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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주의 병에 담으소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 하였나이까?”(시56:8). 화창한 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정오 즈음이면, 창문 맞은 편 벽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소리 없이 고불고불 오르는 아지랑이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밖을 보면 눈에 쉽게 띄지 않아도, 벽에는 이런 모습들이 스크린처럼 펼쳐집니다. 머잖아 이 아지랑이들은 구름이 되어 가장 적절한 순간에 단비로 내려올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우리의 눈물에도, 우리의 탄식에도, 우리의 선행에도 주님께서 때로는 전혀 반응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 한 방울도 허비 되지 않고 아지랑이처럼 올라 차곡차곡 주님의 병에 채워져 가장 적절한 때 은혜로 내려 주십니다. 지금 당장 응답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코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때와 기한을 정하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성경학자들은 시 56편을 삼상21:10-15절 이하의 사건과 연관 된 시로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가드왕 아기스에게 피하지만 그곳 신하들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자 미친 체 하고 도망쳐 나옵니다.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다고 생각한 그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그 후로도 다윗은 10여 년 동안 유리하면서 육신적으로는 잠시도 쉴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합니다. 삼천 명의 택한 용사들과 함께 그를 수색하러 다니는 사울의 목숨이 도리어 다윗의 손에 잡히는 기이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왕이 되기 위하여 한 번도 모사를 꾸미지 않았음에도, 사울을 끝까지 사랑하고 참아주는 그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사울을 심판하시고 왕이 되게 하십니다. 그의 눈물, 그의 신음, 그의 탄식을 하나님의 병에 담아 신원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악에 대한 징벌도, 선에 대한 포장도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때에 맞게 적절하게 하십니다. 우린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에도 상급을 주장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의 은밀히 행하는 선이나 심지어 눈물까지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고 인내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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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실재하심’(요 14;16~21)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혀서 채찍으로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제자들은 ‘설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하실까...’ 라고 생각했겠지만, 미리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건이 터지면 당황하지 말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떠나시면 보혜사가 오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시지 않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다시 오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모르지만 우리는 그분을 압니다. 내 안에 계시는 분에 대한 감각이 있겠지요, 보혜사는 하나님의 실재하심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공간에 같이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같이 한방에서 사는 것입니다. 허물 많은 사람 둘이 만나서 부부가 되어 한방에서 같이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같이 살려면 평생을 서로 알아가야 합니다. 알아가면서 이해해야 내 것을 버리면서 상대방에게 맞추어 줄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하다 보면 먹는 것 입는 것 생활 습관까지 닮아갑니다. 같이 사는 것은 서로의 허물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입니다. 이걸 못하면 헤어집니다. 사람끼리 만나서 같이 사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완전 무흠 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살다보면 둘이 섞여져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완전하신 하나님과 죄인 인간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땅 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 (레 11:45)”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은 그분이 원하셔서 계획하신 그분의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요구한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의 하나님이 자기가 택하신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애굽 에서 꺼내오셨습니다. 애굽에서 열가지 재앙으로 온 세상을 떠들썩 하게 뒤흔드시면서 자기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가 택하신 자의 하나님 이신 것을 온 천지에다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그들과 거하시겠다고 언약을 맺으시고 성막을 짓게 하십니다. 보편적인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함께 사는 것, 그것은 놀라운 일이며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연합한 생명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탁월 하고 비교할 수 없는 영광 입니다.(고전 15:41)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후에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축복의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같이 살려면 먼저 나와 함께 거하실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뭘 원하시는 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맞출 수가 있겠지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레 11:45)” 하나님이 거룩 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같이 살려면 서로 수준이 맞아야 겠지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완전한 허물 덩어리인 내가 완전하신 그분과 어떻게 함께 살라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걸까요? 예수님 자신이 어린양 제물이 되셔서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 하다고 하십니다. 그것을 근거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었다! 