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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파주의 작은 교회’ 어깨에 지워진 짐, 우리는 언제까지 바라만 볼 것인가
- 기자의 기억 속 경기도 파주의 운정참존교회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변두리의 평범한 개척교회 중 하나였다. 담임인 고병찬 목사 역시 기독교계의 거대한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교단 지도자도 아니고, 막강한 재력이나 권력을 가진 인물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이어가는,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목회자일 뿐이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이 작은 교회와 평범한 목회자의 이름 뒤에는 늘 ‘우파의 대명사’라는 무거운 프레임과 함께, 셀 수도 없는 고소·고발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사실 그들이 강단과 삶을 통해 외쳐온 주장들은 특정 정파나 극단적 이념이라기보다는, 성경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대한민국 수많은 보편적 교회들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운정참존교회와 고병찬 목사는 이념의 반대편에 선 이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유례없는 고난을 받아왔다. 고 목사가 그간 겪어온 법적 공방의 명목들은 실로 눈을 의심케 한다. 선거법 위반부터 코로나 시기 방역관리법, 사립학교법(학원법) 위반, 그리고 입에 담기조차 힘든 아동학대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결과는 늘 같았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매번 ‘무죄’, ‘혐의없음’, ‘불송치’라는 결론을 내리며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진실은 밝혀졌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하지만 법적인 ‘무혐의’가 곧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죄 판결 한 줄이 나오기까지 일개의 작은 교회와 힘없는 목회자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분별한 고발과 악의적인 소문 속에서 교회는 지역사회의 싸늘한 눈총과 손가락질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수십 년간 한 주일방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배드리던 이웃 같던 교인들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해 교회를 떠나갔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주일학교 아이들은 학교에서 ‘이상한 교회의 아이들’이라는 편견과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이 아닌 억측과 프레임이 더해지면서 평온했던 한 교회의 일상은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도 운정참존교회 성도들과 고 목사는 단단했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뿌리가 더 깊어지는 나무처럼, 성도들은 흔들리는 대신 교회를 지켰고 목회자의 곁을 지켰다. 인간적인 계산을 해보자면, 고 목사 역시 여느 교회들처럼 아무런 시대적·정치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하고 보편적인 목양에만 전념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것을 원치 않았다. 비록 숫자는 적을지언정 진리 앞에서는 외치는 ‘소리치는 돌’이 되기를 자처했고, 자신들을 이끄는 목회자가 불의한 압박 앞에 결코 주눅 들지 않기를 바랐다. 성도들은 오히려 “우리를 위해 침묵하신다면, 그것이 도리어 진리를 찾는 일에 짐이 될 것”이라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진리를 향해 나아가자고 목사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온, 눈물겨운 연대였다.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버팀목이 된 성도들의 모습은 분명 위대하고 대단하다. 그러나 기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들을 향한 박수 뒤로 깊은 미안함과 속상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과연 이들이 짊어진 ‘총대’가 무조건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한국교회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할 시대적 책임과 무거운 짐을, 경기도 파주의 작은 교회 하나가 온전히 독박 쓰듯 짊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목회자고 성도들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학부모이며, 주일이면 해맑게 웃는 평범한 아이들이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신앙생활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단지 시국이 너무도 엄혹하고 거칠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의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잠시 광야로 나섰을 뿐이다. 언제까지 이 작은 교회의 외로운 사투를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바라만 볼 것인가. 이제는 한국교회가 응답해야 할 때다. 이들의 외로운 어깨에 메인 짐을 조금이나마 나눠 질 생각을 해야 한다.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거룩한 부담감에 동참하고 연대할 때, 우리가 바라는 사회적 정의도, 성경적 가치도 더 빨리 세워질 수 있다. 그 연대의 끝에서, 운정참존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꿈꾸는 ‘평범하고 소박한 신앙생활’이라는 당연한 권리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 전체가 힘을 합쳐, 파주의 작은 교회에 ‘가장 평범한 일상’을 선물로 돌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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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파주의 작은 교회’ 어깨에 지워진 짐, 우리는 언제까지 바라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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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화합이라는 이름 앞에 지워진 경계… NCCK의 위험한 종교 혼합주의
