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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NCCK의 ‘무속’ 비판이 씁쓸한 이유
    전 세계 기독교 경악한 ‘초혼제’ 잊었나? “특정후보 간접적 지지 아니다" 제 발 저린 도둑의 커밍아웃? 코 앞으로 다가온 대선 정국에 기독교 역시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 정권 들어서 총체적 위기를 보이는 국가적 혼란 앞에 이번 대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선택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중요 시국속에서도 정치질을 멈추지 않는 한국교회다. 대선이 한달 밖에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의 내부는 정치적 계파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특정 후보를 겨냥해 ‘무속 비선 정치’ 시비를 걸고 있는 진보계의 행태는 이미 도를 심히 넘어선 모습이다. 근래 한 공중파에서 특정 후보 부인의 녹취록을 공개한 이후, 기독교 진보계는 일제히 비난성명을 발표하고 ‘무속 정치’ 타파를 외치고 있다. 지난 달 말 ‘비선정치·무속정치를 염려하는 그리스도인 선언’을 시작으로, 교계 진보 신학자 28인이 ‘사이비 주술 정치 노름에 나라가 위태롭다’는 성명을 냈고, 2월 3일에는 NCCK와 YMCA가 ‘무속 비선 정치가 주권재민의 공론장을 대신할 수 없다’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또한 같은 날 '주술에 국민과 국가의 내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는 제목의 기독교대한감리회 목회자 486인 선언이 발표됐다. 특히 한국교회 대표 연합기관을 자처하는 NCCK가 이러한 입장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단순한 종교적 비판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노골적이고, 정치적이며, 충분히 의도적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비판과 의심의 바탕에는 교계 진보계가 그동안 ‘무속’에 대해 어떠한 거부감도 드러낸 적도 없으며, 오히려 매우 친밀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WCC의 ‘초혼제’다. 정현경 교수는 지난 1991년 호주 캔버라 제7회 WCC 총회에서 ‘초혼 의식’을 거행하며, 전 세계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WCC는 국내에서 예장통합, 기감, 기장, 성공회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으로, 이들 교단은 동시에 NCCK에서도 함께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WCC와 NCCK는 신앙고백을 공유하고 있다. 무속 행위에 가까운 초혼제 사건이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 보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음에도 NCCK를 비롯한 이들 교단들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한국교회에 반WCC 정서가 완전히 뿌리내린 근저에는 바로 ‘초혼제’가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에 이어지는 NCCK의 ‘나무아미타불 아멘’ 사건은 종교혼합의 극치였다. 어쩌면 무속보다도 못한 행위조차 스스로 용납해 왔다. 또한 NCCK의 총무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7대종단협의회에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동안 NCCK와 서로 종교 간의 예우를 다해 왔다. 그런 상황에 NCCK를 비롯한 진보계가 대선을 코 앞에 두고 특정 후보의 ‘무속’을 문제 삼고 나오는 것이 결코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로남불’, 사실 특정후보를 지지하건, 비판하건 그들의 자유지만, 자신들의 신념이나 과거마저 뒤집어 엎어가며, 이를 비판하는 행위에 교계가 그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애초 무리한 비판이나 성명이기에 그 내용에 모순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NCCK와 YMCA는 공동 성명에서 “무속의 운명론적 세계관이 형성하는 심리적 강제력은,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해치고 공론의 장을 해체하거나 사유화한다. 미신과 무속에 기반한 사교의 정치적 본성은, 세속 권력자들을 숙주로 삼아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사유화한다”며 ‘무속’을 노골적이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결코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시비도 아니며, 특정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도 아니며, 건전한 민족종교의 전통 문화에 대해 존중한다”고 한발 빼고 있다. 참으로 복잡한 성명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무속이 좋다는 것인가? 나쁘다는 것인가? 온갖 비난과 비판을 해놓고, 나중에는 존중한다는 결론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가? 그렇기에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 언급한 “특정 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가 아니다”는 입장은 오히려 제발 저린 도둑의 커밍아웃에 가까워 보인다. 건전한 민족종교라고 했는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건전한 무속은 무엇이며, 불량한 무속은 무엇인가?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제기는 그저 시비에 불과하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2-03
