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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4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면서 첫 번째 주신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글로 번역하고 있는 “생육하다”말은 히브리어로 “파라”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그 의미는 “열매 맺다” “열매가 풍성하다”(bear fruit, be fruitful)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열매 맺는다는 말은 자식을 낳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이 자식을 낳되 많이 낳아서 기르라는 것이다. 자식을 많이 낳아 번성하여 땅을 충만하게 채우라는 것이다. 시편 127편에 보면 자식이 많은 사람을 화살 통에 화살이 가득한 장사로 묘사하고 있다(시 127:5-6). 자식이 많은 것이 복이요 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식을 낳고 기르도록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가정을 세우셨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다. 하나님의 이 명령과 뜻을 거역하는 어떤 이론이나 행동도 다 악이다.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셨다. 새로운 아담을 세우시고, 새 아담을 중심한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 계획은 옛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우고, 새 아담을 통한 새사람들을 모으고, 그들 가운데 새로운 조직과 질서가 있는 새 나라를 세우는 일인 만큼 오랜 동안의 준비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새 나라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넘치는 세상, 그리하여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세워지고 사랑과 평화가 왕노릇하는 세상이었다(사 2:1-4; 11:1-9). 이러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많은 자손, 그리고 그들이 살아야 할 땅,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의 그들의 역할 등을 말씀하셨다(창 12:1-3).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창세 때에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과 같다. 그러나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더 자세하게 말씀하신다.“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땅의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그의 자식과 그 가족들에게 명령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려 하는 것이다.”(창 18:18-19)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크고 강한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와 그의 가족을 통하여 세상 만민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고자 하는 세상,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는 “여호와의 도를 통한 공의와 정의가 있는 사랑과 평화의 세상”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도”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호와의 도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뿐만 아니라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사역과 방법 등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이다. 공의와 정의는 다같이 법정용어로 “관계어”이다. 공의는 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의는 사람과의 바른 관계에 쓰이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공평해야 한다. 그러나 공평하다고 해서 다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평하기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정의롭다고 해서 다 공평하지도 않다. 또한 사람이 사는 사회가 다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다 의로운 것은 아니다. 공평과 정의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공의가 필요한 것이고, 공의와 정의는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에는 공의와 정의가 없어졌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이러한 세상을 포도원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사야 5장에서 여호와는 포도원 주인, 이스라엘은 포도원, 포도나무는 유다이다. 포도원 주인은 땅을 파서 훌륭한 포도밭을 일구었고, 포도를 수확해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포도주 술틀도 만들었다. 부족함 없이 완벽한 최고의 포도원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들포도를 맺고 말았다. 이사야는 이러한 포도밭을 향하여 주인인 여호와께서 이 포도밭을 황무지로 만들 것임을 선언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다. 그분은 그들에게 정의를 기대하였으나 도리어 살육이고, 공의를 기대하였으나 보아라, 울부짖음이다.”(사 5:9).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유다에게서 구했던 열매는 공의와 정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공의와 정의를 잃은 나라가 되었다. 이들에게는 이제 멸망이 남아 있을 뿐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참 포도나무를 새롭게 심으신다.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농부 하나님은 다시 밭을 갈고, 참 포도나무 예수님을 심으신 것이다. 요한 15:1에는 예수께서 “나는 참 포도나무이고, 내 아버지는 농부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5절에는 “나는 곧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다 들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젖붙임을 받아 참 포도나무가 되고, 그 나무로부터 진액을 받아 참 포도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원리를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참 올리부 나무와 돌 올리부나무를 비유해서 가르친다. 참 포도나무이든 참 올리부 나무이든 가지는 나무에 접붙여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근본 종자가 들포도이고 돌 올리브이면 아무리 좋은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도 그 열매는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농부는 접붙이기를 한다. 예수께서는 15:4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내가 곧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들이다. 내 안에 거하여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 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내가 곧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들이다. 그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으니,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이 땅에 보내셨다. 들포도나무 가지들인 우리들은 이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안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처럼 버려져 마르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 불사를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수님 안에 있으라고 명하신다.그렇다면 가지인 우리는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우리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갈 5:22-23에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다. 온갖 아름다운 신앙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 할 일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항상 예수님으로부터 물과 양분을 공급 받아야 한다. 영적 호흡인 기도와 영적 양식인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도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다. 둘째는 요한 15:2에 보면 가지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가지치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했다. 헬라어로 “카다이로”, 영어로 pruning이라는 말을 쓴다. 짤라내어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무슨 나무든지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관상용도 과수용도 다 가지치기를 안 하면 나무를 버린다. 가지치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려 양분이 낭비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되 양질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작은 열매가 많이 맺으면 양분이 분산되어 양질의 과일을 수확하기 어렵다.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보다는 숫자가 적을 지라도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하여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농부는 전정가위를 쓰지만 우리 신자들은 말씀 가위로 가지치기를 한다. 요사이 말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으로 내용 없이 인생을 허비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신 세상에 여호와의 도를 통한 공의와 정의를 세워 사랑과 평화가 있는 세상을 이루시길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 가지 된 인간들은 그가 보내신 참포도나무, 예수께 접을 붙여 영혼의 호흡을 하고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도 가지치기가 필요하고, 우리 개개인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여호와의 도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고 버려야 한다. 전정가위가 녹이 슬고, 무디어지면 가지치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은 열매 맺는 세상, 공의와 정의가 있는 사랑과 평화의 세상, 곧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의 도를 통하여 깨끗케 된 새하늘과 새땅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10-17
  • 학술/ 한복협 9월 월례회 ‘한국교회에 고(告)하는 청년들의 외침’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개최한 9월 월례회 ‘한국교회에 고하는 청년들의 외침’ 중 이창현 국장이 발표한 ‘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의 발제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1990년대에 멈춘 한국교회지난 20년간 한국사회 내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에도, 교회는 1990년대 이후 바뀐 것이 없어 보인다. 다음세대, 선교, 해외 유명학자 초청, 한국교회의 미래 등 늘 비슷한 주제로 대형 컨퍼런스는 달력행사처럼 돌아온다. 학생들의 교육환경은 나날이 변해감에도 주일학교 침체와 붕괴 우려만 나올 뿐 8,90년대 스타일 집체식 수련회 외에 딱히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명망있는 담임목사 1인의 능력으로 교회 전체를 평가하고, 이 담임목사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교회구조는 더 심화되고 있다. 대형교회 성장전략, 개척교회의 몰락, 고령화 추세 속에 젊은 세대가 배제된다는 우려, 신학교가 배출하는 목회자가 많다는 지적, 문화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대중문화의 변화 속도를 여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 등 1990년대나 지금 2019년이나 한국교회의 상황은 비슷해 보인다. 40대의 입장에서 굳이 1990년대를 꺼내 드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외형적) 최고점(最高點)에 있었던 이 시기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현 40대는 N97세대로 70년대에 태어났고, 80년대 한국사회 고도성장기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90년대 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세대다. 한국교회의 현 체제가 확립되고 외형적 부흥의 열매를 보이고 있을 때, 우리는 10대, 20대를 보냈다. 체계가 잡힌 유년주일학교를 거치고, 청소년 시절 CCM을 듣고 수련회와 문학의 밤을 통해 신앙을 키웠고, CCC, IVF, YWAM 등의 학생선교단체가 양적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때문에 정체 혹은 하락세에 있는 한국교회를 보는 40대의 시선은 복잡하다. 한국교회 최전성기시절을 보내며 계속하여 교회는 전진할 줄 알았고, 우리는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더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뒷걸음질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우러러보았던 많은 목회자들이 몰락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여러 대표적 교회가 그 역할을 스스로 상실하는 것을 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교회가 1990년대에서 멈추어버린 것 같다.한국교회와 40대의 간극 : ‘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90년대에 멈춘 한국교회는 40대의 현실 앞에서 간극을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 교회는 지역에 기반하여 매년 태신자 초청주일 같은 행사를 연다. 분명 좋은 행사이고,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2년 전세 때문에 이사를 반복하거나 아예 경기도 외곽으로 떠밀린 40대의 입장에서는 지역에만 기반한 목회가 다소 아쉽다. 연간 20조 안팎의 사교육비가 지출되는 현실에서 40대에게 자녀교육은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데 교회는 자녀교육과 관련한 획기적인 예산편성이나 구조변동에 발걸음이 더디다. 공공부문은 인터넷으로 투명하게 행정공개를 하고 있고, 회사에서는 명확한 지출기준을 가지고 세세한 재정보고를 해야 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주먹구구식 회계보고의 모습을 보인다. 인터넷 댓글, SNS를 통한 자유로운 의사개진이 일상이 되어 있는 40대의 눈에 교회는 공론의 장이 부족하고, 수평적 발언이 금기시되는 곳이다. 특히 40대는 한국사회의 최신 변화에 민감하고 이에 대한 교회의 해답 또는 공동체적 고민을 기대한다. 40대에게 재테크, 부동산 폭등, 비정규직, 이혼, 자녀의 교육격차, 남북통일, 복지문제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 문제는 언급자체가 금기시되거나 설교시간에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의견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 삶의 한복판의 문제가 교회에서 괴리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다. 40대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있거나 세상 속에 감당하는 영역이 너무 제한적이다. 한국교회는 2040 세대가 처한 현실에 대해 어떤 관심이 있는가? 또한 내 의견이 교회에 받아들여질까 의문도 든다. 이미 교회는 단단해진 구조를 가지고 있다. 리더십은 고령화되었고, 그 기준에 맞추어 눈도장을 찍어야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 권사가 된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스스로 교회를 세워가며 직분을 받는 것이 영광이었지만 우리세대는 이미 구조화된 교회 속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된다. 게다가 40대는 근본적으로 한국교회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파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진다. 내 인생을 걸만큼 교회는 진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주저함 속에 40대는 점점 한국교회에 외치는 것을 꺼린다. 40대가 보는 한국교회는?그럼에도 40대의 입장에서 한국교회를 분석해본다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1)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교회가 제대로 대응 하지 못했다.광복이후 한국사회는 한시도 쉴 틈 없이 변화를 겼어왔다. 그러나 최근 20년의 한국사회는 변화에 있어 그 이전 시대와 약간 결을 달리한다. 87년 체제 성립 이전과 직후까지 ‘경제화’와 ‘민주화’라는 거시적인 담론이 우리사회를 지배해왔다면 지난 20년은 복합적인 여러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 경계를 무너뜨렸고, IMF와 구조조정을 거치며 사회는 파편화되었다. 정치경제 거대담론에 우선순위가 밀렸던 가정, 문화, 여성, 교육, 환경 등 다양한 이슈가 등장했다.2002년 한국교회에 뜨거운 감자였던 ‘주5일제’ 논쟁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을 앞두고 무엇이 성경적인지, 어떻게 교회가 대응해야 하는지 찬반양론이 붙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일성수 문제에만 매달렸을 뿐 주5일제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함의와 구체적 변화에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때의 논쟁 중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사회변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방어에 급급하고 내부성장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90년대 이후 젊은 세대가 집을 사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여성 대졸자가 늘어나고, IMF로 맞벌이가 보편화되었으며, 가사분담, 워킹맘, 자녀교육, 저출생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변동이 있었다. 세 번의 정권교체, 기업구조조정, IT 산업의 발전으로 개개인의 참여가 증대되고 사회적 평등에 대한 요구도 거세다. 특히 10대, 20대를 거치며 한국교회의 정점을 경험하고,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의 극적인 변화를 함께 체험한 현 40대에게 있어서 한국교회는 제대로 된 대응 없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한국교회가 과거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고, 한국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된 긍정적 사실마저도 뒤로하고 개체화된 교회성장에만 매몰되어 간다.(2) 교회 내부가 경직되고, 구조화되었다.사회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적인 문제도 있다. 1970년대를 전후로 다양하게 개척되었던 한국교회들은 이제 성장을 넘어 구조화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개척교회 시절부터 교회와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헌신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1세대(193~40년대 출생)들은 이제 은퇴하였다. 이후 성장을 맡았던 2세대(1950~60년대 출생)들은 교회에서 가장 많은 인원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인구고령화 추세 속에 계속하여 주요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 2세대의 헌신 또한 존경 받을만 하고, 귀한 섬김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존경받는 걸출한 2세대 리더가 보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갈 비전도 보이지 않고, 3세대(1970~80년대 출생)는 아직 미약하고 너무 파편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상황 속에 더 큰 문제는 한국교회는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경직되고, 구조화된다는 점이다. 중대형교회는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일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옥상옥(屋上屋)을 만들어가고 있다. 담임목사를 정점으로 시스템이 완성된 교회는 1세대 개척세대에게는 유연하고 효율적인 구조였겠지만, 이후 세대에게는 쉽지 않은 틀이 된다. 40대가 교회 안에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도 의견 수렴의 창구, 작은 역할이라도 해볼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정해진 구조 속에서 사라지기 쉽다.