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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 고 / 김남희(수원기독호스피스 9기 미용6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봉사의 현장에서 감사의 삶이 어언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016년 12월 21일 내 사랑하는 벗, 하늘 시민 이융재 사모의 천국 환송예식을 눈물로 마치고 돌아왔다. 새벽 2시에 잠이 깨어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흔들어 내 머리 속에서 대화의 장이 벌어졌다. 잠은 멀리멀리 달아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내 가슴속 눈 속의 앨범에 한 장의 그림과 같이 또 넣어 두었다. 사랑하는 벗 나의 친구 이융재 사모의 이야기다.너무 반듯하고, 똑똑하고, 재치 있고, 야무지고, 자신만만하고, 무엇이든지 완벽하여야 하고, 검소하고, 힘든 일이라면 자기가 먼저 하여야 하고, 조금은 촌스럽고, 조금은 똑똑함이 샘도 났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추억 속의 앨범이 되었다.2016년 11월 7일 월요일 센터에서 만나 다른 때와 같이 수다를 떨며, 깔깔대며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융재는 밥을 먹지 않았다. 소화가 되지 않아 밥도 못 먹고, 죽도 소화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꼭 내가 다니는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순순히 따라나섰다. 유** 내과의원이 보통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용하다고 이름이 났다. 기다리는 동안 혈압도 재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 우린 만나기만 하면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얼마를 기다렸나 차례가 되어 들어갔다. 갈비뼈 옆이 아프다고 하니 초음파를 찍자고 한다. 약 1시간 후 판독 결과 당장 CT를 찍어보자고 했고, 2일 만에 담도 담낭암 말기로 림프샘까지 퍼졌다며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야단도 맞았다. 그리고 곧바로 성빈센트병원으로 가, 며칠 만에 가족들의 동의로 1차 항암을 하기로 했다. 딸을 천국으로 보낸 나는 항암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터라 단단히 무장을 하여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항암 다음 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더 맞아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는 조금 약하게 또 한 번 싸워야 했다. “이제는 내 인생의 항암은 끝이야, 케모포트(중심정맥관)도 뚫었으니, 나 호스피스로 갈래.” 사실 우리는 지난 15년이란 세월을 호스피스밖에 몰랐다. 어깨 너머 들은 서당개 풍월같이, 자기 병이 어느 정점에 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손쓸 겨를도 없이 그 나쁜 놈이 도적같이 쳐들어와 자리를 잡아 쫓아낼 방법도 없이 그만 지고 말았다.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또 이렇게 보내야 하나, 융재만 생각하면 눈물이 끝도 없이 나와 울고 또 울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 충격 속에 12월은 악몽! 꿈이라면 깨기라도 하지.호스피스병원으로 오기 전 나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자기가 아끼던 수품을 주면서 받으라고 했다. “이걸 나보고 받으라고,” 나는 울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빨리 나아서 주면 그때 받을게.” 하면서 둘이 펑펑 울었다. “권사님, 그만 울어. 나는 괜찮아, 만일 내가 치매라서 권사님도 몰라보면 어떻게 해, 또 다른 병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되잖아. 암은 로또복권이야. 준비할 시간이 있잖아. 내 나이 72살이 되었는데 살 만큼 살았어. 미련도 후회도 없어. 내가 먼저 천국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차피 누구나 가는 길 그 분이 부르시면 어쩔 수 없잖아.” 하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얄미운 사람, 정말 미워. 호스피스병원으로 오기까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자기가 애착을 가지고 봉사하던 이 곳, 호스피스병원으로 결정하고 나니 조금은 편해 보였다. 며칠을 지나 병동에 갇혀있으니 미칠 것 같은 모양이다. 월요일에 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최인례 기사, 미자, 융재, 그리고 남희 우리 넷은 의왕호수로 향했다. 융재는 나보고 무슨 말이든지 수다를 떨라고 했다. 자기는 말할 기운이 없으니 무슨 말이든 들려 달라고 했다. 호수에 도착, 물가 평상에 걸터앉아 늘어진 소나무 사이로 햇볕을 쬐며 옛날 노래도 부르고, 찬송도 불렀다. 또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통성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 사모님을 데려가시면 하나님 손해잖아요. 아직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살려주세요.”라며 엉엉 울었다. 그 후 두 번째 소풍은 광교산, 그리고 바울기도원 낙엽 냄새를 차창 문을 열어 놓고 흠뻑 마셨다.세 번째 소풍은 12월 15일 목요일. 내가 침대 옆 손을 잡으니 “권사님 내 머리 잘라줘” “응 알았어.” “ 짧게 잘라줘.” “아니 내 마음대로 자를게.” “응 알아서 마음대로 해. 미용사 마음대로니까.”이것이 마지막 미용이 되었다. 목욕 후 오후 시간 소풍을 가자고 나를 졸랐다. 다시 원장 선생님 허락 후 최인례 기사와 보디가드 유덕준 권사님, 융재 그리고 나, 우리는 왕송호수로, 이것이 마지막 소풍이 될 줄이야.12월 19일 아침에 가보니 너무 힘들어 보였다. 하루 종일 둘째 아들과 지켜 보았다. 악몽 같은 하루였다. 그날 오후 6시 48분. 인생 고작 70평생에 희로애락을 다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는 순종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수원샘내교회 최건차 목사님의 사모), 이융재여!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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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3
  • 총회재판국 판결의 오류 시리즈 -23
