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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 속히 국정 안정이 우선돼야-심 만 섭 목사
    대통령의 가까운, 사적인 측근들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하여,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제 대통령의 임기가 1년 여 남은 시점에서, ‘레임덕 현상’이 이런 식으로 올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안정된다고 하여도, 북한을 포함한 여러 이웃 나라들과의 문제나, 복잡다단한 국제관계에서 진취적이고, 신중하게 처리해 나갈 일들이 산적해 있다. 그런데 국내 문제로 이렇듯 시끄럽고, 소란한 것은 국민들로 하여금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오죽하면 국민들은, 경찰 추산 26만 명(주최측 100만명)이 서울 거리를 뒤덮고, 대통령의 거취에 대한 의견표명을 촉구했을까? 이러한 상황을 국정의 책임자들은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또 대통령의 ‘하야’니, ‘탄핵’이니 하는 사람들의 진짜 마음은 무엇일까?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셈법을 하고 있을까? 정말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궁금하고 답답하여, 뉴스를 보고, 하루 종일 제 때를 만났듯, 자기주장을 펴는 여러 방송들을 보아도, 속 시원한 해답은 없고, 오히려 혼란스럽기만 하다. 또 지식인층과 학생들과 심지어 가방을 멘 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고 외치는데, 과연 그러한 처사만이 능사인지? 우리 국민들은 슬기로운 민족이다.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 때론 우왕좌왕하는 듯해도, 곧 질서를 잡고, 갈피를 잡아가는 민족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자! 그렇다면 이런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정리해 나가는 것이 옳은가? 우선은 이 나라가 ‘법치국가’라는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대통령도 법의 절차에 따라 국민들이 선택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이다. 그렇다면, 법의 절차에 따라 모든 것이 면밀히 조사되고, 그 결과에 따라 위법(違法)한 사실이 밝혀지면, 정당한 처리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을 보면, 여론과 언론에 의한 폭로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잘못하였을 것이라는 ‘의혹’과 잘못 된 것임이 분명히 밝혀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 언론들은 매일같이 수도 없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언론의 역할이 사실을 찾아내고 은닉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겠지만, 그 가운데에는 불필요한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어, 국민들로 하여금 더욱 불신의 세계로 몰아가는 역할만 가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법치국가’이므로, 대통령에 관한 제반 문제는 법으로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법에 의하여, 판단되고, 정리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끝난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번에 당선된, 공화당의 트럼트 후보의 당선을 예견하는 언론은 적었다고 한다. 그럼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아무리 날고뛰는 실력을 갖춘 언론이라고 하여도, 국민들 마음속에 감춰진 표현되지 않은 의견과 여론까지를 감안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의 대통령 문제에서, 거리에 뛰쳐나온 국민의 숫자보다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의 생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국민들의 마음에 진정으로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법에 의한 정확한 조사와 그 결과이다. 두 번째는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주장이나 이익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운명체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정국은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나 시기가 잘못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위신과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개인도 그러려니와, 국가의 이미지도 한 번 추락하면,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때문에 소탐대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이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의 모든 결정과 영향은 잘못된 주체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돌아감을 직시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때, 우리 기독교인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이 국가를 견인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의 백성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안목과 자세를 가져, 진정으로 애국자다운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하심으로 국정이 속히 안정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1-24
  • 교계 언론의 사명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언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지면 신문이 일색이던 과거와는 달리 1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된 인터넷 언론 시장은 무한 경쟁 속에 하루하루 새로운 언론 트렌드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하지만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수백, 수천 개의 언론 매체가 활동하는 지금 우리들은 그들 매체가 매일같이 쏟아내는 온갖 정보에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늘어난 언론의 숫자만큼 독자로서의 정보 선택권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에 대한 각기 다른 판단은 오히려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는 중대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는 기독교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20여년 전 고작 10여개에 달했던 기독교 언론도 이제는 그 숫자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새롭게 형성된 인터넷 언론시장 문화가 기독교 언론 상황마저 완전히 바꿔 버린 것이다. 