씀으로 언급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디도서 3:5에는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했다. 여기서 “거듭남”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게네데 아노덴”(γεννηθῆ ἄνωθεν) 이라는 말과는 다른 “파링게네시아”(παλιγγενσῖα)라는 말을 쓰고 있다. 한글 개역이나 개역 개정판에서는 “중생,” 표준새번역과 바른성경에서는 “거듭남,” 번역하고 있는 데 영역본에서는 “regeneration”(ESV, KJV, NASB), “new birth”(NET), 혹은 “rebirth”(NIV)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어휘는 의미상 차이가 없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바울의 말이 우리의 구원이 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거듭남은 씻음의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서에서는 죄를 짓고 이방에 끌려갔다가 돌아오는 백성들에게 “정결한 물”(םירוחט םימ)을 뿌려서 깨끗하게 하고,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다(겔 36:25-26). 물로 씻음과 거듭남의 관계를 암시하는 말씀이다. 또한 에스겔 47장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흘러나온 물이 흘러 들어가는 곳마다 치유와 소생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데 여기서도 물의 역할이 생명을 소생시키는 일임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면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 15:3)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깨끗하게 하는 물이 예수님 자신이 지끔까지 가르치신 말씀임을 밝히신 것이다. 바울도 에베소 5:26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물로 씻는다”는 말과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 말이 병행되어 사용되고 있다. 물과 말씀이 다같이 씻음의 역할을 하며, 서로 교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예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은 바로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과 성령은 마치 동전의 앞 뒤와 같아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전통적인 개혁주의자들은 말씀과 성령 사이의 비분리성을 강조하고 가르쳐왔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오웬은 “성령을 말씀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한 사람은 마치 성경을 불태우는 사람과 같다”(W.H.Goold, The Work of John Owen, vol 3, 192)고 말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로버트 레이몬드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분리하거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도 안된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한, 말씀과 함께 한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에 의하여, 성령과 함께 일하신다”(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fo the Christian Faith, 766) 라고 주장했다. 성령은 우리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이 성령은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우리의 힘으로 부릴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전하면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말씀이 내 안에 충만하면 성령이 내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여, 내 안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되는 것이고, 교회에 말씀이 충만하면 성령의 역사가 교회에 충만하고 부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쳐보면 알 수 있다. 또한 20세기 초 한국의 대부흥의 역사는 말씀 공부하는 사경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성도들은 그동안 성령에만 너무 치우친 관심을 가져온 것 같다. 말씀 이외의 일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고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교회가 부흥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제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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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기획
- 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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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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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③
-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며 열두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세우신다(막 3:13-19). 이후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이 그를 찾아 왔다는 전갈을 받고,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막 3:33)고 물으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 사람이 내 형제이고 누이이고 어머니이다“(35)라고 스스로 대답하시며, 예수님의 가족은 살과 뼈를 나눈 육신의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르신 그의 제자들이 참 가족임을 선언하신다. 그후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흔히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알려진 마가복음 4장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이 비유는 4:1-34을 하나의 설교(Discourse)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4:1-2, 큰 무리에게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 (서언)4:3-25, 뿌려진 씨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Seed Sown)4:3-9, 뿌려진 씨의 비유4:10-12,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4:13-20, 비유를 설명하신 예수4:21-25,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을 말씀하시는 예수4:26-29, 자라는 씨의 비유 (The Parable of Seed Growing)4:30-32, 자란 씨의 비유 (The Parbel of the Seed Grown Up)4:33-34, 제자들에게 따로 설명해주신 예수 (결언)이 구조를 살펴보면 본문은 서언(1-2)과 결언(33-34)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언은 예수께서 바다에 떠있는 배 위에 올라 앉아 몰려든 큰 무리를 향하여 비유로 가르치신 말씀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본론에는 3개의 비유가 소개되어 있다. 첫 번째는 네 종류의 밭에 뿌려진 씨에 대하여 말씀하신다(3-25). 두 번째는 자라는 씨의 비유(26-29), 그리고 세 번째는 자란 씨의 비유(30-32)이다. 이 중에 첫 번째 비유에는 제자들의 질문 (10-12)과 예수님의 대답(21-22)이 그의 비유와 해석의 말미에 각각 첨가되어 있다. 33-34절은 서론에 이어 결론으로 예수께서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따로 설명하여 주셨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둘째와 셋째의 비유는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And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as if ...) 