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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육신한 예수교회-36
    욥의 문학에서 ‘전에는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경이로운 문장이 그의 문학 결론 부문에 나타난다. 듣는 것으로만 인지되던 세상에서 시각적인 세계로 까지 진전되어 인식되는 문화는, 세상이 뒤집혀지는 발전을 가져왔다. 섹스피어의 극들이 영국 도시마다 매일 저녁에 공연되었는데, 당시의 시민들은 매일 같이 열리는 극장에 연극을 보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연극 공연을 들으려고 갔다고 한다. 매일 같이 열리는 극장은 3000석에서 5000석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당시 시민들이 한 도시에 10만이 살았다고 하더라도 한 달 정도가 지나면 거의 시민들 중에 한사람 꼴로 섹스피어의 극들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이들이 듣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는, 거의 시민들 95%가 글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글을 모르긴 하였지만, 저녁마다 극장에 모여 연극을 들으면서 깨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섹스피어의 극은 거의 비극을 다루곤 하였는데, 당시 연극의 테마에는 살인 장면들이 삽입되었는데, 이와 같은 부도덕한 사회적 정치적 정황에 말려들면서, 사람으로서의 선택의 자유와 책임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결단과 행동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르기에, 책임의식이 없이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무모한 것임을 깨우쳤던 것이다. 이렇게 섹스피어의 연극을 보면서 시민들의 자의식은 진보하며 발전하였다.이러던 중에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당시의 영국 국교는 예배당이 아무리 많다한들 그들 도시의 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이다. 이들은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사람들에게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텐트마저도 저들을 모두 수용하질 못하였으나, 당시 설교가들은 얼마나 발성법이 좋았던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운집하였어도 삼만 명이 설교를 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메마른 가슴을 만져준 설교가들은 군중들이 내어놓는 헌금으로 고아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하였고, 저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당시 번역되어 인쇄된 성경들을 시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교회에서 글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당시 국민(초등)학교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국민에게 글을 깨우치는 계몽교육이 한 세기가 되자 영국시민 50%가 글을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다.듣기만 하였음에도 책임과 자유를 깨우칠 수 있었던 이 시민들은, 이제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황족과 귀족에게만 독점되었던 권력과 돈과 명예와 문학이 점차로 시민들에게도 나눠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백성들과 지식을 공유하기 시작한 이 운동력은 오늘의 한국과 쿠바에 이르기 까지 쓰나미처럼 퍼져나간 것이었다.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영적 운동력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제관만 갖고 있던 사죄의 권능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자들 모두에게서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치유하는 일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믿는 자들 모두의 사역이 되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예수가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에서든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멈추질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현장은 곧 성령의 나타나심의 장소가 되었다.예수님의 복음이 많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서 독점되고 특권자에게 사유화 되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독점되질 아니한다. 때로는 황금의 입을 가진 자가 독점하기도 하고, 제왕들과 추기경과 교황들이 독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읽혀지는 곳에서는 운동력과 거대한 변화들이 일어난 것이었다. 예수님은 밤중에 방문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위로부터 나질 아니하면 하나님나라가 보이질 않는다 하였다. 당대에 아무리 석학이라 할지라도 듣기만 하고, 진리 안으로 쑥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었다.욥은 고난의 과정을 통과 하면서 그의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다. 우리가 항시 듣던 베토벤의 음악도 어느 시점부터는 그 작곡자가 보이길 시작하고, 그와 더욱 깊은 사귐을 갖게 된다. 지휘자만이 베토벤을 객석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도 베토벤을 만나게 하여 주고, 영화감독도 시청자들에게 베토벤을 만나게 하여 준다. 이뿐 아니라 오페라나 무용수를 통해서도 우린 그 작품의 진수를 조우한다. 하루에 6시간 넘도록 건반을 두드리다가 갑작스레 작곡가를 만나는 일들은 언제나 있어온 것이다. 이들이 그렇게 감동과 환희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에는 모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주님이 계신 하나님나라야 말로, 그것을 본 자만이 세상에 열어주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1-12
  • 성육신한 예수교회-35