그런 만큼 기독교 언론 역시 위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한다. 교계의 온갖 사건과 사고에 대해 각각의 판단에 맞는 기사를 양산한다. 이는 언론사만의 논조와 입장이 있기에 매우 건강한 현상이지만, 반대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진실과 거짓의 기로에서 늘 혼란을 겪어야 한다. 이런 때 독자들이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위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언론사에 대한 신뢰다. 언론이 그간 얼마나 참된 목소리를 내 왔고, 진실을 위해 헌신했는지는 바로 독자들이 그 언론의 정보를 택하는 주요 요인이다. 지난 25년간 한국교회를 위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며, 올곧은 목소리를 내온 교회연합신문은 꾸준한 교감으로 한국교회 성도들과의 신뢰를 쌓아왔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론으로서의 정도를 지켰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진단은 이미 십수년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심지어 10년 후 한국교회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 상황이다. 하지만 진단만 있을 뿐 마땅한 대안이 없어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이런 때일수록 한국교회 성도들은 진실에 대한 갈급함이 점차 커지게 된다.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커질수록 위기의 뿌리에 더 깊게 다가가기 원한다. 교회연합신문은 그런 한국교회 성도들의 갈급함을 풀어줄 참 언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 위기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에 따른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위기 극복을 위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계 언론은 일반 언론과는 다른 ‘선교’라는 사명이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언론이 취재의 대상으로 삼는 교계 기관이나 연합단체, 교단, 개교회, NGO 모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교계 언론 역시 한국교회의 일원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나도록 힘써야 한다. 또한 이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이를 주저하지 말고 바로잡는 언론의 ‘고발’ 역할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최근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하고 있는 이른바 ‘최순실 사태’ 역시 바로 언론의 고발에서 촉발된 것이다. 교회연합신문이 지금처럼 외압에 휘둘리지 않고, 정치적 상황에 편승하지 않으며, 진실을 수호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주기를 바란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불빛은 더욱 환히 빛나는 법이다. 비록 지금 한국교회가 온갖 어둠으로 뒤덮여 있지만, 교계 언론이 진리의 횃불을 든 파수꾼이 되어 한국교회를 선도해 나가준다면, 한국교회의 회복은 분명 이뤄질 것이다. 내년은 특별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매우 특별한 해다. 미래목회포럼은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했던 종교개혁의 정신을 살려 한국교회에 개혁의 새 바람을 일으키고자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때 교계 언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 성도들과의 통로가 되어줄 언론이 미래목회포럼이 제시하는 개혁의 방향을 온전히 전달해 줄 때,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건강한 교계 언론 문화 창달에 힘써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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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16-11-11
  • 한국교회 죽어야 산다-홍 성 표 목사
    우리는 지금 민족과 국가의 위급한 위기를 맞고 있다. 권력은 공백상황이고 국민과 민중들의 심정은 참담하고 비통하다. 소위 대통령의 자리에 사교에 빠진 한 인물이 있었음을 수년 동안 모르고 살아 왔다. 입에 올리기도 싫은 최태민과 최순실 일가의 ‘영적 혼음’에 빠진 한 인물이 이 민족의 운명과 목줄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간파하지 못하고 영적분별도 하지 못한 오늘의 한국교회라는 종교는 죽은 것이다. 특히 권력에 아부 아첨하며 정신병과 사악한 귀신을 축귀하지 못한 한국교회의 정신적, 영적, 신학적 무능은 고개를 들 수도 없고 온 세상에 부끄러운 일 뿐이다. 신천지를 비롯하여 사이비, 이단들, 사교들이 대한민국을 삼키고 있다. 거기에 교회와 종교, 산 자들은 없다. 죽은 해골과 뼈들만이 산과 바다를 이룬다. 이처럼 참혹한 일들은 단군 조선 이후 없었다. 국내외 어떤 역사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교회에 예수는 없다. 그리스도도 없다. 오직 권력과 자본에 신앙을 팔아먹은 ‘사교’만이 있고, 거기에 기생하는 썩은 존재들만 즐비하다. 권력을 탐하고 그 주위에서 맴돌며 아부와 아첨의 간신 노릇하는 종교의 찌꺼기들만이 냄새를 천지에 진동시킨다. 어떻게 우리가 창조주를 논하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이처럼 참담하고, 이처럼 비참함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외세의 간섭과 종속과 식민의 역사를 살고 있는 한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사교나 사이비들은 고도의 사기꾼들이다. 사람들의 약함과 영적 판단력의 무능을 빌미삼아 그들의 물질과 영혼을 착취하고 파멸시킨다. 창조주 하나님을 들먹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품화 하여 장사치가 되고 도적과 강도의 소굴이 된다. 이 가을에 이렇게 비통하고 참을 수 없는 몸부림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황금의 우상에게 절하며 살아 온 죄의 결과,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 온 교회와 이 나라의 죄의 결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교회가 교권에 사로잡혀서 돈과 권력을 섬기고 더러운 입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이제는 정말 깨어있는 성도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 민중이 썩은 역사와 교회를 뒤엎고 바로 세워야 할 때이다. 남북의 민중들의 주체가 일어나서 한민족을 구해야 한다. 이 가을이 무색하다. 