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첫 번째 비유에서도 예수께서는 11절에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다고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이 세 비유가 다같이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이러한 본문의 구조와 주제를 염두에 둔다면 특히 흔히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붙힌 성경들의 문단 제목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면 씨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나 은유가 되어야 한다. 씨뿌리는 자는 마치 자식을 기르는 엄마와 같으니, 혹은 씨뿌리는 자는 마치 학교의 선생과 같으니 ... 등의 비유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의 비유 말씀은 예수께서 씨뿌리는 자에 의해서 뿌려진 씨들이 어디에 떨어져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말씀하신다. 따라서 그 문단의 제목을 “씨뿌리는 자의 비유” 라기 보다는 “뿌려진 씨의 비유”라고 해야 옳다. 그리하여 뿌려진 씨의 비유(3-9, 13-20), 자라는 씨의 비유(26-29), 그리고 자란씨의 비유(30-32) 라고 해야 본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에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다. 성경에 본문을 문단으로 나누고 제목을 붙이는 것은 칼빈의 제의에 따라 제네바 성경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설교자나 성경을 공부하는 자에게 도움이 되는 점도 있지만 자칫 본문의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본문은 세 비유를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가지고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가복음 4장에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 하나만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했다고 볼 수 없다. 더구나 이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알맹이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다.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시며 주신 첫 번째 말씀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마가복음 1:14-15에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신 하나님의 복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로 비유되는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질 말씀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씨처럼 작은 것이다. 씨가 뿌려지고, 그것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고, 다 자란 후에는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 둣이 하나님 나라도 시작은 작고 빈약해도 점점 자라고 커져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말씀의 일꾼으로 부르신 제자들에게 이 말씀 사역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나 그 씨가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좋은 땅에 뿌려져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에 뿌려져도 100% 다 열매 맺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자란다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씨라도 자라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많은 새들이 깃들 만큼 크게 자란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들을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며, “너희는 듣는 것을 주의하여라.”고 명하신다(23-24). 하나님 나라을 위한 말씀의 종은 그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먼저 말씀을 듣는 제자들, 각 사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하루 아침에 이룰려고 해서는 안된다. 말씀을 가르치고, 그것이 싹이 나고, 이삭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까지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하고 그것을 위하여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신자들도 예수 믿으면 바로 성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내가 받은 말씀의 씨가 내 안에서 자라야 내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 개척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교단도 하루 아침에 대형 교단으로 만들려고 할 일이 아니다. 먼저 말씀의 씨를 뿌리고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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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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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②
-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거닐며 사람들과 교제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짓밟아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반역자를 에덴 동산에서 내 보냈다(창 3:23).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와 교제가 끊긴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전 세계적으로 오염되고 확장되며 그 죄질은 더욱 지능적이고 과학적이며 악랄하여져서 하나님은 그의 영이 이들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창 6: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이들과 먼저 교제를 다시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그의 사랑과 권능으로 구출하시고, 이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부터 이 언약이 여호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부부관계를 맺는 혼인 서약이라고 믿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시내산 언약이 결혼식었음을 명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렘 31:31-34).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께서는 신랑으로서 신부와 동거하기 위하여 성막을 만들라고 명하신다(출 25:8).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대로 성막을 만들었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출40:34).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인도하였다(출 40:36-38).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거처(dwelling place)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성소에 가져다 놓았을 때 여호와의 전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찼다(왕상 8:10-11).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가 만든 성전을 떠나고, 그것을 진멸해버릴 것을 경고하셨다(왕하 9: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락하고 악행을 자행했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셨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망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과의 결혼 관계가 파괴된 것이다.