- 인류에 있어 종교가 평화를 말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다종교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이웃 종교의 경사를 축하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올해 석가탄신일을 맞아 발표한 축하메시지 역시 이러한 연대의 연장선에 서 있을 것이다. 전쟁과 폭력, 기후 위기로 신음하는 인류를 향해 종교인들이 마음을 모으자는 호소는 사회적으로 볼 때 그저 따뜻하고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 따뜻한 메시지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마음은 무겁다. 이웃 종교를 향한 예의와 존중이 지나쳐,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이루는 '언어의 본질'마저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합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 연합기관의 언어가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해 버린 흔적들이 메시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곤혹스러운 대목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시니 온 세상이 기뻐합니다"라는 고백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세상에 오셨다'는 선언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이는 인류의 역사 속으로 신(神)이 직접 걸어 들어오신 사건,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만 허락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신앙 고백이다. 반면 불교의 부처는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존재, 즉 인간의 성불(成佛)을 뜻한다. 타 종교의 성인을 존중하는 것과, 기독교적 구원론의 핵심 언어를 투영해 그를 사실상 '신의 반열'로 공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포용이 아니라 교리적 정체성을 상실한 혼합주의의 단면일 뿐이다. 더욱이 메시지는 기독교가 목숨처럼 수호해 온 '진리'라는 단어의 무게마저 가볍게 전락시켰다. "부처님이 오셔서 열어주신 진리와 자비의 길", "불자들을 통해 진리가 피어나고"라는 구절은 당혹스럽다.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는 다원화된 가치 중 하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절대성을 지닌다. 타 종교의 철학적 깊이를 인정하는 것과 복음의 유일성을 희석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이 NCCK의 문장 속에서는 너무나 쉽게 지워져 버렸다. 인류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 문서가 과연 기독교 단체의 연합 공문서인지 의심케 한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따라 살아간다면 현재의 모든 위기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선언은 교회가 세상에 던져야 할 본연의 메시지를 망각한 처사다. 인류의 탐욕과 죄악을 치유할 유일한 소망은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선포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타 종교의 해법을 인류의 궁극적 구원책으로 내어놓고 있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종교 간의 대화와 평화는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다. 그러나 참된 화합은 나의 이정표를 지워버린 채 상대방의 길에 동조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선명히 붙드는 이들만이 비로소 타자와의 진정한 대화도 시작할 수 있는 법이다. 뿌리가 흔들린 나무는 이웃 나무와 진정으로 연대할 수 없다. NCCK는 화합이라는 명분이 기독교의 절대 진리를 허무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신학적 토대를 엄중히 되돌아보아야 한다. 본질을 잃어버린 언어는 평화가 아니라 배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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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화합이라는 이름 앞에 지워진 경계… NCCK의 위험한 종교 혼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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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상식의 저울은 왜 교회의 문 앞에서 흔들리는가
- 법의 존재 이유는 상식의 수호에 있다.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무고함을 증명해 주는 고루한 원칙이 바로 법치주의다. 그러나 최근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를 둘러싼 일련의 사법적 판단과 이를 다룬 언론의 행태를 바라보면, 과연 우리 사회의 사법과 언론이 그 최소한의 상식을 작동시키고 있는지 깊은 회의가 든다. 사건의 본질은 이미 수년 전 정리된 사안이었다. 의혹의 시발점이었던 당사자는 진술이 거짓이었음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고, 그 거짓을 확대 재생산하며 악의적인 유포를 일삼던 이들은 사법부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고령의 유포자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기까지, 수차례 이어진 재판부의 결론은 하나였다. 의혹은 '명백한 허위'라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 피고인 B씨를 향한 재판에서 나온 일부 판결은 법의 오랜 격언인 '입증책임'의 원칙을 무색하게 만든다. 법은 본래 문제를 제기한 자에게 증명의 의무를 지운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라는 요구는, 행하지 않은 자에게 불가능을 강요하는 모순과 같다. 다른 재판부들이 일관되게 인정한 당사자의 자백과 정황 증거를 배척한 채, 피해자에게 '완벽한 부존재'를 증명하라는 식의 논리는 사법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번 재판의 본질은 의혹의 유무가 아니라, 허위임을 알면서도 이를 유포한 행위의 정당성 여부였어야 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이 불완전한 판결을 기화(奇貨)로 삼은 언론의 선택적 침묵과 폭로다. 그간 유포자들이 구속되고 해당 내용이 거짓임이 밝혀진 10여 차례의 판결에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던 모 일간지는, 교회의 주장이 일부 배척된 단 한 번의 판결문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지면을 할애했다. 이를 마주한 독자는 앞선 열 번의 법적 판단을 읽어낼 재간이 없으며, 당사자인 교회 입장에서는 공익을 빙자한 또 다른 형태의 핍박만 받을 뿐이다. 만약 이 사안의 주체가 거대 종교 기관이 아닌 일반 개인이거나, 반대로 사회적 약자였다면 사법부와 언론이 이토록 가혹하고 편향된 잣대를 들이댔을지 의문이다. 