이런 나라에 살아 온 것이 비통하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역사를 말하고 어떤 예수와 구원의 주님을 말해 줄 수 있을 것인가?이럼에도 한기총과 한교연 등은 아부와 아첨을 더할 것인가? 가톨릭도 개신교도 청와대와 전경련에 속해 있는 재벌들에게 아부 아첨을 더할 것인가? 그대들은 사교에 놀아났다. 신의 이름을 만만히 여기고 더럽혔다. 구국 기도회, 몸매 좋은 여인을 찬양하며 그의 썩은 향수를 맡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인가? 이제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에게 돌이라도 던져볼 셈인가? 일제 때는 신사에 머리 조아리고, 미 군정시에는 양키에 무릎 꿇으며,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에게 갖은 아부 아첨을 해왔다. 그들은 오직 권력에만 눈이 어두운 사교에 빠진 자들이었다. 이것을 소위 교회가 부추겼다. 그리고 마침내 온 사회가 추악하고 사악한 최태민 사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참담한 반역사적인 현실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한국 기성 종교들은 무엇이라 할 것인가? 썩은 지식인들, 썩은 아부꾼들, 썩은 탐욕 자들에 의해서 국민과 민중들은 수탈과 억압, 착취를 당해 왔다. 304명의 세월호의 생명들을 내팽개치고 사악하고 추악한 사교 주인 최태민의 굿판에 한 나라의 정상이 빠져 있었다. 민족의 운명과 나라의 생존여부를 가릴 안보와 외교의 문제까지를 농단한 최순실과 그 주변 사람들을 조사하고 처벌하기 이전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수사를 통하여 강력하고 단호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일제와 독재자 청산을 하지 못한 분단과, 분단의 고착을 협력한 세력들은 참회와 함께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제는 권력과 자본의 썩은 탐욕 세력에게 민족의 운명과 역사를 맡겨서는 안 된다. 이제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진정한 혁명이 필요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고 있다. 한국교회 죽어야 산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1-03
  • 미국 대선과 문화전쟁-심 만 섭 목사
    미국이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해 분주하다. 미국 대선은 2016년 11월 8일이며, 지난 2~6월 사이에는 이미 각 당(민주당, 공화당)의 후보 경선을 했고, 6월 전당대회를 통해, 각 당의 후보를 결정했고, 현재는 민주당의 힐러리 후보와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의 경쟁이다. 그러나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는 ‘음담패설’등 과거 성적인 문제로, 계속 힐러리 후보에게 밀리는 양상이다. 힐러리는 클린턴 대통령의 영부인과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낼 정도로 주류 정치계의 일원이다. 또 여성으로는 미국 최초로 대통령 후보가 된 사람이다. 그녀는 ‘함께 가면 더 강하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고, ‘서민의 대변자’로 나서고 있으나, 월스트리트에서 고액의 강연료를 받아, 정경유착의 의혹을 받았고, 2009년부터 2013년 사이 국무장관으로 재직 시에는 개인 이메일로 공무를 처리하여, 구설수에 올랐던 일도 있다. 힐러리는 복지 쪽에 치중하여, 역대 민주당 정강과 공약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으로, 미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 내 불법 체류자 추방, 무슬림의 미국 이민 및 입국 중지 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과거의 성추문, 성추행, 음담패설 등의 문제는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그래서인가 지지율에서도 힐러리 후보에 비해 상당히 뒤처진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 가면, 힐러리의 승율이 90%가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은 내년 1월 20일 취임하게 된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언제나 세계의 이목거리이다. 그만큼 미국의 역할,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는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 대통령 선거의 향배가 우리에게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실망스러운 것은, 두 후보 간 TV 토론을 보면, 완전히 진흙탕 싸움과 다르지 않다. 정책과 정견은 사라지고, 서로에게 흙탕물 튀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한편으로, 미국의 대선을 두고, <문화전쟁>이라고 한다.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는 기독교 신앙, 이성주의, 개척(자립)정신,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아메리칸 스피릿”을 대변하고 있고, 힐러리는 반기독교적 종교관, 이성주의, 사회(규제법)주의, 친 이슬람, 한계 없는 성적 탐닉 문화가 어우러진, “유럽피언 드림”을 대변하고 있는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요즘 한국에서도 큰 화두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는 민주당이 훨씬 적극적이다. 민주당 출신의 현 오바마 대통령은 1996년부터 동성결혼을 지지했으며, 대통령 당선 이후에, 군대내 동성애자 복무 합법화, 군대내 항문성교 금지법 폐지, 동성결혼 법제화 추진 등을 밀어 붙였고, 작년 하반기부터는 성전환자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작년 6월에는 공무원들에게 “동성애 등을 반대하는 기독교는 미국 정부의 적이다”는 대통령 서한을 이메일로 보내기도 하였다. 힐러리 후보는 과거, “낙태에 반대하는 종교적 편견(가르침)은 변해야 한다”거나, “집단 지성에 반하는 기독교는 변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여성단체 모임에서 한 바 있다. 그러나 공화당의 분위기는 다르다. 앞으로 힐러리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친동성애, 급진페미니즘, 이주민정책 등의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한국에서는 현재 ‘동성애’문제가 우리 사회의 건강한 생각과 한국교회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 틀림없다. 만약에 동성애가 정상이라는 인식이 심어지면, 한국교회에는 성경의 권위, 교회의 권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명약관화하다. 과거, 유럽의 기독교계는 1970년대의 성 혁명과 잘못된 인권 개념의 확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유럽의 교회는 쇠퇴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분명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전쟁의 불꽃이 우리나라에 자칫 영향을 줄 것을 생각하면, 그저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한국 교계 지도자들은 유럽과 미국 교회의 운명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보수/진보를 떠나서, 한 목소리로, 교회를 위한 문화 전쟁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0-20
