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6(수)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실시간뉴스

실시간 영성논단 기사

  • 성육신한 예수교회-26
    얼마 전 유투브에서, 도시에 널려있는 CCTV에서 찍힌, 한 시민의 택시 타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이 시민이 택시를 잡아 올라타는데, 함께 차에 몰래 올라타는 자가 있었다. 차에 몰래 동반한 자는 CCTV에만 찍힐 뿐, 운전자나 손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하고 출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전혀 인지하질 못하는 가운데에 무임승차와 같은 도적을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온 것이다.이렇게 사람이 아닌 것들이 사진이나 동영상에 찍혀서 세상에 들어나기 시작한 시기는 분광학이 발전하면서부터이다. 물리학연구소 분광학 실험실에서부터 발견된 이러한 자료들은, 독일의 유보트로부터 영국의 군함이 침몰되던 시기에, 실험실에서부터 적외선 카메라에 찍힌 자료들이 쌓이게 되었고, 지금은 유투브에까지 올라오게 된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모르는 중에 이러한 일들이 수없이 반복되어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되겠는가? 굳이 이러한 예를 들지 않는다 해도 성경에는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묵시문학인 다니엘서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에 던져 졌는데(단 3:20,27), 풀무에 던져진 이 세 사람이, 불에 사라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이 더 불어나서 네 사람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상당히 고무되어서 긍정적 사례로 인식되어졌다. 그러나 반면에 성경에는 부정적 사례도 있다. 이스라엘 아합 왕의 말기에 아합이 아람과의 격렬한 전투에서 사망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였는데(왕상 22:17,23), 야훼 앞에 선 한 영(靈)이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서 사람을 꾀이겠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서 선지자들을 죽이고 국가를 혼란스럽게 한 이세벨과 아합은 짐승의 밥이 되었고 들판의 흙으로 돌아갔다.역사를 기록하는 서기관의 해석이 녹아있는 이 이야기는, 인간사에 사람의 생각이나 행위를 앞서는 영들의 움직임이 있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들은 기록물에 의하면 대부분 5%에 해당하는 지식인들과 권력자들과 경제인들 종교인들에게 맞물려있다. 세상사가 이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은 노동계의 수장들이나 시스템도 이에서 자유하질 못하다. 세상에 일어나는 거대한 이슈와 사건 가운데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세세하게 관찰해 보면, 세상을 속이는 어둠의 영들이 어떻게, 어느 시기에, 어떠한 성향으로 침투하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기록한 왕궁의 서기관은, 정권이 무너지고 국가가 패망하는 원인을 발견한 듯 하고, 이에 지혜 자들의 식견을 깨어나게 하려는 의도인 듯, 세심한 노력이 엿보인다.이러한 사례에서 볼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교회도 도적질 당할 수 있을까?’ 권력과 명예와 경제권도 도적을 맞는데, 교회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이 잘못된 질문은 아닌 듯, 예레미야나 스데반이나 예수께서는 성전 앞에서 소리쳐 이르기를, ‘이 도적놈들아. 너희가 하나님의 전을 도적과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하였다. 오늘의 국회나 노조의 투쟁들은 국민들이 모두 볼 수 있게 공개된다. 이러한 것들이 투명하게 매스컴과 지상에 들어나긴 하지만, 중요한 책략들은 교묘히 들어나지 않게 안전가옥 같은 곳에서 전략을 꾀하기 때문에, 시민들은 결과물을 보고서야 뒤늦게 알게 될 뿐이다.오늘 날, 어느 예배당이든지 ‘우리 교회에는 ( )도둑 출입 금지’ 등, 이러한 문구들이 심심치 않게 걸려있다. 이건 코미디도 아니고, 얼마나 웃기는 현수막인지……, 마치 ‘생쥐 출입 금지’ 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강도나 도둑은 결코 공공연하게 들어나 있질 않다. 나중에 가서야 결말이 나타나게 되고, 그제 서야 도둑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그 때에는 모든 것을 잃고 난 이후이다.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모두가 맞설 수 있는 올림픽 경기에서 마저도 메달을 도적맞는 경우를 보아왔다. 옛날에는 종종 스포츠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왔으나, 오늘에는 세계 도처에서, 이미 승리가 누구에게 정해진 경기를 관전하는 경우가 많다. 권력자의 탐욕은 메달까지도 독점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볼 수 있었다. 요즈음처럼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경제인들, 권력자들, 정치인들, 그리고 예외가 될 수 없는 종교인들……, 이들을 교묘하게 속이기 위해서 미션을 받고 침투해 있는 사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 걸까? 교회마저도 갑작스레 개들의 먹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왕상 21:23)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9-29
  • 성육신한 예수교회-25
    에스겔이 하루는 교회의 문지방에서 물이 솟아나서 흐르는 그림을 보았다. 그가 본 환상은 아주 세밀하게 에스겔서에 기록되었다. 목회자에게는 교회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도 교회 성장 세미나에 인파가 몰리는 것들을 보면 아직도 슈퍼마켓 식 경영 방식이 수그러들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경제력이 좋아지면 무언가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이러한 것들은 에스겔이 본 생수의 강이 아니다. 인구 감소와 노령화, 젊은 세대의 감소가 교회에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이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끊이지 않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들의 일탈로 인해서 세인의 근심거리가 되는가 하면, 하루가 멀다 않고 터지는 교회 지도자들의 탈선으로 인해서, 교회의 본질과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의구심이 드는 시점에 우리가 와 있다.이렇게 교회의 근원적인 문제에 직면한 우리 교역자들로서는 ‘교회가 무엇인가? 이럴 때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된다. 아마도 에스겔이 당면한 교회의 문제가 오늘 우리의 문제와 다르질 않았을 것이다. 