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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대담/ 정근모 박사(제12대 및 15대 과학기술처 장관)
    초일류 국가 이루려면 정직과 도덕적 사회 구현돼야 세계적인 핵물리 과학자로서 대한민국의 앞날을 염려하고 초일류국가 건설과 미래희망을 역설하고 있는 정근모 박사를 만나 ‘거듭나는 대한민국’을 향한 비전과 포부를 들었다.“신고리 원전 5,6호기 중단 논란이 결과적으로 유익하게 됐습니다. 대한민국 원전 기술은 세계최고 수준입니다. 세계적으로 우리 원전 기술이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게 되었고, 이번에 포항 지진에서도 근처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아주 안전하다는 것이 입증된 것 아닙니까. 우리 원자력 기술은 세계 1위입니다.” 정근모 박사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해서 학자들과 교수 그리고 원자력 연구단체 등에서 원자력 에너지의 필요성과 국가 에너지 산업에서 원자력의 중요성을 건의하고, 호소하고, 계속 외치고 있지만, 소위 우리사회 메이저 언론들이 보도에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원자력의 안전과 필요성에 대하여 사회적 여론과 국민의 알권리가 가려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지금도 해외 각국에서 대한민국의 원자력 기술을 세계 제일로 인정하기 때문에 영국,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 요청을 하고 있다고 했다.-거듭나는 대한민국의 비전정박사는 개인이 거듭남(Born Again)의 체험을 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전체가 거듭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 박사는 “세종대왕의 국가경영을 살펴보면, 도덕사회 기반조성, 탁월한 외교와 국방 정책을 세우고, 언어학적 우수성을 인정받는 훈민정음 제정, 과학기술진흥과 서민복지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또 격동의 대한민국 근대사를 살펴보면, 자유민주 정부수립과 함께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국민의 각성으로 자유정치체제를 세웠고, 또한 대한민국 건국지도자들의 비전은 민주공화국 수립, 국민의무교육제도 실시, 산업화 촉진, 과학기술개발로 자주국방 안보추진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이에 힘입어 이제 거듭난 대한민국(Born Again Korea)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사랑과 봉사의 ‘예수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내용을 보면 민족화합의 기도운동, 국민각성운동, 사랑의 집짓기운동, 국가지도자를 위한 기도운동, 빈곤국가 자립 계발운동 등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정 장로는 “기독교만이 미래가 있고,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신다. 예수혁명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초일류 대한민국을 향한 정책수단정 박사는 초일류 대한민국을 꿈꾼다. 대한민국이 초일류 국가를 이루려면 정직한 도덕사회와 인격함양교육으로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회가 되어야 하고, 젊은이에게 꿈을 심어주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과학기술경제, 환경보전 에너지를 개발하는 산전국(産電國)으로 도약해야 하며, 원자력을 중심으로 태양, 수력, 풍력, 혼합 믹스에너지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안보체제 확립이 중요하다. 대량살상무기를 무력화 시키는 방위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이 아세아태평양조약기구(PATO) 같은 지역안보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복지행정을 확립할 수 있고, 한류문화의 전파로 행복을 전하는 초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신앙인 정근모 장로정 장로는 서울 삼성동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삼성제일교회 장로로서 그동안 교회를 섬겨왔다. 정 장로는 한국교회가 교회나 목사님에 데해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잘못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치리 하실 것이기 때문에 불평하거나 원망하면 안된다”면서 한국교회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너무 비판이 심하다는 것이다. 정 장로가 주도하고 있는 ‘민족화합기도회’는 현재 31년째 계속되고 있으며, 매주 토요일 모이고 있다. 특히 매년 3.1절에는 교계인사를 초청하여 대규모로 기도회를 개최하고 있다.정 장로는 기독교밖에는 미래가 없다고 확신한다. 나라가 초일류국가가 되려면 미래의 비전을 실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믿는 사람이 일어서야 한다면서 빛을 발하는 크리스챤 리더가 많이 배출되고,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꿈을 가지고 각성하고 일어나 예수혁명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안보위기, 경제위기, 사회위기를 예수혁명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일류국가 대한민국, 거듭난 대한민국의 건설은 예수혁명, 예수부활의 승리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상만을 바라보고 세상일만 몰두하여 온 사람에게는 ‘혁명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고, 혁명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하다.” 개인의 삶, 가정, 학교, 교회, 직장, 사회, 국가와 세계적인 삶에서 예수중심의 삶이 구현될 때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탁월한 두뇌를 가진 과학자정근모 박사는 가난하고 핍절했던 1954년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이학사를 취득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응용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핵융합연구(Post-Doc) 과정을 마친 탁월한 두뇌를 가진 과학자이다. 그는 이후 공학, 이학, 인문학, 기술학, 리더십 박사에 이르는 여러 분야에서 학위를 받은 석학으로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다. 대학 교수와 총장으로서, 연구기관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정부 기관에서 과학정책을 다루는 행정가로서 국가미래를 위한 정 박사의 노력이 곳곳에 스며져 있다. 또한 세계적인 원자력과 에너지 분야의 회의 참석과 단체 결성에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국가미래를 위한 과학정책 입안정 박사는 앞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을 공부했고,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약관 20대에 대한민국 원자력원 원장 보좌역으로 과학정책을 다루는 기관에 참여했다. 미국 MIT 대학교 핵공학 연구교수, 뉴욕공대 전기물리학 교수를 거치면서 미국 과학재단 에너지 분야 수석정책심의관 등 과학정책 분야에 대한 경력을 쌓아왔다. 80년대 어려운 국내의 사회환경에서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 대학과 한국전력에서 에너지 분야 석좌교수와 고문,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으로서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였다. 또한 과학인재를 양성하는 한국과학원(KAIST)설립을 제안하여 초대 부원장과 교수를 역임했고, 한국과학재단과 고등기술연구원 설립을 주도했다. 그리고 전국대학교에 ‘우수연구센터’를 100개 대학에 설립했고, 선진국처럼 연구교육의 일환으로 과학, 공학 연구센터를 세워서 대학의 대 변신을 가져오게 했다. 뿐만 아니라, 정 박사는 대덕 연구단지에 핵융합연구센터를 세워 에너지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도록 했고,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과 원자력안전에 대한 기술 지도를 하여 관련업체와 협회 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국제기구와 연구기관과의 기술교류에서도 의장국지위와 연차총회유치 등을 통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세계에너지 회의 국제집행위원회,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자문위원, 태평양연안 원자력협력위원회 등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여했다. 대한민국이 세계 속의 대한민국의 원전기술 위상을 높이는데 정 박사의 역할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주필 김형원 장로>
    • 해설/기획
    • 특집