그 성령님과 함께 거하라,” 이렇게 다 입증되고 통과되어서 하나님의 실제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실제화 된 것, 이것이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십자가의 모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그 결과로 받은 가장 큰 축복의 사건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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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준점’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행16:4~5). 이 말씀을 ''작정한 규례를 지키게 하여 믿음을 굳게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학교나 군대에서 훈련받았던 사람이라면 "헤쳐 모여"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모두가 아닙니다. 그 앞엔 반드시 기준점이 있습니다. 선생님이나 교관이 "전방 50미터에 있는 ()()를 기준으로 오른(왼)쪽 3열 종(횡)대 헤쳐 모여" 그러면 우린 그곳까지 헐떡거리며 뛰어가다가 줄을 섭니다. 그곳까지 달리는 순간 모두가 제각기 길을 가지만 기준점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흐트러지지 않는 줄이 됩니다. "헤쳐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항상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는 줄이라면 좋으련만 가끔씩 흩어지고, 혼잡 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토록 고요한 바다라도 사나운 바람이 불면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나 바다를 뒤집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평화로웠던 교회, 집안, 사회가 어수선해지고 요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준점이 있다면 흩어졌을지라도 다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000년이 넘도록 이민족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미 사라졌을 민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기준점이 있었습니다. 모세 오경이 기록 된 토라였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아무리 흐트러진 환경일지라도 한 데 모아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고, 어두워질 때 우린 처음에 확실한 말씀을 기준점으로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선 신앙생활부터 점검해봐야 합니다. '주일을 얼마나 거룩하게 지키고 있는지' '매일 빠뜨리지 않고 작정한 말씀을 읽고 있는지' '새벽 기도는 변함없이 하는지' '자고 깨는 시간은 일정한지' 등 믿기 시작할 때 작정한 규례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 기준점이 없으면 결코 믿음의 진보가 없으며 교회에 있어 기준점이 없으면 서로의 목소리만 높아지게 됩니다.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마다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작정했던 기준점을 찾아 흔들림 없이 나가야 합니다(히3:14) 그래야 일어설 수 있으며 회복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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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요 14:26~27)
    사람의 눈으로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바로 한 시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보내시는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혀서 채찍으로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의 제자들은 몰랐겠지요,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떠나가실 것이지만 제자들을 버리고 가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제자들과 함께 영으로 하나님이 함께 계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고 깨닫게 하시며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하십니다.(요 14:27) 평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평안이었던가요? 평안은 세상에서 잘 살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세상에는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진짜에는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도도하고 기품있는 가치가 있습니다. 가짜는 진짜를 똑같이 흉내내서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어야 진짜와 가짜가 분별이 됩니다, 평안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습니다. 평안이라고 해도 다 같은 평안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고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둘은 같아 보이지만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어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기 전에는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평안이라고 생각 했었습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이 질서 있게 제자리에 잘 배치되어 있는 게 평안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들이 무너지면 평안이 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 주변의 환경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해서 헌신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이없게 사기를 당해서 전 재산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평안이 깨어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살도 생각했었지만 남은 가족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붙들고 주님만 의지하기로 결단하니 주님이 나에게 오셔서 나와 함께 임재하셨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평안을 지켜 줄 걸로 알고 붙잡고 있던 것들이 다 부서지고 깨어져서 붕괴가 되었는데도 지금 내 마음에 있는 이 평안은 무엇일까요? 환경이 안정이 되는 게 평안이라면 다 깨져 버린 지금 나는 평안이 없어야 하는데 지금 나는 어느 때 보다도 평안합니다. 지금 나의 기도 제목은 주님을 위해 나머지 인생을 헌신 할 수 있을 만큼 큰 믿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30년 했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싶고 진실하게 믿고 싶습니다.” 평안은 위기 때 진짜와 가짜로 분별이 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세상의 환경 때문에 이루어 지는 평안입니다. 그 환경이 무너지면 평안도 없어집니다. 평안의 주체는 환경이 될 수 없습니다. 다 버리고 파괴시킬 수 있는 게 평안의 주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안의 주체는 환경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환경이 다 무너져도 모든 게 파괴되지 않고 다시 평안할 수 있어야 주체가 될 수 있지요, 예수님의 평안으로 예수님의 것으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진짜 평안입니다, 그래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받았습니다. 진짜 평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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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음행 중에 잡힌 여자’(요 8:1~11)
