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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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교회에 내란선동을 묻는 몰상식한 시대
    서부지법 투블럭 청년 이슈의 최대 피해자로 몰린 운정참존교회와 IBMS신앙공동체가 한국교회와 경찰당국을 향해 정의로운 관심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좌파 유튜버에 의한 근거없는 '거짓 좌표' 공격 이후, 그야말로 교회와 신앙공동체가 붕괴 직전까지 놓인 것인데, 이러한 흐름이 자칫 한국교회 전체로 번질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6월 13일,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경기북부경찰청 앞에는 불법 고발에 대한 경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운정참존교회(담임 고병찬 목사) 성도와 IBMS 신앙공동체 부모연대(대표 김훈희 집사)의 집회가 펼쳐졌다. 약 1시간여 계속된 이날 집회에서는 자신들을 '극우집단' '내란선동 세력'으로 호도하는 고발의 불법성과 위법성을 지적하는 한편, 경찰의 정의롭고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운정참존교회의 피해는 올 초 서부지법 투블럭 청년 이슈가 한창 불거진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모 좌파 유튜버가 아무 근거없이 투블럭 청년이 파주의 모 교회 성도라고 지목했고, 이후 운정참존교회는 파주 지역은 물론 인터넷 상에서 극우교회, 내란 세력 등으로 낙인됐다. 황당했던 것은 서부지법 투블럭 청년은 운정참존교회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교회측은 거짓 정보가 밝혀지면 금새 상황이 마무리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 찍힌 좌표는 진실과 관계없이 교회를 향해 끊임없는 공격을 강요하며, 점차 고병찬 목사와 성도들의 목을 옥죄어 갔다. 교회를 향한 공격은 매우 치밀했다. 각종 언론들이 교회와 성도들에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것으로 시작해 다음에는 지자체에 다양한 명목으로 교회를 신고했다.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밀려오는 신고와 조사에 교회 전체가 넉다운 직전까지 몰렸다. 이후 이들의 공격은 교회 내 신앙공동체에까지 뻗쳤다. 교회가 학부모들의 요청으로 아이들을 위해 운영한 신앙공동체에 난데없이 '초중등교육법' 위반을 들이밀어 형사고발했다. 한국교회 대다수가 신앙과 성경을 기초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음에도 유독 운정참존교회만 문제 삼아 이를 고발한 것이다. 거기에 고병찬 목사는 '내란선동'으로까지 고발당했다. 예배 시간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고 비상계엄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했다는 이유다. 단순히 '투블럭 청년'에 대한 오해라 생각했던 사건이 '내란선동' '교육법위반' '아동학대' 등으로까지 이어지자 결국 성도와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날 성도들은 각자 이번 사태에 대한 소신 발언을 펼쳤다. 모두가 고발 내용에 대한 불법을 규탄하고, 경찰의 공정 수사를 촉구하는 등 매우 당당하고 단호한 투사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실상은 뒤에서 몰래 눈물을 삼키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도 준비해 온 발언문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 모습은 도대체 누가 평범하고 온순한 이들을 이렇게까지 하게 했는지를 궁금케할 정도였다. 우리가 알아야 할 운정참존교회 이슈의 진실은 분명하다. 첫째, 투블럭 청년은 운정참존교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그와 관련된 뉴스와 정보는 모두 거짓이다. 둘째, IBMS신앙공동체는 정부인가가 필요한 교육기관에 해당치 않으며, 학부모와 성도들이 자발적 헌신으로 만든 신앙공동체로, 그 속에서 아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 셋째,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 등 이념간의 대립이 격해진 사회적 상황에서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고 이를 공유하는 것이 죄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운정참존교회 사태를 결코 좌시해서는 안된다. 운정참존교회 사태는 일개 교회의 문제라기보다 향후 한국교회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새 정권 이후 일부에서 교회를 향한 몰상식한 상황이 벌써부터 벌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은 대선 당시 양 당에 기독교 정책을 제안한 교계 단체를 ‘로비’로 몰았다. 개인의 정당한 의견 표현은 ‘내란 선동’이 되고, 기독교 정책을 제안하면 ‘로비’가 되는 시대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5-06-13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이기는 야구와 지는 정치’