    사람들은 자격을 갖춤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알기위한 방안으로, 학위 유무와 자격 고시 같은 식별 방법을 활용한다. 최근에는 그 사람의 됨됨이나 성향을 알기 위해서 인성 검사나 도덕적 지수를 활용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력을 채용하는 회사로부터 그의 사적인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추적되기 마련인데, 우리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검증되고 채용되었을까? 아마도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기관과 단체, 교회의 지도자들마저도 세속적인 유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복음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는 훌륭한 랍비를 만나기 위해서 제자 후보생들은 돈 보따리를 들고서 자신의 스승들을 선택하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와는 달리, 스승 자신이 훈련 받을 제자들을 선별하여 불러낸 것이었다. 아무런 등록금이나 자격 지침이 없이, 스승만이 아는 식별력에 의하여 채용되었던 것이다. 많은 생도들이 부름을 받아서 선별된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훈련 과정에서 탈락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제자훈련을 마쳤다. 신약의 사복음서의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마무리 되는 장면이지만, 이 훈련된 제자들이 예수의 바통을 잇는 출발선이기도 하다. 마가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 받는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들은 구원을 받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사유의 은총을 거절함으로 인해서 야기된 정죄는 피해갈 수 없음도 함께 선언된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에게 부여된 권능은,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잡아내고, 독을 마신다 해도 해를 받지 않고, 병인에게 손을 내밀어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 모두에게 확대하였다.마태에게 있어서는, 율법으로 인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옭아맨 유대교의 짐과 죄를 벗겨주기 위해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법으로 구원을 주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온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하기 위해서 파송된다. 파송을 받은 이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그리스도’가 함께하여 주심을 보장 받는다.누가에게 있어서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입음으로 인해서, 비로소 예수를 구주로 선포하는 사역이 시작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성령이 임하시자, 하늘로부터 기름부음 받았음이 선포되었고, 그 기름 부음으로 인한 메시아의 사역은 이사야의 예언으로도 확증되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서 메시아 사역을 하고 있음을 만인이 곳곳에서 듣고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이 어떠한 말씀인가?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니 나가는구나!’하였다. 누가는 사람들과 지도자들에게, 예수가 이러한 능력을 가진 분임을 천하에 공포함과 동시에, 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도들도 또한, 위로부터 오는 성령을 힘입어서 권능을 갖추어 선포하였다. 누가는 그의 선포와 같이, 성령께서 마가의 집에 모인 회중들 모두에게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도 역시 권능을 받고,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업적과,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온 세상 끝까지 전파한다.요한은 어떠하였는가?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세계의 석학들 모두를 포함할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율사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사제들에게 까지 해당되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를 영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는다. 이는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 행위조차도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죄악과 허물들은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서 사유되는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수가성의 여인 같이 온갖 종교와 문화에 혼합되고, 정체성이 혼란스러울지라도, 예수께 나오면, 저는 그 내면에서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나게 되고, 황막한 세상이 비옥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 하시자, 그의 제자들에게 오셔서 부활하신 영광의 몸을 나타내 보이시며, 그의 사도들을 파송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하시고,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며 이르시기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하셨다.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자라는 자의식을 가졌다면, 훈련된 것만으로는 파송될 수 없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를 믿고, 성령의 권능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권세 있는 새 교훈’을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1-05
  • 성육신한 예수교회-34
    해가 저물어 가면 곳곳에서 교역자들도 평생을 헌신한 목회를 내려놓고 퇴임을 하는데, 농촌 지역이라서 그런지 대부분 교역자들이 조용히 사역을 내려놓고 떠나간다. 한 오지 마을의 여교역자가 은퇴하는 예배에 참여했다. 여느 교회들은 은퇴식에서도 사람들에게 감투를 씌우는 행사를 끼어 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교회는 전혀 달랐다. 모처럼 마을에 사는 분들도 많이 나와서 환대하는 것이었다. 주변 교회에서도 다들 와서 함께 감사하며, 전도사님의 앞길을 축복해 주고, 참여하신 하객들도 그 마음에 무언가 훈훈함이 가득해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느 행사보다도 사뭇 느낌이 달랐다. 사람들은 으레 모이면 조직을 하고, 회장을 세우고, 모집책을 맡아 고생하는 총무도 세워서 이내 질서를 잡는다. 조직이 형성되면 옛날 반상제도가 있던 때의 계급과, 식민지의 완장을 찬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문화에 익수해진 터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곧 잘 적응을 한다. 교역자들이 모임을 갖는 노회나 총회도 가서 보면, 그 곳에서도 제일 먼저 감투 씌우는 일부터 하는 데, 연합회 모임이나 친목회 모임조차도 이와 다르질 않다. 