    행정절차 중지는 상회의무 포기하고 하회 구박총회는 정치부, 노회는 임사부 호칭 100년전 결정 (승전) “⑥상기 5항을 시행하지 않을 시, 평○노회의 천서 및 모든 행정절차를 중지한다”고 하였는데, 총대천서 제한에 대해서는 이미 본란에서 자세히 논급한 바 있어 그냥 넘기거니와 “모든 행정절차를 중지한다”란 도대체 무슨 뜻이겠는가?장로회정치는 치리권이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 등 치리회에 있고,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의 구성요원은 권한이 같은 목사와 권한이 같은 치리장로로 구성하게 되니, 결국 장로회정치란 목사와 장로의 회의에 의한 통치체제라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통치권 즉 치리권은 행정권과 재판하여 시벌하는 권징권을 가리킴이니, 세상나라에서는 통치권이 입법, 사법, 행정 등 3권이 분립하여 상호견제를 이루게 하는 정치제제 즉 3권분립 체제이지만, 교회 치리권(즉 통치권)은 분립이 아니니 이를테면 행정권과 권징권 즉 양권일체체제이니,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마다, 행정권도 있고, 권징권도 있다는 말이다. 다만 치리회의 구성요원된 목사와 장로들이 오류를 범할 인간적인 약점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3심제도를 원용하고 있을 뿐이다. 즉 당회의 잘못은 노회가 바로잡고, 노회의 잘못은 총회가 바로잡는다고 하는 말이다.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는 모든 행정절차를 중지한다니, 청원도 못하고, 헌의도 못하고, 온갖 증장도 발급하지 않겠다면 교단 소속 노회와 지교회라는 증명도 발급하지 아니하며, 교단 소속 목사의 신분관계에 대해서도 증명발급을 않겠다는 뜻이 되는데, 이같이 행정중지 기간에는 해 노회나 노회소속 지교회가 죽거나 말거나 상회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외면하겠다는 뜻이 되겠는데, 이것이 옳겠는가? 중지기간 동안은 사실상 해 노회를 제명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되겠는데, 총회가 잠정적으로라도 노회를 제명하는가? 총회의 직무(정 제12장 제4조)나 총회의 권한(동 제5조) 규정에서도 “총회는 노회, 대회를 설립, 합병, 분립하기도 하며, 폐지하는 것과 구역을 작정하며…”(2) 라고는 하였으되, 관계 중지도 없고, 잠정적인 제명도 없는데, 행정절차 중지가 웬 말인가?군○노회 이○○ 씨의 군○○노회 배○○ 씨에 대한 소원은 주문: ① 이○○ 씨는 2015. 3. 3. 까지 사임서를 소속노회에 제출하고, 노회는 동년 3월 5일까지 「임원·정치부」에서 수리한다. ② 군○○○교회는 2015. 3. 6. 까지 퇴직금 및 위로금으로 일금 팔천만원을 지급한다. ③ 양측은 교회 및 사회법정에 고소한 모든 민·형사상 소송을 2015. 3. 6. 까지 취하하고, 추후 양측은 본건과 관련된 일체의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④ 이○○ 씨에게 임시로 부여한 강도권은 본건 판결과 함께 취소한다. ⑤ 피상소인측(군○○교회 포함)은 위 조정을 받기로 한 바, 상소인 측이 위 조정을 거부할 시, 본건을 기각하고 이○○ 씨에게 임시로 부여한 강도권을 취소한다대로 받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첫째로 사건 표시를 ‘군○○노회 이○○ 목사가 군○○노회(<노회장 배○○>)에 대한 소원건’으로 표시될 사건이었다. 배○○ 씨가 동 노회의 노회장으로 밝혀졌으니 말이다(2014년 제99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p.291).그리고 소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판결한 내용에 따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소원인 이○○ 목사가 군○○노회 소속 군○○○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노회에서 임시로 강도권을 주어 시무하는 중 배척을 받아 교회 및 사회법정에 민·형사상 소송으로 까지 확대되고 있는데, 노회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설교목사 이○○ 씨가 총회에 소원하였는데, 총회재판국은 법대로 판결하지 아니하고, 양측의 승낙으로 조종하기로 하고 조종하기를, 소원인 이○○ 목사는 설교목사를 사면하기로 하고 피소원인(군○○○교회 포함)측 (피상소인 측으로 표시한 것은 잘못으로 보인다… 필자 주: )은 사면하는 소원인 이○○ 목사에게 퇴직위로금으로 일금 팔천만원을 지급하라는 내용 같은데, 왜 판결하지 아니하고 조종하기로 하였는지? 임시 강도권을 주어 이 사건교회에서 설교하게 했던 목사였었다면서, 일금 팔천만원이란 거액의 퇴직위로금까지 주어서 그만두게 해야 했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처결로 여겨지나, (총회설립 100주년 인명록에 의하면 이○○ 씨가 해 교회 담임목사로 등재된 것으로 보아 단순한 설교목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소원내용을 알 수 없어 더 말할 수가 없으나 다만 기록상으로는 임시강도권을 부여하여 설교하게 한 목사이니, 지교회를 시무하도록 허락한 시무목사(인시목사)도 위임목사도 아닌데, 사면서를 내게 조종한 일이나, 이를「임원·정치부」에서 수리한다고 하였는데, 노회에 정치부가 아직 있는가? 1917년 제6회 총회에서 “각 노회의 뎡사위원은 임사(任事)로 개칭할 일, 나. 총회와 노회 아래 있는 각 위원회의 회(會)자는 부(部)로 변경할”(동 총회록 p.18)이라고 결의하였으니, 이 결의에 따라 ‘총회와 노회 아래 있는 각 위원회가 부(部)로 바뀌고(지금처럼 상비부 즉 부가 되고), 총회는 정치위원이 정치부가 되고 노회는 임사부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노회는 아직 정치부가 있는가? 총회재판국은 재판기관인가? 협의 조정기관인가? 재판기관이지만 상황에 따라 조장도 가능하다고 하면 어떤 사건은 재판해야 하고 어떤 사건은 조정해야 하는가? “쌍방으로 조용히 사화(私和)하게 하고, 가급적 재판하는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옳다”(권 제2장 제10조)는 규정은 분명히 “…피해자 이외의 제3자가 기소하고자 할 때”라고 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이 원심관계 규정인가? 모든 심급이 다 인용할 수 있는 규정인가? 조용히 사화하게 하고 가급적 재판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니 분명히 원심 관계 규정인데, 이미 재판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판결을 받았고, 상소하여 총회재판국에 계류되었는데, “여기서 가급적 재판에 이르지 않게 조종하는가?재판자리에 앉으신 어른들이여! 사건 처결을 내 생각대로 하기로 미리 정해 놓고 내 생각에 맞추어 법을 찾는 입장과, 법이 규정한 법의(法意)에 따라 사건을 처결하려고 법을 찾는 입장 중 어느 입장이 옳겠는가? 후자였다고 하면 상소심에서 조정법규를 찾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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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4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5
    그런데 진(참됨)은 하나님의 영적 성품을 나타내고, 선(착함)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나타내고, 미(아름다움)는 하나님의 예술적 성품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진은 사람의 영적 삶으로 나타나야 하고(영), 선은 사람의 도덕적 삶으로 나타나야 하며(혼), 미는 사람의 예술적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육).그리고 이 진선미는 인생의 목적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다(사 43:7).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첫째 방법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사 43:21). 이것은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요 4:24).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둘째 방법은 빛을 비추는 착한 행실이다(마 5:16). 그리고 셋째 방법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요 15:8). 