에스겔의 그림 중에는, 주검의 골짜기에서 해골들이 군대가 되어 일어나, 잃어버린 도성을 되찾아 복구시키는,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의 그림이 투사되어 있다. 이 모든 환상들은 교회의 회복을 꿈꾸며 그려진 성령의 말씀이다. 죽은 예전만 있던 교회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 무엇이 시작된 것이다. 물이 흘러내리면 땅들이 적셔지고 비옥해진다. 물고기도 살지만 숲도 우거져서 온 세상이 낙원이 된다. 농부나 어부 할 것 없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이 모든 정황을 리메이크 한 복음서가 요한복음이다. 요한은 에스겔을 그대로 읽어서 요한의 시대로 번안해 놓은 것이다. 단지 에스겔의 교회는 한정된 이스라엘 시민과 팔레스타인 지역과 중앙 성소에 집중되어 있지만, 요한의 교회는 모든 세계인을 향한 거룩한 공회를 다루고 있다. 독자들이 알다시피 요한의 시대에도 교회들이 피폐하여졌다. 그 시대의 교회들을 일곱 교회로 정리한 요한계시록이 이에 대하여 잘 시사한다. 계시록 이후 십년정도 지나서 요한복음이 나왔으니, 교회가 음녀들의 포도주와 향연에 얼마나 취해있던지 중심을 잡지를 못하였다. 요한은 이렇게 혼탁해진 교회를 순수한 복음으로 재설정해야 했다.오늘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우리로서는 책임감을 무겁게 갖는다. 우리 역사에서 보았듯이, 국가가 패망한 때에,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잃어버린 강산을 되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던지고, 가족마저도 멀리하고, 조국의 광복만을 바라고 자신들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던지지 않았던가? 에스겔은 조국을 잃은 상태에서 먼 나라에서 포수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교회의 꿈을 꾸었는데, 요한은 공간적이거나 제한적 범주들을 넘어서서, 온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사치의 세력과 음부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순수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유기체가 되도록 숨을 불어넣었던 것이다.오늘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신학자라면 작금의 피폐한 상태에 있는 교회의 신학을 재설정해야 한다. 구원론과 관련해서 우리가 보다 큰 것을 잃은 것이 무엇인지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간과한 것들 중에 지금도 놓치고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소홀히 한 것들 중에서 본질적인 것을 재발견할 수 있다면, 오늘의 교회는 보다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대다수의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춤을 춘 신학자들도 무엇보다도 교회주의에 빠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는 물론, 성령마저도 소홀히 하였다. 순수한 복음보다는 교회론적인 복음으로 윤색되었고, 교회론에 짜 맞춰진 옷이 그리스도에게 입혀졌고, 성령마저 교회론의 들러리가 되었다. 정황이 이렇게 교회에 집중되다 보니 그리스도와 성령과 그의 복음은 소원하여진 것이다.목회자들이 저마다 교회의 성장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도덕과 윤리를 땅에 떨어뜨렸고, 복음마저 상실하였다. 에스겔의 교회가 바빌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듯이, 요한계시록의 교회도 촛대가 옮겨질 상황이었다. 요한은 이를 보고 일어나서, 포도주가 떨어져 흥을 잃은 잔치 집에 새 포도주를 공급하여 잔치의 흥을 일깨웠고, 본질과 기능과 역할이 쇠퇴한 낡은 교회에 다시금 성령의 숨을 불어 넣는다. 루터와 칼뱅이 죽은 중세교회를 다시 일으켜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고, 김 추기경이 수취와 허물로 주검가운데 있던 한국가톨릭을 살려서 세상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던 그 신학과 역동은 무엇이었을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9-23
  • 성육신한 예수교회-24
    러시아 여러 곳을 다니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땅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렇게 넓을 수가 있으랴? 하는 마음뿐이었다. 사람들도 자이언트 족속 같아 보였고, 저들이 키우는 말마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 같았다. 이렇게 넓은 땅을 경작하려면 한 번 들에 나아가 추수를 마치기까지는 집에 들어오질 못하였다. 들판에 초막을 짓고서 모든 가족과 마을 인구가 거기서 살아야 했다. 가을걷이가 끝이 나야 비로소 마을에 들어와서 장가들고 시집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들이 넓은 마을에서는 한 마리의 소나 말로는 땅을 기경할 수 없어서 여러 마리가 한 조를 이뤄 밭을 갈아엎었다. 쟁기를 잡은 농부는 네 마리, 혹은 여덟 마리 소를 잘 다뤄야 일을 기간 내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팔레스타인에서는, 천사들이 돌들을 각 나라에 분배하려고 보자기에 싸서 날아가다가, 한 귀를 놓쳐서 쏟아진 것인지는 몰라도, 그 땅에는 돌들이 지천에 깔려있다. 이런 땅은 한 마리의 짐승으로 경작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적어도 두 마리라야 비로소 땅을 기경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강령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세우려면 사람들에게 전하고 학습시켜서 실천력을 높여야만 한다. 바로 이 책무가 제자들의 멍에였다. 유대인에게 평생 걸어야할 길이고, 목에 메고 일궈야 할 책무가 율법이었듯이, 제자들이 평생 씨를 뿌리며 추수해야할 책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학습시키시고 본을 보이신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다.멍에는 한 마리가 메는 것이 아니라 여러 마리가 함께 메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강원도에서는 산이 험악해서 두 마리로 밭을 갈아야했다. 남녘에서는 두 마리로 가는 것이 번거로워 한 마리로 가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우리가 읽는 복음서의 멍에는 쌍봉 멍에이다. 적어도 두 마리로 밭을 갈려면 숙련된 소를 안에 두고, 수련 받는 소는 바깥에 세우고 밭을 간다. 여기서 안소는 예수님이시고, 바깥 소는 우리 자신일 것이다. 밭의 고랑을 고르게 맞추려면 농부의 지시나 목표 설정을 잘 알아서 인지해야 한다. 먼 산을 바라보질 않으면 밭고랑이 삐뚤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걸음도 잘 맞추고, 호흡도 맞추고, 힘도 적당하게 맞춰 갈면,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넓디넓은 밭은 모두 기경된다.우리가 예수님과 목표 설정이 같고, 예수님과 스텝을 잘 맞추면 일하기가 상당히 수월하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힘이 세다하여 자신의 힘대로만 한다면 다른 한 쪽은 넘어진 상태로 끌려가기 마련이다. 