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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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언론포럼/ 김대성 박사(사)휴먼니커버리 대표)
    서론사람의 몸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그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의 구원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이 당장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재림시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한다는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상당히 무리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원받은 영혼들이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데, 그 영혼들이 예수 재림시 어떻게 다시 육체와 결합하여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게 되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과 설명이 매우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어떤 면에서는 설명 자체가 매우 무리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 설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성경의 사상과는 조화가 되지 않는 이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이 어떻게 기독교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으로 어떤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영혼불멸 사상은 왜 부활의 신앙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1. 영혼은 불멸하는 것인가?대한예수교 장로교 총회에서 발행(1994년)한 교리교육 지침서 352, 359페이지에는 영혼 불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우리는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의 물음에 직면한다. 육체의 생명과 함께 영혼도 끝나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등의 물음에 직면한다. 이에 관하여 그리스도교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 존속함을 주장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 불멸이라 한다. …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나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마지막 날에 그들의 육체까지 완전한 구원을 얻을 날을 기다린다. 이와는 달리 예수를 믿지 않고 거역한 사람들의 영혼은 음부에 던저져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최후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떨어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 죽지 않고 영원히 탄다고 생각한다. 일평생 죄를 지어 보아야 100년 이내의 기간 동안 지은 죄 때문에 그 영혼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타고 있다면, 그것은 공의와 사랑으로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왜 어떻게 유래되어 기독교의 교리가 되었는지 그 근원을 우선 살펴 보려고 한다. 동시에 영혼 불멸 사상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경에 맞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 혹은 철학적 추측에 불과한 것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상세히 다룰 수는 없겠으나, 중요한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2. 인간의 본질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과 생기이다. 인간의 창조 과정에서 영혼은 어디에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이러한 창조 과정에 대하여 한신대 김이곤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인간은 ‘땅 표면의 먼지(아파르 민 하아다마)’ 속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형성된 ‘생명체(네페쉬 하야)’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분명하게 규정되고 정의내려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본질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 사상은 영혼을 육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거나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이분법적 요소가 전혀 없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는 구약 성서의 구원사적(救援史的) 문맥과는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고, 영혼은 육체보다 가치 있는 ‘신과 유사한 영적인 것(호모이오시스)’이며, 죽을 때 그 둘은 비로소 분리되어 육체는 썩어지고 영혼은 불멸을 누린다는 희랍적 사고는 창세기 2장 7절의 히브리적 인간 이해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즉 사멸적인 육체 속에 불멸적인 영혼을 하나님이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유형의 논조는 여기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귀속되었다는 그 귀속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 이상을 도출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7>.3. 영혼 불멸설의 유래와 역사(1)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다음 그들이 거하는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실과를 따먹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그 과일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뱀을 통해서 하와를 유혹할 때에 그 과일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하였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말 중의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과일을 먹었고 결국 그들은 죽었다. 사탄의 말이 거짓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들게 되었다. 몸은 죽었지만 ‘혼’은 죽지 않았다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를 사람들에게 전파한 매개자들이 성경에 나온다.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을 하는 자, 무당 등(신 18:10)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사울 왕이 매우 다급한 상황에서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무당이 주문을 외우며 사무엘을 불렀고 사무엘이 나왔다(삼상 28장). 그가 과연 사무엘의 영혼인가? 사무엘이 무당에게 불려다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몸은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인간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사탄의 속임수임에 틀림없다.(2) 이집트의 영혼 불멸 사상과 헬라 철학이와 같은 사탄의 거대한 속임수로 인해 영혼의 불멸 사상은 인간 사회와 인류 역사에 매우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특별히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 불멸 사상을 대단히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분리된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무수한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으나 지금까지 떠나간 영혼이 되돌아와 다시 살아난 미이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영혼 불멸에 기초하여 윤회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였다. 기원전 5세기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집트를 방문하며 영혼 불멸 사상을 더욱 깊이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보았다”(그리스도교 대사전, 대한 기독교 서회, 1118면). 죽음 직전에 처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침착성은 영혼 불멸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마침내 영혼 불멸 사상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으며, 그의 논집(論集)인 ‘파에돈’은 영혼 불멸 사상의 교과서가 되었다.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철학자의 영혼은 사후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갈 것이며, 신들과 더불어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던 사람의 영혼은 묘지를 왕래하는 귀신이 되어 이리나 독수리와 같은 신체 속에 들어갈 것이다. 참다운 철학자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서 선한 영혼은 천국에, 악한 영혼은 지옥에, 그리고 중간적인 영혼은 연옥에 간다고 결론짓는다”(상동).(3) 영혼 불멸 사상이 교리로 만들어지기까지① 플라톤(Plato, 427˜347 BC) - 영혼 불멸 사상을 체계화시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해 놓았다. 최대의 헬라 문화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고대 이집트 종교를 흡수한 플라톤의 철학에 동양의 신비 사상을 혼합한 신플라톤 철학(Neoplatonism)이 기원전 3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② 필론(Philo, 20 BC~AD 47) -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로서, 몸과 영혼을 분리시킨 플라톤의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유대교에 끌어들이는 데 앞장 섰다. 1세기 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프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③ 오리게네스(Origen, c.185~254) -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3세기 초의 천재적인 교사로서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리스도교계에 소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고 불멸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불멸이라고 했으며, 자신은 영혼불멸을 믿는 진정한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자처하였다. ④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m, c.160~240) - 플라톤과 같은 영혼 불멸을 주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의 영혼은 지옥불에서 영원히 탄다고 하는 영원지옥(永遠地獄)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 - 북아프리카 히포 출신으로 당대의 최대 신학 교부였다. 그의 가르침은 중세 가톨릭 교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 터툴리안의 영원 지옥설을 확증하는 한편, 플라톤의 철학 개념을 빌려 연옥설을 만들어 냈으며, 대교황 그레고리는 서기 528년 그것을 교리로 인정하여 드디어 성경에도 없는 연옥 교리가 생겨난 것이다. ⑥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확인된 영혼불멸 사상과 영원지옥, 그리고 연옥의 신앙은 13세기 스콜라 철학자요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중세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집대성 되었다. ⑦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 - 신곡(神曲)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영혼 불멸 사상에 입각한 지옥, 연옥, 천국을 민속신앙으로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이 이교 철학 사상으로 전해지던 영혼 불멸 신앙이 그리스도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자,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제5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어떤 사람들이 이성적인 영혼의 속성에 관하여 그것이 죽음과 더블어 죽게 된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거룩한 공회의 동의로써, 영혼은…불멸이라고 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종규에 따라, 지성적인 영혼은 죽게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며, 이와 같은 그릇된 주장에 집착하는 모든 사람을 멀리 할 것과 이단으로 징벌하여야 할 것임을 명하는 바이다”(H. J.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 1937, 483,487).영혼 불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된 위와 같은 배경과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있다면, 영혼 불멸 신앙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성서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4) 칼빈의 「혼수론」과 개신교의 영혼 불멸 사상이렇게 이교적인 영혼 불멸 사상이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된지(1513년) 얼마 되지 않아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1517년). 프랑스의 젊은 가톨릭 신자 칼뱅이 1532년 개신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개종한 지 2년만인 1534년, 25세의 나이에,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재세례파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히 비평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최초의 신학 논문인 「혼수론」(魂睡論)을 써서 오늘날 일반 개신교회들의 영혼 불멸 신앙을 정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칼뱅에 앞서 성서에 입각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 위클리프, 틴덜, 독일의 루터 등이 이미 중세교회의 영혼 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교 사상이 개신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4.