더더욱 교회 행사 때에도 초청을 받아서 가보면, 사람들의 직급을 높여주고 감투 씌우는 행사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피라미드 조직을 갖추고 예전을 치루는 것을 좋아했지만, 교회에 이러려고 나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담임전도사님 은퇴식 자리에서, 순서를 맡은 그 교회의 신도가 내빈들에게 인사 말씀을 하는데, 그가 어릴 적에 이 전도사님을 만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분은 법학을 전공한 분이기도 했는데, 항시 사물을 관찰할 때에 귀납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을 곁에서 항시 지켜보면서, 그녀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어야겠다는 마음을 심중에 굳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그 분을 통해서 느꼈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 비쳐지기에는,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변하였고,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그녀가 섬기는 예수님을 붙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교역자가 그렇게 사람을 움직이고, 그들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고, 신도들의 삶에 진전을 가져온 것들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섬기는 교회의 당회장은 따로 있었는데, 그녀는 목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도 마다하고, 당회장의 자리마저도 비워 논 채 사역을 한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전례 적으로 하는 직급 놀이에서 벗어나서, 욕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목양에만 집중한 것이었다. 먼발치에서 몇 년간 그를 지켜보면서, 그녀는 정말 권세 있는 교훈을 가진 분임을 느꼈다. 사람들은 외형적으로는 사제들이 치장한 옷을 입음으로써 비로소 권위를 갖게 되는데, 그녀는 그런 것이 없어도 권능을 갖춘 것이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귀신들린 자를 만났을 때에, 귀신을 병인에게서 쫓아내고 건강한 사람으로 되돌려놓은 것처럼, 그녀도 신도들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 여교역자의 형제들도 그날 거기에 와서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 형제들도 모두 목회자이다. 그 형제 중에 한 분도 주변 오지에 들어가 개척을 하고 한 평생 목회를 하였는데, 그도 그의 누님이 갖추고 있는 권능을 갖추었다. 그분의 교회 신도님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정말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을 보여주는 목회자이다. 그녀의 가족들에게서 현저히 나타나는 그 무엇은, 세속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오직 복음서를 읽어야만 나타나는 ‘권세 있는 교훈’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그녀의 형제들이 목회하는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도시에서 프로그램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도들에게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이야기들일 것이다.요한 서신에서 ‘메시아가 여기 있다 하여도 쫓아가질 말며, 저기 있다하여도 쏠리질 말라’하는 삼가 경고의 가르침처럼, 요즈음같이 열심히 밭을 일구고, 아무리 좋은 씨를 밭에 뿌렸다 하더라도, 밤이 되면 도적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분별하기 어려운, 유사한 나쁜 씨들을 수없이 뿌려놓고 가는 판국이니, 알곡과 가라지를 식별하는 일에 일대의 혼란이 온 것이다. 제관식을 거행하며 가운을 입혀주는 일들이 일상화된 세대에서, 사제복을 입은 자들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을 그리스도께서 보이셨음을 경전에서는 읽었으나, 저들은 어떻게 그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을 전하는 사역자가 될 수 있었을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2-22
  • 성육신한 예수교회-33
    신약전서 마태복음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제일 먼저 나온다. 그리스도의 계보란,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의 족보라는 말이다. 메시아의 계보이니 얼마나 거룩하겠느냐 마는, 안타깝게도 이 세상의 아무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인간적이고, 사람 냄새가 물씬물씬 배어있는 역사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사람으로 태어나셨으니, 짐승의 우리에서 나는 냄새 뿐 아니라, 사람 냄새도 흠뻑 젖어있는 것이다. 랍비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들마저도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그 이야기들을 경전처럼 귀히 여겨서 백성들로 하여금 외우고 낭독하게 하였다. 서기관들과 랍비들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정제된 이야기로 갖추어지면, 또 다시 그 이야기들은 랍비가 보는 앞에서 아이들이 낭독하며 토론하고 재해석하는데, 그 모두가 개개인과 사회의 지혜가 되는 바탕이 되었다.랍비들 못지않은 우리 신약 기자들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네 땅에서는 설교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고서는 즉시 축도하고 내려오는 바람에, 그 이야기는 우리네 이야기가 되질 아니하고, 다시금 경전 속으로 숨어버린다. 영국에서는 영어로 서민들에게 읽혀지도록 성경을 번역하고, 더 나아가서는 서민들도 글을 읽고 쓰고 볼 수 있도록 교회에서 글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광경은 영국과 우리 땅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그런데 우리네는 거기서 더 나아가질 못하고 성경을 읽고, 서로 토론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시킨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도들 영성이 깊지 못한 것이 이것과 전혀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메시아의 계보 소개가 마치자, 야곱이 낳은 요셉, 곧 마리아라는 처녀와 정혼된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중심이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 중심’으로 엮어 졌으나, 마태에게선 그녀와 정혼된 ‘요셉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아마도 이야기꾼이나 희곡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나, 촬영장에서 영화를 감독하는 이라면 더더욱 ‘요셉 중심’의 스토리를 놓칠 리는 만무할 것이리라. 부모님들에 의해서 정혼되어 혼사 날을 기다리던 요셉이란 청년은 갑작스런 불길한 소식을 듣게 된다. 마리아란 처녀가 임신을 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오래 전에 나사렛 마을에 들린 적이 있는데, 그 곳의 정혼된 처녀가 결혼 전에 이미 임신이 되었는데, 그 처녀의 아비가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던지, 그만 자신의 딸을 돌로 쳐 죽인지 채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지방은 혼전에 아이를 갖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게 여기는 일인지를 시사 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신부 측 아비가 혼례식 첫 날 밤에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신부의 방에서 나온 하얀 손수건에 묻힌 그 붉은 색을 보고서는, 동리사람들에게 ‘이것을 보라’라고 소리를 치면, 통과 례가 방점을 찍고 잔치의 흥은 더욱 깊어만 간다.