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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선과 문화전쟁-심 만 섭 목사
    미국이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해 분주하다. 미국 대선은 2016년 11월 8일이며, 지난 2~6월 사이에는 이미 각 당(민주당, 공화당)의 후보 경선을 했고, 6월 전당대회를 통해, 각 당의 후보를 결정했고, 현재는 민주당의 힐러리 후보와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의 경쟁이다. 그러나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는 ‘음담패설’등 과거 성적인 문제로, 계속 힐러리 후보에게 밀리는 양상이다. 힐러리는 클린턴 대통령의 영부인과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낼 정도로 주류 정치계의 일원이다. 또 여성으로는 미국 최초로 대통령 후보가 된 사람이다. 그녀는 ‘함께 가면 더 강하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고, ‘서민의 대변자’로 나서고 있으나, 월스트리트에서 고액의 강연료를 받아, 정경유착의 의혹을 받았고, 2009년부터 2013년 사이 국무장관으로 재직 시에는 개인 이메일로 공무를 처리하여, 구설수에 올랐던 일도 있다. 힐러리는 복지 쪽에 치중하여, 역대 민주당 정강과 공약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으로, 미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 내 불법 체류자 추방, 무슬림의 미국 이민 및 입국 중지 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과거의 성추문, 성추행, 음담패설 등의 문제는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그래서인가 지지율에서도 힐러리 후보에 비해 상당히 뒤처진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 가면, 힐러리의 승율이 90%가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은 내년 1월 20일 취임하게 된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언제나 세계의 이목거리이다. 그만큼 미국의 역할,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는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 대통령 선거의 향배가 우리에게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실망스러운 것은, 두 후보 간 TV 토론을 보면, 완전히 진흙탕 싸움과 다르지 않다. 정책과 정견은 사라지고, 서로에게 흙탕물 튀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한편으로, 미국의 대선을 두고, <문화전쟁>이라고 한다.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는 기독교 신앙, 이성주의, 개척(자립)정신,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아메리칸 스피릿”을 대변하고 있고, 힐러리는 반기독교적 종교관, 이성주의, 사회(규제법)주의, 친 이슬람, 한계 없는 성적 탐닉 문화가 어우러진, “유럽피언 드림”을 대변하고 있는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요즘 한국에서도 큰 화두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는 민주당이 훨씬 적극적이다. 민주당 출신의 현 오바마 대통령은 1996년부터 동성결혼을 지지했으며, 대통령 당선 이후에, 군대내 동성애자 복무 합법화, 군대내 항문성교 금지법 폐지, 동성결혼 법제화 추진 등을 밀어 붙였고, 작년 하반기부터는 성전환자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작년 6월에는 공무원들에게 “동성애 등을 반대하는 기독교는 미국 정부의 적이다”는 대통령 서한을 이메일로 보내기도 하였다. 힐러리 후보는 과거, “낙태에 반대하는 종교적 편견(가르침)은 변해야 한다”거나, “집단 지성에 반하는 기독교는 변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여성단체 모임에서 한 바 있다. 그러나 공화당의 분위기는 다르다. 앞으로 힐러리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친동성애, 급진페미니즘, 이주민정책 등의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한국에서는 현재 ‘동성애’문제가 우리 사회의 건강한 생각과 한국교회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 틀림없다. 만약에 동성애가 정상이라는 인식이 심어지면, 한국교회에는 성경의 권위, 교회의 권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명약관화하다. 과거, 유럽의 기독교계는 1970년대의 성 혁명과 잘못된 인권 개념의 확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유럽의 교회는 쇠퇴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분명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전쟁의 불꽃이 우리나라에 자칫 영향을 줄 것을 생각하면, 그저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한국 교계 지도자들은 유럽과 미국 교회의 운명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보수/진보를 떠나서, 한 목소리로, 교회를 위한 문화 전쟁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0-20
  • 특민의식 인사들이 들여다볼 창-임 영 천 목사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을 동시에 지닌 이들을 나는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마도 선민의식보다는 거기에 특권의식의 뜻이 더 보태어진 ‘특민의식’이란 말이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훨씬 더 실감나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서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선민의식’이란 “한 사회에서 남달리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잘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이라고 풀이된다. 그리고 엣센스국어사전에 따르면 ‘특권‘이란 “특정인 또는 특정의 신분이나 계급에 속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우월한 지위나 권리”라 하였고, 그에 따른 의식을 ’특권의식‘이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가 좀 더 요약해 표현해 본다면 ’특권의식‘이란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진 권리로 인해 지닌 우월감”이라고 간략하게 표현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 사회에서 남달리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잘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이든,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진 권리로 인해 지닌 우월감”이든, 특히 이 양자(兩者)를 함께 지니게 된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라면 우리가 일상적이거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상대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존재들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네들의 선민의식이 너무 높고, 또 특권의식이 너무도 강고(强固)한 언필칭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겠기 때문이다. 