    그리스도인 이라면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감정이 안 생긴다는 고민을 많이 듣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까요? 라는 질문도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생기면 주를 위해 모든 걸 다 걸고 헌신할 수 있을 텐데 그 사랑이 안 생기니 괴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귀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안되어지니 괴로워하는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하나님을 모르고는 사랑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알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벌이라고 합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죄에 대해서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인식으로 시작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예수님에게 담아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요 14:9) 한 죄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있는데 사람들 손에 붙잡혀서 그 앞으로 질질 끌려 왔습니다. 머리채는 다 풀어지고 눈물 범벅이 된 얼굴과 옷이 흙먼지와 뒤엉켜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그대로 끌고 온 것입니다. 죄를 짓는 도중에 잡혀 왔으니 꼼짝없이 벌을 받아야 합니다. 피할 곳도 없고 도망 갈 수도 없습니다. 법대로 하면 돌로 맞아서 죽게 된 것입니다. 죄인 여자를 향해서 모여있는 사람들이 돌을 손에 하나씩 쥐고 곧 던질 기세입니다. 죄인에게 벌을 주는 살기등등하고 살벌한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천벌을 내리셔서 죄에 대한 벌을 주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법대로 하면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하니 예수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때 예수님의 눈이 수치심보다 더한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죄인 여자의 눈과 마주 치셨습니다. 정말로 불쌍하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여자입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요? 한때 누군가에게는 사랑받는 귀한 딸이었을 텐데 죄를 짓고 나니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의 신분이 그렇게 처참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나지막한 예수님의 한마디에 갑자기 살벌하던 현장이 숙연해 집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리니 이 말씀을 듣고 하나씩 하나씩 슬쩍 그 불편한 자리를 피해서 나갑니다. 이것이 죄인을 대하시는 공정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사람 중에서 누가 죄인이며 누가 의인이겠습니까? 모두가 죄인이지요.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죄를 벌하려던 그 자리에 아무도 없고 예수님과 죄인 여자 둘만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말씀을 들은 죄인 여자는 그 자리에서 오열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용납하시고 받으셨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구나, 사랑, 이것이 사랑이구나...’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용서하신 것이 사랑 인 것도 압니다. 그 여자의 마음이 어떤 심정 이었을지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이런 귀한 용서를 받고 또 다시 같은 죄를 지을 강심장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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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비나답의 집과 오벧에돔의 집’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삼하6:11). 지난 주일 새벽까지 주룩 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눈깨비로 바뀌더니 차츰 함박눈이 되 가고 있었습니다. 같은 형질의 구름인데 비로, 진눈깨비로, 함박눈으로 바뀌는 것은 그를 맞이할 때의 온도차이일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빼앗겼던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서 돌아온 후로 70여 년 동안(에벤에셀의 승리 때까지 20년, 사울 통치하의 40년, 다윗의 통치하의 10년)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삼하6:3). 그런데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아비나답의 집에 복이 임하였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옮기는 도중 소들이 뛰자 하나님의 궤를 붙들다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다윗은 두려워 그에게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웃사 사건 전까지 70여 년 동안 잠잠했던 여호와의 궤가 오벧에돔 집에 머문 지 단지 석 달뿐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궤로 인하여 오벧에돔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하게 주셨던지 모두에게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여다본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웃사 역시 죽임을 당하고, 용사 다윗도 두려워 예루살렘으로 모셔가지 못한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모셔온다고 하자 오벧에돔인들 기쁜 마음으로 모실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오벧에돔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벧에돔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맡았으니 온갖 정성을 들였을 것입니다. 자기 집에 하나님 보시기에 불합한 것들을 모조리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청결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보며 언약궤 모시는 법을 터득하려 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언약궤를 직접 볼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성막 문지기, 언약궤를 지키는 문지기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직분을 천하게 여기거나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충성스럽게 맡고 지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온 가족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대상26:4-7절까지는 오벧에돔과 그 자손의 직분에 대하여 나열 됩니다. 그리고 8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저희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 이 명이며” 이처럼 그 자손들에게까지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아비나답의 집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언약궤를 수레에 모신 것을 보면 아마도 하나님을 말씀을 경홀히 여겼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민4:15). 성물은 만지지 말며 어깨에 메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어깨에 메도록 하지 않고 수레에 실었으며, 또 만졌습니다. 구름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 은혜가 온도차이로 인하여 단비가 되기도 하고 또 눈이 되기도 한 것처럼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웃사처럼 화가 되기도 하고, 오벧에돔처럼 복이 되기도 합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고 바라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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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1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11:1~44)