    최근에 프로야구에서 한화이글스가 12연승을 달리며, 리그 1위까지 올라갔다. 지난 4월 초까지만 해도 리그에서 꼴찌를 면하지 못하던 한화가 이처럼 가파른 상승세를 달리며, 지지 않고 이기는 야구를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흥분한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수년 사이에 한화는 별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팀이었다. 그래서 경기에서 져도 한화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고, 이기면 잘했다고 칭찬을 하였다. 정말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 팀보다도 응원전에 있어서는 수위(首位)를 차지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하위권에서 맴도는 이 팀을 좋아하겠는가? 야구는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민이나 지역 출신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한화 팬들은 한화의 잘하는 경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을 것이다. 한화가 12연승을 기록한 것이 지난 1992년 이후 무려 33년 만의 일이라고 하니, 한화 팬들은 얼마나 한화의 연승(連勝)하는 것을 보고 기뻤겠는가? 어떻게 꼴찌하던 팀이 한달 사이에 승리를 쓸어 담으며, 전체 10팀 가운데 1위를 할 수 있었는가? 한화가 이처럼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뭔가? 한 마디로 지지 않는 야구를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 되었든 꼴찌팀 한화가 1등을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야구가 저런 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국민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는 어떤가? 미안하지만 등위(等位)로 따진다면 최하위와 같지 않은가? 왜 그럼 일개 스포츠 분야는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데, 정치는 늘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까? 나름대로 야구와 정치를 비교해 보았다. 첫째, 실력의 문제이다. 야구는 실력을 겨루는 경기이다. 실력이 안 되면 당연히 상대편에게 질 수밖에 없다. 몰론 스포츠에서도 감독의 용인술(用人術)이 있고, 대진운도 있고, 선수들이 부상이 없어, 가용할 인적 자원에서도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의 실력이다. 한화에는 선발 투수진이 강하다고 한다. 야구는 9회까지 공격과 수비를 하는데, 그때 선발 투수가 7회(7이닝)까지 자책점 3점 이하로 막아주는 것을, 퀄리스스타트플러스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한화는 리그팀들 가운데 1위이다. 또 상대편 선수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탈 3진을 뺏는 평균이 게임당 9.43개로 전체 1위라고 한다. 여기에 타자들의 활약이 있기에 이기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국가를 위하고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주변 강대국들에게 지지 않는 정치를 하고 있나? 둘째, 룰(규정)을 따라야 한다. 아무리 실력 있고 뛰어난 선수라도 야구의 규정을 어기면 탈락이다. 이를테면 스트라이크 세 개를 판정받은 선수가 아니라고 우기며, 경기를 방해하고, 이를 판정한 심판을 폭행하고 거부하면 안 된다. 만약 경기장에 이런 선수가 있다면, 그는 선수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를 보면, 선수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감독과 코치와 심판을 무시하고, 심판의 적법한 판정에 대해서도 협박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니 국민들이 정치에 염증을 낸다. 자신들이 힘이 있다고 규정을 안 지키는데, 국민들이 이것을 따르고 용납하겠는가? 셋째, 지는 것도 경기이다. 사람들은 이기는 것만 경기로 보지 않는다. 비록 한 때는 경기를 하기만 하면 지던 팀이 어느 날 지지 않고 이기는 경기를 하는 것은, 그 동안 지는 경기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신인들을 영입하고, 그들의 실력이 자랄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어느 팀에나 쇠락(衰落)이 있다. 그때는 질 수밖에 없다. 지는 팀들이 있어, 이기는 팀들이 빛이 나는 것이다. 그럼 진 팀은 새롭게 팀을 정비하고 가다듬어 이기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를 보면, 이기는 것만 생각하고, 지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과 비전을 마련해야 하는데, 당장 이기는 것만 바라보고 꼼수도 서슴지 않는다고 본다. 국가의 정체성도 지키지 못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국민들을 위하여 정치를 한다는 것이 가당한 것인가? 야구와 정치가 직접적인 연관은 없겠지만, 이기고 지는 것의 원리는 비슷하다고 본다. 오직 이기기 위하여 반칙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경기를 취한다면, 그것은 관중이며, 주권자인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것이다. 국민들은 지더라도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사람은 응원하지만, 완력과 거짓과 권모술수로 국민들을 지배하려는 지도자는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실력과 누구보다도 먼저 준법을 하고, 지는 것에 자기 통찰과 이기는 것에 겸손한 지도자를 원한다. 야구 경기는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여 관중들의 즐거움을 더하지만, 정치 지도자는 지는 일을 하면서도 계속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매우 경계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05-27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초대 교황이 베드로일까?’