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 풀이영혼 불멸 신앙이란 이렇게도 비성서적인 이교의 철학 사상에서 시작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어 굳어진 교리이지만 성경을 보면 마치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성경절들이 도처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일차적인 문제는 히브리 사상을 헬라 사상으로 변형하려고 많은 시도를 한 「70인역」(희랍어 역본) 성경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다시 한신대 김이곤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히브리어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하나님의 ‘모양’(데무트)을 단순히 동의적 평행법으로 반복 병렬시키면서 그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역본은 오히려 ‘에이콘’(형상)과 ‘호모이오이스’(모양) 사이의 엄격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희랍어 역본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호모이오시스’ 즉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과 ‘비슷한 것’(호모이오시스)은 소실되고, 단지 인간적인 것, 즉 ‘에이콘’만 남게 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세기 3장의 타락설화 이후에 나오는 ‘호모이오시스’(모습)라는 표현은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 대신 ‘에이콘’(창 5:1) 또는 ‘이데아’(창 5:3)라는 표현으로 대치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역본은 구약성서가 인간을 플라톤주의적으로(플라톤의 파에돈처럼) 이해하여 인간이 죽을 때는 마치 영혼과 육체가 나누이는 것처럼, 또는 영혼은 육체보다 더 우수한 신적 본질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한 것으로 오도(誤導)하였던 것입니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6, 157).히브리적 인간 개념을 헬라적 인간 개념으로 변형시켜 번역된 「인역」 성경의 영향 때문인지, 각종 번역본에서 ‘영혼’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루아흐 하야’(살아있는 영, 생령)로 되어 있지 않고 ‘네페쉬 하야’(살아있는 존재, 생명체, Living being)로 되어 있으나 우리말 번역에는 ‘생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김이곤 교수의 설명을 들어본다. “문제는, 희랍적 영향 때문인지(?), 이 ‘네페쉬’라는 말이 우리말 성서(개역)를 포함하여 영어, 독어, 불어 등의 성서에서, 희랍역도 그렇게 하지 않은(‘프쉬케’라고 번역하고 ‘프뉴마’로 번역치 아니한) 번역인 ‘영혼(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서 시적 은유로 사용한 것이나 출애굽기 23장 9절, 욥기 19장 2절 등의 어떤 특수 문맥 이외에서 ‘영혼’이라는 말로 ‘네페쉬’를 번역한 것은 명백한-혹은 의도적(?)-오역(誤譯)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상동, 158).이와 같은 오역으로 인해, 많은 성경 독자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천당이나 지옥에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성경절들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표적인 몇 성경절들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에 ‘영혼’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헬라어로 ‘푸쉬케’이다. ‘푸쉬케’라는 단어는 영혼, 목숨, 생명, 마음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번역상 가장 적절한 낱말을 선택하려면 문장의 전후 문맥을 면밀히 살피는 작업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10장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교훈하시는 말씀들이다. 전도하면서 당할 여러 가지 시련과 핍박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하여 사람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하는 핍박은 최악의 경우 몸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 선교하는 정신은 사람이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푸쉬케’라는 말은 다른 여러 경우(행 15:24; 엡 6:6; 골 3:23 등)에서처럼 ‘마음’으로 번역해야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이나 구약 성경에 “생기” “호흡” “신” “영” “영혼” “생명” “목숨” “생물” “마음”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 헬라어(푸뉴마, 푸쉬케)와 히브리어(루아흐, 네페쉬, 네솨마) 단어가 1658회 나오지만 불멸하거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영혼”이라는 말은 마음과 몸을 포함한 사람 전체를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마치 강도가 그날 당장 낙원에 간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다. 위 성경절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부사는 원래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라고 했어야 할 부분인데, 편견을 가진 번역자들이 본래의 헬라어 원문에는 있지도 않는 쉼표( , )를 ‘오늘’ 앞에 찍어 넣음으로 문장을 이해하는 데 혼란이 온 것이다.우선 강도의 요청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공동번역 성경은 이 성경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강도의 요청은 당장 영혼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기를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구원을 그날 바로 약속하신 것이지 그날 그의 영혼을 낙원으로 데려가신 것이 아니다. 강도의 실제적인 구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돌아가신 그날 낙원에 가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신 다음의 말씀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면, 강도가 그 날 그 영혼이 분리되어 하늘에 갔다는 것은 도무지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이 분명하다.(3)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실화로 생각한다.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실화로 생각할 경우에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들과 함께 이 이야기의 실상을 살펴보자.① 아브라함의 품 - 구원받은 의인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면, 아브라함 이전의 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고통받는 악인들이 아브라함에게 탄원을 해야 하는가?② 눈, 손가락, 혀 - 영혼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탈 것이 없다. 뜨거움을 느끼는 감각도 없다. 몸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나 손가락이나 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다. 영혼이 지옥에서 탄다는 말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매우 허망한 이야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③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사이 - 그 두 장소 사이의 거리가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줄수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라면 부모나 배우자나 형제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품도 생지옥에 불과할 것이다.④ 실화가 아닌 비유 - 이것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한 파피루스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민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집트의 민속 설화였음이 밝혀져 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은 잃은 양, 잃은 은전, 탕자, 청지기, 부자와 나사로 등의 여러 가지 비유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있다. 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 - 설화나 우화 속에 이름이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흥부와 놀부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 때문에 소설이 실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눅 16:14).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당시 부자들의 고정관념, 즉 부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의 결과이므로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한 것이다. 5. 지옥과 꺼지지 않는 불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무엇인가? 신약 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낱말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라고 하는 말은 12회 나타난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 48).여기에 기록된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엔나’이다. 히브리어로는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사람 이름인 ‘힌놈’이 합성되어 ‘게힌놈’이라고 쓰고 있으며, 의미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남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힌놈의 골짜기”가 어떻게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을까? 이스라엘의 배도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방신에게 분향하고 몰렉신에게 자식들을 불살라 제사드리며 온갖 추악한 일을 자행하였다(대하 28:1-3; 33:1-6; 왕하 23:10).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골짜기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장소가 되어 그 쓰레기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는 장차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당할 곳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옥을 묘사할 때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있다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을 묘사할 때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불타는 시간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7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불이 문자적으로 영원한 불이라면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곳에 지금도 불이 타오르고 있어야 마땅하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17:27). 예루살렘은 서기 70년에 멸망했다. 그 불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가?장차 악인을 멸망시킬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란, 불타는 시간의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끌 수 없는 하나님의 불,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의 영원성을 묘사하는 표현인 것이다. 6. 부활 -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영혼불멸을 인정할 경우, 예수 재림시 천지 사방에서 일어나게 될 부활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늘에 있던 구원받은 영혼들이 예수 재림시에 모두 함께 지상으로 내려와 각기 무덤 속으로 들어가 육체와 결합하여 일어나는 것이 부활이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성경에는 의인에게 일어날 ‘생명의 부활’과 함께 악인에게도 있게 될 ‘심판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그렇다면 지옥에서 불타고 있던 악인들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성경의 내용 중에는 ‘영혼불멸’ 사상을 대입할 경우 설명이 불가능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모순을 가리기 위하여 성경 번역을 교묘하게 해 놓은 부분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절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선 이 표현은 어법상 맞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은 죽은 자들을 데리고 온다는 말처럼 되어 있다. “데려오다” 혹은 “데려가다”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 원문(아고, αγω)을, 영혼불멸 사상에 맞추기 위해 “데려오다”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문장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기초하여 어떤 신학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해 놓았다. 이 주석의 내용을 보면, 몸은 죽었으나 영혼은 구원을 받아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오셔서 부활시킨다는 뜻이다. 죽은 성도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어 번역 성경에는 주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번역해 놓았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살전 4:14).다음의 성경절들을 살펴보면 성경에 기록된 부활 사상은 그 상태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5-18).이 성경절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재림시 살아있던 자들이 죽은 자들 보다 먼저 하늘에 가지 않는다. (2)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의인들이 부활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 (3) 재림시 살아있던 의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하늘로 올리워져서 공중에서 예수를 영접한다. (4) 그 후 천국으로 올라가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영혼불멸을 믿게 되면,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되는 구원의 과정에 매우 혼란스러운 모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나 유수한 성경학자들은 영혼불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론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탁월한 언어학자요,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로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후에 순교당한 틴덜(W. Tyndale, 1490˜1536)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리와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교리를 함께 결합시켜 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일치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인 한 사람 안에서 성령과 육신이 더 이상 역할 수가 없다. … 내게 다시 말해 주시오.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의 경우와 같지 못한가? 그런 뒤에 새삼스럽게 부활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이와 같이 부활 신앙과는 모순되는 영혼불멸설과 연계되어 있는 영원 지옥설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시작된지는 이미 오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93년 11월 15일자 타임(TIME)지와의 인터뷰에서 불타는 영원 지옥설을 부정하였다. 