    어떤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깊어 위독해 지자 누이들은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며 이틀을 지체 하시는 바람에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은 죽는 게 아니고 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자는 것이면 깨워서 일어나는 게 가능한 일입니다. 사는게 무엇이고 죽는 게 무엇인가?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에 관하여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러 베다니로 가십니다. 베다니에는 죽은 나사로를 애도하는 사람들로 초상집이 북적거립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마르다 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도가 마지막 부활의 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믿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다시 살아난 다는 것은 지금 현재 살아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가져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죽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육체의 죽음을 넘어서 다시 사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받은 사람은 죽음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이 생명의 효력은 죽은 후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현재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아무도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그들로 믿게 하시기 위해서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서 육체가 다 썩은 시체로 있는 나사로를 깨우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하시고 무덤 밖에서 나사로가 들을 만한 큰 소리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죽은, 아니 자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성큼 성큼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시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 그대로 무덤에서 나옵니다. 그 얼굴은 수건으로 싸여 있는 시체 모습입니다. 죽은 자가 일어나서 나올 수 있는 장엄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에서 그것을 보던 사람들이 놀라서 탄성을 지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차갑고 어두운 무덤까지 들어가서 자기의 육체가 썩어가는 경험을 처음으로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겠지요, 예수님은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십니다. 아직도 손발이 묶여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고 있는 나사로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풀어주는 일은 누군가에게 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손과 발이 묶여 있는 나사로는 스스로 자신을 풀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사로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나사로를 풀어주지 않으면 생명을 받았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습니다. 죽은시체처럼 그대로 묶여 있어야 합니다. 풀어져야 비로소 생명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나사로는 살아 있어서 싸이고 묶인 결박 때문에 답답해 죽을 지경입니다. 누군가의 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나사로의 얼굴을 꽁꽁 싸맨 수건을 풀어 줍니다. 나사로에 대한 긍휼한 마음으로 손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손과 발을 풀어주면서 나사로의 눈과 마주친 그는 놀라운 생명의 경이로움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이제 나사로는 더 이상 죽음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자유로워진 손과 발을 움직여 보면서 나사로는 조심스럽게 걸어봅니다. 나흘이나 매여 있던 다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니 뛰어보고 싶습니다.나사로는 더 이상 죽음에 눌려 지내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 있는 자들은 죽음을 향해 외칩니다. “나를 눌렀던 어둠에 속한 모든 것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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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버릴 권세’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선거 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몇 몇 국회의원들은 젊은 세대에게 양보하겠다며 출마포기를 선언합니다. 그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위와 명예를 버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권세’ 하면 얻고 누리고 부리는 것을 생각하기 쉬우나 버릴 수 있는 것도 큰 권세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낭패를 당하고 멸망당하는 이유들은 대부분 얻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지 못해서 생깁니다. 소돔성이 멸망할 때 롯의 가족들은 그동안 일구어 놓은 살림과 명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버릴만한 힘이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습니다. 그들의 약함을 천사가 도운 것입니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끝내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9:26).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모두 멸하라고 한 우양을 멸하지 않고 가장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하여 끌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명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15:24). 