  • 특민의식 인사들이 들여다볼 창-임 영 천 목사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을 동시에 지닌 이들을 나는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마도 선민의식보다는 거기에 특권의식의 뜻이 더 보태어진 ‘특민의식’이란 말이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훨씬 더 실감나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서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선민의식’이란 “한 사회에서 남달리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잘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이라고 풀이된다. 그리고 엣센스국어사전에 따르면 ‘특권‘이란 “특정인 또는 특정의 신분이나 계급에 속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우월한 지위나 권리”라 하였고, 그에 따른 의식을 ’특권의식‘이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가 좀 더 요약해 표현해 본다면 ’특권의식‘이란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진 권리로 인해 지닌 우월감”이라고 간략하게 표현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 사회에서 남달리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잘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이든,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진 권리로 인해 지닌 우월감”이든, 특히 이 양자(兩者)를 함께 지니게 된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라면 우리가 일상적이거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상대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존재들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네들의 선민의식이 너무 높고, 또 특권의식이 너무도 강고(强固)한 언필칭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겠기 때문이다. 앞서 참고했던 국어사전들에 의하면 선민의식의 소유자들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례로 들고 있고, 또 특권의식의 소유자들로서는 중세의 세습 귀족이나 승려들…이 예(例)로 내세워져 있다. 여기서 중세의 승려들이란 종교개혁을 전후로 한 시기의 유럽의 사제들, 곧 가톨릭의 신부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주교, 대주교, 추기경… 들의 경우라면 그들의 특권의식이 어떠했겠는가는 더 이상 상술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민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들 중에서도 특히 종교계(유대교) 지도자들의 경우 그 정도가 우심했다는 사실도 상식적인 이야기의 범위에 속한다. 특히 대제사장의 경우 가톨릭의 수장보다 못지않은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을 동시에 지녔던, 표현컨대 명실상부한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점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 실례로 신약성서 시대, 곧 예수 시대의 대제사장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 등이 그 점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재건된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활동한 수장(의장)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들은 제사권은 물론, 입법/행정/사법의 3권까지 거머쥔 채 종교적인 선민의식과 정치적인 특권의식을 아울러 지녔던 강고한 특민의식의 대표적인 존재들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1830)은 프랑스 대혁명 이래 7월 혁명 전야의 프랑스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적(赤)은 나폴레옹 시대의 군복(軍服)을, 흑(黑)은 왕정복고 시대의 승복(僧服)을 상징하는 색깔로서, 당시의 평민 청년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이 두 가지 노선 외에는 따로 없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 줄리앙 소렐은, 성직자들이 종교계는 물론 정치판도 좌지우지하게 된 복고왕정의 시대엔 자신도 신부(사제)가 되는 게 출세의 지름길이란 판단 하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야심만만한 청년이다. 당시 프랑스의 종교와 정치 양면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었던 가톨릭 집단은 제수이트파(예수회)였는데, 그들은 말하자면, 예수 시대에 제사권과 속권(정치권력) 양쪽을 거머쥐었던 산헤드린의 의장 안나스-가야바의 위치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즉 당시 프랑스의 제수이트파 신부들은 종교 면의 선민의식과 정치 편의 특권의식을 함께 지녔던 실로 강고한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는 것이다.그러나 ‘바벨탑의 붕괴’ 사례가 확실하게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그런 특민의식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심판을 내리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또 새로운 하나님나라 건설의 숙원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독일적(적극적) 그리스도교’의 사실상의 수장으로서 종교적 선민의식과 정치적 특권의식을 동시에 지녔던 소위 특민의식의 소유자 히틀러가 종말에 어떻게 몰락했던가를 역사는 그 실상을 잘 보여주었다. 거슬러 올라가, 종교개혁기에 그 강건하던 옛 가톨릭 특민의식의 아성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던가를 우리는 잘 보아 왔다. 또 더 거슬러 올라가, 예수 시대에 산헤드린을 배경으로 교권과 속권을 함께 주무르며 예수 처형에도 앞장섰던 이스라엘 대제사장들의 특민의식이 또 어떻게 붕괴되고 말았던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학생 줄리앙 소렐은 선배들의 잘못된 특민의식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려는 자신의 야심을 끝내 못 버리고 그 높은 사다리의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지만, 그 욕망 자체가 주님의 뜻에는 위배된 것이었기에 결국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0-12
  • 서울대 인권가이드 라인, 차별금지법과 흡사-유 만 석 목사
