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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목사도 아프다. 단지 견디고 있을 뿐···”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향한 국민들의 비난이 거센 때다. 정부와 언론에 의해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된 교회는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바닥 끝에 맞닿아 있다. “예배 내 감염은 없었다”는 정부의 마지못한 인정이 이제 와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여전히 교회 예배를 코로나 확산의 분기점으로 몰아가려는 그들의 의도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교회의 잘못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 교회로 인한 감염은 있었고, 그것이 국민들의 염려를 산 것은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굳이 확산 규모로만 잘못의 크기를 가늠하려는 일부의 잣대는 스스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자처한 교회의 사명에 모순될 뿐이다. 교회를 향한 부조리한 탄압과 부정할 수 없는 죄책이 공존하는 시대는 목사들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 진실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진 교회를 지켜내야 하는 목사들이지만, 그 어느 쪽을 택해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한겨울 찬서리 가득한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가 지배했던 지난 1년은 목사들에게 있어 초창기 한국교회 못지않은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목사들은 결코 아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힘겨워 하는 성도들의 고통을 온전히 나눠야 했던 목사들은 그들의 아픔 위에 자신의 아픔을 더할 겨를도, 여력도 없다. 아픔을 덜고자 찾아오는 성도들 앞에 자신의 아픔을 드러낼 수는 없는 법, 사람들의 모든 걱정을 대신 짊어진다는 옛 인디언의 ‘걱정인형’처럼 목사들은 현재 이 시대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 매일 같이 한국교회와 국민들을 향해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한 목사가 떠오른다. 정부에 굴복했다는 내부의 질책과 예배강행은 종교이기주의라는 국민들의 비난 사이에 그 모든 책임을 온 몸에 떠안으려 하는 그를 보며, 어느 순간 목사에 대한 비난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진 이 시대가 참으로 안타깝고, 불편하다. 하지만 목사도 아프다. 단지 목사이기에, 주님을 닮아야 하는 사명자이기에, 매일 지옥같은 아픔을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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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1-03-18
  • [기자수첩] ‘코로나와 한국교회’ 국민들의 신뢰회복이 먼저
    새해 초부터 교회와 관련한 계속되는 코로나 확산 사태에 국민들이 또다시 염려하고 있다. 어느 순간 코로나 시대의 ‘슈퍼 전파자’로 전락한 교회에 대해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공격적 여론이 심히 과도한 것은 사실이다. 교회 관련 시설에서 일부 코로나 확산이 이뤄진 것을 부정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교회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억울한 면이 크다. 지금 언론은 교회 확진 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은 뒤로한 채, 일부 국민들의 반교회적 정서를 자극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언론들의 입장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기사는 독자들에 소위 ‘먹히는 장사’인 것이다. 코로나 시대 교회가 감염의 원흉이 된 것은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과 이에 호응하는 언론들이 크게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두를 정부와 언론의 탓만 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지난 1년여 간 교회 혹은 교회 관련시설에서 수많은 확진 사태가 발생했다는 1차적 전제는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매개라는 부정키 어려운 증명이 되고 있다. 정부와 언론들은 교회가 제공한 작은 매개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200% 활용했을 뿐이다. 그러한 행태가 심히 저급하고, 다소 억울하기까지 하지만, 지금도 계속 출몰하는 새로운 교회 관련 확산은 그 억울함에 대한 자그마한 동정조차 불허하고 있다. 백신이 개발됐다고는 하지만 지속적인 변이의 출연과 백신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은 올해 역시 지난해와 다름없는 한 해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측 속에 교회는 어떠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인가? 또다시 별다른 대비없이 그저 그때 그때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에만 1차적으로 반응할 것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코로나 정책에 있어 분명 패배했다. 실패라는 표현보다 패배라는 말이 적당한 것은 코로나 확산에 따른 예배 제재가 단순히 과학적 영역만이 아닌 정치적 영역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변화가 없는 한 한국교회는 올해 또 다시 패배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 싸움이다. 한국교회의 지난해 모습은 작전도, 대책도 없이 그저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혈기 가득한 병사와도 같았다. 한국교회를 위한다는 그 신념은 분명 높이 사야하지만, 그것이 결코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각자가 품은 신념이 서로 다른 상황은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잃게 만들었다. ‘내분’ 전쟁의 패배를 담보하는 최악의 상황을 한국교회가 자초한 것이다.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힘의 결집이다. 각자의 신념보다 한국교회 전체의 대의를 우선해야 한다. 