(3) 교회의 문제에 대해 교회가 정면돌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40대 평신도의 눈에 보이는 한국교회의 마지막 특징은 교회가 정작 교회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일관성 없이 대응한다는 점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성추문, 교회 세습, 재정 비리, 교회 권력 다툼, 법령 위반 등 여러 사건이 있었고,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일부 사건은 최근 들어 일반 언론에까지 이슈가 되었다. 평일 내내 신문기사, 방송뉴스를 장식하는 교회문제를 접하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면 ‘우리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응답을 할까?’ 기다린다. 그러나 교회는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해 개교회 문제에 개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 교회 내 분란이 생긴다는 이유로, 아직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침묵한다.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주변 동료들이 출석하는 다른 교회에서도 비슷하다. 질문하고 싶다. 교회의 문제를 교회에서도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교회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정작 교회의 문제는 침묵하고 성도 개개인의 삶이나 일반적인 사회문제만 언급하는 설교를 들으며 40대 평신도들은 어떤 삶을 반추하며 살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교회에 기대가 있기에 그 대답이 듣고 싶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10-1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3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을 시작하며 열두 제자들을 불러 세우셨다. 그리고 자신이 성령의 권능으로 악령의 우두머리, 바알세불을 내쫓은 분이며, 그를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시며, 제자들을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다. 이어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셨다. 바쁜 시간을 보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시려고 배를 타셨다.항해 중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예수님 일행을 태운 배는 파도가 몰아치고 배에 물이 차올라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이 상황을 제자들은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죽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자기들을 돌봐주시지 않는다고 말한다(38). 죽음의 파도가 몰려오는 이 상황 속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상했다면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고, 꼭 배를 타야할 상황이라면 이를 대비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폭풍이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예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기치 않게 갑자기 사람을 죽음의 코너로 몰아넣는 이 상황은 우리들이 일상 겪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갑자기 몰아치는 태풍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온통 마음이 얼어붙고, 우리의 두뇌 활동이 마비되어 꼼짝할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구렁이 앞에 떨고 있는 쥐새끼와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비상시에 더 정신을 차려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 정신을 놓으면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폭풍이 몰아치자 제자들은 두려운 가운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은 예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 불평을 털어 놓는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 이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διδα、σκαλοV) 이라고 부른다. “주” (The Lord) 라는 말을 쓴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주여!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라든지 “선생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청했어야 할 자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라고 도와주지 않는 선생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다. 결국은 예수께서 이들을 살려 주시기는 했지만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노를 젖거나 배에 차오르는 물을 함께 퍼주시기를 기대한 것이지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ε’πιτιμα、ω) 잔잔하게 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상상을 초월한 지혜와 능력으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잘 모른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만 천지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별로 실감있게 믿지를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태풍이 몰려오면 예수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부모나 가까운 형제, 친구, 오빠를 먼저 찾기 마련이다. 예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이 태풍 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리리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설령 생각이 난다 할지라도 이처럼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할 만큼 큰 기적을 내게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하지 못한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항상 피상적으로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성경 이야기를 좀 아는 수준이지, 그것이 내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머릿속의 위기 대처 프로그람 속에 예수님이 빠져 있는 것이다. 설령 성능이 좋은 프로그람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작동시킬 방법이 서툴거나 우선순위가 틀려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 곁에 게시지만 예수님은 주무시고,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지냈지만 예수님을 정확하게 잘 모른 것 같다.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해주셨으면 제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르면서 배가 뒤집힐 만큼 높이 뛰며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배 안이 오히려 적막하다. 그들에게 두려움, 아니 무서움이 엄습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들이 말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이시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가?” 본문의 상황을 보면 제자들은 폭풍이 몰려올 때보다 더 큰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제자들은 폭풍도 두려웠지만 예수님도 두려운 것이다. 이들은 온통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제자들은 죽게 되었어도 두렵고, 살려놔도 두렵다. 그렇다면 이들이 두려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신다(40).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다.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으면 인생은 항상 두려운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인식한다. 삶 그 자체가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고, 구원자가 없는 인생들에게는 무엇을 해도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내일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내일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내일 우리 자식이나 가족들에게 무슨 변이 생기는 것이 아닌지? 나도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닌지? 등등 이런 확실치 않는 정체불명의 불안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 보면 어떤 때는 가슴이 뛰고 숨이 막혀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믿음을 갖고 교회 생활에 충실해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면 불신자와 다를 바 없이 인생은 불안하기 마련이다.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태풍이 불고 역풍이 분다. 이때 예수님께 대한 바르고 깊은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해 주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이 자리 잡고 계시지 않으면 예수께서 내 옆에 계시고, 내 옆에 누워 계셔도, 불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보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 한다. 내 속에 바알세불이 있어도 안 되고, 가시덤불이 차 있어도 안 된다. 말씀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해야 이런 불안의 씨, 태풍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마가가 이 사건 앞에 바알세불 문제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언급한 것은 바로 성령과 말씀을 통한 예수님과의 동행을 말하고 싶은 목적이 있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과의 동행은 예수님과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폭풍 속에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잠이 들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불안의 문제를 이긴 사람이다. 폭퐁 속에 잠을 못 자고 제자들처럼 아우성치는 사람은 몸은 예수님과 함께 한 배를 타고 예수님 곁에 있어도, 그 속마음은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다 깊고 성숙한 믿음과 불안을 초월한 동행을 원하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9-0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2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 분이다. 특히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는 분이다.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엡 1:5).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의 아들을 삼으셨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대 근동 세계의 신들처럼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그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아들 삼으셨다는 것은 설명이 많이 필요한 대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만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도 그의 아들이라고 부르신다. 이 경우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혹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고대 근동의 입양관계를 빌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자식이 없을 경우 자기가 부리는 노예나 마음에 드는 노예를 사서 자기의 아들 삼는 풍습이 있었다. 노예에게 신분을 바꾸어 주고, 자기 이름을 따라 부르게 해주고, 자기의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게 해주었다. 입양아는 그의 양부모 노경의 봉양자요, 양부모가 죽었을 때에 장례를 치러주고, 대신 양부모의 재산 상속자가 되었다. 아들을 입양할 때에는 입양 계약서를 썼으나 입양을 철회하는 경우에는 다시 노예의 신분으로 돌려 보냈다.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실제로 입양이 행해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나 입양 풍습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은유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로 있을 때에, 바로의 장자와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희생시키고, 이스라엘을 바로로부터 해방시키시고, 그의 아들로 삼으신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맏아들이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데려와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 언약식이 마치 입양 문서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어 계약을 맺는 입양식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기업의 백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의 땅, 혹은 유업의 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잘 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 땅에서 쫓겨나 바벨로니아의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구출하여 그에게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킨다. 이렇게 한 민족의 역사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은유하고 이해하는 경우는 아마도 세계 역사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자 관계는 일종의 모형적 사건이며, 그 실상은 앞으로 다가올 신약시대의 새 이스라엘, 기독교 신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서 죄와 죽음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 어떻게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와 죽음의 종노릇을 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신다. 그것은 창세전에 예비하고,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의 아들로 삼으려는 것이었다(엡 1:3-14).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처녀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그에게 죽음으로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살리심으로 아담의 모든 죄 값을 온전히 치렀다는 것을 확증하시고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아들을 희생하여 이스라엘을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셨듯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희생시켜 우리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제는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왕노릇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다. 그러면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 있던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새로운 세상의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옛 아담을 대신하여 그의 아들, 예수께서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만물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심으로 그들이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굴레를 쓰고 살지 못하게 하셨다. 죄 값을 치뤘기 때문에 죄는 죄인에게 더 이상 죽음의 권세를 휘두르며 목숨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과 연대성 아래 있던 모든 만물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새 아담,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죄가 더 이상 죄인을 죽음으로 가두어 둘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에 대한 증거이고, 표징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속죄가 완전하지 못한 것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거짓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4에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셔서 권능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선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 되셨고, 죄와 죽음이 없는 새하늘과 새땅의 새로운 통치자, 새로운 왕이 되셨다. 그래서 골 1:13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 (βασιλει、α του˜ υι、ου˜)로 옮기셨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아래서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백성들을 구출하여 새 아담인 자신과 언약적 연대성을 맺어 그의 왕국의 백성을 모으려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치 암탉이 자기의 날개 아래 병아리를 모으듯이 그의 백성을 모으려 했다고 하셨는데(마 23:37), 이제 그의 백성을 그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모으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새언약을 세우시고(눅 22:20),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언약을 종결하셨다. 그의 새 나라의 건국이 선포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예수님 나라의 새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도중에 베드로가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했듯이 새로운 왕 앞에 충성을 맹세하면 된다. 우리가 이 신앙고백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세례를 받고, 그 순간에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도장을 찍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을 가리켜 “그 아들의 영”(갈 4:6), “양자의 영”(롬 8:15)이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이 양자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한다고 했다(롬 8:16; 갈 4:6).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다(눅 11: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요 1:12).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신 것은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갈 4:4~5). 그리고 계속해서 아들이면 상속자라고 했다. “너희는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다. 아들이면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상속자이다.”(갈 4:6-7). 그리고 로마서 8장 17절에는 “자녀이면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으시고 왕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되고 왕노릇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이고, 그 나라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속해 주시기 위하여 세우신 나라이다(마 25:34). 누가 복음에는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12:32)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골로새서 1장13절에는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하고 있다.