영국 성공회도 그간의 지옥 개념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지옥을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고통과 징벌의 불구덩이’로 묘사한 기독교의 전통적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지옥은 다만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총체적 부정과 무(無)의 상태’이다. … ‘가학적으로 표현된’ 전통적 지옥관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상흔을 남겼으며, 신을 학대를 즐기는 괴물로 만들었다”(동아일보, 1996. 1.13).현대 신학계의 가장 유명한 신약 학자 중의 한 사람인 프랑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1958년에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성서적으로, 철학적으로 영혼불멸설을 설명하면서, 죽은 자의 영혼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설의 가르침은 부활의 신앙과는 공존할 수 없는 비성서적인 관념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당시 신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논문이었으며, 논문 발표 후, 그를 향한 비난과 공격은 참으로 맹렬한 것이었다(오스카 쿨만, 전경연 편, 복음주의 신학총서 제5권, 7,8쪽 참조).[공격들] ① “그 논문은 생명의 양식의 주림을 채우려고 죽도록 갈구하는 불란서 사람에게 비록 뱀은 아닐지라도 떡 대신 돌을 주었다.” ② 오스카 쿨만에게, 당신은 “영적 번민을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는 괴물”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③ 어떤 사람은 그 논문에 대하여 “놀라움과 슬픔과 그리고 깊은 번민의 원인”이 되었다고 실토했다. [쿨만의 반응] “어떤 비판자도 본문 주석으로 나를 반론하고자 시도하지 않았다.…나의 글에 대하여 가하는 공격들이 주석학적인 논의에 근거되었더라면 이 공격들은 내게 더 큰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나는 철학적인, 심리학적인,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막연한 이유로 공격받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영혼불멸 사상은 성경에 근거한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철학적 가설과 추측이 종교암흑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의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영혼불멸설을 인정하고 믿게 될 경우, 사탄이 미혹하는 현대 강신술에 넘어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미 죽었던 자들이 나타나서 천국에 다녀온 이야기, 지옥에 다녀온 이야기, 혹은 성경의 교리를 왜곡시켜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면 온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깊이 음미하면서 정통적 기독교 성서관에 입각한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인간의 가르침이나 사상, 혹은 교회의 전통보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믿고 따라갈 때에 우리는 안전하게 하늘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 해설/기획
    • 학술
    2019-06-12
  • 기독언론포럼/ 나용화 박사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들어가는 말 인간의 영혼은 사후에 불멸하는가? 아니면, 멸절하여 없어져 버리는가? 인간의 몸은 사후에 부활하는가? 아니면, 전혀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잠자는가?사후에 인간이 가는 천국이나 지옥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사후에 받을 상급이나형벌은 있는가? 아니면 죽음으로 끝나고 아무것도 없는가? 사후의 세계나 상태에 대한 교리가 인간의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Ⅰ. 영혼멸절설과 영혼수면설1. 영혼멸절설성경적 근거 : 사66:24; 계19:20; 20:9-10, 14-15; 21:8; 막9:48-49; 딤전6:15-16핵심적 주장 : 사후 최후 심판후에 회개하지 않은 모든 인간의 영혼들이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면 완전히 불타 버리기 때문에 멸절되어 없어진다. 하나님만이 영원불멸하고(딤전6:16), 영혼의 영원불멸은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이요 선물이다(요10:28).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다.반론 : 사후에도 불신자들은 유황불에 타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어 심판을 받으며(계20:12-13), 지옥에서 밤낮 고통을 당한다(마25:41; 눅16:23-24; 계14:11; 20:10).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육체, 곧 몸이 부활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마27:57; 고전15:44).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한 것이다(눅20:37,38).반면에, 신자들은 살아서 새 하늘 새 땅에서(계21:1-2)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계22:3) 위로를 받고(눅16:25; 계21:4) 그와 함께 다스린다(계20:6; 22:5).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의인들과 악인들이 사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참고,마25:31-46). 영혼이 멸절된다는 것은 각종의 고통과 불행이 끝나는 것으로서 지옥 형벌이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영혼의 멸절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멸절설은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2. 영혼수면설성경적 근거 : 왕상2:10; 11:43; 14:20,31; 왕하8:24; 대하9:31; 33:20; 시6:5; 115:17;146:3,4; 전9:5,6,10; 단12:2; 요11:11; 살전4:13,14핵심적 주장 : 사후에 영혼들은 편히 쉬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잠을 잔다. 반론 : 불신자들은 사후에 활동하지 않거나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막9:48-49; 눅16:24; 유1:7), 성도들은 사후에 한 강도의 경우처럼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며(눅23:43)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며(계7:9-12; 14:37; 19:1-2; 6-8)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계20:6; 22:5). 예수님께서 변화하시던 때 육체적으로는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였다(마17:1-8). (참조. 인간의 뇌는 수면상태에서 오히려 맑게 활동하는 까닭에, 하나님은 인간이 잠든 중에 환상을 보여주고 계시하시기도 한다. 창15:12-16; 28:10-22; 31:24; 마1:18-25; 2:13-15, 19-23). Ⅱ. 영혼불멸과 육체부활 교리1. 구약 성경의 근거 에녹(창5:24; 히11:5) ; 아브라함(창22:5; 히11:8-19) ; 욥(욥19:25-27) ; 엘리야(왕하2:11).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3:6; 마22:32). 죽은 자들의 죽음에 대한 표현 : “자기 열조(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 (또는. “자기 백성에게 합류했다.” “he was gathered to his people.”)(창25:8; 35:29; 49:33; 민20:24) ; “그 열조(조상들)와 함께 누워 잤다.” (왕상2:10; 11:43; 14:20,31) ;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었다.”(왕하9:28 ; 12:21).2. 신약 성경의 근거 악한 자들의 영혼도 사후에 남아있어 심판을 받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11:21-24; 12:41; 참고, 고후5:10) ; 영혼은 죽을 수 없고 사후 낙원에 있게 된다고 하신 예수님이 말씀(마10:28; 눅23:43; 요11:25-26; 14:3) ;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마22:23-33) ; 미래 천국에서의 상급과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들(열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 마25:1-46) ;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16:19-31) ;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눅20:35-36; 요5:28-29; 11:25-26); 최후의 심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롬2:5-11) ;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영생 불사와 부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행24:15; 고전 15:20-23, 42-44, 50-57; 고후5:1) ;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어한 바울의 소원(빌1:21-23; 고후5:6,8) ; 주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살전4:13-17) ; 여자들의 부활신앙(히11:35) ; 하늘의 예루살렘의 성도들(히12:22-24) ; 부활에 대한 계시록의 진술들(계7:9-17; 14:1-5; 19:1-8; 20:4-10, 13-15; 21:5-8; 22:1-5). 3. 핵심적 주장인간의 육체는 사후에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되나(행13:36; 창3:19), 영혼은 결코 멸절되거나 잠들지 않고 불멸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인의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나(빌1:23), 사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지어져 고통을 당하고 마지막 날의 심판을 기다린다(벧후2:9). (참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32장 1항)Ⅲ. 육체부활 교리의 중요성1. 사후에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 - 부활을 수없이 증거하고 있는 성경이 거짓된 책이요,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쟁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고전15:13-16). 또한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열매가 아니다. (참고, 고전15:23)-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 (고전15:14,17). - 죄사함이 없다(고전15:17). 또한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하고(참고, 고전15:54-57), 죄와 사망을 없애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참고, 히9:26; 요일3:8),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다 망했을 것이다(고전15:18).- 우리의 일생이 금생으로 끝나게 되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살아온 성도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다(고전15:19).- 성도들의 본향인 천국이 없다(참고, 히12:13-16).2. 육체부활 신앙의 유익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뒤따라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는 소망을 가지고(히6:19-20), 담대함과 확신에 찬 믿음으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히10:19-22).3. 육체 부활의 열매 :사후에 육체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도들의 죽음을 귀중히 보신다(시116:15).성도들은 영생의 부활(계20:4; 21:3-4; 22:1-5)을 얻게 되나, 불신자들은 영벌의 부활(계20:1, 12-15; 21:8)을 얻는다(참고, 마25:41,46; 요5:28,29; 행24:15). <참고도서>1. 레이몬드. 「최신조직신학」. 나용화 외 3인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04.2. 벌코프. 「조직신학」하. 권수경 이상원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3. 뵈트너. 「불멸의 생명」. 김선운 역. 개혁주의신행협회, 1974.4. 후크마. 「개혁주의종말론」. 류호준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5. 나용화. 「성경에서 교회와 종말을 배운다」. 에페코북스, 2014.6. 박형룡. 「교의신학」(내세론). 은성문화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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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2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9
    예수님의 제자들이 맹인으로 태어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 “랍비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입니까?”라고 묻는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죄가 누구 때문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다.”(3)고 대답하신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 죄 때문에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하여 그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한다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고귀한 뜻을 가지고 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예수님의 이 대답은 이 문제 많은 인생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며 진리의 말씀인가?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났다면 우리는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하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뜻 없이 하실 리가 없고, 창조의 과정 가운데 실수나 하자가 있을 수 없다. 창세기 말씀대로 우리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아무리 맹인이라 할지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열달이 차야 출산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다.“우리는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어 우리로 그것들 가운데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2:10)이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미리 정하시어 우리가 그 선한 뜻 가운데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 그 뜻은 갑작스럽게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만들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따라 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뜻 없이 태어난 자는 없다. 의미 없이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사람은 없다. 태어 나서는 안 될 사람이 태어난 경우도 없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이고, 우리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셨다. 