앞서 참고했던 국어사전들에 의하면 선민의식의 소유자들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례로 들고 있고, 또 특권의식의 소유자들로서는 중세의 세습 귀족이나 승려들…이 예(例)로 내세워져 있다. 여기서 중세의 승려들이란 종교개혁을 전후로 한 시기의 유럽의 사제들, 곧 가톨릭의 신부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주교, 대주교, 추기경… 들의 경우라면 그들의 특권의식이 어떠했겠는가는 더 이상 상술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민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들 중에서도 특히 종교계(유대교) 지도자들의 경우 그 정도가 우심했다는 사실도 상식적인 이야기의 범위에 속한다. 특히 대제사장의 경우 가톨릭의 수장보다 못지않은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을 동시에 지녔던, 표현컨대 명실상부한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점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 실례로 신약성서 시대, 곧 예수 시대의 대제사장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 등이 그 점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재건된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활동한 수장(의장)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들은 제사권은 물론, 입법/행정/사법의 3권까지 거머쥔 채 종교적인 선민의식과 정치적인 특권의식을 아울러 지녔던 강고한 특민의식의 대표적인 존재들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1830)은 프랑스 대혁명 이래 7월 혁명 전야의 프랑스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적(赤)은 나폴레옹 시대의 군복(軍服)을, 흑(黑)은 왕정복고 시대의 승복(僧服)을 상징하는 색깔로서, 당시의 평민 청년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이 두 가지 노선 외에는 따로 없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 줄리앙 소렐은, 성직자들이 종교계는 물론 정치판도 좌지우지하게 된 복고왕정의 시대엔 자신도 신부(사제)가 되는 게 출세의 지름길이란 판단 하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야심만만한 청년이다. 당시 프랑스의 종교와 정치 양면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었던 가톨릭 집단은 제수이트파(예수회)였는데, 그들은 말하자면, 예수 시대에 제사권과 속권(정치권력) 양쪽을 거머쥐었던 산헤드린의 의장 안나스-가야바의 위치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즉 당시 프랑스의 제수이트파 신부들은 종교 면의 선민의식과 정치 편의 특권의식을 함께 지녔던 실로 강고한 특민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는 것이다.그러나 ‘바벨탑의 붕괴’ 사례가 확실하게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그런 특민의식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심판을 내리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또 새로운 하나님나라 건설의 숙원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독일적(적극적) 그리스도교’의 사실상의 수장으로서 종교적 선민의식과 정치적 특권의식을 동시에 지녔던 소위 특민의식의 소유자 히틀러가 종말에 어떻게 몰락했던가를 역사는 그 실상을 잘 보여주었다. 거슬러 올라가, 종교개혁기에 그 강건하던 옛 가톨릭 특민의식의 아성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던가를 우리는 잘 보아 왔다. 또 더 거슬러 올라가, 예수 시대에 산헤드린을 배경으로 교권과 속권을 함께 주무르며 예수 처형에도 앞장섰던 이스라엘 대제사장들의 특민의식이 또 어떻게 붕괴되고 말았던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학생 줄리앙 소렐은 선배들의 잘못된 특민의식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려는 자신의 야심을 끝내 못 버리고 그 높은 사다리의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지만, 그 욕망 자체가 주님의 뜻에는 위배된 것이었기에 결국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0-12
  • 서울대 인권가이드 라인, 차별금지법과 흡사-유 만 석 목사
    근자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추진 중인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이 논란을 빚고 있다.최근 서울대 총학생회가 만든 <서울대학교 인권 가이드라인>에 보면, 제2조 “평등권”에서 열거하는, 차별금지 조항은 27가지인데, 그 중에 기존의 “차별금지법” 조항에 담고 있어 독소조항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가족 형태’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등이 포함되어 있다.이 중에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 ‘가족 형태’는 동성애 문제를 담고 있고,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은 이념과 관련이 되며, ‘전과’(前過)는 사회적 혼란의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한 마디로 “차별금지법”(안)의 모방에 다름 아니다.그런가 하면, 제20조 “인권침해의 예방 및 구제”에 보면, 구성원의 교육, 징계심의를 규정하고 있어, 이 가이드라인에서 규정하는 것을 위반했다고 볼 때에는, 실제적으로 이해 당사자에 대한 압력과 징계를 담고 있다.또 제19조 “인권교육”에서는 ‘구성원을 대상으로 상시적인 인권교육을 실시하고, 구성원은 이에 성실히 응한다’는 것으로, 상징적인 수준을 훨씬 능가하여 강제성마저 띠고 있다.이 가이드라인은 서울대 구성원 간으로 제한하고 있으나, 서울대학교라고 하는 특성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볼 때, 실제적인 “차별금지법” 제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하여 서울대 구성원들과 동문들, 그리고 시민들의 우려가 심대하다. 지난 21일 서울대에서 열린 <2016 서울대학교 베리타스 포럼>에서는 “동성애와 한국 사회”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는데, 서울대가 동성애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과, 젊은 세대가 동성애 운동의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이날 포럼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차별금지법”이나 “인권 가이드라인”과 같은 문제들은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운동가들의 플랜에 의한, 과정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서울대 총학생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가이드라인이 통과될 경우, “차별금지법”의 촉진제가 될 것이며, 우리 사회에 엄청난 혼란이 예고되어, 서울대 동문들과 시민들에 의해 저지되어야 한다.지금, 소위, “차별금지법”을 인정하는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인권 역차별 사례는 차별금지법이 얼마나 괴악한 지를 실증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나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동성애적 교육은, 참 인간의 품성과 품위를 포기해야 할 정도의, 강요가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우리나라가 왜 그런 전철(前轍)을 밟아야 하는가?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생각은 결국은 국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다. 서울대 인권가이드라인을 추진하는 서울대 총학생회나 이를 부추기는 모든 사람들은 ‘동성애 천국’의 환상과 ‘동성애 지옥’의 꿈속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9-29