어차피 방법이 다를 뿐 한국교회를 위한다는 모두의 생각은 같은 터, 대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힘을 한 곳에 모을 필요가 있다. 정부와 방역정책에 대한 협의를 담당하고 있는 한교총이 지난해 나름의 여러 전략들을 내놓았지만, 만족할만한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그 전략을 실현시켜줄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협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보다 우위에 서는 것인데, 지난해 코로나 정국에서 이러한 모습은 연출되지 못했다. 오히려 교계 내부에서 이를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듯한 모습은 반대로 정부에 힘만 실어 주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예배를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일부의 비난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나마 정말 힘겹게라도 예배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새해 한국교회의 예배 회복을 위한 코로나 전략이 성공키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론이 중요하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여론 정책에 완전히 실패했다. 앞서 언급했던 언론들의 왜곡보도를 제대로 바로 잡지 못했고,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치를 전혀 충족치 못했다. 가뜩이나 코로나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던 상황에, 코로나란 극한의 위기상황에서 드러난 교회의 이기적인 모습은 국민들의 실망을 분노로 뒤바꾼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교계 내부의 지지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여론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 한국교회의 코로나 전략이 힘을 발휘할리는 만무하다. 더구나 이런 정서에 아랑곳 않고, 자기의 신학적 신념만 우선하는 일부 교회의 태도는 국민들의 공감을 전혀 얻지 못한 채, 종교 이기주의의 표본으로 굳어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정국에 있어 분명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침해 당했고, 대부분 올바르게 방역지침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는 억울한 오해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억울함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이 없다면, 코로나 정국에 있어 한국교회는 영원히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새해 방역 협상 일선에서 펼치는 한국교회의 전략이 효율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교계는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하나됨은 교회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우선된 전제다. 여기에 교회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교회가 국민들과 대립해서는 안된다. 그 어떤 교회 역사에서도 국민들과 대립하는 교회가 부흥한 적은 없었다. 새해 하나됨으로 승리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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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2021-02-01
  • [기자수첩] “정인아 미안해”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실험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 손에 겨우 감길만한 16개월 된 아기가 온 몸의 뼈는 골절되고, 장이 터져 나갔다. 뱃속 가득히 피가 고여 울음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폭력은 계속됐을 것이다. 정말 악마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의 잔인함이다. 뉴스를 보며 ‘악마를 보았다’는 말이 무색한 것은 악마를 넘어선 잔인함은 물론이고, 일말의 죄책조차 없는 뻔뻔함 때문이다. 제발 이 뉴스가 현실 아닌 영화이길 바랄 정도로, 눈을 감고 싶었고, 귀를 닫고 싶었다.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상상하려만 해도 발끝부터 저려오는 몸서림은 정인이가 겪었을 고통의 1/100도 체감치 못할 비겁한 어른의 무관심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 모든 학대의 주범으로 의심받는 양모의 부친이 바로 목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준다. 더구나 목사의 사모이자 양모의 모친은 바로 어린이집의 원장, 윤리와 도덕, 사랑과 포용의 상징적 인물인 그들은 ‘악마’를 키워낸 장본인들이었다. 정인의 양모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온 ‘악마’는 아니었을 테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싹틔웠을 악의 씨앗이 목회자 부모가 일군 결과물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다. 양모가 보여준 악마의 끔직한 본성은 그 부모의 얼굴을 투영한다. ‘목사와 악마’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두 존재의 공존을 목도함은 우리 의 역사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긋남의 시작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어느 순간 한국교회의 윤리 기준은 그 중심점이 심히 낮아졌다. 종교인으로서의 완벽한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함으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해가 자연스러워졌다. 목회자의 양심도 법이 판단하는 시대가 된 것은 ‘최소한의 도덕’일 뿐인 법을 지키며, 그것을 심히 당당해 하는 씁쓸하기 그지없는 윤리 의식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이 절대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의 현실을 대변할 수는 없다. 냉정히 지극히 예외인 경우로, 이를 교회, 목회자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죄해야 한다. 정인이의 죽음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무관심의 학대였다. 모두가 가해자였고, 죄인이다. 이러한 사건이 우리사회에 일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교회는 책임이 있다. 윤리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책임은 정인이에 대한 사죄와 별개로 우리가 마땅한 짊어져야 할 몫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1-09