그렇기 때문에 참된 예배 곧 ‘진’과, 착한 행실 곧 ‘선’과, 아름다운 열매 곧 ‘미’는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성도의 견인과 배교예정에 관한 확신으로 최초로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분명하고 상세하게 설명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지만, 그도 어떤 초기 사상과 같이 후기의 신학은 은혜로부터 떨어질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루터는 은혜와 율법에 대한 긴장 때문에 성도의 견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이었지만,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더욱 강화하였다.그리하여 칼뱅주의자들은 고전적 칼뱅주의지이든, 온건 칼뱅주의자이든 모두 성도의 견인을 주장한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성도의 배교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개혁주의적 알미니스주의자들은 배교만을 인정하는데, 웨슬리주의적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고백하지 아니한 고의로 범한 죄로 인하여도 구원울 잃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는 칼뱅주의 관점은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예정)의 토대에 의존한다고 보는데 반해, 웨슬리는 이 소유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는 달리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자 선택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개혁주의 입장과 달라지는 지점은 성령님께서 선행 은총을 베푸셔서 죄인들도 내적 균형 상태를 가지게 하시는데, 이 내적 평형 상태에서 죄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도르트 신조(5대 교리로 지칭되는 Tulip) 가운데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이다.성경에는 많은 구절들이 성도의 견인을 말하지만, 또한 성경의 상당한 구절들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특히 히브리서에는 배교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있다(히 3:6, 12-14, 6:4-6, 10:23, 39). 이에 대하여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구절들은 문맥에서 피상적인 기독교적 신앙에 대한 경고로서, 혹은 논적의 상대를 향하여 순전히 가정의 논증으로서, 혹은 신자의 안전을 위하여 더욱 확실한 거룩을 요구하는 권고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하고,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은 구원을 영생으로 말하는데,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에 의하면 성도의 견인이 인정된다.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 3:12)라고 말한 후,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들에게 배교를 여러 차례 경고한다.예수님께서도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또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 7:19)라고 하시고,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마 24:10)지만,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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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4
  • 설 고향교회 방문은 건강한 교회로 가는 첫걸음
    한국교회 양극화가 정말 심각하다. 대형교회와 작은교회,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심각하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현안은 80%에 달하는 농어촌교회와 작은 개척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몸집이 커지고, 농어촌교회나 작은교회는 점점 힘을 잃고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런 양극화를 극복하고 건강한교회로 나아가는 해답이 있는가? 해답을 찾는다면 미자립교회를 자립할 수 있도록 부축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가는 일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양극화 극복의 대안은 ‘성장제일주의’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운동이다. ‘건강한교회’가 해답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강한 교회’ 운동을 통해 세상 속에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며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의 영광을 다시 드러내야 할 때이다. 설이나 추석에 고향교회나 작은교회 방문운동은 한국교회 전체가 건강한 교회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함께 경제적으로나 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농어민들과 그들과 함께 하는 작은교회가 일어설 힘이 도저히 없을 때, 스스로 일어서거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격려와 배려, 이것이 이 시대에 먼저 선 자립교회와 도시교회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일 것이다. 매년 설이 지나면 상계감리교회 서길원 목사의 경우 전국의 1,000여명의 목회자를 초청하여 격려하고 매년 100여개의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인적 물적으로 지원하는 작은교회 리메이크를 통해 목회 생태계를 다시 복원하고, 건강한교회의 가치를 창출해, 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작은교회를 넘어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져올 정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성경에 보면 보아스가 곡식을 벨 때에 룻을 위하여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하므로 룻과 나오미가 생계를 유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땅 백성들이 암울한 오늘에서 더 암울할 것 같은 내일을 바라보며 한 숨 쉬고 있을 때, 참다운 신앙이라면 반드시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기쁨을 불어 넣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교회가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들을 품고 격려와 위로도 하지 못하고 방치한다면 그런 지도자들로 어찌 한국교회의 미래와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또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는 고향교회 방문하기 캠페인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김관선목사는 “어찌보면 저수지는 물을 가두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그 많은 물은 재앙이 될 날이 옵니다. 