오늘의 젊은이라면 어떻게 이러한 처사를 해결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요셉이 소문들을 들었을 때에는, 동리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나, 집안의 어른들의 근심을 모른 채 할 수 없게 된 터이었다. 공이 마리아에게서 요셉으로 온 것이다. 아마도 요셉의 생각이 깊질 못하다면, 그 처녀는 그 날 밤에 돌무더기에 덥힌 싸늘한 주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청교도들의 마을에서 이러한 일들이 항시 있어 왔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나다나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도 비쳐진 바이다. 종교재판이나 인민재판에는 승자가 없다. 모두가 패자가 될 뿐이다. 오늘 날에 시청 앞에서 벌어지는 촛불 집회도 역사적인 어리석음에서 자유하질 못하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마저도 회당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고서 못질을 하고는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워 죽게 하였다. 이런 일들은 그가 태어나서 개혁을 일으킨 지 오백년이 되도록 신학자들마저도 덮어 버린 것이었지만, 아벨의 피는 여전히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인간 사회에 만연된 죄악과 지나친 분노와 위장된 거짓들을 천사에 의존하여 풀어 간다. 이러한 일들에서 굳이 천사의 도움을 받음은 사람이 결코 해결하지 못해서일까? 요셉처럼 혼란스러움에 빠지면 정말 천사가 달려오기는 하는 것일까? ‘신의 일식’처럼 광기에 취한 히틀러가 유대인 육백만을 가스실로 내몬 처사를 보면, 지옥마저도 지금의 북한처럼 할 말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음’을 알았고, 해가 떠오르기 전, 그녀에게 즉시 달려가, 증오와 광기에 노출된 그 여인이 돌무더기에 덮여지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우리의 메시아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2-15
  • 성육신한 예수교회-32
    요한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서론격인 1장을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세세히 묵상하여 보면,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1절에서 18절에 기록된 송영일 게다. 이 송영을 오늘의 복음송들 중에 특히 경배송들과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많다. 요한의 공동체가 기록한 송영은 요한복음서의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짧은 노랫말에 모두 담아낸 것이다. 6-8, 15절에 삽입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빼고서 다시 읽어보면, 시인의 시상과 노래하는 음률이 그대로 살아난다. 아무리 수만 번 다시 읽어도 이 노랫말은 경이롭기만 하다. 과장법이라는 생각이 들 수는 있어도,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랍비이던 서기관이던 제사장이던 선지자 철학자라도, 심지어 아브라함이나 모세라 할지라도, 그 아무라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독생자(獨種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계시하시므로, 저들 요한 공동체의 신도들은 드디어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저들은 고백하며 노래하고 경배한다. 우리가 곡조와 음률과 노랫말을 함께 들음으로서 온몸과 영혼이 전율하며, 이성과 영이 하나가되어 청중들과 함께 공감을 이루는 곡을 말하라고 하면, 베토벤의 교향시 ‘환희’가 아닐까? 이 교향시는 우리 찬송가에도 나와 있긴 하지만, 작시자의 원 뜻을 너무나 손상시켰기에, 교향시 원곡을 들을 때처럼 감동이 일지는 못한다. 그러나 원곡 그대로 듣는다면, 그런 감동과 이 요한 공동체의 송영이 다르질 않을 것이다. 요한교회의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거룩한 구원 사역과, 본을 보이심을 서로 나누면서,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영광을 보고 그대로를 그려내는 화가 렘브란트처럼 저마다 예수를 사람들에게 그려줄 수 있었다. 이 교회의 신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들이 들려주는, 낭송하는 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아무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리를 얻게 되었음을 의심치 않았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들어가 여러 날 있다가 산 아래로 내려 왔을 때에, 그 얼굴로 반사되어 나오는 거룩한 광영을 차마 백성들에게 보일 수 없어서 수건으로 얼굴을 싸서 숨겼다. 이처럼 주님의 임재 가운데에서 머무르면,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거룩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일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권세가, 마치 임금의 양아들이 된 자들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권력을 거머쥔 실제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던 것이다.이들이 고백하며 노래하며 찬양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구약을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시인들과 서기관들과 랍비들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입술이 모두 헤어지도록 낭독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신앙의 연속성에서 이제야 역사적 인간 예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실제로 보았고, 들었고, 아는 바가 된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바와 같이, 진리를 안다는 것이 이성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경험하고 누리는 자체를 모두 내포함인만큼, 이 공동체는 예수로 인해서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진리를 아주 풍부하게 경험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진리’란 가시적인 현상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실체’란 뜻이다.‘계시’란 계시하는 자와 계시된 자가 하나이질 않으면 불가하다. 사람이라야 사람을 보여줄 수 있듯이, 하나님이라야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기에, 인간으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저를 보내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이었다. 요한 교회의 신도들은 저마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와 권력에 동참한 것이다.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누구든지’ 이다. 결코 집단으로 경험된 것이 아닌, 개개인이 저마다 인격적으로 믿고 경험된 예수였다. 그래서인지 요한 일서에서도 강조하는 것을 보면, 한 집단의 지도자나 그의 지혜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기름 부어짐으로 인해서 인지된 식별능력이 돋보인다. 요한교회의 생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에서 솟아나서 흘러나오는 교회이다. 정부도 붕괴되고 국가도 붕괴되고 교회도 붕괴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개개인의 배에서 생수가 샘솟아서 흐르는 교회는 온 세상을 넉넉하게 살려내는 교회가 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2-08