    2017-12-0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시고, 시내 산에 데려와서 언약을 맺어 이들을 그의 백성 삼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40년을 행진해왔다. 지금 같으면 8시간이면 다다를 거리를 40년이나 걸려, 이제 가데스 바네아를 거쳐 요단 건너편 모압 평지에 이르렀다.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건너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반복하여 주신 말씀 중 일부가 바로 신명기 8장의 말씀이다. 모세는 입을 열어 “너는 내가 오늘 너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며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땅에 들어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세는 “너는 내가 오늘 너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온 백성, 그러니까 장정만 60만이 되는 이 백성을 향하여 “너희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단수형 “너는”이라고 말한다. 우리 어법에는 맞지 않지만 모세는 그의 백성 모두를 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특히 신명기를 보면 이러한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부분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이점 때문에 모세 오경의 저작설과 통일성을 부인한다. 이들의 주장은 어떻게 한 사람이 똑 같은 청중을 앞에 두고 어떤 때는 복수로 “너희가 …” 이렇게 말하다가 금방 대상을 바꿔 단수로 “네가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분명 신명기 내에 둘 혹은 세개의 자료가 편집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온전한 정신을 갖지 않고서야 같은 청중을 향하여 단수 “너”와 복수 “너희”를 구별하지 않고 연설을 하고, 말씀을 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경의 문서편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명기를 오경으로부터 분리하여 모세가 쓴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특히 신명기에 쓰여진 어휘 분석을 통하여 요시아 왕 때에 이스라엘의 종교 개혁 사상에 투철한 제사장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여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명기로 편집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만일에 이러한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신명기를 비롯한 모든 성경 말씀이 무명의 인간들이 지어낸 신앙 서적이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대를 따라 그들의 신, 여호와에 대한 신앙 고백을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다. 이 책을 믿고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지 않은 예수라는 분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 결국 기독교는 허구의 종교가 되고 말 것이며,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서구의 교회는 이 자유주의자들의 양향으로 말미암아 쇠락하게 되었다.그러나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 그의 성령으로 그의 선지자를 감화 감동하여 성경을 쓰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성경에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오류처럼 보이는 불가해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혜나 지능이 아직 그 신비에 미치지 못하거나 하나님께서 일부러 감추어 두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세상의 모든 신비를 다 알기를 원하시지 않는 부분도 있다.신명기에서 모세나 하나님께서 단수 (너)와 복수 (너희)를 혼용하여 쓰고 있는 것은 언약적 연대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다. 한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 전부이고, 이스라엘 민족 전부가 한 사람이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한 사람, 한 여자로 부르고,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잘 못하면 모두가 잘못한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잘 하면 각각의 개인이 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한 사람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언약적 저주가 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모압 평지에서 그가 주신 이 말씀을 지켜 행하면 그들이 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이 광야에서 살아 남은 길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첫째는 이스라엘은 40년동안 시내 광야를 돌고 돌았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돌았던 그 모든 길을 다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40년 동안 그들이 다녔던 모든 길을 빠짐 없이 다 기억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는 그들이 격었던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었든지 다 기억하라는 것이다. 아마도 좋은 일보다는 힘들고 고생했던 일을 기억하라는 말씀 같다. 왜 기억하라고 하시는가? “이는 너를 낮추고 시험하셔서 네가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는 지, 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아 보시려는 것이었다.” 는 것이다. 여기서 낮추고 시험하셨다고 했는 데, 낮추다는 말은 “아나”()의 강조형이다. 겸손하게 하다 (humble), 고생시키다. 환난을 당하게 하다(afflicted)라는 의미이다. 또한 “시험하다”는 말도 히브리어 “나사”()의 강조형(Piel)으로 훈련시키다(train), 혹은 “경험하게 하다”(experience)는 뜻이다. 그래서 “이는 너를 낮추시고 시험하셔서”라는 구절은 “이는 너를 고생시키고 훈련시키셔서 네가 그분의 명령을 잘 지키는 지 …”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을 더 잘 표현할 것 같다. 이는 구체적으로 광야에서 목마르고 배고프게 하시다가, 반석에 샘물이 나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배부르게 하신 일들을 염두에 두신 말씀 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 만이 자기들의 생명을 살려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 앞뒤가 꽉 막혀 있는 광야에서 물도 없고, 양식도 없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그 백성을 죽게 내 버려 두시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죽을 지경에 이를지라도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과 사경에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여, 사경에 이를지라도 육신의 양식보다는 우리 영혼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양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양식을 친히 주셨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양식만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 40년 동안에 네 몸에 걸친 옷이 헤어지지 않았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4)고 말씀하신다. 옷도 주시고, 건강도 주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육신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셨다. 그래서 광야에서 울면서 이집트로 돌아갈 생각하지 말라. 이 광야 생활을 저주 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마치 아비가 자식을 훈련하듯이 그들을 이스라엘을 아들로 대우하시고 훈련하셨다는 것이다. 놀랍고 감사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광야 길에서 있었던 그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둘째로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점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분명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배불리 먹고, 좋은 집 짓고, 은 금을 비롯하여 가진 것이 풍성해질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배고프고 천대받고 학대 받던 날에 그들을 이끌어내어 해방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된 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반석에 샘물이 나게 하시고 불뱀과 전갈이 있는 광야를 지나며, 만나와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어 이 복지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자가 되어 잘 살게 된 것이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된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다는 것이다. 16-17절 말씀, “광야에서 네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네게 먹이셨으니, 이는 너를 낮추고 시험하여 마침내 네가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게 마음 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잊고 교만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잘 나서 이들에게 복주고, 부자 되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18). 우리 신자들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잘 먹고 잘 수 있게 되어 있다. 번영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복에 취해서 하나님을 잊을 때 하나님은 그를 망하게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성공의 날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선민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을 때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에 종으로 다시 끌려가게 하셨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1-25
  • 해설/ 한국교회 연합단체의 통합과 분열 무엇이 문제인가?