  • [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설교 논란에 입 연 신학자들
    소 목사는 ‘자기비하’ 통해 자신은 낮추고, 성령만 드높이는 광대 유행가 논란? 성 프란스시스, 칼빈도 설교 중에 대중가요를 사용했다 “소강석 목사의 독특한 설교는 신학적 유산으로서의 분명한 가치가 있다” 시종일관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전개로 유명한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설교가 근래 유튜브 등에서 크리스천들의 큰 각광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일부 목회자들이 소 목사의 설교 행태를 시비하며, 때아닌 논란이 일고 있다. 스스로 ‘광대’를 자처하며, 목회자로서의 정형화된 고정관념과 권위를 내던진 것으로 유명한 소 목사이기에, 사실 이번 논란 자체가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고, 부자연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코로나 확산 이후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린 유튜브를 통해 소 목사의 ‘설교’ 역시 높은 인지도와 함께 그 인기가 급상승하며 새로운 반항을 일으킨 것 역시 사실이다. 문제는 이번 ‘설교 논란’ 자체가 기존 소 목사를 향한 정치적 공격과 그 맥락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 상당수가 이전에도 소 목사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자주 해 왔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설교의 행태, 구성, 유행가 삽입 등 소 목사의 행태를 두고 도를 넘는 온갖 문제를 제기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에 매진하다보니, 딱히 설득력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튜브, SNS 등을 통해 해당 논란이 끊임없이 재생산, 확대 되며, 논란은 쉬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정통 신학자들까지 나서 해당 논란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김덕현 교수(칼빈대 설교학 교수) 등이 참여한 토론에서 나온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 목사의 설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철저히 개혁주의적이며, 자기희생적인 매우 훌륭한 설교다. 이번 논란이 오히려 전문가들로 하여금 소 목사의 설교를 검증하고, 인정하게끔 만들어 준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논란과 별개로 소 목사의 설교에 대한 두 교수의 견해는 교계의 또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영상보기: youtu.be/iRC2NN8AP5s> 김덕현 교수 “소 목사는 광대 설교의 표본” 신성욱 교수 “바울과 같은 아이덴티피케이션(자기 동일시)’기법 적용” 먼저 김덕현 교수는 세계적인 설교학 박사 요한 H. 실리에(Johan H. Cilliers/ 남아공 스텔렌보쉬대 교수)가 주창한 ‘광대 설교’가 소 목사의 설교 행태와 정확히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광대 설교’의 핵심은 ‘자기비하’로 자기를 낮추고 희생함으로 청중들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성경 인물이 다름아닌 ‘바울’이었다. 다음은 요한 H. 실리에 박사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어릿광대’에서 표현한 바울의 모습이다. “바울이 보는 설교자의 모습은 보다 이상하고 불편한 그것, 바로 바보의 모습이다··· 우리는 바울을 연극 안의 바보처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예고도 없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그의 발칙한 말들과 익살맞은 행동들도 극 전체를 헤집어 놓는 바보 말이다. 연극 속의 바보처럼 바울은 관습을 거스르는 행동들을 보인다. 십자가를 선포함으로써 그는 힘과 지혜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바꾸어 놓는다" 김 교수는 “요한 H. 실리에 교수는 성경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설교자의 이미지를 광대로 봤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바울을 지목했다”면서 “자기비하를 통해 스스로를 낮추고, 오직 성령만 드높이는 것이 바로 광대설교다”고 말했다. 이어 요한 H. 실리에 교수가 그린 ‘광대상’에 소강석 목사가 매우 근접했다며 “만약 요한 H. 실리에 교수가 한국어를 배워, 소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면 ‘한국에 이런 설교 컨텐츠가 있구나’ 하고 놀랐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성욱 교수는 소 목사의 설교를 ‘아이덴티피케이션(자기 동일시)’ 기법의 전형으로 봤다. 자기를 낮춰서 상대를 배려하며, 이를 통해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인데, 이 역시 ‘바울’의 설교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신 교수는 소 목사의 설교가 ‘개혁주의’가 아니라는 비판에 대해 지속적인 변화와 수정을 의미하는 ‘reform’에 오히려 매우 충실함을 지적했고, 김 교수는 ‘유행가’ 논란을 놓고 과거 성 프란시스와 칼빈도 설교 중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사용했고, 실제 많은 호응을 받았음을 설명하며, 일각의 근거없는 비판들을 일축했다. ‘나’의 기준을 ‘기독교’의 기준으로 삼아선 안돼 사실 이번 논란은 굳이 전문가의 평가나 신학자들의 연구가 아니더라도, 이를 듣는 청중들의 반응에서 그 결과가 증명되고 있다. 진지함으로 포장한 권위에 도취된 일부 목회자들이 다름과 틀림의 구분 없이 무조건 비판으로 일관하는 자세는 오직 스스로만 옳다는 자만을 증명할 뿐이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변치 않지만, 교회와 예배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또한 보는 이들의 관념에 의해서도 옳고 그름이 판단된다. 