    근자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추진 중인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이 논란을 빚고 있다.최근 서울대 총학생회가 만든 <서울대학교 인권 가이드라인>에 보면, 제2조 “평등권”에서 열거하는, 차별금지 조항은 27가지인데, 그 중에 기존의 “차별금지법” 조항에 담고 있어 독소조항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가족 형태’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등이 포함되어 있다.이 중에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 ‘가족 형태’는 동성애 문제를 담고 있고,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은 이념과 관련이 되며, ‘전과’(前過)는 사회적 혼란의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한 마디로 “차별금지법”(안)의 모방에 다름 아니다.그런가 하면, 제20조 “인권침해의 예방 및 구제”에 보면, 구성원의 교육, 징계심의를 규정하고 있어, 이 가이드라인에서 규정하는 것을 위반했다고 볼 때에는, 실제적으로 이해 당사자에 대한 압력과 징계를 담고 있다.또 제19조 “인권교육”에서는 ‘구성원을 대상으로 상시적인 인권교육을 실시하고, 구성원은 이에 성실히 응한다’는 것으로, 상징적인 수준을 훨씬 능가하여 강제성마저 띠고 있다.이 가이드라인은 서울대 구성원 간으로 제한하고 있으나, 서울대학교라고 하는 특성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볼 때, 실제적인 “차별금지법” 제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하여 서울대 구성원들과 동문들, 그리고 시민들의 우려가 심대하다. 지난 21일 서울대에서 열린 <2016 서울대학교 베리타스 포럼>에서는 “동성애와 한국 사회”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는데, 서울대가 동성애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과, 젊은 세대가 동성애 운동의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이날 포럼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차별금지법”이나 “인권 가이드라인”과 같은 문제들은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운동가들의 플랜에 의한, 과정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서울대 총학생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가이드라인이 통과될 경우, “차별금지법”의 촉진제가 될 것이며, 우리 사회에 엄청난 혼란이 예고되어, 서울대 동문들과 시민들에 의해 저지되어야 한다.지금, 소위, “차별금지법”을 인정하는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인권 역차별 사례는 차별금지법이 얼마나 괴악한 지를 실증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나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동성애적 교육은, 참 인간의 품성과 품위를 포기해야 할 정도의, 강요가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우리나라가 왜 그런 전철(前轍)을 밟아야 하는가?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생각은 결국은 국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다. 서울대 인권가이드라인을 추진하는 서울대 총학생회나 이를 부추기는 모든 사람들은 ‘동성애 천국’의 환상과 ‘동성애 지옥’의 꿈속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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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9
  • 기장총회의 미래와 한국교회-홍 성 표 목사
    장공 김재준 박사는 그가 창간한 ‘제3일’의 창간호 제자직이란 제하의 글에서 디트리히 본회퍼의 값싼 은혜를 언급한다. 값싼 은혜란 마치 거리바닥의 경매상에서 팔려 나가는 고물처럼, 성례전, 사죄, 위로 등등이 교회에서 헐값으로 팔려 나가는 은혜를 말 하며, 동시에 값싼 은혜란 교리화, 체계화, 원칙화의 은혜이고, 값싼 은혜란, 회개 없는 사죄, 교회훈련 없는 세례, 신앙고백 없는 성만찬, 개인적 고죄 없는 사죄선언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말한다. 본회퍼의 제자직이란 이러한 값싼 은혜를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사람,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값비싼 은혜를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 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제101회 총회가 경기도 수원에 있는 라비돌리조트 신택스 컨벤션센터에서 9월 27일(화)-9월 30일까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조금 애매한 주제로 열린다. 우선 주제 설정에 있어서 내 교회가 누구의 교회란 말인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이러한 모호한 주제는 꼭 더민주의 사드에 대한 당론의 입장과도 유사하다. 개인이나 집단, 공동체나 국가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이 분명하고 투명하게 조직 구성원과 공동체 내지는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어찌 되었든 “내 교회”는 (마태 16:18)의 본문으로 보아 예수님의 교회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머리 되시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몸인 까닭에 그렇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가 인간의 사유화, 상품화 된 것 같은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교회의 세습과 교권의 세습을 위하여 교회를 개인의 대물림과 교권을 유지하기 위한 교권주의자들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를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이번 기장 총회에서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 중에 첫째는 한신총장 선거의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선거의 원천 무효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지금 선거 과정 중에 빚어진 결과는 이사장과 이사회에 대한 폭력적 선거 과정에서 정당한 학생들의 저항을 “특수감금”으로 몰아붙여서 23명의 학생들과 1명의 교수가 검찰에 송치 되어 기소 여부를 기다리고 있다. 공권력(경찰을) 신성한 교정에 불러들이고 학생들을 이사장과 이사회 학교 당국이 특수감금으로 고발하여 범죄자를 만들고 학교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이러한 총장 사태의 문제를 원초적으로 제공한 사람은 채 전 총장이다. 이러한 한신의 사태는 한신대 70여년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한신을 있게 한 기장의 명예가 추락한 상황이다. 다음 문제는, 총무선거이다. 