    대형교단 구미에 맞는 새판짜기 우려 커져 태동 당시부터 수많은 논란을 낳았던 한국기독교연합(공동대표회장 김선규, 이성희, 전명구, 정서영)이 결국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의 파기선언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애초 한기연은 창립 당시 한교연과 교단장회의(한교총)의 통합체로서 새로운 단체 창립이나 분열이 아닌, 한국교회 대통합의 기틀이 될 것이라는 대의를 내세웠으나, 결국 한교연이 떨어져 나가며, 또 하나의 분열단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이로서 한국교회는 기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이홍정 목사)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엄기호 목사) 와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와 한국기독교연합 등 총 4개의 연합단체로 분열하게 됐다. 한교연-한교총 통합, 예고된 ‘불발’사실 한교연과 교단장회의의 공존은 이미 창립 당시부터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높았다. 무엇보다 교단장회의의 불분명한 정체성과 통합과정에서 상식을 뒤엎는 논란들, 그리고 교단장회의 한교연의 관계에 대한 경과를 살펴 볼 때 통합에 대한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미 앞서 수차례 지적했지만 교단장회의는 교단장들의 친목 모임일 뿐, 그 이상의 어떠한 정치력도 가질 수 없다. 그런 연유로 교단장회의가 정치참여를 위한 꼼수로 한국교회총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으나, 이 역시도 교단장들의 의지만 있었을 뿐, 정작 교단들은 가입한 적 없어 임시단체에 불과했다. 문제는 한교총의 성격이다. 교단장회의는 한교총을 설립할 때 한기총-한교연의 통합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며, ‘빅텐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연합단체 위의 연합단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즉, 교회협, 한기총, 한교연 등 기존의 연합단체를 아우르는 단체가 바로 한교총이라는 것이다. 이후 한교연과 한기총이 통합 선언문을 발표하며, 무르익던 통합 분위기가 한기총 이영훈 대표회장의 중도 사퇴로 지지부진해 지자, 한교총은 9월 총회를 앞두고 공식 창립을 선포했다. 역시 명분은 ‘빅텐트’였다. 하지만 고작 1주일이 지나, 한교총은 한교연과 난데없이 통합을 발표한다. 한기총-한교연의 통합을 교계 통합의 숙제로 여기던 상황에 갑작스레 이뤄진 또 다른 통합 발표는 한국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무엇보다 한교총이라는 조직이 교단장회의가 만든 임시단체에 불과할 뿐인데, 통합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와, 양측의 가입교단들이 대부분 겹친다는 점에서, 과연 이를 교계 통합으로 봐야 할 것이냐는 논란이 생겼다. 더구나 이들이 합의한 통합안을 보면, 내용 상 통합의 단체로 ‘한교총’이 명시되어 있지만, 정작 서명은 ‘교단장회의 대표 이성희 목사’로 되어있어 통합안이 애초에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논란을 뒤로 하고, 결국 양 단체는 지난 8월 16일 한기연의 창립총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한교연은 정확히 3개월 후 이에 대한 파기를 선언한다. 9월 총회 이후 입장 엇갈려그렇다면 과연 8월 16일 창립총회는 무슨 의미였을까? 8월 16일의 창립총회는 어디까지 한국교회 9월 총회를 앞두고 회원교단들의 가입을 허락받기 위한 순전히 ‘띄워놓기’였다. 한국교회에 있어 가장 민감한 부분은 분열이다. 대부분의 교단 목회자들은 분열에 있어 매우 민감하다. 한국교회 정서상 분열은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정당성을 인정받기 힘들다. 일례로 과거 한교연이 한기총에서 분열해 나올 때 그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이단 문제’를 앞세우기도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기연의 주요 교단들에 있어 기존 한기총이나 한교연이 아닌 새 단체인 ‘한기연’의 가입을 총회에서 허락받는 것이 그리 녹녹치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한교연’이라는 기존의 연합단체가 있다면 얘기가 틀려진다. 무엇보다 ‘분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창립총회는 추진 중인 단체가 아닌 완성된 조직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한교연과 한교총이 한기연의 창립총회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순식간에 치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한교연 역시 이 문제를 염두해, 창립총회에 임했고, 사실상 창립총회에 별다른 비중을 두지 않았다. 창립총회 이후에도 한교연은 여전히 존재하며, 오는 12월 초 정기총회 이후 한교연이 완전히 한기연에 통합되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주요 교단들의 가입 허락을 받은 한기연의 입장은 달랐다. 창립총회로 양 단체의 통합은 완성된 것이라는 입장이었기에, 한교연의 반발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더구나 각 교단들의 가입으로 이미 단체 조직을 위한 모든 여건이 완료된 상황인지라, 한교연의 파기 선언이 한기연 파기로 이어질 이유도 없었다. 대교단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연합 구도’ 좌지우지문제는 대형교단들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구미에 맞게 교계 연합 구도를 떡 주무르듯 하고 있다. 한기총의 태동부터 한교연의 분열, 그리고 금번 한기연의 재분열까지 이 모두의 이면에는 예장통합이라는 대형교단이 자리하고 있다. 겉으로 에큐메니칼을 표방하면서 사실상 한국교회 분열을 조장해 온 예장통합에 대해 한교연 역시 “한기총을 세운 대교단이 한기총을 탈퇴해 한교연을 세우고, 또다시 아무런 명분도 없이 한교연을 없애고 한기연을 새로 만드는데 주도적으로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아무리 불의한 일일지라도 일단 한 번 누군가 길을 뚫고 나가면, 그간 눈치보던 이들이 우후죽순 그 길로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또다시 반복된 교계 연합단체 분열은 지극히 위험하다. 철저히 정치적으로 얽힌 대교단들의 이해관계에 당장 1년 후에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한국교회의 분열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험하다.