  • [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One’과 한국교회의 ‘Win’
    한동안 정체 되었던 한국교회의 대통합 운동에 또다시 불이 붙을 태세다. 현 한국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꼽히는 소강석 목사가 지난 9월 총회에서 ‘원 리더십- 원 메시지’라는 시대의 구호를 발표한 뒤, 하나됨에 대한 교계의 열망은 다시 들끓어 오르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교총의 차기 공동대표로서 내년 자신의 모든 역량을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재건하는데 매진할 것이라고 수차례 공언하며,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기대까지 한껏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기총에서 한교연으로, 그리고 다시 한교총으로 이어지는 연합운동의 3단 분열 속에서 한국교회가 받은 상처는 실로 엄청났다. 물론 하나됨을 위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편승해,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한 그들만의 욕심은 결국 또다른 분열만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교계에 있어 ‘통합’이란 말은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처럼 아무런 신뢰도, 별다른 기대도 주지 못한다. 통합에 대한 의지나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말로만, 문서로만 반복되어 온 ‘통합’이란 두 글자는 어느순간 한국교회에 있어 ‘거짓’의 또 다른 표현이 됐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 ‘One’의 절대성을 주창하는 소강석 목사를 향한 들끓는 기대의 한 편에는 여전히 트라우마 가득한 불신이 자리함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거울의 양면처럼 소 목사가 말하는 ‘One’의 뒷면에 무엇이 새겨져 있을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미 바닥 깊이 추락해 앞뒤를 돌아볼 여력조차 없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과연 그 의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반복된 거짓말에 진력이 난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외면한 순간, 늑대는 나타났다. 그리고 양들은 몰살 당했다. 연합단체의 ‘하나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앞선 그들의 행태가 꽤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됨’의 사명을 외면한다면, 결국 양들을 잃는 것은 우리 한국교회일 뿐이다. 현재 각종 유튜브와 SNS, 온라인을 통해 쏟아지는 소강석 목사에 대한 비난은 단순 ‘유명세’라고 하기에는 심히 도가 지나친 감이 크다. 더 안타까운 점은 그 대부분이 한국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총질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외치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 동시에 정부에 굴복했다는 비난을 가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 지독한 모순일 뿐이다. 냉정히 한국교회가 가진 지금의 힘을 과연 크다고 볼 수 있나? 분열을 반복한 한국교회의 현재의 모습은 차·포 떼인 장기판이자, 무기와 갑옷을 잃은 군대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최악의 상황에서 그나마 이룬 최선의 결과였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은 바로 그 힘을 되찾는 결정적 방편이다. 반 기독교정책에 몰두하는 정부에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기독교의 예배와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당장 눈 앞의 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 없이,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회복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한 곳을 모으는데 집중해야 한다. 적어도 2021년, 한 해 동안만이라도 한국교회 전체가 지난 트라우마는 덮고, ‘하나됨(One)’을 통해 반드시 ‘승리(Win)’하겠다는 절박한 소망을 쏟아내기를 기대해 본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11-24
  • [기자수첩] 기독교는 좌도 우도 아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초장기전으로 접어들며, 국민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설상가상 갈수록 고조되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이념갈등은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신음하는 국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는 중이다. 사실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갈등이야 늘상 있었던 일로 그리 새로울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보지 못한 극단적 이념간의 충돌은 조금의 타협점 없이 서로의 막장을 향해 치닫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충돌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의 양 끝에서 그 어느 집단보다 강력한 행동으로, 각자의 진영을 주도하고 있다. 단순히 교회만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한 이념 주입에 몰두 중이다. 