  • 기장총회의 미래와 한국교회-홍 성 표 목사
    장공 김재준 박사는 그가 창간한 ‘제3일’의 창간호 제자직이란 제하의 글에서 디트리히 본회퍼의 값싼 은혜를 언급한다. 값싼 은혜란 마치 거리바닥의 경매상에서 팔려 나가는 고물처럼, 성례전, 사죄, 위로 등등이 교회에서 헐값으로 팔려 나가는 은혜를 말 하며, 동시에 값싼 은혜란 교리화, 체계화, 원칙화의 은혜이고, 값싼 은혜란, 회개 없는 사죄, 교회훈련 없는 세례, 신앙고백 없는 성만찬, 개인적 고죄 없는 사죄선언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말한다. 본회퍼의 제자직이란 이러한 값싼 은혜를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사람,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값비싼 은혜를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 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제101회 총회가 경기도 수원에 있는 라비돌리조트 신택스 컨벤션센터에서 9월 27일(화)-9월 30일까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조금 애매한 주제로 열린다. 우선 주제 설정에 있어서 내 교회가 누구의 교회란 말인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이러한 모호한 주제는 꼭 더민주의 사드에 대한 당론의 입장과도 유사하다. 개인이나 집단, 공동체나 국가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이 분명하고 투명하게 조직 구성원과 공동체 내지는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어찌 되었든 “내 교회”는 (마태 16:18)의 본문으로 보아 예수님의 교회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머리 되시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몸인 까닭에 그렇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가 인간의 사유화, 상품화 된 것 같은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교회의 세습과 교권의 세습을 위하여 교회를 개인의 대물림과 교권을 유지하기 위한 교권주의자들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를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이번 기장 총회에서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 중에 첫째는 한신총장 선거의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선거의 원천 무효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지금 선거 과정 중에 빚어진 결과는 이사장과 이사회에 대한 폭력적 선거 과정에서 정당한 학생들의 저항을 “특수감금”으로 몰아붙여서 23명의 학생들과 1명의 교수가 검찰에 송치 되어 기소 여부를 기다리고 있다. 공권력(경찰을) 신성한 교정에 불러들이고 학생들을 이사장과 이사회 학교 당국이 특수감금으로 고발하여 범죄자를 만들고 학교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이러한 총장 사태의 문제를 원초적으로 제공한 사람은 채 전 총장이다. 이러한 한신의 사태는 한신대 70여년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한신을 있게 한 기장의 명예가 추락한 상황이다. 다음 문제는, 총무선거이다. 총무 후보가 6명이 나왔다. 어느 때 보다 경쟁이 치열하다. 물러나는 총무가 8년 한 일이 너무도 기가 막힌 상황이라 기장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사명과 소명으로 입후보 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한 교단의 사령탑은 밥벌이나 얼굴내기, 하찮은 명예욕으로 출마해서는 안 된다. 정말 교단과 교회 공동체를 겸손히 섬기고 불의한 역사를 바로 세워가며, 분단 된 민족의 평화통일을 열어가는 예언자요, 리더쉽을 가진 목자의 심정이어야 한다. 불의와 악에 대해서는 단호히 아니오 라고 하고 시시비비를 정의와 공평하게 가리며 정직과 진실을 근거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썩은 교권에 타협하거나 그들에게 휘둘리는 자가 사령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권의 고리를 단호하게 배제하고 얽힌 고리를 잘라내야 한다. 강자에 대해서는 아부와 아첨을 멀리 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부보의 심정을 가지고 섬기고 돌보는 자라야 한다. 세속의 정치인처럼, 아니 그보다 더 타락한 모습으로 신과 예수의 이름을 앞세우고 자기출세 지향적인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신과 예수, 종교를 상품화 하는 정치꾼은 총무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상상을 초월한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은 물론이고, 교단과 교권의 타락상은 하늘에 다다른다.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 된 상황에서 미중일의 패권의 다툼이 둘러 싼 한반도의 미래가 불확실한 가운데에서도 교회는 자기 탐욕적인 교권의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 기독교장로회는 7-80 년대에 개발 독재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통하여 민중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키려고 역사의 한 복판에 몸을 던졌다. 한국 민주화의 과정의 중심의 한 축이 된 것은 자타가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저항과 투쟁의 향수에 젖어서 교만과 오만에 안주할 처지가 못 된다.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총장선거는 이 번 총회에서 원천 무효화가 선언 되어야 하고 총무는 기장을 믿음의 “근원으로( AD FONTES)” 회복시키는 진정한 개혁적 혁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죽어가는 신음 하는 교회와 분단된 민족의 생명과 역사를 살리는 교회여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9-22
  • 에바다 희망을 열라-홍 성 표 목사