    • 해설/기획
    • 해설
    2017-11-2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1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다 창조하셨다는 것이다.둘째로 창세기 1:1이 의미하는 바는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의 세계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늘과 땅이란 일종의 메리즘(Merism)이다. 메리즘이란 서로 반대의 의미를 가진 어휘를 합성하여 전체나 전량을 의미하는 어법이다. 남녀노소는 서로 반대어를 합성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기가 “헬라인이나 유대인에게 빚진 자”라는 말을 하고 있는 데 이는 선민과 비선민을 대표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가 빚졌다는 의미이다.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라는 의미도 같은 어법이다. 따라서 창세기 1:1의 “하늘과 땅”이라는 말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무”의 세계에서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보통 Creation out of nothing (creatio ex nihilo) 라는 말을 쓴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스스로 생겨난 것은 없다. 자연발생적인 것은 없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자연”이라는 말보다는 “피조물”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보면 우리는 그것들 하나 하나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롬 1:20).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하여 기뻐하시고 만족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의 그의 창조물에 대한 완벽성, 혹은 만족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신 것은 사람을 그를 대신한 만물의 통치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지상의 왕을 신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바빌로니아에서는 하무라비 왕을 마둑의 형상, 느부갓네살을 벨의 형상이라고 하였고, 이집트에서도 바로 왕을 아톰의 형상 혹은 르의 형상이라고 칭하였다. 왕을 가리켜 신의 형상이라고 부른 것은 왕이 지상에서 신들을 대리하여 신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만물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그의 통치권을 사람에게 위임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을 대신한 왕이다. 하나님이 대왕이시라면 사람은 왕이 된 것이다. 따라서 시편 8:5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관”을 씌우셨다고 말하고 있는 데, 여기서 “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타라”를 번역한 것으로 왕관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왕관을 쓴 존재,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은 위로는 대왕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의 대리 통치자로 왕관을 쓴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에는 사람의 보호와 통치를 받아야 하는 만물의 세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는 하나님-사람-만물이라는 위계 질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은 모든 피조물을 창세기 2:1에는 “만물”이라고 지칭한다. “만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콜-츠바암”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모든 그들의 군대”라는 뜻이다. 히브리어 “차바”는 군대라는 의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를 때 바로 “차바”라는 어휘를 쓴다. 여호와를 군대를 다스리는 분으로 일컫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2:1은 “하늘과 땅과 그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었다.”(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ir hosts)라고 번역해야 옳다. 그러나 한글 성경은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만물”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말하자면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는 하나님-사람-만물의 위계질서가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마치 군대와 같은 조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위계 질서를 가진 조직이다. 군대 조직은 왕이 통수권자로서 총사령관이라면 그 밑에는 각각 사단장 그리고 연대장을 비롯한 지휘자가 있고, 그 아래에 일반 병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에 어떤 사단장이 총사령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면 그 사단장이 명령불복종의 반역죄로 처벌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단의 병사들도 그들의 사단장과 함께 명령 불복종이나 반역의 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군대 조직은 이와 같은 결속력, 연대성을 가진 조직체이다. 그런데 바로 청세기 1장의 구조가 바로 고대 근동의 군대 조직과 흡사하다. 아담은 대왕이신 하나님의 봉신으로 왕이라 할 수 있다. 왕은 하나님의 봉신으로서 계속 충성할 때 의미가 있다. 왕, 아담은 대왕이신 하나님의 신하로서 백성을 돌보고 다스리며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 복종해야 한다. 명령을 불복종할 때는 그의 통치권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대성을 고대 근동의 봉건제도 곧 계약관계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종주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그의 속주이며, 피조물은 속주의 통치권 아래에 있지만 종주가 내리는 상벌에 있어서는 속주와 연대성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의 관계는 언약관계이다. 사람과 만물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갖는다. 따라서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 불순종의 태도 여하에 따라 피조물의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2-31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날자별로 그 순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1-3일은 빛, 궁창, 육지라는 영역을 창조하시고, 4-5일은 해와 달과 별, 새와 물고기, 그리고 짐승과 가축과 사람 등 각 영역을 무대로 그 무대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를 세우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장은 만물의 기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태초에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을 통하여 우주의 기원이나 생물의 발생 연대를 추측하려고 하는 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의도하는 바와는 맞지 않다. 창세기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상 일어난 모든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책이 아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5천년 혹은 6천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성격을 오해한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특별한 일을 선택적으로 기록한 “구속사”이다. 창세기 1-2 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은 과학적으로 창조의 순서를 기술한 책이 아니다. 시 8편은 창세기 1-2장에 대한 해석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가를 설명하며, 그 창조 세계 가운데 사람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고대 근동의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한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성경적인 관점, 곧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언약 관계성 속에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1-17
  • 학술/ 감사의 사람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1월 10일 서울 신촌 성결교회에서 개최한 11월 월례회 ‘감사의 영을 부어주소서’에서 오정호 목사가 발제한 ‘감사의 사람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바울 서신에 나타난 감사신약성경에는 바울 서신에 감사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감사표현의 70% 정도가 바울 서신에 집중되어 있다.(개역개정으로 판단할 때, 감사 표현은 신약 전체에 65회(63구절) 등장하는데 바울 서신에 48회(46구절), 그 나머지에 17회(복음서에 11회, 사도행전에 2회, 히브리서에 1회, 요한계시록에 3회) 등장한다. 신약성경은 모두 260장인데, 복음서가 89장, 바울 서신이 87장, 기타 책이 84장으로 집계된다. 물론 각 장의 절수가 고려돼야 하지만, 대략 잡아 바울 서신이 약1/3 정도 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진섭 교수/그말씀/2014년 11월 두란노)앞의 진술된 내용으로 보건데 사도 바울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감사의 체질인 것이 틀림없다.그는 마치 시인의 시가 읽는 이들의 감정 이입으로 말미암아 시다워질 수 있듯 사도 바울의 삶을 한편의 시라고 할 때 고조된 감사로 감정이입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면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가졌으리라사도 바울은 마치 투수가 공을 던졌을 때 타석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공이 오기를 기다리던 타자가 찬스를 결코 놓치지 않고 힘차게 쳐내는 것처럼 그는 감사를 자극하는 그 어떤 순간도 놓치지 않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표현하는 감사자였다. 물론 그가 주님의 은혜와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환경을 매의 눈을 가지고 살폈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매는 상공 1Km에서 땅에 기어가는 들쥐를 알아낼 정도라고 한다. 동일한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사도 바울처럼 감사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은 평범함을 감사의 비범함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음을 안다. 아니 그가 본질적으로,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감사로 표현해야 할 그 시점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 생명의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상대적으로 그 자신의 죄성과 초라함 그리고 외식에 대하여 처절하게 탄식하였다. 자기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규정하였다. 골짜기가 깊으면 정상이 높듯이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세워진 자기 모습 앞에서 때로는 감격하며, 때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때로는 경이로움을 담아 외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2-16)사도 바울은 감사의 체질이었다.바울 서신 중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형식이 바로 ‘감사형식(thanksgiving formula)’이라 불리는 것이다. 알려진 대로 13개 바울서신중 11개 서신에서 이런 감사형식이 등장한다.(갈라디아서와 디도서에는 예외적으로 감사표현이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이 두 서신의 배경에 무게를 둔다. 갈라디아서는 거짓복음을 따르는 자들 때문에 디도서에는 목회적 사역을 전하는데 집중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 마디로 감사체질이 아니고서야 이렇듯 압도적으로 감사를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곧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감사는 삶이었고 그의 삶은 감사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문이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감사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 감사가 멈추지 않는다. 그가 생명을 드려 개척한 여러 교회 교우들의 형편을 듣고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될 때 그는 감격하였다. 그 예로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 그는 벅찬 마음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하였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2-3)특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반듯한 신앙생활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감사함을 표하였다.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또한 그가 감사함으로 모든 난관을 딛고 일어선 것처럼 핍박중에 있는 데살로니가교회 교우들 역시 기도가 삶에 녹아져 그것이 모든 핍박을 이겨내고 딛고 일어서는 ‘성도의 동력’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것을 막아내고 복음적인 삶의 영적 선순환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사도 바울은 박해가운데서도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그의 감사를 표하였다.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살후 1:3)한 마디로 표현하면 복음의 실체와 영광을 실생활에서 경험하고 자기 정체성 확신의 토대로 삼음에 대하여 이 역시 감사의 제목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3)개인에 대한 감사사도 바울은 우주적인 감사에 대하여 민감하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개인에 대한 감사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빌레몬 때문에 드리는 감사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기저에는 빌레몬의 믿음과 행함이 놓여 있었다.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몬 1:4-7)굳이 심리학적인 이론을 차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경험한대로 상대에 대한 인정과 칭찬과 감사는 경계심을 해제하고 적의를 풀게 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는 힘이 있다.로마서는 하나님의 웅대한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인간의 죄성을 치열하게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그러나 로마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전에 사도 바울은 16장에서 여러 사람의 이름을 거명한다. 곧 그의 삶을 복되게 하고 눈물을 함께 나눈 동역자 들이다. 예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우리도 알건데 신앙은 윤리로 반드시 표현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관계로 반영된다. 우리 시대의 아픔은 신앙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매몰차게 대하는 것이다. 진리를 빙자하여 편당을 짓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의 따뜻함이 사라진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과 가장 신앙적인 것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힘께 나아가는 개념인 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로마서 16장을 대필자인 더디오에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불러준 사도바울을 상상 할 수 있다. 아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떠올려 입술로 표현할 때 그의 마음은 한없는 감사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복음을 위한 동역자로서 산전수전 함께 겪어낸 피붙이 이상의 끈끈한 관계가 그들의 관계 아닌가.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롬 16:3-5).