  • 성육신한 예수교회-31
    유대인들의 기도문 중에는 여자로 태어나질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는 기도문이 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을 아니 가질 수 없었던 한 생도가 랍비에게 물었더니, 랍비가 이르기를, 이는 남자로서 그만큼 국가에도 책임을 지고 있듯이, 남자가 여인보다도 무거운 책임을 지닌 것임을 뜻하며,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 중차대한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는 긍정의 기도라고 설명하여 주었다. 아무리 완벽하게 기록된 기도문이라 하더라도, 조금은 시대나 상황에 따른 차질도 일어나고, 심지어는 괴리가 되기도 한다. 회당에서 매일 드려지는 기도 가운데에, 나사렛 당을 없이하여 달라는 기도는, 없어지기는커녕, 전 로마가 나사렛 예수를 신앙하는 정황이 벌어지자, 상당한 고난을 치루는 결과를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성향의 기도가 개선되질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칭 빛을 세상에 비춰준다고 공공연하게 공언하면서,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바울이나 요한의 복음을 집중해서 수차례 읽어가다 보면, 아주 역발상적인 상황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로마서 서신인 두루마리를 여인인 뵈뵈 집사가 고린도에서 바다를 건너 로마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로마서 마지막 부문에 이 서신을 전달하는 뵈뵈를 위한 소개문에서 발견되어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것이 불가하게 여겨졌었는데, 어떻게 그 시절에 여인의 몸으로서 바다를 건너가, 로마의 시민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바울의 복음을 일점일획 자구하나 틀리지 않고, 낭독하며 해설하여 주었을까? 이런 일들이야말로 남자들이 해야 하던 일들이 아니었던가?바울이 가장 중요시하는 그의 사역 마지막에 기록한 복음 내용은,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들어났듯이 오해의 소지들이 있어서, 자칫 잘못하여 사사로이 해석했다가는 바울도 추락하고, 로마서도 추락하고, 바울의 희생이 헌신짝보다도 못하게 되었을 결과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복음이란 실천력이 퇴색하여지면, 이론만 난무하게 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도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하였는데, 끼었던 반지가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서 빠져 나가는 것처럼, 믿음과 행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는데, 이는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바울이 삼여 년 간 가이사랴에서 구금되었다가,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려고 로마 항구에 도착하였을 때에, 뵈뵈가 전한 복음을 읽고서 성숙하여진 시민들이, 줄을 서서 바울의 로마 입성을 환대하였다. 이는 뵈뵈의 복음 전달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사례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아직도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되어 국가의 모든 것을 상실한 1920년에, 어린 나이에 여성으로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여인의 입에서 나온 “두려워 말라”는 강론이나, 1921년의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를 보면, 김활란여사의 가슴과 머리는 얼마나 담대하고 의지가 강하였든지, 한국여성의 기개가 어떠함을 알 수 있다.여인들을 대놓고 응원한 복음서는 어느 복음서보다도 요한복음서가 맨 앞이다. 바울도 여인들을 존중하고 격려하며 차별하지 않았는데, 어느 익살맞은 장난꾼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인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구를 바울 서신에 몰래 집어넣은 것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몇몇 문장을 첨부함으로써 그 진리가 가진 가치와 뜻을 퇴색시키려는 것이다. 일본의 독도 주장이라던 지, 중국의 광개토대왕비의 훼손 사건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뇌가 있는 자라 하면, 누구라도 복음서 자체가 진리를 변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지금도 여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이 지상에서 가장 소외된 사마리아여인을, 유다의 가장 최고봉인 학자와 견주어서, 가장 명백하게 복음의 빛을 받아, 생수가 솟아나는 인격자가 되었음을, 복음서 앞자리에 상정시켰다. 어디 이 뿐이랴? 복음서 맨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의 대화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요한교회의 어머니가 된다. 요한교회가 어떻게 여인들을 존경해 주고, 지도자의 자리에 함께 앉게 하였을까? 오늘 같은 이 혼란스러운 정국에서도, 묵묵하게 예수를 잉태하고, 그리스도를 양육해낸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1-24
  • 성육신한 예수교회-30
    한해 전인 것 같다. 전국 규모의 목회자 세미나가 한 곳에서 열렸다. 한 연사가 나와 자신의 목회 성향을 말하게 되었는데, 자기 자신은 신도들에게 은사활동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늘의 교회 부흥과 성장이 마치 개개인의 은사활동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란 말처럼 들렸다. 요한복음에서 저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의 전인(全人)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선포하였다. 요한은 이 예수의 말씀에 주(註)를 붙여서 이르기를, 이 생수는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개개인이 받는 ‘성령’이라 하였다. 현재 한국교회를 점검하여 보면, 신도 개개인이 영적이면서 스마트하게 판단하는 결정 능력이 부재하다. 이는 우리교회의 구조가 예수교회 이전인 모세교회의 구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교회의 시스템에서는 비전을 보고, 음성을 듣고, 결단하는 이는 한 사람이다. 