당장 우리가 예배 중에 아무렇지 않게 부르고 있는 복음성가나 지금은 은혜의 척도처럼 되어버린 ‘통성기도’가 불과 30~40년 전 만해도 장로교에서 금기시되었던 사실은 지금으로써는 결코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또한 지금도 일부 보수교단에서는 복음성가는 물론 설교 중 ‘예화’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예배의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다. 윤항기 목사는 자신의 곡 ‘여러분’의 가사를 철저히 성경을 염두하며 썼다.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라는 가사의 ‘나’는 바로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일반사람들은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여러분’을 단순 대중가요로 기억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은혜로운 복음성가다. 비판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를 부정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인지하는 것보다 많은 변화를 겪었고, 또 그 변화에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예배는 그 익숙한 변화를 통해 점진적인 진화를 이룬다. 이를 인정치 않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개혁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1-26
  • [기자수첩] 천주교, 기독교 그리고 교계 대통합
    교계 대통합을 향한 3개 기관의 노력이 올해도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가 매우 의미있는 행보를 펼쳐 주목을 받고 있다. 류 목사는 지난 1월 21일 천주교 정순택 대주교를 찾아 환담을 나누고, 종교 간 협력과 교류를 당부했다. 이날의 만남은 그저 종교 대표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만 놓고서는 크게 주목받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류영모 목사가 속한 예장통합측은 NCCK를 통해 천주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터라, 이러한 모습이 매우 익숙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날 대화의 내용이다. 류 대표회장이 천주교와의 관계에 있어 매우 전향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이날 류영모 대표회장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기후 위기, 통일, 낙태 등 사회 문제에 공동의 메시지를 냈으면 한다”며 “신학적인 차이는 서로 존중하고, 약자를 위해 하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일이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류 대표회장은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신학적인 부분을 ‘차이’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이나 정죄가 아닌 ‘존중’의 대상으로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대다수 보수 교단이 천주교와 그들의 신학을 ‘이교’ 혹은 ‘이단’으로 보고 있는 상황에, 보수교회를 대표하는 한교총의 대표회장이 ‘차이’와 ‘존중’이라는 말로 천주교-개신교 간의 신학적 간극을 메우는 모습은 매우 파격적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류 대표회장은 “약자를 위해 하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일”이라며, 개신교와 천주교 간의 연합과 협력을 당부했다. 사회와 국민을 위해서 신학과 종교를 뛰어넘는 ‘연합’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목에서 류 대표회장이 자신의 이러한 전향적 관점을 교계 기관 대통합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각 기관 통추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어느정도 해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단 문제’가 통합의 쟁점으로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 류 대표회장이 천주교를 향해 보였던 ‘차이’와 ‘존중’이라는 시각은 ‘이단 문제’의 근본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신성’ ‘연옥설’ 등 기독교의 신학에서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예민한 문제조차 ‘정죄’의 대상이 아닌 ‘차이’가 될 수 있다면, 한교총이 지적하는 한기총 내부의 문제나 한기총이 한교총을 향해 제기하는 ‘WCC’ 문제는 어쩌면 논쟁할 필요조차 없는 매우 가벼운 주제일지 모른다. 여기에 류 대표회장은 이 모든 이유를 ‘연합’이라는 말 한 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됨이 곧 희망이고, 국민들을 위한 길이라는 그의 말은 당연하게도 한국교회 전체가 염원하는 교계 대통합의 취지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단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지만, 오히려 과한 경계는 우리 스스로의 신학적 기준에 모순을 남길 뿐이다. 지금은 내가 아닌 우리, 일개 교단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를 생각해야 할 때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1-22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2022년, 희망의 하모니를 높이자!’