    말세론은 세상의 끝을 말하고 종말론(eschatology)은 다가오는 미래의 희망을 말한다. 지금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카이로스의 시기이다. 역사는 순환도 아니고 반복도 아니며 항상 새로운 역사이다. 온고지신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 뿐 아니라 본래의 나무에 새로운 가지를 접목 시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나무에 우리들은 가지일 뿐이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영양을 섭취하고 열매를 맺게 된다. 한국교회의 지금의 현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를 상실 한 듯 같고 그 나무의 가지도 아니어서 진리와 생명의 자양분을 먹을 수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나무가 많은 과실을 맺으려면 위로부터 받는 햇빛을 잘 받아야 하고 땅으로부터 영양을 충분히 빨아들이며 가시덤불이나 여러 가지 장애물들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부터 해방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첫째, 권력으로부터 자유이다. 권력은 인간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특히 근대로부터 현대의 막강한 국가 권력은 인간의 자율권을 강제로 통제하고 사상과 천부적 권리마저 제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힘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권력의 울타리와 손아귀에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선포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을 밝혀내고 선은 권장 하여 시대적인 지표가 되고 본이 되는 사명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에 행동과 실천을 하는 사표가 되어야 한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에 타협을 하거나 아부 아첨, 굴종을 하는 자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도 될 수 없다. 둘째,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물질을 축적하거나 더욱이 부정한 방법으로 물질의 소유와 탐욕을 부린다면 이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힘 있는 자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아부와 아첨을 하며, 힘없는 자는 짓밟고 멸시와 천대를 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본질도 아니며 예수의 제자는 더욱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과 하나님을 겸이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속의 맘몬주의나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할 만한 자격도 없고 그럴만한 도덕적, 윤리적 가치도 없다. 그것은 교회 자신이 맘몬과 황금의 가치에 매몰 되어 살기에 그렇다. 교회는 자본주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사회적 계급과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사회를 분열 시키는데 중심에 서 있다. 이것은 교회가 사랑과 회해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incarnation)의 삶을 왜곡 시키는 반 그리스도인적 행태를 조장하는 것이다. 교단의 임원 선거에 돈을 뿌리는 경쟁을 하고, 물질적 가치를 유도 하는 것은 죄악이다. 모든 교회 행사에 물질이 중심에 있다. 모든 관계에 황금이 터전이 된다. 이것은 역사를 병들게 하고 망하는 지름길이다. 물질은 소유의 가치가 아니라 나눔이고 더불어 사는 생명의 자원이 되어야 한다. 물질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 된 교회이고 사이비 이단이다. 결코 성서가 말하는 교회는 아니다. 세째, 명예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 총무나 어떤 단체의 임원이 되고자 갖은 추악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 한다. 카톨릭은 교황이 되는 것이 최고의 영적 계급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개신교(Protestant), 특히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는 새끼 교황의 흉내를 내는 명예를 버려야 한다. 자연스럽게 조직이나 공동체의 임원이 되는 섬김과 봉사의 자리가 되어야지 그것을 무슨 목회나 그리스도인의 성공의 벼슬인 것처럼 아귀다툼을 하고 그 자리에 가면 세속의 수장처럼 추악한 모습을 사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타락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가장 어려운 말은 예를 할 때와 아니오를 말 할 때 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진정한 사랑의 터를 만드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을 통해서 인간의 영적 근거는 무너지고 썩어진다. 권력과 물질의 힘을 빌어 인간들은 명예를 사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인가? 내가 소속 된 기장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교권을 통하여 교단 공동체와 한신의 학문의 장이 더럽고 추한 전장터가 되어 있다. 모두가 거짓되고 그들의 타락한 교권을 보고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눈치를 살피고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그 교권과 하찮은 명예욕을 떨쳐내지 못하고 모든 악한 수단들을 다 동원 하고 있다. 교단의 사령탑과 부서의 장들이 공금을 마음대로 쓰고도 모르쇠를 하고 자기 정당화, 합리화 하고 있다. 진실과 정직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억울한 자의 인권을 변호 하고 불의한 역사를 바로 세우며, 분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이루어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증거 하려면 권력과(교권), 물질, 허무한 명예의 탐욕과 소유의 유혹으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101회 총회에서 방향이 확정 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9-08
  • 9월 총회와 한국교회-홍 성 표 목사
    무더운 찜통더위가 어느 해 보다 지루하게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한 순간에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과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간다. 홍만표와 진경준 그리고 우병우의 비리와 부럽 사실들은 국민과 서민 대중 그리고 하루벌이에 온 몸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민중들에게는 분노와 울분을 넘어 서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게 하는 좌절과 절망을 절감하기에 넘친다. 성완종의 의문의 자살과 이인원 롯데 그룹 2인자의 사회와 기업들 고위층들의 비밀 은폐와 총수 살리기 등의 자살은 이 사회의 많은 비극이 도사려 있다. 특별 감찰관 이석수의 어이없는 사표와 빈집 압수 수색, 우병우의 종합 비리 민정수석을 끝까지 감싸고 지키려는 알 수 없는 의문과 그렇게 하난가 되어 정권 유지를 위한 갖은 야합을 해 오던 조선일보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 죽이기와 조선일보와 청와대의 싸움, 권력과 언론의 야합과, 권력과 언론의 죽이기 등을 보며 한국 사회의 현 주소를 본다. 조선해운 특히 한진해운을 둘러 싼 해고의 열풍이 예산 된다. 