한쪽에서는 가뭄으로 고통당하는데 둑이 무너질 정도로 물을 가두어 두고 흘려보내지 않는 저수지가 있다면 모두를 불행하게 할 것입니다. 섬기는 교회를 포함해서 웬만큼 힘을 가진 교회나, 한국교회는 그동안 쌓아둔 것을 흘려보내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고 전했다. 한국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미래를 열고, 보다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농어민과 그들을 돌보는 시골 농·어촌의 고향교회, 그리고 작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배려하고 격려하는 넉넉한 마음이 절실하다.감리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 대치동 성은교회 김인환 목사도 2007년부터 설이나 추석 명절을 즈음해 '고향 교회 방문하기'라는 이색 캠페인을 10년째 펼치고 있다. 소속 교회 성도들이 저마다 고향교회를 찾아 어려운 교회에 힘을 실어주자는 것. 김인환 목사는 평소 "어려운 여건 속에서 꿋꿋이 고향을 지키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우리 신앙의 '못자리'같은 농어촌 교회를 가슴으로 보듬자"고 강조하고 있다.한국교회의 신앙의 못자리이자 신앙의 뿌리는 시골의 농·어촌교회와 작은 개척교회였다. 그런 저 낮은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런 교회들로 채워질 때 한국교회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제 여리고 언덕에서 강도만나 경제적으로 육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이 땅 백성의 억울한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상처를 치유해주며, 그들에게 참된 기쁨을 되돌려주는 선교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 이 시대에 농어촌의 작은 교회,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향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함께한다는 그 마음을 전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귀하고 복된 나눔과 배려가 있을 때 ‘건강한 한국교회’의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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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3
  • 총회재판국 판결의 오류 시리즈-22
    법이 정한 대로의 공무담임권은 국헌이 보장법규에 없는 ‘공직정치’총회는 왜 항다반인가? (승전) “남○○노회 이○○ 씨 외 1인의 평○노회 설○○ 씨 외 1인에 대한 소원은…”이라고 하였는데, 남○○노회 이○○ 씨가 해 노회의 노회장이고, 평○노회 설○○ 씨가 역시 해 노회의 노회장인 것이 제99회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을 통해 밝혀졌으니, 이 사건은 노회간의 소원임이 확실한데, 남○○노회 <노회장 이○○>가 평○노회 <노회장 설○○>를 상대로 한 소원건으로 표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주문:⑤에서 “총회를 기망하고 불법으로 서류를 발급한 박○○ 씨에 대해서는 총회 및 노회 공직정지 5년에 처한다. 단, 노회공직은 3월 12일까지 시행하여 총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⑥상기 5항을 이행하지 않을 시 평○노회의 천서 및 모든 행정절차를 중지한다 대로 받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여러번 논급한 바 있거니와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첫째로 공직이 무엇인가? 공직의 사전적 의미는 ‘관청이나 공공단체의 직무’를 가리키는데, 총회의 공직이라 하였으니 총회장, 총회서기 등 총회임원이 총회의 공직이요, 총회의 관계기관의 직분이 총회의 공직이며, 총회의상비부와 특별위원회 장과 위원 등이 모두 공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공직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는 총회총대에게는 다 있는 것인데, 이것을 정지한다니, 결국 총회총대의 피선거권 정지를 가리키는 것 같고, 그렇다면 총회총대로서 발언권 결의권 행사는 할 수가 있어 보이는데, 총회총대까지 총회의 공직에 포함된다면 시무목사나 당회에서 선임된 노회총대장로라면 누구나 총회총대로서 피선될 권리가 있는데, 이것마저 정지되는가? 총회의 회의결의 및 요람에 의하면 총회가 “전○노회장 김○○ 씨가 헌의한 성경과 총회결의 위반자에 대한 헌의건(헌의안: 제89회 총회 이후 성경과 헌법과 총회결의를 무시하고 교단 및 총회장을 피고로 하여 사회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자는 총대 영구정지 및 교단 산하 모든 기관의 공직을 정지하여 주실 것을 바라나이다.)은 총회 모든 공직을 면직하기로 하다”(2005년 제90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p.69)고 결의한 것이 총회 100년 역사 중 첫 결의로 여겨지는데, 그 후 걸핏하면 공직정지 결의와 판결이 생겨나는데 어느 한 군데에도 공직에 대한 정의(定義)가 없으니 매우 안타깝다. 공직을 받지 못하게 한다니 결국 피선거권 정지인데, 권징조례 제6장 제46조에 의하면 “노회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피소된 목사의 직무를 임시정지 할 수 있으나, 이런 경우에는 그 재판을 속결함이 옳다”고 하였고, 동 제47조는 “장로 및 집사에 대하여 재판할 사건이 있으면 본 장(즉 제6장 직원에 대한 재판규례를 가리킴이니, 목사 재판관계 규정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와 집사재판도 이 장의 규정을 인용한다는 뜻이다.…필자 주: ) 각조에 해당한대로 적용할 것이다”고 한 것이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무를 일시정지 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으나, 그 밖에는 권 제9장 제100조가 “상소를 제기한다 할 때에는 하회에서 결정한 것이 권계나 견책이면 잠시 정지할 것이요, 그 밖의 시벌(즉 정직, 면직, 수찬정지, 제명출교를 가리킨다.<권 제5장 제35조, 동 제6장 제41조 참조>…필자 주:) 즉 당회의 판결이면 노회판결과 총회판결이 나기까지 원심 하회의 판결대로 임시 집행되고, 또한 노회의 판결이면 상소하여 총회재판국에 계류 중에는 물론, 총회재판국이 판결했을지라도 아직은 총회에 보고하여 확정되기 이전의 예심판결에 불과하니(역시 총회재판국 판결이 발효되기 이전이니), 예심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재판국의 판결을 검사하여 채용하거나 (즉 예심판결이 옳다고 그대로 채택하거나…필자 주: ), 환부하거나 (보고가 합당하지 아니하니 다시 재판하라고 판결한 재판국에 다시 돌려보내거나 …필자 주: ), 특별재판국을 설치하고(즉 이 사건을 판결한 재판국이 아니고 새 재판국을 다시 설치하고… 필자 주: ) 그 사건(이미 상설재판국에서 판결한 사건…필자 주: )을 판결 보고하게 한다…”(권 제13장 제141조) 하였으니 ‘검사하여 채용’하면 확정이지만, 아직은 보고 이전이니 채용 이전이요, 채용할지, 환부할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다시 재판하게 할지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예심판결이 났다고 확정인 것처럼 떠드는가? 