오로지 그 한사람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중세기의 왕권신수설을 빼닮은 꼴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임무와 자격을 받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이 특화된 지도자를 따르기만 하면 되기에, 매우 간편하고 쉬운 구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는 지도자가 모두 책임을 지는 구조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의 교회는 이미 유대교에서도 문을 닫은 지 오래이다.주후 70년부터 유대교조차도 이러한 피라미드교회를 신속하게 탈피하였다. 유대교회는 얼마나 스마트하게 발전되고 진화하였던지, 유대인 개개인이 경전을 외우고 실천할 수 있는 제자로 훈련된다. 예전부터 유대교회는 국민 모두가 모세오경을 점하나 틀리질 않게 외워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을 지켜왔다. 그 중에서도 랍비 가족은 시편이나 전도서를 더 외워서 매일같이 낭독한다. 이들이 제자를 삼은 국민 개개인은, 언제 어디서나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돌보는 데에 게으르질 않았다. 시문서나 선지서(사 2:3; 미 4:2) 등에서도 ‘율법’과 ‘말씀’을 서로 교차하며 사용하는가 하면, 탈굼에서는 이미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를, ‘말씀을 맞으려고’로 바꿔서 사용한다(출 19:17). 개개인이 경전을 낭독하고 토론하고 학습하면서, 모세가 야훼하나님의 구름기둥(쉐키나) 가운데에 섰던 것처럼, 국민 개개인을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듯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과 경건의 효과로 인해서 이들에게 나타나는 외적인 증거들은 허다하다. 노벨상에서부터 과학기술과 경제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선두자리를 내어주질 않는다. 저들은 크고 화려한 성전 대신, 한 사람 개개인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는 성소를 수없이 세운 것이다.그런데 우리 한국개신교는 칼뱅의 종교개혁 500년을 맞이하면서도, 신학이나 시스템이 500년 전보다도 퇴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이러한 느낌을 받는 것이 나 혼자뿐일까?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아직도 신도들에게 지성소를 개방하질 않고 있다. 신도 스스로가 지성소에 나아가고, 신도 스스로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있고, 신도 개개인의 배에서 성령의 강물이 넘쳐흘러서, 메마른 땅을 적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두려워서 지성소를 독점한 것이다. 권력과 부와 명예가 독점되었듯이 성령도 독점된 것이다. 모세교회에서 제공하는 달콤함은 얄팍할 뿐이다. 중앙 성전에 사람들이 붐비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서서 설득력 있는 강연을 하면, 두드러지게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게 된다. 이 경제력이 얼마나 위력이 있던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만용마저 일으키게 된다. 지도자가 이런 상황에 최면이 걸리게 되면, 그는 주검을 맞이하기 전에는 결코 그 자리를 벗어나질 못할 것이다.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하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우리 개개인을 그의 품안으로 초대한 것이다. 이 소중한 초대를 받은 크리스천 개개인이,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담임목회자들은 지성소의 길을 막을 것이 아니라 열어줘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쏟고, 빛을 비추셨기 때문에, 저는 맏아들이 되시었고, 우리는 주님의 형제들이 된 것이다. 주님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시고, 요한이 그 사랑하시는 주님 품에 늘 기대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신도들에게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터 주어야 한다. 그래야 신도들 스스로가, 야훼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서, 생수를 강 같이 세상에 흘려보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1-10
  • 성육신한 예수교회-29
    교회 밖에서 교회를 들여다보는 세인들은 교회에 대한 신뢰를 져버린 지 오래이다. 요즈음의 교회는 교회 자체에서도 칭의론을 의심하는 신학이 고개를 드는가 하면, 외형적으로는 교인이라 할 수 있겠으나, 내적으로는 신앙의 정체성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추세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증상은, 개 교회에서 실망을 느낀 나머지 좀 더 나은 교회로의 수평이동이 일상화 되었고, 교회에서 교회로 이동하는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교회에 몸담고 있어야 할 뜻마저 잃은 듯, 더 이상 교회에 소속하질 않는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예수가 등장하기에 앞서 세례요한이 나타나게 된 동기는, 더 이상 사제들을 신뢰하는 풍토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부의 사제집단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 쿰란으로 나갔을 뿐 아니라, 이집트로 내려가 새로운 신학을 발전시키고, 시민들을 응집 시켜서 경건생활에 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치적인 불안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부문에서 심한 피로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요한이 나타나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자, 시민들은 모두 그에게 나가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항상 시민들을 씻기고 거룩하게 하는 종교 전례와 의식이 항시 치러졌지만, 시민들은 이에 만족하질 못하고, 요단으로 몰려가 요한에게 세례와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사제들은 이와 같은 돌발적 운동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들어나게 세례요한을 박해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그가 군중의 지지를 집중적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제들과 예수와의 논쟁에서(막 11:30-32), 사제들이 군중들 앞에서 세례요한을 적대시 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타락하고 흔들리면 이렇게 외적으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민을 씻기고 사죄 선포를 하는, 기성 권위와 능력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 것은 이뿐 아니었다. 