우리 같은 죄악되고 비참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상속자가 되어 그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고, 영광인지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이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자녀이면 또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다.”(롬 8:17).라는 권면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생철학과 도덕과 윤리가 있어야 한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시류에 따라 사는 사람들과 살다보면 고난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고난을 이겨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8-2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1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6일동안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고 제7일에는 안식하셨다. 하나님은 창조활동을 마치시고 안식하시는 신이다. 뿐만 아니라 제7일에는 그가 만드신 사람 사람은 물론 모든 만물에게 쉼을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동과 안식과 결혼을 창조시에 사람이 지켜야 할 규정으로 세우셨다. 우리는 이것을 창조규정 (Creation Ordinance)라고 칭한다. 사람은 일해야 할 존재이고, 일을 하면 쉬어야 하는 존재이고,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남녀노소, 종족과 나라,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피조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쉴만한 여유가 없다. 눈코 뜰 시간이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진정한 쉼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쉼이란 노동을 전제한 말이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 쉼이 필요할 리가 없다. 사람은 창조시부터 땀을 흘리고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반역한 후에는 전보다 더욱 수고하여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창세기 3장 17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동안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는 “네 얼굴에 땀을 흘려 음식을 먹을 것이다.”라고 부연하여 말씀하신다.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수고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이차본”()을 번역한 것인데,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내린 저주의 말씀 가운데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때의 “고통”이라는 말과 같다. NET 나 NIV 에서는 “painful toil” (아픈, 혹은 괴로운 수고, 고통스러운 노동)이라고 번역했고, KJV에서는 “슬픔 가운데”(in sorrow) 라고 번역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는 잉태하고 출산하는 고통을, 남자에게는 땀 흘려 일하는 고통을 주신 것이다. 먹고 사는 일이 고생 정도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노동이 괴롭고 아프고 슬픈 것이 되었다. 죄로 말미암은 인생살이가 고통스럽고 슬프고 힘든 것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피곤하고 병들게 되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다 보면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이 있다. 내가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할 수 없다. 내 안에 있는 죄가 내 마음을 짓누르고, 내 양심을 괴롭히기 때문에, 심령이 메말라 가 마음에 평안이 없다.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 찬송가는 울리는 꾕가리 소리 같다.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일이 나를 오히려 피곤하게 한다. 영적인 탈진 상태에 빠지게 한다. 마치 바알 선지자들과 사활을 건 전투를 마친 엘리야처럼 오히려 하나님께 죽음을 청하는 것처럼 맥이 빠져버린다. 우리 인생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곤한 존재들이다. 전도서 1:8에는 솔로몬은 만물이 피곤한 것을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솔론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1:1). 또 2장 23절에는 평생을 수고하여도 근심과 고통 뿐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인생이 헛되다고 말한다. 모든 만물에게 쉼이 필요한 세상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피곤한 만물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시고, 새로운 힘, energy를 충전시켜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에게도 쉼을 주신다.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는 안식하라고 명하신다(출 20:9-11).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먼저 쉬셨듯이 7일 째 안식일에는 모든 그의 피조물에게 쉬라고 명하신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40년 동안 광야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시키셨다. 안식일에는 아예 만나를 내려주지 않았다. 양식 창고의 문을 닫으시고, 식당문도 닫은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생명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듯이 우리 사람들도 우리의 생업으로부터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생리적으로 먹고, 일하고, 잠 자고, 쉬는 사이클을 가진 생명체로 창조하셨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력이 재충전되고, 새 힘을 가지고 활력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느라고 밥을 제 때에 못 먹는 사람, UTube 보며 밤새거나 일이 많아 잠을 못자는 사람, 다 하나님이 만드신 life cycle을 자기 좋을 대로 조작해서 결국은 자신을 망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육체는 강철이 아니고, 우리의 두뇌는 컴퓨터의 software가 아니다. 가장 쉽게 망가지기 쉬운 유기체이다. 한번 뇌세포에 변형이 일어나면 회복이 쉽지 않고 결국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일에 빠져서는 안 되고, “중지”할 줄을 알아야 하고, 쉴 줄을 알아야 한다.시편 23:1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노래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신다. 예수깨서는 우리 인생들을 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로 부르신다. 우리는 고통스럽게 일하고 무거운 죄짐을 진 자들이다. 사람이란 다 지겟꾼이다. 빵의 짐과 죄의 짐을 지고 힘겹고 고통스럽게 나그네 길을 가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빵의 짐을 내려 놓을 수 없고, 한 번 지게 된 죄의 짐은 내려놓을 길이 없어 발버둥을 친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지겟 짐을 져 주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신다.예수께서는 우리가 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매는 것이다. 멍에는 농부들이 논밭을 갈 때나 달구지를 사용할 때, 소들의 목에 메는 막대기나 기구이다. 우리나라의 쟁기나 수레와는 달리 근동이나 동남아세아 지역에서는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매고 함께 쟁기질을 하거나 수레를 끌게 한다. 두 마리의 소를 한 멍에로 함께 목을 메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은 떨어질 수 없다. 함께 서고, 함께 걷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멍에는 서로 뗄 수 없는 연대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멍에”라는 말은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장치나 제도들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다 멍에를 메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의 죄를 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형수, 아담의 가죽 죄수복을 입고, 아담과 함께 죄의 멍에를 지고, 비틀거리며 가는 농부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고 싶어서 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움 받은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지워진 멍에, 곧 연대성 때문이다. 아담과 함께 아담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들, 곧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시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짐은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을 지고 버벅대고, 허우적거리며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께서 쉼을 주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의 짐을 지고 바둥대며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새 아담, 예수님을 세워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게 하셨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그에게 넘겨씌우셨다”고 했다. 또한 11절에는 “그가 자기 영혼을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할 것이니, 내 의로운 종이 그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하며, 또 그들의 죄를 친히 짊어질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사람들의 죄를 친히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 짐을 지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이 되셨다. 그 새 아담이 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그의 멍에는 그가 우리에게 지워주시는 짐이 아니다. 그의 멍에는 우리를 그와 함께 메는 띠, 곧 band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멍에를 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걷고, 함께 쉬고,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이 예수께 묶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쟁기질을 하고 함께 달구지를 끌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멍에, 곧 옛 아담의 멍에와 새 아담의 멍에를 동시에 멜 수 없다. 그동안 메고 있던 아담의 멍에를 벗어야 새 아담, 예수님과 함께 하는 멍에를 멜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있던 빵의 짐과 죄의 짐을 끄는 옛 아담의 멍에를 벗겨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형수 아담에게 입히셨던 가죽을 벗기시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시고, 편하고 쉬운 예수님의 멍에를 우리가 함께 메게 하셔서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안식,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므로 예수님과 함께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8-0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1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사이에는 언약이라는 관계 안에서 권위와 질서가 있는 일종의 조직체이다.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다음에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는 만물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권위 체계를 우리 가정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남자로부터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로 가정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살펴보면 여자의 창조는 창조의 climax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은 무에서 창조하셨지만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의 막이 내린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는 가정을 그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정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정도 언약적 권위 체계와 질서를 가진 조직체로 만드신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한 세상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릴 우두머리요 대리통치자로 아담을 세우셨듯이, 그가 세우신 가정에서도 남자를 머리로 한 가족을 이루게 하고 가정을 다스리는 책임자로 세우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정은 아담을 머리로 혈연공동체이자 언약적 공동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언약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의 시작인 남편과 아내의 결혼이 바로 계약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니,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 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이 말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나 남자를 머리라 말하고 있는 데, 이들은 다같이 여러 지체를 가진 몸이라는 것을 전제한 말이다. 그리스도라는 몸에는 하나님이 머리이고 더불어 다른 지체가 있으며 남자는 그 지체중의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남자의 몸에는 그리스도가 머리이며 그 안에 여자를 비롯한 다른 지체들이 있다. 따라서 남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머리가 되어 여러 지체를 가졌는데 여자는 그 지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는 이중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동시에 여자의 머리이다. 남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만물의 일원인 동시에 자기를 머리로 하는 가정, 곧 가족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관계와 질서를 설명하기 위하여 고전 11:7에서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광이라고 말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지상의 왕을 신의 형상이라고 지칭했다. 왕이 천상의 신을 대신하여 신민을 다스리는 자로 생각한 때문이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다(시 8:6). 이와 같은 원리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바로 남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우두머리요 대표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정을 다스리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형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오히려 남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여자가 있으므로 남자가 영광스럽게 된다는 뜻이다. 성경애서 다스린다는 의미는 섬기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남자는 가정의 우두머리요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대표자로서 가정를 지키고, 보호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돌보는 자이다. 남자는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가정 예배를 인도하며,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이다. 이러한 모든 일은 여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고, 그래서 여자를 종을 부리듯이 부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 그러나 주 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또한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 님께로 부터 났다.” (고전 11:8-12)이 말씀의 의미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힘의 우열아나 서열을 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정은 혈연으로 맺어진 유기체이자 언약을 통하여 세워진 언약공동채로 하나님께서 새우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머리가 있어야 하고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가족의 구성원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다 동등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대표자가 될 수는 없다. 여자가 없는 데 남자가 대표자가 될 수도 없고, 가정과 가족이 성립될 수도 없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다 각각의 역할이 있고 필요하듯이 가정에도 역할이 있고 필요가 있다. 우리 몸에 얼굴이 있듯이 남자는 가정이라는 몸의 얼굴이다.이상을 살펴볼 때 가정은 언약적 체계를 갖추고 위계적인 질서가 있는 일종의 유기체적 성격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아버지를 머리로 하는 언약적 연대성을 가진 운명 공동체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세우셔서 그를 대신한 만물의 왕으로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창조하시고 남편을 가정의 왕으로 세우시고 가족들을 섬기는 대표자의 사명을 맡기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상에 하나님-사람-만물 사이에 질서가 있듯이 가정에도 하나님-남편-가족이라는 질서가 있다. 가정의 질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바로 이 질서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네 하나님이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신 땅에서 그의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땅을 “기업의 땅,” 혹은 “유업의 땅”이라고 칭한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전제하는 말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시내 산에 언약을 맺었다. 이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양자 삼으시고, 이들에게 가나안 땅을 아들에게 주시는 유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시내 산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왕과 백성의 관계,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이해하고 해석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에브라임은 내 아들, 내 장자이다. 내 아들을 보내라.” 고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는 고대 근동 사람들이 자식이 없을 경우 노예들을 양자로 삼고 입양언약을 맺는 풍습을 빌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어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는 데, 이것을 일종의 입양 언약으로 비유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주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업의 백성, 이들에게 주신 땅을 기업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서, 무엇보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오래 복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입양 관계를 철회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결국은 망했다.