이 사회의 비리와 갈등,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법은 날이 갈수록 깊은 늪 속에 빠져 간다. 부자와 빈자의 골 깊은 양극화, 금 수저와 흙수저의 평행선 남북의 분단과 동서의 분열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분열 현상 등 우리의 모순은 산 같고 바다 같다. 이러한 사회 현실 앞에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만 되는가? 교회는 이러한 모순과 부정의 앞에서 정의와 평화 사랑과 희망을 선포할 수 있는가? 교회 안의 비리와 성적 문란과 교회 안의 분열과 가정의 해체가 증가 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래도 쉬지 않고 복음을 외쳐야 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진수와 진면목이 있어야 하고 복음의 능력이 발휘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 안에 복음에 대한 능력은 있으며, 어떤 복음을 외쳐야 하는가? 오곡이 무르익어 농부들의 땀과 하늘이 주는 자연의 은총으로 먹을거리는 넘쳐 난다. 자연도 사람들의 노력도 위대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위대하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교회 현실은 기본적 삶의 가치와 윤리와 도덕의 기초마저 허물어 지고 있다.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과 회개는 고사하고 거짓과 변명과 합리화로 일관 하고 있다. 총회의 공금을 횡령 하고도 그것에 대한 뼈저린 참회는 고사하고 교권의 힘과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으며, 교권의 구조악을 청산하는 데는 무관심하고 그 교권의 세습을 위하여 갖은 권모술수와 추악한 방법들을 동원 한다. 교단의 총회는 거룩한 성회인가? 덩치가 커지고 물질과 조직이 커진 교단들이 세속 정치판을 그 대로 답습하는 흉내를 내거나 한 술 더 떠서 축적 된 돈을 소비하기 위하여 안달이 난 듯 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출을 위한 후보들의 난립은 가히 춘추전국 시대와 같다. 더민주의 대표를 뽑는 전당 대회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공청회와 선거전 양상이다. 한국 교회의 상실된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우리의 내일을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보면 내일에 대한 예측은 충분하다. 규모에 상관없이 시간과 물질을 허비 하고 그 시간과 에너지를 통한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임원 후보들 간의 인신 공격적 네거티브가 서로의 존재와 본질을 왜곡시킨다. 권력의 속성은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거나 없애는 잔인함이 있다. 교회의 교권도 그와 못지않다. 과거 중세의 가톨릭의 종교 재판소를 통한 교권의 잔혹성과 오늘 날의 교권은 겉모습은 다르지만 잔인하고 추악한 모습들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성과 속의 차이를 무엇으로 가릴 수 있는가? 임원에 입후보를 하고자 하면 우선 막대한 후보 등록금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돈이 없는 목사나 장로는 후보 자체를 단념해야 한다. 거기에 선거 운동비가 막대 한다. 적어도 1억에서 수억원이 들며 큰 교단들은 수십억이 소요 되고도 당선 되지 못한 사례들이 있다. 가끔 교단과 노회들의 송사가 있다. 그 때 나오는 논쟁들이 교회 안에서 아니면 교단 안에서 그 문제를 풀어야지 세상법이나 법정에서 다투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거나 성서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잘잘못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문제를 정의롭고 공평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 혹은 교회법을 잘 적용하느냐의 문제는 그렇지않다라는 결론이다. 지금은 성과 속을 가릴 수 없는 혼돈의 세계에 산다. 신과 종교의 이름으로 우리의 거룩을 회복하기가 매우 어려운 자업자득의 현실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구를 통치 하거나 다스리는 권력이나 벼슬이 아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역사와 교회 공동체 앞에서 정직해야만 한다. 이 시대 한국 현실에서 진정한 복음의 역사가 희망적 창조를 이루려면 한국교회가 먼저 정의가 바로 서는 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9-01
  • 우리가 가야할 길의 어느 인도자-임 영 천 목사
    우연이랄까, 8월의 인물을 살펴보다가 필자의 눈이 갑자기 멈춘 데가 있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극(劇)에 맞서서 슬기롭게,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을 구출해 내는 데 성공한 스웨덴의 외교관, 이른바 ‘스웨덴판 쉰들러’라고도 불리우는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란 인물이었다.독일인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는 ‘쉰들러 리스트’란 이름의 전기소설(傳記小說)과, 동명의 영화(映畵) 때문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스웨덴판 쉰들러’ 라울 발렌베리는 그 쉰들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구출해 낸 영웅적이고도 전설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매우 아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울 발렌베리(1912~1947)는 지금으로부터 1백여년 전인 1912년 8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웨덴 1급의 사업체인 발렌베리 금융그룹의 후손으로 태어나 청년 시절 건축 관련 회사에서 일하다가, 당시 나치 독일 치하의 복잡한 국제 관계 때문에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몸을 담게 되었다. 이후 그는 그곳의 유대인 구출 작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문자 그대로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여권 작성에 필요한 서류 위조행위는 물론, 지휘자 급 독일 고관에게 때로는 무서운 협박과 회유, 매수 등 그의 젊음을 바쳐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데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였다. 아마도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존귀하고, 그 때문에 유사이래 ‘최악’의 인간 학살극이 자행되고 있는 그때, 그곳에서 ‘최선’의 인명구출 방법이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서였던 것 같다.이 상황을 일대위기로 파악한 나치 최대의 살인마(일명 ‘사냥개’) 아이히만이 히틀러에게 그(라울)의 처리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히틀러는 아이히만에게 이렇게 답했다 한다. “그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말라.” 히틀러조차도 이제 갓 30대에 진입한 스웨덴 청년 외교관 발렌베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히틀러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어떤 단안을 내리기를 원치 않았던 때문이었다.