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성전을 떠나시는 모습을 환상가운데 보았다. 그가 이 환상을 본 날자를 에스겔 8:1에 보면 제 6년 6월 5일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 학자들의 의견대로 주전 592년, 아직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이다. 여호와의 손이 그의 머리털을 한 움큼 잡아 그를 땅과 하늘 사이로 들어 올려 이스라엘이 행하고 있는 여러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그들이 무엇을 행하는지 네가 보느냐? 이스라엘 족속이 여기서 심히 역겨운 일들을 행하여 나를 내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한다.”(겔 8:6).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그 역겁고 혐오스러운 모습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퍼부으시고 (9:1-11), 11장에는 성전을 떠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성전 문지방을 나와 바퀴달린 그룹을 타시고 땅으로부터 떠올랐다(10:18-19).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백성을 떠난 것은 마치 목자가 맹수들 앞에 울타리를 거두고 고집센 양떼만을 남겨 놓은 체 떠나버린 모습과 다름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다시 그의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그의 말씀으로 다시 살리시고(겔 37:1-10), 그들에게 새언약을 주셔서 그들의 고토에 돌아오게 하시고, 다윗을 영원한 목자요, 왕으로 세워 영영토록 왕노릇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영영토록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내 처소가 그들에게 있을 것이며,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것을 열국이 알 것이다.”(겔 37:24-28)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때문에 성전을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돌아와 그의 처소를 그의 백성 가운데 두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예언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 오심으로 실현되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오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펴시니(ε′σκη′νωσεν)”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글 성경에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 혹은 “거하시다”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에스케네센”(ε′σκη′νωσεν)은 구약성경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다”(to dwell)라는 의미로 사용된 “샤켄”()을 헬라어로 차용한 어휘이다.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성막(tabernacle)을 의미하는 “미쉬칸”이라는 말도 바로 히브리어 동사 “샤칸”에서 파생한 말이다. 예수께서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신랑,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다 (손석태 저, “여호와, 이스라엘의 남편” 참조). 그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이것을 삼일 만에 세울 것이다.”(요 2:19)라고 선언하신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것이 바로 성전된 자기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요 2:19-22). 물을 포도주로 만든 천지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께서 신랑으로서 그의 백성들 가운에 거주하기 위하여 육신의 몸으로 찾아오시어, 그의 육신을 바쳐 새로운 성전을 친히 지으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만드신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여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한 15:4)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아예 우리 안에 그의 거처, 곧 보이지 않는 성전을 마련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우리를 일깨워 준다. 이처럼 신비한 연합관계는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될 일이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의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the union with Christ)과 동거(the indwelling in the Holy Spirit)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나무와 돌로 만든 성막이나 성전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 아니라 완전한 성막과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예수님과의 교제는 말씀이신 예수님과의 교제이며,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성령은 그 말씀과 함께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온갖 신령한 열매을 맺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돌과 나무로 지은 건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 같다. 구약성경의 성전 중심적인 예배와 성전중심적 신학과 신앙생활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신앙이 잘못 되었을 때, 자기의 성전이라도 아끼지 않고 진멸하시고 떠나시는 분이다. 신앙의 본질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요 17:21) 있는 이 신비한 연합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본질을 외면한 체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을 닮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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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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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①
-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고 아담에게 주셨던 번식명령과 더불어 그의 창조물에 대한 언약적 대리 통치권을 그에게 주셨다.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어줌으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통치 행위를 하였듯이, 노아도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내림으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대리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행사한다. 그런데 창세기 9장 27절,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 학자들이나 목회자들 사이에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노아가 하나님의 홍수 심판 이후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후에 벌거벗고 잠을 잘 때에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이것을 그의 두 형에게 떠벌렸다. 그 형제 셈과 야벳은 아비의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비의 하체를 가렸다. 