    로마 가톨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교황이 지난달 21일 서거하였다(가톨릭은 선종:善終-善生福終: 선하게 살다 복되게 죽었다는 것) 이분은 2013년에 교황에 즉위하여 12년간 가톨릭을 이끌어왔다. 이분에 대하여 가톨릭에서 평가하기로는 서민의 교황, 빈자의 성자, 낮은 곳에 임했던 지도자로 부른다. 이분은 2014년 8월 한국에도 왔었는데, 광화문에서 124위의 시복미사를 집전하였다. 그의 평소 메시지는 약자의 편에 서는 것,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생명은 신성하다는 것,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것 등을 강조하였다. 종교인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유독 동성애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해외 순방 길에서 동성애 의혹이 있는 사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내가 누굴 판단하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리고 2018년에는 스페인 출신 남성 동성애자에게 ‘하느님은 너를 만드셨고, 그분은 너를 사랑한다’고 했다. 2013년에는 ‘동성애는 범죄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사제들에게 낙태한 여성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 2023년에는 스페인의 가톨릭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성전환자들도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였다. 또한 2014년에는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에 참석하여 우주 기원의 가설인 ‘빅뱅 이론’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역대 교황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교황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모습이나 발언은 성경적 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월 26일 교황의 장례식에는 150개국에서 정상들이 참석하고, 수십만 명의 조문객이 모였다니, 교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가톨릭의 상징적인 인물에 의하여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초대 교황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로 본다. 교황의 직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로마 교구의 교구장,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보편 교회의 최고 사제, 서방 교회의 총주교, 바티칸 시국(市國)의 국가 원수 등이다. 그중에 베드로의 후계자로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에 십자가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당하면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질 수 없다며 거꾸로 매달렸다고 한다. 사실 로마 교황은 엄청난 명예와 권력을 가진다. 4세기에 로마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國敎)가 되기 전까지 얼마나 심한 박해와 순교가 있었는가? 로마에서는 로마 황제들에 의하여 10번에 걸친 순교의 피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로마 국교가 된 이후 가톨릭은 타락과 암흑시대를 맞이한다. 5세기에 교황을 지낸 레오 1세(440~461년)는 ‘교황은 베드로와 동일시될 수 있는 존재이며, 교황 수위권(首位權)과 교회의 사법권을 주장하였다. 그는 엄청난 명성과 권력을 얻었다. 그래서 그를 ‘대교황’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후에 사람들로부터 같은 별칭을 들은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는 자신을 수도사로 여기고, 자신을 ‘신의 종복들 중의 종복’으로 여기는 겸손을 보였다. 교황의 어두운 역사는 상당히 많다. 영국의 작가이며 역사가인 존 줄리어스 노리치(John Julius Norwich)가 쓴 ‘교황 연대기’에 보면, 역대 교황들의 어둡고 침침한 부분들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필자는 수년 전에 바티칸-시티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베드로 대성당은 그 규모나 장식들이 대단하다. 넓은 광장과 광장을 둘러선 회랑(回廊)에 서 있는 인물 동상들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성당 입구에는 베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사람들이 소원을 품으면서 발을 얼마나 많이 문질렀는지 신발 한 짝은 거의 닳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엄청난 성당을 면죄부(免罪符)를 팔아서 지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또 베드로 대성당의 부속 성당이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이뤄지는 시스티나 성당에는 역대 교황들이 모아 놓았다는 수많은 형상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종교와 권력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되어야 한다. 로마 가톨릭은 교황이 황제를 압도하는 시대도 있었고, 황제에게 굴복하는 시대도 있었다. 우리는 베드로와 동일시하는 권력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에 주목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05-03
  • [토요시평] 기독교는 참된 의(義)를 알고 있는가?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회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결의되어, 현재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벌써 4개월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국정은 마비되고, 야당의 끊임없는 중요 인사들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지금도 탄핵소추에서 벗어난 국무총리이며 대통령 권한 대행에 대하여 다시 탄핵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정말 국민들은 지긋지긋하고, 우리나라 정치가 이런 정도로 타락하고 후진성을 가졌나 의심할 정도이다. 또 그런 가운데 지난 26일 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 선고가 나왔는데, 1심에서는 심각한 범죄적 판결을 내린 것에 반하여, 2심에서는 전면적인 ‘무죄’가 나왔다. 1심 판결을 2심에서 뒤집을 확률은 1.7%로 매우 낮다고 한다. 이를 두고 외국인들은 ‘한국을 이해할 수 없는 나라’로 평가한다. 외신 기자가 한국 정치 상황을 보도했더니, 본국 독자가 ‘이게 말이 되느냐 기자가 사실관계도 이해 못하고 기사를 쓴 것 아니냐’며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법조계에서도 정치인들의 발언이 ‘표현의 자유’를 넘는 것인데, 이를 법원이 용납했다고 평가한다. 