    2022년 한 해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화두(話頭)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한국교회 각 연합기관과 주요 교단장들의 신년사를 읽어 보았다. 모두가 코로나 시대에도 희망(Hope-소망)을 말하고,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며, 그 희망으로 세상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이끄는 희망이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희망을 선포해야 한다. 희망(소망)을 사전적 의미로 찾아보면, ‘장래에 실현될 것에 대한 기대’라고 정의한다. 성경에서는 희망과 소망을 같이 사용한다. 성경에서도 소망을 말씀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소망의 등불이 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한탄하고 근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하고, 또한 그 희망의 능력으로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의 위로를 받고 있고, 우리들의 그러한 믿음의 결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성경에 보면 수 많은 선지자들의 믿음에 행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인간적으로는 매우 혹독한 시련과 연단의 삶을 인내하면서 살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말씀에 따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희망(소망)을 힘차게 외쳤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사람들의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우상숭배가 횡행하고, 예배는 형식에 흘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됨을 희망적으로 전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회개하지 않는 유다의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죄에서 돌이키도록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40여 년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에스겔도 유다의 멸망이 시시각각 다가오지만, 하나님의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고, 영원한 구원을 주실 것을 희망의 메시지로 전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 시대 사람들의 태도와 모습에서 과연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육욕(肉慾)에 사로잡히고 육정(肉情)에 사로잡힌 세상 사람들은 차치(且置)하고,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삶의 모습 속에서 자신 있게 희망을 건져낼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 있다.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어둠과 멸망에서부터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희망을 전파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완전한 희망의 날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다가온다. 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으며,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희망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상황 3년 차를 맞는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날들이다. 교회들도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을 피하여 살 수는 없다. 우리 힘으로 안 되고, 우리 지혜로도 어렵지만, 이것을 통과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무너진 시련의 모퉁이에서 희망의 불빛을 보고, 그 빛을 확장하여 비출 때,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희망의 빛을 보게 되며, 정상(頂上)으로 향하는 길을 찾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가 할 일이다. 2022년은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미지(未知)의 시간들이다. 그래서 아무도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장담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희망의 날이 반드시 도래(到來)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희망을 더욱 크게 외쳐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절망의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입니다! 교회가 희망입니다! 복음이 희망입니다!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희망입니다! 여러분 그 희망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오십시오! 어찌 보면 2022년도도 전혀 희망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럴수록 희망의 함성은 커져야 한다. 희망의 거대한 출발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의 줄을 꼭 잡아야 하고, 그 희망의 노래를 줄기차게 불러야 한다. 희망의 근원에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있다. 새롭게 시작된 2022년에 우리 한국교회가 희망의 충전소가 되고,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전파하는 보급소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도록 실핏줄 같은 사명을 감당하자.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실개천이 시내를 이루고, 이것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강물이 흘러 큰 바다로 달리듯, 우리들도 희망의 하모니를 높여가는 기쁨으로 살자! 오라, 도전의 날들이여! 오라, 새로운 날들이여! 모든 날들을 희망으로 덮으리라. 올해를 소망으로 가득 채우리라!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01-21