후에 노아가 그 작은 아들 함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알고, 그의 아들, 가나안에게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라고 저주한다(25). 특히 셈의 종이 되라고 두 번이나 언급한다(26, 27). 여호와, 셈의 하나님은 송축하라고 하면서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라는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먼저 언급된 것을 보면 셈이 야벳보다 우위에 있는 것 같다. 문제는 27절에 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고,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라고 말하는 데 (개역, 개역개정판). 이 모습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아무리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남의 장막에 거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는 아마도 정복자나 할 일이며, 셈의 입장에서 본다면 감내할 수 없는 굴욕이 될 것이다. 더구나 앞 절에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말하면서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한다는 것은 논리상으로 맞지 않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아벳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송하여라,”는 구절이 있어야 옳을 것이다. 셈의 하나님을 한번 송축한다면, 셈 위에 있는 아벳을 위해서는 더욱 송축해야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 가운데는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을 야벳이 셈의 보호와 돌봄 가운데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셈의 우월성이 확보되는 것이며, 문맥도 이상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야벳이 셈의 보호아래 있게 된다는 의미가 매끄럽지 않을 뿐만아니라, 셈을 두고 야벳을 축복하게 하는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은 종래의 번역과 다른 번역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케 하시며,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다”(יַ֤פְתְּ אֱלֹהִים֙ לְיֶ֔פֶת וְיִשְׁכֹּ֖ן בְּאָֽהֳלֵי־שֵׁ֑ם וִיהִ֥י כְנַ֖עַן עֶ֥בֶד לָֽמוֹ׃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동사 “샤칸”(וְיִשְׁכֹּ֖ ן)의 주어를 야벳(יֶ֔פֶת )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Walter Kaiser, VanGemeren, 김의원 등도 이같이 주장함). 그래서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시는 것이다. 이 번역도 한글개역의 번역과 마찬가지로 문법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신다면 성경신학적으로 오히려 잘 맞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시에 사람을 그의 교제의 상대로 창조하시고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통치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사람을 그의 동역자로 삼으셨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온전한 사귐을 유지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유무형의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하여 만족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고, 하나님은 그를 동산에서 추방하셨다. 이후 사람들의 반역적인 범죄는 하나님의 영이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창 6:3).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을 내려 인간을 지상에서 쓸어버리셨다. 그런데 바로 이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셈에게 복 주시며, 그의 장막에 거하실 뜻을 보이신 것이다. 무지개를 세워 보존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노아를 통하여 셈의 장막에 돌아오셔서 그와 동거하실 약속을 주신 것이다.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셈의 후손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족보는 셈으로 이어지며, 셈의 후손은 데라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셈의 후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이들을 구출하여 시내 산으로 데려와서,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하여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출 25:8).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대로 성막을 지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영광중에 그 성막에 임하셨다(출 40:34-38). 그리고 이스라엘과 40년을 동행하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는 성전 가운데 임하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을 떠나신다(겔 10장). 그러나 약속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시어 그의 장막을 인간들 가운데 펴셨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셔서” 라고 할 때 “계시다” 혹은 “거하시다”를 뜻하는 헬라어 “스케네오”(σκηνόω)는 히브리어 “샤켄”(שָׁכַן) 으로부터 차용해서 사용한 말아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뜻하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창조 시에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사귐과 교제를 회복하시고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의 첫 복음사역을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심으로 시작하시며, 자신이 바로 신인적 신랑, 곧 구약의 신랑되신 여호와이심을 암시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청소하시며,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그 성전을 헐라고 하신다.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세우실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령으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교제를 회복하고자 하신 것이다(요 17:21).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교제를 누리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의 몸으로 성전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 안에 여호와의 전을 만드셨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가 거하시게 된 것이다(고전 3:16). 그러나 요한 계시록에서 보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 사이에 아무런 장벽이 없이 서로 교제를 나누기 때문에 성전이 따로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계 21:22). 이 같은 구속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본다면 창세기 9:27은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하시고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며”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하시고, (하나님께서)셈의 장막에 거하시며”라고 번역해야 맞다. “거하게 하시다”와 “거하시다”의 의미가 너무 크게 다르다. 노아의 이야기는 방주 이야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셈의 동거에 대한 노아의 예언적 축복도 중요한 주제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 점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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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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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교회 표절 논란을 넘어 진실성을 회복하라’