눈이 안 보이고, 쌍꺼풀이 없고, 코가 낮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지으시고 기뻐하신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가 알아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시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선을 이루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또한 이렇게 가르칩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롬 8:28)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서로 합력하여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비록 내가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괴로운 인생을 살지라도 그것은 선을 이루기 위한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어떤 일은 우리에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고, 어떤 일은 꼭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바냐 3:5에는 “하나님은 실패하시지 않는다”(God never fails, , lo ne‘dal) 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글 역본에서는 (Πι’στοV ’Ο θε、οV,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를 영역본에서는 “God never fails”로 많이 번역하고 있다(고전 1:11; 고후 1:18; 수 21:45; 신 7:9). 우리 신자들은 이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는 실패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요한 9장에 나오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없었던 것같고, 더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셨기 때문에, 선지자일 리가 없고, 오히려 죄인이라고 말하고(25), 또한 예수께서 고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이 이제 눈을 뜨고 보고 걸어다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가리켜 “네가 전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34)고 책망한다. 이들이 보기에는 안식일을 안 지키는 예수님도 죄인이고, 맹인이었던 자는 아예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잘 못이나 불행에 대하여 그들의 부모를 탓하는 경우가 많다. 시편 51편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는 시를 쓴 가운데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말한다. 마치 자기 부모들이 몹쓸 짓을 하여 자기가 태어났고, 자기 어머니 때문에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의 본문을 살펴보면 번역상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악 중에” 혹은 “죄 중에”라고 할 때 사용되는 히브리어 비분리 전치사 “벳”()은 시간의 진행 과정을 묘사하는 의미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정점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대개의 영역본에서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악하였고, 내가 잉태할 때부터 죄가 있었습니다”(Surely I was sinful at birth, sinful from the time my mother conceived me. NIV) 혹은 “내가 출생할 때부터 죄가 있으며, 내 어머니가 나를 잉태한 순간부터 죄인이었습니다.”(I was guilty of sin from birth, a sinner the moment my mother conceived me. NET)라고 번역하고 있다. “가운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때” 혹은 “순간”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여 그의 모친의 행동과 자신와 죄인 됨의 연관성을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가 언제부터 죄인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는 이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 말하자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기의 생명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서 출생하게 되었느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잉태와 출생 때부터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잉태할 때도 죄가 있었고, 그가 출생할 때도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서 죄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칫하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아담의 연대성 안에서 계속 죄인을 양산하는 일을 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에서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말한다. 이제 “아담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게 만들어졌고, 선한 일을 하여, 결국 선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출생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임을 믿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의 부모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하나님께서 쓰신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어머니 뱃속에 내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때가 되어 그 생명이 싹을 트고 나와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게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우리 부모가 비난을 받거나 궁극적으로 책임 져야할 의무가 없다. 그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장하시고, 인도 하시고,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게 하시는 것이다.맹인이었던 자는 그가 눈을 뜨기까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은 일을 했다. 그가 창세 이후에 맹인으로 태어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9:32), 그는 이 세상에 그의 눈을 뜨게 해 줄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 같다. 어쩌면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까지 계속 자기는 죄인으로 알고 살아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는 말씀과 더불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다”(9:5)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의 마음 눈을 뜨게 한 것 같다. 그는 예수께서 그의 눈에 무엇을 발랐는지 알 리가 없었겠지만 그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가서 눈을 씻었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맹인으로 태어나 죄인 취급당하고,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출생관을 바로 잡아 주셔서, 그들을 얽매고 있는 모든 어두운 운명의 사슬을 다 풀어주셨다.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주시고, 소망을 심어주시고, “내가 맹인이었다”고 외치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 주셨다.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육신의 눈도 뜨게 하셨다. 예수님은 운명과 율법에 억눌려 죄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빛과 자유를 주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6-07
  • 학술/ 한복협 5월 월례회, 이 시대 젊은이를 향한 교회의 메시지
    본고는 지난 5월 10일 충무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5월 월례회 ‘헬조선을 외치며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어떠한 메시지를 줄 것인가?’에서 방선기 목사가 발제한 ‘이 시대 젊은이들을 향한 메시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지금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기성세대와 젊은이들과의 세대 차이는 이전 시대나 다른 사회에서의 세대 차이와는 다르다. 현재 기성세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보다 학력이 높고 부모보다 더 잘 살게 된 세대이다. 대부분이 자라날 때 고생을 했지만 부모들보다는 여러 면에서 나은 환경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정반대이다. 자랄 때는 별 고생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자신이 사회에 나가려고 하는데 부모세대보다 훨씬 못하다는 발견하게 된 것이다. 미국 같은 부자 나라에서도 역사적으로 자녀세대가 부모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았는데 최근 들어 반대현상이 일어나서 청년들이 당황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역전 현상이 단 한 세대만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경험하면서 절망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그리고 기성세대는 성인이 되어서 인터넷이나 SNS를 접했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SNS 속에서 태어나서 그 속에서 자란 세대이다. 이로 인한 세대 차이는 이전의 세대 차이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교회 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현재 기성세대는 믿지 않은 가정에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이 교회성장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믿는 가정에서 교회를 떠나거나 아예 믿음을 버리는 자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 역시 서구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인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 세대 만에 이런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의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현실이다.둘째로는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에 변화를 주었던 메시지를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교회를 찾는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교회 안에 있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청년 문화가 감상적이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젊은이들의 문화에 적응한다고 교회음악을 세속적인 음악을 수용했지만 그것이 젊은이들을 붙잡는데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그 변화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대처하는 방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자기들에게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급한 나머지 주님께 헌신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1) 하나님 말씀의 회복이다. 역사를 통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회복의 시작은 말씀의 회복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경을 기독교인을 위한 책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삶에서 멀어진 성경의 위상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의 성육신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들이 접하기 좋은 말씀이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당시에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모국어로 변역했다. 이런 작업은 지금도 지속되어야 한다. 성경을 지금 세대 사람들이 익숙한 말로 번역하고 그렇게 번역된 성경을 읽도록 해야 한다. 성경의 내용을 이 시대에 맞게 번역하는 것은 물론 성경책의 형태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변신을 할 필요가 있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종교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성경을 현실에 적응하는 인류 최고의 고전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많이 팔리고 많이 번역된 책인 것을 안다면 그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을 강조하는 시대에는 인문학 책 중의 책으로 성경을 소개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강요하기보다 말씀의 권위를 설득해서 성경에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성육신의 원리는 성경을 가르치는데도 나타나야 한다. 성경을 가르칠 때 핵심부분은 먼저 가르쳐야 하지만, 적용부분은 먼저 질문하도록 하고 그것에 답을 해준다. 성경에서 추상적인 진리를 가르치기보다는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으로 시작하고 질문하도록 유도한다. 또 질문에 대해 성경으로 대답할 때 흑백으로 가르칠 것도 있지만 스펙트럼으로 대답해주는 것이 유익하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바른 방법이며 동시에 다양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잘 맞는 방법이기도 하다. 성경읽기나 공부를 크리스쳔의 의무로 요구하기보다 재미(fun)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성경의 재미를 느끼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들이 관심이 있는 것을 공부하게 한다. 그리고 나서 성경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과 가까워져서 의무적으로 읽고 공부하게 될 것이다. (2) 일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의 회복이다.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업의 문제다. 실업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문제이지만 과도한 고등교육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 문제는 정부나 기업이 해결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책이 없다. 그러니 교회는 더더욱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세속의 정부나 기업이 할 수 없는 것을 공급할 수 있다. 바른 직업관과 직업을 택하는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는 말씀은 젊은이에게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다.세속적인 가치관은 돈이나 안정을 보장하는 직업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리게 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실패감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러서 맡긴다는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열정과 이웃의 필요가 만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해서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는 일이 좀 힘들고 귀찮으면 그런 일을 쉽게 포기한다. 일하는 지역이 외진 곳이면 가려고 하지 않는다. 