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에게 망한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 땅에서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그들이 살던 땅을 빼앗기게 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 비극적인 멸망을 부모를 공경하지 못한 때문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말하자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시내산 언약이고,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것이며, 그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내서 결국 그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열 개 중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십계명의 두 부분, 즉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5-10계명은 이웃 사랑,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도리와 규범에 관한 계명이다. 윤리와 도덕에 관한 계명이다. 십계명은 1-4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5-10 계명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 부모 공경에는 사람과의 관계, 곧 도덕과 윤리를 다루는 계명에 있어서 첫 번째 계명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관계성이 부모와의 관계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에베소 6:2에서 바울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이 인간인데, 이 땅이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한된 시간 안에 이 땅에서 살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 장수하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부모이기 때문에 순종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바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식된 도리이다. 아무리 부모가 마음에 안 들고, 부족하고,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할지라도, 부모를 무시하고, 멀리하는 자는 그 생명이 길지 못한다. 부모를 무시하고 멀리하는 사람치고 잘 되는 사람 없다. 부모를 공경하고 공양하라는 가르침은 삼강오륜에서도 가르치는 윤리의 대 강령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함은 그의 아버지 노아를 욕되게 한 사람이다.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 사사시대의 이방 여자 룻은 오갈 데 없는 그의 시모, 룻을 죽기 까지 따라서 나서서 남의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고, 일꾼들이 먹다 남은 밥을 얻어와 시모를 공양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보아스라는 남편을 주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 다윗이 나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의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다. 그의 공생애를 마치며 최후로 하신 일, 그의 사역 (His last ministry)이 그의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었다. 고령화 사회, 노령의 인구가 급팽창하는 한국 사회에서 노인 복지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 기독교인은 성경에 나오는 선배들의 부모 사랑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 늙은 부모를 양노원에 보내고 그 비용을 부담한 것이 부모 공경의 전부는 아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7-19
  • 학술/‘시국선언(교회와 정치) 논란에 대한 토론회’ 주 발제문
    본고는 지난 7월 2일 한국교회언론회가 주최한 ‘교회와 정치 토론회’에서 임성택 목사가 발제한 ‘정교분리와 교회 정치투쟁의 당위성’ 중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정치투쟁 비판의 문제점얼마 전 한기총 대표 전광훈 목사가 대통령 하야를 주장함으로 한국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대해 필자는 그가 발표한 내용의 진위나 단체와 개인의 정당성을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진위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할 것이고, 정당성을 따져 편들면 파당에 끼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고자 하는 것은 전광훈 목사의 언행을 두고 권세에 대해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진 교회의 정치참여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려고 하는 악한 시도에 대하여는 끝까지 다투고자 한다.지금까지의 논의로도 부당한 권세를 향한 교회의 선지자적 책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에서부터 최근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벌여온 정치투쟁의 역사는 그야말로 찬란히 빛나는 것이며, 두고두고 평가받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정치투쟁은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며, 그 누구에 의해서도 간섭받거나 폄훼되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내에서의 갈등과 상호 비난이다. 필자는 분명하게 선언한다. 복음에는 좌우(左右)도 없고, 진보도 보수도 없다. 백인의 하나님은 흑인의 하나님도 되시며, 남자의 하나님은 여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가난한 자의 하나님은 여전히 부자의 하나님이며, 권세자의 하나님은 역시 서민의 하나님도 되신다. 지혜롭고 명철한 자의 하나님은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며, 노동자의 하나님은 사업주의 하나님이시요, 병약한 자와 소외된 자의 하나님은 역시 건강하고 풍성한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그런 하나님을 어느 일방의 하나님으로 가두어버리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소치요 불경이다.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수준 높은 교회정치 사상을 폄훼하고, 스스로 세속정치의 어느 일파가 되어 상대를 정적 개념을 가지고 복음과 교회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있음을 통탄한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세속권세자들을 그의 선하심 앞에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봉하는 세속사상과 자신이 발을 담그고 있는 현실정치의 정파 수장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너무나 명백한 것을 두고도 보수이기 때문에 혹은 진보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편들거나 혹은 비난하며, 성경적이지도 않은 주장을 성경과 신학을 동원하여 옹호하고 있다. 필자는 교회와 지도자들은 어느 정파와 주장에도 상관없이 정권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선지자적 사명에 모든 교회가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일에 세상 정치가들의 썩은 냄새를 진동하게 해서는 안된다.기독교에 비판적이며 동시에 개혁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유명 인사들은 교회의 허물을 담은 책을 저술하고 일간지에 광고하여 대대적으로 교회에게 망신과 부끄러움을 안기고 있다. 이로서 그는 세상으로부터 타락한 교회를 향한 용감한 개혁의 선봉이요 시대의 선지지라는 명성은 얻을지 몰라도, 주님으로부터는 교회를 팔아 명성을 취한 가장 저주받을 자로 정죄를 받을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고쳐줄 힘이 있는가? 그럴 방법이 있는가? 어쩌면 세상을 고칠 힘을 잃어버린 교회인 까닭에 세상에라도 아부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정도의 연약함이라면 차라리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논자는 대형교회의 비리와 유명 목회자들의 허물에 대하여 험하게 분노하고 질타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논자의 글과 강연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 교회와 목회자를 세상이 공격한다면, 논자의 모든 것을 걸고 그 교회와 목회자를 지킬 것이다. 감히 세상이 교회와 그 종들과 백성들을 허물하거나 정죄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성경 그 어디에도 우리가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치료받으라는 말씀은 없다. 심지어 세상 재판장으로도 가지 말라고 했다. 세상에서 최고의 선일지라도 그것 역시 복음 앞에서는 악일뿐이다. 한국교회의 정치투쟁을 위한 제언이번 한기총 전광훈 목사의 대통령 하야 성명으로 인한 파장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역으로 이것이 칼이 되어 세상이 한국교회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도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교회 지도자들, 특히 명성이 있는 분들은 모든 언행에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몇 년전 모 한기총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무릎 굻리고 안수기도를 한 일이 언론에 보도된 일이 있었다. 이런 보도를 접한 필자는 기겁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불필요한 종교갈등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장로가 목사에게 무릎을 꿇고 안수 기도를 받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기독교인의 대통령인 동시에 다른 종교인들과 무종교인들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이름 없는 자국 서민들에게는 고개를 숙일지라도 고관대작들과 외국 정상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자기를 대통령으로 아는 국민들을 위한 배려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단순한 ‘해상교통사고’로 이해할 수 있고, 또 지나친 보상 요구와 정치권의 악용에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 단상에서 공공연히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어린 아이를 차가운 바다 물속에서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과 국민의 공분을 조금이라도 읽어냈다면 절대로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작은 교회 이름 없는 종들은 아무리 소리쳐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대형교회에서 유명목사님 한마디가 전파와 활자를 타는 순간 그야말로 핵폭탄이 되어 우리의 선교현장에 떨어지고, 청년 지식인들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귀 아프도록 들린다는 말이다. 하기야 이런 소리를 들을 귀를 가졌다면 그렇게 말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로 인해 정작 필요한 싸움에서 밀리는 빌미를 제공한다. 지금 우리의 정당한 주장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런 구차한 사건들을 다시 끌어와서 교회와 목회자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대항한다. 그러면 교회는 그 일을 변명하고 논쟁하다가 원래의 취지를 담은 투쟁들은 그냥 묻혀버린다. 지금도 그런 일들은 반복되고 있다.기독당에 대해필자는 발제자로서 본 토론회가 교회와 목회자의 철저한 자기반성을 위한 자기성토의 장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이 나라가 위태한 것은 사실이며, 삼척동자조차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쪽에 서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와 목회자들은 긴장해야 하고, 따라서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정당한 주장만큼 주장자는 윤리적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묻히고 윤리성만 공격당하기 때문이다. 지금 형국이 그러하다. 더불어 향후 기독교가 이런 난세의 정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2020년 4월 15일에 실시되는 21대 총선을 어떻게 준비하고 기도해야 하는 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교회가 직접 정치를 할 수는 없지만, 정치가들이 바르게 정치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은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 3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한 기독당의 원내 진입에 대해서도 이제는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필자는 ‘교수직을 걸고’ 기독당의 결성을 반대했고, 또 성공할 수 없으며, 원내 진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비록 천만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신앙과 정치적 결정을 분명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 후보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찍고 정당은 기독당을 찍어달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선거 전략으로는 지역 연고에 깊이 뿌리내린 투표정서를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근자에 진행되는 정치상황을 보면서, 더 이상 정치적 목소리를 정치 중심지에서 내지 않으면 우리의 조국이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근거는 수없이 많고, 그리고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기독교인들의 지역 연고 의식보다 현 상황의 위기의식에 동조하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피부에 닿을 정도로 많아졌다는 면에서, 내년 총선에서 기독당의 원내 진입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가능했다. 그러면 우리도 거의 모든 민주국가에서 원내 의석을 가진 기독정당이 있는 것처럼,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로의 원내진입을 위해 모든 기독 정치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함으로 원내의석을 지닌 기독당의 출현을 기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직 목회자들이 후보자로 출마하는 문제는 부정적이다. 당연히 일정한 기간 이전에 목회자직을 반납하고 나서야 할 것이며, 가장 바람직한 것은 목회자들은 권세에 대한 선지자직을 감당하고 훌륭한 기독 정치인을 골라 그들을 현장으로 내보내는 방법이라 할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7-0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0
    요한복음 10장은 9장의 연속이다. 안식일에 자기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끈질지게 주장한 사람을 출교한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목자가 아니라 강도요, 절도요, 도적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참 목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치신다. 고대 근동 세계의 사람들은 거의가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양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고대의 대 제국의 통치자들은 자기를 가리켜 “목자”로 칭한다. 바빌로니아 제1왕조 6대왕(1792-1750 BC)이었던 함무라비는 그의 법전 서문을 “엔릴의 부름을 받은 목자, 나 함무라비는 부요함과 풍성함을 다같이 모으며...”라고 시작한다. 또한 법전 후기에도 “나는 진실로 평화를 가져오는 목자”라고 쓰고 있다. 함무라비 이전에 우륵의 왕, 엔메르카르, 라가쉬의 엔시, 세계 최고 오래된 법전을 만든 우루-남무, 이쉰의 리피트 이쉬탈 등도 다 자기를 목자로 칭하고 있다. 심지어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디그랏 빌리셀, 아수르 바니팔, 에사르하돈, 앗수르 바니팔 등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누비던 왕들이 다 자기를 “목자”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아멘호텝 3세(1411-1374)도 자신을 “선한 목자요 모든 백성을 위하여 불침번을 서는 자”라고 칭하고, 세티 1세(1313-1292)는 “선한 목자요, 그의 군사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왕들이 자기를 목자에 비유하는 것은 아마도 목자의 역할과 왕의 역할의 유사성 때문인 것 같다. 양들은 물과 목초와 그들을 지켜주는 목자가 필요한 존재이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그들을 지켜 보호해줄 왕이 필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왕들은 그의 백성들이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하여, 왕과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한 것이다.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은유의 대상이 다르다. 양떼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자기 소유의 양떼들을 위하여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을 그의 목자로 고용하여 그들을 먹이고, 돌보며, 보호하고, 지키도록 양떼를 맡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자기 살기 위하여 오히려 양떼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며, 유기하고, 흩어버렸다. 양들이 흩어지면 당장 포식자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책임한 목자들을 하나님은 삯군 목자요, 강도요, 절도요, 도적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부터 목자의 직분을 빼앗고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신다(겔 3:10). 겔 34:15-16에 보면 “내가 내 양을 치며, 내가 그들을 눕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그 잃어버린 것을 찾으며, 그 흩어진 것들을 돌아오게 하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며, 병든 것을 강하게 할 것이며 ... 정의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겠다는 것이다. 영역본 ESV나 한글판 개역에서는 “양을 치다”는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꾸어 “내가 내양의 목자가 되며”(I myself will be the shepherd of my sheep)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다. “내가 그들을 먹이는 한 목자, 곧 내 종, 다윗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니,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는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가운에 지도자가 될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겔 34:23-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다윗을 목자로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다윗은 에스겔보다 이미 500년 전에 유다 나라의 왕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다윗은 실제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사울을 이은 2대 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목자”라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다윗은 어떠한 목자였기에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사무엘 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이 사울 왕 앞에 나가서 자기가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자청하며, 자기가 어떠한 목동이였는가를 진술한다(17:34-37). 다윗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비록 아비의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 했지만 그가 맡은 양 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아비의 양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정신과 책임감과 열정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골리앗을 타도하도록 일어나게 하였으며, 결국 그는 목숨을 걸고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양떼들을 보호하고 지켰다. 아버지의 양떼를 맹수들로부터 지킨 사람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을 골리앗으로부터 지켰다.뿐만 아니라 사울이 놉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자 그는 아둘람 굴로 피난 갔는데, 이때에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다니며 떠돌이가 된 400명 가량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계속 생사를 같이한 동역자드로 삼았다(삼상 22:1-2). 