총무 후보가 6명이 나왔다. 어느 때 보다 경쟁이 치열하다. 물러나는 총무가 8년 한 일이 너무도 기가 막힌 상황이라 기장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사명과 소명으로 입후보 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한 교단의 사령탑은 밥벌이나 얼굴내기, 하찮은 명예욕으로 출마해서는 안 된다. 정말 교단과 교회 공동체를 겸손히 섬기고 불의한 역사를 바로 세워가며, 분단 된 민족의 평화통일을 열어가는 예언자요, 리더쉽을 가진 목자의 심정이어야 한다. 불의와 악에 대해서는 단호히 아니오 라고 하고 시시비비를 정의와 공평하게 가리며 정직과 진실을 근거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썩은 교권에 타협하거나 그들에게 휘둘리는 자가 사령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권의 고리를 단호하게 배제하고 얽힌 고리를 잘라내야 한다. 강자에 대해서는 아부와 아첨을 멀리 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부보의 심정을 가지고 섬기고 돌보는 자라야 한다. 세속의 정치인처럼, 아니 그보다 더 타락한 모습으로 신과 예수의 이름을 앞세우고 자기출세 지향적인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신과 예수, 종교를 상품화 하는 정치꾼은 총무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상상을 초월한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은 물론이고, 교단과 교권의 타락상은 하늘에 다다른다.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 된 상황에서 미중일의 패권의 다툼이 둘러 싼 한반도의 미래가 불확실한 가운데에서도 교회는 자기 탐욕적인 교권의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 기독교장로회는 7-80 년대에 개발 독재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통하여 민중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키려고 역사의 한 복판에 몸을 던졌다. 한국 민주화의 과정의 중심의 한 축이 된 것은 자타가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저항과 투쟁의 향수에 젖어서 교만과 오만에 안주할 처지가 못 된다.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총장선거는 이 번 총회에서 원천 무효화가 선언 되어야 하고 총무는 기장을 믿음의 “근원으로( AD FONTES)” 회복시키는 진정한 개혁적 혁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죽어가는 신음 하는 교회와 분단된 민족의 생명과 역사를 살리는 교회여야 한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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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2
  • 에바다 희망을 열라-홍 성 표 목사
    말세론은 세상의 끝을 말하고 종말론(eschatology)은 다가오는 미래의 희망을 말한다. 지금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카이로스의 시기이다. 역사는 순환도 아니고 반복도 아니며 항상 새로운 역사이다. 온고지신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 뿐 아니라 본래의 나무에 새로운 가지를 접목 시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나무에 우리들은 가지일 뿐이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영양을 섭취하고 열매를 맺게 된다. 한국교회의 지금의 현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를 상실 한 듯 같고 그 나무의 가지도 아니어서 진리와 생명의 자양분을 먹을 수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나무가 많은 과실을 맺으려면 위로부터 받는 햇빛을 잘 받아야 하고 땅으로부터 영양을 충분히 빨아들이며 가시덤불이나 여러 가지 장애물들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부터 해방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첫째, 권력으로부터 자유이다. 권력은 인간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특히 근대로부터 현대의 막강한 국가 권력은 인간의 자율권을 강제로 통제하고 사상과 천부적 권리마저 제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힘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권력의 울타리와 손아귀에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선포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을 밝혀내고 선은 권장 하여 시대적인 지표가 되고 본이 되는 사명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에 행동과 실천을 하는 사표가 되어야 한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에 타협을 하거나 아부 아첨, 굴종을 하는 자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도 될 수 없다. 둘째,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물질을 축적하거나 더욱이 부정한 방법으로 물질의 소유와 탐욕을 부린다면 이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힘 있는 자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아부와 아첨을 하며, 힘없는 자는 짓밟고 멸시와 천대를 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본질도 아니며 예수의 제자는 더욱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과 하나님을 겸이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속의 맘몬주의나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할 만한 자격도 없고 그럴만한 도덕적, 윤리적 가치도 없다. 그것은 교회 자신이 맘몬과 황금의 가치에 매몰 되어 살기에 그렇다. 교회는 자본주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사회적 계급과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사회를 분열 시키는데 중심에 서 있다. 이것은 교회가 사랑과 회해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incarnation)의 삶을 왜곡 시키는 반 그리스도인적 행태를 조장하는 것이다. 교단의 임원 선거에 돈을 뿌리는 경쟁을 하고, 물질적 가치를 유도 하는 것은 죄악이다. 모든 교회 행사에 물질이 중심에 있다. 모든 관계에 황금이 터전이 된다. 이것은 역사를 병들게 하고 망하는 지름길이다. 물질은 소유의 가치가 아니라 나눔이고 더불어 사는 생명의 자원이 되어야 한다. 물질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 된 교회이고 사이비 이단이다. 결코 성서가 말하는 교회는 아니다. 세째, 명예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 총무나 어떤 단체의 임원이 되고자 갖은 추악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 한다. 