- 본고는 지난 8월 27일 서울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열린 세미나 ‘표절과 한국교회’에서 서문강 목사(중심교회)가 발제한 ‘설교 표절 그 정죄의 기준은 무엇인가?’ 중 표절 설교의 정의 부분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설교문을 정기 배달해주는 설교 도우미 존재부목사가 담임목사의 설교 대작하기도무엇이 표절 설교인가?(1) 일반적인 정의표절 설교는 무엇인가? 필자 나름으로 위의 ‘표절’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적용하여 이렇게 규정하여 본다. ‘표절 설교란 남이 한 설교를 가져다가 그것이 마치 자기의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 나온 열매인양 하며 회중들 앞에 제시하는 행위이다.’ 더 짧게 말하면 ‘남이 한 설교를 순전히 자기가 작성한 설교인양 하며 설교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이 표절 설교 문제는 설교의 문제 자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자의 신앙 양심까지 수반되는 문제다. 곧 남이 발견하여 증거한 진리를 자기가 발견한 것 같이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속여 자신을 높이는 기만적인 술수이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 시간에 남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 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표절 설교이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설교자가 B라는 설교자에게 언제 설교한 원고를 달라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자기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그것은 분명 표절임에 분명하다. 듣기로는 이전에 설교문을 아예 정기적으로 ‘배달’해 주는 ‘설교 도우미’들이 있다고 한다. 또는 인터넷의 설교문들이나 인터넷방송의 설교프로그램에서 다운 받거나 들은 설교를 그대로 받아서 자기 것인 양 설교한다면, 그것 또한 표절 설교임에 분명하다. 또는 어떤 경우에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지금은 아닐지도 모르고, 또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소위 어떤 ‘큰 교회’ 담임 목사는 자기 부목사들에게 설교를 작성하도록 하고 자기는 그 작성된 원고를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 전하기만 한다고 한다. 그 담임 목사의 변이 가관이다. ‘이렇게큰 교회 이끌어 나가다 보면 설교 준비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 부목사들이 나를 도와주어야해요’ 그 소문이 뜬소문이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설교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바쁠 만큼 ‘큰 교회’ 라면 설교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정도의 ‘작은 여러 교회들’로 그 ‘큰 교회를 나누어 여러 설교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독설을 발제자는 하고 싶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어떻게 큰 교회는 되어 가는지, 정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참 한국교회에서 ‘그런 큰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참 설명이 어려운 기괴한 현상이다.(2) 표절 설교와 독창설교(창작설교)의 차이그러면 여기서 위에서 규정한 ‘표절 설교’의 보편적인 정신과 자세대로 하면, ‘표절 설교’와 ‘독창적인 설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발제자가 보기에, 오직 한 가지 척도로만 결정될 수 있다고 본다. 곧,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를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만일 자기가 할 설교의 소임을 위해서 남의 것을 베끼거나 도용하여 회중들 앞에 가지고 나가서 설교하면 그것은 ‘표절 설교’임에 분명하다. 곧 설교 준비를 위해서 쏟아야 할 ‘정상적인 과정이나 수고 없이 그대로 회중 앞에 나가서 마치 자기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맺히고 익힌 열매를 준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행위가 ‘표절 설교’라는 말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를 위해서 나름으로 ‘자신이 직접 성실하게 준비하여’ 회중 앞에 가지고 나가면 그것은 ‘독창적인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자신이 직접 성실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주어진 예배에 설교할 소임을 받고 그 설교를 위해서 자신이 직접 그 설교할 것을 준비하고 원고나 내용을 작성하거나 정리하는 것을 가리켜 말함일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의 메시지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고 그 메시지를 받을 회중들의 영적인 상태를 미리 내다보거나 점검해 보는 것이 수반되는 것이다.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설교할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할 회중의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자 자신의 영적인 준비 - 이 준비는 단순하게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한 준비를 포함함 - 그것을 위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등, 소위 설교안(說敎案)이 설교자의 마음속에 보일락 말락 ‘흙을 뚫고 고개를 내밀고 나오는 작고 여리고 노란 떡잎’ 같이 나타나기부터 강단에 서기 전 그의 손에 들려진 ‘설교 원고’로 완성되기까지의, ‘진을 빼는 해산의 수고(말씀 해석과 묵상과 기도를 수반한),’ 또 그 설교내용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증거할 때에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간절한(마음 상할 정도의) 기대와 부담 등, 그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 작업이다. 그래서 한 편의 설교를 바르게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얼마나 진을 빼는 고투가 있어야 하는가! ‘표절 설교’는 그러한 과정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러한 과정을 겪은 것 같은 ‘가면(假面)’을 쓰고 행해지는 것이다.(3)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으로서의 ‘설교’와 설교자의 위치에 비추어 본 표절의 심각성설교는 그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회중들에게 전달이 되고 회중들은 그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접하는 것이다. Phillip Brooks는 그의 ‘설교론(On Preaching)의 서두에서 “설교는 진리가 인격을 통해서 전달되는 행위이다.”고 정의한다. 회중들은 단순한 어떤 진리에 대한 개념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숙성(熟成)’된,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으면서도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역사(役事)하고 숙성(熟成)된 진리’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가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회중들의 인격 속으로 전이(轉移)되고, 그 하나님의 진리가 그 회중들 각자의 인격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설교자 중의 설교자였던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인용되기에 좋은 말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3:13) 물론 이 말이 더 본질적으로는 신약의 계시를 수령(受領)하고 증거하고 기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도의 설교의 위치를 상기하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설교와 관련하여서도 인용되기에 전혀 적실성이 없지 않다.