세상에서 발붙이기 어려운 인생들을 받아주고 안아주고 생사의 고락을 함께 나누는 목자였다. 올데 갈 데가 없는 인생들을 받아 주고, 품에 안아, 상처를 싸매고 위로하며,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생명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였으며, 세상에서 쫓겨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도망 다니는 인생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어 이들을 살리는 일을 했다. 참으로 위대한 목자였다.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다윗과 같은 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내 양떼 곧 초장의 양떼이다. 너희는 사람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겔 34:31).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목자가 되시고, 또한 다윗과 같은 사람을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하나님,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사람을 목자로 주셔서 그의 백성을 모으고, 먹이고, 돌보고, 지키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근동세계의 목자에 대한 문화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 9장에 이어 10장을 살펴보아야 한다.예수께서는 10장 서두에 아주 직설적으로 자기가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를 비교하신다. 삯군 목자는 절도요 강도요 도둑들이라서 양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파괴할 뿐 아니라 포식자들이 나타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도망간다는 것이다. 양떼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둘째 치고, 책임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양들은 다만 자기들이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다. 삯군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살 길을 찾는 자들이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를 희생하여 양떼들을 살리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다윗이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사자와 곰들과 싸우고, 골리앗과도 싸운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하나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어 놓는다. 나는 목숨을 내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18). 이 세상에 자기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선한 목자이고, 자기의 목숨을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내놓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를 자신이 가졌음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자신과 같은 신적인 목자,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과 같은 인간 목자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바로 예수께서 그 약속의 하나님-목자임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목자이시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하나님, 곧 선한 목자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는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자 하나님-다윗과 같은 목자가 바로 자신임을 목숨을 걸고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증명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다윗과 같은 목자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10:30).예수께서는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그가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고, 출교 당한 그를 찾아가 그를 그의 제자로 받아 주심으로 그가 바리새인들과 다른 선한 목자이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고 한 목자 밑에서 한 떼가 될 것이다.”(1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받아 선한 목자 예수님의 우리 안에 함께 들어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이방인들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에게 그의 양을 치도록 목자로 세우신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목자가 되라는 부탁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그만큼 간절하게 부탁하신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목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양들,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며, ....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벧전 5:2-4)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목자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목자장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목자가 되라고 명하셨고, 이제 베드로는 그의 양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제 목자가 되어야할 차례이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신 명령이 그의 양을 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우리가 순종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있는 양이라면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6-21
  • 기독언론포럼/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문제의 제기죽음이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할 필수적 과정이다. 태어남이 있는가 하면 죽는 것도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하나의 학문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하나의 학문 분야가 만들어질 때는 그것이 다루는 고유한 주제와 범주가 있는데 죽음학이 담당하는 영역은 더욱 넓고 깊어서 ‘죽음학은 과학이기도 하고 예술이기도 하다.’ 라는 식으로, 완전하게 결론지을 수 없다.과학은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검증할 수 있는 현상을 연구하라고 강조하는데, 죽음학은 바로 인간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각종 현상의 특징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죽음학은 과학이다. 그러나 과학은 탄생 이전- 죽음 이후의 ‘죽음의 여정’을 포함하여 종교나 철학적 주제의 영역을 다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들 영역을 주된 관심 대상으로 삼는 죽음학은 과학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Ⅰ. 죽음학의 이해육체의 질고와 정신적 고통이라는 씨줄과 날줄 사이에서 죽음의 실체를 몸으로 겪는 골짜기를 지났다. 그러나 여기에 놓여나와 새로운 생명을 체험하였을 때 ‘죽음의 죽음’이라는 소망의 미학(美學)을 가슴 밑바닥에서 느끼게 되었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죽음에 대한 학문적 접근(學問的接近)을 시도하며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에게 하나의 모티브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이 연구를 추진하였다.1)1. 죽음학의 영역죽음학이 다루는 영역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죽음학을 연구하는 기초가 된다.(1) 죽음학의 기원과 함의죽음학은 각 학문 영역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복합과학이라 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회 체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현상 및 관념은 ‘죽음학’(Thanatology) 혹은 ‘생사연구’(Studies of Life-and-Death)의 중요한 대상이다.생사학의 기원은 30여 년 전 미국에서의 시작된 ‘죽음학 연구’이다. 죽음학에서 연구하는 핵심 과제는 정신의학 및 죽음학 전문가인 퀴블러 로스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성장의 마지막 단계’(the final stage of growth)로서의 죽음이다. 당시 미국의 행동과학자들이 많은 미국인들이 죽음을 올바로 대면하지 못하여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점을 발견하고 ‘죽음 각성 운동’(Death Awareness Movement)을 전개하면서 죽음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운동이 마침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호스피스 운동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죽음교육, 호스피스, 죽음 상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죽음학의 연구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죽음학의 주된 관심사는 호스피스, 죽음교육 및 죽음과 연관된 현상들의 연구에 머물러 ‘삶의 차원’(dimension of life)이 결핍되었고, 이에 따라 타이완의 푸웨이쉰 교수가 1993년 종교의 죽음에 대한 관심 및 임종정신의학을 결합하여 삶의 차원을 포함하는 죽음학을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사학(Life-and-Death Studies)이라는 단어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2)즉 죽음학 혹은 죽음교육은 생사학의 전신이고 생사학은 죽음학이 확충되어 이루어진 영역이다. 타이완 생사학계에서 생사학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푸웨이쉰 교수는, 생사학은 다음과 같은 삶의 10대 차원과 가치관을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신체 활동 ② 심리 활동 ③ 정치 사회 ④ 역사 문화 ⑤ 지성 탐구 ⑥ 심미적 경험 ⑦ 인륜 도덕 ⑧ 실존 주체 ⑨ 궁극적 관심 ⑩ 궁극적 진실.1994년 난화(南華)대학에서 타이완 최초로 생사학 대학원을 개설하여 생명윤리학, 참살이(well-being), 생사교육, 호스피스 및 장의 관리 등 5대 영역을 중심으로 죽음학 연구와 교육에 힘쓰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학부과정이 만들어졌다.3)(2) 죽음학의 종류생사학이 포함하는 내용을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을 표준으로 분류한다면 푸웨이쉰의 분류처럼 ‘학문의 생명’과 ‘생명의 학문’으로 나눌 수 있고, 좀 더 통속적인 말을 빌리자면 차이서린(豺麝) 교수의 주장처럼 ‘일반생사학’ 과 ‘응용생사학’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푸웨이쉰은 학문의 생명은 ‘순수 객관적인 학술 연구 혹은 이론 구성’을 말하고 생명의 학문은 ‘우리 실존 주체성의 생명에 대한 체험과 탐구 및 그 이론적 심화’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전자는 생사학 고난 이론의 연구와 구성, 즉 순수과학 혹은 일반생사학의 영역에 속하고 후자는 실천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지혜를 포함하는 응용과학 혹은 응용생사학의 범주에 속한다.① 학문으로서의 생명: 학술적 탐구 혹은 이론 구성학문으로서의 생명 혹은 일반 생사학은 생사 현상과 관련된 학문을 구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종교, 철학 혹은 과학 연구자들이 기존의 이론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에 관한 현상들을 탐구하기도 하고, 현장 종사자들이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면의 생사학자들의 주요 임무는 생사학의 성격, 연구 영역 및 방법론의 확립 등을 포함하는 학문상의 문제 해결을 통한 학문적 특색을 드러내는 데 있다. 생사학의 연구 과제, 대항 및 범주 등은 매우 광범위한데 일반생사학에서는 아래에 열거하는 주제들에 대한 이론 구성을 포함한다.4)첫째, 죽음과 관련된 질병에 대한 연구와 죽음에 대한 정의하기: 현대 의학은 최신 의학의 연구 성과 및 생명 과학적 지식을 끌어들여 심장병, 암, 에이즈 등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생사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최근의 학계와 의학계, 법조계 등 실무 계통에서의 죽음의 정의에 대한 변화는 죽음과 관련된 현상에 대한 이해를 드높였고, 뇌사, 식물인간 등의 심신 상태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이끌어 내었다.둘째. 죽어감 혹은 죽음의 인간관계 및 정신 상태: 정신의학, 정신치료학, 의료 윤리 등을 종합하여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 및 그 가족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문제를 고찰하고 개선하는 것도 생사학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영역 가운데 하나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죽음에 직면해 있는 환자 및 가족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등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의료인과 환자 상호관계를 통해 연구한다,셋째, 연령층에 따른 죽음에 대한 개념 혹은 심리 상태: 아동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 태도 및 심리 상태는 성인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은 많은 연구 결과에 이미 나와 있다. 생사학자는 연령층에 따른 죽음에 대한 개념 및 심리 상태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해야 하고 문화나 사회적 요소에 따른 차이 등에 대해 확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면의 연구 추세는 반드시 심리학, 교육학, 사회학 혹은 문화인류학 등의 지식들을 결합하여 발전시켜, 아동이나 노인 등 서로 다른 연령층에서의 죽음과 관련된 담론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넷째, 비탄 혹은 애도에 대한 상담 및 치료: 지금까지 생사학자들의 관심의 중점 및 형성된 이론들을 보면 비통 혹은 애도에 대한 상담이나 치료 방법에 대한 연구 성과가 가장 풍성한데, 이러한 연구 성과는 인류의 비탄 행위에 대한 이해에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각종 천재지변과 인재 등의 빈번한 발생에 따라 기존 이론은 사회문화 및 경험의 차이에 따른 검증을 받아야 할 것 이다.다섯째, 죽음 관련 전문 인력과 조직에 관한 연구: 죽음 관련 전문 인력에 관한 연구는 전문 업종의 정의, 전문화 과정, 전업 발전의 사회문화적 요소, 전문 인력과 당사자 간의 관계 맺음, 전문 인력의 배양 혹은 생애 등의 담론을 포함한다. 조직에 대한 연구는 정규적 조직과 비정규적 조직, 조직의 기능과 운용, 조직 간의 상호 관계 등을 포함한다.여섯째, 죽음과 종교 혹은 철학과의 관련성 문제: 종교적 지식의 영역에서는 과학이 처리할 수 없는 많은 담론들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life after death)의 존재 여부 등의 기본적 문제에 대해 여러 종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고, 철학적 지식의 영역에서도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학자나 학파 간에 이론적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에 진일보한 정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일곱째, 죽음에 관한 의식: 거의 모든 인간의 사회 조직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과 처리 방식에서 문화적 차이에 따른 각종 형태의 죽음에 관한 의식이 행해진다. 인류학, 민속학, 신학, 철학, 역사학 및 일반 과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문분과에서 의식의 의의와 기능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으며, 세계 각지의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죽음과 대면하여 드러내는 태도나 변화 과정 등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다.여덟째. 죽음교육: 미국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죽음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한국이나 타이완에서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있다. 죽음교육은 연령층의 차이나 학력에 따른 교육 내용과 교재 개발, 교육 방법과 교과과정 설계, 평가 방법, 학생들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연구, 교육의 공헌도와 영향 등의 연구를 포함한다.아홉째, 죽음 관련 윤리와 법률: 자살,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등에 관한 연구는 법률, 종교, 윤리 문제 등을 수반하며 생사학 영역에서도 중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이다. 반드시 법률, 신학, 철학, 의학, 윤리학 및 사회 과학(심리학, 사회학 등) 등 유관 학과들이 서로 힘을 합쳐 연구해야 한다.열째, 죽음의 문학 및 예술: 죽음에 관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의 표현 형식이나 의의, 불치병 환자들의 정신적 조절과 승화에 관한 묘사 등도 생사학이 추구하는 새로운 지식의 영역으로서 미적 감각 차원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 외에도, 삶의 마지막 단계와 관련되어 인간 사이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 모두가 생사학의 영역에 속한다. 예를 들어 지진이나 홍수 혹은 전염병 등의 천재지변, 전쟁이나 학살 혹은 집단적 자살 등으로 인한 집단사망(megadeath) 현상도 죽음과 더불어 생사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가 괸다,② 생명의 학문: 실존 혹은 실무적인 관심생사학 혹은 죽음학은 극히 복잡한 현대인들의 죽음 현상과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 영역의 연구와도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다. 서구나 일본과 비교하여, 한국의 생사학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생사학 연구의 길을 개척하고 토착화하여 우리 자신의 사회 실정에 맞는 생사학을 내놓아야 한다,다른 사회와 달리 한국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까닭에 생명을 돌보는 실무적인 방면에서 비교적 구체적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학문이란 생사학의 응용과학적인 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 내지는 죽어감에 대한 실무적 관심의 표현이다. 생명의 학문이란 학제간 결합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의학(정신의학, 정신치료 등), 철학, 종교와 일반과학(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등) 등과의 관계를 통한 생사학 정립을 의미한다. 이러한 학문 영역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이르면서도 존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실천적 의의를 달성해야한다.5)생명의 학문 혹은 응용생사학은 생사학적 지식으로 삶과 죽음과 관련된 담론에 대해 연구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개념, 방법론 등의 연구 성과를 이용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방침을 제공함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응용생사학자의 첫 번째 임무는 공공정책을 제공함에 있고, 생사학 이론을 정립하는 것은 부차적이기 때문에 이론가나 순수학자로 자임해서는 안 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고문 혹은 기획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마땅하다. 응용생사학자들의 생사학 및 실무에 관한 공헌은 다음과 같은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첫째, 호스피스 정책의 수립: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의료, 간호 및 불치병 환자의 수용과 돌봄은 사회복지제도를 중시하는 국가에서는 반드시 서비스의 대상과 내용을 기획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상담, 의료적 돌봄, 조직의 운용, 규범제도 등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기획과 설계에 관련되는데, 사회 변화의 수요와 문화적 의의 등에 부합하여 진실로 죽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죽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둘째, 장례 관리 제도의 수립: 연구를 통한 각 사회문화에 합당한 죽음 처리 방식의 정립이 필요하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최선의 장례 관리 회사를 기획하여 국가제도의 규범, 죽음에 관한 의식 등에 맞추어 삶과 죽음 모두에서 안락함을 달성하고 있으니 참고하여 배울 가치가 있다.