실제로 천국사역은 관계적인 성격을 띠었다. 머리도 잘 맞아야 하지만 정서적으로도 교감이 되어야 하고, 물리적으로도 조화를 이뤄야 하고, 성령께서도 단비를 때맞춰 내려주셔야 한다. 개인과 집단의 정서와 지능도 향상시켜야 하지만, 성령의 은사 시스템이 가장 효율적이다. 담임목사가 안소이고 부목사가 바깥 소라면 예수님이 농부가 될 것이리라. 들판에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과 골짜기에 흐르는 물, 같은 목표, 공감 있는 소통, 약자의 발걸음에 발을 맞추는 배려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더욱 비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몹시 황폐해졌다. 우리 사회가 건국 이래로 실업과 인구부족, 집단이기주의와 황제노조라는 깊은 질병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이, 교회 역시 이와 다르질 않다. 갑 질이란 것이 제도적으로 단단하게 요새화된 곳이 교회이다. 담임목사는 위임하면 평생직이 되는 반면, 부목사나 전도사는 그 교회를 떠나는 날까지 임시직이다. 마치 ‘노예계약’이라 하면 딱 맞는 말이다. 목사 안수가 한동안 움찔하고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 같더니 잠시뿐이다. 안수를 받자마자 내쳐지는 것이 일상이고, 조금 나은 곳은 한 이삼년 사역한 후에 헌신짝처럼 내쳐진다. 목회자의 터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한 교단지가 밝힌 부목사의 실태를 보면 앞이 깜깜하기만 하다. 한 교단에서만 임지를 잃은 무임목사가(2015년 12월 현재) 1500명에 육박한 것이다. 노동 인구가 2,3%만 넘어도 일용직 임금이 형편없이 추락하는데, 오늘날의 목회자의 가치는 사회적으로도 가장 낮은 처지가 된 것이다. 이럴 때 일수록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는 한국교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요청 된다. 남아도는 목회예비군 인력을 정예화하고, 단단하게 복음으로 재무장 시키려면 꽤 많은 비용이 들것 같아도 실제로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한국교회 지도자 여섯 분이 만나면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담임목사라 하더라도 3년이 지나면 사임을 하는 사례들이 빈번해졌고, 교역자 부인 역시 밤늦도록 일을 해야 하는 이 현실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9-08
  • 성육신한 예수교회-23
    어느 시인이 가장 애처로웠을 때 중에 한 가지가, 도둑이 자기 집에 들어 왔는데, 가져갈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경우란다. 요즈음에는 이런 집이 더욱 많아져서 도둑들도 웬만큼 꾀를 쓰지 않으면 하루를 공치는 경우가 잦은 모양이다. 한번은 도둑이 작은 교회 교역자의 집을 털려고 들어왔는데, 정말 양말 속까지 다 털어서 거실에 모든 기물과 옷 등 소지품들을 쌓아 놓았다. 집 주인이 들어가 보니 오로지 가져간 것은 딱 하나, 학교 때 받은 실반지 하나였다. 도둑이 들어온 것에 대해 당황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들어온 손님에게 아무것도 들려 보낼 수 없었던 처지가 한동안 애처롭게 느껴지더라는 것이었다.요즈음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인 부문에 관하여는 최소한에 필요한 것만을 지니면서 꾸려 나가는 오XX 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의 대표가 칠순을 바라보면서 삼십년간을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살아온 이야기이다. 그는 세상이 보여주는 가치관에는 거의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익을 좇아서 가는 경제논리도 결국에는 사회적 약자를 만들어 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고, 아무리 법체계가 잘 되어 있어도, 그 법은 종래에 가서는 인간에게 폭력을 가져오기 때문에 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줌으로서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는 세상을 어떻게 이뤄갈 수 있을까? 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던 가운데에, 그 길을 산상수훈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 공동체에서는 출소자도 지체부자유자도 행복을 붙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공동체는 이익을 따라가질 않는다. 적어도 인간관계에서만큼은 ‘왜 그랬어요?’라는 말을 사용하질 않는다. ‘그랬군요!’하는 공감대가 먼저이며, 누구에게든지 낯선 나그네라 하더라도 환대를 받는다. 생면부지의 손님이 온다하더라도 한 끼의 식사는 물론, 여러 날도 함께 묵을 수 있고, 그가 좋으면 평생도 함께할 수 있고, 언제든지 들어올 수도 있지만 나갈 수도 있는 문이 활짝 열려있는 공동체라는 것이다.이 세상에서 길이 막힌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직도 퍼즐의 범위가 광범위해서 막다른 벼랑 끝에 서 본 경험이 없는 슬기로운 지식인들도 있겠으나, 모두가 길이 없는 곳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떠난 실낙원 증상에 시달리지 않는 이가 어디에 있을까? 바울과 같은 이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구나!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하였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진정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란 거의 끝이 막혀있을 뿐이다. 해결의 방안이란 오로지 그 곳에서 떠나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어가 반복되어 있다. 아담이 그 부모를 떠나...,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천사가 롯에게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였다. 바른 길로 갈 수 없도록 하는 더러운 영으로 혼합된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가라 함은, 그 땅의 왕들이 음녀의 포도주에 취했고, 그 도시의 상인들마저도 그녀의 사치 바람에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계 18:1-3). 솔로몬 이후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이 중앙 성전에 계시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야훼의 궁전이라 하였다. 그런데 어찌해서 주님은 주후 80년 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하면서, ‘내 백성아 그녀를 버리고 나오너라. 너희는 그 여자의 죄에 휩쓸리지 말고, 그 여자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계 18:4)’ 하신 것일까? 이는 교회마다 이 여자와 함께 치부하면 놀아났기 때문이었다. 계시록이 기록된 10년 이후, 다시 기록된 요한의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맨 처음 행보 하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는데, 그날 성전에서 ‘이 전을 부숴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우겠다.’ 하심은 왜일까?어린 시절 ‘텬로력정’을 읽은 독자들은 그 뜻을 깊게 알질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 시절의 교회는, 지금처럼 음녀가 권하는 진노의 포도주에 덜 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들의 취기가 도를 지나 장망성과 다를 바가 없다. 그 한 예로, 한 중형교회에 후임자가 들어서게 되면 권력투쟁이 시작된다. 한동안 몸을 움츠렸던 세력들이 일어나는데, 온갖 비리가 다 들썩이게 된다. 멀리서 보면 한 개인 지도자의 도덕적인 문제로 위장되었으나 사건의 본질은 권력 투쟁인 것이다. 교회가 이해집단이 되어버린 이상, 아무라도 이러한 통과 례는 피해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9-01