어떻든 발렌베리는 당시의 이런 여건을 최대한 이용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을 거의 10만명가량이나 구출해 내었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숫자는 쉰들러가 유대인을 구출해 낸 숫자(최대 1,200여명)에 비해 상호 비교가 안 되는 숫자이며, 또 당시 ‘영국판 쉰들러’라고 불리어진 니콜라스 윈턴(1909~2015)이 체코 내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구출해 낸 숫자 수백명(669명?)에 비해서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숫자였던 것이다.그러나 이런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1945년 1월 부다페스트 외곽의 소련군 사령부에서 그를 만나자고 하여 그가 응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은 그를 소련으로 압송했다. 이때쯤 해서 그에게는 독일의 스파이 혐의가 씌워져 있었다. 그의 약점을 이런 식으로 잡아놓고 소련 정부는 그에게 무례하게도 모국(某國)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를테면 그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제 정보원으로 활동해 주기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는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그럼에도 소련 정부는 끝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심문은 지속되었고 그의 건강은 30대의 젊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망가져 갔다. 후에 그들은 그를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도 계속된 심문과 고문 때문에 실제로는 젊었던 그였지만 이제 그는 완전히 늙은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스웨덴 쪽에서 혐의를 보이자 수용소 측은 그가 건강하게 잘 있다고 둘러대었다.소련 정부는 발렌베리를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를 그대로 방면할 수도 없었다. 이판사판의 처지로 몰린 소련 정부는 결국 1947년 7월 그를 처치해버리고 말았다. 약을 타러 간다고 그를 딴 곳으로 유인해 내어서는 결국 치명적인 약물을 투여해 그의 목숨을 끊어놓고 만 것이다. 꽃다운 나이, 서른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라울 발렌베리는 오스카 쉰들러처럼, 또는 니콜라스 윈턴처럼 인도주의적인 ‘선행’으로 그의 젊음을 불태우다가, 그의 생애 말년에는 우리나라 윤동주 시인처럼, 또는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문사처럼 타국 관리의 ‘악행’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린 불행한 운명의 소유자였지만, 그러나 그가 지금껏 발휘해온 강렬한 빛은 온 누리에 퍼져 우리의 갈 길을 밝게 인도해주고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8-18
  • 뜨거운 피 ‘8·15’ 식어버린 민족혼과 얼-홍 성 표 목사
    독립운동은 제국주위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 구성원들의 민족적 운동을 말한다. 구국운동은 반식민지 상태를 극복하려는 구국운동이지만, 독립운동이란 식민지의 나락에서 일종의 식민지로부터의 진정한 민족과 국가적, 민중적 해방 운동인 것이다.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를 억압당하고 거절당한 상태일 것이다. 그것은 첫째, 신체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공간과 시간의 제한적 삶이고, 두 번째로 인간의 양심과 얼과 혼이 갇힌 상태이며, 이간의 가치와 의미의 추구가 상실 되도록 되어진 여러 가지 환경 속에 사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1905 년 강제 을사늑약을 통하여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여기에 의분을 떨치지 못한 선조들이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결행하였다. 5년 후인 1910년에는 마침내 이 강산은 구한 말 강대국들의 야수들에 갇혀 있더니만 일제의 침략 야욕에 국토와 주권을 빼앗기고 나라를 잃고 민족은 새로운 독립을 위해 싸워야만 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자유와 권리, 존엄성과 자존감이 파괴 되고 침해당하는 모든 갇힌 삶은 지옥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도 교회는 소위 복음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백만이 구령 운동을 시작하였다. 현실에서의 절망과 희망 없음을 복음을 통한 내세, 차안이 아닌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며 이 난국과 지옥의 문을 열고자 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말세신학”은 세상의 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목말라 하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는 것이었는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권리와 자유, 평화와 정의가 바로 서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성은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진정한 복음은 일제의 식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잃어버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며 상실된 민족혼과 얼을 되찾는 길이 곧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회복이란 말이다. “얼 빠졌다. 넋(혼) 이 나갔다” 얼이 빠지고 혼이 나간 자는 살아 있어도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이며 악의 세력에 아부 아첨하며, 민족과 동족을 팔아 호의호식 하는 매국노들은 인간의 탈은 썼으나 사람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기미년 3.1운동과 숱한 애국지사들과 민중들이 피 흘리며 투쟁해 온 광복 71주년을 맞이하며 다시 미국에 종속된 식민지배 아래 살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광복의 시간은 동시에 분단의 시간이고 새로운 종속의 시작의 시간이었음을 똑똑히 이해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오늘의 현실을 분명히 이해하였다면 우리는 이것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하고, 이러한 종속과 식민 지배에서 해방운동을 해야만 한다. 광복은 분단 역사의 시작이다. 일제하에서 민족의 앞날은 전쟁을 잉태하고 지금까지의 두 국가를 낳았다. 일제의 잔혹한 역사와 그들에게 민족을 팔고 살아 온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고 분단 속에서 그나마 남한의 반쪽 국가에서의 새로운 식민지적 삶을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아직도 독립 되지 못한 해방 전선에 서 있다. 우리 스스로의 군에 대한 작전권이 없고, 주체적이며 자주적인 결정권이 없으며, 우리 민족의 문제를 우리가 풀 수 없도록 옥죄는 내외의 세력에 짓눌려 있다. 일제 치하에서의 신사참배의 굴욕적인 배교 행위뿐 아니라 미군정의 구호물자에 예수의 혼과 얼을 다 빼앗기고 사는 한국 교회의 현실은 역사에서의 퇴출 위기에 서 있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우리 선조들과 이 땅을 몸으로 지켜 온 민중들의 피는 뜨겁고 용기 백배였다. 