셋째, 생명교육과 죽음교육의 확충: 죽음교육 종사자들은 생명교육과 죽음교육을 효과적으로 확충하기 위해서 애도 상담이나 죽음교육기관을 건립하거나 자살 방지 시스템 등을 건립하는 등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한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넷째, 죽음을 규정하는 유관 법률에 대한 협조: 생전 유서, 낙태, 안락사, 사형, 동물권 등 생명의 권리 혹은 법률과 연관된 실제적인 문제는 탁상공론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가하여 토론하고 기획하여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규범을 제정해야 한다.다섯째, 공공위생 정책의 재건에 대한 협조: 생사학자들은 필요할 경우 반드시 공공정책 입안의 기획에 참여하고 협조해야 한다. 특히 전염병이나 중대한 총기 사고 등 집단적인 죽음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위생 정책의 재건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연구 결과 발견한 문제 등은 위생 정책이나 재건 정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여섯째, 평가: 생사학의 또 다른 취지는 일반 공공정책에 대한 평가와 연구에 있는데 주로 정책의 실시가 원래의 목표에 도달하였는가? 실시 상황, 어려운 점과 문제는 무엇인가? 정책이 지금의 사회, 문화 시스템과 충돌하지는 않는가? 등의 물음을 담고 있다. 평가와 그에 대한 연구 결과, 발견된 문제에 대해서 진일보한 개선책을 내놓아야 한다.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각도에서 생사학을 일반생사학과 응용생사학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내용에 대해 소개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대부분의 생사학자들은 두 영역에서 균형을 이루어 이론과 실무가 상호보완적인 관계임을 잘 보여 준다. 생사학의 원리로 죽음과 관련해 드러나는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여 학문의 생명이 성취되고, 문제해결 과정에서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여 생명으로서의 학문을 창조하여야 할 것이다.2. 죽음학의 태동죽음학(Thanatology)6)이란 철학·종교학·의학·생물학·사회학·심리학·인류학·문학·예술 등 여러 학문들이 다학제적인 방식으로 죽음과 관련된 주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학문 분야를 의미한다. 이러한 죽음학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은 1951년 미국에서 헤르만 파이펠(H. Feifel)이『죽음의 의미』(The Meaning of Death)를 통해 죽음 현상을 탐구해야 한다고 천명하면서부터다. 이후 1963년 로버트 풀턴(R. Fulton) 교수가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정규 강좌를 개설하면서 죽음학이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파이펠과 풀턴의 강좌에 이어 여러 학자들-칼리시, 카스텐바움, 레비톤, 슈나이드만, 와이즈만 등-이 대학을 중심으로 죽음 관련 교과목을 개설하면서 죽음학은 하나의 정규 과정이 되었다. 또한 풀턴이『죽음과 정체성』(Death and Identity)을, 글레이저와 스트라우스가 『죽어감의 자각』(Awareness of Dying)을, 코어가『죽음, 비관, 애도』(Death, Grief and Mourning)를 각각 출판했는데, 이 세 권의 책은 죽음교육(death deucation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7)3. 죽음학·생사학의 지향점: 존엄한 삶과 존엄한 죽음죽음학·생사학의 지향점은 존엄한 삶과 존엄한 죽음, 쉽게 말하자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well-living)과 인간답고 행복하게 죽는 죽음(well-dying)이다.8)혹자는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이라 하면 당장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예고 없이 불현 듯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행복하고 평온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잘 해두라는 것이다. 또한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지금 자신이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죽음 준비를 통해 삶을 더욱 유의미하게 변환시킴으로써, 죽음 준비는 곧 삶을 준비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미리 죽음을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는 확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오늘날 인간의 평균 수명은 의학과 생명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편승하여 현대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내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단순히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오락과 안락,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할지라도 죽음이라는 현실을 변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의 힘을 변경할 수 없는 죽음을 미리 생각하면서 불필요한 슬픔에 빠질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즉 죽음에 대한 성찰은 삶의 기쁨과 의욕을 손상할 뿐 현실의 삶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또한 현대인들은 당장 해결해야 할 보다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 아닌 삶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삶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죽음의 문제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도 이런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진지한 사고를 꺼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점차 눈에 보이는 삶의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세속적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일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는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그러나 비록 현대인들이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를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사람들은 평소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다가도 불현 듯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가공할 만한 공포감을 느끼는 가운데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죽음에 맞닥뜨릴 때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직간접으로 경험하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과 아울러 평소에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후세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어려운 일에 봉착하게 되면 다양한 종류의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는 등 많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의 순간에는 두렵고 외로우며 불행한, 곧 준비 안 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려움과 외로움, 당혹스러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실제로 많은 화자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한 의사의 말은 우리가 왜 죽음에 앞서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지 잘 일깨워준다.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셔윈 눌랜드(S. B. Nuland)는 50여 년간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환자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이들이 반(半)가사 상태나 완전한 혼수상태에서 “무의식적이면서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또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한 의식 속에서도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고, 수천의 사람들이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즉사하거나, 치명적 외상을 입어 마지막 공포에서 해방된 채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감안한다고 해도 다섯 명 중 한 사람보다도 적은, 훨씬 적은 수만이 축복 속에 눈을 감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들조차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순간에만 평온함을 느낄 수 있을 뿐,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기까지는 며칠 혹은 몇 주씩 정신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으로 몸부림을 친다”고 토로한다.9)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세상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심을 품는 사람들도 많지만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말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평소에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너무 뒤늦게, 실제로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매우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물질적 부와 사회적 성공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은 끊임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 죽음의 준비를 전혀 못 한 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한 죽음,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은 물질적 부와 사회적 성공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소망하는 것이지만, 그런 죽음은 좀처럼 맞이하기 어려운 행운이 되어 버렸다. 누구나 존엄하고 행복하고 평온한 죽음을 희망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존엄하지도 행복하지도 평온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후회와 슬픔을 가슴에 품고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다.모든 사람이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을 소망하건만 왜 세상에는 존엄하지 못하고 불행한 죽음만 넘쳐나는 것일까?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듯이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듯이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 역시 저절로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학·생사학 전문가들은 죽음이 우리의 삶을 성숙시키는 ‘마지막 선물’이자 ‘최후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10)일련의 사람들은 죽음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으로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존재라고도 말하기도 한다.11)우리가 죽음의 불가피성을 항상 유념하면서 살아간다면, 무의미한 활동에서 벗어나 유의미한 일로 삶의 시간을 채우면서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의미한 삶, 충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끝자락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이란 생전의 삶을 유의미하고 충실하게 보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존엄하고 행복한 삶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Ⅱ. 영혼 불멸에 관한 논의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이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신학자들은 전통적 견해와 다른 교훈을 하고 있지만12) 성경은 죽음이란 죄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16-17에서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죄의 결과인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이 죽음은 극복되어야 하며, 또 극복되는 것이며, 또 장차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자들의 죽음의 극복을 교훈하고 있다. 또 마지막 원수인 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복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모두 이룬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전 15:24-26).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보다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이다.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것이며, 죽음의 권세에서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비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느냐? 라는 점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 대답을 하여야 할지를 논의코자 한다.우리는 인간의 죽음 뒤에 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영혼불멸론과 중간상태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이들은 영혼불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특히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의 활기띤 사상이다.13)그러나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영혼불멸 사상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고유 개념이 아니다. 이 사상은 고대 종교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에 철학적 특성이 가미되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칼빈은 아담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가르치면서14) 영혼불멸론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15) 그러나 영혼의 불멸설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고 했다.16) 아키발트 A. 핫지(Archibald A. Hodge)는 그의 저서에 영혼불멸론의 논의들을 소개하였고17) 월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18)이에 반해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영혼불멸의 교리를 articulus mixtus라고 부르는데, 즉 이 교리의 진리성은 계시(啓示)에 의해서라기보다 이성(理性)에 의해서 더 많이 논증되어질 성질이라는 것이다.19) 벌카우워(G.C. Berkouwer)도 바빙크의 이론에 동조하고 있다.20)성경이 인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영혼불멸론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에 대하여 안토니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21)① 성경은 ‘영혼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 상태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면류관에 대하여, 말씀의 씨앗 등에 대하여 사용된 단어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22)②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존재를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 속에는 어떠한 종류의 본래적인 것이 있지 않고, 혹시 인간을 불멸의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 속에서도 본래적인 것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23)③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란 죽음이며,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만이 진정한 삶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참된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요 3:36, 5:24, 17:3).24)④ 중심적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 인간관과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인간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전체성으로 창조하셨고,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다. 부활은 신자들이 영광 속으로 이전된다는 뜻이며, 그 영광 속에서 우리의 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될 것이다(빌 3:21).25)안토니 후쿠마의 이론을 보다 상세히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26)사람들은 종종 영혼 불멸의 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라고 말해 왔다. 이 말은 계몽주의와 계몽주의의 종교적 파트너인 이신론의 세기인 18세기에는 특별히 사실이었다. 계몽주의에 따르면 모든 진리의 원천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이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성이 발견할 수 있는 ‘자연신학’의 세 가지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의 존재, 미덕의 중요성, 영혼불멸이라고 일컬어졌다. 영혼 불멸의 개념은 임마누엘 칸트(1724-1804년)가 이런 논증들을 파괴적인 비판에 굴복시키기 전까지는 이성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칸트조차도 여전히 이 개념을 이른바 실천 이성의 선결 조건으로 고수했다.27)(1) 타 종교와 철학에서의 영혼 불멸의 개념우리는 먼저 영혼 불멸의 개념(몸이 죽은 뒤에도 영혼 내지 인간의 비물질적인 측면은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고대 그리스 등을 포함한 수많은 민족들이 이런저런 형태로 영혼 불멸을 믿었다. 사실 18세기에 계몽주의의 지도자들이 강력하게 변호한 영혼 불멸의 개념은 기독교 특유의 교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교리를 일부로 삼아 형성된 ‘자연 종교’를 기독교와는 구별되고 기독교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영혼의 불멸성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에서 발전되었고 플라톤(주전 427-347년)의 저작에서 철학적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대화록들 중에 특히『파이돈』에서 플라톤은 몸과 영혼은 별개의 두 실체로 생각해야 한다는 견해를 개진한다. 사유하는 영혼은 신적인 반면 물질-열등한 실체-로 구성된 몸은 영혼보다 가치가 열등하다. 이성적인 영혼, 즉 ‘누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의 불멸하는 부분이며 하늘에서 영혼은 더없이 행복한 선재(先在)를 향유했다. 영혼은 이 선재 상태에서 그 날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몸속에 들어와 머릿속에 머물렀다. 죽을 때 몸은 단지 분해될 뿐이지만 ‘누스’, 즉 이성적인 영혼은 그 행동 방침이 올바르고 고결했다면 하늘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은 다시 또 다른 인간이나 동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혼 그 자체는 파괴될 수 없다.28)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영혼의 불멸성은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합리적인 것은 실재하는 것이며 비합리적인 것은 무엇이든 열등한 종류의 실체를 갖는다. 그러므로 영혼은 본래부터 파괴될 수 없고 따라서 불멸하는 우월한 실체로 간주되는 반면 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완전히 파괴될 운명에 처한 열등한 실체이다. 따라서 몸은 영혼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영혼은 몸이 없는 편이 실제로 더 낫다. 그러므로 이런 사고 체계에서는 몸의 부활 교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2) 성경은 영혼 불멸을 가르치는가그러나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성경은 ‘영혼 불멸’이라는 표현을 과연 사용하는가?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치는가?