주사파, 빨갱이 등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반공이념들이 지금 이 시대에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교회라는 거대한 매개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이념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극단적일지는 몰라도 엄연한 하나의 정치적 신념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이 세상을 진짜 우려케 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선동하는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기 이념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소위 극우, 극좌로 불리는 이들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 사고와 발상으로 교계와 사회, 국민을 가르고 있다. 일부 극우 기독교 세력은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빨갱이, 주사파, 종북주의라는 험한 말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반대로 일부 극좌 기독교 단체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대다수의 교회를 향해 ‘근본주의 개신교 집단’이라는 낙인을 씌웠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 사고에 얽매이다 보니, 어처구니 없는 사태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교계에서 익히 알려진 골수 보수 목회자들을 향해 광화문에 나오지 않고, 정부에 대해 적극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주사파’로 매도해 버린다. 마찬가지로 교계를 대표하는 진보 교단들인 예장통합과 감리교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함으로, ‘근본주의 집단’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기독교는 중립의 종교다. 각자의 정치적 개성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보수도 진보도 모두 복음 안에 품는 포용의 자세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잘못된 생각으로 규정하거나, 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09-12
  • [기자수첩] 결국 편을 갈라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한국교회는 소모적 논쟁만 하지 말고 서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내일의 힘을 제시해야 한다. 편 가르기는 안된다” - 소강석 목사 - “하나님은 목숨걸고 예배에 집중했던 목사들을 높일 것이고, 정부와 싸우지 않고 꼬리 내렸던 목사들을 낮출 것이다” - A목사 - 극우성향으로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성결교단 소속의 A목사가 예장합동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에 대한 뜬금없는 ‘디스(disrespect)’로 빈축을 사고 있다. A목사는 최근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소강석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 정말 실망입니다”라는 영상을 게재하고 소 목사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을 가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소강석 목사는 교회를 탄압하는 정부에 굴복했고, 교회는 정부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인데, 그저 “교회 내부의 갈등을 지양하고 서로 힘을 합치자”는 소 목사의 호소가 그토록 비난받을 일인지, 무리한 흠짓내기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앞서 소강석 목사는 자신의 SNS를 통해 비대면 예배를 둘러싼 한국교회 내부의 첨예한 갈등을 염려하며 “절대 편 가르기는 안된다”고 호소한 바 있다. 소 목사는 현 한국교회의 갈등을 소설 ‘남한산성’ 속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에 비유하며, 결국 모두가 나라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소 목사의 발언에 A목사는 자신의 유튜브에서 “잘못된 영향력, 생각, 가치관”이라며 공격의 시동을 걸었다. 특히 소 목사를 향해 “치사하다” “교묘하다” “약았다” 등의 원색적인 비난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A목사는 시종일관 글의 본래 의도는 외면한 채, 왜곡된 해석으로 일관했다. 특히 소 목사가 예배의 중요성을 공감하며 “광주신학교 시절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수요예배를 지키기 위해서 성경 찬송을 들고 예배를 드리러 갔다”고 언급한 일전의 에피소드를 두고, “서슬퍼런 군부독재에도 목숨을 걸었던 소강석 목사가 왜 지금은 목숨 걸고 예배를 드리지 않나?”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왜 교회 지도자로서 교회를 탄압하는 정치권에 아무 말도 하지 않나? 그 대단한 인맥을 가지고 왜 이를 철회해 달라고 하지 않나?”며 “신학생 때와 달리 지금은 잃을게 많아서? 지위가 높아서?···”라는 비아냥을 잊지 않았다. 허나 소 목사는 이 부분들에 이미 수차례나 답한 바 있다. 소 목사는 “군부독재로 인한 예배 제재였다면 내가 먼저 누구보다 앞장서 목숨 걸고 싸워 예배를 지켜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와 다르다”며 “혹시라도 예배 중에 확진자가 속출하며 그 비난은 고스란히 한국교회 전체가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예배를 강행함으로 있어 생길 수 있는 교회 혹은 제3자들에 대한 피해를 염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A목사는 소 목사가 말만 할 뿐 실제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판키도 했다. A목사는 “불이익을 당한 교회를 위해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는데 폐쇄당한 교회가 있다. 왜 가만히 있나? 뭐하고 있나? 얘기를 해 달라? 안하지 않나?”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소 목사와 새에덴교회는 강제폐쇄 위기나, 행정명령을 받은 교회들의 제재가 해제되도록 물 밑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를 대놓고 홍보하거나 알리지 않았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자신의 글 수상 경력을 소개하며, 소 목사의 글이 교묘하게 예배를 강행한 교회들을 비난한 것이라는 전문가적 견해를 자랑키도 하지만, “내 안에는 김상현(척화파)도 최명길(주화파)도 있다. 