  • 성육신한 예수교회-22
    우리 동양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가운데에, ‘남쪽에서 가져와 심어놓은 귤나무가 북쪽에서는 탱자나무가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江南種橘江北爲枳)?’ 하는 이야기는 제나라의 안영과 초나라의 영왕이 주고받은 담화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뜻은 사람됨에 있어서 환경과 풍토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일 것이다. 요즈음 기독교 지상에서도 의인과 성화에 관한 신학자들의 논쟁이 한창이다. 마틴 루터가 제창한 ‘열매가 좋아야 좋은 나무라’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향하는 영국 복음주의자 톰 라이트(N. T. Wrigt)의 견해에서,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를 김세윤교수가 수용한 것과 관해서 논쟁이 뜨겁다.이 논쟁은 필시 한국교회의 도덕성 결핍으로 인해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자 촉발된 논쟁일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가 의롭다함을 받았음’에 대한 법정적 무죄 선언이 신자들의 도덕성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역사에서 독일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종주국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2차 대전 중에 유대인을 600만 이상을 살해하였다. 독일 시민이라면 그 가족 가운데에 한사람이 유대인 살해에 연루되어 있을 만큼, 시민 각 사람의 의식이 복음의 가르침에 훈련되어 있질 못하였던 것이다. 금 번 폭스바겐의 부도덕한 처사에서도 독일 사회의 시민 의식과 도덕성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복음과는 별개의 문제로 다뤄졌으나, 실제로는 기술이 규제를 따라가질 못해서 일어난 처사이기도 하다.우리 교계를 살펴보자. 투표 과정을 통해서 교단장이 선출되고, 그 선거 과정에서 부정선거가 멈춰지질 않고, 당선된 임원 구성에 의해서 정책과 목표가 설정된다. 어디 이뿐인가? 서로 간에 주고받는 전략적 술수에 의해서 부서장과 부서 임원들도 구성된다. 이러한 정치적 책략에 총체적으로 교단들이 휘말려 있다 보니, 도덕성이 훼손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신학교 교수들도 교단의 세력에서 자유하질 못하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도 자유하질 못하고, 궁중 신학자들 같이 권력자의 시녀 노름에 어울려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어느 신학자가 개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과 비리에 소금을 뿌려본 일이 있었던가? 다만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인 논쟁에 국한되어 있고, 신학적이라 하더라도 교단의 눈치를 봐야하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는 눈을 감고, 꿀 먹은 무엇 같이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어디 이뿐이랴? 우리 일선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신도들에게 립서비스와 프로그램 진행, 이벤트는 열심히 하였지만, 복음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이를 학습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에는 부끄러워하였던 것은 아닐까? TV 생생정보 프로에서 국수집 사장이 국수의 전문가가 되어있고, 국수의 달인이 되어 있으면, 항상 손님들이 줄을 서며 넘쳐나고 행복해하질 않던가? 작금에 와서 종교개혁 이후 문제점이 되어온 신학적인 논쟁은 그동안의 교회사를 보면 핵심적인 논쟁거리가 되질 못한다. 한국교회사에서 교단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로 분열되었던가? 거의가 권력과 야합한 이해집단의 전략과 전술적인 계략에 신학자들이 들러리를 섰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의 정치 집단이 내건 슬로건들이 정말 그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관이었을까? 오늘날 교계에서 정화를 외치는 지식인들도 거의가 헐리우드 액션에 지나질 않는다. 영화 장면에서 하는 총질이 실탄이 장전되어있질 않고 소리만 요란한 공포탄인 것 같이, 허공에 대한 칼질뿐이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 모임을 운영하려면 기업에서 자금을 빼어내야 하듯이, 기독교윤리모임 집단도 개교회에서 지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결국에는 부자의 밥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기대해야 하기 때문에 소리만 요란해진 것이리라. 작금의 칭의론과 성화론 논쟁을 좀 더 단순하게 현실적으로 대해보자. 이 복음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소개한 바울은 먼저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있었다. 이는 자기중심의 구도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구도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모두 폐기처분 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바깥으로 벗어나질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아주 경이로운 선물을 우리에게 전달하였고, 성령의 각양 은사들도 가져 왔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열매를 맺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았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8-18