거대 교회와 영향력 있는 지도자라는 명성은, 때로 악의적인 공격을 방어할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면죄부로 작동하곤 한다. 의혹을 해명하는 과정 자체로 이미 막대한 영적,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교회 입장에서, 이러한 '진흙탕 핑퐁게임'은 잔인한 소모전이다. 진실이 눈을 감고 편견이 펜을 잡을 때 사회는 병든다. 사법부는 흔들리지 않는 상식의 법리로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며, 언론은 단편적인 판결문 뒤에 숨은 거대한 진실의 맥락을 짚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양심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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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상식의 저울은 왜 교회의 문 앞에서 흔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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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메마른 AI 시대,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대체 불가의 교회’를 꿈꾸며
- 최근 교계의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이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AI를 바라봤던 시각은 이제 ‘필수적인 활용’이라는 현실론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기술의 진보를 외면할 수 없다는 점에는 필자 역시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얼마 전 한 교단 수양회에서 목격한 장면은 편의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목회의 본질적 위기를 직면하게 했다. 한 원로목사는 강단에서 AI 앱의 유료와 무료 버전 차이를 설명하며, AI를 쓰지 않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바보’ 같은 일이라 설파했다. 주제와 본문만 넣으면 단 몇 초 만에 매끄러운 설교문이 완성되는 시대에,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효율성 측면에서는 박수를 칠 일일지 모르나, 가슴 한구석에는 서늘한 의문이 감돌았다. 과연 설교가 단순히 ‘글쓰기’의 영역일 뿐인가 하는 점이다. 목회는 사람의 영혼을 상대하는 사명이며, 설교는 그 사명의 가장 강력한 도구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완전무오한 말씀임을 믿는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전하는 설교 준비 과정 역시 성령과 함께하는 ‘영적 분투’의 시간이어야 한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한 단어 한 문장을 고르기 위해 고뇌하는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감이 목회자의 삶을 통과해 성도에게 전달되는 필수적인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중견 시인이자 작가이기도 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최근 일간지 칼럼 ‘AI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를 통해 던진 통찰은 큰 시사점을 준다. 그는 AI의 결정적 한계를 ‘영혼의 부재’로 짚어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AI에는 인간 특유의 ‘망설임’이 없다는 지적이었다. 컴퓨터 공학적 관점에서 망설임은 성능 저하를 뜻하는 ‘버퍼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특히 목회자에게 망설임은 단순한 느림이 아니다. 그 사이 수많은 사고와 고민이 교차하며 영혼과 정신이 성장하게끔 하는 ‘연단의 시간’이다. 말씀을 전하기 전, 이 메시지가 성도들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을지, 혹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지는 않을지 망설이며 머리를 싸매는 그 시간이 설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소 목사의 시와 글을 좋아한다. 그가 노래하는 광야와 꽃에는 맑은 영혼의 숨결이 느껴진다. AI도 광야와 꽃을 주제로 매끄럽고 훌륭한 시를 쓸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결코 담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영혼의 울림’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정보의 나열은 AI가 뛰어날지 모르나, 영혼을 깨우는 생명의 소리는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의 ‘미래의 직업’ 코너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라질 수많은 직종이 나열되어 있다. 의사, 변호사, 판사, 심지어 기자의 이름도 올라와 있지만,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는 직업이 바로 ‘종교인’이다. AI가 영혼을 다루는 종교인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는 세상의 인정인 셈이다. 목회자들은 이 지점에서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어도,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만은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AI의 성능을 유료와 무료로 따지며 설교 준비의 편의성만 강조하는 모습은, 목회자 스스로가 AI에 의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소강석 목사는 지난 2년 전 AI 시대에 오히려 교회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 예고했다.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메말라버린 인간의 영혼과 그 갈급함을 채워줄 곳은 오직 교회뿐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질은 AI의 성능이나 구독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목회자의 눈물과 망설임, 그리고 연단의 시간을 통과한 ‘영혼의 메시지’가 강단을 지켜야 한다. AI 시대, 목회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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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메마른 AI 시대,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대체 불가의 교회’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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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백석총회, 한국 장로교 최대 교단으로 올라설까?