영어 성경에서는 ‘아타나시아’와 ‘아프타르시아’라는 두 헬라어 단어가 일반적으로 ‘불멸’로 번역된다. ‘아타나시아’는 신약에서 세 번밖에 발견되지 않는데 한번은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두 번은 고리도전서 15장 53-54절에서 발견된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이 단어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여기서 불멸성은 명백히 단순한 끝없는 존재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여받은 불멸성과는 구별되는 원래적인 불멸성을 뜻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다른 모든 불멸성의 원천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에게만 불멸성이 있다. 다른 존재들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해서만 불멸성을 얻으며 소유한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생명이 있으신 것처럼(요 5:26) 자신 안에 불멸성이 있다.‘아타나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다른 두 곳은 서로 연이어 등장한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다”(고전 16:53-54).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52절을 보라). 앞에서 인용한 말씀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아직 살아 있는 신자들의 변화와 그때 발생할 죽은 자들의 부활 둘 다에 적용된다. 바울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에(50절) 이런 종류의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이제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불멸성에 관한 다음 세 가지 점을 주목해보라. (1) 여기서 말하는 불멸성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2) 이 불멸성은 우리가 미래에 받게 될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종류의 불멸성은 모든 사람, 심지어 모든 신자의 현재적 소유가 아니라 재림 때 발생할 증여물이다. (3) 이 구절에서 묘사하는 불멸성은 영혼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인의 특징이다. 어딘가에 강조점이 있다면 그 강조점은 몸에 있다. 이 본문은 몸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영혼 불멸의 개념에 대한 어떤 암시도 존재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불멸’로 번역되는 또 다른 단어인 ‘아프타르시아’는 신약에 일곱 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로마서 2장 7절에서는 참된 신자들이 추구하는 목표,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밝히 드러내신 것을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또 이 단어는 바울 서신의 부활에 관한 위대한 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네 번 사용된다. 50절에서 이 단어는 썩거나 부패할 수 있는 것이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42절에서 이 단어는 몸이 썩을 것으로 심겨지지만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전달하는데 사용된다. 53절과 54절에서 이 단어는 여기서 썩을 것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몸이 부활 때 덧입어야 할 부패하지 않는 불멸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 단어는 이런 본문들 가운데 어느 본문에서도 “영혼”에 대해서는 사용되지 않는다.이와 관련된 형용사인 ‘아프타르토스’도 신약에서 일곱 번 사용된다. 이 단어는 하나님(롬 1:23; 딤전 1:17), 부활한 몸(“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고전 15:52), 바울이 얻으려 애쓰는 면류관(고전 9:25),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않을 보석(벧전 3:4), 우리가 그로부터 거듭나게 된 썩지 않을 씨(벧전 1:23),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아니할 유업(벧전 1:4) 등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어느 경우에도 이 단어는 ‘영혼’을 묘사하는 데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는 ‘영혼의 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성경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3) 영혼 불멸에 대한 개혁신학자들 간의 불일치한 해석일부 개혁신학자들은 ‘영혼의 불멸’이라는 표현을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되지 않는 하나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고 변호해 왔다. 예컨대 칼빈은 아담에게는 불멸하는 영혼이 있었다고 가르치며29) 영혼의 불멸성을 받아들일 만한 교리라고 말한다.30) 그러나 그와 동시에 칼빈은 불멸성은 영혼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혼에 나누어 주신 것임을 인정한다.31)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는 1878년에 처음 출판된 한 책에서 영혼의 불멸성 교리를 변호하는 여러 논증을 제시한다.32) 월리엄 셰드는 1889년에 처음 출판된 한 저작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의 불멸성과 죽은 뒤에 몸에서 분리된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신약의 경륜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구약의 경륜의 특징이기도 했다.”33) 이와 비슷하게 루이스 벌코프도 이렇게 말한다. “이 영혼 불멸의 개념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 .”34)ej 나아가 벌코프는 이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반 계시와 성경을 근거로 여러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그러나 이 점에 대한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은 휠씬 더 신중하다. 바빙크는 영혼 불멸 교리를 그 진실성이 계시보다는 이성으로 입증되는 “혼합된 신조”(articulus mixtus)라고 부르면서 이에 덧붙여 신학이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보다도 영혼의 불멸성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고 논평한다.35)바빙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결코 영혼의 불멸성을 그렇게 많은 말로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은 결코 이 개념을 신적 계시로 선포하지 않으며 어디서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개념의 진위를 논하거나 논적에 맞서 이 개념을 주장하려는 시도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36)G. C. 베르카우어도 바빙크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영혼불멸의 개년이 기독교 특유의 교리임을 부정하며 이렇게 단언한다. “성경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에도 살아남으며 우리가 인간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와 상관없이 고찰할 수 있는 인간의 한 일부의 불멸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와 같은 불멸성에 대한 독립적인 관심과도 결코 관련이 없다.”37)(4) 영혼 불멸에 대한 성경적 결론개혁신학자들의 이와 같이 명백히 상충되는 반응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우리는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영혼 불멸의 개념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데 동의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① 성경은 ‘영혼 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멸’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부활 때의 인간의 전 존재, 썩지 않을 면류관이나 썩지 않을 말씀의 씨 같은 것에는 적용되지만 인간의 영혼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② 성경은 영혼의 본래적인 파괴 불가능성으로 인해 영혼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이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주된 철학적 논증 가운데 하나다-가르치지 않는다.38) 이 논증은 특정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과 관련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영혼은 몸보다 더 고상한 형이상학적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영혼은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실체이며 따라서 신적인 실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에 대한 그와 같은 관점을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하나님께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나 인간의 어떤 측면에 있어서 인간을 파괴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어떤 본질적인 성질도 지적할 수 없다.③ 성경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인간의 가장 큰 선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영혼 불멸의 개념은 죽음 이후의 삶의 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개념은 단지 영혼은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단언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강조하는 바가 아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과 동떨어져 사는 것이 곧 죽음이며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가 곧 참된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와 같은 참된 삶을 이미 누리고 있다(요 3:36, 5:24, 17:3).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1-25절과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가르쳐 주듯이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누릴 것이다.39) 성경이 우리 앞에 가장 바람직한 상태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죽음 이후의 실존이다. 성경은 또한 이 참된 영적 생명이 없는 이들도 죽은 뒤에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지속되는 그들의 존재는 행복한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고뇌로 가득한 존재일 것이다(벧후 2:9, 눅 16:23, 25도 보라).그러므로 성경은 미래의 삶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한다. 성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이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로 나오고 그로 인해 다가올 진노에서 피하라고 촉구한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빠지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발한다. 성경은 또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가리거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진리를 부정할 만한 ‘영혼 불멸’에 대한 어떤 개념에 대해서도 경고한다.40)④ 인간의 미래에 대한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몸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에서 일반적인 인간과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몸의 부활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몸은 영혼의 무덤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은 같힌 상태에서의 해방으로 여겨졌다.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과 매우 다르다. 성경에 따르면 몸은 영혼 못지않게 실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몸과 영혼으로 창조하셨다. 몸은 영혼에 비해 열등하지 않으며 인간의 참된 실존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은 참된 인간의 몸을 지닌 참된 인간 본성을 결코 취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적 사고에 따르면 몸은 영혼의 무덤이 아니라 성령의 전이다. 인간은 몸을 떠나서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신자가 미래에 누릴 복은 단순히 영혼의 지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가장 부요한 측면으로 몸의 부활을 포함한다. 그러한 부활은 신자에게는 영광에 이르는 변화가 될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빌 3:21).우리는 영혼 불멸의 개념이 기독교 특유의 교리가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오히려 성경적 종말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몸의 부활 교리이다. ‘불멸성’이라는 단어를 인간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싶다면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이 불멸한다고 말하도록 하자. 그러나 인간이 그런 불멸성을 완전하게 누릴 수 있으려면 그전에 인간의 몸이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 한다.41)Ⅲ. 죽음을 이기는 죽음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극복이란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이것은 죄의 정복과 연관되어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 실현과 병행된다. 죽음의 극복은 죄의 정복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바울의 표현처럼 아담의 범죄로 이 땅에 사망이 왔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왔다(롬 5:17).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며(막 10:45, 14:24), 그의 부활을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 계기이다.42)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 때문에 정죄 당하신 것이며(고후 5:21, 롬 8:3, 갈 3:13), 우리 죄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우리의 의를 위한 것이며(롬 4:24),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에게 부활을 보증해 주는 첫 열매이다(고전 15:20-22).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으며(마 28:18),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는 자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엡 1:20, 빌 2:10).43)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과 죽지 아니할 것을 확보하셨다. 그리스도는 마귀 권세를 멸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죽음과 부활이며, 죽음 자체의 정복이며(고전 15:26), 흑암의 권세잡은 자 마귀의 정복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다 통일하는 것이며(엡 1:10), 만물의 으뜸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44)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롬 6:5, 8, 골 2:10, 딤후 2:1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장차 나타날 영광과(롬 8:23)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전 15:49).45)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 또는 동물적 생명의 종결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죽음관은 점진적 발전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구약 성경 초기 사상은 죽음을 육체적 생명의 종국으로 이해했으나 인간 존재의 완전한 소멸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은 자는 음부에서 그림자 같이 존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후기에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제기되고 영혼과 육체의 분리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약성경은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의한 생명 중단 또는 새 삶의 영역으로의 전환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대립적으로 취급하는 헬라 사상의 이원론을 거부했다.죽음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요, 적대적인 것이다.46) 일종의 원수이다(고전 15:26). 그것은 죄의 결과이며 아담의 타락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앙 항목이었다.그럼에도 죽음의 원인에 대한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죽음을 자연적인 것, 인간의 본래의 조건으로 보는 견해이다. 펠라기우스, 소시누스, 바르트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펠라기우스와 소시누스는 도덕주의자요, 합리주의자였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여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며 완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원죄 교리를 부정하고 육체적 죽음을 죄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생명의 자연적 결과로 간주했다. 바르트는 말년의 저서인 「교회 교의학」에서 죽음의 원인을 죄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 보았다. 그는 죽음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요, 생명의 자연적 종료로 취급했다.47)죽음을 인간 본성에 속한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의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와 관계없이 죽도록 운명 지어졌다면, 왜 성경은 죄와 죽음을 철저히 연결시키고 있는가? 펠라기우스와 소시니우스주의의 주장은 성경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합리주의적 추론에 근거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바르트는 성경의 증거 대부분이 죽음을 저주로, 인간의 원수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적 증거가 좁고 가는 선에 매달려 죽음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로, 또는 인간 본성에 속한 자연적인 것으로 주장했다.48)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한계이며 약점이다.죽음이란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죽음’을 체험하게 되며,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게 된다.그러면 죽음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죽음은 단절인 동시에 새로운 상태로의 이전이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하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축복을 소유하였기에 우리들의 일상(日常)은 승리의 기록이어야 한다.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다(고후 5:1). 그러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고백한다(빌 3:20).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며, 허물로 가득하였을지라도 ‘이미’ 받은 구원의 감격을 안고 ‘아직’ 성취되지 못한 완성을 향해 달음질하며 나아간다.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고 고백한 것처럼 죽음의 깊은 수렁에서도 죽음을 극복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며 영원한 삶으로서의 죽음을 준비한다.49) 2. 바른 죽음을 위한 바른 삶의 연습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이 죽음을 맞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 빌리 그레함(Billy Graham)의 말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50) 우리들의 마지막 여행, 즉 영원한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첫 번째 준비단계는 중요한 일들을 처리, 정돈하는 일이다. 