예수께서 공공연하게 성전 마당에서, 사제들이 성전제사를 위해서 들고 다니는 기물조차도 금하였고, 환전상들의 상과, 제물을 사고파는 현장을 뒤집어엎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놈들아 너희가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이 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동안에 세우리라(요 2:19; 막 11:16,17)’ 하였기 때문이다.집을 세우는 자는 감리 감독자 아래에서 설계도대로 바르게 건축해야 한다. 특히 100층을 넘어가는 마천루를 건설할 때에는 더더욱 그리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세우고저 하신 교회를 예수님같이 세세하게 모두 들여다 볼 수는 없다할 지라도, 이전에 붕괴한 교회들이 거대한 환란을 겪은 후에 어떻게 수습되어 졌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콘스탄틴 이후 교회는 제도화 되었고, 계급과 권력이 들어섰다. 교회의 입교 절차가 흐려졌고, 국교로 선포되다보니 관리들은 거의 크리스천이 되었고, 국민들 모두가 자연스레 기독교에 들어왔으나 거의 신앙고백과는 무관한 기독인이었다. 공산국가의 종교담당 부처가 기독교를 관리하듯이, 국가 부서에 기독교를 관활 하는 부처가 생겨났고, 하나님나라가 세속 정부의 관할 아래 들어간 것이다. 교회가 성령이 임하시므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제도로써 갖춰진 세속적 종교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런 제도권에서 임직식이나 헌당식을 거행할 때면, 으레 성령이 이루셨다는 정도로서 방점을 찍긴 하나, 성령보다는 교회의 제도가 앞서는 것을 바로잡질 못하였다. 예루살렘 성전 붕괴 후에는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유대교도 스마트하게 재정비 되었지만, 교회는 구제도에서 뚜렷이 탈피하였다. 교회가 유대 지경을 넘어서 세계로 나갔으나, 이방인의 종교제도를 모방하지 않은 새로운 교회였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오염되고 잘못되어져 있다면, 굳이 구습과 전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맨 처음의 교회처럼, 기도처 형식으로 단순화 시키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회는 거의가 권사이거나 장로이다. 유교적 관습에서 직분을 갖는다는 것은 구원이고 권력이며 계급이다. 이 같은 제도에서는 성령이 운행하시는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은 매장되고, 하나의 종교단체로 전락된다. 교회가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와 이권에 노출된다. 이러한 제도에서는 신도 개개인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랑의 열매를 맺음에 비효율적이다. 초대교회가 구 교회와는 철저하게 다름으로 차별화 되었듯이, 우리 한국교회가 오백년의 칼뱅 전통이나 백여 년의 구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활로를 개통해야 할 시점에 들어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1-02
  • 성육신한 예수교회-28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라야 반석위에 집을 세운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과장법이나 강조점을 대할 때에는 오늘의 우리들도 문자적인 것과 상황적인 것에서 고민을 피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고 실천함에 있어서 외형적으로는 상당히 완고한 것을 느낄 수 있으나,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과 관련하여, 율사들이나 서기관들에게서 논쟁과 토론을 거쳐 지속적으로 발전되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성격상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나, 사람이 안식일에 숨을 거두는 것과, 아이가 안식일에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랍비들이 백성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되면, 옹색하게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안식일의 논쟁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답하였다.공동번역 마카베오 상 2:27-48에 보면, 안식일에 싸움을 거부한 나머지, 시민들이 몰살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항상 지켜오던 안식일 규례와 전통을 재해석하질 않으면, 앞으로는 씨가 남질 않게 되는 결과가 오게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래서 이들은 안식일보다는 생명이 우선임을 내세우게 되었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안식일에도 적과의 전투에서 맞서 싸우기 시작 하였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과 관련해서 잠언에도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있고, 산상수훈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옥토에 떨어진 씨의 비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선조들이 중요시 한 가르침 중에 세 가지는, 미쉬나에도 기록되었듯이, 성전 예배에 참여하는 의무와, 율법 준수와, 적극적인 윤리실천이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에게서도 항상 강조하신 바다. 이러한 가르침은 특히 스데반과 같은 일곱 집사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저들이 원시교회에서 제일 먼저 선택되어진 것도 성령도 충만하였지만, 훈련받은 가르침을 지킴에 있어서 탁월한 실천력이 있어서, 회중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탁월하였으나, 당시대의 랍비들의 가르침이나, 전통적인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가르침들이 버터처럼 복음서에 흠뻑 스며들어있는 것은 진리의 보편성 때문이다.예수님을 찾아와서 신의 한수를 배우려는 듯이 질문을 하는 사례들이 수없이 많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질문 가운데에 몇 개만 추려서 기록하였다. ‘너의 이웃은 누구냐?’ 라는 질문에 선한사마리아사람이 등장 되었듯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나 레위인들은 모두 전통과 예전에는 숙련되어 있었어도, 실제 삶에서의 윤리적 실천에는 경전의 가르침에 접근하질 못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에게서도 신앙 양상이 다르질 않다. 복음서의 책무도 과거의 종교인들의 가르침과 오늘 우리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르고 차별되어지는가에 대답해 주는 것이었다. 예수가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쳐 주신, 명백하게 차별화된 신의 한수는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상을 전달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오직 자기 자신을 떡과 생수로 내어 놓으려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가져 왔는데, 그 선물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시다. 여기에 기독교의 해답이 있는 것이다. 예수가 주시는 물을 마시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온 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뜻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풍요하게 하심이다.