소명의식이 회복되면 이런 일들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되고 그런 일에 대해서 의미를 찾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치 선교지에 가는 마음으로 그 일에 임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세계선교를 위한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것보다 그들 앞에 주어진 일을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3) 헌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희망을 갖기보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이전에 만들어 놓은 빚이란 담과 앞으로 만들어야 할 집이란 담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아예 하지 않고 또 결혼을 하고도 자녀들을 낳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사회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안타까운 것은 크리스쳔 젊은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삶을 대하는 자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비난이나 책망을 하기보다는 그들의 상황을 이해해주면서 결혼과 가정의 가치를 비롯해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믿음으로 살아내야 함을 가르치고 그 일에 헌신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지금까지 젊은이들에게 요구한 헌신은 주로 전도와 선교에만 적용되었다. 지금도 헌신을 요구하는 영역은 목회나 선교를 비롯한 특정한 사역에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런 헌신을 향한 도전을 수용할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신학교 지원자나 선교사 지원자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에게 요구하는 헌신은 세속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성경적인 가치관을 따르는 일상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 같다. 현 사회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느끼는 문제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면서, 세상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경건하게 살라고 권면하면서 술 담배를 금하도록 하거나 성적인 면에서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소극적인 방법일 뿐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는 오늘 세속의 풍조를 거스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통적으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평범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세속의 풍조를 거스르는 것으로 젊은이들이 믿음으로 헌신해야 할 영역이 되었다. 어찌 보면 선교사역에 헌신하는 것 이상으로 헌신이 필요한 영역이다. 믿음이 있는 젊은 크리스쳔들이 믿음으로 결혼하고 믿음으로 자녀를 낳는다면 그 어떤 다른 것보다도 일반 사회에 믿음의 힘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젊은이들이 세속과 다른 삶을 사는 일에 헌신하도록 도전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긴급한 사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6-0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8
    오순절애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는 새 술에 취했다고 자기들을 조롱하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이 성령세례를 통하여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받았음을 설명하고, 이들에게 “성령의 선물”(δωρε、 του˜α′γι’ου πνευ’ματοV)을 받으라고 말했다(행 2:38). 새언약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입으로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는데 그는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베드로는 분명히 성령세례와 성령의 선물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40절에는 “이 사악한 세대에 구원을 받아라(σω、θητε).”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말하는 “성령의 선물”은 “성령세례”와 구별되는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생을 포함한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결코 그들을 향하여 지금 이 상황에서 선지자가 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그런데 성경에는 “성령의 선물”과 유사한 말로 “(성령의) 은사”라는 말이 있다.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을 쓸 때 헬라어 “도레아”(δωρεα)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라는 말을 쓸 때는 “카리스마”(Χαρισμα)를 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카리스마” 앞에는 “성령”을 붙이지 않는다. 그냥 “은사”이다. 영역본에서는 “성령의”라는 말이 없이 “gifts”(선물들, 은사들)로 복수를 사용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은사라는 말을 쓸 때 많은 경우 앞에 성령을 붙여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다. 은사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성령의 선물”과 “성령세례”, 그리고 “(성령의)은사”라는 말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어서 많은 혼돈을 야기 시키고 있다. 또한 서양의 역본들도 헬라어의 “도레아”와 “카리스마”를 다같이 “gifts”로 번역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도 혼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은사일 경우 복수를 쓰는 것은 좀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물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는 분명 중생과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 이후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는 일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은 성령세례를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사” 곧 “카리스마”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특별한 사람에게 주시는 특별한 재능(talent)을 말한다.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특별한 재능을 주시는 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지식의 말씀을, 믿음을, 병 고치는 은사를, 기적 행함을, 예언을, 영들 분별함을, 방언을,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이것을 통하여 성도들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 가운데 특별히 방언이 문제이다. 방언은 은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인치는 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셨다. 선지자들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입“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들의 입에 성령으로 도장을 찍고, 여러 나라 말을 넣어 주시어 각각 다른 나라 말을 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통역이 없이도 소통이 가능하게 하셨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에서 행한 방언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말(혹은 발성)을 하고, 통역이 필요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모조방언“(Counterfeit Tongue) , 혹은 ”유사방언“(Pseudo-tongue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성령세레의 증거로서의 방언, 엄격하게 말하면 ”언어“와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분명 다른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방언으로 말한다고 했다(고전 14:18). 그리고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 14:39-30). 그러나 모든 것을 적절하게 하고 또 질서 있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몇 가지 지침을 주신다. 방언을 하려면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야 하고, 조용한 곳에서 해야 하며, 교회 안에서 하려고 할 때는 많은 사람이 악을 쓰며 한꺼번에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되며, 꼭 대중 앞에서 하기를 원할 경우 두 세 사람만 나와서 차례로 하되, 반드시 통역을 두라고 했다. 그러나 일부의 성도들은 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교회를 어지럽힌다. 방언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본 목적과 원리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전 14:12).우리는 오순절을 맞으며 성령의 선물, 성령세례, (성령의) 은사 등에 대해서 좀 더 정교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함을 살펴보았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할 선지자적 사명을 부여받은 선지자들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는 성령을 우리 뜻대로 부릴 수 없다. 우리가 오시라고 해서 오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가시라고 해서 가시는 분도 아니다. 성령은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은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다.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말씀이 머무는 곳에 성령이 머무시며,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따라서 성령이 일하게 하시려면 우리는 말씀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야 한다. 말씀이 충만한 곳에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겔 3장). 내 속에 말씀이 충만해야 성령이 내 안을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며, 나를 충만하게 하신 성령이 나를 새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에 말씀이 충만해야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일어나고 교회가 부흥한다. 사도 바울이 본의 아니게 에베소를 떠나며 에베소 장로들에게 주시는 고별사는 항상 우리가 새겨야 할 말씀이다. “이제 나는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니, 그 말씀이 너희를 굳게 세우고 거룩함을 입은 모든 이들 가운데 너희에게 유업을 줄 것이다.”(행 20:32). 그는 그의 양떼들을 성령께 부탁한다고 말하지 않고, 말씀께 부탁한다고 말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5-2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7
    예수님 부활 후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하자, 유대인들이 그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희롱하였다. 이때에 베드로는 긴 연설을 통하여 자기들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살리시고, 그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자기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인증하는 성령의 도장을 찍으신 결과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자신들을 변증한다. 자신들의 과오를 깨달은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향하여 “그러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하며, 그들이 살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령세례룰 받은 베드로는 이들에게 자기들처럼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베드로가 받은 “성령세례”와 베드로가 말한 “성령의 선물”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선물, 성령세례, 나아가서 성령의 선물과 같이 쓰여 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확실한 상이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일을 하셨다. 창 1:2에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감돌고 계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일을 기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일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결국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죄와 죽음 안에 가두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아담을 세워 아담의 죄 값을 그의 죽음으로 대신 치르게 하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갇혀 있는 만물을 해방시키고 구출하는 하신 것이다. 따라서 새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세상 역사에 있어서 옛 아담과 그의 나라의 종언(終焉)과 더불어 새 아담과 그의 나라의 개시(開始)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백성을 모으는 시작이다. 새 언약의 발효점이다. 나라는 백성이다. 백성이 새로워져야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새로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불 수 없다”(요한 3:3). 또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선언하셨다. 여기서 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물은 씻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물로 씻어주시고(요한 13), 15:3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벧전 1:23)고 가르치신다. 이들의 말씀에 따르면 물은 말씀이고, 말씀이 거듭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 곧 말씀과 성령이 하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요한 3:8). 성령을 통한 거듭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령이 언제, 어디로부터 나에게 임하는 지 알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중생의 역사가 언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얻을 때도 언제 임신이 되었으며, 언제 낳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어머니가 우리가 낳았던 생일을 알려주어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중생을 성령세례와 동일시 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가 중생하고,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주관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론이라고 할 때는 전통적으로 구원론을 의미한다. 