이번 판결은 법리(法理)와 논리(論理)와 상식(常識)조차 무너진 것으로, 우리나라는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체제와 진영 싸움에 깊이 빠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하고,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입법부도 사법부도 헌법재판소도 언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국민들은 그래도 법관들의 양심을 믿고 기대했는데, 이미 몇 건의 유력 정치인의 재판을 보았고, 헌재에서 탄핵소추안 재판을 보았는데, 법관들은 일사분란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편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양심(良心)을 가진 세력들의 활동과, 법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그리고 약자 편에 서 있어야 마땅한 법관들인데, 그들마저 ‘우리법연구회’니 ‘국제법연구회’니하면서, 법률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하기 어렵다. 물론, 법관 중에는 법적인 양심과 법리를 따라, 약자를 보호하는 법적 해석을, 강자에게는 보다 엄격한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충실한 법관들도 있다고 본다. 자, 그런 가운데 우리 기독교는 어떨까? 대통령 계엄 선포와 탄핵을 당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성명서를 낸 것은 지난해 12월 6일, A신학대 교수 21명이 낸 ‘시국선언문’이 있다. 여기에는 ‘국민의 기본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 ‘국민을 두려움과 혼란에 빠트리는 행위’ ‘평화를 짓밟는 행위’로 규정하여, 국회는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하라고 촉구한다. 그래서인가? 지난 3월 7일 ‘00대 정상화를 위한 복음주의 학생연합’이 대통령 탄핵 반대와 학내 좌경화를 우려하는 대자보를 붙이자 3분 만에 학교 직원들이 떼어갔다고 한다. 탄핵은 지지하고 탄핵반대는 인정이 안 되는 구조인가? 그리고 지난해 12월 13일 B신학대학교 64명의 교수들도 ‘시국선언문’을 냈다. 이들은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헌정 질서를 부정하는 정변’이라고 하고, ‘반헌법적, 반역사적, 반신앙적 폭거’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내란 행위를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그리스도인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고, 12월 12일 대통령이 계엄의 불가피성을 설명한 것을 ‘궤변이며, 반국가적 선동 행위’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즉각 탄핵 결정을 하라고 촉구한다. 그런가 하면 지난 2월 20일 C교단의 목사, 장로 1,650명은 자기 교단의 ‘000 목사를 징계하라’는 성명서를 낸다. 000 목사는 ‘예배 강단을 정치 선동의 장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4월 중 봄 정기 노회에서 000 목사에 대한 ‘징계 헌의안’이 상정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미 000 목사에 대한 것은 지난 2월 16일 부산교회개혁연대측이 징계를 촉구하는 성명서가 나온 뒤이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참된 의(義)를 알고 있는가? 편향적, 선택적, 폐쇄적, 일방통행식의(義)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누구에게는 엄격하게 의의 잣대를 들이대지만, 다른 쪽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처음에는 국민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하여 깊이 있게 경청하고 고려해 보았는가?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고, 거대한 정치 권력에 의하여 떠밀려 가는 방향이 맞기는 한 것인가? 이대로 간다면 ‘대한민국호’는 안전한가? 한국교회언론회가 지난 2월 26일 여론조사 기관을 통하여 ‘탄핵정국 속 국민들의 심리’를 조사하였다.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사회에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74.1%가 ‘그렇다’고 답했다. 갈등 상황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도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79.2%가 ‘그렇다’고 하였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방적, 선동적, 선결적 선언을 하면서, 다른 의견은 무시하는 태도는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의 기준’을 제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따르는 기독교가 한쪽 눈을 감고, 정치적, 이념적, 정파적, 비양심적 논리에 파묻힌다는 것이 과연 ‘의’가 될 수 있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04-0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사법부에 카르텔이라니, 말이 되나?’
    우리는 평소에 경찰, 법원, 검찰의 국가 조직에 별 관심이 없다. 말 그대로 죄를 짓거나 어떤 범죄적 혐의나 행위가 있을 때, 관련되는 곳이다. 더군다나 헌법재판소는 더욱 관심이 가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최근에 가장 관심을 받는 곳이 헌법재판소이다. 대통령의 탄핵 문제에 있어, 최종적으로 헌법적 판단을 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국민들이 헌법재판소의 헌법 재판관들의 면면에 대하여 좔좔 외울 정도가 되었다.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존함은 모르는 사람들도 헌법 재판관 8명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다. 또 재판관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치적 성향과 그들의 판사활동 궤적(軌跡)을 훤히 알게 되었다. 헌법 재판관들의 정치적 성향에서 눈에 띄는 것이 ‘우리법연구회’(이하 우리법)와 ‘국제인권법연구회’(이하 인권법)이다. 이는 국민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조직에 들어갔던 판사들이 상당수 정치적인 편향성을 가졌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런 조직 속에서 활동했던 인사들 가운데, 이번 대통령 탄핵 사건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살펴보자. 오동운 공수처장은 인권법 출신이다. 또 공수처가 요청한 영장을 발부한 서울서부지법의 이순형 판사는 우리법 출신이다. 그리고 탄핵 심판을 맡은 헌법 재판관 가운데 문형배 권한 대행은 우리법 회장 출신이다. 그리고 이미선 재판관은 인권법 출신이다. 정계선 재판관은 우리법과 인권법 모두에서 활동하였다. 또 야당의 국회 탄핵소추단의 박범계, 최기상 의원도 모두 우리법 출신이다. 그리고 민주당의 추천으로 헌재 재판관이 되려는 마은혁도 우리법 출신이다. 또한 서울서부지법의 영장 전담 판사도 아니면서, 당직 판사로 대통령에 대하여 15자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던 차은경 판사도 우리법 출신이다. 뿐만이 아니다. 최근에 송철호 전 울산시장과 황운하 의원에게 선거법과 관련하여, 1심에서는 두 사람이 각각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2심에서는 ‘유죄 의심이 가지만 직접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내린 2심의 주심 판사도 인권법 출신이다. 그리고 당초 1심을 맡았던 김미리 판사는 계속 재판을 지연하므로, 결국 3년 10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나오게 된 것인데, 그도 우리법 출신이다. 이러니 국민들은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법부 내 사조직 판사들의 이런 행태를 보면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다. 그래서 카르텔(Kartell)를 형성했다고 비난한다. 