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증거되어 그 회중들 각자 속에서 역사하였다. 이것이 ‘설교’라는 방식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하나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여기서 ‘전도의 미련한 것’은 개인 전도에도 적용될 수도 있으나 문맥적으로 볼 때에는 ‘설교의 미련한 것’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확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인 ‘설교’라는 제도는 반드시 설교자의 인격과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인격적인 교감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은혜와 진리 속에서 먹고 자라고 회중들도 함께 자란다. 설교자도 자기가 전하는 진리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진리를 회중들이 듣고 받고 그 인격들 속에서 역사하는 은혜를 받듯이 회중 보다 먼저 자기 속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설교와 설교자의 제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세우신 거룩한 지혜의 소산이다. 설교자와 회중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주시고 설교자로 부르시고 설교자로서 가져야 할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설교와 설교자’의 제도는 사도 시대 이후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항상 같은 무게를 가지고 존재한다. 어느 시대 교회도 이 제도를 대체할 것이 무엇이랴. 칼빈 이후 모든 신실한 설교자들은 이 제도를 두신 하나님의 의도를 존중한 자들이다.그러니 표절 설교의 문제점은 남의 설교를 자기 설교인양 하는 부도덕한 행위로 대번에 정죄당할만한 것 외에 또 더 심각한 것은 바로 그 점에서이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사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기르시고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되는 과정’을 빼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도 진리 속에서 자라지 못하게 된다. ‘표절 설교’를 하는 이는 그 설교되는 진리를 먹고 묵상하고 자기 것으로 받고 순종하는 삶이 열려질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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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교회 표절 논란을 넘어 진실성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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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교회 국내외 탈북민 사역의 진단
- 본 원고는 지난 8월 14일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북한선교 연합 컨퍼런스’ 중 마요한 회장이 발제한 ‘북한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 탈북민’의 주요 부분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중대형교회는 풍부한 인프라 통해 사역의 재생산 이루고탈북민교회 자립 통해 북한선교와 통일에 주도적 역할 해야교회의 탈북민 목회탈북민들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역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사역은 그들을 위한 교회의 목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땅에 탈북민들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탈북민들을 보내신 것은 한국교회를 통해서 북한의 회복을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그 말은 곧 단지 배부르고 자유롭게 살라고 이 땅에 온 탈북민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며 또한 두고 온 고향과 그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북한의 회복의 주체인 한국교회도 탈북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품고 섬길 때 복음통일의 사명을 더 잘 준비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해외에 있는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구출하는 것도, 이 땅에 들어 온 탈북민들에게 정착지원과 교육지원을 하는 것도 결국은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이다. 때문에 교회에서의 탈북민 목회는 모든 탈북민 사역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런 탈북민 목회는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데 크게는 중대형 교회와 작은 교회에서의 목회로 나눌 수 있다.1) 중대형 교회에서의 탈북민 목회중대형 교회에서의 탈북민 목회는 다시 탈북민 중심의 목회와 남과 북이 함께하는 형태의 통일목회로 나눌 수 있다. 탈북민 중심의 목회나 통일목회는 둘 다 공동체 중심으로 모이는데 모이는 목적에 따라 예배공동체와 사역공동체로 분류할 수 있다. 예배공동체는 교회 안에서 독립적으로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세례나 성찬식까지도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예배중심의 모임이다. 반면 사역공동체는 교회 전체 예배를 드린 후에 따로 모임을 가지는 형태인데 예배중심보다는 친교나 사역중심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① 탈북민 중심의 공동체탈북민 중심의 예배공동체나 사역공동체는 말 그대로 탈북민 성도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그러다보니 그 안에서의 예배나 사역 등 모든 것이 대체로 탈북민들에게 맞춰져 있다. 물론 이런 공동체에도 남한 성도들이 참여하는데 봉사자, 혹은 교사로 참여한다. 이런 형태의 공동체는 대체로 북한선교 사역의 일환으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간혹 긍휼사역과 같은 특수사역의 범주에 속하여 진행되기도 한다. 탈북민사역을 긍휼사역 범주에 넣는 것은 탈북민들이 북한선교의 주체가 아닌 사회적인 약자라는 시각으로 보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탈북민사역이 북한선교사역 범주에서 진행되든 아니면 특수사역 범주에서 진행되든 간에 탈북민들의 특성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기존에 교회가 가지고 있는 틀에 집어넣고 사역을 하는 방식은 대체로 비슷했던 것 같다.오랫동안 한국교회의 탈북민 사역은 남한교인들이 교사가 되어 탈북민들을 가르치는 형식을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탈북민들은 항상 ‘을’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물론 교회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구도를 만든 것이 아닌 일반적으로 새신자들이 오면 양육하는 구조를 탈북민들에게도 적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양육을 받는 대상들이 같은 남한 지체들일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들이 탈북민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북한 지체들에 대한 신앙적, 지식적, 문화적, 정신적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평등한 지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없게 하고 따라서 서로를 향해 진정한 마음의 문을 열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역 방법이 남한 교인들에게는 북한선교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자긍심은 줄 수 있으나 역으로 탈북민들에게는 교회에서도 동등한 지체가 아닌 사역 ‘대상’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축시키고 결국에는 그들의 온전한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없게 한다. 