  • [기자수첩] 새해 다시 대통합의 희망을 노래하자
    하나됨을 꿈꾸지 않는 교회에 복음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연합기관의 하나된 힘을 ‘병폐’로 단정 지어서는 안돼 현대사의 가장 큰 재앙으로 기록될 코로나19의 지독한 확산세가 전혀 주춤할 줄 모르는 와중에서도 여전히 새해의 아침은 밝아왔다. 코로나와 함께하는 세 번째 새해는 이제는 공포가 아닌 무던한 익숙함 속에 우리가 코로나로 수년 간 잊고 지냈던 본연의 일상에 안부를 묻고 있다.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었나? 우리 모두에게 코로나는 공동의 적이자,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는 중대한 매개지만, 반대로 코로나가 없었던 우리의 일상이 어렴풋한 기억에만 맴도는 것은 우리가 어느덧 삶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는 씁쓸한 반증일 것이다. 새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다시금 깨우칠 것을 요구한다. 코로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신앙이 이제 다시 삶의 중심으로 당당히 자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신앙은 점차 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되어 코로나에 경도된 이 사회를 새로운 빛과 희망의 이슈로 끌어줄 것을 확신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코로나를 억누를 새로운 빛과 희망의 이슈는 무엇인가? 단연 ‘대통합’이다. 하나됨은 그 자체로 희망이며, 복음의 실현이다. 한국교회 본연의 사명이자, 분열의 시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의 목표가 바로 ‘대통합’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대통합’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행한 분열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의 교단이 300개의 교단으로 흩어졌고, 이를 하나로 묶고자 탄생시킨 연합기관은 다시 세 개로 나뉘었다. 어떠한 변명으로도 결코 정당화 되지 않을 과거의 죄악 앞에 우리가 ‘대통합’을 얘기하는 것은 죄에 대한 철저한 인정이며, 새로운 미래를 위한 당연한 ‘회개’다. 하나됨을 꿈꾸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가 복음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죄를 인정치 않는 오만함에 두 눈이 가려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제멋대로 찢어 놓은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그대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잔인함은 지체들의 고통과 아픔을 굳이 외면하려는 무책임이다. 그런 관점에서 연초 기관 대통합을 대놓고 반대하고 나선 기성 지형은 총회장의 발언이 매우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교계 분열의 죄책을 누구보다 먼저 얘기해야 할 주요교단의 지도자가 앞장서 통합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납득키 어렵다. 자신이 통합을 반대하는 이유를 온갖 미사어구를 들어 설명하지만, 실상은 설득력 없는 조악한 논리일 뿐이다. “연합기관에 힘이 생기면, 병폐도 생긴다”며 지금처럼 삼분열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도 담그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전형이다. 연합기관에 힘을 싣고자 하는 것은 이 사회와 교회 내의 불의를 타파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키 위함인데, 애초에 이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처사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고, 주인에게 칭찬받기를 바라는 우둔한 종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된 힘이다. 그 힘을 어찌 ‘병폐’라 먼저 단정하는가? 과거 하나였던 한기총이 과도한 권력에 불의한 일을 저질렀던 것은, 그 ‘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사용한 이들의 욕심이 컸던 탓이다. 오히려 스스로 한국교회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이제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고, 제대로 된 연합기관의 기틀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겠나? 여기에 한교총의 공동대표제를 개정한 것조차 문제를 삼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이다. 공동대표제는 권력의 분산이라는 이득이 있을지는 몰라도, 동시에 책임의 분산이라는 엄청난 문제를 내포한다. 단순히 권력의 독점이나, 부정부패를 막겠다는 발상은 그 단체의 대표성을 해칠 뿐 아니라 발전을 저해한다. 예장합동측이 금권선거를 예방하겠다며 만들었던 제비뽑기 제도를 결국 폐지한 것은 ‘인물난’에서 오는 손해가 너무 컸던 탓이다. 그리고 제비뽑기 제도를 폐지하고, 합동측은 통합측을 제치고 교계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스스로가 내부의 권력의 독점이나 부정부패조차 막지 못한다고 단정한다면, 과연 한국교회가 종교로서 무슨 존재가치가 있겠나? 여기에 “한교총 만으로 충분하다. 교단이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열을 고착화하는 동시에, 또다른 분열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과거 한교연이 한기총에서 분열할 당시, 스스로 한국교회 보수 연합운동의 새로운 대표이자, 대안임을 자신했다. 허나 수년이 지나 한교연에서 한교총이 분열하며, 이제는 한교총이 대표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권력을 탐하는 ‘교단’들이 있었다. 분열은 또 다른 분열을 정당케 한다. 한교총의 분열이 정당화되는 것은 또 다른 분열을 야기할 뿐이다. 반대로 한교총이 결코 이상적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더 이상 대형교단들이 자기 이권에 맞게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새해 한국교회는 다시금 대통합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품는 지금의 희망이, 세상과 국민을 향한 기쁨과 치유로 열매맺길 기대할 뿐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2-01-17
  • [기자수첩] 누가 소강석 목사의 정치력을 의심했나?