그가 왕이었지만 백성들의 잘 못된 말을 뿌리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왔던 부자청년은 가진 것을 버릴 힘이 없어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마19:21). 이처럼 버리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영적인 힘입니다. 어떻게 해야 버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창14장에는 롯이 사는 소돔 땅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결국 소돔을 포함한 연합국이 패하고 그들의 재물과 양식은 빼앗겼으며 롯도 포로로 잡힙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브라함은 평소 잘 훈련 된 318명의 용사를 데리고 밤에 습격하여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또 부녀와 백성을 다 찾아왔습니다(창14:1-16). 아브람이 승전하고 돌아올 때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러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소돔 왕도 그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그러자 아브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 하리라.”(창14:17-23). 그가 소돔왕의 호의 아닌 호의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준 떡과 포도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먹고 거절할 힘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거절할 힘, 거절할 능력은 성령의 감동된 말씀을 먹을 때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 풍성한 문화 유적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행7:2-3). 바울 역시 그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영광의 예수님이 나타나 주셨기 때문입니다(행26:19). 인도의 성자 썬다싱이 그와 조상들이 섬기던 힌두를 버릴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버릴 힘은 영광의 하나님을 볼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한 형상입니다(출33:19).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은 꼭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하여 무엇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살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함입니다. 그러한 영광은 말씀을 믿을 때 체험하게 됩니다(요11:40). 히11:24이하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말합니다. 바라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히12:2-3).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 명예 영광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었고 또한 바라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절의 힘은 믿음과 소망에서 나옵니다. 얻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리려면 권세, 곧 힘이 있어야 합니다. 버릴 권세는 말씀을 먹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믿음과 소망에 힘을 쓸 때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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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이삭의 우물’(창 26:26~33)
    이삭은 흉년의 때에 블레셋의 그랄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블레셋왕 아비멜렉의 호의를 받고 잘 지냈습니다. (창 26:11)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시니 농사를 지어도 백배나 번창하고 양과 소들도 떼를 이루고 종들도 많아졌습니다. 마침내 생활이 창대하고 번성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때 부터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무엇을 해도 복을 받고 잘됩니다.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의 성공이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하고 패배자로 느끼게 하기 때문에 눈앞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기와의 간격을 좁힐 수만 있다면 자기가 있는 곳까지 아니 더 아래까지 끌어 내려 놓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잘나가고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질투하는 부류들이 함께 따라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에는 항상 있는 일 입니다.(전 4:4) 보다 못한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떠나 달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당신이 우리보다 강성하니.... 이삭이 탁월하게 뛰어나니 공동체가 이삭 한 사람 때문에 시끄럽기 시작합니다. 이삭은 조용히 짐을 꾸려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갔습니다.종들은 그곳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합니다. 우물은 먹고사는 가장 중요한 근거지입니다. 그래서 우물을 발견하여 파는 것은 행운이며 축복입니다. 겨우 우물을 파고 자리를 잡을까 했더니 그곳의 목자들이 와서 자기들 것이라고 내놓으라며 시비를 걸어옵니다. 경쟁입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빼앗기도 하고 안 뺏기려고 몸부림치면서 때리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함께 대응하지 않고 달라고 하니 그냥 줘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팝니다. 어떤 사람은 몇 년을 파도 파도 나오지 않는 우물이 이삭은 손만 대면 터집니다. 그런데 또 와서 판 우물을 빼앗아 갑니다. 이삭은 그것도 또 내어 줘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거기서 옮겨서 가다 보니 더 넓은 곳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서 우물을 파자마자 바로 터집니다. 이제는 이삭의 우물 파는 실력 때문에 빼앗는 사람도 질렸는지 더 이상 시비가 없습니다. 이삭이 어디를 가든지 우물이 터지고 손을 대는 것 마다 백배의 결실을 맺는 것을 보니 어느 누구도 상대가 안됩니다. 이제는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탁월하게 강성해져 버리니 질투하던 경쟁자도 도움을 받으려고 와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동역자가 됩니다.(창 26:28) 이삭은 나약 하고 힘이 없어서 우물을 빼앗긴 게 아닙니다. 그냥 달라고 하니 내어준 것입니다.(눅 6:29) 이삭은 자기 우물도 지키지 못한 약자가 아니라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는 흉년이 와서 길을 떠나는 이삭에게 축복을 약속하면서 그랄 땅으로 가라고 보내셨습니다. (창 26: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거하면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믿음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이삭은 복 주실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내어 쫒으면 나가고 빼앗으려 달려들면 주어 버렸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또 채우시고 넘치도록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에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 달려 들었지만 이삭은 그깟 우물 하나 가지고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블레셋에게서 맞서 싸워 빼앗아 오지 않아도 땅을 팔 때 마다 우물이 터지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삭의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당당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품 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과 구별됩니다. 