이렇듯 한국교회의 전통에 집어넣고 진행하는 탈북민 목회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② 통일목회 공동체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통해 새롭게 시작된 시도가 바로 남과 북의 성도들이 함께하는 통일목회 형태의 탈북민 사역이었다. 이 목회형태는 언뜻 보면 기존의 목회형태와 비슷해 보인다. 이런 형태의 공동체 안에도 탈북민 성도들과 남한성도들이 함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위치와 역할이 다르다. 기존의 탈북민 공동체는 남한성도들이 리더의 위치에서 탈북민 성도들을 가르치고 리드했다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는 어느 그룹이 다른 그룹을 가르치고 리드하는 것이 아닌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지체로 보고 함께 배우고 섬기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남한 지체들뿐만 아닌 탈북민들도 리더로 함께 섬긴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남과 북의 성도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섞여서 말씀을 나눌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가 서로를 섬기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배우기도 한다. 이러한 예배공동체가 더 건강한 통일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교회 안에서의 이러한 목회 형식에도 한계가 있다. 공동체 안에서는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준비해 가지만 공동체 밖 교회 전체에서 이 사역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여전히 탈북민 예배요, 특수사역의 일환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교회 담임목회자의 생각이나 비전에 따라 사역의 방향들이 이리저리 바뀔 때가 많다. 물론 교회 담임목회자가 북한선교와 탈북민 사역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교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괜찮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교회의 사역방향에 따라 관심을 받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하나의 특수한 사역으로 남는다.2) 소형교회 형태의 탈북민 목회① 탈북민교회탈북민 목회 형태에는 중대형교회 중심의 목회만이 아닌 작은 교회중심의 탈북민 목회사역들도 있다. 작은 교회의 탈북민 목회는 처음 탈북민 목회자 또는 북한선교의 사명을 가진 남한 출신의 목회자가 일반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민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교회들은 한국교계에 보통 탈북민 교회로 알려졌고 대부분 탈북민들로 구성되었다. 한국에 입국하여 일반 한국교회에 갔다가 적응하지 못한 탈북민 성도들 가운데는 일반 한국교회는 남한 사람들이 주인이기 때문에 저들은 계속 손님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고 때문에 자기들만의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탈북민교회가 이젠 10년이 넘었고 지금은 전국적으로 30여개의 교회로 성장하였다.탈북민 교회들은 여러 가지 열악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우선은 탈북민들은 모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왜냐하면 워낙 탈북민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여 교인들의 숫자도 별로 없는데다가 보통 탈북민들의 재정적인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헌금도 많지 않고 거기에 믿음이 없어 헌금을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탈북민 교회들은 거의 외부의 지원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또한 탈북민 성도들이 대부분 제대로 된 신앙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함께 세워갈 리더십이 항상 부족하고 그것으로 교회 영적성장에 중요한 새신자 양육이라든지 돌봄과 같은 사역들을 이루는데도 계속적인 어려움들이 있다. 결국 탈북민 교회들의 어려움은 또다른 어려움을 낳는다. 한국교회가 탈북민 교회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② 통일을 살아가는 교회몇 년 전부터 그동안 진행되어 온 탈북민사역들을 통해 얻은 경험들에 기초하여 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통일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미리 통일을 연습하고 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통일이라는 것은 분명하기에 그 사람의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한국교회가 북한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그동안 탈북민들을 섬기면서 깨달은 부분이었다. 남과 북이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같은 민족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준비가 없이도 북한의 문이 열릴 때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남한교회는 북한사람들에 대해 너무나 몰랐고 또한 준비가 없으면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탈북민 사역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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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국교회 국내외 탈북민 사역의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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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한국종교 이해와 신명 이해 ㅤㅈㅠㄶ2
- 이 글은 이은선 박사(안양대)가 지난 3월 28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된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사역” 가운데 “언더우드의 한국종교 이해와 신명 이해”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동양의 단일신론은 성서의 기록된 계시를 결여하고 있어성서의 신관만이 인간의 필요와 존재 문재에 답할 수 있다언더우드 자신의 연구언더우드가 하나님이란 용어를 수용하게 된 과정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한 것은 그가 1908년 뉴욕대학에서 했던 강연을 책으로 1910년에 출판한 ‘동아시아의 종교’(The Religions of Eastem Asia)이다. 그는 이 동아시아의 종교에 자신의 종교론을 전개하면서 왜 하나님만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언더우드는 ‘동아시아의 종교’에서 유일신론(monotheism)과 단일신론(henotheism)을 구별하고, 단일신론을 일신론(monotheism)과 동시한다. 유일신론은 다른 신들마저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말하고, 일신론은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의 신만을 지속적으로 숭배하는 것이다.언더우드는 동아시아 종교에 대한 강연을 통해 이들 종교들의 가장 뛰어난 점들과 하늘이 주신 진리 사이의 큰 간격(guif). 그리고 끝으로 이들과 기독교 사이의 접촉점을 보여주었다.레그(James Legge)는 중국종교를 유일신론(monotheism)으로 이해한 반면, 언더우드는 동아시아의 종교를 단일신론(henotheism)으로 이해하여 설명하였다. 레그는 중국종교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에서 출발해서 중국 본토 종교인 유교와 도교의 기원적 의미에서 어떻게 기독교와 정신유산을 공유할 수 있는지 궁구했다.