허나 김상헌과 최명길이 소모적 논쟁만 하지 말고 서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내일의 힘을 제시해야 한다”며 소 목사가 대놓고 드러낸 글의 본질적 주제는 어째서인지 애써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부의 편 가르기는 절대 안된다고 말한 소 목사와 달리, A목사는 둘의 확실한 경계를 그었다. A목사는 “코로나19가 지나가면, 불이익, 욕 먹을거 각오하고 목숨걸고 예배에 집중한 목사님들은 존경 받고, 하나님이 높이실 것이며, 영향력 있고, 큰 지도자였지만, 정부와 싸움도 못하고 즉각 꼬리 내렸던 분들은 하나님이 낮추실 것이다”고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가 임할 것을 예고했다. 헌데 정부와의 갈등 해결에 있어 대화와 타협을 최우선으로 선택한 것이 과연 이토록 비난받을 일인지 쉽게 공감키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한국교회의 편을 갈라야 속이 시원한 것인가? 한국교회를 광화문과 비광화문 으로 나누고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지금 같은 초유의 위기 상황에서는 단 하나의 가치만이 유일한 정답이 될 수 없다.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애국과 신앙을 실천한다. 자신들만 국가를 살리고 교회를 지켜낸다고 착각하며, 생각과 방식이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분명한 폭력일 뿐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지난 130년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던 현장 예배의 불이 꺼지는 초유의 사태를 마주하고 있다. 이는 예배를 사모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며,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옳고 그름을 가리며 서로를 정죄하고 공격하기보다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견디며 나아갈 때다. 그저 너희들은 잘못됐고, 우리들은 옳았으니 하나님이 우리만 높이실 것이라는 일방적 논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유치한 분으로 만들 뿐, 기독교의 선교에도 교회 회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09-12
  • [기자수첩]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코로나19가 결국 절대 불가침 영역으로 치부됐던 교회의 예배마저 뒤흔들었다.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현장 예배가 중단됐고, 교회의 문은 굳게 잠겼다. 코로나로 교회는 참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성도가 줄었고, 헌금이 줄었다. 재정난으로 문을 닫는 교회가 많아지며 자연스레 교회 수도 줄게 됐다. 전 세계 곳곳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발이 묶였고, 그간 선교지에 쏟았던 공든 노력도 자연스레 퇴색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한국교회가 잃은 가장 큰 가치가 있으니 바로 국민들의 신뢰다. 코로나19로부터 예배가 다시 안전해지면 성도들은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성도가 늘어나면 헌금 역시 자연스레 회복될 것이고, 교회 역시 회복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 선교 역시 다시 활기를 띌 것이다. 코로나만 해결되면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사회적 신뢰는 결코 코로나가 종식된다 해도 회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국민들은 한국교회를 ‘사회악’으로 치부하고 있다. 스스로 빛과 소금이라 말했던 교회가 단순한 오만을 넘어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된 모습에 국민들은 더 이상 교회를 보며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물론 일부 교회의 문제였다. 대다수 교회는 문제가 없었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 일부교회 속에 한국교회를 투영했다. 그것이 비록 잘못된 일반화일지라도 한국교회는 지금 그것을 지적할만한 최소한의 자격조차 없음이 참으로 씁쓸할 뿐이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물론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공교회로서의 책임을 보여야 한다. 국민들에 일부 교회와 특정인의 일탈을 제재하지 않은 방관을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변해야 한다. 국민들 앞에 새로워진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교회라는 이름을 광화문 ‘정치’ 한복판으로 내몬 것은 단순히 전광훈 목사 한 사람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한때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던 원로들이 자리했다. 전 목사가 행한 그릇된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원로들의 지지와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 앞에 새로운 한국교회를 다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극해야 한다. 전 목사를 비호한 원로들 역시 한때 한국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한 공로자임은 인정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 쏟아지는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은 그들의 선택이 결코 옳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다. 계속해서 낡은 부대 자루를 부여잡고 있어봤자 그 속에서 향 좋은 포도주가 나올 수 없고, 결국 자루가 터져 포도주를 버릴 뿐이다. 근래 한국교회의 세대교체는 참으로 더디었다. 아직도 주요 교단에는 여전히 과거의 인물들이 정치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이제 능력있고 참신한 인물들이 확 달라진 한국교회를 만들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그것만이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08-25
  • [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평화와 꽃의 노래 ‘응답하라 2021’