    • 해설/기획
    • 학술
    2017-11-1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70
    성경 구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절이 어떤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을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구절 중에 어떤 것은 가장 중요하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경중을 가릴 수 없이 모두 다 중요한 구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교리와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성경 구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창세기 1장 1절이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1:1이라야 말로 성경의 대전제이고, 이 대전제로부터 신학과 교리와 신앙이 출발하고, 우리의 기독교적인 철학과 사상 체계의 가장 핵심적인 뼈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창세기 1:1을 받아들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기독교 신자는 될 수 없다. 또 창세기 1:1을 확고하게 믿지 않는 사람은 신학자나 목회자가 될 수도 없겠지만 절대로 되어서도 안된다. 창세기 1:1은 하나님께서 온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그리고 시편 8편의 저자의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지은 신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서 세상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만물의 기원을 다루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어떠한 조직과 질서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위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는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있고, 그 사람 아래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돌보도록 맡기신 만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 기사를 읽을 때 이 가운데서 만물의 기원과 우주 만물의 역사적 연대를 추론하거나 창조의 과정을 과학적 이론에 비추어 설명하려는 시도는 전혀 창세기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 기사에 대한 만물의 과학적,역사적 기원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창세이래 지각있는 우리 인간들이 추구해왔지만 해답을 얻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창세기 기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Perspectiv)이 필요하다. 성경적인 관점이다. 성경이 성경을 헤석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다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첫째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것은 모든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로부터 현대 물리학자들에게 까지 끊임없이 물어온 질문이지만 아직도 그들은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셨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누구가 만든 존재도 아니고, 어떤 다른 존재로부터 유출된 존재가 아닌 스스로 존재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알파요 오메가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처음과 나중이라는 의미이다. 온 우주의 맨 처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서 온 우주의 최후도 하나님이 그 마침표를 찍으실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고 그가 정하신 끝을 향하여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분이시라는 것이다.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고대 근동 사람들은 그들이 믿을 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은 다 그들이 믿는 신이 있었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치고, 그것들이 자기들의 앞 일을 알려주고, 자기들의 병을 고쳐주고, 자기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러한 신들의 이야기는 고대 근동 문헌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데 이 신들의 세계에는 가장 큰 힘과 권위를 가진 신을 정점으로 위계 질서가 있고, 신들은 그들의 계급에 따라 일정한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분담되어 있었다. 신들은 남신과 여신이 있어서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기도 한다. 서로 질투하고 싸우고, 죽이며,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그 힘이 쇠하여 젊은 신에게 그의 자리를 물려주거나 빼앗기고 결국은 죽어서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부활도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신들은 그들을 섬기는 민족들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한 민족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면 그들이 섬기는 신도 세력을 얻어 민족을 넘어 세계의 신으로 추앙 받으며, 심지어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로까지 그의 지위가 상승한다. 그러나 그를 섬기는 민족이 멸망하게 되면 그 민족과 더불어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 신도 죽어 이 땅에서 그 이름이 없어진다. 결국 신들의 세계란 인간들의 삶을 모방하여 만든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다. 태초에 스스로 계신 분이다. 그가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가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자들이다. 그러나 무신론도 신앙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무신론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 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는 진화론으로 비약한다. 따라서 인간들은 항상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자들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들을 통하여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고(Control),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신다고 믿는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무신론이나 유신론이다 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믿듯이,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도 신앙이다. 결국 우리는 무신론과 유신론 가운데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고 믿는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1-06
  • 해설 / 한기연 제4의 연합단체로 가나?