반면에 언더우드는 한국의 전통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동아시아의 종교에서 중국, 일본, 한국의 고유한 종교의 도교, 신도, 샤머니즘, 그리고 세 나라의 공통된 유교와 불교를 논의하면서 이들 종교의 현재의 타락된 모습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그와 함께 그는 우리나라에 종교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가 종교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종교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존의 종교들이 쇠퇴하여 현재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당시 동양의 문화를 낮게 평가하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레그는 당시 중국의 유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언더우드는 당시 한국의 유교는 효를 강조하는 윤리체계를 가진 정치윤리적인 제도라고 이해하였다. 물론 유교가 조상제사를 통해 종교적인 측면을 일부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조선의 유교는 수양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체계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언더우드는 윤치호의 글은 인용해, 즉 유교의 “불가지론(agnosticism), 이기심(selfishness), 교만(arrogance), 독재(despotism), 여성비하(degradation of woman)의 열매를 맺는 윤리체계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레그는 도교에 대해 상당기간 동안 종교가 아니라 철학체계였다고 보았으며, 이 관점에서 하나님을 인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노자는 공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 이들이 이미 레그가 주장한 고대일신론에서 이미 떨어져 나왔으며 이런 조건은 후대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의 기원적 신앙이 순수한 정령숭배임을 인정하게 했다고 주장했다.레그는 유교와 도교철학을 이용하여 현재까지 보존된 유일신론을 주목했다면, 언더우드는 초기에 유일신교에 대한 레그의 주장은 옳을 수 있지만 공자와 노자의 시기에 이르면 이미 거기에서 벗어나 정령신앙이나 영혼숭배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지고신의 숭배에서 더 나아가 다신론으로 하강하였다고 주장하였다.그래서 언더우드의 마틴(W.A.P. Martin, 1827-1916)의 견해를 이용하여 상제(上帝) 관념의 하강을 주장하였다. 언더우드는 종교하강론에서 동양 3국의 종교 가운데 유일신론의 흔적을 발견할수 없고, 단일신교를 발견할 수 있으며, 더 타락하여 다신교적인 상황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였다.언더우드는 종교는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강한다고 보았다. 원시시대의 신 숭배는 유일신적 경향으로 사람들이 순수하게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숭배했지만, 이후 이 하나님의 자손 또는 대리인으로 왕을 신성화(deification)했으며, 또한 영웅, 조상, 자연의 힘을 통해 범신론, 다신론, 성물숭배 등으로 퇴화(하강)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언더우드는 레그가 주장한 ‘상제’, ‘천’은 중국사회의 변천 속에서 어던 하강, 즉 다신론, 미신 등의 경향이 농후하다고 보았다. 특히 언더우드는 중국종교의 ‘사실(facts)’면에서 다신론을 유일신론의 쇠퇴(하강)로 여겼고, 이 때문에 이런 종교하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일신론이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언더우드는 동양의 단일신론은 성서의 기록된 계시를 결여하여 다신론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레그는 기독교 계시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신학적으로 일반계시의 가능성을 십분 긍정하는 것으로 타종교에 대한 이해 또는 타종교 안의 계시 가능성을 확인했다.반면에 언더우드는 성서를 통한 특별계시만을 인정하고 일반적인 계시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언더우드는 비교종교 연구를 통해 동방종교의 현존하는 체제가 신성에 관한 지고관념을 제공하지 못하며, 또한 삶의 문제와 인간의 본성적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 절대적 불충분성을 지녔음을 나타내며 동시에 성서의 신관만이 인간의 필요와 종재문제에 대답할 수 있으며 동방종교는 이런 길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언더우드는 기존의 종교 속에서 기독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인 성취론의 요소를 인정하지 않았다.언더우드는 당시 우리나라의 샤머니즘 신앙의 하나님 신앙을 유일신교가 아닌 단일신교로 보았다. 언더우드는 “한국인들은 다른 신들을 믿지만 하나님이 다른 모든 신들을 다스린다고 강하게”믿어 다신교 속에서 하나님만을 믿는 단일신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교에서 차용된 삼신 신앙이 있는데, 그들은 “결코 서로 분리되지 않고 각각 따로 숭배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일종의 삼위일체에 비유된다.”고 한다.그는 더 나아가 초기의 이 하나님 신앙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창조주로 제사하는 유일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마니산에 있는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한 것이며 항상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그리고 그들의 옛날이야기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단군이 이 제단을 세웠고 여기서 ‘그의 아버지’ ‘환인’, ‘제석’ 혹은 창조주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주장한다.”그는 게일의 견해를 받아들여 “한국인들은 그들이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위대한 존재’(Great One)가 최고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고대왕국의 왕인 단군이 강화에 제단을 쌓고 그의 ‘아버지 신’인 ‘창조주’를 숭배했다”고 말한다.그는 “한국은 스스로 모든 가능성 속에서 본래부터 순수한 유일신론을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후에 결과적인 다신론과 함께 자연 종교로 전개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일종의 단일신론(henotheism)이 유지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다신숭배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타락으로부터 신의 원래의(native) 개념을 대부분 보존해 왔다”고 하였다.그는 한국 샤머니즘에서 동물이나 인간의 형상이 발견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신화에서 보이는 퇴페성도 한국 신화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한국의 하나님 사상에는 유대인의 여호와 사상보다 의인화의 경향이 더 적다”고 까지 말한다. 한국이 이렇게 어느정도 고대 신앙의 단순성을 유지하게 된 것은 “금세기 외부세계와 단절되면서, 이 나라는 자신 안에서 만족을 취해”왔기 때문이다.언더우드는 이런 동방종교의 단일신론, 하강경향 속에서도 한국인의 ‘하나님’을 순수한 원시적 유일신론에 대한 강렬한 가능성으로 제기하고 있다. 한국인의 ‘하나님’신앙이 ‘상제’, ‘천’처럼 물질화되지 않고 순수한 한국인의 종교심성을 보존시켰음을 주목했다.그는 한국 샤머니즘이 현재는 타락했지만, 단군시대에는 하나님에게만 제사지내는 유일신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도 하나님만을 섬기는데서 단일신교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헐버트의 단군신화 연구와 게일의 주장들을 수용하면서 한국의 샤머니즘 연구를 통해 하나님 용어 속에 유일신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리하여 하나님 용어를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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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한국종교 이해와 신명 이해 ㅤㅈㅠㄶ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