이 말은, ‘동일 업종의 기업들이 이윤의 증대를 노리고 자유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되는 시장 독점의 연합 형태’라고 정의한다. 판사들은 기본적으로 ‘법’과 ‘양심’에 충실하게 판결해야 한다. 이때 양심은 개인의 정치적 편향이나 주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특정 세력을 변호하고 감싸기 위해서 법을 악용하거나 구부러진 잣대로 적용한다면, 이것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 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공산 국가에서도 법정도 있고, 판사도 있고, 검사도 있고, 변호사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결코 양심적이고 법에 충실한 ‘법조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공산당과 자기들이 받드는 수령(首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군대 내 사조직으로 알려져 크게 비난과 심판을 받은 조직이 있었다. ‘하나회’였다. 그런데 군부 독재 시대도 아닌, 현재에 사법부 내에서 권력을 독점하는 사조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나? 우리법연구회는 1989년 만들어져서 후에 호남계 법조인, 운동권 법조인들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조직은 2018년 해체될 때까지 140여 명의 회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우리법 출신이 많이 기용되었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박시환 대법관, 강금실 법무부장관, 김종훈 대법원장 비서실장 등이 있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표적인데, 그는 우리법 초대 회장 출신으로, 그가 대법원장이 된 후 우리법 출신들을 집중적으로 핵심 요직과 수뇌부에 승진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박범계 법무부장관, 이용구 차관도 같은 우리법 출신이다. 그리고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몫으로 향판(鄕判) 출신인 문형배를 인사청문회 당시 횡령 의혹과 정치적 편향성 등의 문제점이 있었으나, 끝내 헌법 재판관으로 세운 것이다. 그가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으로 이번 대통령 탄핵 사건을 이끌고 있다. 그리고 후에 생긴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의 법관은 4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체 법관 3,000여 명 가운데 우리법과 인권법 판사들의 비율이 얼마나 높은가? 이런 조직에 들어간 판사들이라고 무조건 정치적 편향성을 가졌다고 의심해야 하나? 물론 100% 다는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언론 보도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서 같은 의견을 낸 경우가 90%까지 이른다는 분석이 있다. 이런 현상을 어찌 가벼운 문제로 보겠는가? 책임과 파급력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모든 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그야말로 판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이는 법원으로 상징되는데 이런 사조직 활동과 편향성을 갖게 된다면, 이는 국민들이 인정할 수 없다. 국민들의 결집된 힘으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사법부 내에 모든 사조직은 없어져야 한다. 카르텔을 해체해야 한다. 온 국민들이 이런 올바르지 못한 법관들을 위하여 비싼 세금을 내서 그들을 예우하고, 그런 사람들에 의한 부당한 법의 지배를 받는다면, 이를 용납할 수 있나?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02-24
  • [기자수첩] 아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사회 "돌들의 외침을 막지 말라"
    ◆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19년 3월 1일, 대한의 민중들은 일제히 거리로 나와 일제 침탈의 불법을 고발하고, 당당히 대한의 독립을 선포했다.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전 세계 알린 3.1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유독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화학당에 다니던 17세 무렵의 꽃다운 소녀들로, 바로 그 유명한 유관순 열사와 6인의 이문회였다. 이들의 희생과 투쟁은 대한의 민중들로 하여금 독립의 의지를 북돋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이 민주당의 장면에 뒤지던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이미 이승만은 단독후보로 대통령 당선이 결정된 상황이었음에도, 자유당이 이기붕의 부통령직을 위해 부정을 자행한 것이다. 결국 이 일로 전국의 청년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섰고, 대한민국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4.19혁명이 발생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의 부정선거가 자신의 탓이 아니었음에도, 모든 책임을 직접 지고 하야를 수락한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은 자신을 향해 반기를 들었던 청년들을 보며 "이 땅의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운정참존교회(담임 고병찬 목사)에 최근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서부지법에서 폭력사태를 일으킨 '투블럭 청년'이 바로 운정참존교회의 교인이라는 '악의적 거짓' 때문인데, 이를 입증할 어떠한 증거도 없었지만, 이미 '거짓'은 사실인양 언론, 유튜브, 블로그 등에서 재생산되며, 운정참존교회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더 끔찍한 것은 무자비한 정치적 공격이 어른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서슴지 않고 가해진다는 점이었다. 최근 일부 여론은 운정참존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독스쿨 IBMS의 아이들이 애국집회에 참여해서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을 두고 간악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사상에 문제가 있다거나, 어른들이 아이들을 잘못된 가스라이팅을 했다거나 등등 온갖 막말을 해오는 것인데, 대부분은 아이들이 집회에 참여한 것 자체를 문제 삼는 식이다. 이 상황에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례없는 위기와 혼란을 겪고 있다. 다음시대를 결정할 역사적 선택의 한복판에 있는데, 과연 이런 때에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면 이 시대가 원하는 바람직한 아이들의 모습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불의를 봐도 어떻게든 침묵하며, 오로지 자기 영달을 위한 공부만 하는 것이 참된 아이들인 것인가? 우리 어른들은 지금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단 말인가? ◆ 대한민국의 굴곡진 역사에서 이 시대를 지켜낸 것은 10~20대의 청년들이었다. 시대의 폭력 앞에 깨어있는 청년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일궈냈으며, 오늘의 선진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을 향해 반기를 든 청년들을 보며 이를 탓하지 않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라고 했던 것은 그만큼 젊은층이 이 시대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60년이 훨씬 지난 오늘, 오히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다. 그저 침묵이 정답인양 가르치며, 아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40). 지금 이 시대의 어른들은 자기 안위에 타협한 비겁한 침묵자들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불의 앞에 굴하지 않는 우리 돌들의 외침은 막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5-02-14