    한국교회 대통합 아닌 또 다른 분열일 뿐 한국교회의 새로운 판도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연합(이하 한기연)에 대한 교계의 관심이 뜨겁다. 오는 12월 초 정기총회를 앞두고 있는 한기연은 예장통합, 합동,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등 주요교단들이 한 자리에 모여 명실공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체로 우뚝 서겠다는 각오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각오와는 다르게 시작부터 심한 잡음에 시달리고 있다. 한기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이 최근 정관 문제를 바탕으로 한기연 파기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한기연은 한교연과 한교총(교단장회의)의 통합체로 한교연이 빠지면 한기연은 어떠한 출범의 명분도 갖지 못한다. 이미 출범 전부터 수많은 논란과 명분 없는 통합으로 문제를 야기한 바 있는 한기연은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인가?무리한 통합 추진, 결국 발목 잡아앞서, 지적한대로 한기연은 한교연의 불참으로 깨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 현재 문제의 핵심으로 정관이 지적되고 있지만, 이를 제외하고라도 이미 상당히 깊어진 양측의 불협화음은 더 이상 통합체로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기연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미래는 두가지다. 일단 극적으로 한교연과 한교총이 타협 방안을 마련해 오는 12월 5일 예정대로 정기총회를 여는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는 매우 부정적인 예측이지만, 양측의 통합안 역시 예측을 완전히 뒤집고 나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일단은 충분히 고려해야 할 일이다. 두 번째는 이대로 한교연이 한기연과의 파기를 선언했을 때의 얘기다. 한교연의 주장대로 한기연과의 통합이 파기된다면, 한기연은 단순 헤프닝으로 끝나야 하겠지만, 한교총(교단장회의)만 남은 한기연이 12월 5일 정기총회를 강행할 가능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정기총회 강행 가능성에 매우 무게가 실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 한기연은 지난 8월 창립총회를 개최한 바 있다. 당시 총회를 두고, 통합총회냐 창립총회냐 논란도 있었지만, 이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일단은 정식적인 조직 출범을 교계에 선포한 바 있다. 이 당시 한교연에서는 “창립은 했지만, 실제적인 조직은 12월 총회에서 이뤄진다. 그때까지는 임시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창립은 했지만, 임시라는 매우 애매한 총회를 한 것이다. 당시 총회는 양측이 통합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나 확정이 없는 상황에서 일단 무리하게 강행한 측면이 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창립총회는 목적이 뚜렷했다. 각 교단들이 9월 총회에서 한기연에 대한 가입을 승인받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무리하게 밀어붙인 통합이 지금 탈이 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중요한 것은 한교총(교단장회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총회를 근거로 한기연은 이미 출범한 단체임을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한기연은 교단들의 연합체라는 점을 근거로, 한교연의 파기 선언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결국 한국교회에는 한기연이라는 새로운 단체가 하나 더 생겨나게 되게 된다. 애초 교회협, 한기총으로 양분됐던 한국교회가 이제 4개의 연합단체로 완전히 갈리게 생긴 것이다. ‘통합’은 무조건 옳은가?한기연은 모태인 교단장회의가 한국교회 통합과 관련해 처음 주장했던 것은 수년 전 분열한 한기총과 한교연의 재통합이었다. 이를 위해 교단장회의가 나서 중간자적 역할을 감당하며, 양측의 통합을 종용한다는 것이 처음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교단장회의가 양측의 통합에 과도한 개입을 하자, 이에 한교연이 반발하고 나섰고, 교단장회의를 제외한 한기총-한교연의 양자가 통합 위원회를 재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교단장회의는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이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를 들어 제4의 연합기구를 표방하는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라는 조직을 출범시킨다. 이는 교단장회의가 교단장들의 친목단체라는 한계가 있기에, ‘한교총’은 원활한 정치를 위한 교단장회의의 정치 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 단체다. 그만큼 양 단체는 구성원이나, 활동에 있어 서로를 구분짓지 않았다. 그럼만큼 교계에는 교단장회의가 곧 한교총이고, 한교총이 곧 교단장회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문제는 한교총이라는 조직이 공식 연합단체임을 밝히기는 했지만, 구성 교단들이 정식으로 가입을 해온 적이 없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교단장회의의 또다른 버전이었기에, 그저 교단장들의 의지로만 가입했을 뿐, 정식 총회에서 한교총의 가입을 득하지는 못했다. 결국 창립은 했지만, 임시 조직에 머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 한교연과 한기총은 통합 선언까지 하며 통합을 목전에 둔 듯 하다가 당시 한기총의 대표회장이었던 이영훈 목사가 낙마하며, 통합 논의는 급 중단되고 만다. 그리고 난데없이 한교연이 한기총이 아닌 한교총과의 통합을 발표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한교총은 임시조직일 뿐 이지만, 한교연과 단체 대 단체로의 통합을 결의한다.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이들의 통합에 대해 합동, 감리교, 침례교 등 대형교단들의 섭외를 위한 발판이라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이는 개의치 않았다. 통합 합의서에 주체는 ‘한교총’으로 명시하고, 서명은 교단장회의의 대표가 했지만, 이 역시 아무런 해명 없이 넘어갔다. 그저 한국교회 통합이기에 무조건 좋다는 식이었고, 반대로 거기에 딴지를 거는 것은 통합을 방해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되짚어 보면, 사실상 ‘한기연’이라는 조직은 한기총-한교연 통합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완전히 상실했으며, 주체가 되는 한교총이라는 단체는 임시 단체로서 통합에 응할 자격이 없는 단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예측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한교총이 한기연으로 이름을 바꿔 한국교회의 새로운 연합단체로 등장하는 것이다. 애초에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이야기하며, 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결국 이들의 결론은 또다른 분열이 될 가능성이 크다. 통합은 한국교회의 궁극적 숙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통합이라는 명분이 결코 모든 불법과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정당화시킬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이를 그런 식으로 이용해서도 안된다. 오는 12월 5일 총회를 앞두고 있는 한기연이 한국교회의 또다른 분열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차진태 기자>
    • 해설/기획
    • 해설
    2017-11-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9
    그리움을 안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고, 다시 한번 그때 그 시절로 돌아 가고 싶은 추억이 있다. 그래서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시를 쓰고, 노래를 한다. 추억이 있고, 사모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퐁요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영영토록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상처가 아무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할 지라도, 무엇인가 한줄기 마음 구석에서 피어 오르는 그리움이라는 것은 없을 수 없다. 성전을 그리워하며 쓴 시편 84편은 우리들의 가슴을 찡하게 하고 눈물이 핑 돌게 한다.이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전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심신이 녹아 내려버릴 것 같이 지쳐 있다. 병이 날 지경에 이른 것 같다. 흔히들 순례자의 노래로 알려진 이 시는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매 연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4), 그 마음에 시온으로 가는 대로가 있는 자(5),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12)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4절씩 3개의 연으로 구성되며,”셀라” 라는 연주 기호로 각 연을 나누고 있다.이 시의 시작은 그의 영혼이 그의 왕이신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기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상사병이 걸린 사람 같다. 주의 궁전은 심지어 참새나 제비들도 집을 얻고,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낳아 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들의 노래와 더불어 주의 전에 사는 자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주의 전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행복을 맛보고 살기를 갈망하는것이다.둘째 연은 역시 복이 주제이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전은 시온에 있다. 대로는 고속도로를 의미한다. 마음 속에 여호와께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항상 그 마음이 여호와께로 향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바카 골짜기와 같은 곳을 지날지라도 여호와께 대한 그리움 때문에 오히려 더 힘을 얻고, 결국에는 여호와를 만나 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카 골짜기”란 말의 “바카”()라는 말은 “뽕나무” 혹은 “뽕나무 열매 오디”를 의미하기도 하고, “눈물” “혹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명으로서의 “바카 골짜기”라기 보다는 여러 역본들은 시어로 “눈물 골찌기”라고 지명을 번역한다. 순례자에게 사막이나 광야를 지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 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오히려 이러한 눈문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마치 가을 비나 오아시스의 샘과 같이 풍부한 물과 쉼을 공급하여 순례자에게 힘을 주어,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움이 온갖 역경을 이기게 한다는 것이다.