예심판결이 총회에서 채택되는 그 시각이 바로 하급심 판결(정직, 면직, 수찬정지, 제명출교)의 임시집행 시각이 종료되고, 총회가 채택한 예심판결이 발효되는 시작이라고 하는 말이다. 세상나라에서는 원심에서 중벌이 선고되어 미결수로 복역 중 상급심에서 무죄가 확정되면, 형사보상법에 따라 국가가 보상하도록 되어 있으나, 교회헌법에서는 그런 법규가 없는 것은 세상나라에서는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법관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판결하거니와, 교회헌법은 어느 심급에서든지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예배모범 제16장 5~6, 동 제17장 2~3)고 판결하기 때문이다. 3심제도를 채용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최고심인 총회판결이 옳은 입장이지만,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하급심 판결이 주의 뜻일 수도 있다고 시인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하는 말이다.어찌되었든지 권리 임시정지의 경우란 위 두가지 경우 뿐인데, 당회, 노회, 대회, 총회 등 치리회 회원의 기본적인 권한 중 하나라고도 할 피선거권을 함부로(?) 제한하는가?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헌법 제2장 제10조).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서 제한할 수 있으며(즉 국회를 통과하여 제정된 법률이니, 일반결의에 의해서가 아니다…필자 주: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동 제37조②)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인하고 보장할 것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면서까지 이를 존중하고 있는데,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적정치…”(정치 총론 5)인 장로회총회가 회원의 주권을 그처럼 손쉽게 박탈하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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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3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4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기 위해서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 그 훈련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기 위한 훈련이다. 우리는 먼저 의를 이루어야 하는데,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며(롬 10:10),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따라서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이 자라도록 말씀훈련을 해야 한다.또한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평강은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가 평강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훈련을 해야 한다.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렁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9-12)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우리가 희락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따라서 우리가 사랑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런데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이 이르렀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은혜의 반대말은 공로이고 그리하여 은혜는 훈련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훈련은 필수적이다.구원: 칭의(중생)와 성화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곧 믿는 성도들은 이미 영생 곧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말한다.그런데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라고 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라고 하여, 우리의 구원이 진리를 믿음 곧 ‘칭의(중생)'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곧 ‘성화'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이와 같이 구원은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지는데, 이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구별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 구원 가운데 진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씻음 곧 칭의는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이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성화는 우리가 아직 얻지 못한 것으로써 지금 여기서 이루어 가야 한다. 이 성화가 바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성화를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벧전 1:16)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거룩은 하나님 안에 발견되는 모든 것의 속성으로 단정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근본 토대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기독교신학의 초석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분의 거룩함의 표현이라는 사실은 피할 수 없으며, 또한 죄에 대한 분노(의)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표현이다. 이와같이 거룩이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는 것 곧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을 말하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신(골 1:15)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이 거룩(성화)의 내용은 진·선·미(眞善美), 곧 ‘진’=참되고 성실한 것과, ‘선’=착하고 좋은 것과, ‘미’=아름답고 개끗한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최고의 본질, 최고의 진선미’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하나님은 참되시고(요 3:33), 예수님께서는 진리(참)이시며(요 14:6),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요 14:17)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선하시고(시 100:5),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며(요 10:11), 또한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다(시 135:3).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의 대표적인 속성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 내용으로 진(참되고 성실함) 선(착하고 좋음) 미(아름답고 깨긋함) 모두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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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3