  • [기자수첩] 의병(義兵)
    정확한 수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학자들은 지난 시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 무려 1,000여회 이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은 외세의 공격에 의한 침략전쟁으로, 굳이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전쟁을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이 땅은 지난 반만년동안 중국, 일본, 몽골 등의 주변국에 의해 지독하리만큼 당하고 당해왔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여몽전쟁 등 시대마다 바뀌는 동아시아의 패권국은 하나같이 바로 이 땅 한반도를 탐내왔다. 대부분은 이들의 침략을 이겨냈고, 무력의 한계 앞에서는 슬기롭게 타협해야 했다. 놀라운 것은 그 오랜 역사 속에 우리 땅은 일제시대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작지만 강한 땅, 하지만 그만큼 땅에 새겨진 처절한 울분이 참으로 서글픈 곳, 바로 한반도다. 의병(義兵)은 그 처절한 울분의 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민초들의 이름이다. 아무도 그들을 지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난 존재들, 자기희생의 상징이 바로 의병인 것이다. 문(文)을 숭상하는 대신 무(武)를 지독히도 천시했던 500년 역사의 조선은 국가방위에 언제나 취약했고, 그 피해는 오롯이 민초들의 몫이었다. 국가의 잘못된 정책과 의식으로 짓밟히고 또 짓밟혔던 그들, 하지만 그들은 원망 대신 스스로 의병이 되어 나라를 지키기를 택했다. 임진왜란 초기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들을 보며 관군들도 도망가기 바빴던 그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반전의 씨앗을 틔운 것은 바로 의병들이었다. 의령의 곽재우, 나주의 김천일, 영천의 권응수, 금산의 조헌, 묘향산의 서산대사, 금강산의 사명대사 등 누구하나 시킨 적 없지만, 스스로 군을 일으켜 왜군들을 막아냈다.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 등의 혁혁한 성과 역시 의병들의 희생이 바탕에 깔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반만년 역사의 한반도를 이제껏 지탱해 온 것은 바로 민초들의 애국이었다.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한 민초들의 발호는 의병이라는 매우 숭고한 결실로 나타나 이제껏 한반도를 지켜내 왔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한반도의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종전국이 아닌 휴전국으로, 언제든 우리를 집어삼킬 대적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 한반도다. 지금 우리에게 완전한 평화가 도래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혹자는 6.25전쟁 이후 북한의 도발이 무려 3,000회 이상 이어져 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아직 이 땅은 전쟁 중인 셈이다. 하지만 이 땅을 지켜왔던 그 의병들이 지금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이 땅에 전쟁은 남아있지만, 의병들은 사라진 현실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땅의 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 대한민국의 주류종교는 단연 기독교다. 1,000만 성도들이 함께하는 기독교는 모든 분야를 통틀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최대 집단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교회가 시대의 계속되는 전쟁 앞에 침묵을 택하고 있다. 그것이 종교의 사명인 듯, 기독교의 정의인 듯 얘기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민초들이 지켜낸 이 땅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매우 비겁한 합리화일지 모른다는 씁쓸함이 크다. 굳이 총칼을 들어야 애국이 아니다. 시대는 변했고, 애국의 방법도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다. 2025년 교회는 스스로 할 수 있고, 스스로 해야 하는 의병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한다. 침묵은 답이 아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5-01-31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진보계 미국 대통령의 한계’
    지난해 12월 29일 미국의 전직 지미 카터 대통령이 10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1977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4년간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지냈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1976년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의 장기화로 미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컸던 때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변변한 미국 중앙 정치의 경험도 별로 없는 가운데, 조지아주 주지사를 지낸 것만으로 명함을 내밀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정치 공약은 놀랍게도 ‘절대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것이 국민들에게 먹혀들어 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치는 만만치 않았다. 중동의 오일쇼크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이란의 이슬람 혁명 세력이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여 52명을 인질로 444일간 억류한 사태는 미국민들의 자존심을 구기는,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지미 카터는 재선에 실패하고, ‘강한 미국’을 내세운 로널드 레이건에게 다음 대통령 자리를 내주었다. 지미 카터는 현직에 있을 때, 아주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대통령이다. 그는 57세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자기 땅콩 농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을 지낸 경력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민주주의, 인권, 평화, 기아 퇴치라는 미국 진보계 민주당이 주창하는 것들에 헌신하였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40년 이상을 이런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퇴임 후, 저소득층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해 주는 ‘해비타트 운동’을 이끌어서 전세계 14개국에서 4,447채의 주택을 만들거나 수리하는 일을 하였다. 