- 한국 장로교의 역사는 곧 분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300여 개에 달하는 교단으로 나뉘어 ‘나노 분열’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계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간 한국 장로교단은 예장 합동과 통합이라는 두 거대 교단이 자타공인 ‘양강 체제’를 유지하며 장자 교단의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이 견고한 구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바로 예장 백석총회의 거침없는 약진이다. ‘양강 체제’ 뒤흔드는 백석의 무서운 성장세 백석총회는 최근 중소형 교단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며 급속도로 교세를 확장해 왔다. 지난 5월 5일에도 5개 교단과 통합하며 아홉 번째 교단 통합이라는 결실을 보았다. 각 교단이 주장하는 수치가 상이해 객관적인 교세를 정밀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교계 일부에서는 이미 백석이 통합의 교세를 넘어섰으며, 합동의 자리까지 위협하거나 혹은 이미 추월했다는 분석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러한 성장은 우연이 아니다. 백석은 전신인 ‘합동정통’ 시절부터 ‘연합’을 교단의 명운이 걸린 사명으로 여겨왔다. 1981년 첫 통합 당시부터 분열된 장로교단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선구적 기치를 내걸었고, 2009년에는 교단 통합을 위해 명칭과 기득권까지 내려놓는 대승적 결단을 보인 바 있다. 이처럼 ‘기득권을 내려놓는 연합’이라는 백석만의 정체성이 오늘날 최대 교단을 넘보는 동력이 된 것이다. 백석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분열된 한국 장로교를 다시 하나로 엮으려는 진정성 있는 시도와 노력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다. 300개로 쪼개진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치유하기 위한 백석의 행보는 분명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너무 공격적인 교단 영입과 통합이 자칫 한국 장로교 본연의 생태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장로교의 하나됨이라는 대전제에는 찬성하지만, 그 과정이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비판이다. 양적 팽창에 치우쳐 질적 성숙이나 정체성 확립이 뒤처질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최대 교단’ 그 이상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때 백석총회는 이제 ‘최대 교단’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자신들이 내건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토대 위에서 진정한 교회의 회복을 증명해야 한다. 단순히 숫자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장종현 대표총회장의 말처럼 인간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연합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백석의 시도가 한국 장로교의 부끄러운 분열사를 끝내는 ‘치유의 마중물’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백석이 던진 ‘연합’이라는 화두가 한국교회 전체에 묵직한 울림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장로교 최대 교단을 향한 백석의 도전이 양적 1위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하나로 묶는 질적 지도력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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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백석총회, 한국 장로교 최대 교단으로 올라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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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감성’이 존중 받아야 하는 이유
- "It is difficult to get the news from poems yet men die miserably every day for lack of what is found there." (사람들은 시에서 소식을 얻기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국 중요한 것을 얻지 못해 비극적으로 죽어간다) 미국 '이미니즘' 시학의 핵심으로 꼽히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 1883~1963)는 인생의 말년에 쓴 시 '아스포델, 저 지옥 같은 꽃'(Asphodel, That Greeny Flower)에서 이와 같은 문장을 토해낸다. 감성이 메마른 시대, 오직 삶의 실리만 앞세우는 시대에 대한 비관을 담은 이 문장은 한 마디로 "시 따위는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고 외면하는 시대를 향한 작가의 한탄이 담겨 있다. 작가는 시가 현실의 ‘정보’(실리)를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인정한다. 허나 동시에, 시를 외면한 채 실리만을 좇는 사람들이 결국 ‘중요한 것’, 곧 영혼을 상실한 채 비극적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영혼을 가진 인간에 있어 삶의 정답은 결코 세속적 계산이나 효율 논리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소강석 목사가 최근 출간한 『영혼을 담은 시 쓰기』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60여 년 전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당대 사회를 향해 던졌던 한탄에 대한, 오늘의 응답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살던 당시는 스마트폰이 지배하고 AI가 인간을 대신하는 지금보다 인간애(愛)가 훨씬 더 풍성했음에도, 그는 산업화 속에 빠르게 메말라가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을 염려했다. 반면 소 목사는 종교조차도 AI가 대신할 수 있는지를 논하는 무(無)감성의 시대 한가운데서 '메마른 영혼'에 대한 궁극적 회복을 꿈꾸고 있다. 시를 통해, 언어를 통해,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을 사수하는 것이다. AI가 글을 쓰고, 곡을 만드는 이 시대에도, 결코 인간의 감성, 즉 영혼의 영역은 결코 침범할 수 없다는 그의 강력한 믿음은 변화하는 시대에 '본질'에 대한 더욱 간절한 확신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제4차 산업 혁명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뚜렷이 드러났는데, 그는 AI에 대한 시대의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영혼의 갈급함이 커지기에, 이를 충족시킬 교회의 존재는 훨씬 더 두드러질 것이라는 예측을 했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을 향해 '감성' '영혼'의 워딩을 토해내는 소강석 목사는 사실 그의 행보를 볼 때, 분명 엇갈리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는 분명 현존하는 한국교회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가장 힘든 시기, 위기를 넘겨낸 불세출의 인물로 꼽힌다. 지금도 정치, 지도자의 영역에서 분명한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그에게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실리를 담보치 않은 '감성'은 굳이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정점에서도 '감성'을 노래하고 '영혼'을 구하는 그의 행보는 어쩌면 지독히도 초심에 집착하는 천상 목회자의 모습인 듯 싶다. 60년 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며 한탄한 미국의 한 시인과 오늘 이 시대의 영혼에 다시 숨을 불어넣고자 애쓰는 한국의 한 목회자.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밥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중요성을 공유하고 있다. 소강석 목사의 초심이 너무도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가 교계의 정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최고가 된 자리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돈, 명예, 정치, 권력이 아닌 바로 '영혼'임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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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감성’이 존중 받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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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전도는 우리 구주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다