    모든 대립과 법적 모순 해결, ‘정회’가 살린 한교총 지도자 한 명의 판단이 한국교회 전체를 ‘좌지우지’ 한국교회총연합이 완전한 ‘속회’로 교계 제1의 연합단체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날 속회는 지난 2일의 ‘정회’가 매우 적법한 ‘신의 한 수’ 였음이 증명된 자리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교계 일각에서는 의장 소강석 목사의 앞선 ‘정회’를 두고, 독단과 불법이라는 비난과 함께 단체의 분열까지도 염려했지만, 소 목사는 이런 의심을 불식시키며, 완전한 ‘속회’로 한교총의 더욱 높아진 위상을 증명했다. 애초 한교총은 상위법과 하위법이 충돌하는 법적 모순과 이에 바탕한 내부의 대립이 실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 강행된 정기총회가 결코 순탄할 리 없었고, 자연스레 회의가 점점 파행으로 치닫자, 소강석 목사가 의장 직권으로 ‘정회’를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정회’를 통해 확보한 시간동안 한교총은 근본적으로 내재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미진했던 정관들을 전면 개선했고, 무엇보다 내부 세력 간 대립을 해결했다. 이 시기에 가장 빛났던 것은 역시 소강석 목사의 ‘정치력’이었다. 특유의 화합의 리더십을 통해 단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모든 문제의 합의를 이끌어 냈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회의 내내 단 한 명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견도 없었다. ‘정회’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 회의 분위기가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일부 언론들이 ‘정회’를 보며 한교총이 깨어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적으로 정회는 깨어질 위기에 있던 한교총을 살린 ‘신의 한 수’가 됐다. 완전히 뒤바뀐 분위기 속에 새롭게 대표회장에 올라선 류영모 목사(예장통합 총회장)는 ‘정회’의 사실상 가장 큰 수혜자라 볼 수 있다. 만약 지난 정기총회에서 ‘정회’ 없이 임원인선이 강행됐다면, 류 목사는 불법 시비의 중심에 설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기에, 소 목사의 정회 판단이 결과적으로 류 목사를 살린 셈이다. 더구나 금번 총회는 3인 공동 대표제를 1인 대표회장 체제로 바꾸는 매우 예민한 회기로, 조금의 하자만 있어도, 당장 시비가 걸릴 판이었다. 허나 ‘정회’가 벌어다 준 시간 덕에 정관 전체를 다시 한 번 손 볼 수 있었고, 류영모 목사가 아무런 반발 없이, 1인 대표회장으로 우뚝 올라 설 수 있었다. 그리고 1인 대표회장 체제에 무사히 안착한 한교총은 앞으로 더욱 강화된 권한과 위상으로 시대의 위기에 정면으로 대응할 기반을 갖추게 됐다. 이번 ‘정회’는 지도자 단 한 명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회원들 간 고성이 오가는 극한 혼란 속에 소 목사가 자칫 ‘정회’를 망설였다면, 새로운 한교총도 없었다. 무엇보다 소 목사가 자신의 판단에 몰아칠 논란과 비난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이는 다름아닌 바로 한국교회였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한국교회에 현명한 지도자, 현명한 정치가 왜 그토록 절실히 필요한 지를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12-20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코로나19’를 품은 올해의 성탄절
    2021년 올해는 지난해에 이어 유난히도 ‘코로나19’로 인해 시달리고 타격을 받은 해였다. 그래서 우리가 보낸 2021년 한 해를 ‘코로나19의 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하거나 어색할 리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올 한 해는 코로나19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해였다. 앞서 두어 차례 백신을 접종했을 때만 해도 무언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후 델타 변이니 오미크론이니 하는 변종들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 지금은 너나없이 이른바 부스터샷이라 불리는 추가접종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이 3차접종이란 관문의 통과 없이는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맞을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고, ‘맞아야 할 의무’이기도 한 이 부스터샷 접종의 과정을 넘기기만 하면 모든 게 풀리리라고 기대하는 일 자체도 그렇게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다. 보건행정 당국에서는 앞으로 ‘하루 2만 명의 확진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우려를 이제 공공연히 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그만큼 사회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예고이기는 하겠지만, 이 일을 당하는 우리 시민들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각종의 통제가 시민들의 숨통을 그야말로 숨 막히게 조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럽 등의 어떤 나라 국민들처럼 “통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그런 나라들에서 확진자나 사망자들이 더욱 늘어나는 엄연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접종을 거부하거나 또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무시(거부)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통제를 가해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기울이는 것은 타당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정부의 관심두기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영업자들, 또는 소상공인들, 그리고 기타 열악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크면 클수록 좋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매우 열악한 형편에 놓여 있는 이 나라에 예수께서 오신 날 곧 성탄절을 우리는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날에는 성탄절이라고 하면 무조건 기분이 좋은 세계적 명절로 생각하고 즐겼던 것이 사실이지만 올해의 성탄절은 전혀 예년 같지 못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기 예수께서 오신 날이라고 하여 특히 아동들이 더 좋아하곤 하던 성탄절이었건만 올해는 전혀 그럴 분위기가 못 되는 것이다. 