자신에 관계된 모든 일들을 정리하여야 한다(왕하 20:1).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다(딛 2:1).진정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살 준비를 갖춘 사람이다. 우리는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사는 법을 배우기를 원한다. 언제 우리 앞에 마지막 시간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51)우리에게 죽음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의 소망과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망과 완전에의 미학(美學)”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여행을 준비한다.결론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원천이시다(시 36:9, 민 27:16). 인간의 생명은 원천이신 하나님의 최상의 은사이므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자산이다(욥 2:4). 생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현세의 생명(삶)을 강하게 긍정하고 유복한 삶,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삶을 강렬하게 희구함으로써(신 5:33; cf. 출 23:25-26; 신 4:40) 현세 중심적인 삶과 신앙을 견지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지향한 영육 합일적 이해와 이에 근거한 인생관 및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인생관과 가치관, 죽음관의 향방을 결정한다.생명에 대한 강한 긍정과 함께 현세 중심적인 신앙관 혹은 인생관 때문에 성경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관련된 모든 개념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성경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유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다가 늙어서 맞이하는 죽음을 삶의 자연적 끝이자 종결로 이해한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죽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창 25:8). 이삭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 35:29). 욥도 마찬가지로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 43:17). 다윗도 “백발이 되도록 부와 영화를 누리다가 수명이 다하여” 죽었다(대상 29:28).이러한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자연적 순리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즉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유복한 삶을 향유하다가 천수(天壽)를 누린 죽음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자연적 죽음(자연사)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전 3:1-2; 시 49:10-12; 시 90:1-6). 이러한 자연적 죽음은 피조물의 유한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죽음이기도 하다. 하나님 한분만이 불멸하는 영원한 존재이시고, 인간을 위시한 모든 피조물은 사멸하는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생사(生死)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삼상 2:6; 시 31:15; 잠 4:27; 10:27).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서의 죽음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표현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3:1-2).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께 이반되는 반신적(反神的) 존재, 생명에 적대적인 세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한다. 특별히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하거나 비명횡사하는 비자연적 죽음(비자연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는 형벌로 간주되기도 한다. “내가 네 딸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삼상 2:31-33). 그러므로 성경은 죽음의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을 견지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5-16, 19 개역개정판, 참조 시 90:7-9, 겔 18:21, 28).52)죽음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에 도래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삶 속에 존재하는 현실, 삶과 분리될 수 없는 한 구성요소로서 이해된다. 특히 질병과 노화와 극심한 가난과 절망 속에서,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슬픔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체험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6-12
  • 기독언론포럼/ 김노아 박사(세광중앙교회, 한기총 공동회장)
    <영혼수면설(靈魂睡眠說)>※ 영혼수면설(psychopannychy)이란? 죽은 자들의 영혼(靈魂)이 부활(復活)때까지 무의식적(無意識的) 수면(睡眠)상태에 있다는 견해이다. 이 설(說)은 성경이 죽음을 잔다고 표현한 말이다.1. 예수의 운명(殞命)과 수면(睡眠)1) 예수의 운명막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기록된 말씀과 같이 개역성경은 예수의 죽음을 운명(殞命: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이라고 표현하였다.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기록된 말씀은 예수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영혼이 떠난 죽음을 운명(殞命)이라고 하였고, 영혼이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예수의 수면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기록된 말씀에서 죽은 자들(잠자는 자들) 가운데서(예수뿐만이 아니라 신구약시대 많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 예수라고 하였다. 사람창조(창1:27) 이후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復活)하셨으므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3) 예수의 수면기간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운명(殞命)하신 후 제 3일에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수면기간은 3일이라고 할 수 있다.(※예수께서 운명하시고 3일 후에 부활하실 것을 나타낸 말씀: 마16:21, 마20:19, 마27:63, 막8:31, 막9:31, 막10:34, 눅9:22, 눅18:33, 요2:19~21, 요2:20~22).2. 순교자들의 수면기간순교자들의 수면기간은 일반인의 수면기간과 다르다.1) 순교자들의 수면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기록된 말씀은 신약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운명과 수면에 관하여 잘 기록된 말씀이다. 기록된 말씀에서 순교자 스데반은 죽은 즉시 낙원이나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운명한 즉시 수면상태에 들어간 것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2) 순교자들의 수면기간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기록된 말씀에서 ‘예수의 증거(證據)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순교자)의 영혼들’(계20:4)의 수면기간은 그리스도께서 강림 하실 때에 첫째 부활 때까지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순교자들은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하였다(계20:6).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수면기간은 첫째 부활 때에 부활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갈 때까지다.3) 순교자들의 영혼 구원의 때순교자들의 수면기간이 끝나는 날(계20:4)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 목 베임을 받은 순교자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되므로 순교자들의 부활 그 자체가 곧 구원이다.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3. 순교자 외에 나머지 죽은 자들의 수면기간◉순교자들보다 천 년 더 수면하여야 한다.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순교자) 영혼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되고 이들의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 하였다(계20:4~5).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순교자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되고, 순교자 외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예수 믿고 죽은 자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순교자 외에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 후에 부활하여 살아나므로 순교자들보다 천 년을 더 수면상태에서 잠자게 된다.그러므로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이 천국이나 낙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요, 현재 수면(睡眠: 잠을 잠)상태에 있다. 순교자들은 첫째 부활(계20:4~6), 천년왕국이 시작될 때까지 수면상태에 있는 것이고, 순교자 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첫째 부활 후 천 년을 더 수면상태에 있으므로 현재는 죽은 자들 모두가 수면상태에 있는 것이다.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예수님도 많은 죽은 자들과 함께 수면상태에 있다가 잠자는 자들 중에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이다. 성경에는 죽은 자들 모두가 잠자는 수면상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살전4:13~18). 예수 십자가의 우편 강도가 낙원에 가지 않았는가?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우편 강도에게‘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였다. ‘있으리라’하신 것은 예언의 말씀이다. 우편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그날(오늘)’ 낙원에 가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운명하신 후 무덤 속에 3일 동안 계셨고(눅24:7), 부활 후에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으며(행1:3), 부활 후 40일이 되던 날 승천하셨으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후 43일 만에 승천하셨다(행1:9~11). 예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신 말씀은 거짓말이었는가?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늘’이란 먼 훗날을 가리켜 오늘이라 미리(사전에, 앞서) 말씀하신 것으로(히4: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늘’은 24시간 하루인 땅의 날이 아닌 하늘의 날(시89:29)의 하루를 오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고(벧후3:8),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更點: 시간의 점) 같다고 하였다(시90:4).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오늘’은 천 년 같기도 하고 밤의 한 경점 같기도 한 하늘의 날수를 ‘오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예측된다.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위 증거 한 말씀과 같이 모든 죽은 자들이 현재 수면(睡眠)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살전4:13~14).4. 천 년 후에 죽은 영혼들의 심판과 구원의 때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기록된 말씀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기록된 말씀과 같이 순교자들 외에 나머지 죽은 자들의 부활 때에는 모든 자들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요5:25~29). 사망과 음부는 불 못에 던진다고 하였으므로 음부에 있던 자 곧 불순종 한 자들은 옥(獄)에 있는 자들로서(벧전3:18~20)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다. 사망과 음부가 불 못에 들어가게 될 때에 옥(獄: 음부)에 있는 자들(벧전3:19)도 영벌의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25:46).5. 죽음의 잠이 아닌 신앙이 잠자는 자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 근신(謹愼):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 잘못에 대하여 반성함.살전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기록된 말씀은 낮에 속한 자와 밤에 속한 자로 구분한다. 밤에 속한 자(어둠에 생활하는 자)를 잔다고 하였다.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기록된 말씀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은 육신에 속한 잠을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어둠 생활(잠자는 자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생활), 밤에 속한 자가 되지 말고 낮에 속한 자가 되라는 뜻이다.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기록된 말씀은 죽음의 잠이 아닌 신앙이 잠자는 자, 어둠의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잠자는 자들이라고 하였다.<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1. 영혼(靈魂)이란인생이 태어날 때에 뇌신경에 의한 정신의 파장에 의해서 사람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탄생된다고 믿는다. 세상에서 영혼에 대한 정의는 정립(定立) 되어 있지 않다.영혼(靈魂)은 무형실존체(無形實存體)로서 인간의 심적작용(心的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정신(精神)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영혼은 인간의 육체 안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나(육체) 아닌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육체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영혼(靈魂)을 혼령(魂靈)이라고도 하는데 육체에 머물러 육체의 모든 것을 지배(支配)하는 정신현상(精神現象)의 근원(根源)이 되며 육체가 없어져도 독립(獨立)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예수께서 운명(殞命)하실 때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신약시대 첫 순교자 스데반은 운명(殞命)할 때에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하였다.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존재(存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2.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멸할 수도 있다.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기록된 말씀에서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멸하여 질 수 있고 죽을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의 육체가 살아 있을 때에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다(마10:28).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기록된 말씀에서 ‘내 영혼을 소생(蘇生)시키시고’라고 하였는데 소생(蘇生)이란 다시 살린다는 뜻이다.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는 육체가 살아 있는 자의 영혼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육체가 살아있는 자의 영혼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잠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욥 21:17,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기록된 말씀에서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고 악인의 등불이 꺼진다고 하는 말씀은 악인의 영혼이 등불이 꺼짐과 같이 멸절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기록된 말씀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은 염소로 비유된 자들이다(마25:33). 이 사람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영영한 불은 마귀와 마귀의 사자들이 들어가는 곳인데 인자되신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마25:31) 이웃을 돌보지 아니한 악한 자들은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죽은 영혼들의 심판이 아니요, 육체를 가진 악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을 멸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시 40:14,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시 63: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겔 13:18,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찐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하느냐. 19, 너희가 두어웅큼 보리와 두어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사람의 영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인데(렘38:16)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방석(직분의 자리)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영혼을 사냥하면서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인다고 하였다(겔13:18~19).기록된 말씀을 종합하면 영혼은 죽을 수 있으며, 그 죽었던 영혼이 살아날 수 있는 자(者: 사람)는 육체가 살아있는 사람이다.3. 육체가 없는 죽은 자들의 영혼은 불멸한다.◉죽은 영혼들의 부활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기록된 말씀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어떻게 부활(復活)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하였다.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계 14:9,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기록된 말씀에서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은 영벌을 받을 자들로서‘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라고 한 말씀을 영벌을 받을 것을 의미한다.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하였다(벧전1:9). 영혼이 죽으면 영생을 할 수 없고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죽은 자들의 영혼은 불멸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4. 결론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시 141:8,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시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영혼이 괴로움을 받으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욥7:11), 죽은 영혼을 소생(다시 살림)시킬 수도 있으며(시23:3), 음부에 빠진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살릴 수도 있다(시30:3~4). 영혼도 빈궁하여 가난할 수도 있으며(시141:8),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도 하신다(시107:9).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인 것을 알아야 한다(벧전1:9).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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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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