-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 성도수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 코로나 정국에 떠난 젊은층이 대부분 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대로 가다 간 한국교회에 정말 큰 사단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금 전국 6만 교회에 전임 목회자만 20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생활비만 해도 많은 예산이 필요한데, 교세가 급감하니 자연히 헌금도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를 모실 수 없는 교회가 생겨나게 되어 교회의 통폐합이 늘어나게 되고, 이에 따라 가족을 부양해야 할 목회자들은 소리 소문 없이 교회를 다른 직업을 찾을 수 밖에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4천만명이나 남아 있다. 이들에게 전도가 절대로 필요하다. 교회는 전도를 금지하는 법률이 있던 시대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전도에 목숨을 걸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처럼 종교의 자유를 한껏 누리면서 전도가 자유로운 세상에서 교인이 줄어들고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뭔가 우리 한국기독교의 전도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요즘 우리사회에는 오히려 보편적 교회에서 이단시 되는 '사이비' 집단이나 신흥종교가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고, 막상 '진짜 복음'을 전한다고 자랑하는 기성 교회는 잠잠하고 있다. 그래서 코로나 정국 이후 교회가 잠자고 있다는 말을 것이다. 마치 바다 고기가 스스로 물 따라 떠밀려 와 그물 안에 들어온 것만 잡는 정치망처럼, 교회당 지어 놓고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당 밖에 사람들이 모두 우리교회 예비 신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통폐합의 위기에 내몰리고 목회자의 자리가 줄어 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한국교회가 60-70년대 전도 대부흥의 시대에 했던 것처럼 전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나설 일은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교인들과 교회를 떠나 행불자가 된 옛 교인들을 찾아 심방하는 일과 주일학교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전도하는 일에 모든 힘을 경주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지역의 교회들이 개교회 전도보다 초교파적으로 힘을 모아 연합전도에 나서는 것도 좋다. 그렇게 하면 지역 주민들에게도 신선한 신뢰를 보일 수 있다. 개교회는 총동원 전도에 목표를 정하고 모든 교인의 체계적인 전도훈련이 필요하다. 그 길만이 한국교회가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전도는 사명감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우리를 구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 자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 팔불출이란 말을 들으면서도 자랑하고 쉽지 않은가? 다시 말하거니와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그 사명은 전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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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전도는 우리 구주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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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선지자 이사야
- ▲ 선지자 이사야는 주전 7세기 앗수르 왕 산헤립의 유다 침공 시대의 예언자이다. 그는 구약 선지자 가운데 그리스도(메시야)의 탄생과 고난을 가장 적나라하게 예언한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하시고,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웠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요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호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라고 했다. 창세기로부터 점진적으로 나타난 이 메시야 예언은 이처럼 이사야에 와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 이사야는 다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2-8). 이는 구약의 예언서 가운데 가장 명확히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드러낸 예언이다. ▲ 이사야의 이 예언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것임을 깨달은 것은 기독교였다.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데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4,35).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당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마차를 타고 가면서 읽은 글이 위에 인용된 이사야 53장이다. 기독교는 이사야 53장의 내용이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임을 깨닫고, 그가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의 생과 삶에서 드러난 것임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똑 같은 이 예언을 읽으면서도, 불행하게도 이 예언이 나사렛 예수를 가리킨다는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여기에서 갈라진다. ▲ 또 이사야는 말한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이것이 바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즉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의 승리를 가르키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나타난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섭리를 전파하는 복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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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골] 선지자 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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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춘오 칼럼] 통일교 과연 해산할 수 있나?