어린이집이니 유치원이니, 아니 초등학교마저도 코로나19의 여파로 대면의 모임이 통제되고 있으며, 또 상당한 수의 어린이 확진자들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매우 어두운 분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우리는 (아기)예수의 힘들었던 시절들을 되새겨 보면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어떤 힘을 오히려(역으로) 얻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은 분명히 기쁜 날이지만, 탄생 이후 예수께는 기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어둡고도 어려운 날들을 많이 맞이하신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줄을 알고 가족 모두가 애급으로 피난의 길을 떠난 것은 시련의 첫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찾다가 찾아낼 수 없게 되자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일이 발생한 것은 예수께는 또 다른 의미의 시련이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을 어린아이들이 자기(아기 예수) 때문에 무기력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만일 예수 자신이 생각(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이였다고 한다면, 얼마나 애통한 일로 여기셨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때문에 예수께서 공생애 때에 어린이들과 관련된 다소 혹심한 말을 발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즉 “어린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게 나으니라.”와 같은, 상당히 무서운 말씀을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러니까, 아무 죄도 없는 어린이들을 마구 학살하다니 말이 되는가, 라고 과거의 헤롯과 같은 권력자의 만행을 은근히 비판하는 말씀을 겸해서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공생애 때 예수께서 받은 수난은 극에 이르렀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그 수난의 바퀴가 굴러가는 게 마감되었다. 예수의 제자인 우리는 주님의 그런 고난을 생각하며 애써 인내하면, 오늘의 ‘코로나19’의 고난도 결국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1-12-19
  • [사설] 한국교회 신학교 구조조정 시급하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샬롬나비)은 지난달 말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아 논평을 통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정신을 회복하여 이웃사랑의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물질만능주의에 근거한 번영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하고, 또한 교인 감소에 따른 신학교 구조조정을 통한 목회자 수급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샬롬나비는 "지난 10년 간 한국교회 교단들의 교인 수는 꾸준히 감소하여 왔다. 2020년 기준 전년보다 예장 합동측이 17만 명, 통합측이 11만 명, 고신이 1만 명, 감리교가 6만 명, 기성이 3만 명, 기장이 8천여 명 감소했다. 이처럼 교인 수가 감소했다면 목회자 수와 교회 수도 감소해야 하는데, 하지만 교인 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수와 교회 수는 오히려 늘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시대적 공신력의 하락과 현대 한국인들의 세속적 행복주의가 있다. 이에 맞추어 신학교의 목회자 수급도 조정해야 하는데, 아직도 시대의 요구에 대한 교단들의 적응이 따라가지 못해 해마다 신학교 졸업생들이 쏟아지고 있다. 종교개혁주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에 대한 신학교 구조조정과 목회자 수급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예장 합동과 통합, 두 교단에서만 해도 2020년 한 해 동안 줄어든 교인 수는 200명씩 모이는 교회로 치면 160개 교회가 줄어들었고, 100명 교인이라면 320개가 사라진 셈이다. 아주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샬롬나비의 이 지적은 한국교회 대교단들이 당장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급한 사안이다. 현재 한국교회에는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이 60개가 넘고, 각 군소교단에서 무인가로 운영하는 신학교까지 합하면 300여 개나 된다. 그리고 이들 신학교에서 연간 배출되는 예비 목회자 수는 줄잡아 7000여명에 이른다. 교인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목회자 수도 필요하지만, 교인 수가 줄어드는데 교회 수와 목회자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기성 교회가 그만큼 영세해 진다는 뜻이다. 이는 민족복음화와 선교정책에 오히려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군소교단에서는 목회자 양육을 위한 하나의 교단직영 신학교가 필요하지만, 대교단에서는 여러 개의 지방신학교를 운영하여 필요 이상의 신학생을 배출하고 있다. 때가 늦기 전에 구조조정을 통해 신학교 운영현황을 바꾸어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21-12-18
  • [사설] 창간 30주년에 붙이는 감사의 인사