  • 성육신한 예수교회-21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금년 여름은 유난히 더운 듯하다. 이런 여름에 여지없이 찾아드는 행사는 신도들의 수련회도 있겠지만 교역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예년처럼 지방에서도 교역자를 위한 세미나를 동반한 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초빙된 강사가 교역자에 대해 많이 고심하며 원고를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에 있긴 하지만, 강사 자신의 교회나 목회 경력이 상승 기류를 타고 있어서인지 대부분 어두운 부문 보다는 앞만을 내다보고 강의하는 것 같았다.이 강사의 오후 강론이 ‘복음’에 맞추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복음’과 관련하여 정리가 되질 못한 것임을 아쉬워하며 ‘복음이 무엇임......,’에 집중하려 애를 쓰는 가운데에 정의가 내려지고, 교역자들이 복음에 더 집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아뿔싸! 이 강사가 강조하는 강의 전체가 ‘승리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지난 백여 년의 세월에서 기복적인 복음과 승리주의 복음에서 자유하질 못하였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느 종교에서도 다르질 않았다. 기복주의 종교란 대다수의 교역자들이 바르게 인지하고는 있으나, 전혀 그 스타일에서 순수한 복음으로는 돌아서질 아니한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떡이긴 하지만, 결코 실천에 옮기진 않는다는 말이다. 기복종교는 항시 국가와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왔다. 과거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서 국가의 종말을 맞이할 때에, 종교가 호국불교로 타락한 나머지 정권을 유지하는 종교로 전락하므로 인해서 국가나 국민 의식을 계도하기 보다는 정권의 시녀, 혹은 국민의 정서에 아부하다 보니 함께 망해버린 것이었다.‘승리주의’에 관해서는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에게서 명료하게 분별하여 진 것 같다. 저는 출애굽기를 다루면서, 승리주의에 취한 이집트 종교와, 하나님의 계시에 귀와 눈이 밝아진 모세의 종교를 비교한다. 승리주의 종교는 귀족과 권력자와 가진 자의 시스템을 현상 유지하는 것에 주력하는 종교이다. 그 당시 이집트의 종교는 권력자 파라오의 정권 유지 시스템의 시녀였다. 허지만 모세가 만난 야훼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이집트의 권력에 억압되고, 정권 유지에 희생되던 히브리인들은 오로지 승리주의에 도취한 사회적 시스템에서는 노예이며 소모품일 뿐이었다. 그러나 광야를 넘어서 그 끝 부문까지 다다른 모세는 고통 가운데에 있는 자들의 신음을 들은 야훼신과 마주친다. 여기서 승리주의에 오염된 종교와 모세의 교회와의 현격한 차이와 충돌이 일어난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에 들어가, 악과 고난 가운데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공감대를 이뤄서, 마침내 이집트에서 출애굽을 하여 자유인이 된다.오늘의 가치관에서, 가진 자의 편에서 보면 가난한자는 실패한 자이고, 권력과 부의 대열에서 이탈된 자는 항상 피지배자가 될 뿐이다. 예배당을 화려하게 세우고 많은 회중들을 끌어 모은 이는 마치 목회에 성공을 하고, 예배당을 세웠다 해도 빚에 매여서 마지막에는 회중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고, 건축된 예배당은 필연 다른 이가 넘겨받는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승자의 대열에서 배제된 목회자는 죄인이 되고, 승자들의 비난거리가 된다. 고인이 되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를 성공한 목회자라 하는 기자들의 말에 답한 것처럼, ‘내가 목회에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는, 예수님 앞에 가서야 판결이 날것이다.’함에 무게를 두어야 하리라. 오늘의 한국교회는 불을 지핀 가마솥 안의 개구리 같은 현상이다. 조금 있으면 물이 펄펄 끓어오를 터인데, 아무도 눈치를 채질 못하고, 자신의 영달에만 집착된 상태이다. 얼마 전 교계에 얼굴이 무쇠처럼 뻔뻔해진 지도자와, 저를 줄곧 비판해온 평신도 지도자가 종교행사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비판하는 이의 소속된 재단이 비판을 받는 자의 후원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저들의 어정쩡한 얼굴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오늘에 이르러서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승리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복음마저도 오염시켰다. 우리는 복음이 승리주의에 오염되고, 교회주의에 오염되었음을 알아차리질 못하고 있다. 요즈음 기사를 보니, 교황이 마리아 상을 바라보고 제단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실족하였다는데, 우리는 이 휴가의 계절에 예루살렘 성전 바깥, 영문 바깥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제단에 오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화려한 성전을 떠나신지 오래이다. 그의 가르침에 훈련된 제자들이 돌덩이로 지은 성전을 건축한 일이 없었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8-11
  • 성육신한 예수교회-20
    신약이나 구약에 있어서 가장 많이 다뤄진 인물이 있다면 이는 곧 아브라함이리라. 경전이 저를 중요시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은 저들의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모세의 율법위에 건설되었다. 이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세운 다윗왕조가 얼마가질 못하고 바빌론으로 붙잡혀 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되자, 비로소 종교 사역을 담당하는 서기관들은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모세 오경을 정리하고 백성들에게 체계 있게 보급할 수 있는 교육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의 아카데미와 같은 역할을 하는 회당이었다. 바빌론 이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미 세계화에 적응된 일부 시민들은 귀환하질 아니하고 세계 도처로 흩어져서 살게 되고, 마카베오 형제 난 이후 예루살렘이 안정되질 못하고, 중앙 성전의 역할이 무용지물이 되자, 이집트로 빠져나간 서기관들은 세계화에 적응하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재결집하기 위해서 비로소 70인의 서기관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서 해외에 널리 흩어진 이스라엘은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이 번역한 모세 오경을 회당에서 읽고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구약에서의 아브라함은 혈통의 틀을 벗어나질 못하다가, 예수가 등장하면서부터 혈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아브라함이 정신적인 믿음의 조상이 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복음서를 기록한 서기관들 덕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최초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한 바울서신의 저자인 바울도 이 70인경에 익숙 된 율법학자였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방인 누가, 가장 아름다운 헬라어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아볼로도 이 헬라 역 경전에 익숙 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편화 되었고, 동화 작가에서부터 헐리우드의 영화감독조차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신약성경의 마지막 저자인 요한도 헬라어에 익숙할 뿐 아니라 랍비 전통에도 익숙하였다. 