카톨릭은 교황이 되는 것이 최고의 영적 계급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개신교(Protestant), 특히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는 새끼 교황의 흉내를 내는 명예를 버려야 한다. 자연스럽게 조직이나 공동체의 임원이 되는 섬김과 봉사의 자리가 되어야지 그것을 무슨 목회나 그리스도인의 성공의 벼슬인 것처럼 아귀다툼을 하고 그 자리에 가면 세속의 수장처럼 추악한 모습을 사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타락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가장 어려운 말은 예를 할 때와 아니오를 말 할 때 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진정한 사랑의 터를 만드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을 통해서 인간의 영적 근거는 무너지고 썩어진다. 권력과 물질의 힘을 빌어 인간들은 명예를 사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인가? 내가 소속 된 기장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교권을 통하여 교단 공동체와 한신의 학문의 장이 더럽고 추한 전장터가 되어 있다. 모두가 거짓되고 그들의 타락한 교권을 보고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눈치를 살피고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그 교권과 하찮은 명예욕을 떨쳐내지 못하고 모든 악한 수단들을 다 동원 하고 있다. 교단의 사령탑과 부서의 장들이 공금을 마음대로 쓰고도 모르쇠를 하고 자기 정당화, 합리화 하고 있다. 진실과 정직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억울한 자의 인권을 변호 하고 불의한 역사를 바로 세우며, 분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이루어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증거 하려면 권력과(교권), 물질, 허무한 명예의 탐욕과 소유의 유혹으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101회 총회에서 방향이 확정 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9-08
  • 9월 총회와 한국교회-홍 성 표 목사
    무더운 찜통더위가 어느 해 보다 지루하게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한 순간에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과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간다. 홍만표와 진경준 그리고 우병우의 비리와 부럽 사실들은 국민과 서민 대중 그리고 하루벌이에 온 몸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민중들에게는 분노와 울분을 넘어 서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게 하는 좌절과 절망을 절감하기에 넘친다. 성완종의 의문의 자살과 이인원 롯데 그룹 2인자의 사회와 기업들 고위층들의 비밀 은폐와 총수 살리기 등의 자살은 이 사회의 많은 비극이 도사려 있다. 특별 감찰관 이석수의 어이없는 사표와 빈집 압수 수색, 우병우의 종합 비리 민정수석을 끝까지 감싸고 지키려는 알 수 없는 의문과 그렇게 하난가 되어 정권 유지를 위한 갖은 야합을 해 오던 조선일보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 죽이기와 조선일보와 청와대의 싸움, 권력과 언론의 야합과, 권력과 언론의 죽이기 등을 보며 한국 사회의 현 주소를 본다. 조선해운 특히 한진해운을 둘러 싼 해고의 열풍이 예산 된다. 이 사회의 비리와 갈등,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법은 날이 갈수록 깊은 늪 속에 빠져 간다. 부자와 빈자의 골 깊은 양극화, 금 수저와 흙수저의 평행선 남북의 분단과 동서의 분열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분열 현상 등 우리의 모순은 산 같고 바다 같다. 이러한 사회 현실 앞에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만 되는가? 교회는 이러한 모순과 부정의 앞에서 정의와 평화 사랑과 희망을 선포할 수 있는가? 교회 안의 비리와 성적 문란과 교회 안의 분열과 가정의 해체가 증가 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래도 쉬지 않고 복음을 외쳐야 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진수와 진면목이 있어야 하고 복음의 능력이 발휘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 안에 복음에 대한 능력은 있으며, 어떤 복음을 외쳐야 하는가? 오곡이 무르익어 농부들의 땀과 하늘이 주는 자연의 은총으로 먹을거리는 넘쳐 난다. 자연도 사람들의 노력도 위대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위대하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교회 현실은 기본적 삶의 가치와 윤리와 도덕의 기초마저 허물어 지고 있다.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과 회개는 고사하고 거짓과 변명과 합리화로 일관 하고 있다. 총회의 공금을 횡령 하고도 그것에 대한 뼈저린 참회는 고사하고 교권의 힘과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으며, 교권의 구조악을 청산하는 데는 무관심하고 그 교권의 세습을 위하여 갖은 권모술수와 추악한 방법들을 동원 한다. 교단의 총회는 거룩한 성회인가? 덩치가 커지고 물질과 조직이 커진 교단들이 세속 정치판을 그 대로 답습하는 흉내를 내거나 한 술 더 떠서 축적 된 돈을 소비하기 위하여 안달이 난 듯 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출을 위한 후보들의 난립은 가히 춘추전국 시대와 같다. 더민주의 대표를 뽑는 전당 대회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공청회와 선거전 양상이다. 한국 교회의 상실된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우리의 내일을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보면 내일에 대한 예측은 충분하다. 규모에 상관없이 시간과 물질을 허비 하고 그 시간과 에너지를 통한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임원 후보들 간의 인신 공격적 네거티브가 서로의 존재와 본질을 왜곡시킨다. 권력의 속성은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거나 없애는 잔인함이 있다. 교회의 교권도 그와 못지않다. 과거 중세의 가톨릭의 종교 재판소를 통한 교권의 잔혹성과 오늘 날의 교권은 겉모습은 다르지만 잔인하고 추악한 모습들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성과 속의 차이를 무엇으로 가릴 수 있는가? 임원에 입후보를 하고자 하면 우선 막대한 후보 등록금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돈이 없는 목사나 장로는 후보 자체를 단념해야 한다. 거기에 선거 운동비가 막대 한다. 적어도 1억에서 수억원이 들며 큰 교단들은 수십억이 소요 되고도 당선 되지 못한 사례들이 있다. 가끔 교단과 노회들의 송사가 있다. 