    본보는 1991년 11월 16일,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편집 목표로 창간된 지 이 달로 30주년을 맞았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마 5:37)는 사시로, 어느 교파나, 어느 교단의 도움 없이 순수한 교계연합지로 30년을 쉬지 않고 발행해 왔다. 이는 첫째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독자와 광고주들의 지원 덕분에 있다. 심지어 30년을 한 해도 빠짐 없이 후원한 광고주도 있다. 이 모두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문서선교로서 언론의 사명을 중요시 했다. 1897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조선그리스도인회보'를 만들었고, 같은 해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기독신문'을 발행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1946년 '기독교공보'가 창간되었다. 이후 이 기독교공보는 '기독공보'가 되었다. 이것은 모두 교단의 회보적(會報的) 성격을 가졌다. 또 부산 피난지에서 '한국기독신보'라는 새로운 신문이 나왔다. 이어 민주당 정권의 출범과 함께 '보도의 중립과 교회의 일치'를 사시로 새로 창간된 신문이 '크리스챤신문'이었다. 그리고 이어 '교회연합신보'가 나왔다. 이 시기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과 NAE의 소위 복음주의 운동으로 한국교회가 큰 분열 속에 휘말려 있을 때이다. 이들이 초교파 신문의 효시를 이루었다. 지금의 교계신문 전성시대는 제6공화국의 언론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교단마다 교단지의 발행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연합지가 발간되었다. 본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 연합지들은 언론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으로 인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명멸했다. 더욱이 이 기간 IMF도 겪었고, 코로나19도 겪고 있다. 그래도 본보는 이제까지 살아남아 30주년을 맞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본보는 그동안 기사를 쓰 온 필자들과 광고로 후원해 온 광고주들을 초청해 조촐 하게나마 기념 감사예배라도 드리려 했으나, 아직 코로나가 가로 막고 있어 기념 행사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본보의 앞으로 또 한 번의 30년을 기대하면서 <교회연합신문>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연지골
    • 사설
    2021-12-18
  • [연지골] 소시오패스
    ◇정신병리학적 개념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적 성격장애 또는 품행장애 현상을 드러내는 사람을 '소시오패스'(Sociopath; 반사회적 성격장애)라고 부른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감정 따위는 상관없이, 거짓말을 일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도 이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평소에는 학교나 직장에서 평범해 보이고, 사교적으로 보이지만, 때때로 비정상적으로 잔인하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자신의 잘못이 발각되면, 즉각 잘못을 시인하고 임기응변적인 변명과 말재주로 반성하는 듯하지만, 곧바로 같은 행동을 일삼는다. 이런 소시오패스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전 인구의 약 4% 정도라고 한다. 그것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밖으로 드러내 사회적 영향을 크게 끼칠 수도 있고,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내년 3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이재명 씨를 향해 한 정신과 의사가 '소시오패스'의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후보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는 장기를 가졌지만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무자비하게 타인을 이용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정신병리학적 용어 중에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있다. 사이코패스는 자기 감정에 미숙하고 때때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충동적 감정을 드러내지만,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감정 조절에 뛰어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이용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순한 양처럼 행동하며 미소를 지으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러다가 어느 날 충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하며 반사회적 행동을 드러낸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이코패스는 생물학적, 유전적 원인에 의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소시오패스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유년 시절에 학대나 방임 등을 겪으면서 자신이 무시 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면서도, 그 사람이 느끼는 기분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예사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어떤 종류의 자신의 실패도 인정하지 않는 '독재자'가 되고, 나라와 사회를 미증유의 혼란과 분열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같은 유형을 대표적 소시오패스로 진단한다. ◇또 전문가들은 고급두뇌집단이나 종교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소시오패스가 활동할 수 있고, 나아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과 같이 이런 유형의 인간들끼리 하나의 집단이 형성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교계에도 소위 '이단 감별사'들 중에 이런 인사들이 더러 있다. 그로 인해 교계의 분열을 자초했다. 저들은 자신들의 판단은 모두 옳고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멸시하는 오만을 가진다. 자신들이 가진 얄팍한 지식의 잣대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학적 신앙적 경험은 진리로 믿으면서, 다른 사람의 신앙적 체험은 무조건 이단으로 매도해 버린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의 분열은 이런 소시오패스의 기질을 가진 이단감별사들의 농간에 놀아난 교단지도자들의 미숙한 판단에서 왔다.
    • 연지골
    • 연지골
    202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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