창세기 24장 1절을 원문을 직역하면 ‘그 날들로 나아가다’(went into the days)이다. 랍비들은 ‘그 날들로 나아가다’라는 문장을, ‘아브라함은 야훼 앞에서 그의 백성들로부터 메시아까지의 역사를 보았다’고 해석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8장 56절의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문장을 보면 무엇보다도 요한 자신이 랍비 전통과 해석을 세밀하게 알고 있었음은 물론, 논쟁 당사자인 예수님은 랍비의 토라 해석을 잘 소화하고, 자신에게 적절히 적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이처럼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신의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적절한 정신적인 아이콘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인식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더욱 빛을 발했다. 실제로 우리를 건강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들은 물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도 많은 목회자들이 눈에 쉽게 보이는 것들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한 자였나? 그는 문명국을 떠나 하란으로, 하란에서 다시금 가나안으로, 한때 이집트로 내려간 일이 있었으나, 거대한 피라미드나 소돔문명의 그늘에 안착하질 않았다. 저는 오히려 간편한 텐트 생활을 즐거워했다.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소중한 제단마저도 반시간 만에 수축하였다. 제사를 마친 후에는 훌훌 그 곳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과 다윗을 엮어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궁중학자들 같이, 다윗을 웅장한 성전을 건축한 사람으로 슬그머니 껴 넣으려 하지만, 다윗은 죽기까지 작은 예배당에 나아가 항시 하나님과 대면하였다.요한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들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시금 되살림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멀리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마음을 빼앗기질 않았다. 저가 그의 주변에 학연, 지연, 혈연을 부르짖는 이들의 문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았다면 결코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질 않았을 것이다. 그가 혈통을 중요시 하였다면 하란에서도 떠나질 못하였을 것이다. 더더욱 이집트에서도 정착하질 않고, 저 멀리 보이는 것을 붙들기 위해서 나아갔던 것이다. 저는 마지막에 그의 기쁨이었던 이삭마저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신다. 이 뜨거운 여름, 오로지 믿음만 가진 나를 기업으로 받으신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7-29
  • 성육신한 예수교회-19
    요즈음 브랙시트 투표이후, 영국은 여성 전성시대로 들어섰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난 지 26년 만에 테리사 메이(59)가 두 번째 여성 총리로 지난 13일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스코틀랜드나 북아일랜드 지도자들도 역시 여성이다. 영국은 지금 사회 전반에 걸쳐서 앞장선 이들의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높은 편이다. 이 뿐 아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세계 60개국이 여성 총리이거나 여성 대통령이 지도자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 도전에서도 여성 후보가 대두되고 있어서, 앞으로의 세계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일선에 나서서 세상을 이끌 전망이다.우리 세계에서 중동만큼이나 보수적인 곳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보수적인 유대인들도 골다 메이어 여성을 이스라엘의 총리로 뽑아서 앞세웠다. 오늘의 세계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유리천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지금 독일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과 영향력이 세계 1위인 것을 보면, 여성들에게 편견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적 추세가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유독 종교단체에서는 편견이 사라지질 않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여성은 죽어서 다시 남성으로 태어나야만 한다 던지, 여성은 주기적인 생리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는 둥......, 그러나 보수적인 종교단체일지라도, 여성에 대한 편견을 해소시킬 구체적인 노력이 현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세계적인 성숙과 변화를 우리 개신교가 직면하면서, 사람들의 회집이 이뤄진 교회 공동체도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교회주의론자들에 의해서 슬그머니 경전에다가 자신들의 욕구와 가치관을 삽입시킨 것에 대한 학문적 성찰도 필요할 때가 된 것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교단에 소속되어 있고, 교단의 영향력으로 부자유하지만, 경전 사본사에 있어서, 보다 후에 첨부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과 관계된 문항을 공개적으로 학술적 토론에 부칠 필요가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항은 그 서신의 저자인 의도와도 맞지를 않고, 불합리하며, 후에 어느 사본에는 이 쪽 문장에 첨부되었거나, 어느 사본은 저쪽 문장에 첨부되어 있어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항과 문장이 지도자들과 필사자의 교회주의적인 입장에서 첨부된 것임을 알 수 있다.