셋째 연은 드디어 성전에 도착하여 주의 품에 안긴 행복감을 노래하고 있다. 성전에서의 문지기로 하루 사는 것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호의호식하며 천 날을 사는 것보다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태양이시고, 방패이시며,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복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세계의 문헌, 곧 우가릿 문서, 아마르나의 편지, 아시리아의 왕들의 역대기 등과 달리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태양으로 묘사는 곳은 많지 않다. 태양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셰계관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피조물과 동격으로 여호와는 나의 태양이요 방패라는 말 보다는 방패에 대한 수식어로 번역하는 곳도 있다. 태양의 힘과 역할은 모든 피조물을 능가하는 권위와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New English Translation ?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지고의 보호자이시니니(For the Lord God is sovereign protector)라고 번역하고 있다. 열대지방에서 주님의 성전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에게 태양은 오히려 불가항력의 방해꾼이다. 그러한 태양을 찬양하는 듯한 표현은 옳지 않다. 이 시인은 순례 길에서 여호와의 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기대와 소망 때문에 어떤 역경이라도 물리치고 결국 여호와의 전에 이르러 여호와와 함께 거하는 문지기로 사는 단 하루라도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천 날보다 더 낫다는 고백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여호와 전이 없다. 예루살렘에 있던 여호와의 전은 1차로 바빌로나아 사람들이 파괴해버렸고(586 BC), 2차로는 로마 사람들이 산산이 진멸해 버렸다(AD 7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언젠가는 가까운 장래에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이 재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통파 유대인들이 그렇고, 기독교인들 가운데 세대주의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 반면에 예루살렘 성전 대신 현대의 교회를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활동을 제사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목사는 제사장이며,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제물이라고 생각한다. 강단은 제단으로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꼭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은 시를 쓴 시인은 성전을 그리워하고, 성전에 올라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육신이 쇠약할 정도인데, 우리는 과연 교회를 나가기 위하여 그러한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불행하게도 교회에는 제단이나 제물이나 제사장이 없다. 엄격하게 말하면 성전과 교회에는 서로 연속성이 없다.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이나 교회의 본질을 오해한 까닭이다.성전의 원형은 성막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고 마치 남녀가 결혼하면 언약을 맺고 같이 동거에 들어가듯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들과 동거하기 위하여 성막을 짓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성막을 대신하여 견고한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성막이나 성전은 다같이 예수님의 속죄를 나타내는 모형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예수께서 실형으로 오심으로 더 이상 모형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몸으로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 되신 것이다(요한 2장).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전을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성전 되신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기를 열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된 것이다(고후 6:16). 따라서 우리가 사모하고 열망해야 할 성전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살다보면 심지어 내 안에 계신 성령, 예수님을 잊고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바카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자 하는 간절함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자 힘을 써야 한다. 그래야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요 17:21). 요한 계시록을 보면 사도 요한은 위로부터 예루살렘이 임하는 것을 본다. 그런데 그 안에는 성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께서 그 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다.”(계21:22).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0-2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8
    전통적인 신학에 있어서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하다. 말씀과 성령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칼빈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명령하는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과 성령의 통일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성경에서 표현하신 그 바로 그 진리 속에서 내재해 계시므로 우리 그 말씀에 정당한 존경과 위엄을 돌릴 때에야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 주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을 통하여 그분의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하나로 묶어 놓으셨기에 성령께서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실 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하여 로버트 레이몬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가르치는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며 “말씀 없는 성령은 망상이요, 성령 없는 말씀은 죽어있다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은 항상 함께 가며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같은 사실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도들이 여러 곳에 다니며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나타난 현상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 집에 청함을 받아 가서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한 사건을 “베드로가 아직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그 말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셨다.”( 행 10:4)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본문은 베드로가 “아직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라는 현재 진행 상황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말씀이 선포되는 그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성령이 임했는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는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베드로는 예수께서 만유의 주되심과 복음 사업 가운데 행하신 착한 일,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 재림, 그리고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전하셨다고 고넬료의 가속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이 임함을 보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동료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며 “내가 말하기를 시작할 때에 성령께서 처음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내려오셨다”(행 11:15)고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임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령을 오게 할 수도 없고, 가게 할 수도 없다(요 3:8). 성령은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아서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움직이고 일하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새롭게 한다. 우리는 성령을 오게 하거나 가게 할 수는 없지만 말씀은 전할 수 있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성령이 자동적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성령이 임해야 말씀이 역사한다고 생각하고 말씀은 제쳐놓고 성령을 간구한다. 물론 성령을 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경우라면 성령이 임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오셔서 역사하시고, 기도를 안 한다고 해서 역사를 안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성령께서는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 28:20)고 사명을 주신다. 