성령이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 놓은 구원을 우리 각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령은 우리 구원의 모든 과정을 주관한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그의 백성으로 인증하는 성령의 도장을 찍으신다. 물세례이다. 물세례를 통하여 중생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가 된다(롬 6:3).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불가분리의 신비롭게 밀접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며, 중생과 세례에 더불어 그리스도와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우리의 신앙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복음 사업을 처음 시작하실 때, 물로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때에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가리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메사야로서의 취임식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을 시작하며, 물세례를 받으셨으며,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예식(visible ceremony)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새 아담이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의 일꾼, 곧 선지자로 인치시는 인증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그의 백성들에게 대언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손을 예레미야(렘 1:9)나 이사야(사 6:7)의 입에 대어 그를 선지자로 세우고 인치시고, 그 선지자를 “여호와의 입”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점은 그의 공생애를 선지자로서 살으셨던 예수께서 부활 후 그의 제자들에게 선지자적 대사명을 주시고 인류 구원 사역을 맡기실 때도 같은 절차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고 그의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을 살펴보면 세례와 선지자적 직분을 연관시키신다(마 28:16-20; 행 1:5, 8; 2:3). 땅 끝까지 이르러 세상 끝 날까지 그의 말씀을 가르치려면 사도들을 이어 대대로 선지자를 세워야 한다. 따라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구원의 복음이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이 일을 위하여 선지자들이 계속 세워져야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오순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같이 갈라진 혀들이 제자들 위에 임하여 그들의 혀를 움직여 제자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각 나라 언어로 말을 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중생한 신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 자들이요(요 15:3), 예수님의 친구들이다(요 15:15). 이들에게 더 이상 중생이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중생과는 다르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입, 곧 새 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는 위임식이다. 이 성령세례는 바로 물세례와 병행되는 것이다.이상을 정리해보면 물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 세례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새 아담의 나라, 새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새언약의 선지자가 되어 구약성경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 자는 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다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 연지골
    2019-05-10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6
    2019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다가 왔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부활이 믿지 못하는 사람은 기독교인 아니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쇠사를 묶여 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이야 말로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이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이 주는 의미는 항상 새롭게 음미하고, 더욱 견고하게 믿고, 항상 부활의 정신과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예수님의 부활은 신화나 사람이 꾸며낸 허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훈련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과학적이고 객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라고 말하며,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이 죽은 그의 스승을 보고 싶어하는 동경심과 뜨거운 열정에서 우러나온 환상으로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고, 예수님 본인이 생전에 말했고, 그의 사후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이미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다. 예수님은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었다. 군병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에 피가 쏟아진 것이 아니라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요 20:34). 물이 쏟아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미 완전히 목숨이 끊어졌고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묻혔다.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훔쳐갈까 염려하여 로마 사람들은 그의 무덤의 문을 인봉하고, 경비병이 그것을 지키게 하였다. 예수님은 잠깐 기절하신 것이 아니다. 식물인간이 된 것도 아니고 뇌사 상태에 빠진 것도 아니다. 분명 숨이 끊기고 심장이 멈췄다. 그리고 묻혔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직접 자신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함께 말하고, 먹고 마시는 가운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인했다. 예수님은 또한 일시에 오백여명이 보는 가운데도 나타나셨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던 당시에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이 꾸면 낸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증거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우리 기독교의 대 전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태초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을(creation out of nothing, creatio ex nihilo) 다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다. 권능의 하나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처녀가 어린 아이를 잉태할 수도 있을 것이요,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홍해 바다를 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신이다. 우리는 이러한 천지창조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다. 사람은 다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의 죄 때문이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롬 6:23).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 반역한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아담과 함께 죽음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담을 대신한 새 아담을 세워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고 모든 믿는 자를 새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묶어 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아담을 오실 분의 모형이라고 했다(롬 5:14).하나님께서 새아담을 살리셨다. 죽기까지 순종한 새아담의 피를 아담의 죄 값으로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아담과 그의 언약적 연대성 가운데 있는 피조물들을 죄의 사슬로 묶어 둘 필요도 없었고, 묶어둘 이유도 없었다. 그들을 붙잡고 있는 죄와 죽음의 세력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옳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을 살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아담을 대신한 새하늘과 새땅의 언약적 우두머리, 곧 새로운 왕이 되셨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피조물의 왕이 되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통치하였듯이, 이제는 예수께서 새로운 왕이 되어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이 된 것이다. 베드로는 그러한 의미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함으로 이제 아담의 백성에서 새아담의 백성이 된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다.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탄의 무기인 죽음을 파괴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더 이상 예수님과 예수님의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의 권세와 능력을 부릴 수 없게 죽음이라는 무기를 회수하고 무장해제시켰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의 육신을 벗어나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이제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한다. 우리 인생은 죽음이 결코 그 종착역이 아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즐기려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일생을 소비하고 동물이나 다름없는 삶을 연장하기 위하여 발버둥 친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것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철학이다. 그래서 세상을 마치 바람에 나는 겨처럼 시류를 따라 산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며 살고, 영원한 일을 계획하고 산다.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고, 비전이 있다. 죽음으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이 하루가 귀중하고,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뜻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신자들은 부활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은 결코 악이 승리하는 세상이 아니다. 마치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는 세상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한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만일에 예수께서 나뭇가지를 든 저 악인들의 함성에 묻혀 십자가를 지고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부활하지 못했다면 이 세상은 진정 악이 승리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선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가 이 세상을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주셨다(히 9:27). 이 무질서한 세상에 도덕과 윤리를 세우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억울한 꼴을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바르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기에 세상의 불의와 부정 앞에 비굴하게 타협하며, 눈치 보고 숨죽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천명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이다.우리 한국의 신자들은 부활 신앙은 있어도 부활 정신으로 불의한 세상을 도전하는 부활 정신은 흐릿한 것 같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신앙과 부활정신으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4-26
  • 학술/ 고난과 부활절의 의미 되새기기
    본고는 지난 4월 12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진행한 4월 월례회에서 한국정교회 임종훈 신부가 발제한 ‘정교회의 고난절(대 사순절)과 부활절 의미 되새기기’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 편집자 주 예배를 통해 찾게 되는 대 사순절의 의미1) 뜨리오디온 기간‘뜨리오디온’은 두 가지 사항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는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대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의 3주간을 포함하면서 대 사순절 기간과 성 대주간까지도 포함하는, 부활절을 준비하는 오랜 기간을 통틀어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책의 이름인 『뜨리오디온』입니다. 이 책은 평상시에는 매일 예배에서 아홉 개의 오디를 읽어나가지만 이 기간에는 세 개의 오디를 읽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이 책은 이 기간에만 읽혀지게 됩니다.세리와 바리사이파 주일: 이 날 루가복음 18장 10절부터 14절까지에 있는 세리와 바리사이파 사람에 대한 복음말씀이 교회에서 봉독됩니다. 부활절을 향하여 신자들은 이제 영적인 순례길을 떠납니다. 이 영적 순례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치 우리가 익숙한 항구를 떠나 새로운 종착지를 찾아 떠나는 항해를 시작할 때에, 많은 준비물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 순례에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말로는 겸손이지만 그리스말로는 ‘따삐노시’이고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탕자 주일: 탕자에 대한 비유말씀인 루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가 봉독됩니다. 우리는 다시 한 가지 더 영적인 준비물을 챙기게 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가르치시고 명하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함으로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죄에 대한 절망감과 두려움에서 구해내고 덕과 선행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적들이 펼치는 간계를 물리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입니다.