‘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문구가 아예 오래된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러한 정황을 살필 때에, 오늘과 같이 여성들이 지도자로 진출하고 있는 사실적 정황에서 굳이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여성에게 기회를 일찍이 배려한 교단들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으나. 여성의 권한을 축소하고 억누른 교단에서는 여성들이 성장할 수도 없었고, 저들이 활발하게 세상에 진출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가 여성에 관한 편견이 지나친 것은 유교적 가치관에서 탈피하질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편견과 오염을 씻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역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여성에 대한 편견은 물로 씻기듯이 지워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은 복음서들 가운데에 가장 후기에 기록된 복음서로써, 요한복음처럼 여성에게 남성과 같이 공평하게 가르침과 문장과 문단을 배려한 책은 없었다. 요한복음의 기적의 첫 사건도 여성에 의해서 연출된다. 그리고 예수의 사역이 완성되는 마지막 장면과 예수부활의 첫 대면도 여성이다. 예루살렘의 랍비 니고데모는 예수와의 대화에서 책망을 받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만, 수가성의 여인은 그 도시의 시민들을 대낮에 예수께로 이끌어내는 선지자로 부각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당시 예수의 가르침에 눈을 뜬 선각자들이 얼마나 과감하게 남녀 편견을 뛰어넘고 고정 관념을 탈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려내었음을 명명백백히 알아 차려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은퇴한 연세대 김 모 교수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란 구절이 있었는데, 그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종교적인 편견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한번 몰트만의 ‘성령론’을 읽고서 그의 강론을 요약하여 발표하였더니, 몰트만이 성령 받은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는데, 누가 강의하냐에 따라서 그가 성령 받은 자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우린 요한복음의 다양한 강론들을 많이 보면서, 불자나 유학자나 철인들의 요한복음 강론이 저마다 강조점과 결론이 달랐음을 보아왔다. 우리가 만일 성경을 그리스도론 보다는 교회론(교단)적인 범주에서만 고집한다면, 원 저자의 의도가 퇴색되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7-19
  • 성육신한 예수교회-18
    요즈음 한 예장 교단에서는, 전국을 돌면서 자립을 하지 못하는 교회들에게 계몽 성격을 띤, 교단의 앞으로의 정책을 은근히 통보하는 세미나가 있었다. 세미나 내용인즉, 앞으로는 대형 교회들이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를 감당하는 데에도 여력이 녹녹치 않기에, 미 자립 교회들에 대해서 지금과 같은 지원은 할 수가 없을 것이고, 다만 교역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부족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회마저도 미자립 교회를 감당할 기력이 역부족이라는 것이었다. 총회가 지향하는 방안이란 도시교회를 비롯한 농어촌의 교회들을 향해서 그저 손을 놓아버리는 듯 하는 무정책이란 인상이 짙었다.이와 같은 현상들이 학원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교역자들을 배출하는 신학대학원들이 얼마 전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지방 신학들로부터 시작된 미달 사태가 중앙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문교부에서도 예산을 축소하고 소규모의 학교들부터 문을 닫게 하려고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여도, 얼마가질 않아서 급작스럽게 문이 닫히게 될 형편이 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들은 자립도가 버거워진 교회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신학대학원을 나와 겨우 목사로 임직 받았지만, 교회들이 저들에게 사역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질 못하기 때문에, 안수를 받자마자 다른 직업을 병행하여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목회에서 손을 떼고 다른 직업을 찾아가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군대에서 제대하면 예비군에 편성되듯이 복음을 들고 사역해야할 고급 인력들 대다수가 안수를 받자마자 복음 예비군으로 편성되어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형편을 현장에서 줄곧 보아온 젊은이들은 신학대학원에 들어갈 리도 없겠지만, 안일하게 학생들에게 학위만을 씌워주고 바깥으로 밀어내던 교수들도 강단을 떠나야하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한국교회가 이렇게 총체적으로 허물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달리 마땅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권력과 명예욕과 물욕에 눈이 어두워진 지도자들을 탓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감이 든다. 교단이 운영하는 학원들이나 언론사들도 역시 모두가 대형교회들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먹고 있던 터라서, 묘한 방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초상집 개처럼 입을 다문 지 오래다. 이러한 경우에는 어떠한 프로그램을 활용해서도 쉽사리 길을 찾을 수 없다. 예부터 늘 하던 방식대로,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가톨릭이 너무 멀리 기본에서 멀어졌을 때에, 오로지 할 수 있는 방안이란 칼뱅의 말대로 성경으로 되돌아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듯이 말이다.저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에는 올바른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들썩할 때에는 도가 지나친 포퓰리즘으로 인해서, 얼마 전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민투표와 같은 결과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성난 시민들이 지성적인 판단보다는 눈앞의 달콤한 사탕에 현혹되어지기 때문이다. 요즈음 EU에서 야기된 영국의 브렉시트 현상도 선동적인 포퓰리즘의 결과가 어떠한 쓰나미를 몰고 온다는 것을 선례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역기능적인 운동력은 앞으로 대권을 내다보는 이들에게서도 답습되어질 것이고, 누구라도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자유하질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떠나가시고, 그의 사도들도 사라졌을 때에 그 땅에는 마가와 마태와 누가와 요한 같이, 책으로 길을 열어주는 서기관들이 등장하기 시작 하였다. 