또 분쟁 지역의 외교에서 막후 협상을 벌여 해결사 및 중재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북한, 수단, 아이티,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을 누볐다. 그래서 지미 카터를 ‘사태를 해결한다’는 의미로 ‘미스터 픽스 잇’(Mr.Fix. it)이라고 불렀다. 그로 인하여 200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런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한국과는 그리 친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미 카터 대통령 당시 한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지미 카터는 1977년 대통령에 취임 하자 마자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한다’고 밝혔다. 당시 참모인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담당 보좌관은 신중론을 폈지만, 카터는 한국의 유신체제와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내려놓지 않았다. 이 문제로 양국은 심각한 갈등이 생겼었다. 그런데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한국보다는 북한의 김일성에게 더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1994년 6월 1차 북핵 위기가 있을 때, 카터는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 협의도 없이, 김일성의 초청을 받아들여 평양을 방문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카터는 김일성과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즉 ‘미국이 대북 제재를 중단하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주장을 폈다. 그때까지 강경했던 클린턴 행정부도 어쩔 수 없이 ‘제네바 합의’를 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때 카터의 역할 때문에, 북한이 핵을 개발하여 사실상 보유하는 나라로 만들어 준 셈이 되고 말았다. 또 카터는 2010년 천안함 폭침이 북한에 의하여 발생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이, 북한이 원하는 6자회담 개최에 대한 것을, 북한의 입장대로 뉴욕타임스에 기고하였다. 그리고 2011년에도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한국에 들어왔을 때도, 북한 인권 문제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 대하여 식량 지원 중단한 것을 ‘인권침해’로 비난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2014년 카터가 설립한 ‘카터센터’에서는 당시 내란 음모와 선동 협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판결을 우려한다고 논평하였다. 그는 평화나 인권을 말하면서도, 이를 악용하여 독재를 벌이는 자들에게는 관대하므로, 그들이 평화와 인권 뒤에서 벌이는 허위와 위선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아야 했다. 지미 카터는 100세까지 장수하였다. 그의 부고(訃告) 기사는 이미 오래전에 쓰여졌다고 한다. 뉴욕타임스가 내보낸 지미 카터의 부고 기사는 지난 2017년 사망한 로이 리드 기자가 쓴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부고 기사도 지난해 사망한 에드워드 월시 기자가 작성해 놓은 것이다. 영국 가디언지의 부고 기사도 이미 2021년에 사망한 해럴드 잭슨 기자의 글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놀랍다. 그러나 미국 정치에서 진보 대통령이 가졌던 인식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공산주의 북한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자유민주주의 한국에 대해서는 왜 그리 박정(薄情) 했을까?
    • 연지골
    • 토요시평
    2025-01-22
  • [기자수첩] 그 때 한국교회가 하나 됐더라면···
    ◆ 지난 2022년 6월 2일, 그 날은 한국교회 역사를 완전히 바꿀 뻔한 매우 의미있는 결의가 이뤄진다. 한기총이 임시총회를 열고, 한교총과의 통합을 위한 세부합의서를 통과시킨 것인데, 총 135명 중 찬성 70표, 반대 64표, 무효 1표라는 결과가 말해주듯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지만, 이날 한기총은 사사로운 문제를 덮고 한국교회를 위한 대의에 과감히 한 발을 던지게 된다. 한기총의 결단은 한국교회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교계 연합단체 분열 이후, 단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던 9부 능선의 자리는 얽히고 설킨 교계 정치의 물고 물리는 방해를 고려할 때 사실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열 이후 제 힘을 잃어 버리고, 대립과 다툼으로 서러운 시절을 보내던 한국교회에 있어 한 치 앞으로 다가온 '대통합'은 이제 한국교회의 새 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단체의 통합은 한교총의 내부 반대로 결국 무산되게 된다. 한국교회는 고지를 바로 코 앞에 두고 통한의 발길을 돌려야 했다. ◆ 복잡하고 치열한 교계의 정치 방해를 극복하고, 두 단체의 통합을 9부 능선에 올려놓은 주인공은 바로 소강석 목사다. 많은 인물이 한국교회 통합을 위해 동조하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깊은 내막을 살펴보면 사실 소 목사 혼자 이 모든 일을 짊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는 교단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 그리고 한교총 통합추진위원장을 역임하며 무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오직 통합에만 모든 것을 바쳤다. 적극적이다 못해 치열하기까지 했던 그의 통합 추진 야사(野史)는 책 한권으로는 택도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건들을 낳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성과를 낼수록 이를 깎아 내리려는 일각의 시기와 질투도 함께 증가했다. 그의 진심을 왜곡하는 거짓과 음해는 기본이고, 통합을 방해하기 위한 노골적인 정치 공작들이 횡행했다. 한때 길가다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도 소강석 탓을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일부 진영으로부터 말도 안되는 '억까'(억지로 까다)를 당해야 했다. 사실 한기총-한교총 통합 논의가 도달한 9부 능선은 실로 엄청난 성과였다. 대부분의 교계 관계자들은 수도 없는 실패를 목도하며, 양 기관 통합에 대해 절대 불가를 예상했는데, 소 목사는 이들의 예측을 모두 뒤집고, 통합을 목전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당시 소 목사가 그토록 통합에 매진했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분열을 치유하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사회의 미래 역시 결코 보장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 2025년 새해 정초부터 우리 국민들은 짙은 어둠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겉잡을 수 없이 깊게 패인 이념의 갈등은 국민들은 물론 교회마저도 집어 삼키며, 하나님의 정의보다 빨강과 파랑의 어느 한쪽을 선택케 강요하고 있다.