금육 주일(최후의 심판 주일): 이제 우리는 점점 더 대 사순절의 치열한 영적 투쟁의 기간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대 사순절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금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날부터 신자들은 육류로 조리된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 사순절의 엄격한 금식이 시작되기 전이므로 이 날부터 일 주일간은 우유로 만든 식품은 먹을 수 있는 제한적인 금식을 행하는 유식주간(우유는 먹는 주간)이 됩니다.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태오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까지 최후의 심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심판에서 무슨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게 됩니까? 복음말씀에서 주신 답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나 인류와 같은 추상적인 집합체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 짓고 악에 빠진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격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용서 주일: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태오복음 6장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죄짓는 노예상태에서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금식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 금식은 위선이나 과시가 아닌 오직 하느님께만 은밀히 알려지는 금식으로서, 우리의 타락한 욕구와 본성에 무릎 꿇지 않고 이겨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승리하여 이 세상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분열, 갈등, 증오를 없애고 이겨내어 일치, 연대, 사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즉 인간관계가 훼손된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맡겨 적과 나 사이에 하느님의 용서를 가져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적과 내가 서로를 용서할 때만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2) 대 사순절 기간대 사순절 기간의 세 번째 주일인 십자가 경배 주일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우리 자신의 육체적 욕구와 정념에 맞서 싸워나가도록 하고, 십자가 경배 주일부터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에 집중하도록 신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전례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사순절 첫 번째 주일(정교 주일): 첫 번째 주일을 정교 주일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이 날 교회는 제7차 세계공의회(AD 787)에서 최종적으로 선언한 이콘반대주의자들에 대한 승리와 이콘(성화상) 공경의 회복을 기념하며, 정교 신앙의 승리를 외치기 때문입니다. 공의회 시노디콘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 예언자들이 본 대로,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교회가 이어받은 대로, 교부들이 가르친 교리대로, 온 세상의 교회가 합의한 대로, 은총으로 밝혀진 대로, 진리가 확인한 대로, 거짓이 쫓겨난 대로, 지혜가 떳떳하게 전파한 대로, 그리스도가 치하한 대로,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생각하며, 말하며, 전파한다. 그의 성인들을 말로, 저서로, 명상으로, 성제로, 성당에서 성화로 공경한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흠숭하며 경배한다. 그의 성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사자들로서 연관적으로 공경한다. 이것이 사도들의 믿음이다. 이것이 교부들의 믿음이다. 이것이 신자들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온 세상에 굳건하게 섰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주일): 두 번째 주일에는 14세기에 교회가 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AD 1359)의 적들을 정죄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공인한 것을 정교 신앙의 두 번째 승리로 기념합니다. 성인은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모든 영예를 다 버리고 아토스 성산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은둔의 삶을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과 교제하며 살기를 원했고 엄격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여 자신의 감각을 완전히 억제하고 자신의 영을 하느님께 끌어 올리며, 모든 순간을 끊임없는 기도와 거룩한 묵상에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도움으로 악마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강물처럼 많은 눈물과 밤새워 올린 기도로 자신의 영을 정화하여 성령의 은사를 담은 그릇이 되었습니다.하지만 이 두 번의 기념 주일은 대 사순절의 흐름과는 다소 유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대 사순절은 예비자들이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그들에게 이 기간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처럼 아직은 예언되고 약속되었을 뿐인 새로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아직은 만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순절 세 번째주일(십자가 경배 주일): 이 날은 대 사순절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고귀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를 경배하는 축일로 지냅니다. 사십일 기간 동안 우리는 참담한 통회와 힘든 금식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귀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기를 되찾도록 해주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게 하여 우리를 격려합니다. 힘든 여정의 중간에 교회의 교부들께서는 생명의 십자가를 세워놓고 우리를 쉬게 하고 새로운 활력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사순절 네 번째 주일(성 요한 클리막스 주일): 이제 대 사순절의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더 이상 참회와 노력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취된 사건들에 집중하게 됩니다.요한 끌리막스 성인(†AD 603)은 ‘사다리’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끌리막스』라는 정교회 최고의 영성 서적을 쓰신 분이고 영적인 상승의 단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이집트의 성 마리아 주일):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르코복음 10장 32절부터 45절까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사십일 기간 동안 나 자신을 영적으로 정화하던 모습에서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체험에 실제로 참여하게 되도록 초점을 옮깁니다.창녀였던 이집트의 성 마리아(†AD 378)의 삶을 기념하며 죄에 깊이 물든 사람도 회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성지 주일): 이 날 이전의 6일간은 성지 주간이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 동안의 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의 친구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 베다니아와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함께 하도록 합니다.3) 성 대 주간성 대 월요일: 이 날은 신랑의식에서 마태오복음 21장 18절부터 22절까지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영적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인간들을 경계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그 잎으로 최초의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가렸을 뿐, 그 죄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성령의 열매와는 거리가 먼 영혼을 비유합니다. 주님께서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셨습니다.성 대 화요일: 이 날의 신랑의식은 마태오복음 25장 1절부터 13절까지 열 처녀의 비유를 봉독함으로써 언제 올지 모르는 우리의 죽음과 주님의 재림을 늘 깨어있는 가운데 준비해야 함을 배웁니다.성 대 수요일: 이 날은 마태오복음 26장 6절부터 16절까지 창녀였던 여인이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말씀 속에서 회개의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성 대 목요일: 이 날의 예배는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 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입니다. 마태오복음 26장 2절부터 27장 2절까지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최후의 만찬에서 신비의 감사의 성사를 제정하시고, 올리브산에서 기도하시고, 유다에게 배반 당하셨습니다. 이 날 이 네 가지 사건을 기념하며 성찬예배를 드립니다.성 대 금요일: 이 날은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고난 예식에서 12개로 나뉜 복음 본문이 봉독되고, 대시과에서도 복음이 봉독되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뿐만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되면서 구원 받은 오른편 강도를 기억합니다.성 대 토요일: 이 날은 주님의 장례 예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무덤에 모셔져 장사 지내고, 주님은 캄캄한 지하세계에 내려가 주님 이전에 안식한 모든 영혼을 해방하십니다.(베드로 전서 3:18-19) 부활절의 의미“그리스도의 부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믿음과 거룩한 예배와 기풍과 문화의 핵심입니다. 모든 차원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적셔지고 양육되는 정교 신자들의 삶은, 매일 매일이 부활절(빠스카)입니다. 이 부활 경험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는 쇄신의 경험이고, 만물의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입니다.특별히, ‘지극히 거룩한 날’인 주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사의 성찬예배에서, 정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을, 하느님 통치의 복된 현실들을 미리 맛보고 경험하는 것에 참여함을 장엄하게 경축합니다. 신성한 감사의 성찬예배에 빠스카와 기쁨의 의미가 풍부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감사의 상찬예배는 언제나 기쁨과 환희의 분위기 안에서 거행되고, 그리하여 모든 존재의 최종적인 쇄신, 충만한 기쁨, 생명의 충만, 장차 흘러넘칠 사랑과 지식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종적 종말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역동적 여정에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세상이 얻게 되는 구원의 종말론적 특징을 현재와 결합시켜주는 밀접하고 지울 수 없는 관계와 관련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지니는 이 종말론적 특징은, 교회의 삶에 하나의 독특한 역동성을 새겨넣어주고,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훌륭한 증언자가 되도록 자극합니다. 정교 신자는 사회적인 악에 맞서서 투쟁해야할 분명하고도 고유한 이유와 강력한 동기를 가집니다. 그는 최종적인 목적들과 매우 강고해 보이는 역사적 현실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대조와 긴장을 아주 강렬하게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로 나타난 사랑(루가 10:30-37 참조)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이웃이라 여기고, 가서 기꺼이 그를 도와주라.’(펠루시오스의 이시도로스)고 말씀하신 교부의 가르침처럼, 정교회는 사랑의 디아코니아, 사랑의 봉사, 불안정한 환경 속에 있는 형제를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정교회의 감사의 성찬예배 정신을 확장하고 표현하는 것이며, 현재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의 하느님 나라에서도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핵심임을 굳게 믿습니다.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또한 정교회의 전례적 삶이 ‘함께 누리는 구원’ 경험, ‘함께 누리는 자유’와 ‘함께 누리는 왕국’의 은총 또한, ‘함께 누리는 부활’에 대한 기다림으로 떨리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중시되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생명의 공동체’이고, ‘나눔과 더불어 존재함’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희생적이고 영광스러운 사랑과 일치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내려가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부활 이콘, 이 빛나는 이콘의 놀라운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은 땅 속 깊은 곳에 내려가셔서, 지옥문들을 깨뜨리시고, 단지 승리의 깃발만 드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를, 또한 그들 안에서 온 인류와 온 피조세계를 붙잡아 올리시고, 손수 보호하시고 강하게 하시면서, 영광스럽고도 빛나는 모습으로, 무덤에서 나오십니다. ‘축제 중의 축제’, 죽음의 권세를 멸하는 전능하신 사랑인 부활의 선포는 사회적 불의, 인간성의 변질과 타락이 맹위를 떨치는 세상, 수천 수만의 피난민과 무죄한 어린이들에게 마치 골고타와 같은 이 세상 안에서, 오늘도 울려 퍼집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부활은 선포합니다. 부활은 시련, 고통, 십자가, 골고타가 마지막 단어가 아님을 선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은 그들의 비극적 희생자들에게서 결코 승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정교회에서 십자가는 신앙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삶이 향하고 있는 최종적 궁극적 현실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완성인 부활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이야말로 십자가가 가진 참된 의미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 정교신자들은 외칩니다. ‘십자가를 통해 온 세상에 기쁨이 왔다’고 말입니다. 정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예식이 슬프기만 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이 뒤섞여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수난은 ‘우리의 고통을 없애는’ 부활을 통해 접근되고 경험됩니다. 정교신앙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이 변할 수 없는 결합은, 일반적으로 역사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시련에는 무관심한 모든 신비주의 혹은 자기만족적 경건주의와 결코 화해할 수 없습니다.