- 통일교가 일본에서 정경유착으로 집안이 풍지박살 났다고 여긴 청년에 의해 아베 전 총리가 피격 당하는 사고를 내자, 일본 정계가 발칵 뒤집혀 끝내 정부의 요청으로 통일교가 법원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았다. 이 사건이 한국 정치권에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통일교가 한국에서도 여야 정치권을 돈으로 매수한 사실이 밝혀져 한학자 총재와 윤영호 전 통일교 세계본부장 등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커진 것이다. 야당의 권성동 의원이 당시 여당일 때, 통일교 본부로 찾아가 한학자 총재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고, 또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과 장차관 등 수십명에게도 통일교 자금이 뿌려졌다는 것이 특검으로부터 나온 의혹이다. 그러자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정교분리를 위배한 종교단체에 대해 해산을 검토하라는 발언을 해 통일교가 긴장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발언에는 통일교라는 말은 없었지만 일본의 최근 예를 언급하면서 이같이 발언했기 때문에 통일교에 대한 압력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언급은 통일교 관계자들의 여권에 불리한 진술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러자 교계 주변의 이단연구가들이 통일교 해산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교계의 또 다른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 기독교 주변에서 가장 대표적 이단 사이비로 규정되고 있는 통일교를 이 참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흔들어 놓자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은 다르다. 일본에는 종교법인법이 있어 종교도, 단체도 이 법에 의해 당국에 신고하고 등록해야 한다. 그리고 등록 당시에 명시한 목적에 위배되는 불법 행위를 한 종교단체에 대해서는 정부가 그 등록의 취소를 법원에 제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헌법 제20조의 종교자유 외에 종교법이 따로 없어 종교단체를 정부에 신고하거나 등록하지 않는다. 종교에 관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단체의 불법 행위는 형사법으로만 처벌이 가능할 뿐, 종교단체를 불법화 하거나 취소할 수는 없다. 현행 종교단체는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 또는 사회적 임의단체로 운영된다. 이는 민법 제32조 비영리법인(사단법인, 재단법인, 사회적협동조합)의 설립과 허가에 따른 것이다. 다만 그 종교단체가 국가 안보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거나 사회 공익상 질서를 현저히 해했을 경우에는 법원 판결을 통해 해산이 가능하다. 그것은 민법 제38조 법인의 설립허가의 취소에 따른다. "법인이 설립의 허가를 받은 목적 이외의 목적을 위하여 그 행위를 하거나, 그 외 사유로 공익을 해한다고 인정한 때에는 허가청은 설립의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이 때도 허가가 취소되는 것은 종교단체가 아니라 법인이다. 같은 종교단체 안에도 법인도 있고, 비법인도 있다. 따라서 종교단체 자체를 해산시키려면 그 종교단체가 심대한 사회적 불법을 저질렀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번 통일교 사건과 같이 정치권에 대한 정경유착 불법로비가 국가 안보나 사회 공익상에 위배되는 사건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지금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문선명이 설립한 통일교는 기독교 교리적 측면에서 볼 때 명백한 이단 또는 사이비 종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국의 신종교(新宗敎)라고 부른다. 통일교는 처음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참칭하고 성경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나 성경해석은 전혀 보편주의적 기독교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후 그들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에서 영향을 받은 문선명의 '원리강론'을 경전으로 삼았다. 이에 기독교에서 '이단' 혹은 '사이비'라고 공격하자, 세계가정연합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그럼에도 언론에서는 계속 통일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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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춘오 칼럼] 통일교 과연 해산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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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삼권분립(三權分立)은 국가의 기본이다’