    오는 9월 총회에서 예장합동측 교단 총회장 취임을 앞두고 있는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에 대한 교계의 관심이 실로 엄청나다. 지난 십수년 넘는 시간동안 심각한 인물 부재로 극심한 침체를 겪어야 했던 한국교회에 단비처럼 나타난 ‘거인’(巨人)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시대로 하여금 또 한 번 ‘부흥의 계절’을 기대케 하고 있다. 그간 스스로 인물을 자처하며 지도자로 군림한 이들은 많았지만, 별다른 업적 없이 이름만을 남긴 채 역사 속에 사라져 갔다. 이를 딱히 비난할 것도 없었던 것은 그것이 흐름이었고, 나름의 최선이었다. 그런 일반화 속에 소강석 목사가 보여준 지난 행보는 실로 특이했고, 남달랐다. 직위, 직책, 지도자라는 자리에 오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일들을 해내는데 주력했다. 일을 하는데 있어 재정, 시간, 인력 그 어느 하나 허투루 하는 것이 없었고, 때때로 지역과 국가를 뛰어넘는 엄청난 위용을 보이기까지 했다. 지리산선교유적지 보존, 6.25 참전용사 초청, 동아시아 관계 개선, 성령 운동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그와 새에덴교회의 사역은 역사, 문화, 정치, 목회, 선교 등 전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어쩌면 그런 소 목사의 총회장 취임에 교계와 사회의 기대가 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기대 속에 등장한 총회준비위원회, 일명 총준위의 발족은 매우 소강석 목사다운 결과물이다. 사실 그간의 지도자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은 딱히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총회장에게 주어지는 고작 1년의 임기는, 무슨 일을 추진하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다. 그 와중에 정치적 견제나 내부 혼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그저 각종 소송에만 매달리다 퇴임할 수 밖에 없다. 소 목사의 총준위 발족은 이러한 시간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최적의 구상이었다. 모든 사업 준비를 총회 전에 끝마치고, 다음 회기는 온전히 사업을 실천하는데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단 역사상 초유의 부총회장 단독 추대라는 내부로부터의 호불호 없는 지지는 합동총회와 소 목사가 사업을 시행하는데 절대적 탄력을 제공한다. 현재 교계는 소 목사가 합동측의 지도자만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는다. 뿔뿔이 나뉘어 있는 교계를 하나로 다시 엮을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한국교회는 보수세력의 3단 분열로, 절대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교회의 모든 소모임을 금지했던 지난 중대본의 7/8조치는 지금 한국교회의 사회적 위상이 얼마나 추락해 있는지를 반증한다.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 될 수 있다면, 1000만이라는 국내 최대의 집단이 일제히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전에 본 적 없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소 목사는 한국교회를 향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응답을 요청하고 있다. 과연 시대는 광대를 자처하는 그의 비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이제 다시 한 번 한국교회가 그토록 염원한 평화와 꽃의 노래가 울려 퍼지길 기대해 보자.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07-23
  • 듣고, 말하고, 분노하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에 항상 유념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또 다른 침묵을 익힌다는 말이 된다.그리고 좋은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기 싫은 소리, 어이없는 불평과 비난을 쏟아내기 만하는 너무나 비열함을 고상하게 포장하면서 숭고한 언어로 덧칠하여 불편한 목소리를 발하는 것도 흔히들 볼 수 있는 일이다.그러나 우리사회에서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불편한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많다. 그것을 여론(輿論)이라고도 하고 민심(民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마이동풍(馬耳東風)식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특히 정치인은 남의 말에 귀 기우리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대통령과 정부는 여론과 민심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고, 무리한 반발이나 분노를 사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말하고 외쳐댄다고 하여도 듣지 않고 외면하면서 신뢰와 공감이 전혀 없는 자기들의 주장만을 고집하며 밀고 나간다면 불행한 일이 닥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피타고라스는 “말은 정신의 호흡이다”라고 했지만, 한 마디의 말이야 말로 모든 행위의 그림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며, 이름이며, 사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마치 촉수 잃은 곤충처럼 정치와 외교, 안보, 경제 사회 문제에서 윤리와 원칙이 무너지고, 맘대로 고치고, 봐주면서 사법체계가 엉망이 되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시대를 역행하고 역사를 왜곡하면서도 평등, 공정, 정의를 앞세우며 고집하는 것은 그들만의 언어적 유희(遊戱)에 불과하다. 순수해야 하는 인간양심의 탑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는 침묵이 금(金)이고 은혜라는 비굴함을 보이는 자들이 허다하다.정권의 핵심부에 앉은 자들은 우리끼리는 잘못이 있고 부도덕할 지라도 한없이 관대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발상으로 집단 체면에 매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으로 일방적 독주를 하면서 국민적인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소위 철학적인 고민과 법적인 고민을 거듭한다 해도 공동체는 분열하고 있으며, 앞뒤가 꽉 막혀버린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 권력 본색의 정치상황을 공정하고 품위 있고 관대함으로 풀어 나가는 지도력은 찾아볼 수 없다.정치인과 관료들은 깨끗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해야 하고,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 국민을 위한다는 이중 잣대로 신선한 마당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의혹과 모순으로 불합리를 안고 있는 이 국가적 난국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바로 진리와 정의를 위한 분노이다. 분노해야 할 때에 주저하고 단념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지켜 나가지 못하는 불의가 정당성을 위해 질주하고 있다면, 당연히 자신의 행복과 미래의 길을 열기 위해 분노해야 한다. 아무리 목 놓아 부르짖고 외쳐 된다고 해도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다면 정의와 도리(道理)가 살아나는 시대를 열어 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 분노는 새로운 미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변영로 시인의 시 ‘논개’에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는 구절을 떠올린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01-06