  • 내가 살아가는 작은 이유
    새벽 일찍 깨어나 엎드려 묵상 기도를 합니다. 주님! 지금껏 살아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늘은 호스피스 봉사하러 가는 날이지. 그래 오늘도 내가 할 일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분들이 계신다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작은 이유일거야.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호스피스센터로 향합니다. 아침 예배를 마치고, 주의 사항을 듣고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시작합니다. 3층 병실로 가서 봉사자들을 살피고 오늘은 2층 임종실 환우를 돌보기로 했습니다.202호에 환우의 가족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오늘 봉사자입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임종이 가까워진 환우의 메마른 입술에 물젖은 거즈를 붙여드리고 간단한 발 마사지를 해드렸습니다. 목욕을 못한 것 같아 가까이 있는 봉사자와 함께 손과 발을 닦아드리면서 환우에게 “물이 따듯하지요.” 가족(따님)과 함께 온몸을 닦아드린 후에 새 옷으로 갈아 입혀 드렸습니다. 그때 따님이 우리 아빠가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뻐했습니다. 환우의 귓가에 대고 “박00님께서 지금 가시는 길은 우리가 도와 드릴 수가 없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아침저녁 예배를 드리면서 만난 그 예수님만 믿고 가셔야 합니다.”기도를 해드릴까요?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기도를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지금까지 박00님을 지켜 주시고 이곳까지 인도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육신의 고통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주시고 행여 악한 영들이 틈타지 못하도록 막아주십시요.. 남은 가족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했습니다.환우의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원장 선생님이 오시고 가족이 바라보는 가운데 박00님은 잠자는 듯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함께 있던 가족들이 슬퍼하는 가운데도 따님은 마지막이지만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작은 도리를 했다는 듯 “아까 우리 아빠의 눈물을 보셨지요” 라며 위로를 받고 싶은 눈빛이었습니다. 그 딸을 꼭 안아주면서 등을 다독여 주었습니다. 잠시 후 흐느끼던 따님이 고개를 들며 “오늘 너무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라고 감격해했습니다.모든 뒷마무리가 끝나고 봉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 오늘의 일들이 제가 살아가는 작은 이유일까요..” 감사합니다.2016년 10월에 씀.메모 : 이융재 사모는 수필가 최건차 목사의 아내로 지난 12월 19일 71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위의 글은 고 이융재 사모가 수원기독호스피스센터에서 16년간 자원봉사자로 수고하면서 떠나기 두 달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입니다. 고인은 생전에 말기암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임종을 거두어 주곤 했는데, 자신이 2016년 12월 1일 담낭암 말기로 바로 그곳에 입원하여 19일 만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으로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아름다운 삶이었기에 남은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같이 봉사했던 이들은 이럴 수가 라고 믿기지 않은 듯 금방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고들 하지만. 이 땅에서 다시는 만나 볼 수가 없는 이융재 사모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지인들에게 애틋한 그리움을 한 아름 안겨주었습니다. <최건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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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2
  • 총회재판국 판결의 오류 시리즈-21
    하회의 권징권 행사 소원으로 무효화 못하고청원측, 반대측 소원으로 노회분립 판결 웬 일? (승전) “서○○노회 이○○ 씨 외 50인의 서○○노회 김○○ 씨에 대한 소원건은 주문: 서○○노회 분립과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의 치리(권징)를 무효로 하고, 서○○노회는 분립한다 대로 받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누차 언급하였거니와 “소원은 서면으로 상회에 제출하는 것이니, 하회 관할에 속하여 그 치리권에 복종하는 자 중 1인이나, 1인 이상이 행정사건에 대하여 하회가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아니하거나, 위법한 행동이나 결정에 대하여 변경을 구하는 것이다…”(권 제9장 제84조)라고 하였으니, 개인에게는 치리회의 처결권이 없으니 권 제9장 제90조의 규정대로 “소원을 제출한 자는 소원자가 되고, 소원을 당한 자는 피소원자가 되는데, 피소원자는 보통 하회가 되나니…” 치리회(여기서는 노회)가 피소원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니, 「서○○노회 김○○」씨를 피소원으로 된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제99회 총회(2014년) 회의결의 및 요람(p.70)에 의하면 「서○○노회 김○○ 씨」가 그 노회 노회장임이 밝혀졌으니, 소원은 바로 되었는데, 피소원인 표시가 잘못된 것 뿐이라고 여겨진다. 즉 「서○○노회 이○○ 씨」씨 외 50인이 「서○○노회 (노회장 김○○)」를 피소원인으로 한 소원건은 이라고 표시하거나 혹은 권 제9장 제90조의 규정대로 「서○○노회 대표자(○○○)」로 대표자가 선임되었을 경우의 표시대로 할 일이었다고 본다.그런데 주문: “서○○노회 분립과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의 치리(권징)를 무효로 하고 서○○노회를 분립한다 대로 받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치리(권징)를 무효로 하라」고 하였는데, 소원장 즉 행정처결의 시정, 변경, 촉구를 구하는 소원장(권 제9장 제84조)을 받은 총회재판국이 하회의 「치리(권징)」를 무효로 할 수가 있는가? 