그 때 나오는 논쟁들이 교회 안에서 아니면 교단 안에서 그 문제를 풀어야지 세상법이나 법정에서 다투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거나 성서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잘잘못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문제를 정의롭고 공평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 혹은 교회법을 잘 적용하느냐의 문제는 그렇지않다라는 결론이다. 지금은 성과 속을 가릴 수 없는 혼돈의 세계에 산다. 신과 종교의 이름으로 우리의 거룩을 회복하기가 매우 어려운 자업자득의 현실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구를 통치 하거나 다스리는 권력이나 벼슬이 아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역사와 교회 공동체 앞에서 정직해야만 한다. 이 시대 한국 현실에서 진정한 복음의 역사가 희망적 창조를 이루려면 한국교회가 먼저 정의가 바로 서는 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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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1
  • 우리가 가야할 길의 어느 인도자-임 영 천 목사
    우연이랄까, 8월의 인물을 살펴보다가 필자의 눈이 갑자기 멈춘 데가 있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극(劇)에 맞서서 슬기롭게,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을 구출해 내는 데 성공한 스웨덴의 외교관, 이른바 ‘스웨덴판 쉰들러’라고도 불리우는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란 인물이었다.독일인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는 ‘쉰들러 리스트’란 이름의 전기소설(傳記小說)과, 동명의 영화(映畵) 때문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스웨덴판 쉰들러’ 라울 발렌베리는 그 쉰들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구출해 낸 영웅적이고도 전설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매우 아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울 발렌베리(1912~1947)는 지금으로부터 1백여년 전인 1912년 8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웨덴 1급의 사업체인 발렌베리 금융그룹의 후손으로 태어나 청년 시절 건축 관련 회사에서 일하다가, 당시 나치 독일 치하의 복잡한 국제 관계 때문에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몸을 담게 되었다. 이후 그는 그곳의 유대인 구출 작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문자 그대로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여권 작성에 필요한 서류 위조행위는 물론, 지휘자 급 독일 고관에게 때로는 무서운 협박과 회유, 매수 등 그의 젊음을 바쳐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데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였다. 아마도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존귀하고, 그 때문에 유사이래 ‘최악’의 인간 학살극이 자행되고 있는 그때, 그곳에서 ‘최선’의 인명구출 방법이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서였던 것 같다.이 상황을 일대위기로 파악한 나치 최대의 살인마(일명 ‘사냥개’) 아이히만이 히틀러에게 그(라울)의 처리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히틀러는 아이히만에게 이렇게 답했다 한다. “그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말라.” 히틀러조차도 이제 갓 30대에 진입한 스웨덴 청년 외교관 발렌베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히틀러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어떤 단안을 내리기를 원치 않았던 때문이었다.어떻든 발렌베리는 당시의 이런 여건을 최대한 이용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을 거의 10만명가량이나 구출해 내었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숫자는 쉰들러가 유대인을 구출해 낸 숫자(최대 1,200여명)에 비해 상호 비교가 안 되는 숫자이며, 또 당시 ‘영국판 쉰들러’라고 불리어진 니콜라스 윈턴(1909~2015)이 체코 내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구출해 낸 숫자 수백명(669명?)에 비해서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숫자였던 것이다.그러나 이런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1945년 1월 부다페스트 외곽의 소련군 사령부에서 그를 만나자고 하여 그가 응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은 그를 소련으로 압송했다. 이때쯤 해서 그에게는 독일의 스파이 혐의가 씌워져 있었다. 그의 약점을 이런 식으로 잡아놓고 소련 정부는 그에게 무례하게도 모국(某國)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를테면 그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제 정보원으로 활동해 주기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는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그럼에도 소련 정부는 끝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심문은 지속되었고 그의 건강은 30대의 젊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망가져 갔다. 후에 그들은 그를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도 계속된 심문과 고문 때문에 실제로는 젊었던 그였지만 이제 그는 완전히 늙은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스웨덴 쪽에서 혐의를 보이자 수용소 측은 그가 건강하게 잘 있다고 둘러대었다.소련 정부는 발렌베리를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를 그대로 방면할 수도 없었다. 이판사판의 처지로 몰린 소련 정부는 결국 1947년 7월 그를 처치해버리고 말았다. 약을 타러 간다고 그를 딴 곳으로 유인해 내어서는 결국 치명적인 약물을 투여해 그의 목숨을 끊어놓고 만 것이다. 꽃다운 나이, 서른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라울 발렌베리는 오스카 쉰들러처럼, 또는 니콜라스 윈턴처럼 인도주의적인 ‘선행’으로 그의 젊음을 불태우다가, 그의 생애 말년에는 우리나라 윤동주 시인처럼, 또는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문사처럼 타국 관리의 ‘악행’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린 불행한 운명의 소유자였지만, 그러나 그가 지금껏 발휘해온 강렬한 빛은 온 누리에 퍼져 우리의 갈 길을 밝게 인도해주고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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