세상은 무한 경쟁 시대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강해지기 위해서 독해지면서 작은 것에는 움켜쥐고 벌벌 떨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을 가진 의 여유를 부려도 됩니다. 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다시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종들은 우물을 파기 시작하니 얼마 안가서 또 우물이 터집니다. (창 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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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 다윗’(삼상 26:6-16)
    사무엘상 24장에 이미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서 사울이 택한 군사 삼천 명의 수색을 피하여 굴속에 숨어 있을 때 용무차 들어온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베어 보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다윗이 십 황무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또 다시 그를 잡기 위하여 직접 삼천 명을 거느리고 온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그를 죽이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숫자상 삼천 대 육백은 싸움이 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사울이 못 미치는 곳으로 피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는 아비새와 함께 직접 사울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비록 사울이 누워있다고는 하지만 겹겹이 둘러싼 보초병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잡아 왕의 총애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아비새와 함께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건이 있기 전에 벌어졌던 사울의 엔게디 황무지 사건과 나발의 사건을 통하여 큰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결코 사울의 손에 붙이지 않으신다는 것과 악인은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8:5a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다윗이 거친 들에서 사울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결코 사울의 손에 붙이시지 않으신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의 믿음대로 사울은 진 가운데 누워 자고 군사들 역시 하나님께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삼상26:12). 그러면 왜 다윗이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이고 왕을 차지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리고 싶었을 것이며, 그의 선을 악으로 갚는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자신들을 애굽에 팔아넘겼던 형님들이 곡식을 사기 위하여 그곳으로 온 것을 알았습니다. 형님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 섭섭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던 것은 그를 애굽으로 보낸 분이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님들을 마음으로부터 이미 용서하였지만, 회개할 기회는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그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사흘 후에 요셉의 형님들은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42:21)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므온만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다른 형제들은 곡식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시107:10이하에는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라고 나옵니다.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라고 나옵니다.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으니 그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만일 엎드러졌을 때 돕는 자가 있었다면 회개하며 부르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조건 돕는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햇빛도 좋지만 무조건 햇빛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눅15:7). 그러므로 복 중에서 큰 복은 회개의 복입니다. 회개는 생명을 얻게 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회개하게 되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며, 마귀 올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5-26).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회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마귀 올무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올무에 걸린 자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무엇인가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하였지만, 사울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심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땅에서 없앴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 죽은 사무엘을 불러오라고 합니다(삼상28:8-9). 그 결과 블레셋의 침입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회는 착한 양심을 쓰는 사람이 포착합니다. 착한 양심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때문에 통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57:15). 다윗이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 것은 양심 쓸 기회를 준 것입니다. 신자들이 어떤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면 사해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회개는 생명을 얻게 하고, 진리를 알게 하며, 마귀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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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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