그러한 민족 해방의 힘은 미군 정하에서, 이승만의 독재와 독점, 독선에 대한 자유와 저항의 붉은 피를 흘렸으며, 5.16 군사 쿠테타의 박정희의 개발 독재와 일제와의 굴욕적 외교의 매국적 행위에 온 몸을 던졌으며. 전두환의 12.12에 대한 부당성에 대하여 광주 민중항쟁의 5.18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식민과 종속을 살고 있으며 구한말 보다 더 큰 민족적 위기를 살고 있다. 미·중의 새로운 패권 다툼 속에 끼어 진정한 평화 통일이 요원하고 긴장과 대립 속에서 강대국들의 놀음에 새로운 희생양이 될 처지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얼이 빠져 있고 혼과 넋이 나가 있다. 사드 문제와 중국의 무역 보복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주, 민주 평화 통일을 이루어 진정한 광복을 이루어야할 절대 절명의 시간의 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국의 차원이 아니라 해방의 운동을 전개 시키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미·중의 패권 속에 일본의 군국주의가 다시 부활하게 하고 있다. 동북아의 정세는 세계 패권 다툼과 함께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교회가 먼저 깨어나야 한다. 얼빠지고 혼이 없는 기독교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얼과 혼을 회복하고 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을 시작하며 기도해야 한다. 단순히 정치인들과 도덕과 윤리도 없는 검찰이나 법 기관, 그리고 먹물 같은 지식인에게만 우리 민족의 앞날을 맡겨서는 아니 된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온 몸으로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8-12
  • 연합과 일치에 대한 단상-강 경 신 목사
    지난 7월 10일 ‘제8회 장로교의 날’ 행사가 한장총 23개 회원교단의 교회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분열에 대한 회개를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연합과 일치를 한결 같이 기원하였다. 한국교회, 그 중에서 특히 장로교회는 그동안 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을 나름대로 꾸준히 노력해 왔다. 특히, 칼뱅 탄생 500주년인 지난 2009년에는 ‘장로교의 날’을 제정하여 매년 칼뱅의 출생일인 7월 10일에 장로교의 날 행사를 개최해왔다. 매년 행사 때마다 장로교의 연합과 일치를 제창하며, 장로교의 분열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특별히 내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이기에, 올해는 여러 면에서 더욱 신경을 써서 준비하였다. 그 결과 나름대로의 시대적인 인식과 교회의 선교방향 등을 잘 제시하였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동안 한국의 장로교는 불과 60여년만에 한 교단에서 3백여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였다. 한때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세계교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한국장로교의 급속한 분열은 세계교회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장로교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교회연합과 일치를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며, 지금까지 이 일을 힘써 왔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규모 연합행사와 연합예배, 강단교류, 신학심포지움과 세미나 등 나름대로 뜻 깊은 일들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일치와 연합을 위한 ‘의미 있는 전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한국장로교는 그 구호에 맞게,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과감하고도 개혁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가? 입만 열면 연합과 일치를 말하고, 그 필요성과 당위성은 이구동성으로 외치지만, 여전히 구호는 구호로만, 행사는 행사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다. 표면적으로 교회지도자들은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앞장선다고 하면서도, 정작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개혁들을 하는 일에는 주저하거나 외면해 버린다. 한국장로교가 정말로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가고자 한다면, 각 교단들이 가지는 신앙과 신학, 교리와 전통에 대한 넓은 이해와 포용이 있어야 한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다’라는 말이 먼저 교회지도자들에 의해 수용되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신앙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고, 신학을 정통과 자유주의로 구분하면서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남을 비판하는 일에 너무 익숙했었다. 특히, 일부 한국교회지도자들이 마치 ‘보수신앙이 대세이다“라는 식의 굳은 신앙관을 갖고 분열에 앞장선 것도 사실이다. 이는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이 갖는 지극히 독선적이고 주관적인 사고이다. 세계의 변화와 역사의 흐름에 민감하기보다도 자기 교회의 부흥에만 천착하는 지극히 좁고 편협한 신앙관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교단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타 교단에 대해 신학적인 편견이나 그릇된 선입견을 고수하는 것은 결코 연합과 일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진보신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경계심과 거부감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서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앞장서는 것은 표리부동하다. 이래서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는 없다. 여전히 한국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독선과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과감하게 깨뜨리고자 하는 변화와 개혁의 의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교회부흥에만 매달려 개교회주의와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지도자들은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 변화와 개혁을 항상 교회부흥과 축복에 귀결한다. 그러다보니 기복신앙이 여전히 교회들마다 활개를 친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가 있을까?