마가는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는..., 마태는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누가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요한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였다. 이들은 글로써 자신들이 당면한 상황과 문제를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처럼 인터넷 시대에는 각양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하고, 사람의 머리에서 상상되는 것이 모두가 업그레이드되고 있어서, 무언가가 해결을 줄 수 있을 것처럼 기대하는 눈치이긴 하지만, 요한서신의 지혜를 빌리면, ‘사람들이 메시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동요되질 말고, 오로지 각 사람 개개인이 기름부음으로 알게 되리라’ 하였다. 각 사람이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시간을 진지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독자 중에서 아주 난감한 지경에 처한 자가 있다 할지라도, 성경에 집중하면 거기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바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인류에게 참된 구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7-08
  • 성육신한 예수교회-17
    요한복음에 깊은 관심을 가진 목회자라면 복음서 8장에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끼어든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끼어든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요한복음 21장이다. 이 두 개의 스토리는 요한복음의 전체 구조에서 보면 끼어들 필요가 없는 이야기지만, 아마도 이 복음서가 완성되고 나서 시간이 한참 경과된 후에, 따로 돌아다니는 8장 전반과 21장의 스토리가 너무 소중하여서, 서기관들 중에 어떤 분이 재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이 지상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선지 이미 2000년이 경과하였다. 천년을 두 번 넘겼으니 우리 교회가 상당히 사회적으로도 숙성해 있을 법 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의식을 갖는다.요즈음 요한복음 8장의 스토리가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만일 그 어떤 서기관이 이 말씀을 첨부하는 데에 게으름을 피웠다면 우리 교회는 영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스토리는 예루살렘에서 전개된 이야기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된 여인과, 그녀를 이용해서 예수에게서 어떤 결점을 찾고, 올무에 씌우려는 영악한 율법사들과 종교 지도자들 군(群)과, 그리고 그들의 계략에 의해서 동원된 정의를 외치고 인민재판으로 여인을 처형하려는 성난 군중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서기관과 군중들에 의해 방화가 일어나고 처형되어지는 것을 유투브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다. 그녀가 현행범으로 서기관들에게 직접 체포되었다는 것은 무슨 음모가 발동되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법망에 걸려들면 빠져 나올 자가 없다는 것이다.어쩌면 오늘의 교회와 국가, 그 지도자들이 바로 이와 흡사한 상황에 맞닥뜨려 있다. 요즈음 세간에 떠들썩한 L기업이 검찰의 그물에 걸려들고, 매스컴에서 털리는 것을 본다. 이와 같은 시나리오의 유형들에서, 적은 나라에서는 기업이 문을 닫게 되지만, 큰 국가 주변에서는 나라가 하나 둘 없어지는 것을 얼마 전에도 보아왔다. 대국굴기(大??起)가 아니더라도, 저들은 연례행사로 나라 한둘씩을 무너뜨렸다. 강대국의 지도자는 누가 된다 하더라도, 그의 임기 중에 주변국들에 손을 대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우리가 앞으로 당면하게 될 한반도 정세는, 북한으로 인해서도 비켜갈 것 같질 않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장에서 여인과 예수가, 권력을 장악한 자들과, 그들의 계략에 의해서 조정되는 군중들에 의해서 둘러싸였다. 이 성난 군중들의 손에는 저마다 돌덩이가 들려져있다. 서기관들은 예수에게 묻는다. ‘모세는 이런 자를 돌로 치라 하였거늘, 선생은 뭐라고 말할 것이오?’ 그녀를 돌로 치라 할 것이면 비정한 인간으로 낙인 될 것이고, 용서하라고 하면, 불법을 저지르는 자가 될 것이 아닐까? 어느 인문학자는 오늘날에 우리가 예수처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다면 그녀는 필연 희생되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예수와 같은 권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서슴없이 돌로 친다는 것이었다. 1957년에 제작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 Angry Men’은 비가 막 올 것 같은 고온다습한 여름, 선풍기도 고장 난 6평 남짓한 작은 배심원 방에서, 부친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젊은이를 11명의 배심원이 성급하게 유죄로 평결하고 그 방을 떠나려 한다. 그러자 여덟 번째 배심원인 건축 전문직인 데이비스(헨리 폰다)가 꼼꼼하고 섬세하게 검사와 변호사가 간과한 사실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성격과 생각이 다른 배심원들에게 무죄 가능성을 입증하고, 무죄평결을 이끌어낸다. 이 영화는 헨리 폰다가 직접 제작한 영화로써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 곰 상을 받았다. 요한복음의 상황과는 다른 감이 없진 않지만, 무대에 흐르는 긴장감과 식별 능력과 공감대로 정의를 지켜내는 노력이 흡사하다.우리의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먼저 숨고르기를 하셨다. 그칠 줄 모르고 조여 오는 서기관들 앞에 앉으시더니 무언가를 땅 바닥에 쓰시었다. 그러나 서기관은 예수를 더더욱 옥죄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때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하시고, 다시금 앉아서 무언가를 땅에 쓰시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어른에서부터 아이까지 돌을 떨어뜨리고서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현대 뇌 심리학에서, 6초의 시간이면, 감정이 상층부인 전두엽의 이성과 교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날 자칫 정죄와 죽음으로 내 몰릴 수 있었던 여인은 참 자유와 평안과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6-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