말하자면 이들은 철저하게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제자들을 보면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 성경에 능통한 자들이며, 스데반 같은 집사는 어느 누구 못지 않는 성경신학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솔로몬 행각에서 말씀 전하던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을 체포하여 공회로 끌고 와서 심문을 시작하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본래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들로 알았다가 놀랐으며,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이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행 4:13,14)고 했다. 당대의 최고의 석학들이며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제자들이 본래 무식한 자들로 알았는데 논박할 수 없을 만큼 유식한 자들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텅빈 머릿속에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이들이 필요한 지식들은 주입시키고 할 말을 다 가르쳐 주었다고는 볼 수 없다. 성령의 하시는 일은 이미 예수께로부터 듣고 배운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요 14:26; 16:4).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충분히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구약 성경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즉흥적으로 전하는 자들만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배와 창자에 가득 채우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이마가 굳고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족속에게 나아가 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이마를 부싯돌보다 굳은 다이아몬드처럼 만들어 그들의 이마에 맞설 수 있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신다(겔 3:1-9). 그러면서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모든 말을 네 마음에 받으며 귀로 듣고, 포로가 된 네 백성의 자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여라.”(겔 3:10-11) 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주님의 영이 그를 들어 올리시고(겔 3:12), 여호와의 손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였다고 했다(겔 3:14). 에스겔은 그의 백성들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배와 창자에 가득 채워야 했으며, 그때에 하나님의 영과 능력이 그에게 힘 있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이 성령의 충만한 사역을 기대하려면 그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고 넘쳐야 한다. (손석태 저 “말씀과 성령” 96-101)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10-13
  • 동성애·종교인 과세 시행에 한 목소리로 ‘절대 반대’
    동성애 반대, 인권탄압 논란 우려 금번 한국교회 9월 총회의 가장 큰 화두는 역시 동성애였다. 동성애·동성혼 관련 헌법 개정안이 논의된다는 소식에 교계의 주요교단 뿐 아니라, 중소 교단들까지 동성애 반대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주요 교단으로서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는 예장통합측이 동성애와 동성애 지지자들에 대한 항존직 금지와 신학교 입학금지 등 매우 강력한 제재안을 통과시키며, 교계 전체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 반발도 만만치는 않았다. 장신대 총학생회는 총회 직후 성명을 통해 “신학생이 자유롭게 동성애 문제를 논할 수 있는 풍토와 환경이 신학교에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면서 위 결의를 비난했으며, 통합측 산하 4개 단체는 위 결의에 있어 절차상 하자를 지적키도 했다. 하지만 보수층이 주를 이루는 대다수의 장로교단들은 동성애에 대한 절대적 반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특히 일부 교단에서는 교단 내에서 동성애자를 완전히 배제하기로 하는 결의로 동성애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나타냈다. 문제는 사회적 반감이다. 수년째 퀴어축제에서 반복해 보여지는 성소수자들의 눈살 찌푸리는 행태들이 사회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반대 분위기를 고조시킨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인권적 차원이다. 교단적 결의와 제재로 이어지는 동성애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처가 자칫 동성애 반대를 넘어 인권 탄압으로 비춰질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때일수록 동성애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동성애자들 역시 한국교회가 품어야 할 존재들이 분명하다. 하나님 안에서 평등을 외치며, 교회 내에서 동성애자를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시도는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본질적 의도를 자칫 곡해시킬 우려가 있다. 종교인 과세 유예 적극 공감 종교인 과세 문제 역시 대다수의 교단들이 유예키로 공감했다. 이미 시행안이 확정되고, 그 시기가 내년으로 결정됐지만, 막상 코 앞으로 다가온 지금, 교계에서는 그 시행안이 현실적이지 못해, 큰 혼란만 야기할 것이라며 유예를 주장하고 있다. 종교와 세금의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적 논쟁이 된 사안이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주장하는 단계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 보완이다. 특히 세금 납부가 교회가 아닌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목회자를 빌미로, 교회 전체에 대한 세무 사찰이 나올 것도 염려하며, 이에 대한 확실한 방지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총회에서 대다수의 교단들은 동성애 문제와 함께 종교인 과세 시행을 유예하는데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국민들에 비춰질 교회의 모습이다. 지난 역사에서 교회가 종교인 과세를 거부하며, 싸워온 것에 중첩되어 이번 9월 총회 결과가 자칫 과세 거부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 물론 상당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과세 시행을 탐탁치 않아 하며, 내부적으로 과세 거부 여론도 거센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세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시대의 흐름을 자꾸만 역행하려 하거나, 이를 늦추려 하는 것은 결코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질 수 없다. 더욱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제2의 종교개혁을 외치는 한국교회에 있어 대사회적 이미지 재고는 개혁에 있어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대처가 필요해 보인다. 주요교단, 한기연 가입 승인 한국교회 제3의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연합회(이하 한기연)에 대해 주요 교단들이 총회를 통해 가입을 허락받았다. 올 초 한국교회총연합회(이하 한교총)부터 회원으로 활동키는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총회장의 참여일 뿐 교단의 가입은 아니었던지라, 제대로 된 연합단체로 분류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 통합, 합동, 대신(백석) 등 주요 교단 뿐 아니라, 한교연에 소속한 중소 교단들이 한기연의 가입을 통과시키며, 올 후반 교계 연합단체 구도가 다시 한 번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주요 교단들이 한기연 가입안을 별 논란없이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 있어 특별한 꼼수가 엿보였다. 한기연이 한교총 시절부터 애초에 주장했던 목표는 한교연과 한기총이 통합한 하나의 연합단체였다. 하지만 한기연은 한교연에 기감, 합동, 기침 등 몇몇 교단들이 함께한 사실상 한교연의 연장선상에 있는 조직일 뿐 통합체는 아니었다. 여기에 한기총 신임 대표회장 엄기호 목사는 “통합은 나간 사람이 돌아오면 될 뿐” “한기총의 이름을 버리는 통합은 절대 없을 것” 등 통합과 관련해 매우 단호한 입장을 드러내며, 한기연으로의 합류를 사실상 거부했던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9월 총회를 앞두고, 한기총 대표회장 엄기호 목사, 한교연 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기하성 총회장 이영훈 목사, 예장통합 총회장 이성희 목사, 예장합동 총회장 김선규 목사가 함께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합의서’를 작성하는데, 그 내용인즉슨 “한기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각 단체 대표회장이 책임을 지고 추진을 한다”는 것이다. 한기총과의 통합을 직접적으로 거론한 이 문서는, 이번 9월 총회에서 주요 교단들이 총대들의 허락을 이끌어 내는 매우 중요한 매개가 됐을 것이 분명하다. 내용상으로 그다지 특별할 것 없고, 면밀히 볼때, 날짜도, 구체적인 계획도 나오지 않은 매우 허술한 문서임을 미뤄볼 때 이는 철저히 9월 총회를 겨냥한 꼼수라는 분석이다. 통합측, 세습방지법 위헌 예장통합이 지난 2013년 통과시킨 세습방지법안이 전면 무산될 가능성에 대두됐다. 아니 일부에서는 이미 세습방지법은 더 이상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주장키도 한다. 통합측의 헌법위원회는 이번 총회에서 세습방지법에 대해 위헌 해석을 내놓았다. 담임목사 청빙을 관여하는 세습방지법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교인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이정환 목사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대해 신임 총회장 최기학 목사는 “헌법위 해석일 뿐, 아직 세습방지법은 유효하다”고 주장하지만, 이정환 목사는 “헌법위가 위헌으로 판단했다면 즉시 개정해야 하며, 개정하지 않을 시 위헌 판정을 받은 법안은 즉시 사문화 되고, 효력이 없어진다”고 반박하고 있다. 지난 4년 전 감리교에 이어 세습방지법을 통과시킨 통합측을 향해 한국교회 역사상 최고의 쾌거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던 교계는 이번 논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세습방지법이 이대로 무산된다면, 한국교회는 또다시 퇴보할 것이라는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여기에 이번 세습방지법의 향방이 세계 최대 장로교회인 명성교회의 담임 목사 청빙에 직접 맞닿아 있는 사안이이기에, 이 문제를 놓고 통합측이 앞으로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 교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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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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