한 지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마음에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네, 저에겐 ‘사랑’이란 단어와 ‘아바 아버지’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제 마음에 꽉 차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아버지’란 단어와 ‘사랑’이란 단어로 가슴을 가득히 채운 분이라면 그야말로 예수님이실 것이리라. ‘아버지’라는 말과 ‘사랑’이란 말은 실천에서 얻어지는 언어이다. 자기 스스로를 선물로 내어놓을 수 있어야 비로소 아버지가 되고, 사랑에 눈을 뜨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를 이단아라고 매도하던 율사들 중에 하나인 니고데모가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뵈었다. 예수께서는 저에게 친절하게 말씀을 건네었다. ‘사람은 위에서부터 출생해야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보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셨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0-21
  • 성육신한 예수교회-27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들이 대형화되고 물질과 권력이 풍요해지면서, 교회의 비중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높아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론이나 성령론이 교회론에 잠식되었거나, 교회론적인 그리스도론, 혹은 교회론적인 성령론으로 질서가 왜곡되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만큼 성령론을 왜곡시키고, 성령의 선물들을 부끄러워하고, 성령의 은사들이 무시되고,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의 임재가 이렇게 한국교회에서 퇴색되어진 때는 없었던 것이다. 저마다 교회의 성장에 욕심을 과하게 채우려하다 보니, 교회 자체가 갖추었어야할 열매들이 빈궁한데다가, 신도 개개인에게 갖추어져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들이 매우 궁핍해진 것이다. 교회들과 교단들이 교황청이나 교황보다도 얼마나 강하게 비춰지는지, 서로가 양보하질 않고 대치하는 것을 보아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나 여력이 모두 소진된 것처럼 보인다.예루살렘 교회가 쇠퇴해지고 패망하였을 때에, ‘누가’는 ‘성령론적인 교회론’의 깃발을 올리고 새로운 교회로서의 항해를 시작하였다. 누가복음에서는 교회의 주도권을 제사장들이나 대제사장에게 넘기질 않는다. 이미 사제권을 발동하던 성전중심의 교회제도가 패망하였기 때문이다. 성전의 중심에 있으면서, 제도권의 권좌에서 권력을 누렸던 사제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어단 이후로는 이천년 넘도록, 그런 성전을 다시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사도행전을 설교하면서도, 누가가 세우려는 교회보다는, 패망한 사제집단들이 고수하던 성전중심의 교회를 다시 세운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행보인가?누가는 사도들의 행전에서 조차도 사도들에게 주도권을 주질 않았다. 사도행전에서는 마치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그의 교회를 넘기려는 듯이 하질 않았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여호수아는 다행스럽게 모세의 후유증상에서 한층 자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마저도 모세의 손길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야훼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수가가 믿음으로서 황톳물로 넘쳐나는 요단강을 넘어설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모세에게 예속되질 않고, 모세의 그림자에게서 떠나 여리고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가는 예루살렘 패망 이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결코 사도들 중 누구 하나를 특화시키질 않았다. 누가는 보편적으로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누구이든지, 그는 권능을 받게 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리라.’ 하였다. 누가는 마치 한 인간의 권력이나 제도에 의해서 교회가 서게 되는 것처럼 복음서를 구성하질 않았다.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서 비로소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처음 교회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에도, 누가는 그 핍박의 모진 파고와 풍랑을 이겨내는 영예를 사도들에게 주질 아니하고, 일곱 집사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살게 된, 얼마 안 되는 헬라 말을 하던 유대 교민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이 오늘의 교권을 주장하는 제도권처럼, 사람에게 매여 기록이 되었더라면, 전혀 지금의 사도행전 같은 기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측하여 본다면, 먼저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러고 나서 다른 이들이 성령을 받게 되고, 아마도 추측하건데, 일반 신도들은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게 됨으로서 비로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졌을 것이다.누가는 심지어 바울에게도 사적인 특권을 부여하질 않았다. 바울에게도 바나바와 같은, 교회가 파송한,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로서의 칭호를 사용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적인 역량과 권능을 갖추었음에는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위탁하였던 것이다. 잘못 관찰되면, 바울이 마치 예루살렘의 제도권의 권위 아래에 있는 듯하지만, 그는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사도로서의 사역에 힘썼던 것이다. 사마리아 교회가 마치 사도들의 안수로 인해서 성령을 받은 것처럼 인식되는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마리아의 구원마저도 성령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교회론적인 성령론이 아니고, 성령론적인 교회를 세우고 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가증된 것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차지하도록 방치할 것이 아니라, 누가의 강령처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와 같이, 그 자리를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 내어드려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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