판결의 변경을 구하는 것은 상소(권 제9장 제94조)란 사실도 짓밟고 소원을 받아 「치리(권징)」을 무효로 하다니, 법을 떠난 판결이니 당연무효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서○○노회는 분립한다」대로 받기로 했다는데, 노회 분립을 총회의 결의로 허락을 받게 되었느냐? 분립을 다투는 양측은 어느 한쪽도 노회를 분립할 권리가 없고, 분립을 청원하자고 할 권리 밖에 없는데, 이 다툼에 대한 소원건을 받은 총회재판국이 「노회를 분립한다」대로 받기로 하다가 웬 말인가? 혹시 노회분립권을 가진 총회가 정당한 분립요건을 갖추었는데도 총회가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총회가 피소원인이 된 경우라면 “노회를 분립한다”대로 받기로 하다가 이연(理然)하다 하겠으나, 3심제도를 원용하고 있는 장로회정치 체제 하에서 총회가 피소원인이 될 수도 없고, 이를 다룰 재판국도 있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결국 총회재판국의 이 사건 판결은 어느 모로 보던지 수긍할 수 없고 수긍해서는 아니될 불법판결이라고 하는 말이다.“경○노회 강○○ 씨 외 1인의 삼○노회 윤○○ 씨에 대한 소원은 주문: ① 최○○ 씨, 권○○ 씨, 박○○ 씨, 조○○ 씨, 최○○ 씨, 송○○ 씨와, 해 교회의 삼○노회 가입을 취소한다. ② 주문 1항에 대하여 삼○노회는 2015년 8월 28일(금)까지 처리하여 총회에 보고토록 한다. ③ 상기 1, 2항대로 삼○노회가 시행하지 않을 시 삼○노회의 제100회 총회총대 천서를 제한한다. ④ 경○노회는 상기 1항의 면직 제명된 탈퇴자들을 받아 헌법대로 처리하라 대로 받기로 가결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경○노회에서 윤○○ 씨 등에게 면직, 제명하니, 면직 제명을 당한 자들이 경○노회를 탈퇴하고 삼○노회에 교회와 함께 가입하니, 경○노회가 삼○노회를 피소원인으로 소원한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면직, 제명이 먼저인지 탈퇴 가입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국법은 오래 전부터 “교회 권징재판은 사법심사의 대상 밖에 있고, 그 효력과 집행은 교회 내부의 자율에 맡겨지는 것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교회에 소속된 목사나 교인에 대한 관계에서 그러한 것이고, 그 소속을 달리하는 목사나 교인에게 대하여서까지 그 효력이 미친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대법원 제3부 1985. 9. 10. 선고, 84다카1262판결, 대법원 제3부 1988. 3. 22. 선고 86다카1197판결)라는 판결을 하고 있으니, 경○노회의 면직, 제명이 먼저이면 대법원 판례의 취지대로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고, 교회자율에 맡겨진 것이니 유효하지만, 만일 탈퇴가 먼저이면 권징의 효력이 탈퇴한 자에게까지 미친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면직도 제명도 효력이 없다는 뜻이 된다.본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기는 하나 이 대법원 판례는 ‘교회권징이 사법심사의 대상 밖에 있고, 그 효력과 집행은 교회내부의 자율에 맡겨져 있다’(대법원 제1부, 1981. 9. 22. 선고 81다276판결)는 판례와 충돌된다. 탈퇴는 치리회의 관할을 배척하는 죄이니 죄질에 따라 면직할 수 있도록 규정되고 있어 탈퇴자를 면직하였더니, 권징의 효력이 탈퇴자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결국 사법부가 ‘탈퇴(=관할 배척)한 자에게는 어떠한 벌도 주어서는 아니된다’는 뜻과 같으니 간섭하는 차원을 넘어 방해하는 결과라고 해야 하겠으니 말이다. 탈퇴하지 않았으면 시벌할 이유가 없고, 탈퇴했으니(즉 범행했으니) 벌을 주었는데, 사법심은 탈퇴했으면(즉 범행했으면) 벌이 효력이 없다니 하는 말이다.주문: 3.“상기 1, 2항대로 삼○노회가 시행하지 않을 시, 삼○노회의 제100회 총회총대 천서를 제한한다”고 하였는데, 총회규칙 제3장 제9조 <정기위원> 1의 6에 의하면 “천서검사위원 3인, 원·부서기 및 회록서기로 되어 있고, 동 2의 6)에 의하면 천서검사위원은 총회총대의 천서를 검사하여 적당하지 못한 천서가 있을 때에는 해 노회에 통고하여 재보고토록 하고, 이를 이행치 않을 경우, 총회에 보고하여 그 지시대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일에 총회재판국이 왜 관여하는가? 총회총대 천서문제가 재판건이 된 것도 아니지 않는가? 총회가 결의해서 맡긴 사건은 경○노회 최○○ 씨 등 면직, 제명된 자들이 소속노회를 탈퇴하고 삼○노회에 가입한 사건을 바로잡아 달라는 소원건을 맡겼는데, 엉뚱하게 삼○노회 총회총대 천서 제한 판결이 웬 일인가? 맡기지 않은 사건을 만들어 판결했으니 당연무효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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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6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3
    그리고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 5)라고 하시고, 이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10)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사명을 감당(완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우리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기원하셨던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변화산의 영광이다(눅 9:32).부활 : 승천과 승귀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심 내용이지만, 그것은 부활로 완성된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라고 하신 바와 같이,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지만 그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지 아니하고서 부활에 연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 스스로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느니라”(눅 22:69)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스데반은 순교직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으며(행 7:5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히 10:12)라고 했다.여기에서 하나님 우편이라는 말의 뜻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이다. 이를 승귀(Exaltatlon)라고 한다. 승귀에는 부활 승천과 보좌에 앉으심과 재림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요(빌 2:6), 하나님의 형상이요(고후 4:4),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따라서 승귀는 그 복귀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우편이란 의로움이 있는 최상의 축복을 말하며 평화와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루터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라고 하였으며, 칼빈은 통치하시는 자리라고 했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을 주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엡 1:23)로서 우주를 통치하고 섭리하시고 계심을 뜻한다.