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린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거대 야당의 선을 넘은 횡포는 어느 하나 정상적이지 못한 우리나라가 마주한 저급 정치의 현실임에도, 국민들은 원치 않게 반드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매우 불행한 기로에 서게 됐다. 최선과 차선보다는, 최악과 차악 중에 하나를 택해온 우리나라의 정치가 결국 부정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터져 버린 탓이다. 교회의 대처는 정도(正道)를 잃었다. 우리사회의 빛과 소금을 자처하며, 시대를 선도할 등불이 되겠다던 교회들이 이념의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의 치어리더로 전락했고, 그나마 중립을 추구하던 연합기관은 이도저도 못한 채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국민들이 교회를 보며 품을 희망은 이 시대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이런 상황에 한국교회가 만약 그 때 9부 능선을 넘어, 진정 하나가 됐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궁금증을 품어본다. 그 당시 소 목사가 내건 통합의 구호는 바로 '원 리더십 원 보이스'··· 하나된 한국교회, 하나의 리더십은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 정치와 사회의 그릇된 방향을 분명 지적했을 것이고, 더 큰 화가 미치기 전에 이를 막았을 것이다. 비상계엄과 야당의 횡포는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우리나라의 정치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하나된 목소리는 사회와 정치의 상처가 곪기 전에 이를 발견하고 치유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100만명이 모이는 집회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상시적으로 우리사회를 보듬을 한국교회의 하나된 힘이 먼저다. 그렇기에 만약에 그 때 한국교회가 하나됐더라면, 한국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로 우리 정치의 변화를 촉구했더라면, 어쩌면 우리의 오늘이 좀 더 밝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클 수 밖에 없다. 반대로 당시 한국교회의 통합을 목전에서 저지한 바로 그들이 그 역사적 과오를 뼈저리게 반성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 소강석 목사는 한국교회 통합에 전력하던 지난 2022년 6월,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남긴다. "어느 시대, 어느 역사를 보아도 분열하면 망하고 연합하면 흥하게 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역사적 교훈을 망각한 그 죗값를 톡톡히 경험하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5-01-20
  • [연지골] 지족부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노자도덕경 제44장은 "지족부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라고 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오래 갈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모든 인생사의 만고의 진리이다.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탐내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욕을 당하는 일이 없고, 또한 그 욕심으로 인해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생명에도 크게 지장 없이 살아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태적으로 죄성을 가진 존재여서 그 속에 욕심(辱心)이란 것이 있어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욕 따위를 억제하기 어렵다. 일단 그것을 가진 사람은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더 높아지고 싶어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실족하고 넘어져 망신을 당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정치권의 행태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회 의석 3분의 2에 이르는 거대 야당은 대선에서 자신들이 져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대통령의 국정 운영과 행정부를 무력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직자에 대한 탄핵을 악용하고 있다. 자당 대표의 비리를 수사하는 검사들로부터 장관, 감사원장, 방통위원장, 경찰청장, 국무총리, 대통령대행, 대대행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탄핵을 휘둘러 공권력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끝내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자기네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수단이 탄핵이다. 그러나 작금의 야당의 탄핵 행태는 다수당의 힘만 믿고 정부를 압박하는 무도한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국정 공백이 따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 피해는 소로시 국민의 몫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사심이 앞서면 그 욕심을 정당화 하며 다른 공익은 보려 하지 않는 법이다. 특히 정치인은 권력이 눈 앞에 어른거리면 합리적 사고를 하기 어렵다. 지금 야당의 모습이 바로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 당장이라도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른다면 자기네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권력을 누렸던 때를 생각하며, 아! 옛날을 되뇌이고 국회의 입법권만 믿고 강한 드라이브를 걸며 무리수를 두고 있다. 또 노자는 말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며"(過猶不及),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고, 연한 것은 삶의 속성이다." 정치란 국민의 이익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정당 간 타협하는 것이다. 한 정당이 독식하는 것은 독재이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가 국민의 삶에 폐해를 끼치고, 국가 외교 안보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과연 '과유불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라 한다. 사람도, 동물도, 생물도, 식물도 죽으면 굳어져 딱딱해져 땅에 묻혀 썪는다. 정치도 굳고 강하면 결국 부러져 사라지는 것이다. 지족부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오래 갈 것이라"는 노자의 말을 상기하라. 그렇지 않으면 거대 야당도 결국엔 딱딱해져 오래지 않아 부러지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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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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