    • 해설/기획
    • 학술
    2019-04-2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15
    요한복음 8장에 소개되는 사건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이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유대인들이 죄를 지은 한 여인을 미끼로 데려다 놓고, 이 여인과 예수님을 동시에 죽이려고 손에 돌맹이를 들고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죽음이 온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숨막히는 장면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저라.”(7)는 예수님의 이 한 마디의 말씀이 이 어둠을 뚫고 모든 사람들의 죽은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빛의 역할을 한다. 설교자들은 요한복음 8장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고 설교를 할 때면 대개의 경우 이 사건을 배경으로 이 여자를 중심하여 설교를 많이 한다. 12-59절에 이르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벌이고 있는 논쟁점을 다루는 것은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본문 자체도 길고, 이들이 벌이고 있는 논쟁점도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사건 자체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설교부분 (discourse)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한 여인을 살리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둠을 비추는 “생명의 빛”이시오, 죄의 종노릇을 하는 인생들을 구원해주시는 “해방자”이시오, 죽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한다.예수께서는 여기에 운집해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결코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12)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려고 돌을 들고 서 있는 이 장면을 “어두움”으로 표현하신다. 어둠이 덮여 있는 세상으로 보시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의 빛” 혹은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죄를 짓고 끌려와 죽음을 기다리는 여인, 자신들도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죄인임을 알지 못한 채, 온통 독선에 빠진 인간들이 득세한 세상, 온통 죽음을 부르는 세력들이 가득한 이 세상을, 예수님은 어둠이요, 밤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그가 주신 떡 조각을 받아먹고 그의 선생을 배반하여 팔려고 나갔을 때도 성경은 밤, 곧 어둠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죽음에 갇혀 있고, 어둠에 묻혀 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다(12).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서론에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 그 빛이 어둠에 비쳤으나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요한 1:4-5). 바로 이 말씀대로 이 세상은 어둠이다. 모든 사람들이 좌와 죽음에 갇혀 있고, 어둠에 묻혀 있다. 어둠 속에 있지만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두움이다. 이러한 자에게는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서 자신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인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그의 마비된 양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베드로도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뵈올 때 비로소 그가 입술이 부정하여 선지자가 될 수 없는 자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고,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비추시는 생명의 빛이시다.예수께서는 이어서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보실 때 이 유대인들은 다 자유롭지 못한 자들, 곧 죄의 종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죄 가운데 죽을 자들이었다 24).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여자는 육신에 매인 자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얽매인 자들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율법의 이름으로 처형하고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죄를 짓는 자는 모두 죄의 종이라고 선언하신다(34). 왜 죄 짓는 자를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세상에 죄를 짓고 싶어서 죄를 짓는 사람은 없다. 사람 속에 있는 죄가 사람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충동질을 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서 죄를 짓도록 조종하는 자는 바로 마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너희 아비의 욕망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안에 서 있지 않았으니 이는 진리가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기 본성에서 말하는 것인데,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44)라고 가르치신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자가 마귀이며, 마귀는 본성적으로 거짓말쟁이며, 살인자라는 것이다. 아담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담을 죄짓게 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가 바로 마귀였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마귀에게서 낳은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고 싶지 않고,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마귀가 조종하는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고, 죽을 수 밖애 없으므로 우리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자식”인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를 한탄하며,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주겠는가?”(롬 7:24)하고 부르짖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를 이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킬 분이 위로부터 오셨다(23).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마 28:16).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세력하에 종노릇을 하는 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감히 마귀가 우리 안에 들어와 왕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6).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내 왕이 되시고, 내 안에 앉아 거하시면 마귀가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는 문지기가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다.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며, 바로 말씀이 계시는 곳에 성령이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안에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때에 성령께서 내 마음을 지켜주시고, 죄의 세력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진리를 알아야 모든 얽매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다음으로 37-59절의 말씀은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죽음에 대한 논쟁이다. 사람이 죄의 종이 되면 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기다라고 있다. 죄인의 종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51).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크게 반발한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다 죽었는데 예수께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니 예수, 당신은 아브라함보다 위대한가? 도대체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다. 예수께서는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날 보기를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5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분명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며,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것이다(58). 아브라함이 그의 날 보기를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은 아브라함도 죽음을 넘어 살아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말이 맞다. 세상 사람들은 다 죽을 것이다.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죄와 죽음의 굴레를 쓰고 살다가 결국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아담의 죄 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그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에 매여 죄를 짓고 끌려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한 여인을 말씀으로 살리시며, 그를 죽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빛이시며, 참 자유를 주시는 해방자이시며,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설교하신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4-1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4
    하나님께서 오직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역사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삼자 모세의 형과 여동생이 모세를 비난하며 하는 말이다. 이들의 비난은 단순한 가족간의 문제가 이상의 깊은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220여일이 지난 후 비로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백성들이 만나만 먹으니 기력이 약해졌다고 울면서, 이집트에서 값없이 먹던 각종 생선과 채소를 생각하고, 고기를 달라고 울었다. 그들은 400년 동안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된 감격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이들에게는 사라졌다. 이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도 아니고 다만 보양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다. 과거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며 입맛을 다시고 울며 있는 것이다. 이들은 노예의 근성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었지만 그들의 정신상태는 여전히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들이 이대로 가나안에 들어간다면 젖과 꿀에 파묻히고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다시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적나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일후 바로 가나안 정탐 사건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는 철저한 자유민으로서의 정신 교육과 신앙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민 13-14). 그러나 모세는 더 이상 이들을 혼자 지도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지도자로서의 사임을 목숨을 걸고 요청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70인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그의 영을 모세에게도 주셔서 선지자로 세워 모세를 돕도록 하셨다. 그리고 모든 그의 백성들이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모세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민 11:24-30).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며, 해석하고, 가르치며 훈련시키는 자이다. 이스라엘이 60만이며, 이들에게는 이미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이십부장, 그리고 십부장의 조직이 있기 때문에 70명의 천부장을 선지자로 세우면 70만명은 아주 일사분란하게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광야훈련을 위한 조직이 정비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아론과 미리암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들도 선지자적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지자로서 모세를 책망한 것이다. 영적 위계질서가 붕궤되는 위기를 만난 것이다. 모세는 황당했겠지만 그는 지면의 모든 어떤 사람보다 더 온유하였다고 했다. 이 말을 거꾸로 이해하면 이들이야 말로 지면에 어떤 사람들보다 더 교만한 사람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모세는 이들의 망동을 잘 참았고,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신다.하나님께서는 아론과 미리암을 회막으로 불러 그들이 모세와 어떻게 다른 가를 설명해주셨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모세 이외의 선지자의 존재를 인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본론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들에게 그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주의 말씀을 주신다. 그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만일에 너희 가운데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으면...”이라는 전제로 말씀하신다. 마치 이스라엘 가운데 선지자가 스스로 나타날 수 있음을 가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자칭 선지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여호와께서 세우셔서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선지자는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다. 이 말은 민 11:29의 모세의 말과 맥이 통하는 말씀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에게 환상으로 나를 알리기도 하고, 내가 꿈으로 그에게 말하기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시의 수단으로 환상, 곧 비전(vision)과 꿈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계시와 이 선지자에게 주신 환상과 꿈을 비교하시며 모세에게 주신 계시는 “명백하다” “은밀하다”는 어휘를 쓰시는 것을 보면, 선지자들의 환상이나 꿈이라는 것이 명백하지 못하고 모호하여 그 깊은 뜻을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은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히다”()라는 말로 “수수께끼 같은”(riddel) 혹은 “모호하다”(ambigious)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환상과 꿈의 계시로서의한계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다르다는 것이다. 첫째로 모세는 그 성품이 온유할 뿐만 아니라 충성스럽다는 것이다(민 12:3,7). 모세의 충성심은 아론과 미리암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대적하며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온 집에” 충성된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모든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충성스럽다는 말은 “신실하다”(faithful), 혹은 “믿을만하다”(trustworthy)는 의미이다. 모세를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내 종 모세”라고 칭하시는 데, 이는 성경에서 아브라함, 갈렙(민 14:24), 이사야 (사 42-53) 등 극히 제한된, 특별한 자에게 붙여진 영광스러운 명칭이다. 따라서 본성적으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아론과 미리암과는 근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얼마나 인격적이고 서로 깊은 마음 속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인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전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다고 대답하셨다(출 33:20). 그러나 출 33:11에는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했다. 본문에서는 이 모세를 “여호와의 형상을 보는 자”라고 말씀하신다(민 12:8). 현재형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형상을 봤다가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 34:10에서는 여호와께서 열굴을 마주하여 그를 아셨다고 했다. 인간들 사이에 가장 가까운 관계를 표현하는 어휘 “안다”(야다, )를 쓰고 있다. 모세와 하나님 사이가 부부 이상의 친밀성이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씀하신다고 하신다. 셋째는 하나님과 모세와의 관계가 이처럼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은밀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히다”()라는 말은 “수수께끼”(riddle)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여 마치 구름 속을 헤매며 수수께끼를 풀 듯이 의문과 논란의 여지를 남기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따라서 같은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과 같은 사람들과 그 근본이 다르다. 이들은 모세가 대언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전하고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너희가 왜 내 종 모세 비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며 이들의 방자함을 책망하시고, 결국은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발하게 하여 진 밖에 가두고 그가 낫기까지 온 회중이 가나안으로의 진군을 멈쳤다. 하나님께서 엄벌을 하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동역자로 70명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똑 같은 성령을 주셔서 예언하는 선지자로 세우셔서, 과거도 잊고, 미래의 소망도 버린 채 오로지 고기가 먹고 싶어서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추억하고 흠모하고 울고 있는 이 백성들의 정신 상태를 고치려고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와 같을 수는 없다. 이들이 모세를 비난하는 것은 자기들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 앞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보고, 꿈을 구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하지 못하여,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경론에 대한 해답을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택하여 함께 생활하며,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 그들을 새 언약의 선지자로 세우시며 그가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성령이 사도들에게만 내리신 것이 아니다. 사도들과 함께 있었던 다른 제자들도 있었다. 이들도 사도들과 같이 예언하며선지자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제자들은 다 선지자이다. 그렇다고 마치 아론과 미리암이 같은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모세와는 엄격히 구별이 되듯이,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다 사도와 같을 수는 없다. 사도들이 전하는고 남긴 말씀만이 성경아고, 정경이 되어야 할 이유이다. 물론 사도가 아닌 사람도 성경 저자가 있지만 그들도 예수님 생시에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 입과 입을 마주했으며, 예수님의 형상을 본 특별한 자들이다.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스라엘의 70명의 장로들과 같은 선지자적 직분과 사명을 가진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환상이나 꿈으로 보여주신 계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하지도 않고 은밀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받은 계시는 성경을 통한 간접적인 계시로서 분명히 사도들이 받은 말씀과는 엄격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세나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해석해주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면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입과 입을 대면한 적도 없고,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그의 음성을 들어본 적도 없다. 이러한 자들이 사도들의 권위를 대항하며, 그들이 본 환상과 꿈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고 들은 것을 성경적 계시와 동일시하고, 자신을 사도들과 동등되게 높이는 것은 무지하고 교만한 짓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진노하시고 나병으로 치셨다. 미리암의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에서 죽어 나온 자 같이 되었다고 했다(민 12:12). 비록 모세의 동생이라 할지라고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다스리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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