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창세 전에 가지셨던 영광의 보좌로의 복귀이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예수 주시니라”(눅 2:11)라고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구주로 오셨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설교대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그리하여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부활이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천국 복음(복음의 형식): 의와 평강과 희락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는 말씀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 4:43)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복음의 중요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이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우리가 들어가야 할 목적지이지만, 또한 우리가 삶에서 이 땅에도 임하게 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이미’와 ‘아직’의 성격이 있는 것 같이 천국에도 ‘이미’와 ‘아직’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 곧 성령의 지배를 말하고, 그 표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를 지칭하고, 평강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희락의 중요한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인 ‘의와 평강과 희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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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6
  • 맥베스 내외의 ‘we’와 ‘alone’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부인은 Lady Macbeth로 등장할 뿐 달리 이름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에서 이름이 없는 주요 등장인물은 Lady Macbeth 그녀뿐이란다. 맥베스와 맥베스부인은 이름으로서도 일심동체로 등장하고 있다. 던컨 왕 암살계획에서부터 부부는 완전한 공범이 된다. 동기에서도 결과에서도. Macbeth: If we should fail? Lady Macbeth: We fail? 우리말 번역에서는 흔히 we를 생략할 수 있다. 영어의 ‘I’나 ‘you’ 혹은 ‘we’와 같은 인칭대명사는 되도록 생략해버리는 것이 명 번역의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쯤은 번역을 업으로 하거나 글줄이나 끄적여 본 분이라면 다들 깨치고 있는 바가 아닐까. 그러나 <맥베스>의 1막, 이 장면에서는 자칫 뜻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따져보아야 한다. 원문의 주어가 ‘we’가 아니라, ‘I’와 ‘you’로 오해될 수도 있기 때문. “내가 만약 실패한다면 어떻게 하지?” 다시 말해서 맥베스가 겁을 먹고 주저하고 있을 때 맥베스 부인이 “실패? 있을 수 없는 일이지.”하며 격려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둘의 관계가 더없이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맥베스 왈 “우리가 실패한다면?”하지만, 맥베스부인은 “우리가 실패한다고?”로 응수함으로 성공하는 ‘우리’가 되든 실패하는 ‘우리’가 되든 우리는 일체가 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대사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2막 2장, 맥베스가 왕이 되려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과정인 던컨 왕 암살 장면에서, 이를 결행한 맥베스가 고민하고 있을 때, 맥베스 부인은 “It will makes us mad.”라며, 지난 일을 두고 고민하지 말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us’는 굳이 번역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이 장면에서의 ‘us’는 뚜렷한 의미를 가진다고 보아야할 것 같다. ‘미치는 것’은 왕을 죽인 남편 맥베스만이 아니라 일심동체가 되어 있는 맥베스 부인도 함께 라는 함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의도하고 있었을 것이란 말이다. 맥베스가 잠자고 있는 던컨 왕을 죽이고 두 사람의 시종도 죽인다. 곧 부인이 단검을 넘겨받아서는 둘을 범인으로 덮어씌우겠다고 장담한다. 이로서 맥베스 부부는 완전한 공범이 된다. 그래서 3막의 막이 오르면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어 있다. 그러나 맥베스 부부는 허무를 느낀다. “왜 외톨이(keep alone)로 망상에 사로잡혀 있소?”라며 남편의 소심함을 달래려 하자, 맥베스가 말한다. “우리는 둘 다 얼굴을 가면으로 삼아 마음을 덮어 본심을 감추지 않으면 안된다오.” “나의 마음은 독사들로 가득 차 있소.”할 때, 맥베스는 ‘our mind’가 아니라 ‘my mind’라 일컫는다. 그리고 “일단 시작한 악한 일은 토대를 굳히기 위해서 악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법. 자 따라오시오.”하고 말한다. “Why do you keep alone?” 하고 묻는 아내와 ‘we’하고 응답하는 남편. 셰익스피어는 ‘we’와 ‘alone’으로 범죄 후에 달라진 두 사람의 상황을 교묘하게 표출한다. 그리고 새로운 살인 계획은 자객을 통해서 부인 몰래 단독으로 진행되는데, 부인은 눈치 채지 못한다. “귀여운 당신은 몰라도 돼. 훗날 잘 했다고 칭찬만 해주면 될 것을...”둘 사이의 공범관계가 어디에서 그 끈이 끊어졌는지, 둘이 따로따로가 된 시점이 어디였는지를 ‘alone’과 ‘we’ 가 서로 엇갈리게 하는 기법으로 오히려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한 해설가는 <맥베스>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 2막은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고, 전환점이 되는 3막은 ‘we’와 ‘alone’이 엇갈리는 이야기, 4, 5막은 두 주인공의 ‘alone’이 모두 무너지는 이야기라고.4막과 5막에서는 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둘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3막 4장, 만찬석이 마지막이 된다. 맥베스는 벤코우의 망령을 보고 무서워하지만, 다른 귀족들과 맥베스부인조차도 보지 못한다. 그렇게 맥베스는 ‘alone’이 되면서 폭군이 되어 간다. 그리고 맥베스 부인은 몽유병환자가 되어 손에 묻은 피가 씻기지 않는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마침내 ‘we’가 아닌 ‘alone’이 각각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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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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