  • 교계, 진보·보수 한 자리에 모여라-강 춘 오 목사
    최근 보수우파 교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화문의 시국집회는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사에 특이한 한 획을 긋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권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온 진보좌파 교회들은 오히려 현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듯한 입장에 서 있고, 그동안 일제의 신사참배와 북한의 공산정권에 대한 항거 이후, 한 번도 국가 권력을 비판해 본 일이 없는 보수우파 교회들이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문 정권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도 일종의 진영논리에 빠져 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한국교회는 보수우파가 80%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보수우파가 현 문재인 정부에 대해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문 정부가 한국교회 선교에 해악을 끼치는 좌파정책을 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 문제에 있어서 북에 대한 저자세로 국방 안보가 위협받고 있고, 경제 문제도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좌파 정부의 교육정책에도 심각한 불신을 보이고 있다.이는 진보좌파 교회들이 문 정부의 남북교류정책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믿는 것과는 달리, 보수우파 교회들은 문 정부가 북한의 한반도 공산화 정책에 동조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국을 보는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교회 간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보인다.어째서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가 현 시국을 보는 여론을 이토록 달리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갖는 개인적 정치적 견해는 다를 수 있어도, 교회 안에서의 신앙적 견해는 같아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이 훼손되면 교회는 또 다른 분열을 맛볼 수 있다. 불행한 일이다.사실 최근 전광훈 목사를 필두로 벌어지고 있는 광화문의 보수우파 집회는 성경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고 한 말씀 그대로이다. 즉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간다는 한국교회의 진보측 교회지도자들이 좌파정부와 코드를 맞추느라 '벙어리 개'처럼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동안, 보수우파 교회를 배경으로 나타난 전광훈 목사가 사람들을 충동하고 있는 것이다.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집회에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도 그들이 매번 전 목사의 한기총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현 시국을 보는 우리사회의 우파 국민들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에서 나오는 행동이라 생각된다. 국민들은 그만큼 국가장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한기총의 사정으로 볼 때, 전광훈 목사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전 목사는 광화문의 개인적 인기를 이용해 자신이 추구해온 ‘기독당’에 올인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기총 이름으로 253개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국회의원 선거구와 일치하는 것이다. 자칫 보편적 한국교회를 정치도구화 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집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부정적 평가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나 그 사회의 가치관은 주류종교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주류종교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가 우리사회가 현 정부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임에는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하고, 교회는 진보든, 보수든 ‘하나’라는 원리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회마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로 갈라져 있는 현 상황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대로 가면 문 정부가 끝난 후에도 한국교회는 진보 보수 간에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 분열을 맛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 교계가 대정부, 대사회에 대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지금' 한 자리에 모여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국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니다. 따라서 진보든, 보수든 권력 눈치를 보면서 정부에 끌려다녀서도 안되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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