- 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국정감사를 통하여 조희대 대법원장을 증인석에 출석시킨 가운데 회의를 진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 대법원장은 ‘재판 사항에 대해 법관을 증언대에 세운다면 법관들이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 위축되고 외부의 눈치를 보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현 여당이 조 대법원장을 국회 증인석에 세워 그야말로 ‘망신주기’를 하려는 것은 지난 2022년 대선에서 당시 이재명 후보가 ‘공직선거법’에 기소가 된 것을, 대법원에서 지난 5월 1일 고법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한 ‘파기 환송’을 결정한 때문이다. 이 사건은 2022년 9월에 기소가 되었다. 그리고 2024년 11월 15일 1심에서는 ‘일부 무죄’를 선고했고, 2심에서는 2025년 3월 26일에 ‘전부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2025년 5월 1일 ‘유죄 추정’의 ‘파기 환송’을 한 것이다. 보통 ‘선거법 위반’은 ‘6•3•3원칙’을 지킨다. 즉 기소에서 1심까지 6개월, 2심까지 3개월, 그리고 3심까지 3개월로 재판을 끝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이렇듯 ‘6•3•3원칙’을 제대로 지켰다면, 결말이 나는데 2023년 8월까지 마쳤어야 했다. 그런데 재판을 질질 끌다가 2024년 말부터 신속하게 처리하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재판 결과에 대하여 입법부가 사법부를 ‘사법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대법원장을 국회로 불러다 정치적 압력을 넣는 것은, 삼권분립의 요체인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라며 깔보는 것으로 국민들은 느낀다. 그러나 삼권(三權)은 어떤 것이 세고, 혹은 약하고의 순서가 없다(사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하여도, 법관들은 고도의 법률 지식과 그와 함께 법률 적용에 대한 훈련이 요구되는데, 국민들이 투표로 선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법원장은 국정감사에 나와 인사말만 하고 퇴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답변은 법원행정처장이 해 왔다.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으로, 사법부에 대한 예우도 있지만, 그보다도 국가의 ‘삼권분립’을 해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국회가 대법원에서 판사가 헌법과 법률과 양심적 법리를 따라 판결한 것을 가지고, 따져,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한다면, 모든 법관들의 판결은 부정될 수 있다. 그럼, 누가 국가기관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사법부를 흔든다고 사법개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법부의 수장을 망신 주어 내쫓으려고 한다고, 사법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과거 2018년 현 정권이 권력을 가진 집권 여당일 때, 당시 김명수 대법원장을 국정감사장에 내세워야 한다는 일부 야당 의원의 주장에 대하여 삼권분립을 이유로 반대하여 사법부를 옹호한 정당이 누구인가? 지금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걸핏하면, ‘무슨 개혁, 무슨 개혁’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정말 국민과 국가를 위한 개혁일까? 어느 언론인은 ‘집권 세력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일구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까. 집권층이 비난하는 이승만의 건국과 호국 및 교육입국, 박정희의 산업화와 자주국방이 없었다면, 식민지 피지배국에서 유일하게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한다. 사법부의 핵심인 일선 법관들은 상당히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법관들에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외부적 압력을 받은 적이 있나’라는 질문에 47.1%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14일부터 24일까지 10일간 전국의 법관 69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이다. 이때의 조사에 의하면, 법관들의 85%는 그 ‘부적절한 외부 압력을 국회로 보고 있다’고 한다. 또 외부 압력을 넘어 협박이나 위협을 받은 경우도 26.7%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법부를 지켜주는 것은 오히려 정치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국회가 사법부의 법관들에게 압력을 넣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대법원장을 증인석에 앉혀 법률적 판단에 대하여 시비를 한다면 그것이 사법개혁의 올바른 방향인가를 묻고 싶다. 오늘의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국내 정치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정치에서 보기 어려운 반(反)자유, 역(逆)민주의 수준 낮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의 국회가 국민을 대표한다고 믿는 이는 드물다. 국회는 본래의 주어진 기능을 민주당에 빼앗겼고, 민주당은 잘못된 운동권 세력과 스스로를 개혁의 딸이라 지칭하는 집단에 실권을 내주었다’고 개탄하고 있다. 국회나 행정부는 우리 국민들이 직법 선출한 권력이다. 그렇다면 현재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들은 그들을 뽑은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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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토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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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삼권분립(三權分立)은 국가의 기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