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이 글의 목적은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세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역사적인 분석을 통해 정리하고자 함에 있다. 그 동안 한국 신학계에서는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많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의 접근이 아닌, 역사적 사실과 사료(史料)에 의한 역사신학적 관점에서의 접근을 통해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성령세례에 대해 다룬 문헌 자료들을 새롭게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연구는 복잡한 성령세례론 논쟁의 화합을 이루는 일에 활용될 자료로서 학계에 기여할 목적을 지닌다. 또 이 연구는 성경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참된 경험과 능력을 역사적으로 조사하여 한국교회에 적용시킬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한국 초대교회의 대부흥운동을 다룬 선교사들의 글에서는 성령세례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그러면 당시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이 갈망하고 추구하던 성령세례란 도대체 어떤 은혜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과연 중생 이후의 어떤 제 이차적 단계를 지칭하는 것인가? 그리고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표현은 과연 적절한가? 중생한 신자에게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에게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권면은 과연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올바른 표현인가? 이같은 논제에 대한 답변을 성서의 교훈, 인간 경험, 교회사적 범례 그리고 기독교 타전통(他傳統) 등의 다양한 접근을 통해 얻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글은 그동안 한국 신학계와 교계 속에 나타난 성령세례론의 여러 노선간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특히 개혁파 신학계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분리할지 아니면 동시적으로 보아야 할지 여부에 따라 양 노선간의 갈등이 심화되어왔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적인 분석을 통해 지금까지의 성령세례론을 그 성격상 몇 가지 유형들로 정리한 후, 이 서로 다른 유형들을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성령세례의 양 차원’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은 ‘성령세례‘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확실히 경험될 수 있으며 또한 절실히 요구되는 경험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사실 교회사의 전통 속에는 ‘성령세례’의 경험을 증언하는 이들의 수많은 간증이 있으며, 그런가 하면 방대한 분량의 현존하는 신학 문헌들이 성령세례와 관계된 주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이 연구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동시적인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중생과 구분된 것으로 보는 각 노선이 지닌 강조점들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의 역동적(力動的)인 내용은 현대에도 변함없이 구현되어지는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오순절주의, 은사적 갱신그룹, 웨슬리안 성결운동노선 등에서는 중생과 구분된 경험으로서의 성령세례 혹은 성령충만을 말하는 데 반해서, 개혁파 계통에서는 ‘중생과 동시적이냐 아니냐’의 논제가 오랜 동안 신학적 미해결의 과제가 되어 왔고 또 현재까지도 합일(合一)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특히 개혁파 입장을 고려해서 사용한 것이다. 성령세례론에 있어서 ‘중생과 동시적이냐 아니냐’ 하는 논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 받은 능력이 신자 안에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의 실천적 핵심에 초점을 두고 성령론을 전개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방법론이라고 본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잎만 무성한 성령론 논쟁이 아니라 교회를 성숙시키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주도할 복음적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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