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교회의 성장과 부흥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고난의 연대를 할 때 진정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진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 되고, 세상을 향하여 고난의 연대를 할 때에 진정 한국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다. 이번 ‘장로교의 날’에서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국민출애굽하자’고 선언을 하였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출애굽은 광야로 가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광야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한다. 그래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영화 ‘곡성’에서 주인공 경찰의 딸이 악을 쓰면서 아버지에게 소리쳤던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되었다. “중한거? 그것이 뭐가 중한디. 뭐가 중한지도 모름서” 부디 한국교회가 근본적으로 무엇이 중한지를 알며, 본질적으로 무엇을 개혁해야 할지를 깨달아,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가게 되기를 소망한다. -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29
  • 한국 장로교의 일치운동-홍 성 표 목사
    한국 기독교의 원년을 카톨릭의 경우 1774년으로 보고 개신교는 100년 이후인 1884 년으로 친다. 이때의 한국 역사로는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비롯한 홍영식과 박영호 등의 삼일천하의 갑신정변이 있었고, 이들의 개화당은 독립당이라고 한다. 기울어 가는 유교의 나라 조선은 풍전등화 였고, 이러프영러일미의 강대국의 맛있는 한 손의 요리 감으로 민족과 나라의 운명은 슬프고 애절한 운명을 맞고 있었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사 속에 구원사를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보편사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모든 세상(코스모스)의 구원을 위해서 이 역사 한 복판에 성육신 한 사건 역시 그러하다. 개인과 역사 전체의 구원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전 우주의 구원과 구원사를 따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E.H. Carr의 말을 빌린다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아놀드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가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일을 더듬어 찾아 가는 일”(행 17:27)이라는 것이다. 그 1884년에 또 하나의 사건은 임오군란이다. 군인들의 배급 쌀에 돌을 썩어 줌으로써 군인들의 분노가 나라를 흔든 사건이다. 그 다음 해인 1894 년에는 “후천개벽 사상”과 민심은 천심이요. 인내천 사상을 설파 하며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는 최재우 동학사상을 근거로 한 동학농민 전쟁이 일어난다. 전북 고부의 몰락양반인 김제의 전봉준과 김개남 장군을 필두로 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저항 혁명이 불길처럼 요원하게 불타 오른 한민족 역사의 기상이 땅과 하늘에 진동한 잊지 못할 찬란한 민중들의 살아 있는 시대적 깃발을 펄럭인 시기 였다. 타락한 권력과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비리 속에 민중의 자각이 꿈틀거릴 때, 강대국들은 호시탐탐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의 어두운 역사가 깊어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한민족을 살리는 강한 빛으로 비추이기 시작한 때 이기도하다. 1885년에 감리교의 아페젤러와 언더우드가 이 땅에 첫 발을 딛는다. 언더우드는 제물포에 4월 5일에 아펜젤러는 4월 2일에 부산에 닿는다. 물론 장로교의 알렌은 이미 갑신정변을 겪는 1884년에 들어와 부상당한 민영환 등을 치료하여 궁중 선교를 시작한다. 강대국 속의 한 입의 먹이 감의 신세 속에서 역사는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에 오적을 앞세운 강제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상실하고 5년 후에는 강제 한일 합방이라는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실시된다. 나라를 잃어버린 비탄과 통곡의 소리가 하늘과 땅을 흔들고 민중들은 삶의 희망을 상실 한다. 나라는 잃었지만 민족의 혼과 얼은 살아 있었다. “아와 비와의 투쟁”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국내외의 민족 해방 군사들은 물밀 듯이 일어났다. 추위와 배고픔과 굶주림, 멸시와 천대와 자기부인을 통한 민족의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은 만주와 미주와 그리고 시베리아의 동토의 지역에서도 끊임 없이 불타올랐다. 조국을 다시 찾고 진정한 독립을 위한 싸움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아니했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과 친일 족속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만, 우리의 얼과 혼으로 충만한 하늘에 순천하는 대한민국 남녀노소 아들딸들은 모든 것을 바쳐서 독립을 위한 제물이 되는데 추호도 주저함이 없었다. 동학혁명의 정신과 함께 1919 년 3.1 운동의 횃불은 민족의 어둠을 샅샅이 밝힐 생명의 빛이었고 이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민족과 민중의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여기에 종교나 어떤 다름이 나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 하늘 아래에서 일어 난 땅과 하늘의 일치된 움직임이며 새로운 역사의 잉태와 해산의 움직임 이었다. 이 속에 감리교와 장로교가 나누일 수 없고, 장로교의 예장과 기장 등이 나누일 수가 없다. 단지 하나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참여만이 있었다. 그러나 36년과 40년의 민족 독립과 해방사는 민족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영구화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의 일치운동은 하나의 낮 내기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분단과 독재, 자본의 독점과 사상의 독단의 악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해방을 방해 하고 있는 이때에도 교회는 세속의 탐욕에 젖어 있고 권력과 자본에 공생, 혹은 기생하고 있다. 세월호를 통한 생명의 가치를 경시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살림의 역사에 반하고 있다. 청일과 중일 이후의 한민족의 역사는 침탈당하였다. 지금 교회의 일치 운동, 장로교의 일치 운동은 썩은 교권들의 허위의식의 일환일 뿐이다. 한국 교회의 일치 운동은 먼저 하나님과 역사, 사람과 자연 앞에서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정직과 진실로 바로 서야한다. 다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옷깃을 여미고 구원의 역사에 우리를 던져야 한다. 지금의 세계 역사와 문명의 흐름을 통찰 하고 민족의 역사를 직시하여 생명의 역사를 재창조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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